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화 〉아직 태어나지 못한 자
먼저 입을 연 것은 베르헬트에게 꼭 잡혀 있는 벨투리안이었다. 베르헬트에게서 발버둥치는 것을 그만둔 벨투리안이 짧게 말했다.
“너….”
“아하, 친절하기도 하셔라. 아가씨, 아직도 나를 걱정하고 계시나봐요?”
“웃기는 소리. 그러다 죽으면 답을 못들으니 그랬을 뿐이다.”
그러나 벨투리안의 말은 정말로 그런 것이라고 하기에는 확실히 조금 안도한 낌새가 있었다. 그것을 부정하기는 어려웠다.
“그것보다 궁금하지도 않은가봐요? 분명 평범한 소녀의 힘 밖에 없다고 한 내가 이러고 있는 것이?”
“흑마법사의 얘기 애초에 믿지도 않았으니 놀랄 이유도 없다.”
그건 사실이었다. 애초부터 벨투리안은 단 한 순간도 세미의 그 말을 믿은 적이 없었다. 그 말을 듣고는 세미가 쿡쿡 웃기 시작했다. 그 미소는 이전처럼 순수한 모습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직 광기로운 요염함만을 품고 있어 섬뜩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너무하네요~. 이래뵈도 그건 거짓말이 아니었다고요.”
“하, 그럼 네 지금 그 모습은 뭐지? 아니다, 관심없다. 알 바 아니다. 빨리 내 어미에 대한 이야기나 해라!”
“싫어요. 세미는 이야기하고 싶은걸요?”
“베르헬트! 빨리 놔라! 어차피 이제 나를 붙잡고 있을 이유는 없지 않느냐?!”
말이 통하지 않자 벨투리안은 베르헬트를 향해서 자신을 놓아달라고 소리쳤지만 베르헬트는 요지부동이었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이라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아니, 그는 분명 아무 것도 생각하고 있지 않겠지만.
하지만 어째서 베르헬트가 세미를 붙잡고 있지 않는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움직이지 않을 거랍니다. 아가씨.”
그런 벨투리안을 보고 세미가 말하기 시작했다.
“뭐…?”
“왜냐하면 그는 똑똑하거든요. 잘생각해봐요. 아무리 나라고 하더라도, 일개 초월자 따위가 용의 둥지를 침입하는 걸 둥지의 주인이 가만 보고 있을 리가 있나요?”
“하지만 빙룡은 잠시 자리를 비웠다고…!”
“물론 그 말은 사실이겠지만 돌아오려면 얼마든지 돌아올 수 있겠죠. 아시겠나요? 그는 저에게 ‘잠시간의 유예’를 허락한겁니다.”
“그렇다면 우트가르드는 왜….”
“멍청한 골렘 따위한테 당할 수준이라면 유예는 허락하지 않겠다는 뜻이겠죠? 저야 빙룡의 고매하신 속뜻까지는 알 수 없으니 정말일지는 모르겠지만…. 저에게 그런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답니다.”
세미의 표정은 마치 빙룡을 비웃기라도 하고 있는 듯 싸늘한 얼굴이었다. 그렇게 말하는 사이에도 세미의 배는 천천히 닫히고 있었다. 완전히 치료된 것은 아닌 듯 보였으나 어쨌든 적어도 일단은 멀쩡한 인간 정도로 보일 수준이 되어가고 있었다.
“어쨌든… 일단 목표는 다 완수했으니까요. 아가씨의 궁금증이라도 풀어드릴까요? 제가 마법을 쓸 수 있는 이유는 간단해요. 휘리오비치가 죽었거든요. 엘핀과 라로슈가 꽤나 힘썼나봐요? 아주 다행이에요, 다행. 타이밍 맞게 죽어줘서 정말 다행! ‘나’도 지옥에서 만족스러워 하고 있을거에요.”
오랜만에 나온 두 초월자의 이야기는 순간적으로 벨투리안을 동요시켰다. 그래, 분명 그런 일이 있었지. 그들이 휘리오비치를 잡으러 간 날이 떠올랐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네가 마법을 쓸 수 있는지 아닌지는 관심 없다! 내 어미에 대해 네가 알고 있는 것을 말해라!”
“쫑알쫑알 시끄럽네 정말.”
짝!
순간 벨투리안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기가 힘들었다. 벨투리안은 아주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겨우 세미가 자신의 뺨을 후려쳤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만 가만 아가씨라고 불러주니까 내가 정말 네 시녀라도 되는 줄 알고 있냐? 그렇게도 네 어미가 궁금한가? 그래, 말해주지. 네 어미는….”
하지만 그 순간 베르헬트가 세미를 막았다.
“그만 거기까지.”
“잠깐, 무슨 짓이냐 베르헬트!”
뺨을 얻어맞은 충격도 잠시 드디어 자신의 어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단 것에 기다리고 있던 벨투리안에게 베르헬트가 찬물을 끼얹었다. 그러나 세미는 베르헬트의 말에 더 이야기하지 않고 뒤를 돌아 우트가르드를 바라보았다.
“그래, 타임오버로군.”
세미의 뼈골렘은 반쯤 작살난 채 얼어붙어있었다. 그리고 상처투성이인 우트가르드가 천천히 세미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우트가르드는 꽤나 지쳐있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그녀가 멈출 이유는 되지 못했다.
“너무 잡담을 많이 했나 보군. 뭐 됐어. 어차피 목표는 이미 달성했으니까.”
세미는 뜸들이지 않았다. 잠깐의 지체도 하지 않고 우트가르드의 반대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향하는 곳은 바로 얼어붙은 뼈골렘의 시체였다. 우트가르드가 바로 쫓기 시작했지만 아무래도 먼저 도착할 것은 세미가 분명해보였다.
“잠깐! 젠장, 내 어미는! 내 어미에 대해서 말하고 가라!”
벨투리안이 악에 받쳐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이미 세미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뼈골렘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고 베르헬트는 여전히 자신을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이윽고 뼈골렘에 도착하자 얼어붙은 뼈골렘이 녹기 시작하고 그 뼈 사이로 게이트가 열렸다.
벨투리안은 그 게이트를 알고 있었다. 이전, 왕국에서 벗어나는 데 사용했던 마력의 통로였다. 벨투리안은 우트가르드를 향해 외쳤다.
“잡아! 워프 게이트다! 도망가게 두지마!”
우트가르드는 벨투리안의 말이 필요없다는 듯 빠르게 쇄도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세미는 게이트를 너머 바깥으로 도착했고 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우트가르드가 세미를 잡아당기려 했지만 그 시도는 간발의 차이로 불발되었다.
문이 닫히기 직전에 세미는 입을 열었다. 그러나 벨투리안에게는 무슨 소리인지 들리지 않았다. 벨투리안은 베르헬트에게 붙잡힌 채 무력하게 세미가 도망가는 걸 볼 수밖에 없었다. 이 순간만큼은 벨투리안은 베르헬트에게 원망을 감출 수 없었다.
순간 벨투리안은 게이트 너머로 있는 것이 세미 혼자가 아님을 깨달았다. 짧게 자른 분홍색 머리의 키가 큰 여인. 그건 분명 마르코와 아폴리온의 동료였던 큐빗트였다. 어떻게 눈에 들어온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큐빗트의 손에는 작은 황금색 깃털이 들려있었다.
베르헬트가 벨투리안을 놓아준 것은 게이트가 완전히 닫히고 난 뒤였다. 털썩 하면서 땅에 떨어진 벨투리안은 허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젠장, 베르헬트 어째서…!”
어째서 이렇게 된 걸까? 세미는 베르헬트가 자신을 막는 이유를 똑똑해서 그렇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것이 빙룡의 뜻인가? 빙룡은 대체 뭘 알고 뭘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 그러나 그 답을 내려줄 수 있는 베르헬트는 묵묵부답이었다. 아니, 묵묵부답 수준이 아니었다. 베르헬트는 그대로 동굴 안쪽으로 사라진 것이었다. 대답은 들을 수 없었다.
“괜찮으십니까, 우르테가.”
그런 벨투리안을 일으켜준 것은 우트가르드였다. 여전히 차가워보이는 인상에 무표정한 것은 베르헬트와 똑같았지만 그래도 베르헬트보다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아, 그래… 고맙다.”
“별 말씀을.”
우트가르드는 확실히 백상으로 인한 데미지를 모두 회복한 듯 금세 원래대로 돌아왔다. 방금 전까지 격렬한 싸움으로 지쳐있었음이 분명한데도 그런 기색은 전혀 보이질 않았다. 오히려 아까 전까지 쓰러져있던 벨투리안의 상태가 더욱 심각했다.
“너야말로 괜찮은가?”
“무엇이?”
“침입을 제대로 막지 못했는데… 빙룡…님께서 책임을 묻기라도 하면.”
“저는 괜찮습니다. 그건 제가 제대로 의무를 수행하지 못했기에 생긴 일, 처벌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것이 도구의 생각이라는 걸까. 분명 세미는 이것이 빙룡이 준 ‘잠시간의 유예’라고 표현했다. 그 말을 믿는다면, 이 모든 침입은 빙룡이 알고도 눈감아준 것이 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트가르드는 주인의 의지에 따라 처벌을 받을 거라고 얘기한다. 불합리한 얘기였다. 그러나 벨투리안에게는 그것에 대해 간섭할 권리가 없었다.
우트가르드는 대화가 끝난 벨투리안을 들어 업었다. 이미 상처를 많이 입은 벨투리안이 혼자서 걸어가기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 하에 행한 것이었다. 벨투리안은 당황하지 않고 얌전히 우트가르드의 친절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런 우트가르드의 품 역시 온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베르헬트의 품과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