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연모와 소년기의 끝자락 (15)
트론은 합류 지점을 향해 뛰어가면서 위화감을 느꼈다. 사전에 들었던 것보다 지나치게 마수들의 숫자가 많았다.
체력을 낭비하지 않도록 치명상만 남기고 계속 도망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상정한 범위를 넘어섰다.
‘……사먼도 걱정되는군. 합류 지점까지 무사히 도망쳤을까.’
그러나 잠시의 고민도 사치였다. 사마귀와 닮은 마수가 톱날 같은 날카로운 팔로 그를 후려치려 했다.
트론은 신경질적으로 검기를 흩뿌려 마수의 팔을 잘라 낸 다음 나무 위로 올라섰다. 그러자 이번에는 나무 그늘에서 나타난 마수가 그를 덮쳤다.
트론은 혀를 차며 아슬아슬한 간격으로 마수와 거리를 벌리고 주술식을 그려 냈다. 주술식이 완성되자 몸이 굳어 버린 마수가 나무 아래로 떨어졌다.
뒤를 보지 않고 달려가며 트론은 낮은 목소리로 전서구를 불렀다.
“아나이테.”
루베인 건이 있기에 가이도 마수들의 상태를 살폈을 것이다. 그라면 지금의 이상 사태를 파악하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그렇게 생각하여 아나이테를 통해 가이를 호출했으나, 답변이 없었다.
“……소백작. 바쁜가?”
“…….”
아나이테는 굳게 입을 다문 채 트론의 주위를 날아다닐 따름이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트론은 우선 오늘은 달물결 꽃을 따는 것을 포기하고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이대로 무모하게 움직여 봤자 리스크가 컸다.
그 순간, 쿠르릉 소리가 산기슭을 울리기 시작했다. 소리가 나는 방향을 바라보았다가 트론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마수 소환 주술.”
수십, 어쩌면 백 마리에도 이를 각종 마수가 협곡 위에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
엘피는 루베인이 아침을 나눠 주겠다고 하는 것을 사양하고 그녀와 마주 앉아 가볍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루베인이 식사를 거의 다 비웠을 무렵, 그녀의 방으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엘피는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열쇠로 문을 여는 소리가 이어졌다.
루베인은 엘피를 향해 눈짓하여 안심시킨 후 방문을 여는 이에게 물었다.
“……누구세요?”
“나다, 루베인.”
“각하?”
엘피는 찔끔하여 방구석으로 물러나 고개를 푹 숙였다. 상전이 식사를 마칠 때까지 대기하는 하녀의 모양새였다.
공작이 언뜻 자신의 얼굴을 알아볼지도 모르니 감추려는 의미도 있었다.
마그달리사 공작은 보좌관과 함께 방으로 들어왔다.
“아직 몸단장도 마치지 않았는데요, 각하. 바로 마수 토벌 행사장으로 가나요?”
“아니. 마수 토벌 행사가 취소되었다고 연락이 왔다. 사고가 생겼다는군.”
엘피는 가슴이 선뜩해졌다. 계속 느끼던 불길한 예감이 맞아떨어진 것만 같았다.
‘서, 설마 전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 아니겠지?’
엘피의 걱정을 대변하는 것처럼 루베인이 물었다.
“사고라니……. 트론 전하도 참석하시잖아요. 괜찮으시대요?”
“자세한 건 모르겠구나, 마법 전보로 급하게 받은 소식이라. 우리는 떠날 채비를 하자.”
루베인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어차피 행사가 중지되었으니 후야제 파티도 취소되겠지. 굳이 이곳에 더 머무를 이유가 없다. 르터바이스 측에는 서신으로 위로의 뜻을 남기고 갈까 한다.”
“……그렇, 군요.”
루베인의 표정이 어두운 것을 보고 공작이 미간을 찌푸렸다.
“오히려 네가 원하는 것 아니었나? 너를 상품으로 걸지 말라느니 존중해 달라느니 하지 않았더냐.”
“그건 그렇지만……. 전하의 안부가 걱정되잖아요.”
“전하에게 연정이라도 품은 게냐. 철없는 짓을.”
“전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친구로서입니다.”
“트론 스레데니옴에게 관심을 끊어. 이제 그 패는 버릴 때다. ……루베인 너에게는 마땅한 영광의 자리를 반드시 마련할 테니까.”
“……?”
“됐다. 말이 길었군. 곧 하녀들을 보낼 테니 돌아갈 채비를 하려무나.”
그 말을 남기고 마그달리사 공작은 방을 나섰다.
“대체 뭐가 뭔지……. 아, 언니!”
루베인은 방구석에서 힘을 잃고 주르륵 주저앉은 엘피를 향해 달려갔다.
“저, 전하라면 괜찮을 거야! 아직 무슨 일인지도 모르는데 벌써 그렇게 기운 잃으면 어떡해!”
“루베인…….”
“우선 르터바이스 본저로 돌아가서, 가이 님한테 연락해! 나는 각하를 따라 돌아가야 해서 도울 수 있는 게 없지만……. 별일 없기를 기도할 테니까!”
“……응. 가이 님도 계시는걸. 괜찮을 거야.”
엘피는 스스로를 달래듯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식기를 챙겨 왜건에 올리고 방문을 열었다.
“루베인. 마그달리사 공은 우리 전하와 척을 지기로 결심하신 것 같아.”
“어……? 아까 각하가 하신 말씀 뭔가 아는 거야?”
“그냥 짐작 정도지만. 그래도 루베인…… 나는 계속 너와 같은 편이고 싶어.”
“나도 그래! 나야말로 끝까지 트론 전하를 돕고 싶어.”
“고마워. 전하께서도 기뻐할 거야.”
엘피는 불안 때문에 벌렁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듯 일부러 침착한 목소리를 냈다.
“그럼, 다음에 보자. 하븐까지 조심해서 돌아가.”
“응, 언니도.”
루베인에게 인사를 건넨 후 엘피는 종종걸음으로 방을 빠져나갔다.
트론의 안위에 대한 걱정이 가슴 속을 꽉 채워 터질 것만 같았다.
***
“서두르세요. 왕자님의 안전 확보가 최우선입니다!”
가이가 수하들을 향해 명령했다. 실시간으로 협곡의 상황을 파악하던 와중, 이상이 감지되었다. 원래 이 협곡에서 살지 않을 마수들이 나타났고, 일부 부상자까지 나왔다.
아나이테를 이용하여 트론에게 연락하려 했으나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마법 방해가 들어간 것으로 짐작되었으나 추적이 불가능했다.
가이는 마그달리사 공작이 있는 호텔로 마법 전보를 보내려 했을 때 방해가 들어왔던 일을 떠올렸다.
그때와 같이 교묘한 솜씨였다. 이런 실력자가 흔할 리는 없으니, 단순히 우연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증거를 잡기 어려운 이상 추궁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당장 중요한 것은 트론이 어디 있는지 확인해서 보호하는 것이었다.
가이는 이 사태를 긴급 상황이라 규정하고 바로 행사를 중지하는 한편, 수하들에게 할 일을 지시했다.
마법 전보를 통해 올페마 쪽에서도 만일에 대비하여 태세를 갖추도록 전했다.
마음 같아서는 가이 본인이 협곡으로 들어가 트론을 찾고 싶었지만, 비상사태의 사령탑으로서 할 일을 망각하지는 않았다.
‘이번 일은 크게 갚아야 할 겁니다, 마그달리사 공작.’
가이는 칼을 가는 심정으로 바쁘게 상황을 통솔했다.
급박하게 주변을 살피는 와중, 병사가 부상자를 공터로 날라 오는 것이 보였다. 그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가이는 그쪽으로 달려갔다.
“사먼!”
사먼의 몸 상태는 엉망이었다. 마수의 독 때문에 다리 일부가 마비되기 시작하여 우선 급하게 응급처치를 진행했다.
“윽, 소백작님. 면목이 없습니다……. 제가 더 힘이 있었다면…….”
“잘잘못을 따지는 건 나중으로 미룹시다. 어떻게 된 거죠? 왕자님은요?”
가이가 주변에 사람을 물리고 물어보자, 사먼이 마수 무리 때문에 트론과 마지막으로 헤어졌던 상황을 설명했다.
사먼은 원래 목적대로 그 마수들을 따돌리는 것에는 성공했으나, 엄청난 수의 마수들과 맞닥뜨리게 되었다고 한다.
트론이 걱정되었던 사먼은 마수들과의 전면전을 무릅쓰고 트론이 이동한 방향으로 가려고 했다. 그러나 점차 자잘한 부상이 더해지고 주술로 생명력을 갉아먹으며 버티기 어렵게 되었다.
남은 힘으로 이 상황을 전하고 구원을 요청하기 위해 산기슭까지 내려왔다가 힘을 다해 쓰러졌다는 모양이다. 다행히 가이가 보낸 구조 요원들이 금세 그를 발견했다고 한다.
“……그랬군요. 천하의 사먼이 이럴 정도면, 왕자님도 안심할 상황은 아니겠네요.”
“정말 죄송합니다.”
“아뇨, 우울해하는 것도 나중으로 미루죠. 혹시 원인으로 짐작되는 상황 있나요?”
“있긴 합니다만……. 그게 맞는지 조금 믿기가 어렵습니다.”
“……?”
“이렇게 대량의 마수를 한곳에 몰아넣는 방법은 한 가지입니다. 주술을 이용한 마수 소환이죠.”
가이는 안경을 고쳐 썼다. 그러고 보면 어렴풋이 데니옴 왕궁에 외부 침입자를 막기 위해 특정 조건이 발동되면 마수를 소환하는 함정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던 것도 같았다.
그렇다면 충분히 가능성을 생각할 법한데, 어째서 믿기 어렵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왕궁 같은 데서도 쓰는 주술 아닌가요? 그럼 불가능하지는 않을 텐데요.”
“마법은 만능이 아니지요. 주술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술은 대가를 요구합니다. 특히 살생이나 이런 대규모의 주술이라면 더더욱이요.”
“네, 피나 머리카락이라고 했던가요……?”
“그건 주술사에 대한 오해입니다. 그렇게 단순한 조건으로는 주술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머리카락 정도로 할 수 있는 건 암시를 거는 것에 불과하죠. ……주술만을 이용해 사람을 완벽하게 죽이기 위해서는 수명을 깎을 정도의 생명력을 걸 각오를 해야 합니다.”
“…….”
가이는 잠시 침묵했다. 트론이 과거에 자신의 부친에게 걸려고 했던 주술이 어떤 각오 위에 성립된 것인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저 대규모 마수 소환 주술은 그만큼 큰 조건이 필요하다는 거죠?”
“네. 단번에 저 정도 규모라면 주술사 한두 사람의 목숨을 거는 정도로는 부족합니다. 한 마리 한 마리씩 부르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한꺼번에 부르는 거라면 간단한 주술식도 아니고요.”
“……그렇군요. 이상하네요.”
주술사는 고급 인력이었다. 또한, 숫자가 적기도 했다.
만약 이 일이 마그달리사 공작이 획책한 일이라고 하면 더욱 이해되지 않았다. 마그달리사 공작이라면 더 확실한 방식으로 이쪽의 뒤통수를 칠 것이다.
‘마수를 소환하여 트론이 위험에 빠질지도 모르지만, 100% 죽으리라고 확신할 수는 없는 방법’을 위해 귀중한 인력을 낭비할 리가 없다.
하지만 이에 대한 고민은 트론을 구출하고 난 뒤의 문제였다.
가이는 사먼의 상태를 살피도록 수하에게 지시하고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그때, 연분홍색의 둥그런 빛이 떠오르며 비둘기 울음소리를 냈다. 아일란이 보내는 신호였다.
“……엘피 님?”
[가이 님! 전하는 괜찮으시죠? 아일란으로 전하에게 말을 걸어도 답변이 없으셔서……!]
“…….”
가이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엘피에게 빠르게도 이쪽의 난리가 전해진 모양이었다.
“괜찮습니다. 걱정하실 건 없어요. 루베인 님은요?”
[행사가 중지되었다고, 마그달리사 공작님이 루베인을 데리고 하븐으로 돌아가신다는 것 같았어요.]
“……그렇습니까.”
마그달리사 공작은 이 난장판을 만들어 두고 바로 발을 뺄 모양이었다. 증거를 잡지 못하는 것이 천추의 한이었다.
속으로 분을 삭이며 가이는 여느 때와 같이 느긋한 목소리를 내려 노력했다.
“아무튼, 이쪽 일은 걱정하지 마시고 계세요. 제가 지금 좀 바빠서요. 정리되는 대로 연락 다시 드리겠습니다.”
[전하께 무슨 일 있는 거죠!]
연락을 끊기 직전, 엘피가 필사적으로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말로 왕자님이 무사하다면, 가이 님이 그런 식으로 말씀 안 하시는 거 알아요. 가르쳐 주세요! 전하께 무슨 일이 있으면 저한테 다 말씀해 주시기로 했잖아요……!]
트론에 관한 일이라면 남들보다 몇 배는 민감한 그녀였다. 쉽게 속여 넘길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가이는 단념하고 엘피에게 사실을 전하기로 했다.
“침착하고 들어주세요.”
어딘지 날카롭게 들리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가이가 고했다.
“현재 협곡에 대량의 마수가 들끓고 있습니다. 정확한 원인은 불명이고요. 마수 소환 주술이라고 짐작 정도만 하고 있습니다.”
엘피가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이는 각오하고 다음 말을 입에 담았다.
“또한, 전하의 현재 위치도 불명입니다. 최선을 다해 찾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