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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님, 악당 길만 걸어요!-103화 (103/132)

103화. 진심과 이지러진 달 (9)

“지금 이게 무슨 짓이지?”

[주군답지 않게 뭘 그렇게 흥분하고 그러세요. 마음을 가라앉히세요.]

“…….”

트론은 어린아이라도 달래는 듯한 그녀의 말투에 화가 더 끓어올랐지만 필사적으로 참았다. 이 상황에서 화를 내는 것은 할리케가 바라는 것일 터였다.

트론은 침을 삼키며 분노를 삭였다. 그렇게 했어도 흘러나온 목소리는 무섭도록 차가웠다.

“말장난하지 말고 용건을 말해.”

[후후, 역시 우리 주군은 상황 판단이 빠르시다니까. 주군이 이렇게 훌륭하게 성장한 걸 볼 때마다 저는 참 뿌듯해요. 제가 당신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다면, 열 살도 채우지 못하고 죽었을 테니 말이죠.]

할리케가 일부러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녀가 하는 말은 진실이기도 했다. 트론이 현재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웰칸 연합 덕분이었다. 그 첫 거래를 잊은 적이 없었다.

“대단한 은혜를 베푼 것처럼 지껄이지 마. 그대 연합도 천출 왕자 하나에 매달리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머저리 집단에 불과하다.”

[아하하!]

명백한 도발을 받고 할리케는 배를 잡고 웃었다. 허세가 아니라 실제로 유쾌해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우리 사이의 거래는 처음부터 명확했다. 나는 그대들에게 돌려줄 것에 소홀한 적이 없었어. 그런데 왜 멋대로 내 수하를 건드린 거지?”

[소홀한 적이 없다라……. 주군. 요즘 백성들 사이에서 주군의 평가가 어떤지 아시나요?]

“…….”

[중흥의 군주 로라 2세 이래 최고의 성군이 될 재목이래요. 정말 우습지 않나요? 주술사들을 쳐 죽인 왕 이후 최고의 성군이 주술사인 트론 스레데니옴이라니. 아하하하!]

그녀는 생리적으로 흘러나온 눈물을 손가락으로 훔쳐 냈다.

[우리 가여운 조카님. 그래서 처음부터 계속 경고했잖아요. 착각하지 마시라고. 성군 놀이는 즐거우시냐고.]

“……내가 왕이 된 후 변심하리라 생각했나?”

[아니죠, 주군. 변심이 아니에요. 저는 당신이 원래 그런 사람이란 걸 알고 있어요.]

할리케는 고개를 기울이며 요염하게 웃었다.

[당신은 르터바이스의 힘을 얻고 임시 대공 체계에 들어가 안정기에 접어들었어도 웰칸을 끊어 버리지 않았죠. 왜일까요? 편리해서?]

“…….”

[아니에요. 당신은 지나치게 착해서, 겉으로는 험한 소리를 하면서도 자신의 어린 시절을 구명해 준 제 이모와 웰칸에 대한 은혜를 저버리지 못하는 거예요. 가엽게도.]

“……이런 짓을 하지 않았어도, 거래는 성립되었을 거다.”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주군은 왕이 되면 본성을 거스르며 죄 없는 사람을 죽이고, 체계를 파괴하고, 가치 있는 것들을 모조리 짓밟아야 해요. 그게 과연 쉬울까요? 폭군도 소질이 필요한 법이에요.]

트론은 눈을 부릅뜬 채 할리케를 쏘아보았다.

“내가 해야 할 일은 한다고 했다. 멋대로 사람을 재단하며 이딴 식으로 시험하려 들지 마.”

[그러신가요. 그럼 주군께서는 분명히 제가 세운 계획도 쾌히 찬성하시겠네요.]

“계획……?”

[간단한 거예요. 저는 2차 데니옴 회의에 맞춰 데니옴 왕궁을 불태우려 해요. 화재에 휘말린 헤럴드 스레데니옴을 땔감으로 삼아서 말이죠.]

그녀가 여상하게 뱉은 말이 공기에 파문을 일으켰다.

트론은 엘피의 예지몽에 나왔던 화재가 어떤 경위로 일어나게 되는지 깨닫고 입술을 짓씹었다.

[망국의 폭군이 즉위하는 걸 기념하는 화려한 전야제로 만들까 하고요. 수많은 시체와 왕가의 역사가 타고 남은 재를 밟고 왕좌에 오르다니, 무척 뜻깊은 자리가 되겠네요.]

“……왕궁을 전소시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네, 보통은 그렇죠. 하지만 주술사가 자신의 목숨과 맞바꾸어 피워 내는 불은 어떨까요?]

“할리케, 그대 설마…….”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며 웃음을 흘렸다.

[사먼은 이미 각오하고 있어요. 오히려 전하 옆에 있으면서 무탈한 기간이 길었죠. 자, 이 계획에 찬성하시나요?]

“…….”

[그것 보세요. 주군은 그런 사람이에요. 자기 때문에 죽은 사람을 하나하나 기억하면서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

“……겨우 그런 걸 확인하기 위해 이런 일을 벌인 것인가.”

[겨우라뇨. 저는 역시 제 생각이 맞았구나, 기뻐하고 있는걸요.]

할리케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일을 벌였는지는 이해했다. 트론은 치솟는 분노를 어떻게든 삼키며 상황을 정리했다.

감정에 휩쓸려 경솔하게 행동해 봤자 좋을 게 없었다. 엘피의 안위가 저쪽에 달린 이상, 그녀에게 해가 될 행동은 할 수 없었다.

“됐다. 내가 직접 그쪽으로 가지. 가서 이야기하겠다.”

[어머나. 역시 그 계집이 소중하신가 봐요. 이것도 제 예상이 맞았군요.]

“그녀의 가치가 어떻든 그건 중요한 일이 아니다, 할리케. 그대가 내 사람에게 손을 댄 순간, 이미 선을 넘었어.”

[아하하.]

“상대가 협력하면 협력을. 배신하면 배신을 돌려주는 게 거래의 철칙이다. 직접 대면하고 우리의 거래를 다시 논하기로 하지. 나는 배신을 잊지 않는다, 할리케.”

[알겠습니다. 뜻대로 하세요. 저는 주군의 보배라는 그 아가씨를 꽃처럼 아끼며 기다리도록 하죠.]

거울의 초점이 흐릿해지며 할리케의 모습이 사라졌다.

트론은 그와 동시에 주먹으로 거울을 내리쳤다. 엄청난 소리와 함께 유리 조각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왕자님!”

그 소리에 바깥에서 대기하던 가이가 바로 들어왔다.

그는 사용인을 불러 유리 조각을 치우게 지시하고, 마법으로 트론의 상처를 치료했다.

“……르터바이스 소백작.”

“네, 전하.”

“나는 며칠 더 자리를 비워야 할 것 같다. 대외적으로는 르터바이스 영지에 방문하는 것으로 해 둘 테니 뒷일은 부탁하겠다.”

“……엘피 님을 찾으러 가시는 거죠?”

“…….”

가이는 이번 일이 웰칸 연합과 얽혀 있으리라 짐작하고 더 자세한 것을 묻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그럼 말러 전하 쪽 일은 수하에게 맡기고, 제가 데니옴 왕궁으로 돌아가죠. 전하의 확인이 필요한 건 그때그때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래.”

가이는 트론의 주먹에 맺힌 피가 사라진 걸 확인하고 나서야 손을 떼었다.

트론은 바로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여장을 꾸리자마자 출발할 모양이었다.

“있죠, 전하.”

“…….”

“항상 드리는 말씀이지만, 전하께서 즐거운 일을 우선하도록 하세요. 음, 하지만 아마 왕자님은 엘피 님이 계시지 않는 한 즐거움이고 뭐고 의미가 없으려나요.”

가이가 손을 앞으로 뻗자 아나이테가 날아와서 그 위에 앉았다. 그가 전서구의 정수리를 쓰다듬는 것과 동시에, 아나이테의 목에 원래 없던 목걸이가 생겨났다.

“아나이테에게 크헤룬과 비슷한 기능을 추가했습니다. 솔직히 대단한 도움은 될 것 같지 않지만…… 그래도 유용하게 쓰세요.”

“알겠다.”

아나이테는 트론의 어깨에 내려앉아 뺨에 깃털을 비빈 후 공중으로 녹아들었다. 트론은 준비를 마치고 가이의 배웅을 받으며 호텔을 나섰다.

‘……엘피.’

그녀는 아직 무사하다. 사라진 것도 아니다.

짓눌릴 것 같은 불안함을 억지로 누르며, 그는 밤거리의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

엘피가 사먼을 따라 데이센느에서 심야 열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숲으로 둘러싸인 소도시였다.

열차를 타고 오는 새벽 내내 한숨도 이루지 못했지만, 엘피는 불평하지 않고 사먼의 뒤를 따랐다.

그곳에서 엘피는 움직이기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간단한 요기를 한 뒤 이지러진 달의 숲으로 출발했다.

두 사람이 깊은 숲을 한참 가로질러 웰칸의 본거지에 도착한 것은 느지막한 오후가 다 되어서였다.

바위 문이 열리고, 지하에 위치한 소도시가 그녀의 눈앞에 펼쳐졌다.

생각보다 커다란 그 도시를 보며 엘피는 전생에서 보았던 실내 유원지를 떠올렸다. 오밀조밀한 건물들과 신비로운 조명이 어딘지 비현실적이었다.

엘피가 안내받은 곳은 도시 중앙에 있는 큰 건물이었다. 감옥에 갇히는 것이 아닐까 걱정했지만, 뜻밖에 평범한 방이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엘피 님.”

사먼이 깊게 고개를 숙이며 다시 사과했다.

엘피는 대답 없이 그를 응시했다. 나름대로 길었던 믿음에 배신을 당한 것이었고, 자발적으로 걸어왔다고 해도 납치나 다름없었다.

모진 말로 그에게 화를 내는 것은 간단했지만, 그럴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래서 대신 질문했다.

“사먼은 명령 때문에 저를 이곳에 데려온 거였죠?”

“……네.”

“혼란스러워 보이는 건…… 그 명령을 납득하기 어려워서인가요?”

엘피의 지적에 사먼은 당황하며 시선을 피했다.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결국 명령을 실행한 건 저였는걸요. 더 원망하셔도 괜찮습니다.”

“…….”

“장로님의 의도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주군과 완전히 척을 지실 생각이 없는 이상, 엘피 님에게 해를 가하지는 않으실 겁니다. ……그럴 거예요.”

그 말은 정말로 확신한다기보다는 그래야만 한다는 자기 위안에 가까웠다.

하지만 사먼이 적극적으로 엘피에게 해를 끼치고 싶어서 이번 일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사먼을 원망하고 증오해도 될 일이었다. 자신보다는, 트론의 신뢰를 저버린 것이 실망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엘피는 감정에 치우치지 않기로 했다.

당장 중요한 사안은 이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럼 쉬고 계십시오. 저는 바깥에 있을 테니 필요할 때 부르시면 됩니다.”

“알겠어요.”

사먼이 나간 후 엘피는 아일란을 부르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마법을 차단해 둔 것인지 아일란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았다. 주술사의 도시지만, 협력하는 마법사가 존재하는 모양이었다.

그녀가 갇힌 방은 좁지 않고 침대나 가구들도 다 고급스러운 편이었지만 창문이 없었다. 그래서 이 방이 건물의 어디쯤 위치하는지 알 수 없었다.

건물 구조 자체도 미로 같아서, 여기에 올 때도 층수나 방향을 확인하기 어려웠다.

‘완전 예지의 힘은…….’

순간 완전 예지의 힘을 떠올렸지만 존재가 사라진다는 리스크가 있고, 갇혀 있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다.

아무리 지식이 있다 해도, 방문을 부수고 나갈 완력조차 없는데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 힘을 쓸 거라면 전후 상황을 더 고려하는 게 좋을 듯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이겠지.’

엘피는 결심하고 문으로 다가가 사먼을 불렀다.

“네, 엘피 님. 무슨 일이실까요?”

“혹시, 제가 그 장로님이라는 분을 뵐 수 있을까요?”

우선은 장로라는 자가 자신을 이곳에 데려온 목적을 알아야 대응할 수 있을 듯했다.

분위기로 봐서는 저쪽도 자신을 바로 죽이거나 해하려는 의도는 없어 보였다. 정해 준 숙소나 대하는 태도가 그랬다.

그렇다면 대화의 여지가 있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장로님께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부탁드려요.”

지금까지도 부족하지만 끝없이 노력해 왔다. 트론을 위한 일이라면 몸을 사리지 않았다.

엘피는 트론을 떠올리며 마음을 굳게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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