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히 굳어 있는 날 보고 대신관이 잠시 주위를 둘러봤다.
“한참을 안 들어와서 다른 사람인 줄 알았더니만.”
“……누구?”
“음?”
“누군 줄…… 아라써?”
대신관은 아무렇지 않게 입을 열었다.
“바이칼로스 영애.”
그 말이 날 지탱하고 있는 끈을 싹둑 잘라 버렸다.
난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아니야.’
대신관은 그럴 사람이 아니야.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이 사람도 결국 리미에를 선택할 거야. 모든 사람이 그렇게 했던 것처럼.
내 속에서 두 마음이 싸웠다.
둘 중 누가 이기든 말든 상관없었다. 이미 공포가 내 모든 걸 집어삼켰으니.
“너…….”
“시러!”
내 몸에 그의 손이 닿으려고 하자 바로 손을 쳐내고 몸을 동그랗게 말아 떨었다.
머릿속에 날 선 목소리가 들렸다.
‘너 같은 건 필요 없어.’
‘왜 따라왔는지 원.’
“주기지 마세요. 잔못해써요. 안 그럴게요.”
“너 왜 그래.”
“언니, 언니 말 잘 들으께요. 주기지 마세요. 제발. 제발.”
뚝뚝 눈물이 흘렀다. 손이 빨갛게 변하고 뜨거워질 정도로 싹싹 빌었다.
‘이 멍청한 평민 계집애가!’
‘주제를 알아라. 쓸모없는 널 참아주는 건 리미에 때문이야.’
‘야, 장난감. 바닥에 딱 붙어 있어. 그게 딱 너다워.’
“저 편민 마자여. 주제 아라여. 바닥에서 기어 다니께요.”
“…….”
‘넌 쓸모없어.’
“신선력 뽀바가. 나 신선력 마나. 때리지 마. 제바.”
‘죽어. 너의 전생처럼.’
싫어. 싫어. 난 살고 싶어. 죽고 싶지 않아.
‘하지만…….’
하지만 정말 난 쓸모없는-
“정신 차려!”
내 어깨를 누군가 잡고 거세게 흔들었다.
그제야 눈을 깜빡이며 정신을 차렸다.
대신관이 걱정이 가득한 표정으로 내 양어깨를 붙잡고 있었다.
숨만 색색 내뱉는 나에게 대신관은 한 자, 한 자 똑바로 내뱉었다.
“널 해칠 사람은 여기 없어. 괜찮다.”
“대신간…….”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린 날 보던 대신관은 눈썹을 찌푸리며 ‘언니라……’ 하고 읊조렸다.
“바이칼로스 공녀를 무서워하는 거라면 그녀는 앞으로 안 올 거다. 거절했으니까.”
그 말에 미친 듯이 뛰던 심장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떨던 손도 잔잔해졌고, 숨 쉬는 것도 조금씩 편해지기 시작했다.
엉망이 되어 주저앉은 내가 괜찮아질 때까지 대신관은 말없이 있어 주었다.
“먀, 먄해, 대신간. 놀라찌?”
“안 놀랐다면 거짓말이지. 그런데…… 이미 바이칼로스 공녀와 아는 사이인가 보군.”
난 크게 움찔거렸다.
대신관은 그런 날 보며 턱을 괴었다.
“하지만 정작 그녀는 너를 아는 것 같지 않았다.”
“…….”
“그리고 언니라는 호칭도.”
“그-”
“넌 바이칼로스 공녀가 너를 두고 자신을 ‘언니’라고 호칭하는 걸 어떻게 알았지?”
난 마주 잡은 손을 꼼지락거렸다.
말하면 안 되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더 이상 나 혼자 감추고 있기에 너무 벅차다는 걸 오늘 일로 알게 되었다.
리미에와 관련된 일이라면 또 폭주할 거고. 이상하리만큼 발작하겠지.
‘믿어…… 줄까?’
난 고개를 떨궜다.
못 믿어도 상관없지. 대신관은 그냥 나를 미쳤다고 생각할 거고, 난 그를 떠나기만 하면 될 거다.
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대신간. 교환밈 걸 수 있어?”
“무슨 말이지?”
“나나가 할 얘기 듣구 혼자 알고 있는 고에 교환밈 걸 수 있냐고.”
대신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난 입을 열었다.
한 번도 남에게 털어놓지 못한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다.
내가 회귀를 한 이야기, 마왕이 부활하는 10년 뒤의 이야기. 그리고…… 리미에에 관한 이야기.
“난 주거써. 그러케.”
“…….”
“리미에는 날 주겨써. 그래소…… 그래소…….”
다시 눈물이 차오를 거 같아서 하늘을 보려는데 내 눈이 무언가로 가려졌다.
따뜻했다.
난 조금 시간이 지나서야 그게 대신관의 손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손바닥으로 내 눈을 가려준 대신관이 말했다.
“더 말 안 해도 돼. 다 믿으니까.”
“……신선력으로 확인해쏘?”
대신관 정도라면 신성력으로 거짓을 판가름할 수도 있다.
난 대신관이 그렇게 한 줄 알았다.
“아니.”
“왜?”
“네가 거짓말할 리가 없으니까.”
대신관은 손을 내렸다.
꾹 참아왔지만 결국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런 내 머리를 대신관이 토닥거리며 말했다.
“고생 많았다, 나나.”
난 눈을 크게 떴다.
대신관이 내 이름을 불러준 건 이번이 처음이었기에.
대신관은 헝클어진 내 머리를 풀어주며 덤덤히 말했다.
“이번엔 바이칼로스에게서 내가 지켜주겠다. 후견자는 그러라고 있는 거니까.”
“…….”
“네가 똑같은 일을 겪지 않게 할 거야.”
그 말엔 단단한 힘이 있었다.
대신관은 값비싼 천이 망가지는 건 신경도 쓰지 않고 옷소매로 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대신 너도 힘을 기르도록 하지.”
반질반질해진 내 얼굴을 보며 대신관이 픽 웃었다.
“리미에에게 허무하게 죽기엔 넌 너무 아깝거든.”
장난스럽지만 날 챙겨 주는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카밀라에게서 느꼈던 버팀목이 대신관에게서도 느껴졌다.
대신관은 내 사람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바이칼로스의 뒷돈도 좀 뜯어 먹을걸. 아쉽군.”
“…….”
조금…… 돈을 많이 좋아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