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 몰락 보고서-20화 (21/47)

제 20화

순결의 몰락에 대한 보고서 (7)

남자는 자신을 '고위 이단심문관 하스펠 신부'라 소개했다. ‘고위직’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마차를 네 대나 가져왔다. 두 대에는 의식에 쓰이는 집기를 실었고, 한 대에는 시종들을 태웠고, 나머지 하나는 자기 것이었다.

이단심문소 특유의 붉은 로브를 입은 이들이 부지런히 짐을 옮기는 동안, 하스펠은 카인과 릴리를 공터에 세워진 자기 마차로 불러들였다. 시종들을 시켜 누구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한 건 덤이었다.

“제국보안국 카인 요원, 릴리 요원이라 들었는데 맞나 모르겠구려.”

카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중년의 사내는, 수염과 주름만큼이나 다채로운 휘장을 달고 있었다. 흘러간 세월에 대한 추모비리라. 그중에는 붉은 리본에 하얀 십자가가 그려진 것도 있었는데, 마왕을 물리치기 위해 결성된 십자군의 일원이었다는 의미다.

“어제 두 분의 활약에 대한 이야기는 서신으로 들었소이다. 귀중한 정보들을 많이 주셨더구려. 특히 환자들을 다루는 방법은 깊이 감명받았소. 아리우스 수도원장에게도 같은 방법을 쓸 수 있을 것 같소이다.”

그러니까 교단은 석 달 전에 습격당한 '절제' 에게 단 하나의 정보도 알아내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하스펠은 미간을 문질렀다.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교황 성하께서는 일곱 영웅에 대한 시성을 준비 중이라오. 하지만 그냥 터놓고 이야기하겠소이다. 그건 그냥 예쁜 포장지고, 실상은 대체 무슨 일을 하고 다녔는지에 대한 전면적인 재조사나 마찬가지요. 성역도 없고 범위도 없으며 제한도 없소. 모든 것은 합법적이며 성하의 축복 하에 이루어지는 일이니.”

“하스펠 신부님. 교단은 이 사안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하스펠은 쉽사리 답을 꺼내지 못했다. 대답을 망설인다기보다는, 너무나 많은 것을 알고 있어서 어디에서부터 말해야 하나 고민하는 사람 같았다. 이윽고 그는 좌석을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일단 순결의 기사에 대해서부터 이야기합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저 피해자들과 윌리엄 대주교에게 악마가 손을 대었는지 알아보러 왔소. 의식을 준비하는 이유기도 하지.”

“구마 의식 같은 겁니까?” 릴리의 질문에 하스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구마 의식은 마귀의 손아귀에 떨어졌다는 것이 확실할 때 한다오. 감기에 걸리지도 않은 환자에게 감기약을 지어주는 건 의미 없는 일인 것처럼. 대신 영혼과 육신에 복이 깃들기를 바라는 축복 의식을 치를 거라오. 악을 몰아내고, 선의 힘을 더욱 강화해주는 의식이지. 우리는, 저 가련한 이들이 악마의 괴롭힘을 당한다고 보고 있소.”

“직접 거행하십니까?”

“이단심문관이 축복을 내려준다는 것이 이상하게 들린다는 건 아오.” 하스펠이 카인의 물음에 미소 지었다.

“당연히, 내가 직접 한다오. 자비기사단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할 것이고, 여러분은 제국의 공증인으로 참관하게 될 것이고. 여러분을 굳이 여기 부른 이유는 그 때문이오.”

“믿기 어려운데요.” 카인이 양 손바닥을 펴 보였다. “단순히 참관인으로 선발되었다고 이렇게 비밀스럽게 대화를 나눈다고요? 신부님. 시간이 없습니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시죠.”

“급하구려! 급해!” 하스펠이 손을 비비적거리며 웃었다.

“좋소. 그렇게 합시다. 하지만 이건 짚고 넘어가야겠는데, 여러분은 이단심문관에 대해 얼마나 아시오? 여러분이 얼마나 아는지를 알아야, 나 역시 편하게 전할 수 있을 듯한데.”

“세계 최고의 중재 전문가이자 교단이 자랑하는 소방수지요.”

릴리는 황당하다는 눈으로 카인을 바라보았다. 배를 잡고 웃는 하스펠을 보고 더더욱 놀라워했다. 이내 ‘역시, 그럴 줄 알았어.’라는 듯 표정을 다시 굳히기는 했지만.

“잘 아시는구려. 이야기가 쉽겠소. 이단심문관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순결의 기사 윌리엄 때문이라오. 아는지 모르겠지만, 이 영웅님의 이력이 좀 특이해야 말이지…”

순결의 윌리엄. 본명은 윌리엄 체스터. 백작가의 넷째 아들이다.

체스터 백작령은 영세한데다 기근까지 겹쳐 무척이나 궁핍했다. 체스터 백작은 자비기사단에서 대출을 받았는데, 만기일이 되어도 갚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자 기사단은 둘 중 하나를 바칠 것을 요구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돈을 모아 갚던가, 아니면 사람으로 대신 갚던가. 사람으로 갚으라는 이야기는, 가족 중 한 명을 기사단에 입단시키라는 뜻이었다.

그래서 선택된 것이 윌리엄 체스터였다. 넷째 아들인지라 계승권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고 나이도 어린데다, 성격이 난폭해서 부모는 그를 좋아해 주지 않았다.

하지만 난폭한 성정에도 불구하고, 윌리엄 체스터에게는 재능이 있었다. 성기사의 재능.

“기사가 되기도 어렵지만, 성기사가 되기 위해서는 ‘신성한 힘’을 쓸 줄 알아야 하오. 숱한 연구에도 불구하고 그 힘을 대체 어떻게, 어떤 사람이 쓸 수 있는지는 모른다오. 우리가 아는 건 한 번이라도 쓴 사람은 앞으로도 계속 쓸 수 있다는 것과, 힘을 쓸 줄 아는 사람이 적다는 것, 가르친다고 해서 쓸 수 없다는 것…하지만 일단 배우고 익히면 더 능숙해진다는 것뿐이오. 즉, 안 되는 사람은 계속 안 되고, 되는 사람은 계속 더 잘 쓰게 되는 거지.”

카인은 무례한 붉은 머리 기사를 떠올렸다.

“헤르부르크 성주, 알드릭 형제도 쓸 수 있습니까?”

“못 쓴다고 알고 있소. 알드릭이 계속 한직으로 밀려나는 이유가 그 때문이지. 오히려 그자가 데리고 있는 견습 기사는 성기사의 자질이 있소. 약하게나마 기적을 쓸 줄 알거든.”

두들겨 맞았던 그 수습 기사를 뜻한 것일 테다. 그렇다면, 그렇게 못살게 구는 이유는 대체 뭘까.

“성기사가 쓴다는 ‘기적’은 무엇입니까?”

“악마와 마법사, 마녀를 처단하는 단 하나의 힘이지. 사특한 것을 물리치는 권능이 담겨 있소. 무고한 자와 신심 있는 자에게는 아무 영향도 없지만, 오로지 악과 악마의 하수인에게는 반응하오.”

카인은, 고위 이단심문관이 입술을 찡그리는 것을 보았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는 듯했다.

“순결의 윌리엄도 기적을 쓸 수 있었지요. 그래서 마왕을 물리치는 일곱 용사로 선발되었던 것이고. 강력한 기적을 행할 수 있었다고 하던데요.”

“그랬지. 비극이오.”

“비극이라 하셨습니까?”

하스펠 신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카인 요원. 비유로 말하는 걸 용서하시오. 세상 사람들은, 저마다 그릇을 가지고 있소.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릇이 넘칠 정도로 은총을 받는다오.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 은총은, 저주가 되어 그 사람을 잡아먹는데…순결의 윌리엄에게 일어난 일이 바로 그것이오.”

“대체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하스펠이 들려준 이야기는 끔찍했다.

교황의 기사단은, 기사이긴 하지만 일단 성직자로 분류된다. 굳이 정의하자면 싸우는 수사, 승병에 해당한다.

그리고 순결의 윌리엄 역시, 마왕을 물리친 자비기사단의 성기사이며, 검의 경애를 받은 7인의 영웅 중 한 명이지만, 본질은 성직자다. 성직자의 덕목을 그대로 따라야 했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그가 가는 곳에서는 추잡한 소문과 고발이 끊이질 않았다.

“전부. 하나같이. 성적인 것과 관련된 것들이었소. 중상모략이라 생각했지. 누가 봐도 말도 안 되는 모함도 있었지만, 사실 여부가 불확실한 것도 많았소. 하지만 윌리엄을 끌어내리려고 하는 자들이 많았던 것만은 사실이지.”

“이해가 안 가는군요. 영웅을 말입니까?”

“영웅은 큰 비바람은 이겨내도, 잔매는 못 버텨낸다오. 그걸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은 없소.” 고위 이단심문관이 쓸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성기사가 되려면 ‘기적’을 행할 수 있어야 하오. 기적을 무기로 쓰는 법을 알아야 하지. 일단 본인에게도 영예스러운 일이지만, 승진도 보장된다오. 그런데 그게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니라, 거의 타고나는 것으로 여겨지다 보니…”

하스펠은 말을 흐렸다. 릴리가 그의 말을 완성 지었다.

“질투를 많이 받았겠군요.”

“그렇소이다. 릴리 요원. 순결의 윌리엄은, 마왕을 물리칠 정도의 기적을 쓸 줄 알았소. 하지만 찬란한 영광이 드리운 그림자의 무게를 버텨내는 법은 몰랐지. 그가 이단심문소로 자리를 옮긴 이유라오…일반적인 관행은 아니지. 당신네들 비유로 따지자면, 같은 제국 공무원이라는 이유로 보안국 사람을 재무국으로 옮긴 셈이오.”

카인과 릴리는 동시에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필 비유해도 재무국이라니. 하지만 그렇게 말하자 와닿는 면은 있었다.

윌리엄은 거의 좌천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단심문소에 와서도 추문은 끊이지를 않았소. 오히려 더 심해졌지. 이단심문관은 사람을 장작처럼 태우는, 그런 무시무시한 사람이 아니외다. 그보다는, 신앙과 성서를 자기 입맛대로 해석해 사리사욕을 챙기는 이단자들과의 신학 논쟁이 주 업무요.

마녀와 마법사를 잡는 것도 업무지만, 그보다는 마법사와 마녀를 잡았으니 와서 확인 좀 해달라는 지원 요청이 훨씬 많지. 10,000명 가운데 9,999명은 마법사도 마녀도 아니오.”

“그러면 무엇입니까?”

“마법사와 마녀로 모함당한 사람들이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기 공동체 사람으로부터.”

이것이 이단심문관이 중재 전문가이자 소방수로 불리는 이유다. 세속 권력이 하지 못한, 사람들 사이의 오해와 갈등을 밝히고, 사적인 재판을 중지시킨다는 점에서 말이다.

“기가 막히다오. 빌린 돈 갚기 싫어서 중상모략하는 놈, 흑심을 품고 들이댔다가 망신당하자 보복하려는 놈, 그냥 못생겨서 혐오감이 든다는 이유로 마을 사람들에게 두들겨 맞다가 결국 화형대에 반쯤 불타는 사람…남자고 여자고 없소.

그냥 마음에 안 드는데 이유가 없으니까 ‘마법사다, 마녀다’ 몰아붙이는 사람들. 지긋지긋하다오. 거기 어디에도 마법사와 마녀는 없소. 그저 서로를 마법사와 마녀라고 헐뜯는 사람들 뿐인데, 사실 그것이야말로 악마의 노림수지.”

악마라. 카인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범죄자를 잡는 것은 할 수 있지만, 악마를 잡는 일은 전문 분야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이런 이야기는 조금 낯설었다.

“카인 요원. 릴리 요원. 악마가 바로 그런 식으로 일합니다. 악마는 절대 대놓고 활동하지 않아요. 악마를 보자마자 사람들은 죄다 교단 성전으로 달려갈 테니까.

악마가 한 일이라고는, 그저 ‘세상에는 마법사와 마녀라는 나쁜 게 있는데, 어쩌면 네 이웃일지도 몰라.’라고 속삭인 것뿐이오. 나머지는 사람들이 알아서 다 하지. 근거도 이유도 없이 굶기고 때리고 자르고 불태워버리니까.

그들에게는 그런 자격이 없소. 그들은 심판자가 아니오. 그저, 신의 이름을 빌려서, 정의의 탈을 쓰고, 자기들 하고 싶은 대로 날뛰는 것뿐이지. 그게 바로 악마가 원하는 바요. 자신을 정의롭다 여기게 하여, 다른 이를 마음껏 해쳐도 된다는 어처구니없는 정당화를 심어주는 것.”

마차 밖에서 똑똑, 소리가 났다. 준비가 끝났다는 신호였다. 하스펠은 목을 가다듬었다.

“아무튼. 말이 길어졌는데.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순결의 윌리엄은 이단심문관이 되어 다른 귀족, 평민들과 활발히 교류했고. 그 가운데 믿기 어려운 풍문들이 넘쳐났다는 것이오. 성적인 종류의 고문을 가했다는 게 대표적이지.

너무나 뒷말이 무성하자, 이번에는 교구 대주교로 옮겨갔다오. 대주교 정도 되면 보통 사람보다는 귀족과 더 많이 어울리고, 귀족이라면 그런 헛된 중상모략은 하지 않을 테니까.”

“그런데 잘되지 않았군요.”

“잘 안되었소.” 하스펠 신부가 종이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아름답고 꼼꼼한 필체로 적힌 고발장이자, 유언장이었다. 내용을 다 읽기도 전에 신부는 종이를 도로 집어넣었다.

“로렌츠 백작 부인의 고발장이오. 순결의 윌리엄 대주교와…육체적 관계를 맺었다는 내용의 고발이지. 대주교가 자신을 어떻게 희롱했는지에 대해 적은 다음 성 밖으로 투신했소. 그게 며칠 전 일이고. 이런 고발장이 수백 장이 넘소. 파기된 것까지 합치면 수천이 넘을지도 모르지. 그러다 보니, 가장 신심 깊은 자들마저도 의심이 드는 거요.”

“그래서 의식을 치르는 겁니까?”

“그렇소.” 하스펠이 좌석에 몸을 기대었다. “가뜩이나 끔찍한 피해를 당한 사람에게 이런 중상모략이라니. 이건 악마가 붙어 괴롭힌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소. 그러니, 가련한 영웅이 짊어진 무거운 짐을, 정화와 축복으로 씻어내려는 게 목적이오.”

다시 똑똑, 하는 소리가 났다. 말소리도 들렸다.

“자비기사단 남부 지역 사령관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마르코 사령관이? 벌써? 빨리 왔군.” 하스펠이 마차 문을 열어젖혔다.

“잘 되었구려. 시간 낭비를 줄일 수 있겠소. 여러분은 그저 편안히…편안히라는 말이 좀 우습긴 하지만, 그저 미사 한 번 본다 생각하시면 된다오. 가만히 앉아서 의식을 참관하기만 하면 된다, 그 뜻이라오. 그냥 평범한 미사 한 번인데, 뭐 별일이야 있겠소?”

“당연히 별일 없겠죠.”

카인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들은 환자들이 기다리고 있는 성당으로 향했다. 구마의 의식도 아니고, 단순히 축복을 내리는 것이니, 꽤 지루한 미사가 되리라 생각하면서.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 이단심문관에 대한 내용은 야콥 슈프랭거, 하인리히 크라머의 '마녀를 심판하는 망치 - 말레우스 말레피카룸, 마녀 사냥을 위한 교본' 를 참고하였습니다. 1486년 초판이 발행된 책으로, 저자 두 명 모두 1400년대 독일 성직자들입니다.

국내 번역본도 나와 있는데, 아무리 봐도 후반부의 궁수-마법사는 Arch-Mage의 오역 같습니다. 다만 살벌해보이는 제목과 달리 내용은 말 그대로 마녀와 마법사를 기소하는 방법, 재판 절차, 소송에 대한 법률적 기술서에 대한 내용이 많습니다. 민중 혹은 귀족의 사적인 재판을 이단심문관이 가서 뜯어 말린다는 내용은 본문에서도 꽤 여러 번 나옵니다.

※ 띄어쓰기와 줄바꿈 보기 편하신지 궁금하네요. 휴대폰으로도 보기 괜찮으신가요? 아니면 지금보다 줄바꿈을 더 많이 하는 편이 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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