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연모와 소년기의 끝자락 (16)
가이와 연락을 마친 후, 엘피는 실이 끊어진 꼭두각시 인형처럼 풀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가이는 르터바이스의 전력을 들여서라도 트론의 안전을 확보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엘피를 안심시키려 했다.
그 배려가 느껴졌기에 엘피도 연락하는 도중에는 우는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러나 연락이 끊어지자마자 엘피를 지배하는 것은 공포였다.
“엘피. 너는 살아 줘. 내가 그걸…….”
회귀한 후 많은 시간이 흘렀기에 과거의 상처가 희석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 그가 죽음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역시, 루베인의 죽음만 피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이 행사를 중지하자고 억지라도 부릴 걸 그랬다.
변경백의 병환보다 왕자님의 안전이 중요하다고, 그런 못된 소리를 대놓고 하며 악을 쓸 걸 그랬다.
“……흑.”
르터바이스 본저에서 트론이 쓰던 집무실은 조용했다. 엘피가 우는 소리가 더 크게 울렸다.
그녀의 눈물이 뚝뚝 흘러내려 바닥의 카펫을 적셨다.
‘대체, 무슨 소용이야. 라이샤라는 게 다 무슨 소용이야.’
엘피는 원망하듯 카펫을 움켜쥐었다. 터져 나오는 오열을 삼키려 노력했다.
“제발, 왕자님을 살려 주세요. 신님. 믿고 섬기지 않은 거, 사과드릴 테니까…… 매일 기도라도 할 테니까……. 만약 정말로 듣고 계신다면.”
지리멸렬한 말을 입에 담으며 한없이 울었다.
“……제 소원을 들어주세요. 절대로 전하를 죽게 만들 수는 없어요.”
그 순간, 엘피의 눈앞이 까맣게 물들었다.
***
트론은 끈질기게 마수를 따돌리며 협곡의 입구를 향해 이동하려 했다. 그러나 점차 늘어나는 마수들이 길을 막아 의도대로 움직이기는 쉽지 않았다.
‘마수 소환 주술식을 새겨 놓은 위치만 파악해서 주술을 풀면 그만인데.’
그러나 이 넓은 협곡에서 주술식의 위치를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트론은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을 하면서도 쉬지 않고 달렸다.
일단 이번 일이 헤럴드의 짓은 아닐 것 같았다.
애초에 이 정도 수준의 주술을 구사할 수 있는 인재가 있다면, 지금까지 그렇게 어설픈 암살 시도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짐작이 가는 것은 마그달리사 공작 정도지만, 겨우 혼담을 거절당한 앙갚음으로 이렇게 비효율적인 짓을 저지를 인물은 아니었다.
만에 하나 마그달리사 공작이 관련되어 있다고 해도, 배후가 있을 가능성이 컸다.
‘렌포우 솔피시언……? 형님들을 데리고 본격적으로 움직일 셈인가.’
그러나 지금 그런 생각을 해도 의미는 없었다. 중요한 것은 당장의 상황을 헤쳐 나가는 것이었다.
“아나이테. 역시 소백작의 대답은 없나?”
아나이테는 꾸륵 소리를 내며 마치 미안하다는 듯 트론의 머리 위를 빙빙 날았다.
“아니, 소용없는 걸 확인했다면 됐다. 그럼 돌파하면 그뿐이지.”
트론은 각오하고 손가락을 뻗었다. 이제부터 대규모 주술을 사용할 셈이었다.
어느 정도 수명을 바쳐야겠지만 여기서 이렇게 죽는 것보다는 나았다.
‘……엘피가 알면, 화내려나.’
그녀가 자신을 향해 눈물을 글썽이며 화내는 표정이 저절로 그려졌다. 심각한 상황인데도, 그녀를 떠올리니 어쩐지 옅게 웃음이 나왔다.
그 얼굴을 다시 보기 위해서라도 돌파는 불가피했다.
붉은빛의 주술식을 그려 가며 트론은 요령 좋게 검을 휘둘렀다. 마수들의 공격을 피하는 와중에도 정확하게 공중에 문양을 새겨갔다.
거의 주술식이 완성되려는 찰나, 갑자기 커다란 소리가 들렸다.
“왕자님! 그거 하지 마세요!”
“……어?”
트론은 귀에 들려온 목소리를 믿을 수 없어서 고개를 돌렸다.
푸른 눈에 가득 눈물을 머금은, 그의 라이샤가 그곳에 있었다.
반투명하여 마치 유령과 같은 모습으로.
***
엘피는 자신이 새카만 공간 안에 있다는 것을 자각했다. 방금까지 있었던 집무실이 아니었다. 사방이 까매서 아무것도 인지할 수 없는 공간이었다.
‘……꿈?’
저도 모르게 두 손을 꼭 쥐었다. 울다가 정신이라도 잃은 것일까. 엘피는 입술을 깨물었다.
“전하를, 도와야 해. 위험하시다면 살려야 해. 이럴 때가 아니야.”
예지몽은 언제나 꿈을 자각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어쩌면 이 꿈도 도움이 되는 것을 가르쳐 줄지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갑자기 머릿속이 맑아졌다. 동시에, 마치 해일이라도 밀려오는 것처럼 엄청난 정보들이 휘몰아쳤다.
“뭐, 뭐지?”
엘피는 당황하여 머리를 쥐었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각이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찰나부터 영원까지, 모든 것을 깨달은 것 같은 고양감이었다.
‘……모르, 겠어. 그렇지만 알겠어. 전하를 살리기 위해서 무얼 해야 하는지.’
소설의 내용이 떠올랐다. 제시드가 마지막으로 루베인을 위해 쓰고 사라졌던 힘.
‘완전 예지’의 힘이었다.
그걸 깨닫는 동시에, 사방에 흰빛이 쏟아져 내렸다. 눈이 부셔서 눈을 질끈 감았다 떴을 때, 주변은 낯선 숲이었다.
“아……!”
저 멀리 트론이 보였다. 엘피는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허우적거리듯 그곳을 향해 달려갔다. 날아갔다고 하는 것이 정확할지도 모른다. 그녀는 마치 유령처럼 반투명한 상태로 둥둥 떠 있었으니까.
엘피는 그저 정신없이 트론에게 향했다. 완전 예지의 힘으로 지금 이 상황에서 트론을 구할 방법을 알고 있었다.
또한, 지금 트론이 공중에 새기고 있는 주술식이 수명을 담보로 한다는 것도.
그렇다면 그녀가 해야 할 일은 하나뿐이었다.
“왕자님! 그거 하지 마세요!”
“……어?”
트론이 당황한 얼굴로 자신을 돌아보았다. 엘피는 필사적으로 외쳤다.
“마수 소환 주술을 풀고 싶으신 거죠?”
“어떻게 그것을…….”
“주술식은 전하께서 마지막으로 꿀벌 모양 마수를 쓰러뜨렸던 곳에서, 샛길로 조금만 더 올라가면 있어요. 붉은 바위 뒤요!”
“그것보다, 지금 그대의 모습은……?”
“설명은 나중에요! 얼른 가요!”
엘피가 일갈하자, 트론은 바로 냉정을 되찾고 끄덕였다. 그 후 망설이지 않고 엘피가 설명한 바위가 있는 위치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엘피 역시 그를 따라 날아갔다.
이동 중 몇 마리의 마수를 만났으나 트론은 가볍게 치명상을 남겨 쫓아오지 못하게 막았다. 10분 정도 달린 끝에 목적지인 바위에 도착했다.
“저 바위인가?”
“맞아요, 왕자님!”
샛길로 기어 올라가자, 탁 트인 공간이 나왔다. 그곳에는 보기 드문 커다란 달물결 꽃이 무리를 지어 흔들리고 있었다.
트론은 바로 주술식의 흔적을 찾아냈다. 엘피의 말대로 근처에서 육안으로 주술식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마수 소환 주술을 해제하기 시작했다.
엘피는 초조한 마음으로 그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마치 전지전능한 것처럼 자신의 머릿속을 채우고 있던 지식이 빠져나가는 감각을 느꼈다.
‘……아, 힘을 다 썼나 보다.’
그래도 역할을 다 했으니 괜찮다. 그렇게 안도하며 숨을 내쉬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트론은 해제 주술식을 완성했다.
“멸하라.”
트론이 짧게 외치자, 주변이 고요해졌다. 사방에서 부스럭대던 마수의 소리가 일시에 사라졌다. 들려오는 것은 계곡의 물소리와 나무를 스치는 바람 소리뿐이었다.
“엘피, 이제 설명을…….”
질문을 하려던 트론은 뒤를 돌아보자마자 놀란 얼굴을 했다.
“……엘피? 어디 갔지?”
그의 눈은 그 무엇도 비추지 않고 있었다.
***
“저, 전하? 저는 여기 있는데요?”
트론의 반응에 엘피는 당황했다. 그에게 바짝 다가갔지만, 자신이 보이지 않는 듯했다.
‘……정말로, 유령 같은 상태가 된 거야?’
엘피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까는 반투명한 자신의 몸이 보였지만, 지금은 ‘몸’이라고 부를 만한 부분이 보이지 않았다. 말 그대로 투명인간이었다.
소름이 돋는 감각을 느끼며, 소설의 내용을 떠올렸다. 제시드는 6년간 존재가 사라졌다.
‘설마, 존재가 사라진다는 게 이런 거였던 거야?’
그렇다면 제시드는 6년이라는 긴 세월을 이렇게 끔찍한 상태로 살아왔던 것일까. 존재하지만 아무도 자신을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로.
상상만으로도 무서웠다.
‘……그리고 어쩌면 나도?’
엘피가 혼란스러움을 느끼는 것보다 더, 트론 쪽이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는 주변을 샅샅이 뒤지며 엘피가 어디 있는지 찾는 듯했다.
“엘피…….”
그 목소리는 사람의 이름을 부른다기에는 끔찍한 비통에 차 있었다.
“전하, 저는 여기 있어요.”
그렇게 반복해서 말했지만 전해지지 않았다. 그는 엘피를 인지하지 못하고 주변을 헤매고만 있었다.
언제나 모든 일에 냉철하고 침착한 트론이 이런 얼굴을 하는 것은 엘피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이제는 완전히 성인이 된 트론의 얼굴에서, 마치 미아가 된 아이와 같은 절실함이 느껴졌다.
그가 자신 때문에 괴로워하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자신은 트론에게 누나와 같은 존재다. 마음씨 다정한 그는, 엘피가 사라지면 분명히 가슴 아파할 것이다.
‘역시, 라이샤의 힘을 과하게 쓰면 존재가 사라지는 게 맞았구나.’
가설을 확인해도 기쁘지 않았다. 지금 당장 트론의 불안함을 덜어 내 주고 싶었다.
이윽고, 트론의 얼굴에서 완전히 표정이 사라졌다.
“……아냐. 엘피는 라이샤니까. 무언가 힘을 써서 잠깐 나한테 찾아왔다가 돌아간 거겠지.”
확신한다기보다는, 그렇기를 바라는 희망 사항에 가까운 말이었다. 트론은 냉정을 되찾으려 노력하며 달물결 꽃을 챙겼다. 협곡 입구로 돌아가려는 모양이었다.
그 뒷모습이 쓸쓸하여, 엘피의 가슴까지 조여드는 듯했다.
‘나는 언제까지 이런 상태인 걸까?’
그 순간, 다시 새하얀 빛이 온몸을 감쌌다. 엘피는 눈을 질끈 감으며 그 빛을 피했다.
길고도 짧은 시간이 지나갔다.
정신을 차려 보니, 자신이 서 있는 곳은 르터바이스 본저의 집무실이었다.
“아……! 돌아…… 온 거야?”
서둘러 자신의 몸부터 확인했다. 투명하지도, 반투명하지도 않았다. 멀쩡하게 현실에 존재했다.
“다행이야…….”
저도 모르게 맥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정말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사건이었다. 자신이 이럴 정도인데, 눈앞에서 엘피가 사라지는 것을 직접 목격한 트론은 얼마나 불안했을까.
“아, 그래. 이럴 때가 아니야. 왕자님!”
엘피는 바로 트론을 떠올렸다. 자신이 무사하다는 걸 가르쳐 줘서 안심시키고 싶지만, 아나이테로는 연락이 통하지 않는 상태다. 가이에게라도 말을 전해 놓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아일란을 부르며, 엘피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다른 무엇보다 트론이 무사해서 다행이었다. 이제야 겨우 그 실감을 하며 한숨을 돌렸다.
***
“……엘피!”
몇 시간 후, 트론이 집무실로 달려왔다. 그리고 엘피를 보자마자 으스러뜨릴 기세로 꽉 안았다.
“와, 왕자님……. 숨 막혀요.”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죄송해요. 그게, 가이 님을 통해서도 설명했지만. 라이샤의 힘이었어요!”
트론이 걱정할 게 뻔했기에, 힘을 쓴 패널티로 존재가 사라진 것이라느니 하는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중요한 건 트론이 무사한 것이었다.
“다시는 사람 심장 떨어지게 하지 마.”
“……네. 안 그럴게요. 그것보다, 전하께서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꽉 껴안은 몸으로 트론의 심장 소리가 전해졌다. 귓가를 간질이는 그의 숨결이 느껴졌다. 그걸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족했다.
자신이 겪은 일들을 소화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던 엘피는, 트론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