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리알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난 서둘러 벨리알의 바지춤을 잡아당기면서 ‘미!’ 하고 입 모양으로 말했다.
그러자 벨리알이 말했다.
“미, 미성년자도 가끔 숲을 거니는 걸 좋아합니다…….”
아이, 참.
난 복장이 터질 것 같았다.
두 남자를 화해시키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이라니.
하지만 다행인 점은 둘 다 데면데면해도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난 한 손으로는 벨리알의 손을 잡고, 다른 손으론 대공님의 손을 잡고 말했다.
“벨랼도 가치 놀자!”
같이 놀면 사이가 좋아지지 않을까!
그러다 보면 속마음도 터놓고 솔직해지는 거겠지! 나의 엄청난 계획을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둘을 질질질 피크닉 매트로 끌고 와도 두 사람은 자리를 피하지 않았다.
성격상 둘 중 하나라도 자리를 떴을 텐데, 안 그런 걸 보니 대공님도 반성하고 벨리알도 자기가 사고를 쳤다는 자각은 있는 것 같았다.
특히 대공님은 벨리알을 보는 눈빛부터가 이전과 달랐다.
부드럽고 후회감이 가득했다.
‘역시 화해하고 싶은 게 틀림없어.’
난 전생에서도 이번 생에서도 가족이 없지만, 가족끼리 사랑을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신전 교육원에 언니, 오빠들을 보러 오는 부모님들은 다 끔찍하게 자신들의 아이를 사랑했으니까.
‘나처럼 아예 부모님이 없으면 대화할 수도, 화해할 수도 없지만.’
둘은 아니잖아. 그러니 난 머리를 돌돌돌 돌려 궁리를 해 보았다.
‘좋은 생각을 떠올리자, 좋은 생각.’
그래!
이내 박수를 짝 치며 말했다.
“소꿉노리 하자!”
“소꿉놀이?”
“소꿉놀이?”
누가 부자 아닐까 봐 둘 다 똑같은 톤으로 나에게 물어보았다.
대공님과 벨리알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 그건 싫은가……?’
하던 찰나에 벨리알이 물었다.
“그게 뭐냐?”
“그게 뭐지?”
벨리알과 대공님이 둘 다 말했다.
세상에 소꿉놀이를 모르다니. 이 국민 놀이를!
“소꿉노리는 가조기 대어서 노는 고야(소꿉놀이는 가족이 되어서 노는 거야).
“우린 이미 가족이야.”
벨리알이 당당하게 말했다.
“……그건 그로치만.”
그런 게 아니란 말이에요.
하지만 놀이라는 말에 자신감이 생겼는지 벨리알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난 이미 3살 때 가신들이 하는 애들 놀이는 다 할 수 있었어.”
“먼데?”
“칼싸움 놀이.”
“……딴고.”
“묶어놓고 머리 위에 사과 올린 다음 검으로 꽂는 거.”
“……그고 말고.”
“사냥놀이. 멧돼지도 잡았어.”
“…….”
“또 뭔 놀이가 있지.”
아니, 그렇게 폭력적인 거 말고요!
내가 고개를 붕붕 저으며 ‘그론 고 아냐!’ 하니까 벨리알이 골똘히 고민하다가 이내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고 말했다.
“난 모든 것에서 최고였으니 할 수 있다.”
“멀?”
“소꿉놀이에서도 최고가 되어주지.”
벨리알의 의기양양한 시선에 난 그냥 슬쩍 시선을 피했다.
소꿉놀이가 뭔지 알고도, 최고가 된다고 할 수 있을까?
“조, 조하. 그럼 하자.”
난 그동안 신전에서 왕따였기 때문에 사실상 소꿉놀이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다른 애들이 그렇게 노는 걸 부럽게 본 기억밖에 없다. 그러나 어떻게 하는지는 알고 있으니까…….
‘내가 가르쳐 줘야 해!’
음, 그런데 먼저 뭘 하더라.
“음…… 소꿉노리는 가족이 이써야 대.”
그 말에 대공님도 벨리알처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우린 가족이다.”
“……그로니까 그고 말고 가짜 가족.”
그냥 역할을 정해 주는 게 빠르겠다.
난 벨랼을 척 가리켰다.
“벨랼 아빠! 나나 엄마!”
아차.
대공님을 스윽- 보았다.
대공님이 난 무슨 역할이지 하는 얼굴로 날 보고 있었다.
저분에게는 무슨 역할을 전담해 줘야 하는 거지. 남는 게 없다.
난 땀이 뿅뿅뿅 솟아 나는 기분으로 곰곰이 고민하다가 겨우 말했다.
“대곤밈…… 애기.”
대공님의 오른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 말에 뒤에 있던 엘이 마치 쓰러질 것처럼 하얗게 질렸다.
‘역시 애기는 좀 그런가.’
그럼 멍멍이밖에 없는데, 어쩌지.
하지만 대공님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난 애기다.”
“…….”
저렇게 건장한 애기라니.
“그…… 애기는 응애 응애 해저야 하는-”
대공님이 날 뚫어져라 보았다.
난 겨우겨우 활짝 웃으며 박수를 쳤다.
“요, 요기소는 앙 하는 거로 하께요(여기서는 안 하는 걸로 할게요).”
그렇게 어색한 소꿉놀이가 시작되었다.
난 대공님이 뿌려주었던 꽃을 열심히 장난감 컵에다 담으며 벨리알을 향해 말했다.
“벨랼 남푠은 돈 버러 와. 보톤.”
“그래? 돈이라. 야, 거기.”
벨리알이 불량하게 대공님 뒤에 있는 기사 중 한 명을 지목했다.
“가서 돈 좀 가져와라.”
“그게 아냐!!”
그게 무슨 소꿉놀이야!!
난 천천히 손을 들어 차근차근 설명을 해주었다.
“남푠은 돈 벌러 가는 고야. 그리고 조미따 집에 드러와서 ‘와- 돈버러따’ 하는 고야.”
자, 이제 이해가 됐지?
제발 이해해.
하지만 여전히 잘 모르겠는지 벨리알은 살짝 썩은 얼굴로 ‘알았다’ 하더니 자리에서 일어서 피크닉 매트 옆에 섰다.
“…….”
그, 그래도 집을 벗어났으니 됐어. 된 거야.
“글구 애, 애기…… 맘마! 맘마 먹자!”
그 말에 방금 헉 소리가 난 것 같았다. 여전히 하얗게 질린 채로 엘은 숨을 참고 있었다.
‘이런 게 아닌데.’
엉엉. 내가 생각한 소꿉놀이는 이런 게 아니란 말이야.
‘더 화목하고 아기자기한 느낌이라고!’
하지만 난 울면서 꽃을 담은 장난감 컵을 대공님에게 주며 장난감 포크에 열심히 꽃을 끼웠다.
“자, 아-!”
이제 먹는 척을 하면 되는 거야!
대공님은 아까 벨리알보다 더 얼굴을 찌푸리며 자신의 손에 쥐어진 장난감 컵과 내가 내민 포크를 내밀었다.
그 엄청난 기세에 내 포크가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는 순간,
덥석-
대공님이 포크를 입에다 물었다.
난 순식간에 얼굴이 새파래졌다. 꽃을 먹으면 어떡해요!!
“애, 애기가 꽃 머거써!! 꽃 머거써(애기가 꽃을 먹었어!! 꽃을 먹었어)!!”
난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지!! 에비!”
하며 서둘러 대공님의 등을 퍽퍽 내려쳤다.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헉, 대공님을 보았다.
“애비라고?”
대공님이 한쪽 눈썹을 까딱 올렸다.
“벨리알에게 못된 말만 배웠나 보군.”
아니! 그게 아니라!
“에비! 에비에비 하때 에비! 모라여?”
“모른다. 아버지에게 애비라니.”
큰일 났다. 전혀 소통이 안 되고 있어…….
하지만 그때 구세주같이 엘이 대공의 귓가에 속삭여 줬다.
“아이들이 손대면 안 되거나 먹으면 안 될 때 하는 말입니다, 주군.”
“애비가 아니라 에비였군. 그런 용어가 따로 있나?”
“예.”
난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며 대공님에게 아- 하고 입을 벌리게 시켰다.
꽃이 없어! 진짜 삼킨 거야!
“그골 왜 머거요!”
“네가 먹으라 하지 않았나.”
“그로니까 소꿉노리하 때 징짜 먹는 고 아녜요! 가짜루 머거야지!”
난 속상해 얼굴을 손에 묻고 철퍼덕 앉았다.
이 상황을 도저히 어쩌면 좋아.
대공님은 여전히 심각한 얼굴로 입을 막았다.
“소꿉놀이는 매우 어려운 놀이군.”
누가 보면 지금 제일 문제 되는 회의 안건을 고려하는 얼굴 같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냐.”
벨리알의 말에 난 얼른 고개를 들었다.
그래, 벨리알이라면 이해를 해줄지 몰라!
“대곤니미 꽃 머거써! 빤니 아빠니까 바바.”
벨리알은 물끄러미 대공님을 보더니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독초가 아니니 아프진 않잖아.”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이 부자들아. 대공님은 거기서 왜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어요.
난 머리가 띵 해져서 이마를 잡았다.
“그나저나. 난 이렇게 말을 걸었으니 돈 벌어 온 건가.”
“고게 중요해? 지금?!”
“당연하지. 소꿉놀이의 끝을 가려야 한다.”
이건 무력 싸움 놀이가 아니라구요…….
하지만 난 그냥 벨리알에게 꾸벅 인사하면서 말했다.
“여보, 돈 마니 버러오셔써요?”
그 말에 벨리알은 기사한테서 뜯어온 황금을 툭 떨어뜨렸다. 대공님도 멈칫거렸다.
응? 둘 다 왜 그러지?
난 둘을 번갈아 가면서 봤지만, 왠지 둘은 날 보는 게 아니라 다른 무언가를 보는 기분이었다.
“아아! 소꿉노리 이제 끝! 끄티야!”
여하튼 꽃을 먹어버린 대공님 탓에 소꿉놀이를 끝낼 수밖에 없었다.
벨리알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배부른 짐승 같은 얼굴로 말했다.
“다음 놀이는 뭐지? 소꿉놀이에서 난 이긴 건가?”
“……웅, 벨랼은 소꿉노리의 시니야. 소꿉노리 넘 자래(웅, 벨리알은 소꿉놀이의 신이야. 소꿉놀이 너무 잘해)!”
그러자 벨리알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난 이 이야기가 여기서 끝난 줄 알았다.
다음 날 벨리알이 기사들에게 자신이 소꿉놀이를 정복했다며 자랑했다가 얼굴이 새빨개진 채 나에게 올 줄 어떻게 알았겠어.
조금 어색한 분위기로 대공님과 벨리알은 나란히 앉아 날 보았다.
난 그 두 시선에 케이크가 목으로 넘어가는지, 코로 넘어가는지 몰랐다. 그러다 ‘아이참!’ 이러고 결국 포크를 내려놓았다.
“이제 다음 노리는 업쏘!”
“왜냐.”
“왜?”
벨리알과 대공이 둘 다 쿠궁- 절망한 얼굴로 날 보았다.
난 볼을 빵빵하게 불린 채로 팔짱을 꼈다.
“노리는 친항 사이끼리 하는 고야. 긍데 둘 다 하해 안 하구. 안 치나니까 노리두 잼업쏘.”
그 말에 대공님은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벨리알은 눈빛이 흔들렸다.
난 고개를 팩 돌리며 말했다.
“하해해(화해해).”
둘은 어색하게 고개를 돌렸다.
자존심 때문인지 뭔지 몰라도 이런 관계가 너무 오랫동안 지속되어서 쉽게 화해하기 어려운 듯했다.
어쩔 수 없지. 최후의 수단을 써야겠다.
“나나 밥 안 머거!”
“뭐라고?”
“뭐!”
“나나 강식도 안 머거!”
그 말에 둘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하지만 난 팔짱을 풀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결국 한참 가만히 있다가 입을 연 건 대공님이었다.
“내가 미안했다. 너에게 약하다고 해서. 아버지로서 할 소리가 아니었다. 용서해 주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