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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님, 악당 길만 걸어요!-5화 (5/132)

5화. 회귀와 거짓 예언자 (5)

궁을 빠져나가기로 한 날이 되었다.

자정에 가까운 시각, 달도 구름에 얼굴을 가려 사방이 어둠에 잠겨 있었다.

후드가 달린 검사용 재킷을 걸친 작은 소년과 머리칼을 보자기 안으로 꽁꽁 싸맨 소녀가 발소리를 내지 않고 회랑을 지나갔다.

엘피는 한 걸음 앞서 복도에 걸린 초상화 아래에 멈춰 섰다.

“비밀 통로가 여기지요?”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가 트론은 작게 끄덕였다.

“……그렇다. 왕족 외에는 위치를 모르는 통로인데, 어떻게 알았지?”

“저는 라이샤니까요. 전하께서는 믿지 않으시겠지만.”

“…….”

물론, 진짜 라이샤인 원작 남주가 활약하는 시기가 오면 자신의 거짓말이 들통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주는 제약 때문에 6년 뒤에야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어. 그때까진 괜찮아.’

트론에게 목숨을 빚졌다. 그가 죽지 않는, 가장 이상적인 미래를 쟁취하고 싶다.

그를 위해 가장 우선되는 가치를 결정했기에, 두렵지 않았다.

“……잠시 기다리도록.”

트론은 더 추궁하지 않고 가져온 물병에 들어 있는 내용물을 벽에 뿌렸다.

그에 따라 희미한 빛이 흘러나와 문양을 만들었다.

이윽고 벽이 약간의 소음을 내며 반으로 갈라져 통로를 만들어 냈다.

회귀 전에도 이용했던 비밀 통로를 조금 감개무량하여 바라보고 있으려니, 트론이 따라오라는 듯 손짓했다.

트론의 궁에서 바깥으로 통하는 어두운 구멍을 향해 두 사람은 발을 내디뎠다.

이윽고 초상화 아래 벽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통로를 감추었다.

***

트론은 등불을 들고 망설임 없이 걸어가는 엘피의 옆에서 의구심을 느꼈다.

왕족에게만 알려진 비밀 통로의 위치는 그렇게 쉽게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아니었다.

‘헤럴드 숙부라면 일부 알고 있겠지만, 도려내면 그만인 말단 암살자에게 그런 귀한 정보를 흘릴 정도로 머저리는 아닐 텐데.’

애초에 자신을 죽이기 위해 굳이 이렇게 빙 돌려서까지 번거로운 방법을 쓸 이유도 메리트도 없었다.

이 사실은 그녀가 헤럴드 말고 다른 이해 조직과 얽혀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트론 스레데니옴이 가지고 있는 가치는 아직 그다지 높지 않으며, 이 정도로 번거로운 방법을 사용할 이유는 찾기 힘들었다.

‘라이샤…….’

그렇기에 가장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자꾸 떠올리게 된다.

“오늘, 조금 덥네요.”

그녀가 일상적인 인사인 양 지금 상황에서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을 건넸다.

“……그런가? 밤이라 서늘한 편인데.”

“북쪽 지방 출신이라 더위에 약해서 그런지 땀이 좀 나서요.”

희미한 등불빛에 엘피의 얼굴을 확인한 트론은 그녀가 긴장했다는 걸 바로 알아챘다. 그 긴장을 털어 내려는 것처럼 의미 없는 말을 늘어놓고 있다는 것도.

“그렇군. 이나드 영지는 북쪽인가.”

“네. 최북방에 있는 르터바이스 변경백의 영지에 비할 바는 못 됩니다만……. 그래도 겨울에는 제법 살이 에일 듯 춥답니다.”

이나드 자작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김에, 트론은 마음에 걸리던 점을 질문했다.

“그대는, 가족의 복수를 위해 나를 이용하는 거라고 생각해도 좋다고 말했지.”

“……네.”

“그대의 힘으로도 가족의 비극은 막을 수 없었던 것인가.”

“제가 라이샤의 힘을 자각한 건…… 전하를 뵌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확실히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이상했다. 그를 껴안고 울며 접촉해 온 것도 암살 의뢰를 받은 부담감과 자책감이라고 넘기기에는 과하다고 생각했다.

라이샤라면, 미래의 자신을 보고 그랬을 가능성도…….

‘가능성이라니.’

트론은 속으로 실소를 뱉고 말았다. 어느샌가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가능성의 한 갈래로 자리 잡았다.

“아픈 일을 다시 떠올리게 해서 미안하다.”

“아닙니다. 저야말로 이런 때에 쓸데없는 잡담을 꺼내 죄송합니다.”

딱딱하게 사과하며 입을 꽉 다문 그녀의 얼굴에 다시 긴장이 서렸다.

구불구불한 지하 통로를 지나 탁 트인 공간이 드러나고, 길은 동굴로 이어지고 있었다.

트론은 천천히 후드를 내렸다.

“……추가로 묻고 싶은데.”

“네.”

어디선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바람조차 없는 동굴 안에서 이질감이 공간을 채웠다.

미적지근한 공기가 팽팽한 위화감을 타고 신호를 보냈다.

트론이 들고 있던 숏소드로 허공을 베었다.

동굴의 사각에서 튀어나온 기괴한 생물이 그대로 체액을 뿜으며 바닥에 쓰러졌다.

곤충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크기는 사람을 압도할 정도로 비대한 생물.

스레데니옴 왕국에서는 이를 ‘마수’로 규정하고 있다.

“지금 이 상황도 라이샤로서 읽은 것인가?”

***

노란빛의 소름 끼치는 안광을 뿜는 생물들이 두 사람이 서 있는 사방을 둘러쌌다.

바스락거리는 소리는 이제 작은 음량이 아니라 불규칙한 리듬의 커다란 노이즈가 되어 땅을 울렸다.

“네. 한참 쓰이지 않아 잊혔지만, 이곳엔 침입자가 접근하면 마수가 소환되는 주술이 걸려 있습니다. 피아 식별이 안 되는 주술이었던 모양입니다만.”

엘피에게는 익숙한 광경이었고, 이미 겪은 상황이었다. 회귀 전 그녀가 트론을 따라 궁을 탈출했을 때에도 똑같이 마수를 맞닥뜨렸다.

“나를 왕으로 만들겠다는 자가 이런 식으로 위험에 빠뜨리나?”

“그럴 리가요.”

천장에 붙어 있다가 이쪽을 향해 날아드는 나방 모양의 마수 무리를 바라보며 그녀는 단호하게 고했다.

“트론 전하께서 눈 깜짝할 사이에 이 상황을 처리하실 수 있다는 걸 아는 것뿐입니다.”

엘피의 뻔뻔한 말에 실소를 터뜨린 트론은 숏소드를 휘둘러 시야를 막고 있는 마수를 치웠다.

그와 동시에 왼손 검지를 공중에 뻗어 특정한 빛의 잔상을 만들었다.

엘피는 그것이 비밀 통로에 물을 뿌렸을 때 만들어진 빛의 문양과 유사하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주술사.

자연계에 존재하는 물질을 변형하거나 조종하여 신비를 만드는 자.

존재하지 않는 것을 창조하는 마법사와는 다른 존재들.

엘피는 소설을 통해 트론이 주술사 중 톱클래스의 실력을 갖추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한, 회귀 전에 그의 주술을 처음부터 끝까지 목격한 적도 있기에 확신했다.

잠시 후 이 공간을 채운 마수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라고.

“─멸하라.”

그의 왼손의 움직임에 따라 허공에 문양이 새겨졌다.

그 짧은 주문에 두 사람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마수들이 가루가 되어 사라져 갔다.

침입자가 도달했을 때 마수를 소환하여 공격하라는 주술을 트론이 해제한 것이다.

후드를 다시 뒤집어 쓴 트론이 간략한 감상을 뱉었다.

“라이샤는 사람 부려먹는 걸 좋아하는 모양이군.”

“죄송합니다.”

엘피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회귀 전에 평민을 가장하며 함께 지내던 시절, 사람을 너무 부려먹는다며 트론이 투덜대던 것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별로 그렇지 않은 얼굴인데.”

“그치만……. 왕자님은 그런 것으로 저를 벌하거나 이곳에 놓고 가지 않으실 거잖아요.”

그녀는 들고 있던 가방을 고쳐 안으며 단언했다.

잠시 뚫어져라 엘피를 응시하던 그는 몸을 돌렸다.

“……뭐, 아직 약속한 기한이 지나지 않았으니.”

“역시 왕자님은 다정하시네요.”

그녀의 말에 답하지 않고 트론은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엘피는 상황에 맞지 않게 가슴이 뛰었다.

회귀 전에도 다정하다거나 친절하다고 칭찬하면 그는 대꾸하지 않고 쑥스러운 듯 시선을 돌리곤 했다.

그리운 흔적을 다시 찾아낸 것처럼 그 사실이 기뻤다.

***

퀴퀴하고 어두운 지하 통로를 지나, 왕궁에서도 한참 떨어져 있는 야산의 동굴 입구에 다다랐을 때에는 이미 어스름하게 동이 트고 있었다.

산에서 내려와 인기척이 없는 도로에 도착하자, 엘피는 망설임 없이 걸어가는 방향을 잡았다.

“길을 잘 아는 모양이군.”

“네, 맞습니다. 이 길을 따라 걸어가면 카라스입니다. 거기서 기다리면, 말씀드렸던 것처럼 오늘 내로는 결론이 나겠지요.”

그는 잠시 그녀를 응시하다가 재차 질문했다.

“그러고 보니, 굳이 카라스를 거점으로 잡은 이유가 있나?”

“카라스에는 열차역이 있습니다. 이후 열차를 이용해 수도 근방에서 벗어나기 편하리라 판단했습니다.”

그 대답으로 트론은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그 뒤’가 이어져 가고 있었다.

‘제 목숨을 구하고 싶어 사기꾼 노릇을 하나 했는데.’

사기꾼치고는 어설펐다. 독이 든 병을 자신에게 넘긴 순진함에는 맥이 풀릴 정도였다. 그래도 자신에게 해가 되지는 않을 테니, 살려 보낼 생각이었다.

그러나 상황이 달라졌다.

여기까지 오는 과정에서 그녀가 입에 담았던 정보를 종합해 보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라이샤가 아니더라도 엘피 이나드는 이질적인 시야와 정보를 가진 자다.

그녀는 위험하고도 매력적인 변수였다.

확신은 반밖에 채우지 못했다. 헤럴드 밑으로 간다는 선택지를 버리고 그녀가 라이샤라는 말을 믿기에는 아직 리스크가 컸다.

남은 반절의 확신을 채우지 못한다면, 어중간한 위험 분자는 제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생각을 겉으로 내보이지 않으며 트론은 짐짓 그녀를 떠보았다.

“이제 남은 시간은 고작 반나절이다. 그대의 말이 거짓으로 판명되면 다시 궁성으로 돌아와야 할 터인데. 열차를 타게 될 뒷일을 확신하나?”

엘피가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밝아 오는 동녘의 햇살이 그녀의 금발을 물들였다.

“네. 저는 라이샤니까요.”

자기 증명이라기보다 다짐처럼 느껴졌다.

그 목소리가 담고 있는 감정을 트론은 완전히 읽어 낼 수 없었다. 근거 없는 허언으로도 들리고, 희망 넘치는 찬가처럼도 들렸다.

그는 속으로 조소했다.

오늘 헤럴드의 반역이 시작된다 해도, 트론이 그녀를 라이샤라고 믿을 증거는 되지 않는다.

애초에 헤럴드가 보낸 첩자였던 그녀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으니까. 또한, 트론 역시 이미 파악한 정보이기에 도움이 되는 예언도 아니었다.

오늘 역모만 시작되면 그녀를 믿어 줄 것처럼 말했지만, 약속으로 맺은 이틀의 신뢰는 처음부터 무게추가 망가져 있었다.

트론의 예측을 뛰어넘는 무언가를 보여 주지 않는 한, 엘피의 목숨은 오늘까지다.

‘그런 내 속내도 모르는 주제에, 어떻게 확신하는 거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마음 어딘가에서 기대하고 있는 자신을 부정할 수 없었다.

여름의 아침 햇살 아래에서 반짝이는 소녀가 자신을 더 재미있게 해 줄 내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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