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진심과 이지러진 달 (13)
놀라울 정도로 마음이 차분해졌다. 엘피는 고개를 들고 트론에게 사과했다.
“……죄송해요, 건방진 소리를 해서.”
“아냐. 나는 그대가…… 네가…… 모든 걸 알게 되면, 나를 경멸할 거라 생각했어.”
“절대 안 그래요. 저야말로…….”
엘피는 그에게 라이샤라고 정체를 속였던 것이나 회귀에 관해 이야기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지금 말하기에는 시간이 없었다.
“일단, 긴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해요. 전하, 제가 알고 있는 것들을 말씀 드릴게요.”
그녀는 ‘완전 예지’로 알아낸 것들을 트론에게 전했다.
가장 큰 것은, 지금 자신에게 조건에 따라 제 목숨을 앗아 갈 수 있는 주술이 걸려 있다는 것.
그다음으로는, 그녀가 현재 갇혀 있는 위치였다.
“……목숨을 끊게 하는 저주라면, 그 주술을 걸어 둔 매개체만 알면 된다. 그럼 바로 주술을 풀 수 있어.”
“네, 그것도 말씀드리려고 했어요. 매개체는 푸른 보석이에요. 그런데…… 웰칸의 장로님이 몸에서 떼어 놓지 않고 갖고 계신 듯해요.”
“그렇군.”
할리케는 철저한 사람이었다. 트론은 미간을 찌푸리며 계산했다.
“……전하, 장로님을 죽여서라도 가져올 각오를 하고 계시죠?”
“…….”
“그 사람을 죽이시지 않는 게 좋아요. 지금 시점에서 웰칸과 척을 지면 데니옴 회의까지 전부 엉망이 되고 말 거예요. 아직 대화의 여지가 있어요. 그리고…….”
엘피가 더 설명하려다가 비틀거렸다. 그녀의 모습이 더욱 흐릿해졌다.
트론이 깜짝 놀라 그녀를 부축하려 했으나, 반투명한 상태인 엘피를 만질 수는 없었다.
“윽, 죄송해요. 너무 많은 정보가 들어와서 받아들이는 데에 한계가…….”
“됐어, 무리하지 마. 그 정도면 충분하다.”
“……네. 그리고 아까 제가 한 말도 기억해 주세요.”
엘피는 남은 눈물 자국을 훑어 내며 미소 지으려 노력했다.
“저는 항상, 전하가 행복하기를 빌어요.”
“나도, 항상 그래.”
왕이 된 그의 옆에서 더 이상 가짜 누나 행세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가 맞이하는 행복한 미래를 먼발치에서 바라볼 수 있는 것만으로 족했다.
‘……아니, 갈수록 욕심이 생길지도 몰라.’
그래서 무의식중에 트론에 대한 감정을 애써 모른 척해 왔던 것일지도 모른다. 분수를 모르고 그 이상을 바라게 될 것 같아서.
그 순간, 엘피는 자신의 몸이 완전히 투명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 슬슬 한계인 것 같아요. 저, 잠깐 사라질지도 모르지만, 무사하니까요! 걱정하지 말고 기다려 주세요.”
트론은 작게 끄덕였다. 이전에도 같은 일이 있었지만, 그녀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간 것뿐이었으므로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꼭 돌아올게요! 그리고…… 전하.”
“응.”
“전하께서 어떤 선택을 하시든, 저는 전하 편이에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빛의 잔상이 사라졌다.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방 안이 고요해졌다.
“엘피…….”
이전에도 한 번 겪었던 일이지만, 끔찍한 감각이었다. 눈앞에 있던 그녀가 갑자기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 같은 아득한 외로움이었다.
트론은 고개를 젓고 정신을 차렸다. 검을 고쳐 쥐고 이제부터 할 일에 집중했다.
우선은 할리케가 가지고 있는 주술의 매개체를 탈취하여 엘피의 주술을 풀고 안전을 확보하는 것.
그는 망설임 없이 방을 박차고 나섰다.
***
이 도시는 하늘이 없다. 하지만 낮에 푸른 하늘을 볼 수 없는 대신, 밤이 되면 지하에도 공평하게 어둠이 찾아왔다.
바깥에 이따금 반짝이는 불빛이 마치 별 같았다.
할리케는 무표정하게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언니는 두더지 땅굴 같다며 웰칸의 도시를 싫어했었다.
“할리케, 왜 우리는 이렇게 남들의 눈을 피해서 살아야 하는 걸까.”
언니의 그 질문은 나이를 먹은 현재까지도 대답해 주기 어려운 문제였다.
그들은 여전히 대륙의 인간들 사이에서 더럽고 추악한 존재로 취급당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언니는 두더지가 파놓은 굴에서 빠져나갔다.
때때로 원로회를 통해 언니의 소식이 전해졌다. 왕실 직속 주술사라는 영광스러운 자리까지 올라갔다는 모양이었다.
현명하고 아름다운 언니는 이 땅굴에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 대신, 두더지들을 땅 위로 끌어올려 줄 것이다.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언니가 왕의 씨를 품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가능성 넘치는 천재 주술사는 이름조차 남지 않는 뒷방 첩실이 되었다.
할리케는 그녀의 몰락을 믿기 어려웠다. 믿고 싶지 않았다.
언니는 할리케에게 조카가 되는 아들을 낳았다고 했다. 그 이후 몇 년은 끊어질 듯, 소식이 가끔 전해지는 정도였다.
현명한 언니가 제 노력으로 이뤄 낸 발자취는 모두 사라지고, 언제 왕궁에서 쫓겨날지 모르는, 서출 왕자의 이름 없는 모친만이 남았다.
할리케는 다시 언니를 만날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를 떠올릴 때마다, 무언가를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너구리 같은 원로회 영감들을 구워삶으며 웰칸 연합 안에서 악착같이 기어 올라갔다.
연줄을 만들고, 연락망을 강화했다. 왕궁과 귀족가에 첩자를 심었다. 두더지는 두더지답게 몸부림을 쳤다.
그리하여 할리케는 웰칸 연합의 장로가 되었다. 젊은 나이를 생각하면 이례적인 출세였다.
그녀는 장로가 되자마자, 자신의 언니를 찾아갔다. 적막한 감옥 같은 왕자궁에 잠입한 할리케는 언니를 발견하고 놀라고 말았다.
한때의 미모는 흔적만 남아 있을 뿐 뼈가 앙상했다. 총기 넘치던 눈동자는 어딘지 흐리멍덩했다.
“왜 왔니, 할리케.”
“언니, 나는…….”
“나를 비웃으러?”
언니는 그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이 알던 총명하고 사려 깊던 언니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마치 그녀의 잔해를 붙들고 대화를 하는 것 같았다.
“나, 장로가 되었어. 언니를 위해서 뭐든 하고 싶어서…….”
“……그래, 그렇구나. 그런 거였어.”
할리케는 음침하게 중얼거리는 언니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손톱을 씹으며 무언가 생각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좋아, 할리케. 그럼 나를 위해서 이 나라를 없애 줘.”
“그, 그렇지만……. 그건 로라 2세 때도 실패했던 일이잖아.”
“괜찮아. 너는 최고의 도구를 가지게 될 거야. 빌어먹을 스레데니옴의 피가 섞인 왕위 계승권자를 말이지.”
언니는 재회한 후 가장 밝은 미소를 지으며 할리케에게 말했다.
“내 아이를 너에게 줄게.”
그렇게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분명히 그때 언니는 정상이 아니었던 거겠지.’
이제 와서 냉정하게 생각해 본들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녀의 언니는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헤럴드의 수하에 의해 세상을 떠났다.
정황상, 피할 수 있었는데도 저항 없이 죽은 것으로 보였다. 남의 손을 빌린 자살인 셈이었다.
죽지 못해 살던 언니가 자신에게 뜻을 맡기자마자 안심하고 죽었던 것은 아닌지. 그녀를 말릴 방법은 없었는지.
그런 고민을 시작하면, 지금도 심장이 으스러질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하지만 당시의 할리케는 언니의 죽음을 추모하는 것에 앞서, 그녀의 유산을 확보해야만 했다.
트론 스레데니옴.
그 어린 조카가 죽지 않고 살아남아 이 나라를 부술 수 있도록. 언니의 유언을 지킬 수 있도록.
“네가 트론이니?”
“엄…… 마?”
“아하하. 아쉽지만, 틀렸어. 네 엄마의 동생이야.”
“아…….”
“……아가야. 나랑 거래하지 않으련?”
처음부터 모든 것은 정해져 있었다. 트론이 만약 거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해도, 할리케는 어떻게든 그의 목숨 줄을 쥐고 등을 떠밀었을 것이다.
지나치게 명석한 조카는 두더지가 필사적으로 깔아놓은 망국의 왕을 향한 길을 착실하게 걸어갔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이의 소원을 이루어 주기 위해, 산 사람들은 제물이 되어 갔다.
거기에는 어떤 명분도 애정도 실체도 존재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저주일지도 모른다.
자신과 트론의 관계는 그것이 전부였다.
전부여야 했다.
***
트론은 복도를 가로질러 할리케의 침실로 재빠르게 이동했다. 중간에 그를 방해하는 위병들을 제압하며, 나선 계단을 올라갔다.
이윽고 다다른 곳은 중앙 탑의 가장 중심 꼭대기에 있는 방이었다.
앞을 지키는 주술사들을 무력화시킨 후, 트론은 그 문을 더듬었다. 방문에는 주술이 걸려 있었다.
‘이 술식 형태는…….’
특정한 숫자를 넣어 해제해야 하는 방식이었다. 문을 무시하고 벽을 아예 부숴 버리는 것도 생각했지만, 소란을 피우면 추가 병력이 몰려와 골치 아파질 가능성이 컸다.
트론은 생각나는 몇 가지 숫자를 넣었다. 할리케의 생일이라거나, 모친의 생일 같은 숫자였다.
하지만 어느 쪽도 맞지 않았다. 애초에 그녀가 그렇게 허술한 숫자를 넣었을 리가 없었다.
그는 포기하고 벽을 파괴하려다가, 순간적으로 그녀와 나누었던 예전 대화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주군, 생일을 정하셨다면서요.”
“그런 소리는 어디서……. 아니, 쓸데없는 질문이었군. 사먼인가.”
“아하하. 섭섭하게 왜 말씀을 안 해 주셨어요. 생일을 챙기고 싶으신 거면 제가 날짜를 정해 드렸어도 되는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거다.”
“모처럼 생일을 정하셨다니 매년 선물을 보내야겠어요.”
“사양하겠다. 어차피 그대도 금세 잊어버릴 날짜 아닌가.”
“어머. 제 기억력을 우습게 보시네요. 내기하시겠어요? 5년 뒤에도 기억할 거예요.”
“됐다.”
그 후로 할리케는 매년 사먼을 통해 달갑잖은 선물을 보내 왔다.
‘……정말 웃기지도 않는군.’
그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시도해 본다고 손해 볼 것은 없었으므로, 손가락을 들어 자신의 생일을 입력했다.
그와 동시에, 맥없이 문의 방어가 풀렸다.
“하…….”
어이없는 한숨을 내쉬며 트론은 할리케의 방에 들어섰다.
침대에 앉아 있던 흑발의 미녀는,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천천히 트론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머, 주군. 이렇게 늦은 밤에 미리 말도 안 하고 오시다니. 예의범절이 부족하시네요.”
“…….”
“밤에 잠이 오지 않아서 이모의 자장가라도 듣고 싶으셨나요?”
그는 할리케의 헛소리에 반응하지 않고 재빠르게 그녀를 향해 뛰어갔다.
할리케는 입꼬리를 올리며 침대를 방패 삼아 민첩하게 뒤로 몸을 물렸다.
트론은 동요하지 않고 검으로 침대를 무너뜨린 다음, 주술을 발동했다.
할리케의 뒤에 있던 커튼이 마치 살아 있는 촉수처럼 꿈틀대며 그녀의 팔을 붙들기 위해 움직였다.
그러나 할리케는 소리 높여 웃으며 품에서 단도를 꺼내 커튼을 잘라 냈다.
“아가씨의 목숨이 아깝지 않으신가 보죠?”
“…….”
이번에는 그녀가 붉은빛의 주술식을 그려 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