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 몰락 보고서-42화 (43/47)

제 42화

검으로 바치는 경애 (17)

“언제나처럼 저에게 아픈 말을 쏟아붓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아버님이 그곳에 계실리는 없다는 걸 저는 알았습니다. 아버님은 제국 수도 아니면 백혈기사단 본성에 계실 테니까요. 그러자 그림자가 바뀌었습니다.”

“어떻게?”

대답 대신 릴리는 카인을 더 세게 끌어안았다. 놓치면 사라져버리기라도 할 거라는 것처럼.

“…요원님이, 아버님의 곁에, 죽어 누워 있었습니다. 죽은 채로 저를 원망하셨었습니다. 너 때문에 내가 죽는다고 소리를 지르셨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알았습니다. 그림자의 저편에서 검집의 기사와 겨룬다는 것을. 내가 두려움에 떠는 이 순간까지도 버텨 내고 있을 거라는 걸.

피하고, 막고 찌르면서도, 끈질기게 검집의 기사와 맞서고 있으리라는 걸 알았습니다. 기대를 저버릴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그림자가 조금 걷혔습니다.

기사와 싸우시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익숙한 두려움과 공포가 가신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거기에서 여전히 싸우시는 것만으로도, 살아 계셨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기뻤는지 모르실 겁니다…”

“릴리. 나는…”

“고생하셨고 아파하셨잖습니까.”

이마에 릴리의 입술이 닿았다. 살아 있는 사람의 온기에 카인은 할 말을 잃었다. 얼굴 가득 느껴지는 뭉클하고 부드러운 감각은, 떠나보내기 싫었다.

“그 여자. 정말 사랑하셨습니까?”

릴리의 심장이 거세게 뛰는 것이 느껴졌다. 고통스럽지만 열어 보아야만 하는 편지를 뜯듯이. 하지만 뭐라고 하기도 전에 릴리가 채근했다.

“임무 때문이 아니었더라도, 사랑하셨겠습니까?”

강요에 가까웠다. 도망칠 곳을 열어주는 것 같았다. 아니었다고 말하라고. 도망쳐버리라고. 문이 열려 있지 않느냐고. 베아트리체가 그랬던 것처럼, 릴리도 도망칠 길을 열어주었다. 어서 아니라고 말하라고.

“임무, 임무 때문이었어.”

릴리가 입을 맞춰왔다.

더는 이야기하지 말자는 것처럼, 이대로 저 아래 묻어 버리자는 것처럼. 봉인을 찍고, 깊고 깊은 갱도에 처박아두자는 것처럼. 숨을 헐떡이며 릴리가 속삭였다.

“그거면, 충분합니다. 그저 임무였을 뿐이잖습니까. 그러려고 하신 것도 아니었잖습니까. 사고였습니다. 그냥 사고였습니다.”

죽은 여자는 땅속에. 살아 있는 여자는 몸 위에. 죽은 여자의 심장은 뛰지 않는다. 살아 있는 여자의 가슴은 뜨겁다.

릴리가 몸을 떼었다. 어설프게나마 웃으려 하고 있었다. 카인도 애써 미소를 지었다. 가장 힘든 미소였다.

“앞으로, 행복해지면 되는 거잖습니까.”

- 앞으로 행복해지면 되는 거잖아. 그렇지, 카이로스?

죽은 여자의 목소리가 겹쳐 들렸다. 카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목소리를 위한 하나의 답이었다. 족쇄에 매달린 마음이라도, 어찌 되었든 나아갈 수는 있을 것이다.

다시금 상냥해진 릴리가 입을 가만히 맞춰왔다. 아까보다도 훨씬 뜨겁고 농밀했다. 손가락으로 카인의 가운 사이를 죽 훑는가 싶더니, 손바닥으로 심장 부분을 찰싹 내리쳤다.

“그래. 앞으로 행복하면 되는 거지…”

그러면 될 거라고. 카인은 애써 생각했다. 그렇다. 그러면 되는 일이다. 카인은 애써 팔을 흔들었다. 여전히 끈이 묶여 있었다.

“그런데, 행복해지려면 행복을 붙잡아야 한다고 했었잖아. 그런데 내 팔다리는 꽉 묶여 있는데…이것 좀 풀어줄래? 욕실에 좀 가고 싶어서.”

릴리가 쿡, 하고 웃음 지었다. 머릿수건을 풀어 내리자, 물결치는 금발 머리가 휘날렸다. 릴리가 카인의 가운을 풀고 상체를 드러냈다. 손가락을 세워 가슴 사이에서 명치까지 죽 그어 내렸다. 배꼽 위에서,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렸다.

“제발 가게 해달라고 말해주십시오.”

카인은 소리 내 웃었다. 하지만 릴리는 웃지 않았다. 한쪽 입매를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무슨 농담이 그래?”

“농담 같으십니까?”

일그러진 웃음마저 싹 사라졌다. 다정한 얼굴은 더없이 싸늘했다. 지금까지 본 얼굴 중에 가장 서늘한 표정이었다.

“죄송합니다. 저는 속 좁은 여자라서요. 그렇지만…조금 화가 나는 건,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발버둥 치는 팔다리를 부여잡고, 멍 하나하나에 입을 맞추고 손으로 풀어주고, 몸 구석구석을 수건으로 닦아내는 동안…죽은 여자 꿈을 꾸고 계셨다는 거군요.”

“악몽이었으니까. 좋은 꿈이었다면 네가 나왔겠지.”

가볍게 받아넘긴 말이었지만, 릴리는 여전히 웃지 않았다.

“저는 요원님을 잃는 게 가장 무섭고도 두려웠는데. 요원님은, 죽은 여자가 무덤에서 살아 나오는 게 더 두려우셨나 보군요.”

릴리의 눈에는 원망이 가득했다. 사랑하는 사람의 어디에서도 자기 자리를 확인받지 못 한 사람처럼. 하지만 카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나는 똑같아. 난 너를 지켜낼 거고, 어떻게든 살릴 거야. 난 내가 그렇게 할 거라는 걸 알고. 그래서 난 두렵지 않았어.”

“…임무 때문입니까. 아니면 마음 때문입니까?”

“네가 다치는 걸 나더러 보라는 말이야?”

릴리의 손이 카인의 목으로 옮겨갔다. 엄지로 볼을 천천히 쓰다듬고, 이내 목 옆의 맥을 짚었다.

“저는 소중한 요원입니까?”

“당연하지.”

“그렇다면.” 릴리가 서글프게 웃었다. “소중한 사람입니까?”

“…맞아.”

릴리가 가까이 다가왔다. 카인의 귓가에 속삭였다.

“저도. 그 여자만큼…중요해질 수 있습니까? 마음 한 자리, 머물 자격, 있습니까?”

“더. 훨씬 더 중요해. 그리고…” 카인은 숨을 들이쉬었다. “넌 나에게 이미 특별해. 목숨을 살려주었고, 어젯밤엔 돌봐주었고, 네가 아니었으면 나는 살아남을 수 없었을 거야.”

“그런데. 왜 저에게는…주지 않으십니까.”

릴리가 떨어졌다. 매정하리만큼 몸을 휙 돌렸다. 말을 흐린 것인지, 아니면 뭐라고 한 것을 자신이 알아듣지 못한 것인지. 카인은 알 수 없었다.

“가게 해 줘.”

릴리가 카인을 바라보았다. 눈을 커다랗게 뜨고 있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제발, 가게, 해, 줘.”

카인은 다시 또박또박 들려주었다.

릴리가 배부른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손목의 매듭을 풀어주었다. 혹시 아프고 저릴까 봐 조금씩 풀어주기까지 했다. 자국이 살짝 남기는 했지만 아프지는 않았다.

그대로 릴리는 왼쪽 발목도 풀어주었다. 하지만 오른쪽 발목은 내버려 둔 채, 몸을 일으켰다. 풀어진 가운을 단속하고 위에 망토를 둘러 방문 앞에 섰다. 문고리를 잡았지만 돌리는 대신 카인 쪽으로 몸을 돌렸다.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더 말은 하지 않았다.

‘형님. 저런 애가 속이 깊고 뜨거워요. 하지만 마음 돌리면 뒤도 안 돌아볼 겁니다. 저런 성격 가진 여자한테 차여봐서 잘 안다니까요?’

뵘이 했던 말이었나. 봄이 했던 말이었던가. 카인은 해묵은 기억을 떠올렸다. 매듭은 간단히 풀렸다. 잠시 고민하던 카인은 외투를 대충 걸쳐 입었다. 릴리의 뒤를 따라가기엔 아직 늦지 않았을 테니까.

* * * * *

카인은 근위국 숙소에 무기와 검은 옷을 반납했다.

간단한 경과 보고서를 작성한 다음 콧수염 멋진 시종에게 넘겨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일기장을 구하기는 했으나 암호로 적혀 있어 해독에 시간이 걸릴 거라는 것,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부터 교단 관련 인물을 추천받았다는 내용도 적었다.

다만 과연 어디까지 함께 할 것인지, 정확히 어떤 사람인지는 조사 후 알리겠다고 했다. 근위국에서 작성하는 보고는, 그저 현재 상황에 대해 적으면 그만이다.

완료된 것은 완료, 진행 중인 것은 진행. 순결의 몰락에 대한 보고서는, 해독된 일기장과 함께 보내야 할 터였다.

근위국에서는 행상인의 옷을 내어주었다. 화려한 상인의 옷은 짐꾸러미에 넣어 보안국 지부에 반납했다. 그 옷은 이미 노출되었기에 입고 다니는 건 위험했다.

지부에 들러 반납하는 김에, 맡겨 두었던 짐가방을 챙겼다. 하인리히 신부에게 건네줄, 오트란토 수도원에서 건져낸 유품이 담겼다.

약속 장소에서, 카인과 릴리는 밀짚모자를 쓴 이단심문관 하인리히와 마주쳤다.

하인리히는 섣불리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따라오라는 신호였다. 인파를 헤치고 들어간 곳은 어느 옷가게였는데, 안에 사람이 없었다.

세 사람은 접대용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덥군요.” 하인리히가 모자를 벗었다. “비밀스러운 대화를 나누기엔 좋은 곳입니다. 가게 주인과 막역한 사이거든요. 그건 그렇고…”

옆방에서 어제 본 수녀가 걸어 나왔다. 짙은 적금발의 수녀였다. 겉으로 드러나는 상처는 없었다. 걸음걸이도 여전히 가벼웠고, 보폭은 적었다.

밝은 빛 아래, 매섭고 사나운 눈매 아래로는 짙은 그늘이 졌다.

오뚝한 코 아래로는 냉소적인 가늘고 긴 입술이 자리했다. 교수대에 매달린다고 해도 하, 하며 비웃음을 머금을 것 같은, 위험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이단심문관 마리아입니다. 뛰어난 젊은이이며, 가진 재주도 많고, 정식 이단심문관으로 임명받기 전부터 뛰어난 수사관으로 명망이 높았습니다. 어셔 백작가 사건도 마리아가 아니었다면 해결 못 했을 겁니다.”

카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젯밤에 보여준 기술과 솜씨만 놓고 보면, 굉장히 뛰어난 도둑임이 틀림없었다.

어셔 가의 원본 서류를 빼돌린 것도 마리아의 솜씨이리라.

“반갑습니다.”

마리아가 고개를 까딱거렸다. 수녀의 정중함보다는, 수녀복을 입힌 골목 불량배의 태도에 더 가까워 보였다.

당연히 카인에게 별로 좋은 감정을 품고 있지는 않을 터였다. 그래도 카인과 릴리는 정중히 인사했다.

“그리고 제 딸이기도 합니다.”

책상 아래에서 릴리가 카인의 손을 꽉 붙들었다. 어지간히 놀란 모양이었다. 이단심문관 마리아는 세상 못 들을 걸 들었다는 것처럼 하인리히를 노려보았지만, 별말은 하지 않았다.

“…그러니 신용에 대해서는 안심하셔도 됩니다. 하지만 제…수사관에 대한 소개는 이쯤 해야 할 것 같군요. 이곳은 믿어도 되는 곳이니,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어제 들으셨겠지만, 교황 성하께서는 이 모든 일을 그저 덮으실 생각입니다.

판관 말라키아께서도 그 일이 옳지 못하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뭔가 적극적으로 하기에는 너무나 지위가 높으시지요. 지위가 높으면 바라보는 눈도 많으니까요.”

“하인리히 신부님도 고위직이지 않습니까.”

카인의 질문에 하인리히는 웃음을 터트렸다.

“고위 이단심문관은 여유가 좀 있습니다. 자체 수사팀을 꾸릴 수 있거든요. 그리고 이단심문관의 수사 범위에는 제한이 없습니다. 이론적으로는, 누구도 이단의 혐의를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남용되기를 바라지 않기에, 함부로 휘두르지 않을 뿐. 그러니…수사관 한 명을 ‘파견’ 한다고 해도 이상한 것은 없고요.

그렇다고는 해도 어젯밤 소동은 전적으로 불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지시를 내린 건 저였으니, 이 이 자리를 빌려 제가 사과드리겠습니다.”

하인리히는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난처해진 것은 카인이었다. 당장 서로 죽일 듯이 싸웠던 게 오늘 새벽 아니었던가. 마리아는 비딱하게 카인과 릴리를 노려보았다. 카인은 두 사람을 달래주었고, 자세한 사정을 들을 수 있었다.

어제저녁 늦게, 그러니까 카인과 릴리가 돌아간 다음 교황청에서 서신이 도착했다고 했다. 일곱 영웅에 대한 모든 자료를 취합하여 교황청으로 보낼 준비를 하라는 것이었다.

‘시성’에 대한 절차를 진행해야 하니, 모든 것을 ‘적극적이고도 면밀하게 검토해야 한다.’는 이유였다. 황송하게도 직접 마차까지 보내준다고 했다.

뿐만이 아니었다. 하스펠의 사무실은 모든 자료를 다 끄집어내기로 되어 있었다. 순결의 성기사 윌리엄의 피습 현장에 나갔던 사람이니까.

심지어 오늘 아침에는 교황청 서기까지 도착했다. 하스펠의 사무실에 봉인을 붙였다고 했다.

“왜 그렇게까지 한 겁니까?”

“오트란토 수도원의 파괴에 대한 보고가 교황청에 올라갔다는 뜻입니다.”

하인리히가 천천히 설명해주었다. 서신과 동시에 편지가 한 장 도착했는데, 거기에는 보다 노골적이고도 원색적인 내용이 담겨 있다고 했다.

오트란토 봉쇄수도원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파괴되었는지는 이단심문소만이 알고 있다.

다만 파괴되었다는 사실 자체는 자비기사단도, 교황청도 알고 있다. 하도 소식이 없자, 그들도 자체 조사관을 파견했고, 폐허가 그들을 반갑게 맞이하였으니까.

“어제 제 사무실에 들어왔던 이들 중에는, 교단보다도 교황 성하를 더 광적으로 추종하는 자도 있습니다. 누구라고 특정해 드릴 수는 없지만, 이미 어젯밤 비밀리에 서신을 보냈다는 것까지도 알고 있고요. 오늘 저녁쯤에는 아마 교황 성하께서도 첩보를 받아 보시겠지요.

판관 말라키아께서도 이 일에 대해서는 알고 계십니다. 이단심문소장님과 상의 끝에, 어설픈 정보를 올리거나 애매하게 은폐하느니 차라리 제대로 된 보고서를 올려 혼란을 줄이는 편이 낫다는 결론을 내리셨지요.

그리고 그 보고서는 제가 작성합니다. 오트란토 수도원의 몰락에 대해 최초로 듣고, 두 분을 맞이한 이가 저니까요. 그리고 저는 하스펠의 조사에 대한 내용은 하나도 넣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의 ‘개인적인’ 조사는 어디까지나 내사 단계일 뿐이지, 공론화할 것은 아니니까요.”

교묘한 말이었다.

하스펠의 의심을 그대로 믿으면서도, 교황청에는 감출 것이며, 그 사실에 대해 어떤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도, 상급자에 대한 복종의 의무를 저버리지도 않는 우회로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교황청에 모든 정보가 다 넘어가기 전에, 서둘러 제대로 된 조사를 마쳐야 합니다. 더구나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요.”

“하스펠 신부님의 말이었죠. 그게 정확히 어떤 뜻입니까?”

“마왕.”

하인리히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마리아도 그 말에는 호기심이 동한 듯 눈을 반짝거렸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분량조절 실패로 새벽에 한 편 더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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