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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님, 악당 길만 걸어요!-106화 (106/132)

106화. 진심과 이지러진 달 (12)

“흥정하려 들지 마. 지금 그대와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나는 많이 참아 주고 있는 것이다.”

“아하하.”

할리케가 마른 웃음과 함께 손짓하자, 그녀의 보좌관이 고개를 숙이며 보고했다.

“……현재 엘피 이나드 영애는 숙소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합니다.”

“그렇다네요, 주군. 사랑스러운 아가씨도 잠은 자야겠죠? 이렇게 한밤중에 쳐들어가는 건 실례잖아요.”

“…….”

“우선 쉬세요. 방은 준비해 두었어요. 내일 아침에 이야기하죠.”

트론은 대답 없이 할리케를 한참 쏘아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그녀의 목을 쥐고 그대로 죽여 버리겠다고 협박이라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트론은 제 이모를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위험에 처할 경우를 대비하여 엘피를 죽일 장치를 마련해 놨을 사람이다.

“……알겠다.”

“네, 그러셔야 현명한 우리 주군답죠. 쉬지 않고 여기까지 오시느라 많이 피곤하시죠? 푹 쉬세요.”

엘피의 목숨을 어떤 방식으로 위협하고 있는 것인지, 그녀를 무사히 빼낼 방법이 무엇인지. 그것을 확인하는 것이 먼저였다.

트론은 날뛰고 싶은 충동을 잠재우며 숙소로 안내하는 시종의 뒤를 따랐다.

***

할리케의 말과 달리, 그 시각 엘피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깨어 있었다.

현재 상황, 트론에 대한 것, 이 나라의 미래, 그 모든 것들이 실타래처럼 뒤엉켜서 꼬리를 물고 머릿속을 괴롭혔다.

결국, 그녀는 자는 것을 포기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을 움직이면 잡념이 덜어질까 싶어, 엘피는 좁은 방 안을 왔다 갔다 걸어 다녔다.

그때, 밖에서 노크 소리가 울렸다.

“……엘피 님. 안 주무시나요?”

“아, 사먼.”

그녀는 문으로 다가갔다.

“네, 머리가 복잡하다 보니……. 한숨도 못 자겠어요.”

“그러셨군요. 주술로 재워 드릴까요?”

“그, 그건 사양할게요.”

“실은, 아침에 말씀드릴까 했는데…….”

“……?”

사먼이 잠시 망설이는 것 같더니, 말을 이었다.

“주군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아……!”

엘피는 저도 모르게 문에 바싹 달라붙었다. 트론이 가까운 공간에 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것만으로 가슴이 크게 뛰었다.

“……아무래도 엘피 님의 안부를 두고 내일 오전에 장로님과 이야기가 오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군요……. 알려 주셔서 감사해요.”

“천만의 말씀을요. 저기, 불면에 좋은 차라도 내드릴까요?”

“아뇨, 괜찮아요. 다시 누워 볼게요.”

“알겠습니다. 모쪼록 무리하지 마시길.”

바깥에서 인기척이 사라지고, 엘피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눌렀다.

트론과 할리케가 내일 오전에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면, 기회는 지금뿐이었다.

그녀는 밖에서 수상하게 여기지 않도록 다시 불을 끈 다음, 두 손을 모았다. 트론을 떠올리며 간절하게 빌었다.

‘원작의 비극을 반복할 수는 없어요. 부디, 저에게 힘을 주세요. 이 상황을 슬기롭게 헤쳐 나갈 힘을……!’

어느 순간, 사방이 암흑으로 뒤덮였다. 익숙하고도 낯선 그 감각에 엘피는 안도했다.

라이샤로서의 자신을 자각하는 순간이었다.

***

엘피는 몸이 붕 뜨는 느낌과 함께 눈을 떴다. 캄캄하던 시야가 점점 밝아지고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황금과 비단으로 장식된 벽과 예술품들이 진열된 복도, 그리고 높은 천장이 보였다.

‘……데니옴 왕궁?’

그녀는 어딘지 낯이 익은 그 풍경을 두리번거렸다.

궁성 안은 기묘할 정도로 조용했고, 오가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창밖을 보니 저녁쯤이긴 했지만, 궁성 복도에는 보통 사용인들이 상주하게 마련이다.

엘피는 위화감을 느끼며 몸을 움직였다.

‘어째서 데니옴 왕궁에 온 건지 모르겠지만, 분명히 이 꿈에 의미가 있을 거야.’

지금 엘피가 있는 곳은 본궁의 그레이트 홀 근처였다. 그녀는 상황을 살피기 위해 홀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엘피는 그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심장이 덜컥 떨어지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계단 형태로 만들어진 단상의 가장 높은 곳에, 왕좌가 있었다.

그 왕좌에는 한 청년이 앉아 있었다. 자는 것인지, 아니면 무언가 생각에 빠진 것인지 눈을 감은 상태였다.

‘왕자님!’

엘피는 깜짝 놀라 허둥지둥 계단 위로 향했다.

그녀는 왕좌에 앉아 있는 트론을 보고 흠칫 놀랐다.

그의 얼굴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성숙해 보였다. 또한, 오른팔의 옷자락이 부피감 없이 늘어져 있었다. 그곳에 있어야 할 오른팔이 없었다.

‘……설마, 원작의 트론 스레데니옴?’

얼마 전에 보았던 꿈의 뒷이야기일지도 모른다. 2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외견과 왕좌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미루어 보면, 그가 왕이 되고 나서 시간이 꽤 흐른 것 같았다.

이 꿈은 자신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고 싶은 것일까. 엘피는 두 손을 모은 채 트론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어딘지 지쳐 보였다. 찬란한 미모는 여전했지만, 걱정될 정도로 몸이 깡말라 있었다.

그렇게 몇 분쯤 지났을까, 트론이 천천히 눈을 떴다. 잠깐 자고 있었던 것인지 깨어난 그의 눈동자가 흐릿했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눈을 크게 뜨더니 몸을 일으켰다.

“……엘피?”

트론이 절뚝거리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엘피는 헉 소리도 내지 못하고 굳었다.

지금까지 라이샤로서 꿈을 꿀 때는 아무도 그녀를 인지하지 못했다. 꿈속의 트론이 자신을 알아본 상황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꿈인가……?”

“모, 모르겠어요.”

자신에게 있어서는 꿈이지만, 트론의 입장에서는 꿈인지 현실인지 그녀로서는 알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엉겁결에 모르겠다고 대답하자, 트론이 눈을 찡그렸다.

“……네 목소리는 들리지 않네. 이왕 꿈이면, 목소리도 듣게 해 주지.”

“제 목소리, 안 들리세요?”

“미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어.”

트론은 그녀를 만지려는 것처럼 손을 뻗었다가, 닿지 않는 걸 확인하고 다시 왕좌에 앉았다.

“꿈이 아닌 것 같은데……. 내가 미친 걸까? 그래서 헛것을 보나?”

엘피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환각이라도 반가워. 아니, 환각인 게 좋을 것 같아. 엘피가 천국에 있지 않고 떠돌고 있다고 생각하면 슬프니까.”

“…….”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어른 모습이네. 네가 어른이 되는 걸 항상 상상했었는데, 그것보다 훨씬 아름다운 것 같아.”

엘피는 뜻하지 않은 칭찬에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그녀의 반응을 보고 트론이 살며시 고개를 기울였다.

“……그에 반해 나는 이렇게 추하고 끔찍하게 변해서. 미안해.”

“아, 아니에요!”

“아니라고 말해 주는 건가……? 괜찮아, 위로하지 않아도 돼. 나도 아니까.”

트론은 왕좌에 머리를 기댄 채 속삭였다.

“이제 곧 루베인 마그달리사 공작이 왕궁으로 올 거야. 오늘 밤 안에는 끝이 나겠지. 길었어.”

“…….”

“마그달리사 공은 선량하니까, 목이 베이는 정도로 끝나지 않을까. 지금까지 내가 죽여 온 사람들을 생각하면 본보기 삼아서 더 잔인하게 죽이는 게 좋을 텐데.”

“읏…….”

“……가끔은 그런 생각도 했어. 그냥, 엘피 네가 죽은 그날, 나도 같이 목숨을 끊는 게 좋았을까 하고. 그럼 수많은 사람이 고통받을 일 없이 끝났을 텐데 말이야.”

핏기가 없어 파리한 입술을 달싹이며, 그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러면……. 네 죽음에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잖아.”

어느샌가 엘피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는 눈물을 훔쳐 주려는 듯 왼팔을 앞으로 뻗었다가,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고 표정을 흐렸다.

“네가 굳이 목숨을 바쳐서 바란 게 이런 결말은 아니었겠지. 결국 그냥 핑계야. 네 죽음에 무언가 의미를 만들지 않으면, 내가 견딜 수 없어서…….”

엘피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넘쳐흐르는 눈물을 어떻게 할 길이 없었다.

“……미안해. 그래도 환각이나마 다시 봐서 기뻤어. 나는 죽어 봤자, 너를 만날 수 없을 테니까.”

“전하…….”

“너는 천국에서 잘살고 있겠지? 나는 분명히 지옥에 떨어질 테니까, 영원히 엘피를 만날 수 없겠지만.”

트론은 얼굴을 찌푸렸다. 마치 울 것 같은 표정이었지만, 눈물은 맺히지 않았다.

“있잖아, 엘피. 실은 나도……. 이런 왕이 되고 싶진 않았어.”

“흑…….”

“엘피랑 오래오래 함께 있고 싶었어.”

어디선가 멀리 함성이 들려왔다. 고요했던 왕성 안에 발을 구르는 소리와 쇠붙이가 맞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그와 동시에 엘피는 자신의 몸이 흐릿해지는 것을 자각했다.

“……슬슬 끝인가 보네. 잘 가, 엘피.”

“윽…….”

“내가 걱정되어도 지옥까지 오지는 마.”

트론은 마지막으로 입꼬리를 올려 엘피를 향해 미소를 보였다.

그 표정은, 어린 시절 장갑을 선물 받고 활짝 웃던 미소와 똑 닮아 있었다.

***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입술을 적신 액체가 턱을 타고 흘러 옷자락으로 내려왔다.

엘피는 심장을 옥죄는 듯한 고통과 함께 오열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머릿속에 해일이 몰아치는 것처럼 정보가 흘러들어왔다. 그녀는 그 감각을 알고 있었다. 르터바이스 협곡에서 겪었던 ‘완전 예지’의 힘이었다.

눈부신 빛이 그녀를 감쌌다. 엘피는 채 눈물을 닦아 내지 못하고 빛을 피해 눈을 찡그렸다.

이윽고 주변 풍경이 바뀌었다. 그녀가 감금당해 있던 곳과 비슷한 분위기의 방이었다.

‘그렇다면 여기는…….’

“……엘피?”

“아…….”

엘피는 얼른 몸을 돌렸다.

검은 머리칼의 청년이 놀란 얼굴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방금 꿈에서 보았던 것보다는 어린 외견이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트론이 그곳에 서 있었다.

“르터바이스 협곡 때처럼…… 힘을 쓴 거야?”

“읏, 네…….”

엘피가 눈물을 참지 못하고 겨우 대답하자 그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왜 우는 거지? 무슨 일이야. 할리케가 무슨 짓을 했나?”

엘피는 얼른 도리질했다.

“그, 그런 게 아니에요. 무척 슬픈 꿈을 꿔서…….”

“……슬픈 꿈?”

엘피는 조심스럽게 트론을 향해 손을 뻗었다. 만지는 것처럼 뺨을 더듬었지만, 역시 닿지 않았다.

“전하께서…… 폭군으로 세상을 떠나기 직전의 꿈이요.”

“…….”

트론이 숨을 들이켜며 시선을 돌렸다. 엘피는 작게 속삭였다.

“……‘지금’의 미래는 아니에요. 하지만 장로님에게 들었어요. 전하께서는 지금껏 이 나라를 끝장내기 위해 웰칸의 협력을 받아오셨다고. ……망국의 마지막 왕으로 죽기 위해서.”

“엘피…….”

머릿속에서 멋대로 오가는 정보는 그녀가 원하는 것을 수월하게 전해주지 않았다.

혼란스러운 감정과 머리를 진정시키며, 엘피는 눈물을 훔치고 말을 이었다.

“전하께서 진정으로 그걸 바라신다면, 상관없어요. 저는 전하 곁에서 망국의 간신으로 같이 죽어도 괜찮아요.”

그 마음은 진심이었다. 그가 악당이 되어 이기적으로 왕의 길을 쟁취한다고 해도 얼마든지 따라갈 수 있었다. 회귀하여 그가 죽지 않기를 바랐던 그 시절부터, 항상 그랬다.

그럼에도 그가 편하고 쉬운 악한 길에 손을 물들이지 않고, 어렵게 돌아갈지언정 바른길을 택하는 것이 기뻤다.

그의 고뇌를 알지 못했다. 그의 전부를 이해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어쩌면 멋대로 만들어 놓은 이상향을 그에게 강요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 마음이 이기심이라고 한다면…….

“하지만 있잖아, 론.”

“…….”

“역시 나는 론이 오래오래 살아서 행복했으면 좋겠어.”

마지막까지 이기적으로 발버둥 치자고 생각했다.

“있잖아, 엘피. 실은 나도…… 이런 왕이 되고 싶진 않았어.”

그가 예정된 비극도, 괴로움도, 아픔도, 겪지 않도록.

처음부터 그랬다.

무엇보다 소중한 그에게 행복한 미래만을 선사하고 싶었다.

이 세상에 펼쳐져 있는 푸르름과 화사함을 모두 긁어모아, 온 세상의 여름이 그의 것이 되도록 장식하고 싶었다.

서서히 머리가 맑아지고, 단 한 가지 결론이 그녀 안에 남았다.

납득하고, 또한 탄식했다.

‘아아, 그렇구나. 나는…….’

엘피 이나드는, 트론 스레데니옴을 사랑하고 있었다.

무척 오래전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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