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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님, 악당 길만 걸어요!-42화 (42/132)

42화. 긍지와 파란의 수도 (7)

“저, 저만 오로라 처음 보는 건가요?”

“아니. 나도 처음이야, 누나.”

트론이 말투를 바꾸어 말하자, 엘피는 뺨을 붉혔다.

“그런데 왜 그렇게 침착한 거야. 나 혼자 열 올린 거 같아서 부끄럽잖아…….”

“누나가 보고 즐거우면 됐어. 르터바이스령은 아름다운 곳이니까.”

“……나는 론이랑 같이 봐서 즐거운 거야.”

엘피는 섭섭함을 내비치며 흘러 내려온 그의 앞머리를 넘겨 주었다.

“론은, 항상 별로 즐거운 게 없어 보여서……. 맛있는 걸 먹어도 시큰둥하고, 새로운 걸 봐도 이렇게 반응이 없잖아. 어떤 걸 좋아하는지 잘 모르겠어.”

그것은 트론 본인도 알 수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독에 대한 저항력을 키우기 위해 독을 먹다 보니 미각이 망가져 맛을 느끼는 감각이 지극히 둔했고, 어느 순간부터 모든 일에 감흥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도 삶을 연명하는 목표라면 있었다. 왕좌에 앉아 이 나라를 잘게 부숴 놓는 것이었다.

그렇게 목표를 향해 걷다가 눈앞의 소녀를 만났다. 아마도 즐거운 일이라면, 그 정도일 것 같았다.

“누나가 즐거우면 나도 즐거워.”

엘피의 표정을 보는 것이 좋았다. 별것 아닌 일에도 크게 반응하는 것이 신기했다. 자신의 본질을 오해하고 헌신하는 모습이 어리석으면서도 사랑스러웠다.

이런 온갖 감정을 오직 그녀를 통해서만 느낄 수 있었다.

엘피는 울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떨구었다.

때때로 그녀가 자신을 괴롭게 보는 순간이 있었다. 지나치게 깊어 보이는 그 감정을 트론은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미 그런 것으로 고민하는 단계는 지났다.

“……나도 론이 즐거워야 마음 놓고 즐겁고 행복할 수 있어. 그러니까 또 이렇게 아프거나 하면 안 돼. 알았지?”

장담은 할 수 없었지만, 고개를 저으면 그녀가 또 울상이 될 것 같아서 트론은 작게 끄덕였다.

엘피는 그제야 안심한 얼굴로 그를 침대에 눕혔다.

“……누나도 방에 가서 제대로 자.”

“론 자는 거 보고.”

목 아래까지 이불을 덮어 주고 그녀는 그 위에서 손을 토닥거렸다. 이미 충분히 자서 잠이 다시 올 것 같지는 않았지만, 트론은 눈을 감았다.

그는 어둠 저편에서 예전에 정원에서 보았던 새 둥지를 떠올렸다.

부모 새가 부지런히 날라 온 먹이를 삼키는 새끼 새들 가운데 혼자 자기주장을 못 하는 새가 있었다.

비쩍 말라 볼품없는 그 새는 미약하게 빽빽거리며 몇 번이고 자신의 형제들에게 밀려 먹이를 먹지 못했다. 그러다가 형제 새들이 먹다 구석에 떨어뜨린 조각에 게걸스레 입을 가져갔다.

끝끝내 형제들을 이기지 못하고 밀쳐진 채 떨어진 먹이의 조각만을 탐했다.

‘정말 바보 같지…….’

그녀의 애정이 자신의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온전한 애정을 보내는 착한 왕자님이란 존재는 허상이다. 가족인 양 소꿉놀이를 해도, 그들은 친남매가 아니다.

그러나 떨어진 조각을 먹던 그 새처럼, 애정의 부스러기나마 떨어지는 지금에 안도했다.

‘……그 덜떨어진 새는 부모 새가 떠나고 나서 살아남았을까.’

나중에 다시 확인한 둥지는 텅 비어 있었다. 끝은 언제나 갑작스레 찾아온다.

이 허망한 소꿉놀이 역시 언제까지 갈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엘피의 손이 떨어지는 걸 아쉽게 생각하며 트론은 상념을 홀로 삼켰다.

***

트론의 병환을 넘기고, 새해가 찾아왔다.

르터바이스 변경백의 건강 문제도 있어 올페마의 신년회는 조용히 지나갔다. 트론이 데니옴 회의 전까지는 행사를 최소화하라고 명한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그리고 가이는 본인이 제안했던 대로, 먼저 데니옴으로 떠나게 되었다.

“거리가 멀어서 포털은 쓸 수 없지만, 아나이테랑 아일란은 유효하니까요. 제가 없어서 무척 쓸쓸해지실 텐데, 연락 주세요.”

“쓸쓸할 일은 없겠지만, 용건이 생기면 연락하지.”

“히잉, 한참 못 보는데 전하가 쌀쌀맞으셔.”

엘피는 쓴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했다.

“잘 다녀오세요, 가이 님. 저쪽에서 가이 님을 노릴지도 모르니까 조심하시고요.”

“그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가이는 트론처럼 자신을 위험에 빠뜨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것보다 엘피 님, 전하께서 무리 안 하시게 잘 지켜봐 주세요.”

“네, 당연하죠. 다시는 아프실 일 없도록 제가 잘 살필게요!”

둘 사이에 결연한 의지가 오고 갔다. 당사자인 트론은 어이가 없었다.

“내 몸은 알아서 잘 관리할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전 안 믿어요!”

“왕자님께서 스스로 신뢰를 깎아 먹으셨잖아요.”

“…….”

아무래도 씨도 안 먹히는 듯했다.

“정말로 다시 그럴 일 없을 테니까 의심의 눈을 거두도록 해.”

“좋아요, 그럼 전하 또 쓰러지시면 그때는 저를 형이라고 부르시기예요.”

가이의 그 말을 듣고 어째서인지 엘피가 부러운 듯한 얼굴을 했다. 누나라는 호칭만으로 만족하지 못한 것일까. 트론은 머리가 아파 왔다.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출발해.”

“치잇.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데니옴에서 다시 뵈어요, 가이 님.”

올페마에 처음 온 이래 항상 행동을 같이하던 세 명이 처음으로 헤어지는 순간이었다.

***

마그달리사 공작저에는 겨울밤다운 고요함이 감돌았다.

백금발에 초록색 눈을 한 청년이 천천히 회랑을 가로질러 걷고 있었다. 공작가의 장남이자 소공작인 딜 마그달리사였다.

그는 한참을 걸어 어떤 방 앞에 도착했다. 건장한 호위 몇 명이 굳은 얼굴로 문 앞을 지키고 있다가 딜에게 인사했다.

“루베인, 들어간다.”

딜은 문을 두드리고 대답을 기다렸다.

잠시 후 들어오라는 대답 소리가 들려왔다.

응접실을 지나 침실 안으로 들어간 딜은 미간을 찌푸렸다. 루베인이 평민 남자 옷을 입은 채 무릎을 감싸 안고 침대에 앉아 있었다.

“너, 또…….”

“내보내 주려는 거 아니면 돌아가, 오라버니.”

딜은 루베인의 옆에 앉아 여전히 짤막한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각하도 화가 나셔서 그래. 너 많이 아끼시잖아. 그러니까 벌이 이 정도 선에서 그치는 거지.”

“…….”

“나도 그래, 루베인. 솔직히 네 생각을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각하보다는 그래도 내가 더 네 말을 들어줄 수 있을 거야. 나중에 함께 우리 영지를 더 좋게 바꾸어 가자. 응? 그러니까 우선은 각하 말 잘 듣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어떨까.”

루베인은 무릎에 얼굴을 묻은 채 눈동자만 올려 딜을 보았다.

그는 좋은 오빠였다. 그녀의 부친인 공작 역시 정치적으로는 다소 닳아 있었지만, 자신에게는 무른 사람이었다.

내성적이고 심약한 모친 역시 이번 연금 건을 적극적으로 말리지는 못했지만, 자신을 걱정하는 것을 알았다.

루베인도 가족들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대로 멈춰 있어도 되는지. 다정한 가족에게 둘러싸여 안전한 정의의 사도 놀이를 계속하면 그만인지.

“……오라버니는.”

“응?”

“어떻게 될 것 같아? 이번 데니옴 회의…….”

딜은 ‘반성 안 하고 또 그런 거나 생각하고 있었던 거냐’라고 말하는 듯 다소 불만스러운 얼굴을 했다. 하지만 동생에게 약한 그답게, 결국 성실하게 답변을 해 주었다.

“글쎄, 십중팔구 헤럴드 전하가 왕위에 오르지 않을까. 트론 전하는……. 으음, 어렵겠지. 이번에 고아원 건으로 신세를 진 것도 있고 해서 나도 안타깝게 생각해.”

“오라버니는 그걸로 괜찮아? 헤럴드가 선왕을 죽이고 옳지 않게 그 자리에 오르려고 하는데?”

“루베인!”

딜이 화들짝 놀라 그녀의 입을 막았다.

“정말 너…… 언제 철들래. 네가 철없는 소리를 하면 너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야. 이번 일도 네 경솔한 말을 각하께서 수습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서 그래?”

“…….”

그는 손을 떼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그달리사 영지를 책임지는 이상, 그저 충동만으로 행동할 수 없어. 헤럴드 전하의 치세가 되면 또 거기에 맞춰서 움직여야지. 대놓고 그쪽 줄을 댄 처필이나 데하스와 달리, 우리는 어려운 상황이 될 가능성이 크니까.”

“그래서 헤럴드의 비위를 맞출 거라고?”

루베인이 고개를 들며 날카롭게 되묻자, 딜은 더 꾸짖을 마음도 사라졌는지 고개를 저었다.

“안 되겠다. 각하께 찬성하는 건 아니지만, 역시 넌 당분간 더 반성하는 게 좋겠어.”

“…….”

“어머님이 매일 울고 계셔. 적당히 속 썩이고 반성하는 모습 보였으면 좋겠다, 정말.”

마지막으로 그 말을 뱉고 딜이 방에서 나갔다.

‘……정말 이대로 괜찮을까.’

루베인은 다시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대로 헤럴드가 왕이 되어 버리면 트론은 죽을 가능성이 컸다.

트론은 자신 역시 괴물이라 칭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근거 없는 판단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이미 혈육의 피로 손을 물들인 헤럴드보다는 그가 나아 보였다.

트론은 루베인이 받을 땅 일부를 가져가, 한겨울의 추위에 죽을지도 모르는 아이들을 구해 주었다.

그녀는 무언가 쓰여 있는 반투명한 종이를 손에 쥐고 뚫어질 기세로 바라보았다. 고민은 길었지만, 결심은 빨랐다.

“……탈출하자.”

회의에 맞춰 마그달리사 공작과 딜은 수도로 떠난다. 두 사람이 자리를 비우면 분명 탈출하기가 더욱 쉬워질 것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만히 처박혀 있는 것보다는 움직이는 것이 나았다.

그렇게 루베인은 가출을 결심했다.

***

트론은 달빛을 등지고 거울 앞에 섰다. 연보라색의 문양이 공중에 반짝인 후, 거울 안의 초점이 흔들렸다. 이윽고 거울은 트론이 아닌 다른 이의 모습을 띄웠다.

검은색의 긴 곱슬머리를 치렁치렁 늘어뜨린 붉은 눈의 여성이었다. 그녀의 외견만으로는 나이를 추측하기 힘들었다. 보기에 따라서는 중년으로도, 또는 무척 앳되게도 보이는 희한한 분위기의 미녀였다.

[오랜만이에요, 주군.]

“그렇군.”

트론은 최대한 무표정하게 그녀를 마주했다. 이제는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그녀를 대할 때마다 항상 기묘한 압박감에 사로잡혔다.

[주군의 ‘조만간’은 무척 긴가 봐요? 인내심을 시험하시나 했네.]

“바빴다.”

[네에, 그야 바쁘셔야죠. 주군은 그만큼의 사명을 어깨에 짊어지신 분이니까.]

“……용건부터 이야기했으면 하는데, 할리케.”

[주군이 너무 차가워서 섭섭해요. 저희가 그렇게 정이 없는 사이였나요?]

“그대의 입에서 정이라는 표현이 나오는 게 놀랍군. 웰칸의 마녀도 슬슬 정이 고플 나이가 되었나?”

[주군의 밉살스러운 말을 귀엽게 넘길 수 있을 만큼은 나이가 먹었나 봐요.]

할리케는 성의 없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제가 주군의 이모잖아요? 보통 사람들은 조카를 귀여워하며 정을 주는 모양이더라고요.]

“글쎄, 다른 쪽의 혈연은 조카인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라 잘 모르겠군.”

[아하하!]

트론은 그녀의 과장된 웃음소리를 들으며 속으로 한숨을 뱉었다.

웰칸 연합의 장로이자 친모의 여동생, 할리케는 그에게 언제나 거북한 상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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