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긍지와 파란의 수도 (2)
“이나드 영애.”
“……네.”
“정말로 위험을 무릅쓰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방금 말했지만, 겉으로 보이는 호위가 몇 안 되는 것처럼 위장하는 것뿐이야.”
물론 독살이나 주술에 의한 저주도 통틀어 방비를 느슨하게 할 예정이었지만, 트론은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상대가 쓸 수 있는 최대한의 수단과 자원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래야 효율적으로 이후 대책을 마련할 수 있으니까. 즉, 장기적으로 암살에 의한 위험이 더 줄어드는 셈이다. 이해해 줄 수 있겠나?”
“…….”
엘피는 마음 같아서는 계속 트론 곁에 붙어 있겠다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은 무력하고, 오히려 그에게 방해가 될 것을 알았다.
“……그럼, 적어도 왕자님한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바로 알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건 소백작이 준비해 줄 것이다. 그는 마법사니까.”
트론이 흘끗 가이 쪽을 보았다.
가이는 ‘에고고’ 하고 과장되게 앓는 소리를 내며 손을 펼쳤다. 반투명한 보라색 비둘기 한 마리가 빈 공간에 나타났다.
“이, 이건……?”
“마법 전서구입니다.”
가이가 등을 톡 치자, 비둘기가 푸드덕 소리를 내며 트론의 머리 위에 올라앉았다.
“평소에는 모습을 감추고 있지만, 그 아이의 이름을 부르고 말씀하시면 저에게 전달된답니다. 포털의 좌표 역할도 하니까, 제가 바로 전하 쪽으로 이동할 수도 있어요.”
엘피는 그 비둘기를 신기하게 쳐다보다가 가이에게 물었다.
“이름이 어떻게 되나요?”
“아나이테라고 불러 주세요.”
저도 모르게 심각한 상황도 잊고 실소할 뻔했다. 설화로 남아 있는 전설적인 미녀의 이름을 비둘기에게 붙여 주는 센스가 과연 가이다웠다.
“암컷인가 봐요.”
“아뇨, 수컷인데요.”
“…….”
트론은 머리 위의 비둘기가 귀찮은 듯 손을 휘휘 저어 쫓아냈다. 몇 번 날갯짓하던 비둘기는 가이의 어깨로 위치를 옮겼다.
“작명에서까지 그대의 변태 같은 취향을 과시할 건 없는데.”
“사람이 마법 기술의 정수를 선물했는데 더 기뻐해 주실 순 없는 건가요!”
“내 알 바는 아니군.”
가이는 툴툴대며 다시 손을 펼쳤다. 이번에는 분홍색 비둘기가 나타나 엘피의 머리 위에 올라갔다.
“그 아이는 아일란입니다.”
미녀 아나이테의 여동생의 이름이었다. 왠지 이 비둘기도 수컷일 것 같았으나, 엘피는 부러 묻지 않았다.
“상대를 지정하지 않고 전언을 보내시면 저한테 오지만, 아나이테와 아일란도 서로 소통이 가능하답니다. 아나이테한테 전해 줘, 라고 하면 그 이후 엘피 님이 하는 말이 전하한테 갈 거예요. 전하 쪽도 마찬가지고요.”
트론은 턱을 괴고 가이를 보았다. 그의 마법은 트론이 웰칸 측과 연락할 때 사용하는, 물체를 매개로 하는 대화 전달 주술을 마법으로 응용한 것이었다.
트론의 주술은 본인과 상대방 모두 주술사여야 한다는 제약이 있으니, 이쪽이 더 편리했다.
‘짧은 기간 안에 이런 연구를 해내다니 실력이 뛰어나긴 해.’
“하븐에서도 두 분에게 이 아이들을 딸려 보냈으면 좋았을 텐데, 그땐 완성이 덜 된 상태라서. 앞으로 유용하게 써 주세요.”
가이가 못내 섭섭한 얼굴을 했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마법 전서구를 완성한 후에 엘피를 놀라게 해 주려고 했는데 트론이 먼저 밝혀 버려서 분했던 모양이었다.
“멋진 선물 감사합니다, 가이 님.”
“별말씀을요. 참고로 지속적인 마력 충전이 필요한데, 어차피 저희야 매일 얼굴 보니까 그때그때 할게요.”
가이가 설명을 마치자 아나이테와 아일란이 공중으로 날아오르더니 공기에 녹아들듯 사라졌다.
“자, 그럼 엘피 님의 걱정은 제가 덜어 드린 셈일까요?”
“네. 정말 감사합니다.”
사실은 아직 불안이 남아 있었지만, 그래도 완전히 호위를 치우는 것은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여차하면 마법 전서구도 있으니 가이가 움직여 줄 것이다.
‘……그래도 왕자님이 암살 위험에 노출되는 건 정말 싫어.’
회귀 전과 같은 일이 반복되지는 않을 것이다. 엘피는 그렇게 자신을 달래며 애써 마음을 진정시켰다.
***
“그럼 다음으로는 암살이라는 방법이 좌절된 헤럴드 전하가 어떻게 나올지를 생각해야겠군요. 전하보다 계승권이 낮고, 옥새도 없으니 필사적일 거예요.”
가이는 간식으로 갖다 놓은 말린 무화과를 씹어 삼킨 후 본론으로 돌아왔다.
“아마 데니옴 회의가 끝날 때까지 암살 시도 자체는 끊이지 않을 거다. 숙부로서는 그게 가장 깔끔한 결말이긴 하니까.”
자신에게 죽을 위기가 계속 닥칠 거라는 소리를 잡담이라도 되는 양 평안하게 하는 트론을 보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엘피는 불만을 애써 삭이며 질문했다.
“역시 이번 회의에서 모였을 때 왕위를 굳히려고 할까요?”
가이가 끄덕이며 트론 대신 대답했다.
“두 공작가를 등에 업고 있으니 헤럴드 전하의 발언력이 세긴 하죠. 억지로 밀어붙일 가능성이 없지는 않겠네요. 데하스와 처필이 얼마나 정치적 부담을 질 각오가 있느냐에 달려 있긴 합니다만.”
왕위 계승권이 높은 것도 모자라 트론은 옥새까지 쥐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를 무시하는 것은 두고두고 비난받을 결정이었다. 역사에도 기록이 남을 것이다.
하지만 두 가문이 명예와 실리 중 무엇을 선택할지는 미지수였다.
“그러니 이쪽에서도 거부하기 힘든 패를 내밀어야지.”
트론은 양손을 깍지 끼워 턱을 괴며 말했다.
“역사상 조카를 살려 둔 채 왕위에 오른 왕이 있었으니까.”
“로라 2세 말씀이시군요?”
왕실의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계승권이 낮은 경우 자신보다 순위가 높은 계승권자들을 모두 죽여 왕위에 오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중흥의 군주로 유명한 로라 2세는 달랐다.
로라 2세는 약 500년 전, 당시 왕이었던 첼시의 둘째로 태어났다.
첼시 왕은 주술사를 수면으로 끌어올리고 복지에 신경을 쓴 장본인이었으나, 경제 정책에서 크게 실패하여 암흑기를 불러왔다.
이 상황을 수습해야 했던 것은 로라의 오라비인 몰른 왕이었다. 그러나 그는 왕위에 오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슬하에 어린 자식 하나만을 두고 세상을 떠났다.
이때 왕실에는 웃어른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 몰른의 동생이었던 로라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그녀는 귀족 회의를 통해 한 가지를 제안하게 된다. 어린 조카가 성인이 될 때까지 자신이 임시 명예직인 대공을 맡아 4대 공작가와 협력 체제로 나라를 이끌겠다는 내용이었다.
이것이 역사적으로 유명한 ‘대공 선언’이었다. 왕이 없는 상태로 이어진 이 10년가량의 시기를 ‘대공 시대’라고 따로 분류해 놓기도 했다.
“하지만 실제로 그 조카는 성인이 되고 나서 계승권을 포기했죠?”
엘피가 역사책에서 읽었던 내용을 떠올리며 물어보자 트론이 이어서 설명해 주었다.
“그래. 그 과정에 압박이 있었는지는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게 갈리지만, 결론적으로 그녀의 조카는 평안하게 여생을 보냈지. 로라 2세는 대공 시절에 보여 준 뛰어난 정치력을 왕이 된 후에도 발휘하여 스레데니옴의 암흑기를 종식시킨 중흥의 군주로 칭송받았고.”
“왕자님께서는 헤럴드 전하에게 대공 직을 제안하실 생각이시군요.”
명군으로 유명한 왕이 그렇게 했다는 사실은 무시하기 어려운 전례였다.
“실종된 사람에 대한 사망 선고까지는 통상 5년이 필요하지. 왕세자인 형님이 계시지 않는 이상 내가 왕위에 오르는 일은 저어되니 그때까지…… 라는 단서를 달아 두는 형태겠군.”
가이는 안경을 고쳐 쓰며 트론의 의견에 찬성했다.
“그 제안은 아마 능구렁이 데하스와 처필도 솔깃하게 들을 겁니다. 5년간 국사를 직접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건 매력적일 테니까요.”
“……그리고 그 5년은 숙부가 종막으로 향하는 기간이 될 것이다.”
집무실 안에 정적이 흘렀다. 엘피는 조용히 숨을 삼켰다. 그녀의 복수 역시 그때 이루어질 것이다.
‘그럼, 그 이후는……?’
라이샤였던 제시드는 소멸해 버렸다. 이제 엘피가 가짜 라이샤라는 걸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입을 다물고 있으면 그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너무 비겁하게 느껴졌다.
‘……그때가 되면, 왕자님께 사실을 고백하고 벌을 구하자.’
그렇게 생각하자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엘피는 트론 쪽을 향해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트론은 아주 잠깐 따뜻한 얼굴을 했다가 금세 표정을 지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은 내가 방금 말한 내용을 토대로 관련 법안과 사료를 정리하도록.”
“네, 차질 없이 준비하겠습니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바쁜 겨울의 시작이었다.
***
“빌어먹을……. 빌어먹을!”
브요른 남작은 욕지거리를 뱉으며 책상을 발로 찼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옥새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그는 숙소를 이 잡듯이 뒤졌다. 다음 날 들려온 소식은 갑자기 나타난 셋째 왕자가 옥새를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 뒤로도 좋은 일이라고는 없었다.
몇몇 중요 거래처는 눈치를 보듯 이쪽과 손을 끊었고 헤럴드는 더 광포해져 자신을 쥐어짤 기세로 현금을 요구했다.
그 외에도 서서히 목을 조르는 듯 주변 사정은 악화되었다.
‘뭐가 어찌 되었든 헤럴드 그 새끼를 왕위에 올려야 해.’
파산이 목전이었다. 이윤을 내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해야 했다.
그때 집사가 조심스럽게 그의 서재에 들어왔다.
“가주님, 우편물입니다.”
“놓고 나가.”
어차피 대다수 편지는 나쁜 소식이 적혀 있을 것이다. 브요른 남작은 내키지 않는 얼굴로 봉투의 보낸 사람 이름만 확인했다.
그러던 중, 뜻밖의 소인을 발견하고 그는 이름을 다시 읽었다.
“……데하스 공작가?”
그 가문도 자신과 같은 친헤럴드 파긴 하지만, 입장은 천지 차이였다.
브요른 남작은 낮은 작위 때문에 파벌 내에서도 무시당하는 위치였다. 헤럴드의 돈줄 역할을 하며 엄청난 현금을 붓고 온갖 궂은일을 하는데도, 라블미 백작에게 일방적인 지시만 받을 뿐이었다.
그가 우연히 발견한 옥새를 탈취한 것은 만약을 대비한 보험이기도 했으나, 그런 일이 쌓인 억하심정도 없지 않았다.
‘나랑 제대로 된 이야기도 해 본 적 없는 대귀족님이 무슨 일이지.’
의아함을 느끼며 그는 봉투를 열어 안에 들어 있는 편지를 단숨에 읽어 내렸다.
「……따라서, 우리 데하스는 트론 전하가 가지고 있는 그 옥새가 가짜일 것으로 판단하고 있소. 필시 마그달리사 공작이 협작을 꾸민 게지요. 종이에 도장이 찍히는 모양새만 같으면 의심을 사지 않을 테니까요. 하지만, 헤럴드 전하께서 진짜 옥새를 ‘찾아내신다면’ 그만입니다. 셀토아 남작에게 경의 이야기는 자주 들었소이다. ‘대용품’을 전문으로 다룬다지요…….」
“하하, 아하하! 역시 신이 아직 나를 버리진 않았군!”
브요른 남작은 소리 내어 웃었다. 그는 곧바로 외투를 들고 문을 쾅 닫으며 방 밖으로 나갔다.
이미 많은 강을 건너온 브요른 남작에게 있어 데하스 공작의 제의는 오히려 기쁜 일이었다.
옥새를 위조하는 것은 중죄에 속했으나 헤럴드가 왕좌를 차지한다면 별문제 될 일도 아니었다.
진짜는 얼마든지 가짜로 전락하고, 가짜야말로 진짜인 양 포장된다.
그리하여 그 중죄를 짊어지는 건 위조된 옥새로 정통성을 사칭한 트론 스레데니옴의 몫이 될 테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