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긍지와 파란의 수도 (8)
[따스한 정을 나눌 기회는 나중에 있겠죠. 그건 그렇다 치고.]
할리케는 별로 우습지도 않은 소리에 한참을 웃더니 돌연 웃음을 그치고 트론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지금 상황이 유리하지 않다는 건 저도 이해해요. 그러니 헤럴드를 일단 꼭두각시 대공으로 앉혀 두고 시간을 벌고자 하는 주군의 안은 일반적으로 나쁘지 않겠죠.]
“일반적으로는 나쁘지 않지만, 로라 2세의 전례를 따르는 건 불쾌하다 이거겠지?”
[그걸 아시는 분이 왜 이러실까요?]
트론은 입을 다물었다.
로라 2세의 어머니였던 첼시 왕은 주술사를 수면 위로 끌어냈다. 하지만 그 반작용과 각종 악재로 인해 왕실의 권위는 땅에 떨어진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그녀의 뒤를 이어 왕이 된 로라 2세는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극약 처방을 내렸다.
첼시 왕과 반대로 주술사를 탄압하고 사실을 교묘하게 비튼 루머를 확산시키는 정책이었다.
원래도 주술사에 대한 편견은 심했고, 거기에 약간 부채질을 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전염병이 도는 것도, 가뭄이 든 것도, 가축들이 떼죽음을 당한 것도, 모두 그들의 잘못인 양.
왕실을 원망하던 백성들은 주술사를 새로이 공동의 적으로 인식했다.
원망의 화살을 그쪽으로 돌려놓은 사이, 로라 2세는 산적한 정치 과제들을 해치우고 암흑기를 돌파했다.
중흥의 군주라는 이명에는 이런 그림자가 존재했다. 물론 대다수 사람은 신경 쓰지 않을 그림자였다.
소수의 희생이 다수의 행복을 낳는다면, 당사자인 소수가 아닌 이상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더 좋은 방법이 있다고 생각하나?”
[정 안 되면 저희 연합의 총력을 기울여서 각 가문의 수장들을 세뇌라도 할까요?]
트론은 눈을 찡그렸다. 그녀가 진심으로 하는 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역사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로라 2세에게 앙갚음을 할 요량으로 몇몇 주술사들이 모여 실제로 그런 일을 획책했었다.
하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주술에 의한 정신 지배는 일시적이고, 소수에 불과한 주술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었다.
애초에 주술사들의 반격을 예측하고 대비한 로라 2세를 상대로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로라 2세 치세 이후 그렇잖아도 적은 주술사 인구가 1/10로 줄어들었다는 한 문장 안에 담긴 비극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대체 그건 무슨 헛소리인가.”
[처음부터 주군이 잘못 선택하신 거죠. 헤럴드 밑으로 가는 방안을 택했다면 애초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나올 일도 없었을 텐데.]
“어차피 마찬가지야. 헤럴드에게 일시적으로 협력하는 척하는 것처럼, 로라 2세가 취했던 방식을 잠시 빌리는 것뿐 아닌가.”
[방편에도 용납할 수 있는 한계가 있어요. 로라 2세의 방식을 쓰는 건, 원수의 칼을 쓰라는 소리나 다름없잖아요.]
“그대들의 숙원에는 결론적으로 지장이 없는 일이다.”
[하하. 말씀을 바로 하셔야죠, 주군. ‘그대들’의 숙원이 아니라 ‘우리’의 숙원인데.]
트론은 숨이 막혀 오는 듯한 감각을 참아 내며 끄덕였다.
“그래, 우리의 숙원에는 지장 없는 일이다. 현명한 그대라면 이 과정이 최선이라는 것은 이해했겠지. 화풀이하고 싶은 마음은 알겠지만, 적당히 해.”
[연합 안에서도 의견을 통일하는 건 어려운 일이에요. 저는 그렇다 쳐도 원로회 늙은이들은 펄펄 뛰고 있는걸요.]
“그대의 공을 언제나 잊지 않고 있다.”
[저도 주군이 아니면 이런 일 안 해요.]
할리케는 구불구불한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빙빙 돌려 말면서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사먼한테 들었는데. 얼마 전에 독 드셨다면서요? 물론 문제는 없으시죠?]
“응.”
완전히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트론은 짤막하게 답했다.
[주군은 제가 심혈을 기울여 키워 낸 걸작이에요. 이렇게 자라신 모습을 보면 언니도 기뻐하지 않을까요? 모쪼록, 가는 길을 착각하지는 말아 주세요.]
어릴 때부터 아슬아슬하게 버틸 만한 독을 주입하는 것으로 저항력을 올려 그를 독살의 위험으로부터 떼어 낸 것은 할리케의 안배였다. 왕궁에서 제대로 주어지지 않는 교육을 대신 제공한 것 역시 그녀였다.
그런 의미에서, 트론이 현재까지 생존할 수 있게 해준 은인이 할리케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갚아야 할 빚이 있기에 그녀가 더욱 거북했다.
“그쪽이야말로 착각하지 말도록. 그대가 나의 이모든 아니든, 우리 관계에서 그렇게 중요한 요소는 아니야. 그러니 소름 끼치는 정 운운하는 소리는 앞으로 하지 마.”
[주군이 이모한테 너무 차갑네요. 섭섭하게시리.]
물론 그녀의 말에선 조금의 섭섭함도 느낄 수 없었다. 혈연이라는 요소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피차 마찬가지인 주제에, 말만은 번지르르했다.
“협력받은 만큼은 돌려주겠다. 혈연을 강조하지 않아도 내가 할 일은 해. 그렇게 알고 들어가. 그대도 바쁠 것 아닌가.”
[알겠어요. 이번 일은 정말 유감이 크고, 수습하느라 제가 고생하고 있다는 것만 알아주세요.]
“그래.”
[다시는 이런 이유로 굳이 얼굴 마주할 일 없었으면 좋겠네요.]
“내가 할 소리군.”
[아하하.]
검은 머리의 미녀가 거울에서 사라졌다. 이윽고 거울의 초점이 흐려지며 다시 트론의 모습을 비추었다. 그 안색은 어딘지 창백했다.
이제 독 기운도 가셔서 지칠 일이 없는데도 할리케와 나눈 잠깐의 대화에 더 없이 피로해졌다.
“……응, 착각 안 해.”
그가 걸어갈 길의 끝에 기다리는 것은 올곧은 파멸의 낭떠러지였다.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스러질 셋째 왕자에서 스레데니옴 왕국을 새카맣게 물들이는 마지막 왕으로서 자신을 남길 것이다.
그것이 트론 스레데니옴이 삶을 지탱해온 목표인, 자기 증명이었다.
“그 끝에 다다르면 당신이 불행하고 비정한 왕이 아니라, 모든 백성에게 사랑받는 행복한 성군이 되리라 믿습니다.”
트론은 언젠가 엘피가 남겼던 말을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그녀의 예언은 지금까지 모두 이루어졌지만, 그 말이 이루어질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그녀 역시 언젠가 자신을 떠나갈 것이다.
그 사실을 착각하지 않았다.
***
헤럴드가 데하스 영지로 물러가면서, 데니옴 왕궁에서 그가 부숴 놓은 부분은 수리되어 반짝반짝했다.
그러나 서쪽 끝에 있는 삼 왕자궁은 사정이 달랐다.
청소는커녕 기본적인 보수도 되어 있지 않아, 좋게 봐줘도 폐허였다.
가이는 그 참상을 눈앞에 두고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렇게 흉흉한 곳에서 일주일만 지내도 병에 걸릴 것 같은데…….”
그의 옆에 서 있던 시종처럼 보이는 푸른 머리의 청년이 답했다.
“실제로 유령이 나온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웰칸 연합의 사먼이었다. 그는 트론의 지시로 한동안 연락책 외에도 가이를 돕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왜 그런 소문이 돌죠?”
“왕에게 내쳐져서 목매달아 죽은 정부라거나, 유폐당한 왕매라거나, 아무튼 불행한 주인들만 맞이하던 궁이라서요.”
“저런…….”
가이는 혀를 찼다. 그는 미신을 믿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놓고 불길한 궁을 거처로 받은 트론의 대우를 웃어넘길 수는 없었다.
해자가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삼 왕자궁의 감옥 같은 구조도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표면으로 드러낼 수 없는 이들을 가두던 감옥으로 쓰이던 곳이니, 감옥 같을 수밖에 없었다.
“뭐, 그렇지만 무서운 건 유령보다는 산 사람이지요. 정리 견적부터 잡읍시다. 궁내부 쪽 의견은 어떻던가요?”
“어차피 제대로 된 절차를 밟을 상황도 아니어서요. 예산만 저희 쪽에서 알아서 하면 왕자궁을 수리하는 일 자체는 문제 삼지 않겠다고 하더군요.”
“헤럴드 전하 쪽에서 트집을 잡을 줄 알았는데, 이상하네요?”
“동감입니다.”
가이는 왕궁으로 들어올 때 공격을 받을 가능성도 생각했었다.
그러나 현재까지 이상할 정도로 헤럴드 쪽의 움직임이 없었다.
“거꾸로 함정일 가능성도 생각해 봐야 할까요……. 주술 쪽 탐색 결과는 어땠죠?”
“깨끗했습니다.”
“으음…….”
트론에게 들은 바로 사먼은 무척 실력이 뛰어난 주술사였고, 그의 말을 신뢰하자면 주술에 의한 공격도 걱정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하지만 느낌이 좋지 않았으므로, 헤럴드 측의 움직임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건물 자체를 아예 갈아엎고 새로 세우고 싶지만, 그럴 시간은 없군요. 마법과 주술 장치에 대한 탐색 작업이 끝나는 대로 조경과 내장 전문가에게 맡기기로 하죠. 혹시 모르니 주술 쪽도 다시 점검 부탁할게요.”
“네, 소백작님.”
“남들 없을 때는 그냥 가이라고 편하게 부르세요. 어차피 전하 밑에서 같이 일하는 처지 아닙니까.”
가이가 공중에 마법을 발동시키며 말하자, 사먼은 당황했다.
그는 처음 트론에게 가이즈카 르터바이스를 도우라는 지시를 받았을 때 조금 거부감을 느꼈었다. 귀족에게 좋은 기억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막상 만나 본 가이는 상대를 격 없이 대하는 사람이었다.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는 웰칸 안쪽에서 일하는 것보다 마음이 편할 정도였다.
“으음, 가이…… 님은 무척 대귀족 같지 않으시네요.”
그 말조차 엄청난 무례의 범주에 들어갔지만, 가이는 생글생글 웃으며 신경 쓰지 않고 답했다.
“칭찬 고맙습니다. 그럼 시작하죠.”
“네!”
***
회귀 전 도망 다니던 시절, 처음부터 트론이 요리 담당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당연하지만 초기에 두 사람은 그다지 친하지 않았고, 엘피는 왕자인 트론을 대하는 것이 조심스러웠다. 그래서 자청하여 요리를 포함한 온갖 잡일을 혼자서 했다.
하지만 엘피의 요리 솜씨는 긍정적으로 표현해도 파멸적이었고, 그 결과물은 겉보기뿐만 아니라 맛도 끔찍했다.
그녀는 언제나 ‘다음번에는 꼭……!’이라는 다짐을 새기며 요리를 내놓았다.
엘피 본인조차 울며 겨자 먹기로 입에 욱여넣는 음식을, 트론은 언제나 군말 없이 먹어 주었다. 언젠가 그런 그에게 미안해서 사과했던 적이 있었다.
“……맛, 엄청나게 없죠. 죄송해요.”
“괜찮다.”
딱히 다정한 기색은 아니었지만 원망하는 투도 없이 담담했다. 그가 그렇게 반응하니 그녀는 더더욱 몸 둘 바를 모르는 심정이 되었다.
“그렇지만,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도 삶의 즐거움 중 하나잖아요. 전하의 즐거움을 제가 빼앗은 것 같아서 송구합니다.”
트론은 그 말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별 이상한 말을 다 들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대는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즐겁나?”
“네, 그야 당연히 그렇죠.”
이나드 자작가에서 일하던 요리사는 엄청난 실력의 소유자까지는 아니었지만, 내주는 음식은 항상 맛있었다.
그녀는 새삼 자신의 부족한 음식 솜씨가 원망스러웠다.
그 대화가 오가고 며칠 후, 밖에 나갔다 돌아온 엘피는 깜짝 놀랐다. 트론이 부엌에 서서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다.
“와, 왕자님!”
엘피는 놀라서 들고 있던 짐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그에게 달려갔다.
“불 쓰시는 거 위험해요!”
“그대는 나를 어린애라고 생각하는가?”
“아니, 그게 아니라……. 제가 할 건데요!”
“거의 끝났다. 저녁이나 먹지.”
트론은 엘피가 사다 놓은 레시피 책을 덮은 후 재촉했다.
그녀는 안절부절못하는 기분으로 테이블 앞에 앉았다. 트론이 내려놓은 것은 토마토 스튜였다.
“잘 먹겠습니다…….”
“응.”
그는 짧게 답한 후 여느 때처럼 표정 없이 스튜를 떠서 삼켰다. 눈치를 보던 엘피는 숟가락을 들고 스튜를 입에 넣었다. 한동안 느껴본 적 없는 감칠맛이 입 안에 퍼졌다.
“마…… 맛있어요! 전하!”
“그거 다행이군.”
“토마토를 썼는데 어째서 풋내가 안 날까요? 제가 토마토를 쓰면 신맛이랑 쓴맛이 섞여서 먹을 게 못 되던데.”
“……레시피를 그대로 따라 하면 되는 것 아닌가?”
약간 짜다는 것 외에는 트론의 요리는 크게 나무랄 데가 없었다.
처음 요리를 해 보는 건 트론이나 자신이나 마찬가지일 텐데 이 차이는 무엇일까. 서글퍼하는 와중에도 착실하게 음식은 입 안으로 들어갔다.
“앞으로 요리는 내가 하도록 하지.”
“아닙니다, 전하! 저도 노력하면 괜찮아질 거예요.”
“어차피 그대에게만 모든 일을 맡기는 것 같아서 마음이 편치 않았어. 어렵지도 않은 일이니 마음 쓰지 않아도 돼.”
“그치만…….”
트론은 자신이 만든 맛있는 음식에도 별 감흥이 없는 얼굴로 적은 양의 식사를 마쳤다.
“그걸 마지막 명령이라고 치지.”
냅킨으로 입가를 닦아낸 그가 말투를 바꾸었다.
“함께 도망치는 처지에 신분 따지지 말자. 누나.”
그릇을 깨끗하게 비운 엘피는 고민하다가 끄덕였다.
“그, 그럼 대신에. 내가 나중에 론이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음식 만들어 줄게!”
“으음.”
트론이 조금 난처한 듯 미소 지었다.
“……그래, 그럴 수 있으면 좋겠네.”
“응! 약속이야!”
그 이후 엘피는 계속 그걸 의식해서 몰래 요리 연습을 해 왔다.
결국, 그 약속은 지켜지지 못하고 끝나고 말았지만.
회귀 전 과거를 꿈으로 볼 때마다 그녀는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그에게 해 주지 못하고 끝난 것들이 모두 후회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