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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님, 악당 길만 걸어요!-59화 (59/132)

59화. 연모와 소년기의 끝자락 (5)

아직 초봄인 르터바이스 저택의 정원은 앙상한 가지에 연두색 이파리가 한둘 보이는 정도였다.

엘피는 새순이 난 가지를 골라 꺾어, 자그마한 유리잔에 꽂아 변경백의 방에 가져갔다.

“오랜만이오, 이나드 영애.”

“직접 뵙는 건 오랜만입니다, 변경백 각하.”

“보내 주는 편지는 항상 즐겁게 읽고 있소. 하지만 역시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제일 좋지요.”

“네, 정말요.”

엘피가 자신에게 보이도록 푸른 싹이 난 가지를 내려놓는 것을 보고, 밀리엔은 미소 지었다.

“어느새 봄이군요.”

“아직 푸른색이 조금씩 돋아나기 시작한 정도지만요. 각하께서 쾌차하실 때쯤에는 온 세상이 푸르러져 있을 거예요.”

“후후, 고맙소. 영애도 전하와 비슷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엘피가 외출한 사이에 트론이 밀리엔의 몸 상태를 확인할 겸 먼저 이곳에 들른 모양이었다.

“저는 의학에 무지한 사람이라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부군과 왕자님이 힘쓰셔서 곧 각하의 병을 낫게 해 주신다 들었습니다. 그 두 분이 하시는 일이니 틀림없겠지요. 쾌차하시면 꼭 저랑도 산책해 주세요.”

“산책뿐이겠소이까. 시커먼 아들밖에 없었던 몸이니, 영애를 꾸며 줄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즐겁습니다. 물론 꾸미지 않아도 이나드 영애는 무척 아름답지만 말이오.”

“아이참, 왜 각하까지 가이 님 같은 농담을 하세요.”

“가이 녀석도 농담은 아닐 겁니다.”

정말 이런 부분은 한결같은 모자였다. 그녀는 쑥스러운 마음에 화제를 돌렸다.

“실은 선물이 이게 다는 아니에요. 예쁜 오르골을 가져왔습니다. 나중에 멜로디를 들어 보세요.”

“영애의 마음 씀씀이에 항상 감사할 따름이오. 처음 뵈었을 때도 얼굴만큼 마음도 고운 영애라고 생각했지만요.”

“그만 놀리세요, 각하.”

“진담이랍니다. 물론, 처음 만났을 때보다 영애는 무척 성숙해졌지만 말이오.”

“벌써 3년이나 흘렀으니까요.”

“긴 세월이지요. 특히, 전하께서 무척 장성하셔서 놀랐습니다. 그때 왕자님은 어린아이였는데 말입니다.”

“정말 그렇죠. 하루하루 키가 크는 게 느껴질 정도라니까요.”

엘피는 마치 자신이 칭찬을 받은 양 뿌듯하게 맞장구쳤다.

“앞으로도 더 쑥쑥 크실 것 같아요. 어릴 때는 입도 짧으시고 잠도 잘 주무시지 않아서 건강 걱정 많이 했는데……. 이제 잔병치레도 안 하세요.”

“다 영애가 왕자님을 보살핀 덕이지요.”

“과…… 과분한 말씀입니다.”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엘피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늙은이의 감이라고 웃어넘겨도 됩니다만, 어쩐지 그런 확신이 들거든요. 영애가 없었으면 전하는 지금과 사뭇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라고.”

“…….”

엘피는 저도 모르게 침묵했다. 밀리엔의 말은 정곡을 관통하고 있었다. 소설에서 악당이 되었던 트론을 떠올리니 조금 우울해졌다.

“예전에 바실리를 만났을 때의 일입니다만.”

그녀가 자신의 남편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엘피는 조금 놀라며 끄덕였다.

“처음에는 이런 괴짜에게 사랑은커녕 호감을 가지는 것조차 불가능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소. 이미 결혼한 마당이니 어쩔 수 없다고도 생각했지요. 하지만 그는 변했고, 저 또한 변했습니다.”

“…….”

“하다못해 가이즈카 녀석도 조금 변했으니까요. 저는 그 모든 것이 즐겁습니다. 그러니 모쪼록, 영애는 계속 전하 곁에 있어 주세요.”

“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전하께서 원하시는 한, 절대로 떨어지지 않을 거예요.”

“후후. 그 말을 들으니 안심이 되는군요.”

밀리엔은 양해를 구하고 다시 자리에 누웠다. 그녀는 엘피의 손을 꼭 쥐며 어딘지 당부하듯 말했다.

“사람은 꼭 긍정적으로 변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래도…… 처음의 각오를 잊지 마세요. 영애가 목숨을 걸고 처음으로 왕자님을 이곳까지 모셔 왔던 그때의 각오를요.”

“네,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오랜만의 대화가 즐거웠지만 피곤했던지, 밀리엔은 눈을 감으며 잠에 빠지는 모양이었다. 엘피는 주름이 잡힌 밀리엔의 손을 쓰다듬다가 살며시 떼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한 말은 라이샤였던 제시드가 했던 말과도 같았다.

처음의 그 마음을 잊지 않을 것.

엘피는 끄덕이며 주먹을 꾹 쥐었다. 겨우 반나절 정도 떨어져 있었던 것뿐인데, 새삼스레 무척 트론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

르터바이스 저택의 정원에 오후의 햇살이 내려앉았다. 해가 잘 들어 따스한 양지에 야외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두 명의 청년이 앉아 있었다.

정확히는 트론과 남장을 한 루베인이었다.

“이쪽이 저번에 말한 자료고, 노란색 서류첩에 든 게 지금 검토해 줬으면 하는 안건이야. 전하.”

트론은 지긋지긋하다는 얼굴로 성의 없이 그녀가 내민 서류첩을 집어 들었다.

“왜 올페마까지 와서 그대와 일 이야기를 해야 하는 거지?”

“그건 내가 할 말인데. 전하야말로 바쁠 텐데 왜 데니옴에서 올페마까지 온 거야?”

“반대로 내가 묻고 싶다. 그대의 부친은 무슨 꿍꿍이인가?”

“몰라, 나도 괜히 끌려와서 짜증 나. 전하가 직접 물어보든지.”

루베인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녀의 말로 미루어 보자면, 루베인 역시 마그달리사 공작에게 특별히 언질을 듣지 못하고 여기까지 온 모양이었다.

“또 도망쳐 온 모양이라고 들었는데. 바로 안 들어가도 괜찮나?”

“아직 각하 도착 안 하셨어. 들키면 그때 혼나지 뭐. 그러니까 그거나 빨리 봐줘. 마무리하고 가져가게.”

몇몇 문서는 그렇게까지 중요한 내용은 아니었지만, 루베인이 강조한 것은 일부 예산 증액을 요구하는 안건이었다.

찬찬히 서류를 읽던 트론은 턱을 괴었다.

“……심리 치료라.”

“응. 나도 가능하면 자주 가서 이야기도 걸고 이것저것 해 주려고 하지만 아무래도 한계가 있어서.”

서류에 쓰여 있는 것은 고아원에서 맡고 있는 원아 중 특별히 보살핌이 필요한 아이들의 자세한 기록이었다.

고아가 되는 원인은 천차만별이지만, 어느 정도 나이가 든 상태에서 고아가 된 아이일수록 깊은 마음의 상처를 입는 사건을 겪은 경우가 많았다.

“특히, 거기 마우라는 여자아이 말인데……. 밤에 거의 잠을 못 이룬대. 계속 괴로운 걸 혼자 끌어안고 있는 것 아닌가 싶어.”

“…….”

트론은 눈을 내리깔았다. 서류에 쓰여 있는 정황만으로도 그녀가 당한 학대는 쉽게 짐작이 갔다. 보호해 줄 부모가 사라지자마자, 양친이 일하던 귀족가의 도련님에게 몹쓸 짓을 당한 모양이었다.

다만 그녀는 끝까지 그 가문의 이름은 입에 담지 않았다.

“법이 귀족에게 유리하기는 해도, 내가 어떻게든 끝까지 도와줄 테니 말해 달라고 했는데 마음을 열어 주지 않더라고.”

“그야, 법정에서 이기기 어려울 테니까.”

“그렇긴 하지……. 윗전의 명령을 거부했다가 강제로 관계한 경우에만 처벌이 가능하다니 말이 돼? 자기 목숨줄이랑 돈줄을 쥐고 있는 놈이 명령하는데 거부할 사람이 몇이나 있다고.”

말하면서 감정이 격해진 것인지 루베인은 씨근대며 목청을 올렸다.

“……이런 식으로 권력을 이용해 폭력을 가하는 건 흔하다면 흔한 일이지.”

“감상이 겨우 그거야?”

“당장 나 역시 그런 폭력의 결과물로 태어난 자 아닌가.”

루베인이 잠시 찔끔하더니 미안하다는 듯한 얼굴을 했다. 트론은 그녀의 반응에 신경 쓰지 않으며 서류첩을 돌려주었다.

“아무튼, 예산 건은 승인하겠다. 하지만 이대로는 임시방편밖에 되지 않아. 근원적으로 법을 뜯어고치지 않는 한 비슷한 일은 반복될 거다.”

“응, 그건 나도 알아. 그 부분은 전하를 믿고 있어.”

“글쎄, 10년 안으로 통과 가능한 안건일까 싶은데. 귀족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제한받는 것을 가장 끔찍하게 생각하니까.”

그는 여느 때처럼 냉정하게 반응했다.

“그래도 알아줄 사람은 알아줄 거야. 전하가 노력한 만큼 기뻐할 사람도 있단 거지.”

“정치에 있어서 선의가 돌아올 거라 기대하는 마음은 위험하다.”

“어째서?”

“선의가 돌아오지 않을 가능성이 크니까. 또한, 보답받을 생각으로 행하는 정치만큼 휘둘리기 쉬운 것도 없지.”

“……으음, 어렵네.”

“정치 강의는 됐으니 이만 돌아가도록 해. 나중에 공작이 펄펄 뛰며 르터바이스 본저까지 달려올 일을 만들지는 마. 수하들이 그대를 찾고 있을 것 아닌가.”

“칫. 네에.”

트론은 언제나 퉁명스럽고 감정 없이 말하지만, 루베인은 그를 돕기로 결정한 것은 역시 잘한 일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슬픈 일에 함께 울어 주지는 않더라도, 앞으로 눈물 흘릴 일을 없애기 위해 어떤 걸 해야 할지 계획하는 사람이었으니까.

루베인은 가방에 서류들을 대충 처박다가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그러고 보니, 전하도 이번 행사 기념 파티 참석하지?”

“아마도.”

“엘피 언니는?”

“글쎄, 본인이 계속 사양해서.”

“그러지 마! 데려가! 같이 춤 춰!”

“……본인이 싫다면 강요할 생각은 없다.”

트론의 대답에 루베인은 답답해서 가슴을 쥐어뜯고 싶어졌다.

“언니도 실은 참석하고 싶을 거야! 전하를 생각해서 사양하고 있는 거지! 그러니까 잔뜩 꾸며 준 다음에 꼭 춤춰 주기다?”

그는 뜻밖의 말을 들었다는 듯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루베인은 에휴, 하고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신하의 마음을 잘 헤아려 주는 것도 주군이 할 일이라고. 알았지?”

트론은 그녀가 대체 왜 그렇게 힘을 주어 강조하는지 알 수 없었으나, 얼떨결에 끄덕였다. 그제야 루베인은 만족한 얼굴을 했다.

“슬슬 돌아가 볼까 하는데, 전하는?”

“난 잠시 처리할 일이 있으니 그대 먼저 가도록 해.”

밖에 나온 김에 사먼에게 지시를 내려야겠다고 생각하며 트론이 대답했다.

“그럼 나, 언니랑 소백작님한테 인사만 하고 돌아갈게. 나중에 봐.”

“알았다.”

그녀는 바로 저택 쪽으로 달려갔다.

루베인이 남긴 말 때문인지, 트론은 바로 엘피가 드레스를 차려입은 모습을 떠올렸다.

금발을 눈부시게 늘어뜨린 그녀의 모습은 무척 아름다울 것이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파티에 참석하면 그녀의 모습을 자신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이 보게 된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게 모순되는 감정을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

“전하, 다녀오셨어요. 루베인은 방금 돌아갔습니다.”

엘피는 저택으로 돌아온 트론을 보고 반색했다. 겨우 반나절 정도 못 본 것뿐인데도 무척 그가 반가웠다.

“응. 돌아간다고 들었다. 소백작은?”

“르터바이스 부군께서 잠시 부르셨다나 봐요. 곧 오신댔어요.”

“그래. 이후 일정은 그가 오면 이야기하지.”

“알겠습니다. 차 드릴까요?”

“괜찮다.”

트론이 집무실 소파에 앉자, 엘피가 그의 뺨을 손으로 쓸었다.

“전하, 몸이 차가워지셨어요. 르터바이스 영지는 아직 많이 춥죠? 더 두껍게 입고 정원에 나가시는 게 좋았을 텐데. 챙겨드리지 못해서 죄송해요.”

“그렇게 걱정할 정도는 아니야.”

그는 엘피의 손을 뺨에서 떼어 붙잡았다. 실내에 있던 그녀의 체온이 자신보다 높아서 따끈따끈했다. 왕궁에서처럼 그대로 껴안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옆에 앉혔다.

“그것보다 엘피, 이번 행사 파티…….”

트론이 말을 채 끝내기 전에 집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전하, 저 왔어요! 기다리셨죠? 기다리셨다고 해 주세요.”

“…….”

가이는 어딘지 원망에 찬 트론의 눈길을 받으며 자신이 타이밍을 잘못 맞췄다는 걸 깨달았다.

물론 그건 그거대로 재미있었으므로 그가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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