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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님, 악당 길만 걸어요!-38화 (38/132)

38화. 긍지와 파란의 수도 (3)

한동안 트론을 향한 표면적인 암살 시도는 없었다.

여기서 ‘표면적’이라는 표현은 엘피가 인지하지 못하는 범위라는 뜻이었다.

그사이에 주술에 의한 저주, 독살 시도는 여러 번 이루어졌다.

트론은 웰칸 연합과 가이를 통해 그간의 공격을 뒤처리했다.

사정을 모르는 엘피는 오히려 암살과 관련하여 잠잠한 상황인 것이 불안했다.

그녀는 가이와 함께 업무를 마무리하고 회랑을 걸어가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왕자님께서는 언제까지 위험하게 계실 생각일까요?”

“일단은 암살자가 와야 뭐가 되겠죠? 전하는 순차적으로 방비 수준을 높이실 생각이신 것 같아요.”

“순차적으로요?”

저녁놀이 르터바이스 저택의 크리스털을 통해 회랑에 빛을 흩뿌리고 있었다.

가이는 그 아름다운 광경과 동떨어진 삭막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예를 들어서, 20 수준의 암살자를 보내면 30 수준으로 올리고, 40 수준을 보내면 50으로 올리는 식으로요. 상대에 맞춰서 낭비를 줄이시려는 거죠.”

“……그걸 낭비라고 생각하시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아요. 전하 목숨은 하나인걸요.”

“저도 동감이긴 하지만요. 뭐라고 해야 하나, 왕자님은 쓸 수 있는 자원 중에서 본인 몸을 가장 하찮게 여기시는 경향이 있다고 할까요. 그래서 낭비라고 생각하시는 거 아닐까 싶어요.”

“…….”

엘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가이는 너무 직접적으로 이야기했나 싶어 살짝 후회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엘피 님. 전하는 현명한 분이시니까요. 그렇다고 정말 자신의 안전을 해칠 생각은 없으실 거예요.”

“……네.”

엘피는 입술을 짓씹었다. 그래도 불안한 마음이 떠나지 않았다. 이미 현재는 회귀 전과도, 원작의 내용과도 동떨어져서 굴러가기 시작했다. 라이샤가 아닌 그녀가 아는 미래는 이런 상황에서 아무런 힘을 쓰지 못했다.

‘역시 라이샤에 대해서 더 조사해 보는 게 좋겠어.’

제시드는 자신이 영원히 사라진다고 했지만, 어쩌면 그를 다시 불러올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제시드가 아닌 다른 라이샤가 동시대에 존재해서 그가 사라진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새로운 라이샤를 찾아가서 트론에 대한 예언을 부탁할 수는 없을까.

모두 가설에 불과했지만, 뭐가 되었든 트론에게 도움이 될 만한 단서를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경이었다.

“……가이 님. 혹시 서고는 함부로 들어가면 안 되나요?”

르터바이스 본저의 별채에는 그 역사만큼 자료와 서적이 쌓여 있는 커다란 서고가 있었다.

‘어쩌면 라이샤에 대한 책이나 기록이 남아 있을지도 몰라.’

가이는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보통은 보안 때문에 출입을 금지하고 있습니다만, 엘피 님은 괜찮습니다. 나중에 열쇠를 드릴 테니 언제든지 편할 때 들어가세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서고는 갑자기 왜요?”

엘피는 잠시 눈알을 굴렸다가 반쯤 솔직하게 말했다.

“라이샤로서 제가 원하는 대로 미래를 볼 수는 없어서요. 혹시 과거 라이샤들의 기록을 보면 다른 방도가 있지 않을까 하고요.”

“전하가 걱정되어서 그러시는군요.”

“네…….”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도와드리겠습니다. 저도 시간 있을 때 서고에서 관련 자료나 서적이 없는지 찾아 놓지요.”

“정말 감사해요.”

내내 어두웠던 엘피의 얼굴이 그제야 약간 밝아졌다.

가이는 사람을 이렇게나 걱정시키는 트론도 참 죄가 깊다고 생각하며 엘피를 동정했다.

***

“……아나이테.”

깊은 밤, 트론이 쉰 목소리로 전서구를 불렀다. 연보라색의 비둘기가 푸드덕 소리를 내며 모습을 드러냈다.

“르터바이스 소백작. 깨어 있나?”

트론이 묻자 전서구가 입을 벌려 가이의 목소리를 전했다.

[네, 전하. 무슨 일 있으신가요?]

“내 방 주전자에 손을 댄 자가 있는 것 같으니 바로 색출해. 처리되는 대로 이쪽으로 와.”

[알겠습니다아.]

사전에 준비를 해 두었기에 어떤 인간이 어떤 경로로 접근했는지는 바로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트론은 기침을 참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숏소드를 허리에 찼다.

금세 처리를 끝마친 것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가이가 푸른 포털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범인은 바로 찾아서 가두었고, 이후 방비를 한 단계 올리기로 했습니다.”

“응. 수고했다.”

“더 지시 내릴 것 있으세요?”

“그게…… 쿨럭.”

트론이 참고 있던 기침을 뱉자 입에서 피가 흘렀다. 검붉은 색이 뚝뚝 흘러 트론의 셔츠와 이불깃을 물들였다.

가이는 혀를 차며 가지고 있던 손수건으로 그의 입을 닦아 주려 했다.

그러나 트론은 고개를 저으며 자신의 소매로 대충 입을 닦아 냈다.

“아니, 일부러 독을 드실 필요는 없잖습니까.”

“휘발성이면 독 성분 조사를 못 한다. 직접 섭취해서 확인하는 게 빨라.”

“치료 안 하셔도 돼요?”

“알아서 처리했으니 괜찮다.”

“진짜, 왕자님 제발…….”

이마에 손을 대며 가이가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했다.

“엘피 님이 알면 야단날 겁니다. 적당히 하세요.”

“…….”

“애초에 전하를 왕으로 만들려고 이 고생을 하는 건데, 정작 본인이 목숨을 잃으시면 본말전도 아닙니까. 이러다가 왕좌에 앉자마자 쓰러지시겠다고요.”

“어차피 길지도 않을 목숨인데.”

트론은 피에 젖어 거추장스러워진 셔츠를 벗으며 무심히 중얼거렸다.

“왜요, 왕 되셔서 천년만년 장수하셔야죠.”

“아직 이 나라 인간들이 제정신이면 나라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는 왕을 왕좌에 계속 붙여 놓지는 않겠지.”

“…….”

가이는 눈을 찡그렸다. 어차피 단순한 협력 관계였고, 그럴싸한 우정 같은 것도 존재하지 않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트론이 이런 식으로 자기 파멸적으로 구는 걸 보면 마음이 안 좋아졌다.

“전 말이죠, 전하. 기본적으로 쾌락주의자랍니다.”

“그건 말 안 해도 안다.”

“에이 참, 들어보세요. 그러니까 전 차라리, 전하도 저처럼 본인이 즐겁고 좋아서 그러시는 거면 별로 상관없어요. 폭군이 되어서 국고를 낭비하고 아무나 잡아 죽이며 화려하게 살다 가고 싶다는 것도 삶의 목표는 될 수 있겠죠.”

“…….”

“그렇지만 왕자님은 그런 것도 아니잖아요. 전 전하를 보고 있으면 말이죠, 꼭 고행하는 수도승을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요.”

트론은 새 셔츠의 단추를 모두 채우고 대꾸하지 않았다.

가이가 어둠 속에서도 희미하게 빛나는 자신의 은발을 쭉쭉 잡아당기며 투덜거렸다.

“보고 있는 제가 즐겁지 않단 겁니다. 쾌락주의자인 제 신념에도 어긋나요.”

“정말 아무래도 좋은 소리군.”

“아니면 혹시 자학하는 것으로 쾌감을 느끼는 취향이셨어요?”

그 말을 듣자마자 트론은 그를 발로 차 버렸다.

가이는 과장되게 뒤로 쓰러지며 낄낄 웃었다.

“그래서. 지시 내리실 일은요?”

트론이 숏소드를 쥐며 담담하게 말했다.

“웰칸 쪽의 보고에 의하면, 무장한 암살자가 오늘 잠입할 예정이라고 한다.”

가이는 쓰러지느라 흐트러진 안경을 밀어 올리며 얼른 몸을 일으켰다.

“그럼 처음부터 그렇게 말씀을 해 주셔야죠!”

“그대는 다른 방에서 대기하고 있어. 다른 호위 인원들에게도 지시하도록 해.”

“전하 위험한 일 하시면 엘피 님한테 다 일러 버릴 거예요!”

트론은 시끄럽게 투덜대는 가이를 밀어내며 고개를 저었다.

“나도 딱히 죽을 생각은 없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가이는 몇 마디 불평을 더 뱉어 낸 후에야 밖으로 나갔다.

***

방에 혼자 남은 트론은 벽에 몸을 기댄 채 어둠 속에서 숨을 죽였다.

‘목이 따끔거리는군.’

지효성 독이 계속 퍼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트론은 미간을 찌푸리며 침을 삼켰다. 계속 야습에 대비하고 있는 상태였기에 수면 부족이라 몸도 약간 둔했다.

하지만 그 외에는 컨디션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하고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로부터 약 1시간쯤 흘렀을 때, 소리 없이 창이 열렸다.

온몸을 까맣게 감싸 정체를 숨긴 괴한이 망설임 없이 침대를 향해 도끼를 찍었다.

트론은 한 치도 주저하지 않고 그의 등에 검을 찔러 넣었다. 괴한이 고통에 찬 신음을 흘렸다.

“아, 큭.”

트론은 그대로 몸의 무게를 담아 상대를 침대 밑으로 차 버린 후 목을 밟았다.

그자는 고통에 꿈틀거리면서도 팔을 휘저어 트론을 쳐 내려 했다. 그 공격을 물 흐르는 듯한 동작으로 피하며 트론은 괴한의 명치를 찼다.

기절할 때까지 간격을 두지 않고 한 번, 두 번. 세 번째 발차기에 그가 완전히 기절했다.

“……쿨럭.”

트론은 그제야 참고 있던 기침을 겨우 뱉어 냈다. 끈적한 액체가 다시 흘러내렸다.

피를 무심히 닦아 낸 다음 트론은 그를 구속하며 아나이테를 통해 가이에게 상황이 끝났음을 알렸다.

잠시 후 방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가 큰 소리로 그를 불렀다.

“……읏, 왕자님!”

트론은 당황하여 고개를 들었다.

엘피였다. 당연히 가이가 들어올 거라고 생각했던 트론은 저도 모르게 괴한을 구속하던 손을 멈추고 말았다.

“이나드 영애……?”

“잠깐만요, 전하, 피가!”

엘피가 새하얘진 얼굴로 그에게 달려왔다.

가이가 그녀의 뒤에서 느긋하게 나타나며 고개를 저었다. ‘그거 보세요’라는 표정이었다.

“다, 다치신 거예요?”

“아니니까 진정해. 상대의 피가 묻은 거야. ……소백작. 그대는 멀뚱히 있지 말고 이자를 끌고 가.”

“네에, 네에. 일단 상처 적당히 치료한 다음 나중에 신문하겠습니다.”

가이는 트론에게 암살자를 인도받아 대기하던 인원들과 함께 끌고 나갔다.

엘피는 그런 주변 상황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트론의 몸을 붙들었다.

“괜찮…… 으신 거 맞죠?”

두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트라우마를 모르는 트론은, 엘피가 왜 이렇게까지 두려워하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정말 괜찮다. 그렇게 걱정할 것 없어. 그것보다 왜 이나드 영애가 여기 있는 거지?”

엘피는 훌쩍거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왕자님한테 위험한 일 있으면 바로 알고 싶다고 그때 그랬잖아요. 가이 님이 불러 주셨어요.”

“소백작이 쓸데없는 짓을…….”

“이, 이제 이런 일 안 하실 거죠? 왕자님, 역시 너무 위험해요.”

짜내는 듯 간절한 목소리였다. 트론은 엘피의 뺨을 어루만졌다.

“응. 걱정 안 해도 돼. 누나.”

그가 나직하게 속삭이자 엘피는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사실 트론이 구태여 자신을 미끼로 세운 것은 주변으로 타깃이 튀지 않게 하려는 이유도 있었다.

변경백이나 소백작도 그렇지만, 엘피가 말려들어 위험해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헤럴드 측의 암살 의뢰 방식은 이제 전반적으로 확인되었다.

그쪽도 여유가 없어서인지 생각했던 것보다는 암살자들의 수준이 높지 않았고, 이 정도라면 크게 문제없을 듯했다.

이후 그에 맞춰 방비 수준을 올리면 엘피를 포함하여 주변이 위험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 안전을 확보할 수 있다면 독으로 약간 몸이 상하는 것이나 그간의 암살 위험은 그다지 큰 손해가 아니었다.

트론은 눈물을 그치지 못하는 엘피를 달래듯이 안아 주며 만족했다.

아마도 엘피 본인이 알았다면 절대로 기뻐하지 않았을 보호 방식이었다.

사정을 모르는 엘피는 이후 결단코 트론이 위험에 빠질 일을 찬성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차라리 내가 정말로 라이샤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자신의 무력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의 심장 소리가 껴안고 있는 몸을 통해서 전해져 오는 것만이 위안이었다.

피를 흘리며 숨이 꺼져 가던 트론의 마지막 모습을 필사적으로 머릿속에서 지우려고 노력하며 엘피는 트론을 꽉 마주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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