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1화 (61/172)

완전히 굳어 있는 날 보고 대신관이 잠시 주위를 둘러봤다.

“한참을 안 들어와서 다른 사람인 줄 알았더니만.”

“……누구?”

“음?”

“누군 줄…… 아라써?”

대신관은 아무렇지 않게 입을 열었다.

“바이칼로스 영애.”

그 말이 날 지탱하고 있는 끈을 싹둑 잘라 버렸다.

난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아니야.’

대신관은 그럴 사람이 아니야.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이 사람도 결국 리미에를 선택할 거야. 모든 사람이 그렇게 했던 것처럼.

내 속에서 두 마음이 싸웠다.

둘 중 누가 이기든 말든 상관없었다. 이미 공포가 내 모든 걸 집어삼켰으니.

“너…….”

“시러!”

내 몸에 그의 손이 닿으려고 하자 바로 손을 쳐내고 몸을 동그랗게 말아 떨었다.

머릿속에 날 선 목소리가 들렸다.

‘너 같은 건 필요 없어.’

‘왜 따라왔는지 원.’

“주기지 마세요. 잔못해써요. 안 그럴게요.”

“너 왜 그래.”

“언니, 언니 말 잘 들으께요. 주기지 마세요. 제발. 제발.”

뚝뚝 눈물이 흘렀다. 손이 빨갛게 변하고 뜨거워질 정도로 싹싹 빌었다.

‘이 멍청한 평민 계집애가!’

‘주제를 알아라. 쓸모없는 널 참아주는 건 리미에 때문이야.’

‘야, 장난감. 바닥에 딱 붙어 있어. 그게 딱 너다워.’

“저 편민 마자여. 주제 아라여. 바닥에서 기어 다니께요.”

“…….”

‘넌 쓸모없어.’

“신선력 뽀바가. 나 신선력 마나. 때리지 마. 제바.”

‘죽어. 너의 전생처럼.’

싫어. 싫어. 난 살고 싶어. 죽고 싶지 않아.

‘하지만…….’

하지만 정말 난 쓸모없는-

“정신 차려!”

내 어깨를 누군가 잡고 거세게 흔들었다.

그제야 눈을 깜빡이며 정신을 차렸다.

대신관이 걱정이 가득한 표정으로 내 양어깨를 붙잡고 있었다.

숨만 색색 내뱉는 나에게 대신관은 한 자, 한 자 똑바로 내뱉었다.

“널 해칠 사람은 여기 없어. 괜찮다.”

“대신간…….”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린 날 보던 대신관은 눈썹을 찌푸리며 ‘언니라……’ 하고 읊조렸다.

“바이칼로스 공녀를 무서워하는 거라면 그녀는 앞으로 안 올 거다. 거절했으니까.”

그 말에 미친 듯이 뛰던 심장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떨던 손도 잔잔해졌고, 숨 쉬는 것도 조금씩 편해지기 시작했다.

엉망이 되어 주저앉은 내가 괜찮아질 때까지 대신관은 말없이 있어 주었다.

“먀, 먄해, 대신간. 놀라찌?”

“안 놀랐다면 거짓말이지. 그런데…… 이미 바이칼로스 공녀와 아는 사이인가 보군.”

난 크게 움찔거렸다.

대신관은 그런 날 보며 턱을 괴었다.

“하지만 정작 그녀는 너를 아는 것 같지 않았다.”

“…….”

“그리고 언니라는 호칭도.”

“그-”

“넌 바이칼로스 공녀가 너를 두고 자신을 ‘언니’라고 호칭하는 걸 어떻게 알았지?”

난 마주 잡은 손을 꼼지락거렸다.

말하면 안 되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더 이상 나 혼자 감추고 있기에 너무 벅차다는 걸 오늘 일로 알게 되었다.

리미에와 관련된 일이라면 또 폭주할 거고. 이상하리만큼 발작하겠지.

‘믿어…… 줄까?’

난 고개를 떨궜다.

못 믿어도 상관없지. 대신관은 그냥 나를 미쳤다고 생각할 거고, 난 그를 떠나기만 하면 될 거다.

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대신간. 교환밈 걸 수 있어?”

“무슨 말이지?”

“나나가 할 얘기 듣구 혼자 알고 있는 고에 교환밈 걸 수 있냐고.”

대신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난 입을 열었다.

한 번도 남에게 털어놓지 못한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다.

내가 회귀를 한 이야기, 마왕이 부활하는 10년 뒤의 이야기. 그리고…… 리미에에 관한 이야기.

“난 주거써. 그러케.”

“…….”

“리미에는 날 주겨써. 그래소…… 그래소…….”

다시 눈물이 차오를 거 같아서 하늘을 보려는데 내 눈이 무언가로 가려졌다.

따뜻했다.

난 조금 시간이 지나서야 그게 대신관의 손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손바닥으로 내 눈을 가려준 대신관이 말했다.

“더 말 안 해도 돼. 다 믿으니까.”

“……신선력으로 확인해쏘?”

대신관 정도라면 신성력으로 거짓을 판가름할 수도 있다.

난 대신관이 그렇게 한 줄 알았다.

“아니.”

“왜?”

“네가 거짓말할 리가 없으니까.”

대신관은 손을 내렸다.

꾹 참아왔지만 결국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런 내 머리를 대신관이 토닥거리며 말했다.

“고생 많았다, 나나.”

난 눈을 크게 떴다.

대신관이 내 이름을 불러준 건 이번이 처음이었기에.

대신관은 헝클어진 내 머리를 풀어주며 덤덤히 말했다.

“이번엔 바이칼로스에게서 내가 지켜주겠다. 후견자는 그러라고 있는 거니까.”

“…….”

“네가 똑같은 일을 겪지 않게 할 거야.”

그 말엔 단단한 힘이 있었다.

대신관은 값비싼 천이 망가지는 건 신경도 쓰지 않고 옷소매로 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대신 너도 힘을 기르도록 하지.”

반질반질해진 내 얼굴을 보며 대신관이 픽 웃었다.

“리미에에게 허무하게 죽기엔 넌 너무 아깝거든.”

장난스럽지만 날 챙겨 주는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카밀라에게서 느꼈던 버팀목이 대신관에게서도 느껴졌다.

대신관은 내 사람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바이칼로스의 뒷돈도 좀 뜯어 먹을걸. 아쉽군.”

“…….”

조금…… 돈을 많이 좋아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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