소설리스트

88화 (88/172)

침을 꿀꺽 삼켰다.

……드디어 원하는 걸 드러내셨군.

들키지 않도록 드레스 자락을 살짝만 움켜쥐고 얼굴은 최대한 환히 웃었다.

“아시는 그대로입니다. 폐하.”

솔직히 황후가 너무 잘 대해준 덕분에 조금 마음에 걸리긴 했다.

‘하지만 그녀는 완전히 내 편이 아니야.’

그녀가 나를 잘 대해주는 건, 내가 그녀의 입맛대로 행동해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황후의 생각과 달리 폐태자는…….’

황위에 관심이 없어 보였는걸.

그나저나 이 질문을 한 걸 보니 폐태자 때문에 부른 건가 보다.

난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면 전보다 더 상세히 보고서를 써서 올릴까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슬그머니 빠져나가려고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였다.

황후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럴 것 없다.”

“그러면…….”

“내가 아끼는 아이를 고달프게 할 정도로 못된 황후는 아니란다.”

그녀가 꽤 만족스러운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대신 누군가를 소개해 주고자 한다.”

그리고 잠시.

저벅-

잔디가 밟히는 소리가 들렸다.

화려한 의복. 검은 머리카락에 회적안. 미려한 외모를 가진 내 또래의 소년.

난 그 소년의 얼굴을 보고 눈을 홉 떴다가 이내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했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제국의 황태자 에스테반.

황위의 서열 1위 계승자. 그리고-

‘황후가 껌뻑 죽는다는 그 황태자……!’

다리가 떨리고 있는 게 티 나면 안 되는데!

지금 난 이렇게 긴장하고 있는데 황후는 가볍게 웃고 있었다.

“태자, 내가 아끼는 슬라데이체 공녀입니다. 내가 해줬던 말, 모두 기억하고 있지요?”

“예. 어머님.”

“내가 보기에, 나보단 나이가 비슷한 두 사람이 더 통하는 게 많을 듯싶구나.”

황후가 입매를 끌어 올리며 내게 가볍게 웃어줬다.

“슬라데이체 공녀. 태자는 내 아들이지만, 훌륭한 아이란다. 한번 어울려보는 건 어떻느냐? 물론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거절해도 상관없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황후의 눈은 싸늘했다. 나를 강하게 뜯어보는 듯한 눈빛.

“우리의 만남은 혼사보다는 친목 도모에 목적이 있으니까 말이야.”

……그렇겠죠?

난 울지도 못하고 웃지도 못하는 심정으로 황태자의 에스코트를 따랐다.

* * *

“-그것이 최근 제 관심사입니다.”

“하하. 그러시군요.”

……지루해라.

황태자는 정말 바른 아이였다.

에스코트하면서 열심히 국제정세라든지 이런저런 어려운 경제 이야기들을 했다.

나쁜 사람 같아 보이지는 않지만.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는걸.’

그냥 대충 맞장구쳐주다가 헤어지는 게 좋으려나.

으으. 하지만 그러다가 황후가 정기적으로 만나자고 그러면 어떡해.

그건 또 싫은데.

“카페가 슬라데이체 영애의 의견-”

그리고 황태자가 황후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분명 얘기가 들어갈 테고.

그러다 보면 황후가 나한테도 말을 걸 텐데.

앞뒤가 안 맞다 보면 분명 의심을 사게 될 거란 말이지?

“다음 시리즈는 무엇인가요?”

“네?!”

무, 무슨 이야기 중이었지?

침을 꿀꺽 삼키고 눈을 깜빡이면서 황태자의 질문을 유추해 보려고 노력했다.

시리즈? 무슨-

‘아.’

혹시 우리 카페 이야기인가?

그거라면 다행이다.

난 파아앗- 피어나는 웃음과 함께 입을 열었다.

“혹시 토끼 쫑쫑이라고 아시나요? 제가 진짜 좋아하는 시리즈인데!”

내가 무려 토끼 쫑쫑이 콜라보로 머그컵까지 낸 사람이라구!

뭐, 그렇다고 해도 황태자가 알 거란 생각은 거의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황태자인데.’

그런데…….

‘어라.’

“토끼……. 쫑쫑이 말입니까.”

황태자의 눈이……

‘빛나고 있다.’

“…….”

난 팬심으로 알 수 있다.

‘쫑쫑의 팬이 분명해!’

근데 이상하다.

왜 저렇게 말을 머뭇거리는 걸까. 좋아하면 좋아한다고 말하면 될 것을.

그 이유는 조금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원래 주위에 시녀가 이렇게 많았나.’

호위 기사라면 모를까, 주위에 우리를 보는 시녀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그제야 알 수 있었다.

‘태자는 내 아들이지만, 훌륭한 아이란다. 한번 어울려보는 건 어떻느냐?’

황후가 했던 그 말이 단순히 나에게 한 권유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말은 동시에, 황태자에게 주어진 지시기도 했던 것이다.

‘으음…….’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잠시 황태자를 보고 고민하던 난 허리에 손을 착 올렸다.

그리고 휴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 이런 건 잘 안 해주는데 말이야.

“전하. 혹시 쪼그리기, 담 넘기, 뛰기 잘하시나요?”

“……예?”

“체력은 당연히 좋아야 한답니다.”

황태자가 당황한 얼굴로 날 쳐다봤다.

난 방긋 웃으며 황태자의 손을 꽉 잡았다. 그리고 힘껏 잡아당기며 달렸다.

“저, 전하!”

뒤에서 시녀가 소리 지르는 게 들렸지만, 난 그들이 잘 듣도록 더 크게 소리 질렀다.

“저랑 놀아요, 황태자 전하!”

에라, 모르겠다.

그냥 황후에게 오늘은 조금 몰상식한 영애가 되자.

지금까지 이미지 잘 쌓았으니, 오늘 하루 정도는 괜찮을 거야.

‘황태자가 너무 불쌍한걸.’

지금도 갑자기 이래서 당황했을 텐데 황태자는 내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충분히 뿌리칠 수 있었는데.

마치 자기도 진작 도망치고 싶었던 것처럼 말이다.

* * *

“여기면 아마 안 올 거예요.”

“여긴…….”

황태자가 날 빤히 바라보았다.

그 순수한 시선에 어색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래요. 맞습니다.

“네……. 폐…… 태자님 궁 근처예요.”

하, 하지만 여기라면 정말 안 올 거라서 말이죠.

어색하게 손끝을 톡톡 두드리고 있자 황태자는 이내 푸핫 하고 웃었다.

“슬라데이체 공녀는 참 재밌는 사람이군요.”

“……그런가요.”

“어머니가 붙인 사람들을 눈치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거기서 도망칠 거라고 생각하지는 못했습니다.”

하긴. 거기서 쉽사리 도망칠 사람이 많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리고 보통 그 후 제 형이 있는 곳으로 도망쳐 오진 않지요.”

뜨끔.

그 말에 어깨를 흠칫 떨었다.

가슴이 두근두근 떨렸다.

혹시 황후처럼 황태자도 폐태자를 매우 싫어하려나 싶어서.

하지만 황태자는 부드럽게 눈매를 휘어 접어 웃었다.

“어머니의 시선이 숨 막혔습니다.”

“아.”

“그러니 감사합니다.”

뭔가 신기했다.

가끔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도 황후는 굉장히 계산적이고 철두철미한 사람이다.

‘황태자는 아닌 것 같아.’

언뜻 봐도 그는 욕심이 없어 보였다.

지금도 폐태자에 대해서 반감도 거의 없고.

그런 황태자를 보고 있다가 빙그레 웃었다.

이런 사람. 싫지 않았다.

“토끼 쫑쫑이 좋아해요?”

황태자는 그 말에 이내 환하게 웃었다.

“좋아합니다!”

“저도 엄청 좋아해요!”

“영애는 어떤 에피소드를 제일 좋아합니까?”

“저는-”

* * *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요.”

“아차.”

저녁노을이 지고 있었다.

황태자와 내 앞은 내가 나뭇가지로 이리저리 그려놓은 토끼 쫑쫑이 이달의 상품에 들어갈 표정과 모양들로 가득했다.

우리는 하루 종일 토끼 쫑쫑이 덕질로 이야기 꽃을 피웠다.

‘그러면 토끼 쫑쫑이 작가님은 못 만나신 겁니까?’

‘저도 어떻게든 만나 뵈려고 했는데, 작가님이 그것만큼은 안 되신다고 해서……. 하지만 사인은 받았어요!’

‘아!’

‘……하나 부탁드릴까요?’

‘될까요……?’

덕질 친구 최고……!‘

토끼 쫑쫑이 머그컵이라도 보내주고 싶은데.’

지금까지 토끼 쫑쫑이를 이렇게 좋아해 주는 친구가 없어서 너무 기뻤다!

에휴. 황태자인 게 아쉽다.

“돌아갑시다. 이제 어머니가 손을 쓸 시간이 되었어요.”

황태자가 손을 뻗어 나를 일으켜주었다.

그는 손수건으로 흙이 살짝 묻은 내 손을 닦아주며 말했다.

“어머니에게는 제가 잘 말씀 드릴 테니 걱정 마세요. 영애의 명예에 누가 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음……. 어차피 제가 자초한 일인데요, 뭐. 하하…….

난 어색하게 웃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어차피 전하와는 이번이 마지막 만남이니까요.”

이번 일로 황후는 황태자와 날 만나게 하지 않을 거다.

우리의 만남이 도움되지 않을 거라고 판단할 거니까.

그리고 우리가 만나면 안 되기-

“왜…….”

하지만 황태자는 내 손을 잡았다.

지금까지 시종일관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던 얼굴이, 처음으로 진지해져 있었다.

“이번이 마지막이죠?”

* * *

“왜…… 냐니요.”

당연히 곤란하지…….

귀족들과 우방국, 주변국들이 슬라데이체와 황실의 결합을 강하게 경계할 거다.

물론 황후가 노리는 게 바로 그 점이긴 하겠지만.

‘자기 황태자가 그만큼 공고하다는 의미로 쓰고 싶은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황태자가 생각하는 건 황후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래도 결과는 똑같다.

‘황후는 제위에 도움이 되는 신붓감을 고르려 할 테니.’

설령 황후가 날 마음에 들어 해서 황태자비로 삼으려 해도 문제다.

괜한 정쟁 싸움에 휘말리고 싶지 않으니까!

난 세계 멸망을 막고 안전하고 부유하게 사는 게 꿈이라고.

그렇기에 난 조심스럽게 손을 빼려고 했다.

“아무래도 사업도 있고 하니까 일이 바빠서요!”

“그렇군요…….”

“시간 되면 놀아요! 되면.”

그제야 날 잡고 있던 손에 조심스럽게 힘이 풀렸다.

그 틈을 타 얼른 손을 뺐다.

황태자는 여전히 내 눈을 똑바로 보고 있었다.

‘눈이 그냥 유순하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끝이 고양이처럼 날카롭구나.

어색하게 시선을 피한 난 애써 웃었다. 황태자도 그제야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어쩐지 좀 찔리는 기분이었다.

“그럼 이만 돌아갈게요. 말씀해 주신 대로 늦었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뒤를 돈 난 흘긋 폐태자 궁을 보았다.

* * *

……그냥 보기만 했어야 했는데.

‘신경 쓰여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

여기까지 왔는데 폐태자를 안 보고 가기엔 너무 걱정된다고 해야 하나.

황후의 눈에 띄지 않게 살금살금 궁 안으로 들어온 난 입에 손을 모았다.

“전하- 어디 계세요-”

휘이잉-

“전하- 저 목소리 크게 못 내요- 오늘은 몰래 왔단 말이에요-”

휘이이잉-

대답 없이 썰렁한 바람만 불었다.

뭐지. 오늘은 궁에 없는 건가.

어쩔 수 없지! 그러면 돌아가 볼-

“우악-!”

그 순간 뒤에서 나온 커다란 손이 날 끌어당겼다.

누군가의 품에 폭삭 껴안긴 난 뒤로 발라당 끌어 안겨져 넘어졌다.

없다고 생각했던 폐태자가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검은 저주, 검은 머리카락.

백옥처럼 새하얀 피부 사이에서 시리게 빛나는 보석 같은 푸른 눈동자.

눈빛을 빛내는 폐태자는 한 마리의 맹수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그가 빤히 날 바라봤다.

‘뭐, 뭐지?’

날 바라보는 그 얼굴에 잠깐이지만 무언가 쿵 하고 떨어지기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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