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구, 군주님!”
위로그 총관이 놀라서 소리쳤다.
샤론 군주가 검지를 들어, 입술에 갖다 대었다.
조용히 하라는 신호였다.
이윽고, 그녀가 날 보며 입을 열었다.
“염치없지만, 로서를 잡아주세요.”
“군주님,”
“저들을 보세요. 저들은 모두 로도스 왕국의 백성들이에요. 저는, 우리 백성들을 꼭 살리고 싶어요.”
“하지만 로서는···”
“태리 단장님, 당신이 만약 로서를 잡아준다면···”
샤론 군주가 앙증맞은 입술을 깨물었다.
뭔가 말하기 곤란한 듯한 표정.
그녀가 눈을 감더니 잠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시키시는 일들은 뭐든지 하겠어요.”
“군주님!”
샤론 군주의 말에, 위로그 총관이 경악했다.
“설령, 당신의 노예가 되더라도, 저는 피하지 않겠어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위로그 총관이 황급히 다가와 그녀를 말렸다.
고귀한 군주가 노예가 되겠다니···
너무나 황당해서, 기함한 표정이었다.
“봤어요. 당신이 테사다르의 팔을 자르는 것을···”
“군주님, 놈은 이미 다비온과의 전투에서 지쳐있던 상태였습니다. 그 때문에 쉽게, 팔을 자를 수 있었던 거고요.”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테사다르가 아무리 지쳤다 해도, 그렇게 쉽게 팔을 자를 수 없어요.”
“·····”
“그는 당신에게 공포를 느끼고 있었어요.”
“공포라니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제 눈은 속일 수 없어요. 저는 크리스탈의 권능을 이어받은 엘리멘탈 마스터예요.”
“·····”
“로서를 잡는 것은 어렵고 힘든 일이에요. 하지만, 다비온 경과 당신이라면 반드시 해낼 거라고 믿어요.”
“·····”
“태리 단장님, 간곡히 부탁드려요.”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요청에,
일단,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로서라···’
로서가 테사다르 정도의 실력자라면, 못 잡을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테사다르를 잡아, 공간의 잼도 획득해야 했다.
- 공간의 잼(1/3)
뿐만 아니라, 10대 보물도 얻어야 했다.
‘앞으로 4개.’
10대 보물을 모두 얻기까지 불과, 4개밖에 남지 않았다.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몇 번을 생각하고 생각해봤지만,
결론은 하나였다.
로서를 잡는 것.
그것만이 내가 강해질 수 있는 길이며,
이 난관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었다.
로서를 잡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다비온 경을 만나러 성벽으로 향했다.
***
4천의 그림자 병력이 내성을 안정적으로 방어 중이었다.
다크 실리안과 다크 템플러들이 무차별적으로 공격했지만,
그들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과연, 그림자 병력다운 모습이었다.
고개를 돌려, 다비온 경을 찾았다.
다비온 경은 총사령관으로서, 전장을 살피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자네 말대로 구만. 정말 대단해.”
그림자 병력을 연신 칭찬했다.
무한대의 체력과 무한대의 마력을 갖춘,
전설의 정령들.
다비온 경이 칭찬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림자 병력의 활략에,
로도스군이 치료와 휴식을 병행할 수 있었다.
내성 방어에 여유가 생긴 것이다.
그 모습에,
‘흐음,’
곰곰이 생각해봤다.
다비온 경과 로서를 잡는 것은 무리일듯싶었다.
다비온 경은 총사령관으로서, 이곳을 지휘해야 했다.
혹시나 모를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도 말이다.
***
휴식을 취하고 있던 디폴트 기사장을 찾았다.
“디폴트 기사장.”
“예, 단장님.”
“베스 제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줄 수 있습니까? 지도를 구해주면 더 좋고요.”
“베, 베스 제국으로 가는 길 말씀이십니까?”
“예.”
“베스 제국이라면···’
디폴트가 자신의 가방에서 지도를 꺼냈다.
“여기서 동북쪽으로 가시면···”
그가 지도를 펼치며 대략적인 방향을 설명했다.
“베스 제국이 나옵니다만,”
설명이 모두 끝나자, 그가 지도를 건네주었다.
지도를 받은 나는,
다시 한번 방향을 숙지했다.
창밖은 벌써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성벽은 아직도 아비규환인 상태.
그림자 병력과 12군단의 극단적인 전투가 계속되었다.
내가 만약 그림자 공작이 되지 못했다면,
이렇게 쉬지도 못했을 것이다.
12군단의 비명을 벗 삼아, 아무 곳에나 드러누웠다.
뻥 뚫려있는 천장.
오늘도 많은 별들이 반짝였다.
전쟁을 치른다고 제법 고단했는지,
잠이 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잤을까.
다시 눈을 떴을 땐, 대낮처럼 밝아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살폈다.
“헉,”
이곳은 난생처음 보는 곳이었다.
끝도 없이 펼쳐진, 드넓은 초원.
녹색의 풀잎을 따라, 온갖 꽃들이 아름답게 피어있었다.
푸르른 나무는 싱그러운 열매를 맺었고,
귀여운 동물들은 초원 위를 뛰어다녔다.
“일어났나?”
그때, 누군가 다가왔다.
꽤나 낯익은 모습···
무심코 그를 바라보다 깜짝 놀랐다.
“다, 당신은!”
아슬란 자라.
바로, 그림자 공작이었다.
“놀라거나 당황할 필요 없네. 지금 이곳은 자네의 꿈속이니까.”
아슬란 자라가 이름 모를 음료를 건네주었다.
“실제로 마시는 건 아니지만, 달콤함을 느끼기에는 충분할걸세.”
그가 옆자리에 앉더니, 음료를 훌쩍거렸다.
“그나저나 놀랍군. 자네가 이토록 빨리 그림자 공작을 달성할 줄이야. 자네를 처음 봤을 때는 정말 한심했는데 말이야.”
“예?”
“하하~ 농담일세. 난 자네를 처음 본 순간, 그토록 찾던 후예임을 직감했다네. 그래서 자네의 심장 속으로 냉큼 들어가 버렸지.”
“후예라면···”
“그림자 후예 말일세. 자네의 마음은 너무나 깨끗한 반면, 무척이나 어두웠다네. 정말 특별한 자들에게만 나타나는 현상이지.”
“·····”
“아, 저기를 좀 보게.”
아슬란 자라가 드넓은 초원을 가리켰다.
“정말 아름답지 않은가? 악마 군이 침공하기 전, 프로미아의 모습이라네.”
아스란 자라가 눈을 감으며 회상에 젖었다.
“온화하고 포근한 날씨, 대기의 풍부한 마력, 젖과 꿀이 흐르는 대지. 사파이어처럼 영롱한 바다. ····· 프로미아는 그야말로 축복받은 별이지.”
“아름답네요.”
“하하~ 자네에게 보여주고 싶었네. 내 기억 속의 프로미아를···”
아슬란 자라가 뭔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프로미아의 옛 아름다움을 추앙하는듯했다.
“그래, 로서를 잡기로 했다면서?”
“예? 아, 예.”
“현실에 안주하는 것보다 강해지는 것을 선택했구만.”
“예, 당연히 강해져야죠.”
아슬란 자라가 고개를 저었다.
“잘 듣게. 여기서 더 강해진다면 대악마들이 자네를 인지할걸세.”
“대악마요? 인지해요? 그게 대체 무슨 말이죠?”
“대악마는 암흑룡 길가메시와 대적할 만큼 강력한 놈들일세. 놈들은 자네와 같은 강자들을 절대로 용납지 않아.”
“혹시, 최초의 드래곤을 살해한 놈들입니까?”
“그래, 정확히 알고 있군.”
“아,”
위로그 총관에게 들었던 고대 역사가 떠올랐다.
그때도, 대악마에 관한 얘기들이 나왔었다.
핀들레이를 죽이기 위해, 암흑룡 길가메시와 손을 잡은 악마들.
그들이 바로 대악마들이었다.
“난 당시, 그림자 대공으로 승작할 수 있었네. 하지만, 승작을 포기해버렸지. 대악마들의 표적이 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네. ····· 뭐,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조금 후회가 되지만···”
아슬란 자라가 내 어깨를 다독였다.
“내 모든 기억들이 이제 자네에게 전이될 걸세. 부디 현명한 선택을 하길 바라네.”
그 말을 끝으로, 아스란 자라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 그림자 공작, 아슬란 자라의 기억이 전이됩니다.
시스템 음성과 함께,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졌다.
“으아아아아!”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머리가 너무나도 아팠기 때문이다.
***
내가 눈을 떴을 땐, 아직 어둑한 새벽이었다.
“태리 단장님, 좀 어떠세요?”
샤론 군주였다.
“군주님이 여긴···”
“어제, 밤새도록 비명을 지르셨어요.
“제가요?”
“네.”
“아,”
어젯밤, 아슬란 자라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분명, 기억을 전이한다고 했는데···’
기억을 어떻게 전이했는지 몰라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 대악마를 조심하게.
머릿속에서 아슬란 자라의 음성이 들려왔다.
“윽,”
머리가 또다시 아파졌다.
“태리 단장님, 괜찮으세요?”
샤론 군주가 옆에서 부축했다.
곧이어, 그녀가 힐샤워를 시전했다.
황금빛 마력이 내 전신을 감쌌다.
아팠던 머리가 금방 치유되었다.
‘대체 뭐야. 대악마를 조심하라니,’
오늘, 베스 제국으로 쳐들어갈 작정이었다.
그래서 더욱더 강해질 작정이었다.
대악마가 나를 인지한다고 해서,
여기서 멈출 수 없었다.
여기서 더 강해질 수 없다면,
대악마든 뭐든 차라리 죽는 것이 나았다.
샤론 군준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 뒤,
밖으로 나갔다.
외성 밖으로 순간 이동했다.
● 불새 : 창공을 가르다.
‘불새.’
바닥을 박차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베스 제국이 있는 동북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
전장에서 도망친 테사다르는 공포에 질려있었다.
지구인이라 했던가.
카마쉬를 죽인 인간이 너무나도 두려웠던 것이다.
어둠의 기사.
놈의 공포스러운 모습이 아직도 생생했다.
발록의 일족이 두려움을 느끼다니,
그저 참담할 뿐이었다.
무려 150만에 달하는 엄청난 병력이었다.
그런 병력에도 대패한 것이다.
아니, 아직 대패했다고 볼 수는 없었다.
지금도 12군단이 놈들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으니까.
“테사다르, 어떻게 된 일이냐!”
로서의 물음에 테사다르가 몸을 숙였다.
도망친 장수로서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멍청한 놈.”
“죄송합니다, 로서님. 하지만, 아직 끝난 것이 아닙니다.”
“끝난 것이 아니다?”
“예.”
로서가 손짓하자, 홀로그램 영상이 펼쳐졌다.
글로디악 요새의 모습이었다.
“내성 방어를 뚫을 기미가 전혀 안 보이는데, 끝난 것이 아니다?”
영상에는 12군단이 내성을 공략하고 있었다.
헌데, 내성을 방어 중인 병력들이 심상치 않았다.
얼핏 봐도 굉장히 강한 놈들이었다.
하이퍼 스피릿의 실력자들도 몇몇 보였다.
“도움을 요청할 생각입니다.”
“도움? 설마, 악마들에게 손을 내밀겠다는 것인가?”
“악마들이 아닙니다. 저희 일족의 지도자이신 디마쉬님께 도움을 요청할 생각입니다.”
“디마쉬? 발록의 지도자 그 디마쉬 말인가?”
“예.”
“흐음, 어찌 되었건 최대한 빨리 크리스탈을 가져오도록.”
“예, 로서님.”
테사다르가 황궁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디마쉬에게 텔레파시를 보냈다.
***
디마쉬.
그는 발록 일족의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오래전, 아크마 헬바인을 이기기 위해 그는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고위급 마족인 흡혈귀의 몸에 빙의한 것이다.
디마쉬의 목표는 자신과 똑같았다.
아크마 헬바인을 죽이고, 일족을 해방시키는 것.
그러기 위해서 강해져야 한다는 것.
오직 그것뿐이었다.
(무슨 일이냐, 테사다르. 니가 연락을 다하고···)
(디마쉬님께 부탁이 있습니다.)
(부탁? 크크~ 테사다르님이 이 볼품없는 흡혈귀에게 부탁이라고? 그래, 무슨 부탁일까.)
(디마쉬님, 절 흡혈귀로 만들어주십시오.)
(뭐라!)
뜻밖의 대답에 디마쉬가 크게 놀랐다.
다른 것도 아니고 흡혈귀가 되겠다니···
그 말은 한순간에 철회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