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0화
단칼에 악령을 베어 버리려 했으나 그 시도는 절반의 성공으로 끝났다. 악령이 결정적인 순간에 피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악령의 팔 하나를 잘라낼 수 있었다. 잘린 절단면에서 검은 연기가 뭉클 피어오른다.
악령이 인상을 찌푸린다. 잘린 팔을 재생하려 했지만, 마음처럼 쉽게 되지 않았다. 그것을 예상하고 있던 인호는 더욱 거칠게 악령을 몰아붙였다.
“평생을 쌓은 업의 기운이 담긴 검이다. 나의 평생 업이 고작 두 달이 되지 않은 네 악업으로 비빌 수 있겠나?”
악령의 반대편 팔도 잘려 바닥에 떨어진다. 퍼덕거리던 팔은 곧 검은 연기가 되어 사라진다. 인호는 서두르지 않고 악령을 공략했다. 부장과 저승사자들이 나머지 악령들을 상대하고 있기에 조금의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찢어 죽일 것이다.”
악령이 악의를 가득 담아 외치지만 결국 인호의 검에 목이 잘리고 말았다. 인호는 악령의 남은 몸도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악령을 소멸시킨 후 인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저승사자들과 악령들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역시 그랬군.”
악령들이 저승사자들을 사냥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과연 그것이 가능한지 의문을 가졌다.
인호가 아는 저승사자들은 평소에 힘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아서 그렇지, 저 정도 악령들에게 쉽게 당할 정도로 무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답은 역시 다구리였어.”
딱 봐도 저승사자들이 일방적으로 악령들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일 대 일의 대결이라면 저승사자들이 악령에게 패배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다. 아마도 여러 마리의 악령들이 모여서 함정을 판 후 저승사자들을 협공했을 것이다.
가장 먼저 소멸된 것은 부장이 상대하던 악령이었다.
“그깟 알량한 재주를 믿고 해서는 안 될 짓을 하고 다녔단 말이지? 그동안 내 눈을 피해 숨어지내느라 고생 많았느니라.”
평소의 부장이 아니었다. 그녀는 파란 귀화가 활활 타오르는 곡검 한 자루로 악령의 목을 날려 버렸다.
가장 강력한 기운을 지니고 있던 악령은 그렇게 변변한 반항도 하지 못하고 소멸되고 말았다.
저승사자들 역시 차례로 악령들을 소멸시켰다.
가장 먼저 싸움을 마치고 기다리고 있던 인호를 확인한 부장이 생긋 웃으며 다가온다.
“역시 인호 씨가 변변치 않은 차사들보다 낫군요.”
그녀의 뒤에 선 두 저승사자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특히 인호와 인연이 깊은 저승사자는 입술을 삐죽거린다. 입 모양을 살피니 ‘넌 뒈졌어’였다. 인호가 어색하게 웃으며 변명을 하려 할 때였다.
부장이 허리를 굽혀 무언갈 집어 든다. 새빨갛다 못해 까맣게 보이는 구슬이다.
“부장님. 그게 뭔가요?”
한 번도 본 적도, 저런 것이 있다고 들었던 적도 없다.
“악령들도 신수들처럼 오랜 세월 악업을 쌓으면 그 업이 이런 결정체로 남게 되죠. 차사들의 임무 중 하나가 도를 넘은 악령들을 처치하고 이것을 수거하는 것이고요.”
“그걸 뭐라고 부릅니까?”
“만겁주萬劫珠. 만겁주는 아주 위험한 물건이에요. 망령이 취하면 최악의 악령이 될 것이고, 희박한 확률로 인간이 취할 경우 희대의 악당이 될 거예요.”
인호가 갑자기 드는 의문에 부장에게 질문한다.
“전에 제가 굉장히 지독한 악령과 싸웠을 때는…….”
“그때 그 빙의했던 악령 말하는 건가요?”
“네. 그 악령에게서는 만겁주가 나오지 않았는데요?”
“나왔어요.”
“하지만…….”
만겁주 같은 것을 보지 못했다.
부장이 웃으며 인호의 뒤에 서 있는 뚱보를 힐끔 바라보고는 고개를 까딱한다.
“아-! 그런 거군요.”
뚱보가 인호 몰래 만겁주를 빼돌린 것이리라. 뚱보가 어색하게 웃으며 인호의 시선을 피한다.
“너무 나무라지 말아요. 존재 자체를 모르는 것이 인호 씨에게 좋을 것 같아 제가 직접 지시한 거예요. 참고로 인호 씨의 아버지, 또 그 아버지의 아버지 역시 만겁주에 대해서는 잘 몰라요.”
부장이 만겁주를 수거해 뒤에 대기 중인 저승사자들에게 건넨다. 그들은 그것들을 조심스럽게 갈무리한 후 스르륵 모습을 감춘다.
“저분들을 이쪽으로 데리고 와줄래요?”
인호가 서로를 의지해 바들바들 떨고 있는 세 사람을 부장의 곁으로 데려왔다.
부장은 그들을 보며 생긋 웃으며 말한다.
“여러분. 오늘 여러분은 2차 오프 모임을 가진 거예요.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오늘 보았던 일을 기억하지 못해요. 아시겠죠?”
그 모습이 마치 유치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보육교사처럼 보였다.
“아-, 그렇구나. 어쩐지 아까부터 머리가 깨질 듯 아프더니.”
“여자라곤 나 혼자 밖에 없는데 무슨 술을 이렇게 많이 마시게 한 거예요.”
엉뚱한 소리를 하기 시작하는 세 사람.
“이제 집으로 돌아가세요. 저쪽 출입구로 나가면 택시가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그들이 멀어지자 부장이 걸음을 뗀다.
“우리는 좀 걸을까요?”
인호가 그녀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
“오늘 일은 상제님께 보고드릴게요. 아주 흡족해하실 거예요.”
“그런가요?”
인호가 녹아내린 옷 안으로 보이는 피부를 힐끔 바라본다. 왼쪽 가슴, 심장 부위에 자리하고 있던 검은 문양의 일부가 사라져 온전한 피부가 보인다. 옥황상제가 흡족해한다면 피부가 보이는 부분이 조금 더 넓어지지 않을까?
“인호 씨.”
“말씀하세요.”
“오늘 위기였죠? 저희한테 도움받으신 것 맞죠?”
“왜- 그러시는지요?”
“사실 인호 씨에게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거든요.”
인호가 부장을 빤히 바라본다. 대화의 시작부터 ‘부탁’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흐음-. 이렇게 대놓고 부탁이라고 하시는 걸 보니 쉬운 일은 아닌가 보네요.”
“쉽다면 쉽고, 어렵다면 아주 어려운 일이죠.”
“일단 말씀해 보세요. 들어 봐야 제가 할 수 있는 일인지 대답해 드릴 수 있죠.”
“한 사람이 인호 씨 사무실에 방문할 거예요.”
“그게 누굽니까?”
부장이 어색하게 웃는다.
“혹시 동호 씨에게 스승님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 있나요?”
“애주愛酒 거사님 말씀하시는 건가요?”
애주 거사는 토룡 황동호의 스승으로 술을 너무 사랑하기에 자신의 도호를 애주라고 지은 기인이었다.
“만난 적 있으신가요?”
“아니요. 동호 형님에게 말만 들었습니다. 그마저도 자세히 들은 적은 없고요. 동호 형님이 이상하게 스승님 이야기를 잘 안 하려고 하거든요.”
“이해해요. 평범한 사람이 아니거든요. 어느 정도까지 이야기를 들으셨나요?”
“이 나라에 존재했던 모든 도사들 중 최고라고 들었습니다.”
“정확해요. 애주는 아주 뛰어난 도사죠. 문제는 그가 너무 뛰어나다는 거예요.”
인호는 도대체 부장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보통 뛰어나다 함은 좋은 의미로 해석된다. 인호의 지인인 황동호만 해도 도문의 기원인 중국을 뛰어넘는 최고의 도사가 아니던가.
그리고 보니 황동호가 대단한 이유가 스승인 애주 도사가 대단한 까닭이기도 하다.
“직접 만나보면 알 거예요.”
“그런데 어떤 부탁인지 알 수 있습니까?”
“그와 내기를 해주시면 돼요.”
“내기요?”
“네. 애주는 인호 씨에게 세 가지 내기를 제안할 거예요. 세 번 중 두 번을 이기면 돼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요.”
부장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이번에도 대답은 같아요. 일단 만나보세요. 아참, 그리고 애주가 술 다음으로 좋아하는 것이…….”
부장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한다.
“여자예요.”
* * *
“내가 지 무덤 파는 일인지 모르고 천방지축 설치는 놈을 만나러 왔을 리가 없잖아.”
“그러면 누굴 만나러 오셨는데요?”
이민정은 소파에 앉아 유들유들한 미소를 짓고 있는 30대 중반의 남자를 쏘아보고 있었다.
“내가 만나러 온 것은 당연히 너지.”
“네? 절 아세요?”
“아무렴 알고말고. 평범하지 않게 태어나 평범하지 않은 삶은 산 아이. 실력은 쥐뿔도 없으면서 허세만 가득한 도사 녀석의 냄새가 나는 것을 보니 그 녀석이 부적이라도 한 장 그려 준 모양이구나.”
“토룡 아저씨도 아시는 모양이네요. 그런데 딱 봐도 토룡 아저씨보다 어려 보이는데 말을 너무 함부로 하시는 거 아니에요?”
이민정이 발끈하자 남자가 피식 웃는다.
“괜찮아. 토룡이 그 말을 들어도 화를 낼 수 없을 테니까.”
“정말 웃기는 분이시네. 진짜 토룡 아저씨를 아는지 모르지만, 그 아저씨 성격이 썩 좋은 편이 아니거든요.”
“아니래도. 그 녀석은 절대 내게 따지지 못해. 이런 영양가 없는 대화보다는 조금 건설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이 어떻겠느냐? 혹시 좋아하는 것 있느냐? 내가 선물로 사줄 수도 있는데.”
“아-, 이상한 아저씨이긴 한데 돈은 많은 아저씨다? 이 말이 하고 싶은 거예요?”
“하하, 재미있는 아이구나.”
“말하는 것만 들어 보면 노인네인 것 같기도 하고.”
그때 사무실 문이 열리며 인호가 안으로 들어온다.
“노인네인 것 같은 게 아니라 노인네 맞아.”
“소장님. 오셨어요?”
소파에 앉은 남자가 인상을 와락 구긴다.
“임마! 누가 노인네야?”
“아니. 연세가 여든이 넘으셨으면 노인네 맞지요. 뭘 아닌 척 잡아떼세요?”
이민정이 놀란 눈으로 남자를 바라본다. 누가 봐도 30대 중반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외모다. 하지만 인호가 실없는 농담을 할 사람이 아니니, 남자의 나이는 정말로 여든이 넘었을 것이다.
“거 손녀뻘도 안되는 여자애한테 그러고 싶으세요?”
“넌 그런 말도 못 들어 봤냐? 남자는 밥숟가락 들 힘만 있으면 다 짐승이 될 수 있는 거야. 딱 봐도 내가 밥숟가락 잘 들게 생겼잖아.”
“아-, 그러시구나. 참 다행이네요.”
“갑자기 뭐가 다행이라는 소리냐?”
“동호 형님이 스승을 안 닮아서요. 와, 정말 닮았으면 대박이었을 것 같네요.”
“갑자기 그 녀석 얘기는 왜 하는 것이냐?”
“제가 좀 오라고 했거든요. 누구의 철없는 스승님이 남의 사무실에서 이상한 짓 하고 있으니 좀 끌고 가라고요.”
그 말에 애주 이형표가 인상을 와락 구긴다.
“누굴 불렀다고?”
“누구긴 누구예요. 저죠. 스승님 그간 기체후 일향만강하셨습니까?”
“그게 궁금한 녀석이 한 번도 스승에게 문안 인사를 안 와?”
“아니, 도대체 어디에 계신지 알아야 문안 인사를 여쭙던 모시던 할 거 아닙니까?”
사무실 안으로 들어 온 황동호의 말에 이형표가 볼을 긁적인다. 황동호가 이형표의 맞은편에 앉으며 묻는다.
“여긴 왜 오신 거예요? 스승님과는 연관 없는 곳 아닙니까?”
“누가 그래? 내가 이곳과 연관이 없다고?”
“인연이 닿아있던 곳이란 뜻입니까?”
이형표가 인호를 힐끔 바라본다.
“내가 은호도 알고, 대호도 알아.”
인호는 아버지와 할아버지도 알고 있다는 이형표의 말에 놀란 표정을 짓는다. 이형표는 벽에 걸린 사진을 가리킨다.
“저기 걸린 사진 중 저놈 증조부의 사진. 저거 사실 사진 아니야. 내가 그려 준 거지. 그런 걸 알고나 말해.”
인호는 오래전 아버지에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 네 증조부의 사진은 아주 대단한 능력을 지니신 분이 그려주신 것이다. 정말 사진처럼 보이지?
“아-, 그분이셨습니까?”
“이제라도 알았으면 알아서 모시거라.”
인호가 피식 웃는다.
“그건 그거고. 아닌 건 아닌 거죠. 왜 남의 사무실 와서 여직원한테 수작을 부립니까?”
“수, 수, 수작? 누가 수작을 부렸다고 그래? 어린아이가 고생을 많이 하고 자란 것 같아 애틋한 마음에 뭐라도 하나 사주려고 한 것이지.”
“그런 걸 보고 보통 ‘수작’이라고 부릅니다.”
인호의 말을 들은 황동호가 웃음을 참으려 고개를 돌린 채 꺽꺽거렸다.
인호가 얼굴에 웃음기를 거두며 묻는다.
“그래서- 왜 오신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