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갑군주 이성계-19화 (19/33)

019. 황금의 여신 (1)

공민왕의 배신(?)에 분노한 것은 기황후만이 아니었다.

원나라의 수도 대도(북경).

원나라 황궁의 정전(正殿)인 대명전(大明殿)에서 문무백관들이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바얀테무르왕이 기철과 권겸, 노책을 한꺼번에 죽였습니다!’

“그들은 대원제국에 충성을 다하던 충신들이었어요!”

“이것은 우리 원나라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얀테무르에게도 칭기스칸의 피가 흐르고 있거늘!”

“요양행성의 병력을 총동원해서 응징해야 합니다!”

단순한 허세가 아니었다. 원나라는 고려의 국왕을 마음대로 갈아 치워 왔기 때문이다. 충렬왕, 충숙왕, 충선왕…….

그중에서도 충혜왕은 순제로부터, “네놈의 피를 천하의 개들에게 먹여도 시원치 않다.”는 폭언까지 들은 후, 머나먼 티벳으로 귀양 가다가 독살당했다.

그 충혜왕은 공민왕의 친형이었다. 그런데도 공민왕은 원나라에게 반기를 든 것이다.

아내인 노국대장공주가 든든한 뒷배가 되어 주었기 때문이다.

기황후나 순제조차 노국대장공주를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노국대장공주는 칭기스칸의 7대손인데다, 그녀의 아버지가 위왕(魏王) 베이르테무르(孛羅帖木兒)였기 때문이다. 항렬도 높아서 순제의 고모뻘이었다.

기황후가 노국대장공주를 배신자라고 부른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기황후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이번에야말로 고려의 버르장머리를 고칠 것이오!”

기황후가 악을 썼다. 가족을 잃은 슬픔과 원한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심려 거두소서 황후 폐하!”

“조만간 8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갈 거라고 통보하였사옵니다!”

“고려 놈들, 지금쯤 겁이 나서 오줌을 찔끔거리고 있을 겝니다.”

기황후파 대신들이 낄낄거렸다. 그때였다.

“무어라? 고려에 이미 사신을 보냈다고?”

말없이 앉아 있던 순제가 놀라서 물었다.

“게다가 80만 대군으로 짓밟아 버리겠다? 그리 말했단 말이오??”

“그렇사옵니다! 이번 사건은 절대로!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 아니옵니까?!”

기황후가 표독스럽게 소리쳤다.

“하아아아아~”

순제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피곤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짐의 말을 잘 들으시오. 그리고 한 글자도 고치지 말고 고려에 보내시오!!”

수백 개의 눈과 귀가 황제를 향했다.

***

그로부터 얼마 후, 개경 송악산 아래에 위치한 연경궁 강안전(康安殿).

강안전은 역대 국왕의 즉위식이 가장 많이 거행된 전각이었다. 연등회, 격구(擊毬)대회, 활쏘기 대회, 사열식 등도 종종 치러졌다.

그 강안전 안에 놓인 옥좌에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가 앉아 있었다.

그 앞에는 당상관들이 좌우로 도열해 있었고, 당하관들과 무관들이 강안전 계단 아래에 늘어서 있었다.

“지금부터 부원배 처단에 대한 논공행상을 실시하겠소.”

공민왕이 말했다. 기철, 권겸, 노책과 같은 ‘원나라 앞잡이’들을 처치한 공로자들에 대한 보상이 시작된 것이다.

“공 1등! 화령성주 이자춘의 아들, 이성계!”

왕명을 출납하는 대언(代言)이 길게 외쳤다. 고려 관복을 입은 이성계가 왕 앞에 나아가 허리를 숙였다.

“이성계는 반역수괴 기철을 처단하였으며, 그밖에 다수의 적도를 빼어난 활솜씨로 주살함으로써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였다. 이에 일등공신으로 봉하고 만호(萬戶)로 임명하노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이성계가 우렁차게 외쳤다. 만호는 장군급 품계였다. 병사(코르치) 계급으로 첫 출전한 스물 두 살 애송이(?)에게는 과분한 지위였다. 공민왕을 비롯한 수뇌부가 이성계의 활약을 얼마나 높이 평가하는지 알 만했다.

하지만 공민왕의 파격적인 포상에 불만을 제기하는 자는 없었다.

이성계가 기철의 대형 기갑기 <바가투르>를 처치하지 못했다면, 작전실패는 물론이고 공민왕조차도 위험했을 테니까.

이성계 외에도 19명이 안사공신(安社功臣), 즉 <사직을 평안케 한 공신>이라는 이름으로 상을 받았다.

논공행상이 끝나자 연회가 시작되었다.

푸짐한 주안상이 차려지고 고려가요인 구합곡(句合曲)이 울려 퍼졌다.

좋은 음식을 차려 놓음이여

빛나어라 호화로운 연회 질서정연하고나

동쪽의 생황과 서쪽의 종이 서로 사이하여 울리오니

아름답다. 법부의 양양함이여

우러러 붉은 뜰을 대하여

악공과 악사가 곡을 합주하옵나이다

아리따운 무희들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성적으로 자유롭고 개방적인 고려답게 화려하고 현란한 춤사위였다.

김용, 이방실, 황상, 최영, 유탁, 안우 등의 장수들이 이성계 주위에 모여들었다. 모두가 시대를 풍미하는 최고의 장수들이었다.

이성계가 22살 청년장수다운 겸손한 태도로 인사했다. 중장년 무장들이 연거푸 술을 따라주었다.

“자네~ 카라 쥬르켄을 직접 본 적이 있나? 딸꾹!”

불콰하게 취한 유탁이 술을 따라주며 말했다.

“나는 봤다네! 회안성 앞에서 말일세! 캬아~ 칠흑같이 새까만 그 자태! 얼마나 멋졌는지 아는가? 응?”

유탁이 신이 나서 떠들었다. 그러자 최영을 비롯한 주위 무장들이 ‘저 양반 또 시작이구만~’하는 표정으로 웃으며 바라보았다.

이성계도 속으로 웃으며 술잔을 비웠다.

그때였다.

다다다다다…

흙투성이가 된 전령이 달려와서 외쳤다.

“전하! 원나라가…… 원나라가 80만 대군으로 고려를 공격하겠다고 하옵니다!”

“무어라?!”

공민왕이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80만 대군이라고?!!”

여기저기서 절망적인 탄식이 터져 나왔다. 정말로 80만 대군이라면 하늘이 무너져도 이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황제 폐하께 사죄하고 화친해야 하옵니다! 일단 소나기는 피해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서북면병마사 인당이 외쳤다. 그러자 그의 부관인 신순(辛珣)과 몇몇 문신들이 거들었다.

“인당의 말이 옳사옵니다!”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가 필요하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전하!”

강안전 앞마당이 시장바닥처럼 시끄러워졌다. 그때였다.

“그럴 필요 없사옵니다.”

이성계가 나지막히 말했다. 좌중이 한순간에 조용해졌다. 모두가 이성계를 바라보았다.

“뭣이? 어찌 그리 자신하느냐?”

인당과 그에게 동조하던 무리들이 쌍심지를 켰다.

“어린 놈이…… 아니 연소한 자가 뭘 안다고 나서는 거요?”

“그러게 말이오. 국정을 논하기엔 경륜이 한참 부족하거늘!”

“전공을 세웠다고 너무 나대는 거 아니오?”

인생 1회차에 한 나라의 건국태조를 역임하고, 2회차에 칭기스칸에 의해 번왕에 봉해졌던 이성계의 발끝에도 못미치는 자들이 경륜을 논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성계는 눈도 깜짝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지금 원나라는 강남의 한족 군벌들 때문에 나라가 망할 지경이옵니다. 이런 상황에서 고려와도 척을 진다니요? 제정신이라면 그리 못할 것이옵니다.”

사람들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사리에 맞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아니되옵니다 전하! 이 만호는 젊은 혈기에 섣부른 주장을 하고 있사옵니다! 그는 지금 고려를 위험에 빠뜨리고 있사옵니다!”

인당이 소리쳤다. 그러자 이성계가 인당을 보며 말했다.

“제 아버지 이자춘은 늘 말해 왔습니다. 위기가 찾아올 때 적과의 화친을 주장하는 자! 그 자가 바로 첩자라고 말이옵니다.”

“뭐, 뭐라고? 첩자라고?!”

왜소한 체격의 인당이 삿대질을 하며 외쳤다.

“만약 80만 대군이 정말로 쳐들어오면 어쩔 것이냐? 네가 책임질 수 있느냐?”

이성계는 대답하지 않고 공민왕을 보며 말했다.

“전하! 만약 신의 말이 사실로 틀렸을 경우 소신에게 큰 벌을 내려 주시옵소서! 허나 만약 옳다고 판명될 경우, 한 가지 청을 들어 주시옵소서!”

20대 중반의 꽃미남 왕이 흥미롭다는 듯이 말했다.

“그대는 늘 나를 재미있게 해 주는구려! 좋소! 그리하리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이성계가 허리를 굽히며 길게 외쳤다. 인당과 그의 무리들이 이성계를 노려보며 씩씩거렸다. 그때였다.

또 한 명의 전령이 강안전 안으로 달려들어왔다. 그리고는 내시들에게 큼직한 두루마리를 전해주었다. 그 두루마리를 전달받은 늙은 대언이 공민왕에게 소리쳤다.

“전하! 대원제국 황제 폐하로부터 조서가 당도하였사옵니다!”

“무어라? 황제의 조서인데 어째서 사신이 아니라 전령이 전해 주는 것이오?”

“원나라 사신이 고려에 들어오는 것을 몹시 두려워하여, 압록강 너머에서 조서만 주고 돌아갔다 하옵니다.”

“허허~ 그런 겁쟁이가 있단 말인가!”

공민왕이 혀를 차며 화려한 금박 두루마리를 펼쳤다. 그리고 잠시 후,

“하하하하!!”

하고 시원하게 웃기 시작했다.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웃은 공민왕이 두루마리를 대언에게 돌려주었다.

“큰 소리로 모두에게 읽어 주게.”

“예 전하.”

대언이 두루마리를 조심스럽게 들고 읽기 시작했다. 기나긴 내용을 짧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았다.

<최근 요망한 무리가 기철, 권겸, 노책을 죽인 다음에 고려가 한 짓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 하지만 너희 고려가 우리 대원제국에 변함없이 충성하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앞으로도 변치 말고 충성하라. 짐은 고려를 믿노라.>

“오오오!”

기쁨과 안도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만호 이성계의 말이 맞았사옵니다!”

“원나라는 고려를 적대할 뜻도, 능력도 없는 게 분명하옵니다!”

인당과 신순이 분한 표정으로 이를 갈았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하하 만호 이성계! 그대의 말대로 되었구나! 참으로 신통하지 않은가? 하하하하!”

공민왕이 용상 팔걸이를 두드리며 웃었다. 노국대장공주의 아름다운 얼굴에도 미소가 피어났다.

“원나라 입장에서 생각해 본 것뿐이옵니다.”

이성계가 머리를 숙이며 겸손하게 말했다.

사실 이성계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던 이유가 있었다.

‘전생의 원나라도 이렇게 했었으니까.’

기황후는 길길이 날뛰었지만 순제가 제지했다. 황하 남쪽의 한(漢)족들도 버거운데 요하 동쪽의 한(韓)족들까지 적으로 돌린다?

결코 현명한 처사가 아니었다. 나중에 응징하더라도 일단은 달래야 한다는 게 순제와 대신들의 생각이었다.

“아까 청이 있다 했었지? 그래 무엇을 원하느냐? 어서 말해 보거라!”

공민왕이 호탕하게 말했다. 그러자 이성계가 머리를 머리를 조아리며 외쳤다.

“신(臣) 만호 이성계, 왕후 마마께 삼가 기갑기 대련을 요청드리옵니다!”

***

강안전 앞마당이 잠시 조용해졌다. 모두가 의아한 표정으로 이성계를 바라보았다.

‘뜬금없이 중전마마와 기갑기 대결이라니……?’

‘뭘 원하는 거야 저 애송이는?’

하지만 이성계는 당당했다. 주원장에게 기갑기를 보여 달라고 했을 때처럼, 이번에도 나름의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갑기 대련 말인가요?”

노국대장공주가 아름다운 얼굴에 미소를 띠며 물었다.

“너무 이르지 않을까요? 저는 기철 따위와는 완전히 다르답니다.”

공민왕도 껄껄 웃으며 말했다.

“왕비에게 도전한 자들이 한둘이 아니었네. 하지만 대부분이 혼쭐이 나고 말았지. 조만간 쌍성총관부 탈환전에 투입될 텐데, 부상이라도 당하면 안 되지 않겠는가?”

공민왕 부부는 이성계를 노골적으로 놀리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 비친 이성계는 ‘어쩌다가 기철을 잡고, 원나라의 반응까지 맞히자 기고만장해진 애송이’에 불과했으니까.

“송구하오나 중전마마! 소신이 걱정하는 건 한 가지뿐이옵니다.”

이성계가 노국대장공주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아름다우신 마마께 부상을 입히게 되는 것! 그리하여 상감마마의 성심을 어지럽히는 것! 오직 그뿐이옵니다 마마!”

“내가 부상당할까 봐 걱정이 된다고요?”

노국대장공주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온화하던 눈빛이 날카롭게 변해 있었다. 훈훈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가끔은 좋겠지요. 자라나는 새싹들을 훈육하는 것도요.”

노국대장공주가 용상에서 일어나며 외쳤다.

“나와라 알탄 다리에크!”

“기이잉-!”

6장(18m) 높이의 날씬한 기갑기가 공간을 가르고 나왔다.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구나, 보르지긴 보타슈리!’

이성계가 아련한 눈으로 황금색 기갑기를 바라보았다.

주원장의 <백련신장>보다도 크고 아름다운 여성형 기갑기!

백련신장이 우아한 고려백자 같은 느낌이라면, 알탄 다리에크는 순금으로 만든 화려한 서역 도자기 같은 느낌이었다.

‘황금의 여신(女神)’이라는 뜻의 <알탄 다리에크>가 노국대장공주의 이름인 <보르지긴 보타슈리>로 바뀐 것은 그녀가 죽은 이후였다.

와아아아-!

멍하니 바라보던 사람들이 일제히 환호했다. 씨근덕거리던 인당과 그의 무리조차 감탄하고 있었다.

“아직도 할 생각이 있나요?”

노국대장공주가 이성계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녀가 의도했든 아니든, <함흥 촌구석에서 온 네가 이런 기갑기를 본 적이나 있을까?>하고 깔보는 것이 느껴졌다.

“하하 그래, 이쯤하시게 이 만호! 왕비는 상냥하고 유순하지만, 일단 기갑기에 타면 사람이 달라지니까 말일세.”

공민왕이 유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모두가 미소를 지으며 이성계를 바라보았다. 특히 인당의 당여(무리)들은 노골적으로 비웃고 있었다.

그러나 이성계의 눈빛은 맑고 고요했다.

“소신이 이기면 한 가지 청을 들어주시옵소서.”

이성계가 노국대장공주를 보며 말했다. 그러자 노국대장공주가 빙그레 웃으며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휘익-

날개옷을 입은 선녀가 하늘을 나는 듯했다.

털썩!

그녀가 알탄 다리에크의 조종석에 앉았다. 그러자 슈우웅-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조종석이 닫혔다.

후우웅-

황금의 기갑기의 두 눈에 황금빛 불꽃이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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