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충정과 만년설 호랑이 (1)
─지금도 눈을 감으면 선명하게 기억난다. 근사하고 행복했던 나날이.
트론은 난처한 얼굴로 식탁을 내려다봤다. 그런 그의 옆에서 엘피도 죄인이 된 기분으로 같이 서 있었다.
“누나. 이건 저녁식사가 아니라 음식 재료를 화학 처리했다고 불러야 할 것 같은데.”
“……그게, 중간까지 잘될 거 같은 예감이 들었거든? 정말이야.”
그 말에 대꾸하지 않고 트론은 식탁 위의 참상을 치우기 시작했다.
숯덩이가 되어 있는 감자, 잔혹하게 해체되어 널브러져 있는 호박─채를 썰다가 실패한 듯하다─, 피 웅덩이를 담은 듯한 수프를 모으니 귀신의 집 장식으로 써도 손색이 없을 듯한 모양새였다.
자신에게 가차 없는 그에게 뾰로통하여 엘피가 입을 삐죽 내밀고 항의했다.
“론은 나를 너무 안 믿는 것 같아. 조금만 더 연습하면 이번에야말로 성공할 거라고, 이 누나를 신뢰해 줄 수 없어?”
“그 말을 4년째 듣고 있는 사람의 심정을 먼저 헤아려 주는 건 어떨까?”
“…….”
도피 생활을 시작하고 나서 두 사람 중 요리 담당은 트론으로 정해졌다. 엘피가 악마에게 저주받은 듯한 파멸적인 요리 실력의 소유자였기 때문이었다.
가끔 이렇게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음식 재료를 못 쓰게 만들었다가 그에게 잔소리 듣는 것도, 일상의 한 페이지였다.
그에 반해 트론은 그럭저럭 준수한 요리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물론 전문 요리사에 비할 바는 못 되었으나, 부엌과는 평생 인연이 없었던 무경험자인 걸 참작하면 빠른 학습 속도였다.
엘피의 명예를 위해 변명하자면 자작 영애였던 그녀도 요리와 인연이 없었으니 무경험자이긴 했다. 학습 속도 이전에 규격 밖의 실력이 문제였을 뿐이다.
지옥에서 올라온 요리 실험 결과물들을 처리하자마자, 트론은 식량 창고에 남아 있는 재료를 헤아렸다.
그러고는 물 흐르는 듯한 동작으로 불 위에 솥을 올리고 감자 껍질을 벗겼다.
요리에 익숙하여 어떤 순서로 움직여야 효율적인지 파악하고 있는 사람의 움직임이었다.
“방해돼.”
뒤에서 알짱거리며 도울 게 없나 고개를 내미는 엘피를 향해 그는 축객령을 내렸다.
그녀의 임시 동생은 다정하고 자상하고 친절했으나, 요리에 한해서는 가차 없었다.
“다음에 내가 걸작 요리 만들어서 그 코를 납작하게 해 줄 거야!”
“누나는 요리 재료에 대한 학대를 그만두는 방향으로 검토해 봐.”
“나쁜 놈, 두고 보자!”
그녀는 삼류 악당의 퇴장 대사를 뱉으며 부엌에서 뛰쳐나갔다.
잘잘못을 따지고 보자면 귀중한 식량을 망가뜨린 그녀의 죄가 더 크겠으나, 어쩐지 트론이 더 잘못한 것처럼 몰아가는 상황에 그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다정하고 자상하고 친절한 그녀의 임시 동생이 정색할 만큼 본인의 요리 실력에 구원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엘피 스스로 깨닫기 전까지는 해결되지 않을 굴레일 듯했다.
다시 돌아오지 않는 나날은 기억 속에서 더욱 영롱하게 빛을 발한다.
꿈속에서 그녀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몇 번이고 몇십 번이고 다시 이 꿈을 꾼다 해도, 지루하게 느끼는 날 따위는 오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깨고 싶지 않았다.
***
“……나. 누나.”
“…….”
멀고도 그리운 목소리가 들린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기억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높고 청명한 목소리가.
“으응…….”
“누나. 일어날 때가 되었다.”
론이 나를 깨우고 있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비비다가 문득 엘피는 위화감을 느꼈다.
현재의 상황을 떠올린 그녀는 바로 눈을 떴다.
“……아!!”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이상하다는 듯이 자신을 쳐다보는 트론의 얼굴이 먼저 보였다.
열여섯이었던 꿈속의 그보다 훨씬 작은, 열두 살의 그가.
‘맞아, 도피 중이었지.’
그와 함께 성을 빠져나온 후, 1주가 흘렀다.
“깊게 잠든 것 같더구…… 같더라. 슬슬 역에서 내릴 시각이다. 준비하자.”
“미안해, 론. 피곤했었나 봐.”
“푹 잤으면 됐어. 이제 곧 올페마에 도착이야.”
엘피는 끄덕이며 갖고 있던 가방을 꼭 끌어안았다.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들여 찾아오게 된 올페마는, 르터바이스령의 중심 도시였다.
그들은 르터바이스 영지를 다스리는 영주, 밀리엔 르터바이스 변경백을 만나기 위해 이 험한 국경 지대에 찾아왔다.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니, 만년설의 봉우리로 장식한 르터바이스 산맥이 저 멀리 웅대한 풍채를 자랑하고 있었다.
풍경을 보다가 차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낯설어 그녀는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단발이라기에는 짧고 숏컷이라기에는 애매하게 긴 길이의 어두운 갈색 머리가 흔들렸다.
좋은 염색약을 쓴 것이 아니기에 색상이 얼룩덜룩하고 머릿결도 많이 상했지만, 이나드 영애였던 시절과 인상이 사뭇 달라져 있었다.
머리를 자른 후 카라스의 여관에서 트론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엘피는 차창에 기댔다.
***
그들이 르터바이스 영지를 찾게 된 것은, 카라스에서 이후 목표를 결정했기 때문이었다.
“우선 저희가 해야 할 일은, 옥새를 확보하는 것입니다.”
트론을 왕으로 만드는 첫걸음으로 그녀가 선택한 방안은 그것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소설의 여주인공이 습득할 옥새를 대신 얻는다. 이후 계획까지 고려하자면 가장 타당한 방안이었다.
“처음에 말씀드렸다시피 현재 옥새는 궁성에도, 헤럴드의 손아귀에도 없습니다.”
“숙부가 눈이 뒤집혀서 찾고 있겠군.”
스레데니옴 왕가에 있어서 옥새란 상징적인 의미가 강했다. 천 년이 넘는 역사에서 왕실의 정통성을 그대로 담아온 물건이기 때문이다.
옥새를 손에 넣지 못한 현재의 헤럴드 스레데니옴은 억지로 보위에 오른다 해도 반쪽짜리 왕이 될 수밖에 없었다.
“네, 하지만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현재 옥새는 헤럴드의 수하 중 한 명인 브요른 남작이 보유하고 있으니까요.”
“헤럴드의 수하가 가지고 있다는 말은…… 그가 배신했다는 의미인가?”
“아뇨. 그는 소심한 자입니다. 헤럴드가 무너질 때를 대비한 안전책이죠.”
그는 헤럴드가 반역 후 궁성을 장악하느라 정신없는 틈을 타서 옥새를 몰래 탈취했다.
일단은 헤럴드 밑에 붙어 있지만, 상황을 봐서 언제든지 다른 이에게 갈아타려고 옥새로 보험을 만들어 둔 소심하고 비겁한 인물. 엘피가 알고 있는 브요른 남작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게 그대가 읽어 낸 가능성의 기억인가.”
“네. 다만, 그의 옥새를 쉽게 얻어 내기는 어렵습니다. 현재 저희는 세력이 보잘것없으니 옥새를 양도하도록 그를 설득할 수도 없고, 법을 초월한 방법을 쓸 수도 없으니까요.”
“법을 초월한 방법이라면?”
“으음, 이를테면 브요른 남작을 납치하여 고문한다거나 하는…….”
망설이는 말투로 그렇게 대답하자, 트론이 눈을 가늘게 뜨고 미소했다. 그의 새카만 눈에 이채가 어렸다가 사라지는 걸 포착하지 못하고 그녀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런 방법은 쓸 수 없으니까요.”
“하긴, 리스크가 큰 방법은 피하는 게 상책이지.”
“가능하다고 해도 왕자님께서 그런 방법을 허락하지 않으시리라 생각합니다.”
“……으음. 그래.”
방법론과 도덕론적인 부분에서 서로 인식이 엇갈렸다.
트론은 엘피의 인식을 정정하지 않으며 추가로 질문했다.
“그렇다면 다른 방도가 있다는 것이겠지?”
“그렇습니다. 11월 초, 추수감사절을 기념하여 중립파인 마그달리사 공작의 주최로 북부 귀족 교류 파티가 열립니다.”
이나드 자작가도 북부에 소속되어 있기에, 엘피의 부모님도 매년 그때쯤 파티에 참석하곤 했다.
다만, 이번 행사는 훈훈한 교류와는 거리가 멀었다.
헤럴드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찬성하는 가문과 반대하는 가문, 중립파가 뒤섞인 정치적 격전지가 될 예정이다.
“브요른 남작도 북부 소속이므로 그 파티에 참석합니다. 불안증이 심한 그는, 옥새를 가택에 두고 올 수 없어, 본인이 직접 들고 이 파티에 참석하게 될 겁니다.”
“그때가 기회라는 것이로군.”
“네. 하지만, 저희는 맨몸으로 귀족의 파티에 참석하여 모습을 드러낼 수는 없습니다.”
평민을 가장하는 도망자의 신분으로는 당연히 어림없고, 무작정 정체를 밝히고 모습을 드러냈다가는 헤럴드의 먹잇감이 될 것이다.
“저희를 보호하고 지지해 줄 만큼 힘이 있으며, 헤럴드를 옹호하지 않는 세력을 아군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또한, 북부 교류 파티에 초대받아 참석할 수 있는 가문.”
트론이라면 아마도 엘피가 어떤 가문을 찍었을지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직접 답을 말하지 않고 그를 응시했다.
그녀가 말한 조건에 들어맞는 가문은 딱 한 곳뿐.
“……르터바이스 변경백인가.”
‘만년설 호랑이’라는 이명을 지닌 르터바이스 가문이었다.
***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스레데니옴 왕국은, 북쪽으로 험준한 산맥과 맞닿아 있다.
만년설 봉우리로 장식된 그 산맥을 넘으면, 언제나 겨울이 떠나지 않는 척박한 대지가 얼굴을 내밀었다.
개국 당시 스레데니옴 왕국은 북쪽 지역을 골칫거리로 여기고 있었다. 척박한 대지에서 살아남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마수들이 때때로 산맥을 넘어 남하했기 때문이다. 이 마수들이 넘어오는 것은 당시 사람들에게 자연재해나 다름없었다.
안정적인 주거 환경을 갖출 수 없으니, 현재의 르터바이스 영지에 해당하는 토지는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이었다.
스레데니옴 왕국의 15대 왕이었던 얄파나 스레데니옴은 그 사실을 안타까워했다.
만년설 봉우리는 왕국 전역을 통틀어도 가장 풍부한 자원을 보유했다. 이 토지에 사람들을 정착시키고 광산을 개발할 수 있다면, 왕국이 더 윤택해지리라 생각한 것이다.
이때 나타난 라이샤가 예언을 내렸다. 왕의 충직한 기사 르터바이스 경이라면 그 대지에서 능히 마수들을 제압하고 사람의 터전을 만들 수 있으리라고.
라이샤의 말을 받아들인 얄파나 왕은 르터바이스 경에게 ‘변경백’의 작위를 내리고 국경 일대의 땅을 르터바이스 영지로 지정했다.
강건하고 용맹한 르터바이스 변경백은 수많은 시련을 넘어 만년설의 땅에 봄을 가져온다.
스레데니옴 천 년 왕국의 기틀이 되는 중요한 첫걸음이었다.
그런 연유로 유서 깊은 가문인 르터바이스는 왕국 내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왕위 계승권이 없다는 사실만 제외하면, 체감적 위치로는 후작과 공작 사이로 받아들여졌다.
또한, 중앙 정치에 관여하지는 않아도 나라의 위기에 먼저 나서서 언제나 바른길을 이끄는 등불로 칭송받았다.
그런 상징적인 위치까지 합쳐져, 르터바이스의 힘을 얻는다는 것은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걸 알고 있기에, 엘피는 복잡한 심경을 느꼈다.
원작에서는 폭군이 된 트론에 대적하여, 주인공을 도와 그의 목을 치는 데 둘도 없는 역할을 하던 가문이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