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충정과 만년설 호랑이 (2)
‘하지만 이야기는 바뀔 거야. 이제 ‘바른길’은 트론 전하가 성군이 되는 길이니까.’
폭군 트론의 목을 치는 역할이 아닌, 그가 왕으로 향하는 길을 보좌하는 가문으로서 르터바이스가 위치할 것이다.
아군이 된다면 그만큼 든든한 가문도 없었다. 트론의 첫 뒷배로 그들을 고른 건 최선의 선택이었다.
다만, 문제는 어떻게 설득하여 아군으로 끌어들이느냐 하는 부분이었다.
엘피는 원작에서 주인공이 어떤 방식으로 르터바이스 가문의 힘을 얻었는지 원작의 내용을 다시 떠올려 보았다.
요약하자면 그녀는 고결한 의지와 품성으로 그들을 설득했다.
폭군이 된 트론에 의해 백성이 도탄에 빠졌으니 이를 구원해야 한다는 명분도 있었다.
‘음, 이거라면 지금 우리 왕자님도 고결한 의지랑 품성이 있으니까 문제없겠어. 자신의 형을 시해한 헤럴드를 끌어내리는 명분도 있고.’
흐뭇하게 웃으며 엘피는 트론을 바라보았다. 르터바이스 영지로 출발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가져갈 짐을 점검하던 트론이 그녀의 시선에 의아한 얼굴을 했다.
“왜 그러지?”
“아…… 왕자님이라면 쉽게 르터바이스의 힘을 얻으실 수 있겠다, 그 생각을 했어요.”
“만년설 호랑이는 중앙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헤럴드 숙부의 일이 아니어도, 과거에 몇 번이고 비슷한 혈육 상잔은 반복되었지. 그러나 단 한 번을 빼고 그들이 움직인 적은 없었다.”
그 ‘단 한 번’에 대해서는 엘피도 알고 있었다. 동화책으로도 남아 있는 이야기이기에 어릴 때 읽은 기억이 있다.
“그리고 움직인 그 한 번도 실패로 돌아갔지. 쉽게 우리를 도와줄 거라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보통은 쉽게 도와주지 않겠지만, 왕자님이라면 괜찮을 거예요.”
“그럼 라이샤로서 그들을 설득할 방법을 제시해 주겠나?”
그의 질문에 엘피는 배시시 웃었다.
“왕자님이 지니신 고결한 의지와 품성으로 그들에게 진솔하게 부딪치시면 됩니다. 그럼 분명히 알아줄 거예요.”
“…….”
그가 침묵하는 이유를 짐작하지 못하는 엘피를 바라보며 트론은 작게 중얼거렸다.
“이럴 때는 확신이 생기려다가도 의심스럽군…….”
“네?”
“……아니. 해야 할 말을 고민해 보겠다는 소리다.”
“네!”
그렇게 각자의 상념을 뒤로 한 채, 두 사람은 르터바이스의 중심 도시 올페마로 떠나게 된 것이었다.
***
올페마 역에 도착한 두 사람은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엘피는 처음으로 방문하는 낯선 도시의 모습에 압도되었다.
카라스는 수도 근교 도시이기 때문에 건물 양식이나 도시 구조가 크게 색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올페마는 크리스털을 기조로 한 유리성 같은 건물들, 나선 계단을 모티브로 한 미로같이 복잡한 도시 구조가 눈을 뗄 수 없게 했다.
“금속이랑 유리 공예가 발달한 도시였죠…… 아니, 도시였지.”
“우리나라 최대 광산을 보유한 영지니까.”
“거리가 예쁜 건 좋은데, 길 찾을 때 헷갈릴 거 같네.”
엘피는 트론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복잡한 도시에서 서로 흩어져 미아가 되는 일만은 사양하고 싶었다.
트론은 엘피의 의도를 알아채고 바로 손을 마주 잡았다.
“일단은 숙소를 잡고, 변경백과 접촉할 방법을 찾아야겠어. 괜찮지, 론?”
“응, 누나.”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번쩍이는 번화가를 가로질러 그들은 한참 거리를 헤맸다.
고생 끝에 카라스 때와 마찬가지 요령으로 적당한 수준의 숙소를 잡은 후 끼니를 때우고 그들은 본격적으로 머리를 맞댔다.
“이제 르터바이스 변경백을 만나 봐야 합니다만, 약속도 없이 무작정 찾아가도 만나 줄 리는 없겠죠.”
“그야 그렇겠지. 아마 입구에서 내쫓을 거다.”
이 부분은 엘피로서도 조언하기 어려웠다.
원작 여주는 공녀님이었고, 르터바이스 변경백을 편하게 만날 수 있는 위치였다.
하지만 지금의 두 사람은 신분을 숨기고 도망치는 처지기에, 정식으로 방문 약속을 잡을 루트가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솔직하게 고백했다.
“죄송해요, 왕자님. 제가 보는 가능성의 미래는 단편적이라서, 어떻게 하면 변경백과 접촉할 수 있을지는 읽지 못했습니다.”
“아니, 사과할 일은 아니다. 왕이 될 자가 모든 것을 그대에게 의지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으음, 뭔가 왕자님의 주술을 이용할 수는 없을까요? 변경백이 볼 수 있는 곳에 메시지를 남긴다거나…….”
엘피가 묻자, 트론이 어딘지 차가운 웃음을 보였다.
“그대는 내가 주술사라는 걸 알고 있었지. 그렇다면 그 사실을 숨긴다는 것도 알 텐데.”
아차 싶은 마음에 그녀는 눈을 내리깔았다.
회귀 전의 트론에게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거리감을 재지 못했다. 그는 곧잘 주술을 사용했으니까.
하지만 원작에서는 나중에 밝혀지는 반전 요소였다. 또한, 그가 주술사라는 사실을 함부로 입에 올렸다가 살해당하는 조연 캐릭터도 있었다.
주술사는 이 나라에서 평민보다도 천한 취급을 받는 하위 계층이기 때문이다.
“……죄송, 합니다.”
눈을 꽉 감고 배려가 부족했던 점을 사과하자, 그녀의 정수리에 무언가 따뜻한 것이 올라왔다. 다름 아닌 트론의 손이었다.
“괜찮다. 비밀 통로에서 마수를 헤치고 지나갈 때 유용하게 썼으니, 떠올리는 것도 당연할 테지.”
문지르듯이 갈색으로 얼룩덜룩해진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그는 말을 이었다.
“아무튼,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겠다. 오늘은 쉬고 내일 정보를 수집하도록 하자.”
그의 다정한 말에 엘피는 안도했다.
***
‘자, 그럼…….’
엘피가 샤워를 하러 자리를 비운 사이 트론은 사먼에게 몇 가지 지시 사항을 내렸다.
르터바이스 변경백과 접촉하기 위해 깔아 둬야 하는 밑밥, 또한 설득에 실패했을 시에 대비한 준비였다.
이제 사먼을 통해 르터바이스 측으로 자연스럽게 트론의 정보가 들어갈 것이다.
이후 그쪽의 움직임을 파악하여 접촉하면 그만이니, 르터바이스 가문과 만날 기회를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그들을 만나고 나서 ‘어떻게 설득하느냐’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예지가 아니더라도, 헤럴드 밑으로 들어가는 선택지를 버린 이상 르터바이스는 트론이 쥘 수 있는 최상의 패 중 하나였다. 놓칠 생각은 없었다.
다만, 라이샤로서 그녀가 제시한 방법은 과정의 디테일이 빠져 있었다.
‘고결한 의지와 품성’만으로 르터바이스 가문의 힘을 얻을 수 있었다면 이미 몇십 번이고 중앙 정치에 그들의 이름이 남았을 것이다.
‘말만으로 설득하는 건 쉽지 않겠지. 하지만 일단 라이샤를 믿어 볼까.’
선량한 왕자의 ‘고결한 의지와 품성’으로 헤럴드를 끌어내리자고 설득하는 정공법. 트론은 그 방법을 채택하기로 했다.
그렇지만 정말 통할 거라고는 믿기 어려웠기에 차선책을 생각해 두었다. 피 냄새가 날 가능성이 있으므로 딱히 선호하는 방식은 아니지만, 필요하다면 어쩔 수 없었으니까.
이전의 자신이라면 ‘정공법으로 설득’이라는 말도 안 되는 수를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미한 가문의 영애가 하는 이야기만 듣고 뜬구름 잡는 방법을 쓰게 되었다는 걸 과거의 자신이 알게 된다면 기막혀하지 않을까.
‘애초에…….’
고결한 의지도 품성도 자신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가 걷는 왕의 길에는 우아한 이상이 없다. 질척한 욕망도 없다.
할 수 있는 건 그럴싸한 무언가가 존재하는 양, 텅 비어 있는 속이 보이지 않도록 꾸며 내는 일뿐이었다.
트론은 오른손을 쥐었다 폈다. 염색 때문에 조금 거칠어진 엘피의 머리 감촉이 손바닥에 남았다. 그녀는 매사에 그렇게 필사적이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트론이었다.
그녀가 원하는 ‘착하고 다정하며 정의로운 왕자님’ 노릇을 잘하고 있는지 트론 자신은 알기 어려웠다.
터부를 건드린 엘피에게 그냥 ‘괜찮다’라는 말만 건네면 그만이었을 텐데,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쓰다듬은 이유 역시 잘 알 수 없었다.
***
다음 날, 두 사람은 올페마 사람들을 탐문했다.
르터바이스 변경백의 팬이라서 얼굴을 보고 싶은 뜨내기 관광객을 위장했더니, 의외로 사람들은 편하게 말을 해 주었다. 인망이 높은 자신들의 영주를 자랑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수도는 역모로 한창 난리지만, 최북방인 이곳 사람들은 평소와 다름없어 보였다. 물리적인 거리가 먼 것도 이유겠지만, 영주에 대한 신뢰가 그만큼 두터운 듯했다.
사람들에게 변경백 자랑을 잔뜩 들은 다음 내린 결론은, 그녀를 직접 만나는 건 역시 어렵다는 것이었다.
사적으로 외출을 많이 하는 사람이라면 그곳에 난입하는 방법이라도 있을 텐데, 밀리엔 르터바이스는 공식적인 루트 외에는 일절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두 사람은 우선 점심을 먹으러 갔다.
“직접 만나기 어렵다면 역시 서신을 전할 방법을 생각해야겠는데.”
여름이지만 최북방답게 서늘한 날씨에 맞춰 약간 두꺼운 후드 재킷을 입은 트론이 중얼거렸다.
그와 마주 보고 테이블에 앉아 있던 엘피가 샌드위치를 삼킨 다음 끄덕였다.
“일반적인 방식으로 우편을 넣는 건 어렵겠지?”
“응. 귀족가라면 사용인 선에서 모든 우편물을 미리 확인할 테니까. 귀족가나 왕가의 소인이 찍히지 않은 건 윗선으로 전달될 확률이 희박하지.”
이전보다 능숙해진 평민의 말투로 담담하게 답한 다음, 트론은 포크를 내려놓고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싸구려 식당에 어울리지 않는 완벽한 예법이었다.
‘……말투를 바꿔도 품위 있는 동작 때문에 전혀 평민 같지 않아.’
회귀 전에도 도피 생활 최고의 장애물이었던 트론의 분위기에 엘피는 속으로 탄식했다.
물이 든 유리잔을 만지작거리며 그는 말을 이었다.
“남은 방법은 변경백 곁에서 가까이 일하는 이를 포섭해서 인편으로 보내는 것이지만, 이것도 믿을 수 있는 상대가 아니면 아무리 많은 돈을 쥐여 준다고 해도 확실하지 않지.”
“내가 그 입장일 때는 몰랐는데 평민이 귀족을 만난다는 거 정말 어려운 일이었네…….”
그녀의 넋두리를 듣고 트론이 피식 웃었다.
오늘 내내 뚱한 표정을 하고 있었기에 처음 보는 웃음이라 엘피는 살짝 기분이 좋아졌다.
“걱정 마, 론. 정 안 되면 내가 변경백이 타고 나가는 마차에 뛰어들기라도 할게.”
“그만둬.”
그녀의 너스레에 정색하는 트론을 보고 엘피는 웃음을 터뜨렸다.
더 웃게 하고 싶었는데 농담의 방향성이 잘못된 모양이었다.
***
번화가에서 필요한 정보를 수집한 트론은 슬슬 르터바이스 측과 만나기 위해 뿌려 둔 떡밥을 회수할 생각이었다.
그는 점심식사를 마치고 엘피에게 르터바이스 본저 쪽에 직접 가 보자고 제안했다.
르터바이스 본저는 올페마 시내에서 서쪽으로 약간 떨어져 있는 고급 주택가에 자리했다.
그곳은 르터바이스 영지 내에 소속된 귀족들의 저택이 모인 구역이었다.
올페마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을 영지로 삼는 귀족들도 이 주택가에 별장을 보유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모양이었다.
그중에서도 르터바이스 본저는 가장 깊숙한 곳에 어마어마한 부지를 차지하는 큰 규모였다.
거기에 스레데니옴 왕국에서도 유수의 역사를 자랑하는 가문이다 보니, 저택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유적과도 같은 위용을 자랑했다.
보통의 평민이라면 이 단계에서 이미 저택에 다가가는 일 자체에 기가 죽을 것이나, 엘피는 회귀 전에 왕궁에서 트론의 직속 시녀를 하고 있었기에 규모에 새삼 놀랄 일은 없었다.
다만, 올페마의 크리스털을 기조로 한 건축 양식의 정수를 보여 주는 저택의 아름다움에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덕분에 정말 관광객의 마음으로 주변을 돌아다닐 수 있었지만, 이렇다 할 수확은 없었다.
르터바이스 본저를 지키는 위병은 바늘 하나 들어갈 분위기가 아니어서 말을 함부로 꺼내기 어려웠다.
올페마 시내에서 사람들을 탐문했던 것처럼 편하게 물어보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엘피는 실망한 얼굴로 트론의 손을 잡아끌고 주택가에서 빠져나갔다.
“헛걸음이었던 것 같네.”
“……괜찮아, 이곳에 온 건 의미 있는 행동이니까.”
“어, 뭐라고?”
“아니, 아무것도. 그보다 크리스털 벽면이 근사한데.”
트론이 가리키는 쪽을 보니 그의 말처럼 거리로 향하는 길 벽면이 모두 크리스털로 장식되어 있었다. 두 사람은 벽으로 가까이 다가가 걸음을 멈췄다.
들어올 때는 반대 방향이라서 발견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마치 스테인드글라스처럼 색색의 크리스털이 어떤 그림을 그려내고 있었다.
숲을 배경으로 서 있는 두 명의 남자.
어딘지 기시감이 있어 한참 쳐다보다가 엘피는 그게 무엇인지 깨달았다.
“아, 비슷한 장면 동화책에서 본 적 있어. <웬필리와 러트니>던가?”
르터바이스 영지를 배경으로 한 설화 중 하나였다.
“응. 웬필리 르터바이스가 러트니 스레데니옴의 영혼과 만나는 장면을 그린 모양이네.”
“맞아, 맞아. 친구인 러트니의 영혼에 설득당한 웬필리가 시 같은 걸 남기고 회군하는 게 결말이었지? 그 시 내용 뭐더라…….”
동화를 떠올리며 기억을 헤아리자, 트론이 답해 주었다.
“지켜야 할 벗을 잃었으매, 호랑이는 그리운 만년설로 돌아가리. 방패와 칼을 지니고.”
그 순간, 뒤에서 감탄한 듯한 청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정확하게 기억하고 계시네요.”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그녀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이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은발의 청년이 생긋 웃으며 안경을 고쳐 쓰고 있었다.
“저희 영지의 고사를 잘 알고 계신 것 같아 영광입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엘피는 트론의 손을 꽉 잡았다.
트론은 청년의 안경 너머 예리한 안광을 응시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떡밥을 뿌렸더니 기대하지 않던 월척이 잡혔군.’
예상했던 것보다 빠르게 르터바이스와 접촉할 수 있을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