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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님, 악당 길만 걸어요!-104화 (104/132)

104화. 진심과 이지러진 달 (10)

시간이 더 걸릴 거라 생각했지만, 뜻밖에도 장로와의 대면은 금세 이루어졌다.

사먼은 그녀가 점심을 같이 먹으며 이야기하자는 제안을 했다고 전했다. 식사를 하자니 체할 것 같았지만, 엘피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식당에서 이야기를 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뜻밖에도 사먼이 그녀를 데리고 간 곳은 지하였다.

구불구불한 나선계단을 한참 내려가자 음울한 분위기의 공간이 나왔다.

생각보다 넓은 것 같았지만, 빛이 부족하여 계단 근처 외에는 형태를 알아볼 수 없었다.

원래 식당으로 쓰이는 공간은 아닌지, 임시로 갖다 놓은 듯한 테이블과 의자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사먼은 그곳에 엘피를 앉히고는 퇴장했다.

그와 동시에, 하얀 빛의 포털 사이로 검은 머리칼의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왕자님이랑 닮았어.’

트론의 이모라면 연배가 있는 여성일 텐데도, 그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미모의 소유자였다.

“안녕하세요. 주군의 시녀장이라죠?”

“……네, 안녕하세요. 엘피 이나드입니다.”

엘피는 자리에서 일어나 작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저는 할리케라고 해요. 웰칸 연합의 장로를 맡고 있죠. 편하게 할리케라고 불러 주시면 된답니다.”

“알겠습니다. 장로님.”

친근한 호칭을 무시하고 딱딱하게 부르자, 할리케가 생긋 웃었다.

“그렇게 굳어 있을 것 없어요. 식사 시간은 즐거워야죠. 왕궁의 요리사 정도는 아니겠지만, 저희 요리사도 제법 솜씨가 있답니다. 맛있게 즐겨 주시길.”

“…….”

즐거운 사교 모임 같은 것이 아닌데도, 할리케는 명랑하게 떠들었다.

엘피는 작게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점심 코스는 채소를 주재료로 한 요리였다. 어차피 무거운 것을 먹어 봤자 소화가 안 될 게 뻔했기 때문에 엘피로서도 차라리 반가운 메뉴였다.

차례로 나오는 요리를 예의에 어긋나지 않을 정도로만 깨작깨작 삼켰다. 상황 때문에 맛을 구분하기 어려웠다.

세 번째 코스로 접어들었을 때, 할리케가 엘피에게 물었다.

“입맛에는 맞나요?”

“……네, 염려해 주신 덕분에요.”

엘피가 예의를 차려 대답하자 그녀는 깍지를 끼워 팔을 괴었다.

“새삼스럽지만, 정말 예쁜 아가씨네요.”

“……장로님이야말로 무척 아름다운 분이신 것 같습니다.”

“어머, 빈말이라도 고맙기도 해라.”

“왕자님이랑 많이 닮으셨어요.”

“하하. 주군이 들으면 싫어하실 것 같네요.”

“전하의 이모님이라고 하셨던가요.”

“네, 맞아요. 주군의 어머니가 제 언니였죠.”

엘피는 물 잔을 만지작거리며 조심스럽게 본론으로 들어갔다.

“……어째서 이런 일을 벌이시는 건지 물어도 될까요?”

“어쩜, 성미가 급한 아가씨였군요.”

할리케는 그렇게 말했지만, 엘피로서는 식사가 이렇게 진행될 때까지 이야기를 꺼내지 않은 것만 해도 충분히 오래 기다린 것이었다.

엘피는 할리케의 너스레를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아마 아실 것 같지만, 저는 사먼을 통해서 웰칸 연합의 존재를 들었습니다. 주술사의 권익을 찾기 위해 전하를 도왔다는 것도요. 이제 곧 왕자님께서는 왕좌에 오르실 테고, 그 숙원이 이루어질 날이 머지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저를 납치해 오신 건지, 이해되지 않아요.”

“아하하.”

할리케는 마른 웃음을 뱉으며 공중에 주술식을 그려 냈다.

술식이 완성되는 것과 동시에 사방에 빛이 감돌았다. 그제야 어두웠던 공간이 어떤 구조인지 알 수 있었다.

엘피는 주변을 둘러보고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생각보다 넓고 천장이 높았다. 강당 크기 정도 되어 보이는 공간에는 마치 도서관처럼 빽빽하게 수납장이 놓여 있었다.

하지만 수납장에 놓인 것은 책이 아니라, 자그마한 항아리들이었다.

엘피는 전생의 기억으로 그와 비슷한 장소를 본 적이 있었다.

‘……납골당.’

“장관이죠? 저게 무엇인지 아시겠나요?”

“……화장한 다음에 유골을 모아 둔 건가요?”

“어머나.”

그녀가 답을 맞힐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지, 할리케가 정말로 놀란 얼굴을 했다.

“네, 맞아요. 빌어먹을 국법에 따르면 주술사는 땅을 오염시키니까 시체를 묻으면 안 된다고 하잖아요. 그러니 별수 있나요, 태워서 보관하는 수밖에.”

“…….”

“뭐, 주술사 전부를 보관한 건 아니고요. 특히 기억해 둘 만한 죽음인 경우 이곳에 모아 두었어요. 하하, 식사하러 초대한 것치고는 좀 분위기가 없긴 하네요.”

그렇잖아도 없는 식욕이 뚝 떨어지는 공간이었다.

엘피는 침을 삼키며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부외자인 제가 감히 이해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주술사 여러분께 아픈 세월이 길었다는 건 알겠습니다. 하지만 전하께서 곧 왕이 되시면, 불합리한 것들을 바꿔 주실 거예요. 그러실 수 있는 분이세요.”

“그렇군요. 예상은 했지만, 아가씨가 원인 중 하나였나 보네.”

“……?”

“아가씨는 우리 주군이 어떤 왕이 될 거라 생각하죠?”

“그야…… 모든 백성에게 사랑받는 성군이 되실 거예요. 왕자님은 현명하고 훌륭하신 분이시니까요.”

“하하. 아하하하하!”

할리케는 배를 잡고 크게 웃었다. 전혀 웃을 만한 말이 아니었기에, 엘피는 당황하여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 정말 웃겨라. 전하한테도 그런 소리를 했어요?”

“……네.”

“그렇구나. 아이참. 역시 난 감이 좋다니까.”

중얼중얼 혼잣말을 읊던 할리케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잘 들어요. 트론 스레데니옴은 이 나라의 마지막 왕이 될 거예요.”

그녀의 말을 순간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엘피가 눈을 크게 떴다.

“주군은 이 나라를 망하게 하기 위한 모든 수단을 쓸 거예요. 죄 없는 자를 죽이고, 부정과 죄악을 부추기고, 멀쩡한 체계를 망치고, 발전한 기술과 문화를 짓밟을 겁니다.”

“무, 슨…….”

“다툼과 질시와 혼란이 지속되겠죠. 우리 주군은 머리가 좋으니까, 어떤 방식으로 최단 기간에 나라를 망쳐야 할지 알 거예요. 그러다 보면, 참지 못한 민중이 들고일어나서 우리 귀여운 조카님의 목을 베겠죠. 이 나라는 그렇게 마무리되는 거예요.”

엘피는 숨이 멎는 듯한 충격에 가슴을 부여잡았다.

“이것이 우리 웰칸과 전하의 거래랍니다. 이제 이해하셨나요?”

“어째서인가요! 왜, 그런 방법을…….”

숨을 몰아쉬며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냈다.

“그런 방법을 써 봤자, 주술사도 같이 불행해지는 것뿐이잖아요……! 왕자님은 현명한 분이세요. 분명히 왕이 되시면 주술사의 권익을 도모하는 방식을…….”

“100년 안에는 해결될까요?”

“……네?”

할리케는 구불거리는 흑발을 손가락으로 비비 꼬며 흥미가 떨어진 듯한 목소리를 냈다.

“이봐요, 아가씨. 사람의 고정관념이나 인식은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는 법이에요. 이 나라 사람들에게 있어 주술사는 하찮게 대하고 욕을 해도 당연한, 기분 나쁜 족속들이죠. 그런 사람들이 왕의 한마디에 변할까요? 법을 바꾼다고 해서 갑자기 주술사를 제 이웃으로 여길까요?”

“그건…….”

“우리는 지쳤어요. 이제는 숫자도 적죠. 그나마 있는 것은 쌓아 놓은 기술과 인맥, 그리고 재산뿐이에요.”

“…….”

“공평하게 다 함께 망하는 게 훨씬 즐겁지 않겠어요? 망하고 폐허가 된 이 토지에서, 주술사는 절대적인 힘을 발휘하겠죠. 병마의 치유도, 존재하는 물질의 변형도 가능한 우리 주술사라면. 뭐, 그래도 주술사에 대한 인식이 당장 쉽게는 안 변하겠지만. 100년 걸리는 것보다는 단축할 수 있겠네요.”

엘피는 속으로 탄식했다. 또한, 자신의 무지함에 자책했다.

‘……전하는, 이런 원망을 끌어안은 채 외롭게 싸워 오셨던 거야.’

자신은 그것도 모르고 그에게 성군이 되실 거라느니, 좋은 왕이 될 거라느니 속 편한 소리나 지껄였다. 그의 괴로움도, 슬픔도 모른 채.

“이제 알겠나요, 아가씨? 자기가 얼마나 철없는 소리를 했는지?”

“그럼, 저를 이곳에 데려오신 이유는…….”

“뭐, 아가씨 말도 틀리지는 않아요. 우리 주군은 현명하고 훌륭한 사람이죠. 애초에, 끔찍하게 고통받고 핍박받는 세월을 살아왔으면서, 저렇게 고고하게 성장한 것 자체가 기적이나 다름없어요.”

“…….”

“그건 우리 주군의 원래 성향이기도 하지만 분명히 아가씨가 곁에 있어서 그런 거겠죠.”

“저는, 아무것도…….”

“하하. 뭐, 됐어요.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우리 조카님이 이 나라를 망치는 폭군이 되기에는 아직 너무나 선하고 올곧다는 거예요.”

만지작거리던 머리칼을 놓은 할리케는 따사로운 미소를 지었다.

“자, 주군께서 아끼시는 우리 아가씨. 그러니까 도와줘요. 트론 스레데니옴이 망국의 마지막 왕으로서 이 나라를 화려하게 불태울 수 있도록, 말이죠.”

***

“이건 가이 님하고 왕자님한테 바로 알려야 하는 일이야!”

루베인은 포털을 통해 세오미로 돌아온 후에도 목청을 높이며 씨근덕거렸다.

처필이 사병을 양성하는 정황을 포착한 그녀는 바로 크헤룬으로 증거물을 남기고 가이에게 연락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제시드가 마법을 차단해 버려서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죄송해요. 그건 도와드릴 수 없어요.”

“어째서!”

“……단순히 처필의 마약 재배를 고발하는 것이라면 그건 괜찮아요. 하지만 저건, 차기 왕권 다툼과 관계가 있는 일이잖아요?”

“그건…….”

제시드는 차분하게 답하며 기절해 있는 크헤룬의 목깃을 쓰다듬었다.

“헤럴드 대공이 처필을 통해 군사를 양성해서 트론 전하를 치려는 거라면, 그들끼리 싸우게 두는 게 낫지요. 세틱스 님께 이익이 되는 상황이니까요. 협력해 드릴 수 없어요.”

“…….”

역시 만만하게 볼 상대가 아니었다. 제시드는 빈틈이 많고 덜렁거리는 듯 보이지만, 사실 머리 회전이 빠르고 그를 뒷받침하는 실력도 있었다.

“……역시 넌 머저리 같은 게 아니야. 제시드 율페이든.”

“네? 저기, 아뇨. 위로해 주시는 거라면 기쁘지만…….”

방금 전의 냉철한 면모는 어디로 갔는지, 제시드가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손을 저었다.

“아니, 농담이나 위로가 아니라 진짜로 그래. 난 네가 왜 그렇게 자기를 낮추지 못해서 안달인지 오히려 그게 신기한걸.”

“그, 그렇게 말씀해 주시는 건 루베인 님밖에 없어요.”

그녀는 그 말을 듣고 약간 위화감을 느꼈다. 위화감의 정체를 머릿속으로 더듬고 있으려니, 제시드가 양해를 구했다.

“아무튼, 이 일은 주인님께 보고해야 할 것 같네요. 잠시 말씀하지 말아 주세요.”

“……알았어.”

내키지 않았지만, 그들의 대화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있을 것이다. 루베인은 우선 입을 다물기로 했다.

제시드가 공중에 손가락으로 원을 그렸다. 그 원은 반투명한 초록색으로 빛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원의 색깔이 붉은빛으로 바뀌고, 청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제시드.]

“갑작스럽게 죄송합니다, 세틱스 전하. 급하게 보고드릴 일이 있습니다.”

[시시한 일이면 각오해야 할 거다.]

“죄, 죄송합니다! 혹시 별것 아닌 거면 죄송합니다!”

[얼빠진 놈. 사과를 몇 번을 하는 거냐. 빨리 말하기나 해.]

“네, 네에.”

루베인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리고 말았다.

‘세드릭 율페이든’으로서가 아니라 세틱스가 직접 제시드와 대화를 나누는 것은 처음 들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고약했다.

‘신하라고 해도, 저렇게 함부로 대할 일인가?’

그녀가 골똘히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제시드는 처필 공작의 사유지에서 확인했던 것들을 세틱스에게 전했다.

그사이에도 보는 사람이 민망할 정도로 세틱스가 그를 매도했고, 제시드 역시 사과와 자기혐오가 담긴 말을 번갈아 입에 담았다.

[뭐야, 겨우 그런 걸 전하려고 급하게 연락한 거냐? 머저리 같은 새끼가.]

“죄송합니다, 전하…….”

[그딴 건 전할 필요도 없다. 어차피 알고 있었던 일이니까.]

“아, 알고 계셨다고요?”

뜻밖의 말에 제시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세틱스는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

[당연하지 않으냐. 라블미 백작은 가망 없는 헤럴드를 버리기로 했다. 이 몸이 왕이 되는 걸 돕기 위해서 말이지.]

루베인은 저도 모르게 헉 소리를 낼 뻔한 것을 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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