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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님, 악당 길만 걸어요!-58화 (58/132)

58화. 연모와 소년기의 끝자락 (4)

르터바이스 영지는 5월이 찾아와도 추웠다. 최북단에 위치하여 봄이 늦게 오기에, 5월 초도 다른 지방의 초봄 같은 날씨였다. 그런 르터바이스에서는 봄마다 정기적인 행사가 치러졌다.

그것은 바로 마수 토벌이었다. 예로부터 북쪽의 마수들은 겨우내 움츠려 있다가 날이 풀리면 먹이를 찾아 경계를 넘어오기 시작했다. 그렇기에 인명 피해가 없도록 날을 잡아 경계에 있는 마수들을 잡는 행사가 매년 반복되었다.

현재는 마수들에 대한 방비가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기에, 마수 토벌은 봄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적인 행사에 가까웠다.

그 마수 토벌이 바로 며칠 뒤 시작될 예정이었다.

트론은 엘피에게 예언을 들은 후, 전후 상황으로 보아 루베인이 다치는 것이 마수 토벌에 휘말려서이리라 짐작했다. 올페마에 도착하여 가이와 만나자마자 그 이야기부터 전했다.

“그렇군요, 루베인 님이 위험하다고요…….”

“응.”

가이는 소파에 기대며 머리를 긁적였다.

“보통 마수 토벌에서 위험할 일이 그렇게 많진 않을 텐데요. 아시다시피 요즘 행사는 그냥 형식적이거든요.”

“나도 안다.”

“아무튼, 엘피 님의 예언이라면 틀림없겠죠. 행사 안전을 다시 검토해 보겠습니다. 물론, 루베인 님이 괜히 말려드는 일이 없도록 미리 살펴야겠고요. 오늘내일 내로 올페마에 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그건 그렇고……. 마그달리사 공도 이번 토벌 행사 파티에 참석하기로 했거든요. 아무래도 전하가 오신다는 이야기를 주워들은 것 같은데, 무슨 꿍꿍이일까요?”

“글쎄다.”

트론은 무심히 답했다. 가이는 머리칼을 잡아당기며 끙, 소리를 냈다.

“솔직히 마그달리사 공은 전하께 협력할 마음은 있어 보이는데……. 마지막 한 발자국을 떼어 주지 않네요. 3년이나 끌 줄은 몰랐습니다.”

“아무래도 계산속이 깊은 자니까. 쉽게 마음을 정하기는 싫은 거겠지.”

“그런 부친 밑에서 태어난 루베인 님이 정반대 성격인 게 좀 신기합니다.”

“뭐, 변경백 밑에 그대도 태어난 마당이니.”

“히잉, 사람 콤플렉스를 쑤시지 마세요.”

“그대와 닮은 르터바이스 부군은 오늘 바로 볼 수 있나?”

“안 닮았거든요! ……아무튼, 지금 별로 기분이 안 좋으시다고. 1시간 있다가 오시래요. 자기가 불러 놓고 뭐라는 건지.”

왕족을 상대로 지나치게 뻔뻔한 자세였다. 그러나 변경백의 병환 연구 때문에 종종 교류하면서 가이의 부친이 원래 그런 사람이라는 것은 파악했기에 더 뭐라 말하지는 않았다.

“알겠다. 잠깐 기다리는 거야 어렵지 않으니.”

“그냥 괘씸죄로 처형하셔도 되는데요.”

“변경백의 병을 낫게 한 다음 고려하도록 하지.”

“긍정적으로 검토해 주세요.”

건성으로 끄덕이며 트론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책을 집어 들었다.

***

엘피는 오랜만의 올페마 방문에 약간 들떠 있었다. 왕자궁으로 거처를 옮긴 이래 멀리 떠날 일이 없었기에, 올페마는 3년 전 방문한 이후로 오랜만에 다시 찾는 셈이었다.

그녀는 평민 옷으로 갈아입고 변경백에게 줄 선물을 고르고 있었다.

‘전하께서 자기 생명력을 깎는 건 아니라서 다행이야.’

그 덕에 마음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물론 루베인에 대한 일이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트론을 믿고 있기에 심각하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그런 엘피의 옆에는 호위를 겸하여 사먼이 따라다니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지만, 이미 의미가 없는 명령이었다.

“사먼, 이 오르골 두 개 중에 어떤 게 더 예뻐 보이나요?”

엘피는 크리스털과 자수정으로 장식된 오르골과 나무를 섬세하게 깎아서 만든 오르골을 가리키며 사먼에게 물었다.

“글쎄요……. 르터바이스의 분위기에 더 맞는 건 크리스털 쪽일 것 같습니다만, 나무는 의외성이 있어서 괜찮지 않을까요?”

“으음, 역시 그렇죠? 에이, 둘 다 사야겠다.”

그녀는 주인장에게 둘 다 포장해 달라고 부탁하며 가격 흥정을 했다. 은전을 건네 계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사먼이 궁금한 얼굴을 했다.

“항상 생각하지만, 엘피 님은 참 귀족답지 않으시네요.”

그의 ‘귀족답지 않다’라는 말이 칭찬이라는 걸 알고 있기에, 엘피는 피식 웃었다.

“도망 다니면서 이것저것 계산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어요.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한 푼이라도 아껴야 한다는 자세가 몸에 배서.”

“주군과 함께 왕궁을 도망가신 다음 말씀이시군요.”

“네. 후후……. 믿어지세요? 저렇게 허름한 식당에서 전하랑 식사를 했어요.”

엘피는 선술집을 겸하는 허름한 식당을 가리켰다.

“저렇게 볼품없는 곳에서 싸구려 옷을 걸치고 있어도, 전하는 항상 빛이 나서……. 도망치는 입장에서는 좀 곤란했어요. 눈에 너무 띄니까.”

“나중에는 여장하셨죠? 전 주군이 원래 여자인데 숨겼던 건가 하고 깜짝 놀랐어요.”

“아하하!”

사먼이 습관적으로 주변을 경계하다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데 엘피 님 말고도 이런 뒷골목까지 오는 귀족 아가씨가 있네요. 어라, 어디서 많이 보던 얼굴인데요.”

“음?”

사먼의 말을 듣고 그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엘피는 입을 떡 벌렸다.

루베인 마그달리사가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채 씩씩거리는 얼굴로 골목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주변 행인들은 식겁하여 길을 비켜 주었다. 루베인은 엘피를 보자마자 반색하며 달려왔다.

“……대체 왜 이런 곳에.”

사먼은 엘피의 의문에 답해 주기 전에 먼저 몸을 숨겼다. 현명한 판단이긴 했지만, 루베인을 혼자 상대해야 할 것을 생각하니 엘피는 골치가 아팠다.

“언니!”

“……으응. 오랜만이야, 루베인.”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귀부인 차림을 하고 있는 루베인은 이 장소와 붕 떠 보였다.

“그것보다, 아까 봤어. 뭔가 남자랑 같이 친근하게 있던데!”

“…….”

사먼이 모습을 감추는 것보다 루베인에게 포착되는 것이 빨랐던 모양이다.

“설마, 데이트?”

“아니란다…….”

“휴, 언니가 그사이에 마음을 바꿨나 하고 놀랐잖아.”

“마음……?”

“앗, 아무것도 아냐. 전하는 잘 계셔?”

엘피는 화제가 바뀐 것에 안심하며 끄덕였다.

“응. 지금 르터바이스 본저에 먼저 들어가셨어. 그것보다, 왜 그런 차림으로 이런 데에 왔어?”

“옷 사려고.”

루베인이 불퉁한 얼굴을 했다.

“어머님한테 원래 입던 옷을 다 빼앗겨서 짐 가방에 드레스밖에 없어. 지금도 몰래 빠져나온 거야. 하녀들이 날 붙잡아 놓고 못 나가게 하려고 어찌나 성화인지.”

올페마에 오자마자 그녀 나름대로 스펙터클한 모험을 벌인 모양이었다. 에너지 넘치는 그녀의 모습이 여전하여 엘피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올페마에는 파티에 참석하러 온 거지?”

“응, 각하한테 떠밀려 온 거지만, 일단은 그렇다고 알고 있어.”

역시 루베인이 마수 토벌 행사에 직접 참가하는 것은 아니었다. 뭔가 계기가 있어서 참가하는 바람에 위험에 처할지도 모르지만,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가이와 트론이 막아줄 테니 그리 걱정되지는 않았다.

“안 좋은 예감이 들기는 해.”

그런데 루베인이 그런 소리를 해서 엘피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뭐, 뭐 때문에?”

“이렇게 꽃단장시켜 놓는 게, 무슨 선이라도 보게 할 기세잖아.”

“아아, 그런 거…….”

“겨우 ‘그런 거’라니! 나는 심각해, 언니!”

루베인이 엘피의 팔짱을 끼며 툴툴댔다.

“후후, 미안. 그것보다, 지금 우리 엄청나게 구경거리가 되고 있어. 빨리 옷을 사러 가는 게 어떨까?”

“아, 그러게. 미안.”

일정 거리를 둔 채 동물원 원숭이 취급을 당하던 두 사람은 슬그머니 골목을 빠져나갔다.

***

본저에서도 까마득하게 걸어야 나오는 별채가 변경백의 부군인 바실리 르터바이스의 거처이자 연구소였다.

작업실 안에는 다듬지 않아 길게 늘어뜨린 연갈색 머리를 아무렇게나 뒤로 묶은 중년 남성이 책상에 앉아 있었다. 눈매는 둥그스름한 편이었지만, 가이와 생김새나 특유의 학자 같은 분위기가 비슷한 미남이었다.

“오랜만이군, 르터바이스 부군.”

가이의 포털을 통해 작업실 안에 착지한 트론이 인사하자, 한 박자 늦게 반응이 돌아왔다.

“……음, 왕자님이십니까. 잠깐만요. 이것 좀 끝내고.”

트론은 그의 태도를 책망하지 않고 발 디딜 틈도 없이 빽빽한 작업실에서 의자를 찾아내어 앉았다. 이윽고 바실리가 책상에서 일어나 트론 쪽으로 몸을 돌렸다.

“보내 주신 논문은 확인했습니다. 이론상으로 문제는 없을 것 같군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그의 화법에 맞추어, 트론 역시 바로 답했다.

“그래, 다행이군. 변경백의 병은 원인이 되는 핵을 제거해야 하지만, 문제는 그 핵이 몸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기관에 침투해 있다는 사실이야. 이 기관을 대리하는 장치를 마법으로 만들어야 하고. 이 부분은 문제없나?”

“네. 동물로도 실험을 마쳤습니다.”

“알았다. 그래서 내가 검토해 달라고 한 것의 결과가 나왔다고 들었는데.”

“으응, 네.”

책상 위를 뒤적거리던 그는 종이 한 장을 찾아내 트론에게 건넸다.

“주술로 신체 순환을 제어하는 과정에서 부족한 생명력을 보충하는 방안을 검토해 달라고 하셨죠.”

트론 본인의 수명을 깎으면 해결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가이가 말리기도 했고, 엘피가 그 사실을 알고 슬퍼하는 얼굴을 보고 싶지 않은 게 가장 큰 이유였다.

참고로 바실리의 경우에는 그 이야기를 듣고 실망한 기색을 보였다. 하여간 자신의 아들과 다른 방향성으로 솔직하고 주변 눈치를 안 보는 인물이었다.

“약의 힘을 빌리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타당한 결론이긴 하지만, 굳이 그 내용을 말해 주려고 나를 르터바이스 영지로 부른 건 아닐 듯한데.”

“그건 방금 드린 걸 읽으면 이해하실 겁니다.”

트론은 바실리가 준 종이에 쓰여 있는 내용을 쭉 읽어 내렸다. 그는 납득한 듯 입가를 비틀었다.

“……최고급품 달물결 꽃. 그런 의미인가.”

“네.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건 못 믿겠습니다. 마법사인 저나 가이즈카는 마수와 상성이 나쁘니 어렵고요. 전하께서 직접 지정된 기준을 통과하는 달물결 꽃을 확보해 주십시오.”

바실리가 지정한 약의 재료에는 ‘달물결 꽃’이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마수 서식지에서만 피어나는 그 꽃은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입수하기 어렵다.

가장 빠르게 얻을 방법은, 이번 토벌에 참가하여 마수 서식지에 발을 들이는 것이다.

“그럼 그대는 나에게 무엇을 줄 건가?”

“으응……. 밀리엔만 일어나 준다면 뭐든 시키는 대로 하지요. 다리나 팔을 잘라서 드리는 것도 괜찮습니다.”

“아니, 됐다. 새삼스럽지만 참으로 소백작의 아비답군.”

“가이즈카는 저같이 음침한 성격이 아닙니다.”

바실리가 어딘지 분한 듯 항변했다. 이럴 때 보면 르터바이스 부자는 사이가 좋은지 나쁜지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극단적인 부분이 그렇다는 말이네. 아무튼, 어려울 것은 없으니 심려하지 말도록 해. 무사히 가져오도록 하겠다.”

“네. 뭐든 한다는 말은 거짓이 아닙니다.”

“그대가 빈말을 할 리 없다는 건 안다. 힘이 필요할 때가 오면 요청하기로 하지. 그럼 이만 가보겠다.”

바실리는 끄덕이고 바로 책상에 다시 앉았다. 지금까지 나온 이론의 정밀도를 처음부터 검토하려는 모양이었다.

“르터바이스 부군.”

“네.”

“만약에 내가 그대를 죽이려 한다면 어떨 것 같은가?”

“밀리엔이 일어난 다음에 해 주시면 안 될까요?”

“이유는 안 묻나?”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데에 대단한 이유는 없습니다. 눈물 짜는 사연으로 포장해 봐야 살인은 살인이죠. 이유를 물어 무엇 하겠습니까.”

“맞는 말이군.”

가이는 항상 자신의 부친을 나쁘게 말했지만, 사실 트론은 바실리가 싫지 않았다. 자신에게도 남에게도 무례할 정도의 솔직함이 가이와 다른 의미에서 편안했다.

아무튼, 길었던 연구는 이제 거의 끝났다. 바실리가 지정한 약재만 모으면 이제 변경백은 쾌차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의 빚을 내려놓는 기분에 트론은 후련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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