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2화
인호는 한 마리 새가 되어 하늘을 날고 있었다. 한없는 자유로움이 느껴졌다.
광야를 가로지르고 협곡 사이를 누빈다. 목초지를 만나면 잠시 쉬어가기도 한다.
다시 날아올라 세상을 눈에 담는다.
얼마나 날았을까? 커다란 호수가 보인다. 그리고 그곳에서 두 사람을 볼 수 있었다.
한 남자와 한 소녀.
높은 하늘이기에 아주 작은 점 정도의 크기지만 인호는 두 사람의 얼굴을 정확히 볼 수 있었다.
‘오민호.’
남자는 바로 오민호였다.
날개를 접고 그대로 아래로 떨어져 내린다. 오민호와 소녀가 앉아있는 호숫가 나무에 내려앉는다.
갑작스러운 불청객의 방문을 두 사람 모두 눈치채고 있었다.
인호와 오민호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친다.
“오민호 씨.”
“누구십니까?”
“오민호 씨 할아버님과 아버님의 부탁을 받은 사람입니다.”
“아-! 이곳엔 어떻게 오신 겁니까? 살아있는 사람은 올 수 없는 곳인데요.”
“오민호 씨도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오민호가 웃으며 고개를 흔든다.
“정확히는 가사 상태에 빠진 사람이죠.”
“그래서 할아버님과 아버님이 걱정이 많으십니다. 그것보다 이곳은 어떤 곳입니까?”
“한국식으로 표현하자면 이승과 저승의 중간, 즉 경계입니다.”
“이곳에 계신 이유가…… 그 소녀 때문입니까?”
오민호가 고개를 끄덕인다.
“의도한 것인지, 아니면 작은 실수 때문인지 이 아이는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이곳 경계에 갇혀 있습니다.”
“주술사님을 통해 독수리의 눈으로 세상을 볼 때 보신 겁니까?”
“네. 그때 나는 이 아이에게 약속했습니다. 내가 곁에 있어 주겠다고 말이죠. 제가 이 아이를 저승까지 안내할 방법이 없으니 외롭지 않도록 말동무라도 되어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조금 이기적이시군요. 오민호 씨를 걱정하는 가족들 생각은 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할아버지께서는 제가 어렸을 때부터 ‘약속’의 중요성에 대해 수도 없이 이야기하셨습니다. 보통 사람들에게도 약속은 중요하지만 우리들처럼 큰 기업을 경영하는 사람들에게는 더 중요하다고 말이죠. 이런 말도 하셨습니다. 못 지킬 것 같으면 아예 약속을 하지 마라. 하지만 약속을 하면 반드시 지켜라.”
오민호가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전 이 아이와 약속했습니다. 약속을 지켜야 합니다.”
인호가 한숨을 내쉰다.
오민호의 설득이 쉽지 않을 것 같다.
“아이야.”
소녀가 인호를 바라본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너로 인해 살아있는 이가 이곳에 갇히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니?”
소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쪽-.”
“정인호입니다.”
“네, 인호 씨. 이 아이에게 대답을 강요하지 마세요. 모든 선택은 제가 스스로 한 겁니다.”
“그저 궁금했을 뿐입니다.”
인호가 소녀를 바라본다. 소녀의 입술이 벌어진다.
“나도 민호가 돌아갔으면 좋겠어.”
“아라샤.”
소녀의 이름이 아라샤인 듯하다.
“민호는 산 사람이잖아. 그동안 민호 덕분에 즐거웠어. 이제 외롭지 않아. 그러니 그만 돌아가.”
“싫어. 난 아라샤와 약속했어. 약속은 지킬 거야.”
“그러지 마. 계속 이러면 나도 욕심이 생긴단 말이야.”
“괜찮아. 내가 괜찮다고 하잖아.”
“내가 괜찮지 않아.”
인호는 오민호와 아라샤의 대화를 듣고 있다가 문득 떠오른 게 있어 오민호에게 말한다.
“만약. 만약 말입니다. 나한테 그 아이를 저승으로 보낼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네? 그게 가능합니까?”
“민호 씨 할아버님이 괜히 저를 고용하신 게 아닙니다. 그나저나 이런 모습으로는…….”
사람의 모습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는 순간 인호는 사람의 모습으로 변했다.
“후우-, 이래저래 신기한 경험을 많이 하게 되네요.”
인호가 품속에 손을 넣었다.
현실의 세계가 아니기에 삼신령이 없으면 어쩌나 걱정을 했지만 다행히 손에 삼신령이 잡혔다.
“이게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네요. 한국에서는 효과가 아주 직빵이거든요.”
“그게 뭐 하는 물건입니까?”
“누군갈 부르는 데 사용하는 물건이죠.”
딸랑- 딸랑-
인호가 삼신령을 흔들고 주변을 살핀다. 저승사자로 보이는 존재는 나타나지 않는다.
“역시 이곳에서는 통하지 않는 것 같군요.”
인호의 말이 끝날 때 쯤이었다.
하늘에서 어떤 소리가 들려왔다. 자세히 들으니 새의 울음소리 같았다.
그 소리에 인호와 오민호, 아라샤가 동시에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하늘에 점 하나가 보였다. 그 점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어-.”
오민호가 놀라 이상한 소리를 낸다.
점점 커진 점은 거대한 독수리였다.
날개를 펼친 채 아래로 떨어져 내린 독수리는 지면에 닿기 직전 살짝 몸을 틀어서 착지했다.
독수리는 인호와 오민호를 보고 마지막으로 아라샤에게 시선을 준다.
끼아악-
독수리가 울음소리를 내더니 아라샤에게 걸어간다.
“절 데리러 오셨군요.”
“아-!”
인호가 탄성을 토해낸다.
주술사가 이곳의 저승사자가 새의 모습을 하고 온다고 했던 말이 떠오른 것이다.
독수리가 부리를 벌려 아라샤를 문다.
오민호가 놀라 앞으로 나서려다 독수리와 눈이 마주치고는 뒤로 물러선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힘이 담긴 눈이었다.
“한국으로 따지면 저승사자입니다. 아라샤를 저승으로 안내해 줄 겁니다.”
“아, 그렇군요.”
독수리가 인호와 오민호를 차례로 본 후 날개를 퍼덕였다. 이내 아라샤를 문 채 하늘 높이 솟구쳤다.
오민호는 독수리가 눈에 보이지 않음에도 계속해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민호 씨. 이제 그만 돌아가야 할 시간인 것 같네요.”
* * *
“민호야. 정신 들어? 민호야. 나 보여?”
“아, 시끄러워서 고막 찢어지겠네.”
눈을 뜬 오민호가 자신을 보며 소리 지르는 이정훈을 보고는 웃으며 말했다.
“정말 깨어났구나.”
“누가 와서 계속 가자고 졸라서 어쩔 수 없이 왔지.”
그때 텐트 안으로 들어서는 이가 있었다.
“잠에서 깨어난 걸 축하해요.”
들어선 이는 인호였다.
“계속 그곳에 있고 싶었습니다.”
“이유를 물어도 될까요?”
“거기선 경쟁을 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형과 싸우지 않아도 되니까요. 할아버지, 아버지 눈에 들기 위해 가식을 떨지 않아도 되니까요.”
인호가 쓰게 웃는다.
일반인이 재벌가의 일원이 느끼는 압박감을 이해하긴 어려웠다.
“그나저나 절 깨우기 위해 미국까지 오신 겁니까?”
“그래야 한다고 해서요.”
“이곳은 하늘 부족이겠군요.”
인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오민호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한다.
“으윽-.”
하지만 일어나려는 시도는 실패했다.
“야. 니가 누워서 잠만 잔 게 얼마나 지났는지 알아? 너 그동안 영양제로 버텼다고. 움직일 힘도 없을걸.”
이정훈의 말에 오민호가 현실을 파악하고 피식 웃는다.
“그리고 보니 배가 많이 고프네. 정훈아. 나 먹을 것 좀 줘라.”
“당장 뭘 먹기는 그렇고……. 기다려봐. 내가 미음을 쑤든 죽을 끓이든 해 볼 테니까.”
이정훈이 텐트 밖으로 나가고 인호와 오민호만 남게 되었다.
“아라샤는 좋은 곳으로 갔겠죠?”
“아마도요?”
어린아이라고 해서 무조건 극락에 간다는 보장은 없었다.
요즘처럼 아이들의 범죄가 기승을 부리는 때에는 지옥으로 가는 어린아이들도 많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아라샤는 인디언 부족의 소녀이니 지옥에 갈 만큼 나쁜 짓을 벌이지 않았을 것이다.
“제발 그랬으면 좋겠네요.”
“그럴 겁니다. 그러니 오민호 씨도 이제 현실 도피는 적당히 하시죠.”
오민호가 씨익 웃는다.
“당연히 그래야죠. 삶과 죽음의 경계까지 갔다 온 놈이 뭘 못하겠어요? 나중에 제가 신성 그룹 싹 다 잡아먹으면 한 자리 내드릴게요.”
“됐습니다. 전 신성 그룹 회장보다 극락 흥신소 소장 직책이 더 좋은 사람이거든요. 하하하.”
“하하하.”
인호와 오민호는 서로를 바라보며 크게 웃었다.
* * *
어두운 텐트 안.
인호는 주술사와 마주 앉아있었다.
“어땠나?”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원하는 것을 얻은 것을 축하하네.”
“참 다행이죠.”
주술사가 환하게 웃는다.
“소통하는눈은 어차피 깨어날 아이였어. 내 뒤를 이어 새롭게 주술사가 되는 아이에게 언제고 발견되었을 테지.”
“그대가 이틀 동안 그 세계에 머물렀던 것은 알고 있나?”
“다른 사람들에게 들었습니다.”
새가 되어 자유를 만끽한다고 너무 오랫동안 날았던 것 같다.
“그 사이 그대와 함께 온 이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지. 그 역시 아주 대단한 힘을 지니고 있더군.”
황동호를 말하는 것이리라.
“그 손님은 당분간 우리 부족에 머물기로 했다네.”
“정말요?”
조금 전 만난 황동호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한곳에 머물지 못하고 쏘다니는 방랑벽이 또 도진 모양입니다.”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많은 세상을 보는 것은 큰 도움이 될 테지. 물론 우리 부족의 주술사들은 평생 이곳을 벗어나지 못하지만 말이야. 곧 떠날 테지?”
“그래야죠.”
“인연이 있다면 다시 만나게 될 거라는 빈말도 못 하겠군. 보다시피 내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네.”
“오래오래 사십시오.”
“오래 살라는 말이 나에게는 욕이라네. 더 오랫동안 고통을 받으라는 말이지 않은가.”
인호가 쓰게 웃는다.
“그렇게 되나요?”
주술사가 인호에게 마지막 덕담을 해준다.
“부디 그대는 하고 싶은 일 모두 하면서 살길 바라네.”
* * *
“으악-!”
이민정이 찢어질 듯 비명을 내지른다.
“아이, 깜짝이야. 왜 소리 지르고 그래!”
인호가 버럭 소리친다.
“소, 소장님. 이, 이게…… 잘못된 것 같아요.”
“뭐가 잘못됐는데?”
이민정이 보고 있던 모니터를 확인한다. 은행 사이트였다.
“여기 보세요.”
인호는 이민정의 손가락을 따라서 최근에 입금된 기록을 확인했다.
“아-.”
인호가 가벼운 탄성을 토해낸다.
“공이 몇 개냐? 하나, 둘, 셋……. 어이쿠야. 백억이네?”
“그쵸? 제가 잘못 본 것 아니죠?”
“둘 다 잘못 볼 확률이 얼마나 될 것 같냐?”
“그러니까요. 그런데 이 돈 뭘까요?”
“뭐긴 뭐야? 일 열심히 하고 받은 수고비지.”
“무슨 수고비가 백억이나 해요?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
말을 하던 이민정이 갑자기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신성이잖아요.”
“그렇지. 신성이지.”
백억 원은 인호도 예상하지 못한 금액이다.
신성 일가다 보니 돈을 많이 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백억 원을 보낼 줄은 몰랐다.
“소장님. 이 돈으로 뭐 하실 거예요?”
“갑자기 그게 왜 궁금한데?”
“흥신소 법인 명의로 차 한 대 더 뽑죠.”
“차를? 왜? 한 대면 충분하거든.”
“제가 갑자기 출장 가게 될지도 모르잖아요. 지난 번에 퇴계원역 갈 때도 매일 지하철 타고 다녔거든요.”
“지하철이 더 빠르고 안전하거든.”
“이씨. 못 됐어. 자기는 매일 벤츠 타고 다니면서.”
인호가 피식 웃는다.
“그래. 법인 차 뽑는다고 가정하고. 어떤 차를 뽑았으면 좋겠냐?”
“저는 말이죠. 비싸고 큰 차 바라지도 않아요. 소형차도 좋아요.”
인호가 어이가 없다는 듯 이민정을 바라보며 말한다.
“법인 차 이야기를 하라니까 무슨 말을 하고 있니?”
“말이 그렇다는 거죠. 전 아무 차나 상관없어요.”
인호가 다시 소파로 돌아가 앉는다.
“일단 커피 한 잔 타와 봐. 커피 마시면서 생각해 보게.”
“넵! 최고로 맛있는 커피를 대령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