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 몰락 보고서-29화 (30/47)

제 29화

검으로 바치는 경애 (4)

본관 외벽은 그저 밋밋한 돌벽이지만, 안은 화려하다.

바닥의 섬세한 모자이크는 붉은 장미 정원 위를 거니는 기분이었다. 벽과 창문의 기하학적 아라베스크 문양은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살아서 꿈틀거리는 듯한 신비로움을 준다.

4층까지 뻥 뚫린 로비는 돔형 천장까지 올려다보인다. 2층, 3층, 4층. 석재 난간 너머로 사람들이 가득하다. 어떤 사람들은 웃고 있고, 또 누군가는 난간에 기댄 채 진지한 대화를 나눈다.

로비도 마찬가지다. 억양조차도 제각각이었는데 살짝만 귀를 기울여도 북부에서 남부까지, 동부에서 서부까지 제국의 모든 사투리를 전부 들을 수 있었다.

심지어, 홀 중심부에는 별도 안내소까지 두고 있다. 일렬로 깔린 책상에 수도사들이 앉아 길 안내, 서류 접수, 상담 예약까지 받는 중이었다. 카인이 보기엔, 수도 법원보다도 훨씬 복잡해 보였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그래도 탁발 수도사는 친절하게 웃음까지 지어주었다. 카인은 점잖게 대답했다.

“고위 이단심문관 하인리히 신부님 뵙기를 청합니다.”

“사전에 예약이 있으셨나요? 아니면 고소나 고발 관련 사항입니까?”

“둘 다 아닙니다만, 중요한 일입니다.”

수도사가 난처한 듯 다시 활짝 웃었다. 익숙한 걸 보니 한두 번지어 보인 미소가 아닌 듯했다.

“죄송합니다만, 바로 만나 뵐 수 있는 분은 아닙니다. 하인리히 신부님뿐만 아니라 다른 분들도 다 마찬가지죠. 다들 업무가 너무 많으시거든요. 예약을 잡아주시면 형제님의 시간 낭비도 줄일 수 있을 것 같은데, 지금 예약하시겠습니까?”

카인은 이 탁발 수도승에게 하스펠 신부 이야기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잠시 고민했다. 다른 고위 이단심문관의 이름을 대면 쉽게 통과시켜 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노출 위험 역시 크다. 안나의 답장 내용을 보면 더더욱.

“아쉽군요.”

카인은 정말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사실은 제가 큰 사업을 하나 벌이고 있습니다. 삶과 죽음의 예언자님의 은총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그런 교역이죠. 그래서 그 크신 은혜에 보답하고자 기부와 자선 행사를 열어 하인리히 신부님에게 축사를 부탁할까 했거든요.”

수도승의 표정이 일순간 굳었다. 카인은 귀가 간지러웠다. 뒤에 바짝 붙은 릴리가 긴장했는지 바람을 불어넣고 있어서였다. 수도승이 카인과 릴리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저. 뒤에 계신 분은…”

“아. 제 아내입니다.”

“안녕하세요.”

뒤편에서 릴리가 우아하게 인사를 건넸다. 수도승이 얼떨결에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눈에는 여전히 의심이 가득하다.

“저. 죄송합니다만, 하시는 일에 대해 좀 더 정확히 듣고 싶습니다. 아, 말이 좀 이상하게 들렸다면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고위 이단심문관에게 이런 기부와 자선을 부탁할 정도의 분은 사실 드물거든요.

그래서 어지간한 분의 신상에 대해서는 저희가 다 알고 있는데, 그분들 가운데 아내가 남편보다 키가 조금 더 큰 부부에 대해서는 제가 들은 바가 없어서요.”

누가 들어도 무례한 소리였지만 카인은 정중히, 그리고 의도적으로 몸을 숙였다.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서부 이교도 방식임을 금방 알아챌 정도다.

“모르시는 것이 당연합니다. 저는 교역 중개상인데, 주로 서부와 동부에서 주로 활동하거든요. 남부와는 연이 닿지 않아 이름 알릴 기회가 없었습니다만, 좋은 분을 모시고 남부 쪽으로도 활로를 뚫으려 생각 중입니다.”

탁발 수도승의 눈이 가늘어졌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로군요. 서부 이교도와 교역하려면 제국과 교황청 두 쪽의 인가가 모두 필요합니다. 그런데, 실례되지만 두 분의 복장을 보면…귀족은 아닌 것 같은데요. 물론, 값진 옷임은 틀림없어 보이지만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카인과 릴리는 고위 귀족들이 두르는 어깨 장식 천도 두르지 않았고, 심지어 왕족이 두르는 허리띠 같은 것도 없었다.

실크로 된 부드러운 천에 섬세한 금실 무늬는 분명 값진 것이었지만, 부유한 상인의 옷일 수는 있어도 귀족 옷의 특성은 아니다.

“말씀 옳습니다. 인가는 중요하지요. 하지만 인가받지 않고도 교역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예? 어떻게 말입니까?”

“사람과 사람 사이의 대화에는 허락이 필요 없지요. 저는 서부 이교도와 동부 연합 공화국의 상인들과 서신을 자주 주고받습니다. 어떤 물품이 필요한데 누구를 만나야 할지 모르겠다고 연락이 오면, 적절한 물품을 댈 수 있는 사람을 소개해 주죠. 그 사이에 중개 수수료를 받습니다.”

“아아. 이해했습니다. 일종의 정보 중개인이로군요. 그런데 어떻게 그런 거래가 가능합니까?”

수도사는 꽤 관심 있어 보였다. 카인은 청빈을 목표로 삼는 탁발 수도사가 왜 이런 것에 관심 있는지 궁금했지만, 일단은 그의 환심을 사는 것에 집중했다.

“글쎄. 서로 도시를 걸어 다니다가 칼 맞아 죽는 것보다는, 사기의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중간 거래인을 끼는 편이 안전하니까요. 그리고 제국 수도의 블룀베르크 쌍둥이 상회는 높은 신용도와 탄탄한 보험 항목으로 유명한 회사입니다. 여기, 제 신용장도 있고요.”

카인은 가짜 신분용 신용장과, 어린애 손바닥 크기의 남부 왕국 금화를 테이블에 슬며서 내려놓았다. 수도사는 신용장을 쓱 잡아당겨 살펴보고선, 금화는 자기가 가지고 신용장은 돌려주었다.

“알겠습니다. 잠시만…아. 정말 죄송합니다만, 당장 하인리히 신부님을 만나 뵙기는 좀 어려울 겁니다. 잠시 후에 열리는 종교재판에 판관으로 자리하시거든요. 재판 전에는 준비하실 것이 많으시니, 방문은 어렵지만…”

수도사가 서류를 바쁘게 뒤적거렸다. 양해를 구한 뒤 일어서더니, 다른 수도사와 뭔가를 속삭이고서는 명단을 가져왔다.

“다행히 공개 재판이기에 참관인 명단에 올려드릴 수는 있을 듯합니다. 경비병에게는 미리 언질을 줄 테니, 재판 끝나고 잠시 이야기할 수 있도록 해 드리지요. 이 정도라면 어떻습니까? 대략 두 시간 정도 남았으니, 시간도 넉넉하고요.”

카인은 강아지를 생각했다. 멀리 집어 던진 쓰레기를 물어 온 다음 ‘이 정도면 잘 하지 않았느냐’고 헉헉거리는 강아지. 수도사의 표정이 딱 그랬다.

“더할 나위 없이 좋군요.”

물론 카인은 정중하다.

* * * * *

두 시간 동안, 카인과 릴리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제국 제2의 도시이자, 쌍두독수리의 성지라는 이름답게, 마그데부르크 안에는 성이 하나 더 있다.

해자와 도개교는 없지만, 길쭉한 내성벽(內城壁)을 갖춘 버젓한 성으로, 오로지 교단만을 위한 성소다. 이단심문관 본원,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신전인 성 리아 대성당, 검의 경애 공원까지.

카인은 보통의 사내들처럼 왼손은 허리에 얹고 오른손은 지팡이를 짚었다. 릴리는 얌전히 팔짱을 낀 채 걸었다. 누가 봐도 평범한 부부처럼 보일 터였다.

물론 나지막한 목소리로 주고받는 대화는 전혀 평범하지 않다.

“마그데부르크 보안국 지부장한테 술이라도 하나 보내야겠어. 이런 옷 안 입고 다니면 사람 취급도 못 받을 거라더니, 사실일 줄이야.”

지부장은 카인과 릴리가 무슨 임무를 맡았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서로 임무에 대해서는 묻지도 답하지도 않되, 지역에서는 수도 파견 인원의 편의를 최대한 봐 주는 것이 원칙이다.

카인은 ‘적당히 상인으로 보일 만한 복장 두 벌’을 주문했고, 원해서는 아니었지만, 릴리와 ‘부부’ 행세하기로 했다. ‘사촌’끼리 동업을 하는 것보다는 ‘부부’가 함께 일하는 편이 더 자연스러워 보일 거라는 권고 때문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마그데부르크 보안국 지부장이 수도의 거상이나 입을 법한 값비싸고 묵직한 옷을 들고 왔을 때는 꽤 놀라웠다.

“너무 과하지 않습니까? 완전히 실크에, 이건 뭐야. 금실 자수인가요? 실크에 붉은색 염색은 어떻게 한 거죠?”

카인의 옷뿐만 아니라 릴리의 옷도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몸매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전형적인 제국 옷이었지만, 어떻게 깎았는지 모를 보석이 아침 이슬만큼이나 빼곡하게 달려 있어서 입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과하다뇨. 대접받으라고 드리는 게 아니라 문전박대당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마그데부르크에서 이 정도로 안 입고 다니면 사람 취급도 못 받아요. 그리고 비법은 나도 모릅니다. 남부 왕국 장인들이 한 거니까.”

“마그데부르크가 부유하다는 말은 여러 번 들었지만, 사람을 무시할 정도라니…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요?”

“전쟁 때문입니다. 릴리 요원.” 같이 온 여자 담당자가 대신 답해주었다.

“저주받은 십자군과 5차 십자군 전쟁 때 가장 이득을 본 건 교황과 남부 왕국이죠. 마그데부르크는 남부 왕국과의 주요 교역 도시고, 덕분에 막대한 부가 쏟아져 들어오고 있어요.

거기에 교황 성하께서는 ‘검의 경애 공원’을 특별 성지로 지정하셨죠. 한 번이라도 방문하면, 지금까지 신에게 저지른 죄에 대한 벌을 ‘안 받을 수 있다’라고 선언하셨거든요.

성지 순례도 하고, 관광도 하고. 북부하고 서부 이교도들도 돈 싸 들고 걸어 들어오는 판국입니다.”

“세상에. 난 교역상인 줄 알았는데. 진짜 이교도라고요? 그게 가능해요?”

지부장이 껄껄거리며 웃었다.

“미움과 갈등이 돈 앞에서 어떻게 녹아 사라지는지 보면, 기적이라는 말이 저절로 나올걸요. 아주 용광로가 따로 없습니다. 간단하지 않습니까? 사람이 모이고 돈이 모이면, 장사꾼도 모이기 마련이죠. 돈 앞에서는 종교고 원한이고 갈등이고 없어요.”

그렇다고는 해도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위장 우편 마차를 타고 마그데부르크로 오면서, 카인과 릴리는 수많은 인파를 마주쳤다. 가난한 사람들부터 돈과 권력 있는 사람들까지 다양했다.

다만 그들 모두 마그데부르크가 세상 유일한 화장실이라도 되는 것처럼, 한 줄로 늘어선 사람들은 비통하고도 어둡고 절망적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카인은 오래전 이 도시에 온 적이 있었다. 동부 출장을 가기 전이었다. 마그데부르크는 그때도 부유하긴 했지만, 이 정도까진 아니었었다.

“그거 말입니까? 교단 방침이 좀 바뀌었어요. 너희 이렇게 살다 간 천국도 지옥도 못 간다고 을러댑니다. 중간 지대에서 정화를 받을 때까지 불에 타들어 갈 텐데, 신실한 믿음을 증명하면 그 ‘정화의 과정’을 건너뛸 수 있다고 말합니다. 저곳에서 받을 형벌을 미리 당겨 받는다나?”

“무슨 말이에요, 그게?”

“그러니까, 잘못해서 된통 혼나고 다시는 안 그러겠다 맹세를 받아도 회초리 한두 번 정도는 맞지 않겠습니까. 누구나 죽으면 그 회초리를 저승 가기 전에 맞고 가게 되는데, 그거 안 맞게 해 주겠다는 겁니다.”

“그게 무슨 말장난이야. 그리고 신실한 믿음을 뭐로 증명해요?”

“예전 같았으면 십자군에 참여하던가 기부금을 바치거나인데, 요샌 그런 전쟁이 없죠. 그래서 교황청이 내놓은 게 성지순례와 기부금이에요.

물론 목숨 바쳐 희생한 이들의 길을 걸어가며 그 뜻을 되새긴다는 큰 의도는 좋다 생각하지만, 왜 하필 그 성지중 하나가 제일 부유하고 물가도 비싸면서 교황청이 죄다 가져가는 마그데부르크 내성이냐는 거죠.”

“재무국은요? 그 애들이 가만있을 리가 없는데?”

“하이고, 그 돈벌레들? 말도 마시죠. 돈을 바리바리 싸 들고 오는데 왜 말리겠어요? 내성 들어가기 전 도로에 좌판 쫙 깔리고 시장 계속 이어진 거 못 보셨어요? 그거 재무국 작품이에요.

순진한 시골 사람들은 거기서 한번 쫙 털리고, 정작 내성 들어가서는 낼 돈이 없어 쩔쩔매다가, 수도사가 인자하게 ‘괜찮습니다. 여기 와 주신 것만으로도 그대의 신앙은 증명되었으니까요.’ 한 번 웃어주면 행복하게 돌아갑니다.

지갑도 마음도 죄의식도 텅텅 비어서 돌아가는데 발걸음이 가볍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하죠.”

“맙소사.”

“검의 경애 공원 들어온 이후론 더 심해졌어요. 아까도 말했죠? 이교도들 몰려온다고. 웃긴 게 서부와 북부 이교도들도, 검의 경애 공원만큼은 인정하거든요. 본인들도 마왕에 맞서 성전을 일으켰으니까.

그리고 그 체면 차리기 좋아하는 이교도들에게 휴전 중인 적국의 심장부에 가서 돈을 쓰고 왔다는 것만큼, 자기 위세 떨치기 좋은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사람 사는 곳 다 똑같아요.”

카인과 릴리는 뭐라 말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지부장은 지친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마그데부르크는 도가니입니다. 돈이라는 화염으로 절절 끓어오르는 도가니지요. 종교재판소에서는 현자의 돌, 그러니까 납을 금으로 바꾸었다고 떠드는 사이비들을 호되게 질책한다고 하는데. 내가 봤을 땐 마그데부르크야말로 현자의 돌이에요.

세상 모든 미움과 증오와 원한과 죄의식이 죄다 금덩어리로 바뀌는데, 이게 기적의 연금술이 아니면 대체 뭐겠어요?”

'검의 경애 기념 공원' 앞에 선 지금, 카인은 그 말이 정말 맞다고 생각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아래는 그냥 중세 TMI니까 가볍게 읽어주시면 됩니다.

내성벽 : 성벽이 두 개 이상일 경우, 바깥쪽 성벽은 외성벽, 안쪽 성벽은 내성벽이라 칭합니다. 비잔티움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의 내성벽은 제국의 수도를 꽤 오랫동안 지켜준 비결이기도 했습니다. 외성벽과 내성벽 사이에는 페리볼로스(perivolos)라 불리는 병력 이동 통로가 있었다고 합니다.

면죄부와 면벌부 : 두 가지는 뜻이 다릅니다. 면죄부는 '죄를 사한다' 라는 뜻이고, 면벌부는 '죄에 지은 데 따라오는 벌을 면한다' 라는 뜻입니다. 실제 교리상으로, 중세에 판매했다는 가톨릭의 증서는 면'죄'부라기 보다 면'벌'부에 좀 더 가깝습니다. 종교 해석과 교리상으로는 엄청난 차이가 있지만, 국내에서는 여전히 면죄부라는 표현이 더 자주 쓰이긴 합니다. 다만 학계에서는 정확한 표현을 위해 면죄부보다 면벌부라는 명사로 대체해나가는 추세이며,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대사' 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가톨릭 용어 사전 링크 참고)

죄를 없애준다는 것과 죄에 따르는 벌을 없애준다는 것은 굉장히 다른 의미입니다. 무죄와 집행유예만큼의 차이만큼 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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