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 몰락 보고서-17화 (18/47)

제 17화

순결의 몰락에 대한 보고서 (4)

카인은 예배당으로 돌아왔다.

안은 그대로였다.

냄새와 구토, 신음과 좌절, 울음과 눈물. 한탄과 비명. 신을 찬양하며 환희의 찬송을 부르던 공간은, 신이 죽기라도 한 것처럼 애통의 장송곡만 흐른다.

하지만 카인은 달라졌다.

휴식을 취하는 간호 인력들에 끈질기게 달라붙었고, 짜증 섞인 무시가 돌아오면 정중하게 물러섰다. 지팡이를 벽에 기대어 둔 채, 양손에 천을 들고 환자의 오물을 같이 닦아주었다. 무겁고 더러운 짐을 대신 들었고, 뜨거운 미음이 식을 때까지 수저로 저어 식혀주었다.

“가만히 계세요! 다친다고요!”

또 누군가가 발작했다. 울부짖으며 제 몸을 부딪쳤다. 쇠사슬이 끊어질 리 없는데. 제 몸을 찧어 보았자 다시 말끔히 회복될 텐데.

간호하던 수사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환자도 그랬다. 사람과 사람이 만났는데도 슬픔과 고통만이 가득하다.

통하지 못하니까. 이야기를 나눌 수 없으니까.

카인은 가까이 다가갔다. 쇠사슬을 겨우겨우 붙들던 수사들은 카인이 힘을 써 주러 왔나, 하며 기대했다. 하지만 카인은 손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저 질문했다.

“복수하고 싶으십니까?”

한때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제 몸에 갇혀버린 영혼이 울부짖었다. 몸부림은 없었다. 그저 울부짖음이다.

“제 말이 들리신다면, 짧게 울어주십시오. 아니라면, 침묵해주시고. 저는 당신을 돕기 위해 여기 왔습니다.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고요.”

수사들이 카인을 귀신 보듯 바라보았다. 카인은 묵묵히 말을 이어 나갔다.

“답답하고 힘든 마음…그걸 감히 안다고 아는 척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괴로운 고통도 저는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당신이 대체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알고 싶습니다. 당신을 이렇게 만든 자를 찾아 값을 치르게 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다시 한번 청합니다. 제 말이 들리신다면, 당신을 위한 복수에 동의하신다면, 짧게 울어주십시오. 아니라면, 제 말이 들리지 않으시거나 이해하지 못하신다면, 침묵해주십시오.”

우으으.

몸부림이 멈췄다. 주변의 환자들조차 몸부림을 멈추었다. 지켜보던 수사가 조심스럽게 수건으로 환자를 닦아 주었다. 예전과 달리 짜증을 내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다.

“감사합니다. 질문 먼저 드리겠습니다. 소리를 내는 것이 힘드시다면 그저 몸을 살짝 움직여 주시고, 그것도 힘드시다면 한쪽 눈만 감아 주십시오. 반응이 있으면 그렇다, 없다면 아니다 라고 이해하겠습니다. 고통스러우시겠지만, 공격당하셨을 때의 상황을 알고 싶습니다…”

알아야 할 것이 분명했기에, 얻어야 할 것이 확실했기에, 모든 것은 그저 과정이 되었다. 거쳐 가야 하는 단계가 되었다. 방향이 분명해지자, 행동 하나에. 감정 하나에, 의미가 깃들었다.

카인은 그렇게 한 명, 한 명 조사해 나갔다.

칼에 베이거나, 창이나 화살에 꿰뚫리거나, 밧줄에 졸리거나 하는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둔기에 맞았거나 어딘가에 강하게 부딪혔을 때 생기는 타박상과 골절상이 전부였다.

온몸에 멍이 들어 있었으니까.

수사, 수녀, 기사단 시종과 견습 기사는 험하고 궂은일을 많이 할 뿐이지, 의사는 아니다. 그렇지만 아주 어린 시절부터 혹독한 매질을 견딘 이들이기에, 이런 ‘멍든 상처’에 대해서는 잘 알았다. 특히 기사단에 소속된 이들의 증언은 한결같았다.

그들의 말로는, 어딘가에 부딪히거나, 둔기에 맞았을 때 멍이 드는 건 같지만, 그 색이 다르다고 했다. 뼈나 장기가 상한 경우는 피가 많이 뿜어져 나오기에 멍의 색은 검은색에 가까워지고, 크기도 커진다는 것이다.

반면 일반적인 멍은, 막 생겼을 때는 피처럼 붉은 색을 띠고, 푸르스름한 보라색이 된다고 했다. 황색에서 갈색이 되면 서서히 나아진다는 의미이며, 붓기도 점차 가라앉는다.

50여명의 환자는, 대부분 검고, 푸른 멍투성이다. 끔찍한 상처라는 건 분명 맞지만, 멍의 색깔조차 변하지 않는다는 건 분명 기이한 일이다. 한두 명도 아니고 50명 전부가 그런 상태라는 건 더더욱.

“이 사람들은 시간에 갇힌 것 같아요.”

간호 수녀 한 명이 흐르는 땀을 닦으며 자신의 견해를 들려주었다.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던 사람이 한 번 말문이 트이자 이런저런 말을 쏟아내는 걸 보고, 카인은 그녀가 맺힌 것이 많았던 모양이라 생각했었다.

“둔기에 맞은 건지 거인이 손으로 이리저리 휘두른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뼈가 부러졌을 때의 그 시간이요. 색깔조차 변하지 않는다는 건 이상해요.”

“정말 기적일까요?”

카인의 질문에, 수녀는 공허한 눈으로 답했다. 이윽고 혼란스럽다는 듯,

“글쎄요. 함부로 말하기는 조심스럽군요. 제가 그런 말을 할 위치도 아니고. 기적인지 아닌지는 오로지 교황 성하만이 결정하시니까요…하지만 이건 확실해요. 기적이라면, 가장 끔찍한 기적일 것이고. 주술이라면, 가장 사악한 주술일 거라고요.”

“주술이라 하셨습니까?”

“똑똑한 분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은가 보네요. 이게 축복 같아요?”

그래 보이지는 않았다.

* * * * *

저녁 식사는 형편없었다. 맥주 수프에 말라빠진 빵 두 조각, 소금에 절인 양배추가 전부였다. 보통 때였다면 화를 냈을 터.

하지만, 지금 상황이 어디 ‘보통’ 상황인가. 오히려 이런 상황에서도 요리하고, 뭐라도 먹으려는 태도야말로 용기의 미덕이라 할 만하다. 더구나 이런 바위산은 보급조차도 여의찮으니, 굶지 않는 것만으로도 행운에 가깝다.

카인이 릴리와 다시 만난 건 식당에서였다. 아무 말 없이 저녁을 먹고, 그들은 둘만의 장소를 찾아 바깥으로 나왔다.

적당한 곳이 없었다.

산, 그것도 분지였던지라 태양은 일찍 저물었고, 기사단원들은 곳곳에 도가니를 설치하고 불을 피웠다. 어설픈 횃불이라면 바람에 꺼졌겠지만, 움푹한 강철 도가니에 불을 담자 꽤 안정적이었다.

심통 난 바람이 쿡쿡, 쑤시는 바람에 불티가 확 피어오르기는 했지만. 어차피 여긴 불탈 것조차 없는 황량한 돌산이다.

“아, 여기 계셨군요.”

때마침 귀도 수사가 반갑게 다가왔다. 그리고 대뜸 카인을 꼭 끌어안았다. 릴리가 놀란 눈으로 카인과 귀도를 바라보았다.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역시 수도에서 오신 분들은 뭔가 달라도 다르군요. 저 무식한 기사단 놈들이나, 시골 촌구석 교구 사람들, 산에서 돌부리나 캐 먹는 저희 같은 놈들과는 달라요…”

“어…별것 아닙니다.”

카인에게서 떨어지기는 했지만, 귀도는 카인의 양 어깨를 꽉 붙들었다.

“아뇨! 아닙니다! 누구도 그런 생각을 못 했었습니다. 저 사람들도 사람이고, 사람이면 다른 사람과 소통하고 싶어 한다는 걸 저희는 잊고 있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너무나 비참해서. 저들에 대한 동정이 눈을 가린 것만 같습니다…신을 따른다는 자들보다도, 오히려 정확하게 봐주셔서. 그저 놀랍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아. 한결 편해졌습니다.” 귀도가 한시름을 놓았다. “이제 간호 인력들은 절대 윽박지르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습니다. 뭔가 행동을 하기 전에, 먼저 물어봅니다. 식사하시겠어요? 어디 불편한 곳 있으세요? 아래쪽이라면 짧게 한 번, 위쪽이면 두 번. 이런 식이죠”

릴리는 통 영문을 몰라 했다. 카인은 조금 부끄러웠다. 수도에서는 거동이 불편한 환자에게 그렇게 하고는 하니까.

“하지만 저들에게 삶의 의욕을 불어 넣어 주신 것, 그것에 감사드립니다. 역시 사람은, 방향이 확실해야 제 날개를 펴는 법이로군요.”

“무슨 의욕 말입니까?”

“복수!”

귀도는 기뻐했다. 보고 있는 것이 괴로울 만큼 순진하게도 기뻐했다.

근본부터 선한 사람이고, 세속과 연을 끊은 사람이기에 그런 것일까. 복수라는 것의 의미가 뭔지도 잘 모르는 것은 아닐까, 그저 저 가련한 환자들이 애써 밥을 먹고 얌전해진 것만으로도, 나아졌다는 현실에만 집중하는 걸까. 카인은 알 수 없었다.

“그래요. 복수. 다들 속삭입니다. 복수해야 해요. 복수하셔야지요. 그러려면 일어나셔야 해요. 기운을 차리셔야 한다고요. 기적의 주문 같습니다. 아멘 보다도, 성가보다도, 훨씬 마음에 와닿는 말이죠!”

소리가 컸다. 맥없이 주저앉은 사람들이 귀도를 힐끔거렸다. 귀도는 귀까지 빨개진 채로 헛기침했다.

“큼. 말씀드리고자 했던 건 사실 이게 아니고. 원장 수사님이 두 분에게 정말 감사드린다는 말씀을 전하라 하셨습니다. 궁금한 게 있는데, 두 분. 혹시 별도 일행이나 호위병이 오기로 되어 있습니까?”

카인과 릴리는 서로를 쳐다보았다. 카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희 둘 뿐입니다. 더 올 사람도 없고요.”

“그렇다면 숙소를 아직 못 정하셨겠군요. 그렇죠? 기사단처럼 노상에 천막을 치시는 것도 아닐 거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잘 되었군요. 원장 수사님이 수도자 숙소를 비워 주라 하셨습니다. 귀한 분들이 오셨으니 당연히 그 값을 해야 한다고요. 낡긴 했어도, 돌로 지어진 건물인지라 나름 따뜻하고 또 견고합니다. 안 그러면 기사단 천막에서 주무셔야 할 텐데, 여기 밤은 바람이 무척 많이 불거든요.”

봉쇄수도원 숙소까지 내어준다는 건, 분명한 호의의 표시다. 릴리도 고개를 슬쩍 돌리는 걸 보니 좋은 모양이다.

“좋기는 하지만, 이거 민폐가 아닌가 저어되는군요. 저희 때문에 방을 비운단 말입니까?”

“그런 건 아닙니다. 환자분들을 수도자와 기사단 사람들이 하루 3교대로 돌보고 있거든요. 그래서 수사들과 수녀들은 같은 시간 근무자끼리 방을 합치기로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방이 남게 되었는데…여러분이 안 쓰시면, 저 붉은 머리 자비기사단 사령관이 밀고 들어올 거거든요.”

귀도의 목소리가 더욱 낮아졌다.

“자기는 굳이 수도자 숙소에서 자겠다며 난리를 쳐서 얼마나 곤혹스러웠는지 모릅니다. 어찌나 꼴불견이던지. 원장님은 차마 그 꼴은 못 보겠다며 저를 보내셨고요. 저 불한당에게 내주느니, 귀한 분에게 드리는 것이 옳다고.”

릴리가 카인의 허벅지를 쿡쿡 찔러댔다. 카인은 침착을 잃지 않았다.

“이런 호의를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요. 원장님의 선한 마음, 감사히 받겠습니다.”

“저. 그런데…하나 알아 두셔야 할 건 있습니다.”

귀도는 정말로 미안한 듯했다. 카인은 조금 불안해졌다.

“소음이나 불편함은 괜찮습니다. 천장과 벽과 바닥이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만족하니까요.”

“어, 제 말은 그게 아닙니다. 남는 방이 하나뿐인데다 수도자들 방이라는 게 조금 좁거든요. 대신 침대는 두 개 놓겠습니다. 담요는 물론이고요.”

“큼. 크흠!”

릴리가 헛기침했다. 사정 모르는 귀도의 귀에는 민망함과 난처함으로 들렸다. 물론 릴리와 좀 더 오래 일한 카인은 저 의미를 정확히 이해했다. 너무 좋아 미칠 것 같다는 뜻이었다.

‘너 들어가서 좀 보자.’ 생각하면서도, 카인은 깊이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 * * * *

청빈과 궁핍은 표현의 차이일 뿐이라고 말하는 이가 있었다. 신앙에 대해 무지한 자의 표현이라며 무수히 욕을 먹고 사과했지만. 전자는 신을 닮아가며 세속의 것에 관심 두지 않겠다는 목적이 분명하지만, 후자는 그냥 가진 것도 없고 의미도 없다는 뜻이다.

봉쇄수도원 복도를 걸으며 카인은 그 오래된 말을 떠올렸다.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카인의 눈에 수도원 숙소는 궁핍해 보였다.

차라리 수도 헌병대 지하 유치장이 더 호화스러웠다. 최소한 거기는 밝기라도 하지, 여기처럼 조명이랍시고 10m에 촛불 하나를 두진 않으니까.

그 때문에 카인은 지나친 방문의 개수를 헤아렸다. 잠깐 볼 일이 생겨 밖으로 나왔다가, 돌아갈 곳을 잊어 남의 방에 들어가면 민망한 일일 것이다.

선한 수도자들은 침대를 미리 가져다 놓았다. 나무판 두 개에, 얇은 천 매트리스 하나. 딱딱한 목침 베게 하나에, 덮고 잘 수 있는 천 하나. 바닥에 둔 나무 침대 두 개만으로도 방은 거의 꽉 차다시피 했다. 각자의 짐가방을 벽에 기대 놓으니, 차고 넘치는 기분마저 들었다.

조명은 달빛뿐이다. 벽에는 동그란 창문이 나 있었는데, 묘하게도 이것만큼은 스테인드글라스로 되어 있었다. 고난받는 쌍두독수리가 새겨진 예쁜 장식이었다.

“큼. 릴리. 불편하면 나는 밖에서…”

“저는 지금이 좋습니다. 혹시 불편하십니까? 이런 건 확실히 해 두고 싶습니다만.”

릴리는 천연덕스러웠다. 카인은 차마 ‘응’이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안 불편해.”

“그러면 큼. 크큼! 뒤로 돌아앉아 주십시오. 잠깐이면. 큼! 됩니다.”

“왜?”

릴리는 애써 침착하려 하는 것 같았다.

“옷을 갈아입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땀에 푹 젖었거든요. 돌아 앉으시는 정도의 불편은, 감당할 수 있으시겠지요?”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 연재 시간을 오후 8시로 정하겠습니다.

※ 주중 연재 누락분은 내일 보충하겠습니다.

※ 불필요한 부분은 최대한 잘라내겠습니다. 전개가 느려 죄송합니다.

※ 맥주수프 관련 내용은 설정집에 자세히 적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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