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 몰락 보고서-41화 (42/47)

제 41화

검으로 바치는 경애 (16)

희끄무레한 것이 보였다.

카인은 고민했다. ‘저게 뭐더라. 저걸 뭐라고 부르더라?’

너무 멀어 보기 어려웠다. ‘가까이 가면 알겠지.’ 카인은 걸었다. 어린애도 쉽게 넘을 수 있을 울타리 문을 열어젖혔다. 하얀 꽃을 피운 사과나무들이 보였다.

베네루치아는 섬이다. 질 좋은 흙 구하기가 어렵다. 그래서인지 고향의 나무보다 키도 작고 크기도 작다. 하지만 수확물은 알찬 편이다.

지금도. 하얀 꽃 사이를 노란 벌들이 바쁘게 움직이며 꽃가루를 옮겨주고 있지 않은가.

공짜는 아니다. 양봉업자를 불렀다. 벌통을 정원 가운데 놓아 두고 열어젖히면, 벌들이 이렇게 쏟아져 나온다. 부지런히 꽃들을 이어주어 결혼시킨 다음, 꿀을 챙겨 집으로 돌아가는 기특한 곤충이다.

업자를 부르는 건 비싸지만, 돈값을 한다. 저 꽃 하나하나에 맺힐 과실을 생각하면, 카인은 혼자서도 웃음 짓고는 했다.

“난 크기가 좀 더 컸으면 좋겠어.”

나무의 뒤편에서 베아트리체가 걸어 나왔다. 얇은 천 하나만 두르고 있었다. 동지들이 보면 기겁하겠지만, 카이로스와 둘만 있을 때 그녀는 언제나 그랬다. 짙은 갈색 곱슬머리가 찰랑거린다.

“맛만 좋으면 된 거지, 뭐.”

카이로스가 나무에 몸을 기대었다. 베아트리체가 느긋하게 걸어왔다. 언제나처럼 자세는 꼿꼿하고, 큰 편은 아니지만 작고 예쁜 가슴을 도도하게 내민다.

“밤마다 열심히 만져주는데도 커지질 않아. 사랑을 덜 준거 아니야?”

“사랑도 너무 많이 주면 죽어버려.”

“아니면.” 카이로스의 앞까지 온 베아트리체가 어깨의 매듭을 풀었다. 천이 스르륵, 하며 내려갔다. “열매를 맺으면, 더 커지지 않을까? 어떻게 생각해?”

천천히 입을 맞춘다. 고개를 숙여 가슴에 입술을 댄다. 베아트리체가 카이로스의 머리를 끌어안는다.

“공화국 기밀 정보를 빼가라고 보내놨더니 여자 마음이나 훔치는 제국 도둑놈씨, 어떻게 생각하시냐고요.”

부드러운 손가락이 갈퀴처럼 뒷머리를 긁는다. 자신이 언제나 우위에 있다는 듯이.

베네루치아의 상징은 사자다. 베아트리체는 공화국 지도자인 도제의 외동딸이며 정치적 동반자이기도 했다. 늙고 위엄찬 수사자 아버지와 젊고 매력적인 암사자 딸. 그리고 그사이에 끼어든 도둑.

“말이 좀 웃기지 않아? 도둑놈도 아니고 도둑씨라니.”

“그러면 살인자라고 부를까.”

푸른 하늘이 시뻘겋게 돌변했다. 베아트리체는 선 채로 나무가 된다. 사과나무들은 피를 흘리고, 꿀벌들의 웽웽거림은 화살이 나무에 박히는 소리, 칼과 칼이 부딪치는 소리로 돌변한다.

나무에서 벗어나려 카이로스는 발버둥을 쳤다. 손에 집히는 건 사과들이다. 큼직한 유방을 닮았다. 그러나 잡히는 족족 뭉개지더니 물이 되어 바닥으로 흘러내린다.

그곳에서 장미 덩굴이 자라난다. 흰 장미들 위에 피가 뚝뚝 떨어지더니 붉게 물든다. 이내 그것은 저들끼리 얽히더니 가시왕관이 된다. 덩굴들이 몸을 비비적거리며 울부짖는다.

“심장 도둑아, 네 것이라도 내놓아라. 남의 심장에 피 흘리게 한 자야, 네 눈물만이라도 내어놓아라.”

카이로스는 도망치려 했다. 가시에 살갗이 찢기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멀리 피떡이 되다시피 한 어둠에서 검집의 기사가 다가온다. 검은 갑주를 걸치고, 오른손에는 칼을 검집째로 들어 올린 채.

기사가 팔을 휘둘렀다. 퍽, 하는 소리가 났다. 나무가 된 베아트리체가 검집을 대신 맞아준 것이다. 튀는 것은 나뭇조각이고, 흐르는 것은 진득한 수액이다. 카인의 얼굴로 이끼 묻은 흙이 살점처럼 튀었다.

- 카이로스. 도망쳐.

* * * * *

외마디 비명과 함께 카인은 깨어났다. 심장이 뛰어 숨을 거칠게 쉬었다. 놀란 햇살이 창가 너머에서 안을 바라보았다. 이름 모를 새들이 저 녀석 좀 보라는 듯 짹짹거린다.

“아으.”

무의식적으로 머리를 기대다가 다시 비명을 질렀다. 뒷머리가 지끈거렸다. 벽에 기대다가 너무 세게 부딪힌 탓일까.

하지만 여기는 바닥이 아니다. 침대 위다. 침투를 위해 차려입은 검은 옷이 아니라 얇은 가운 하나만 걸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다.

“뭐야, 이거?”

왼쪽 손목에 끈이 묶여 있었다. 잡아당기자 팽팽해졌다. 반대쪽은 침대 모서리에 묶여 있었다. 오른손을 가까이 가져다 대었지만 그쪽도 마찬가지였다.

끈은 비교적 길었고, 손가락 하나 들어갈 정도 고리를 미리 지어 놓았기에 아프게 살을 파고들거나 조이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매듭은 촘촘했다. 두 손이 아니면 절대 풀 수 없는 그런 매듭이다. 혹시나 해서 발목을 당겨 보았다. 두 발목도 매한가지인 모양이다.

‘그러니까, 침대에 두 팔과 두 다리를 벌린 채 묶여 있다는 거지.’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이로 물어뜯으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어, 일어나셨습니까?”

머릿수건을 두른 릴리가 욕실 쪽에서 걸어 나왔다. 하얀 가운 차림이었다.

“숫돌아. 이거 대체 어떻게…”

“가만히 계십시오.” 릴리가 침대 위로 올라왔다. 이불을 끌어당겨 벌어진 가운 사이를 가렸다.

“저 기절하는 줄 알았습니다. 쿵 소리가 들려서 보니 벽에 기대 스르륵 주저앉으시더군요. 일어나서 깨우려고 했는데…”

“했는데?”

대답 대신 릴리는 멍든 팔을 보여주었다.

“덫에 빠져 일주일 굶은 늑대도 그렇게 거세게 저항하진 않습니다. 팔다리를 거칠게 휘두르시더니, 제 팔은 아예 물어뜯으려고 하셨었습니다. 정말 하나도 기억 안 나십니까?”

“내가 그랬다고?”

눈썹을 치켜올린 릴리가 팔짱을 끼었다.

“그거 아십니까? 수도원에서도 그러셨었습니다. 밤새 비명 지르고 허우적거리셨었지요. 그래도 그때는 어떻게 달래드렸는데 어젯밤, 아니 오늘 새벽엔 그게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죄송하지만, 손을 좀 썼습니다.”

‘뒤통수가 아픈 게 그것 때문이었나.’ 카인은 헛기침했다. 조금 민망했다.

“몸은 차고, 식은땀 범벅에, 어디에서 대체 뭘 하셨는지 멍투성이…우선 옷부터 벗기고 물수건으로 다 닦았습니다.

밤새 풀어드리고 가운 입혀 놓으니 그제야 좀 주무시는 것 같다가, 또 물에 빠진 것처럼 팔다리를 마구 저으셨습니다. 안 묶었다면 그랬으면 크게 다치셨을 겁니다.”

릴리가 고개를 돌려 마른기침을 했다.

“큼. 혹시 오해하실까 봐, 큼. 큼! 말하는 건데, 요원 대 요원의 통상업무였을 뿐이지, 절대 다른 의도 같은 건…”

“고맙다.”

릴리는 별로 감동하지 않은 것 같았다. 뚱하니, 카인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물기 젖은 금발 머리가 어깨 위로 축 내려왔다.

“…정말 괜찮으신 것 맞습니까?”

“어…어?”

카인은 당황했다. 엉금엉금 기어 온 릴리가 카인의 이마를 짚고 목의 맥을 짚었다.

“평소 같았다면 거기에 ‘그런데 말이지.’ 라던가 ‘하지만.’이라던가 ‘고맙긴 한데 이런 식은…’ 이라고 뭐가 붙지 않았습니까.”

“내가 그랬어?”

카인은 웃음 지었다. 이마의 땀을 닦고 싶었지만 묶인 팔로는 한계가 있었다. 릴리가 말라빠진 수건으로 이마를 촘촘히 닦아주었다.

“괜찮으시다면 다행입니다. 저는 크게 다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저.”

어쩐지 주눅이 든 것 같은 릴리가, 카인은 안쓰러웠다. 고맙다는 말도 곧이곧대로 듣지 못할 정도라니.

“괜찮아. 뭔데?”

“베아트리체가 누구입니까?”

말 대신 일그러지는 얼굴이 대답했다.

릴리는 뭔가를 눈치챘는지 입매를 일그러뜨렸다. 이내 눈을 감고 후, 하며 숨을 내쉬긴 했지만.

“그분을 밤새 찾으셨었습니다. 접선자 이름입니까? 아니면 임무에 중요한 핵심 인사…”

“죽은 사람.”

카인의 답을 들은 릴리가 멈칫했다. 뭔가 말을 꺼내려다가 삼키는 것이 뚜렷하게 보였다.

“죽은 여자야. 나 예전에, 동부…연합국에 간 적 있었다고 했었잖아. 베네루치아에 갔었어. 그때 도제 Doge는 니콜로 단돌로였고, 베아트리체는 그의 외동딸이었어. 내 임무는…베아트리체를 제국으로 망명시키는 것이었고.”

릴리가 두 손을 끌어모아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하지만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침대에 앉은 채 카인을 내려다본다.

“니콜로와 베아트리체 모두 베네루치아와 동부 연합국 정치 체계를 바꾸려고 했던 건 같았어. 그런데 그 둘은, 부녀지간이면서도 정치적 맞수였지. 늙은 수사자와, 젊은 암사자…니콜로는 노년층에, 베아트리체는 젊은 개혁파에서 인기가 많았어.

하지만 어느 경우든, 둘 중 하나만이라도 성공한다면 분열된 연합국은 다시 하나가 되었을 거야. 그랬다면 제국에 큰 위협이 되었겠지. 니콜로는 의심이 많아 접근 불가였지만, 베아트리체는 당차고 사람 만나는 걸 좋아했기에, 보안국에서는 그녀와 접점을 만들라고 했었어.

정확히 그 부녀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아보라는 거였지. 원래 임무는 분명히 그거였는데…”

“…잘 안되었군요.”

“약혼을 해버렸어.”

릴리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괴로운 한숨을 토해냈다.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팔다리가 묶인 데다 생명을 구한 여자 앞에서까지 비겁해지고 싶지는 않았다. 비겁은 한 번으로 족하니까. 카인은,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이 담담하게 남은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정신 차렸을 땐 우리 둘 다 너무 멀리 와버린 후였어. 니콜로의 공격은 집요했고, 베아트리체는 점차 세력을 잃어갔지. 가장 가까운 숭배자마저 떠나간 그녀 곁엔 나밖에 남지 않았었고.

베아트리체는 이미 그때 내가 제국 첩자라는 걸 알았지만…유일한 지지자가 첩보원이라는 걸 믿고 싶지 않아서였는지. 아니면 정말로 사랑해서 그것조차도 덮었는지는 몰라. 신경 쓰지 않았어.

다만 내 옆에만 있으려고만 했지. 한때는 그토록 사나웠던 사자가, 이제는 바깥출입조차 두려워하는 폐인이 된 거야.

나는 제국으로 가자고 했어. 답답하겠지만, 넓고 안전한 곳이라고…그런데. 발각당했고. 나는 도망쳤지만, 그녀는 나 대신 죽었어.”

릴리는 어떤 표정도 보여주지 않았다. 무심하기까지 했다. 더는 말을 하기 싫었지만, 카인은 관성에 기대었다. 결론을 지어야 했다.

“끝났다고 생각했지. 다 끝났다고. 간신히 몸만 건져서 보안국으로 돌아왔어. 죽거나, 지하 감옥에 평생 갇혀 햇빛 구경 못 해도 할 말 없다고 생각했는데. 되려 칭찬을 받았어. 과장으로 승진했고. 보안국의 모두가 나와 인사를 나누고 싶어 했었어…

이해할 수 없었지. 왜. 어째서? 답은 한참 나중에야 들었어. 외동딸을 잃은 니콜로가 미쳐버려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두 거물이 한꺼번에 몰락하자, 베네루치아는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해 큰 정치적 혼란에 빠져들었고, 베네루치아를 수장국으로 삼았던 동부 연합국 역시 주저앉아 버렸다는 거야.

나중에는 훈장까지 받았어. 영웅이라고. 대놓고 영웅이라 말할 수는 없겠지만. 공헌과 헌신과 충성을, 제국은 영원히 기억할 거라고…그렇게 적혀 있었어.

잊고 살았어. 다 잊고 살았지. 할 만큼 했다고, 제국을 위해서였다고. 다 그렇게 생각했어, 임무를 위해서였다고. 실패하긴 했지만, 오히려 그래서 결과가 좋으니 다 잘된 것 아니냐고. 그렇게 스스로 묻었다고 생각했는데…

수도원에서 본 그림자가 그녀의 모습을 하고 있었어. 그리고 어제…아니. 오늘 새벽엔, 좀 더 또렷하게 보았고. 어젯밤에는 그 여자 꿈을 꿨었어…아주. 몹시 나쁜…꿈.”

목이 갈라지고 힘이 빠져 더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카인은 릴리가 가만히 몸을 포개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보아야 했다. 릴리는 카인을 끌어안고, 가슴으로 얼굴을 묻고, 머리를 두 팔로 가만히 꼭 안아주었다.

“그날. 저도 그림자를 봤었습니다.”

릴리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다. 그림자는 사람 마음에 있는 가장 두려운 것을 꺼내 들이민다고 했었던가. 왜곡시키고, 과장하고 증폭시킨다고 했었다. 릴리 역시 그림자를 보았지만 ‘있을 수 없는 것’이었기에 버텨내었다고 했었다.

“뭘, 봤어?”

“제 아버님을 보았습니다.”

릴리의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도제 Doge : 천 년 가까이 베네치아를 통치했던 최고 지도자의 직책명으로, 지도자라는 뜻의 둑스 Dux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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