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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님, 악당 길만 걸어요!-6화 (6/132)

6화. 회귀와 거짓 예언자 (6)

비밀 통로에서 빠져나온 후에도 꽤 한참을 걸어간 끝에 두 사람은 수도 근교 도시 카라스에 도착했다.

밤새 비밀 통로를 통해 탈출하느라 잠을 자지 못했기에, 숙소를 잡아 우선 쉬자는 엘피의 의견에 트론도 동의했다.

“그전에 식사부터 간단하게 해결할까요, 왕자님.”

“그래.”

수면을 취하지 못한 것도 그렇지만, 어제 저녁 이후로 카라스에 도착할 때까지 둘은 아무것도 먹지 않은 상태였다.

엘피는 주목받는 걸 피하기 위해 레스토랑에는 들어가지 않기로 정했다.

자신은 그렇다 쳐도, 이 귀티 나는 소년은 후드를 벗자마자 엄청나게 이목을 끌 것이다.

인적이 드문 골목길의 벽에 기대고 있는 트론의 얼굴에서 엿보이는 부드러운 라인이, 붉은 입술이, 커다란 검은 눈이, 그를 지나치게 고급스러운 인상으로 완성했다.

‘……너무 잘생긴 것도 생각해 볼 문제야.’

특히 사람 눈을 피해 도망 다녀야 하는 처지에서는 전혀 긍정적인 요소가 아니었다.

속으로 한숨을 폭 내쉬며 엘피는 정체를 숨기기 위해 고려해야 하는 또 한 가지의 요소를 꺼냈다.

“먹을 걸 사러 가기 전에……. 돌아다니면서 왕자님이나 전하라고 부르는 건 너무 튀겠네요. 설정을 정해야겠습니다.”

“설정?”

“귀족가의 미성년자 자식이라면 수행원도 거느리지 않고 돌아다니는 게 이상해 보이지요. 그러니까 평민 남매로……. 가명을 쓰는 게 좋겠네요.”

설명하면서 엘피는 그리운 감각에 사로잡혔다. 이제는 먼 과거처럼 느껴지는 회귀 전, 어색하게나마 트론과 보폭을 맞추며 아등바등 살아남기 위해 노력하던 나날이 머릿속으로 밀려 들어왔다.

“가명이라. 평민이 쓸 만한 이름은 잘 모르겠는데.”

“저희 이름을 한 글자씩 쓰면 무난할 겁니다.”

“한 글자씩?”

눈을 감으면 먼 과거임에도 손에 잡힐 듯이 떠올랐다.

풀 내음 가득한 정원, 서늘하게 아름답던 푸른색 수레국화, 시야를 가릴 정도로 꽃송이를 늘어뜨린 보랏빛 수국, 일면을 가득 채우는 따스한 햇발만큼 샛노란 금계국.

그의 손을 잡고 도망쳤던 6년 전의 여름.

평민을 위장하기 위해, 그때도 이 가명을 사용했었다.

“네, 저는 엘. 왕자님은 론. 평민이 쓰기에도 크게 어색하지 않은 이름이지요.”

“……엘.”

트론의 입에서 나온 자신의 이름을 듣는 순간, 엘피는 고개를 숙여 마치 그때로 다시 돌아간 듯 먹먹한 감정을 다잡았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그녀는 뺨에 닿는 온기를 느꼈다.

트론이 손을 뻗어 엘피의 뺨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지만, 그대는 무척 자주 울 것 같은 얼굴을 하는군.”

“……아, 아닙니다! 신경 쓰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트론은 천천히 그녀의 얼굴에서 손을 떼었다. 얼마 뒤 자신의 손에 의해 목숨을 잃을 그녀가 아등바등 뒷일을 대비하고,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우스꽝스러웠다.

하지만 트론 역시 이곳에서 정체를 들켜 귀찮아지는 일은 피하고 싶었다.

어차피 앞으로 남은 시간은 겨우 반나절이었다. 적당히 그녀의 장단에 맞춰 주기로 했다.

“그건 그렇고, 평민 남매를 가장한다고 하면.”

“네.”

“이름은 그렇다 치고, 지금 이 말투가 더 튀지 않는가? 그대가 손위 누이라는 설정이니, 존대도 이상하고 말이지.”

“……시, 실례가 아닐까 하여.”

“그대는 참 이상하군. 무려 왕자를 마음껏 부려 먹었던 주제에, 엉뚱한 부분에서 몸을 사리는 경향이 있다.”

“송구합니다.”

“아무튼, 나는 개의치 않으니 그대도 편하게 부르도록.”

그녀는 떨리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천천히 입을 뗐다.

“로, 론…….”

회귀 전에는 그가 왕자로 복권하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터라, 이 이름을 부르는 건 부끄럽고 어색했다.

그는 잠시 엘피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 누나.”

정말로 동생이라도 된 양 트론이 그녀를 불렀다.

엘피는 순간 심장박동수가 올라가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누구보다 그를 잘 알고 있지만, 누구보다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지만, 마지막 기억은 열여덟의 그에게 멈춰 있었다.

성숙한 외견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던 트론에게 익숙해진 상황에서, 자그마한 그가 누나라고 부르며 올려다보는 것은 파괴력이 상당했다.

‘우리 임시 동생님 너무 귀엽구나.’

지난 6년간 친동생 이상으로 그를 소중히 생각해 왔다.

다시 보는 어린 그의 모습에, 오랜만에 듣는 누나라는 호칭에,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없었다.

한참 반응을 못 하는 것이 이상했던지, 트론이 고개를 살짝 갸우뚱했다.

“왜 그러는가?”

“왕자님께 누나 소리를 들으니 몸둘 바를 모르겠, 아니, 그게 아니라.”

무의식중에 그의 말투에 맞춰 그대로 극존대를 썼다가, 뒤늦게 수습했다.

자신의 실수가 멋쩍어서 엘피는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트론은 잠시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가 시선을 돌렸다.

위치는 불안하고, 미래는 멀고, 목숨은 위태롭고, 현실은 각박했다. 무엇 하나 해결된 것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순진하게 감정을 드러내는 엘피를, 트론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

간단한 식사를 마친 후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숙소를 잡기 위해 움직였다.

다만, 여관방을 잡기까지 꽤 긴 시간이 걸렸다.

수준 이상의 멀쩡한 숙소는 미성년자 두 사람이 묵는 것을 경계하거나 신고할 것이고, 그렇다고 수시로 패싸움이 일어나거나 술병이 깨지는 환락가의 숙소는 위험했다.

엘피는 열심히 후보를 물색하여 돌아다닌 후 그 중간 수준을 잡았다.

퉁명스러워 보이는 여관 주인은 그녀가 선급으로 낸 은전을 보고 별말 없이 방 열쇠를 내주었다.

여관방에 도착한 후 엘피는 흙먼지를 씻어내도록 트론을 먼저 샤워실로 들여보냈다.

그 후에 자신도 씻을 생각이었으나, 밤새 걸어온 피로 때문에 꾸벅꾸벅 졸다가 그만 침대에 쓰러졌다.

씻고 방으로 나온 트론은 잠이 든 그녀를 본 순간 맥이 풀렸다. 긴장감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엘피 이나드.”

그는 그녀에게 얼굴을 가까이하여 나직하게 이름을 불렀다. 완전히 수마에 붙잡힌 것인지 그녀는 반응하지 않았다.

트론은 무심한 얼굴로 검지를 들어 엘피의 목을 꾹 눌렀다. 정확히 경동맥이 위치하는 곳이었다. 그래도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하…….”

트론은 손을 떼고 어이없다는 듯 숨을 뱉었다. 자신의 위기조차 감지 못하는 라이샤라니, 우스운 이야기였다.

물론 전설에서도 라이샤가 모든 미래를 읽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지나치게 위기의식이 없지 않은가. 맹수에게 바쳐진 초식 동물도 이 정도는 아닐 것이다.

“사먼.”

그는 찬장을 향해 작게 이름을 불렀다.

그곳에 놓여 있던 컵이 달그락거리며 트론의 손으로 날아왔다.

[부르셨습니까, 주군.]

“슬슬 상황이 끝나갈 것 같은데, 어떤가.”

[네, 예상하시는 그대로입니다. 헤럴드는 셀딕 왕을 죽였고, 주요 궁성 및 수도 안팎의 제압을 시작했습니다.]

“특별한 일은 없나?”

[옥새가 사라져서 헤럴드가 날뛰고 있는 정도일까요. 셀딕 왕의 처소는 물론 보물고까지 이 잡듯이 뒤엎고 있습니다만, 성과가 없는 상태입니다.]

그는 눈을 크게 뜨며 엘피 쪽을 홱 돌아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평화로운 얼굴로 잠든 상태였다.

엘피와 나누었던 대화를, 트론은 토씨 하나 빼놓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

“역모가 일어나는 동안 옥새가 행방불명될 겁니다. 저희는 헤럴드가 미처 확보하지 못한 그 옥새를 찾아내어, 왕위 계승권자로서 정통성을 다루는 무기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기분 나쁠 정도로 심장이 두근거리는 걸 느끼며 트론이 입을 열었다.

“……옥새가?”

[네. 어제까지 셀딕 왕이 결재에 쓴 흔적은 있는 모양이라, 아무래도 오늘 벌어진 난리 통에 누가 탈취해 갔을 거라는 예측이 지배적입니다.]

“알…… 았다.”

[주군? 어디 몸이라도 안 좋으신 겁니까?]

“아니다. 그리고 사먼.”

[네, 주군.]

“나는 헤럴드 밑으로 가지 않을 것이다.”

트론의 입에서 짧고도 담백한 선언이 떨어졌다.

절대 채워지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반절의 확신이 지금 이곳에서 채워졌다.

망가진 무게추를 눌러 버리며, 엘피 이나드는 이틀을 넘어선 신뢰를 손에 넣었다.

***

꿈을 꾸었다.

엘피는 빛과 어둠으로 나뉜 공간에 멈춰 서 있었다.

본능적으로 빛을 향해 발을 내디디려는 순간, 어둠 쪽에서 누군가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엘. 누나.”

나지막한 미성에 그녀는 바로 고개를 돌렸다.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숨이 막혀 왔다.

환하게 웃는 트론이, 열여덟의 그가, 어둠 밑에 서 있었다.

“……론!”

양팔을 벌린 그를 향해 뛰어들었다. 그보다 한참 작은 엘피는 트론의 품에 파묻히듯 안겼다.

“여기 있었구나.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흐느끼며 그의 가슴을 적셨다. 피를 흘리지 않는 그가 이곳에 존재한다. 살아 있다.

그 사실만으로 끝없이 울음이 터져 나왔다.

트론은 엘피의 등을 꽉 안으며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누나. 나랑 함께 있어 줄 거야?”

“흑, 우, 윽……. 당연, 하지…….”

닿아 있는 온기가 사랑스러워서 그녀는 울면서도 안도의 숨을 흘렸다.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

그가 엘피에게서 몸을 떼었다. 그녀의 어깨를 잡고 빙글 돌려 빛을 향하게 한다.

“론……?”

“엘피. ‘나’는 아직 어리석지만, 그래도 너를 선택했어. 그러니까…….”

트론의 모습이 점점 희미해졌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몸을 돌려 그를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마음먹은 대로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를 부르려 해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나’와 함께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아 줘.”

그 말만이 빛 속에 잔상으로 남아 그림자 저편으로 사라져갔다.

***

“……아, 윽!”

채 말로 나오지 않는 비명 같은 것을 목으로 삼키며 엘피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

잠이 들었다가 무언가 꿈을 꾼 것 같았다. 그러나 어떤 내용인지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는 뒤척이며 몸을 일으키려 노력했다.

그 순간, 맑은 목소리가 울렸다.

“일어났나.”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아직 잠에서 완전히 깨지 않아 흐릿한 시야 너머로 사람의 형태가 어른거렸다.

서서히 기능을 되찾은 눈이 오렌지색 노을이 들이치는 창문을 뒤에 둔 트론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저, 전하!”

그 사실을 인식하자마자 엘피는 온몸에서 피가 빠져나간 듯 오싹해졌다.

‘지금 시각은? 저녁? 헤럴드의 반역이 끝났을 때지? 아니, 그것보다 대체 난 얼마나 자고 있었던 거야?’

아무리 피곤해도 이런 어이없는 실수를 저지르다니 울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가 얼마나 실망했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참담했다.

“왕자님. 정말 제가 드릴 말씀이…….”

“쉿.”

그러나 트론은 딱히 그녀를 책망하는 기색 없이 창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그녀의 말을 멈추게 했다.

낮보다는 서늘해진 바람이 열려 있는 창에서 불어와 엘피의 뺨을 스쳤다.

동시에, 건물 밖의 소음이 방 안을 채운다.

“호외요, 호외! 국왕 폐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신문팔이의 외침, 그리고 웅성이는 행인들의 대화가 귀를 울렸다.

창에서 시선을 돌린 그는 다시 똑바로 엘피를 응시하며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이제 그대를 믿을 수밖에 없겠구나.”

무엇보다 기다렸던 그 말이 무겁게 공간을 짓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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