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화 〉늑대 걸음을 굽히지 말아라
“뭔가 얘기할 것이 있으십니까?”
“너는… 딱딱하게 말하는 군. 조금 편하게 말해도 된다.”
왕자의 말에 쯔르레이는 살짝 당황했다. 자신의 말투가 딱딱한 건 인지하고 있었지만 그걸 정면에서 지적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렇지만 갑자기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말투가 바뀌는 것도 아니었고 바꾸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쯔르레이는 대답했다.
“노력해보겠습니다.”
“아니, 됐다. 널 부른 건 한 가지 부탁이 있어서야. 앞으로 내 동생 르베니와 어울려주지 않겠나?”
쯔르레이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무슨 의미일까, 저것이. 자신이 일단은 엘핀 세이피어스의 동생 신분이라고는 하나 아직은 평민이었다. 신분의 문제 이전에 공주랑 놀만한 교양 같은 걸 가지고 있을리 없다는 것이다.
“죄송하지만 무슨 뜻인지 여쭈어도 괜찮을까요?”
“말 그대로다. 르베니가 최근 심심해하는 것 같아서. 같이 시간을 좀 보내줬으면 하는 것이다. 비슷한 나잇대의 여자아이니까 서로 통하는 것도 있겠지.”
있을 리가 없었다. 쯔르레이는 겉보기에만 어린애일 뿐 속은 완전 아저씨였으니까. 그렇다고 여기서 저는 사실 아저씨입니다 라고 밝힐 수도 없었다. 미친년 취급을 받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기서 공주랑 시간을 보낸다는 건 사실상 훈련을 받지 못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고된 훈련을 받고 나서 공주랑 논다? 불가능했다. 지금도 마법으로 치료를 받았지만 아직 몸이 쑤셨다. 왕자가 부른 게 아니라면 결코 오지 않았을 것이다. 왕자가 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결국 쯔르레이는 거절의 말을 올렸다. 결코 왕자의 말을 거절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훈련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죄송합니다, 왕자전하, 공주전하. 저는 오… 제 오라비에게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아쉽지만 그럴 시간이 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게 문제라면 내가 직접 세이피어스 경에게 훈련을 그만두도록 말해보도록 하지.”
그런가, 이거였나. 이게 이유였나. 왕자는 들은 것이다. 쯔르레이가 학대 수준의 훈련을 받고 있다는 것을. 그렇기 때문에 직접 이렇게 나서서 그걸 막으려고 하는 것이다. 쯔르레이에 대한 권리는 엘핀에게 있으니 설령 왕자가 직접 말한다고 해도 훈련을 그만두게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런 간접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안될 말이었다. 쯔르레이가 다급하게 말했다.
“아뇨, 아닙니다. 훈련은 제가 원해서 받고 있는 겁니다. 부디 그러지 말아주시길 바랍니다.”
그 말에 왕자의 얼굴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보는 눈으로 바뀌었다. 그럴 만도 했다. 그런 훈련을 10살짜리 여자아이가 받기를 원한다는 것은 상식 바깥의 이야기였다. 왕자에게도 그러했다.
“헤에, 쯔르레이양도 오라버니를 많이 좋아하나봐요?”
그러다 갑작스레 끼어들은 공주의 말에 쯔르레이의 얼굴이 말 그대로 썩어들어갔다. 처음으로 보여주는 거나 마찬가지인 표정 변화에 왕자와 공주 모두 흥미롭게 쯔르레이를 바라봤다.
“아뇨, 절대 아닙니다.”
“우와… 세이피어스 경을 별로 좋아하지 않나봐요?”
“제 오라비는 성격이 더럽습니다.”
쯔르레이의 직설적인 말에 물어본 공주 또한 당황했다. 그녀에게 있어서 오라버니라는 것은 매사에 친절하고 착한 존재였기 때문데 더욱 그러했다. 자신이 왜 오라버니의 연애 사업에 까지 나서서 도와주려고 하고 있겠는가. 오라버니를 좋아해서 그러는 것이다. 그런데 이 쯔르레이라는 특이한 이름의 소녀에게 오라버니라는 것은 전혀 다른 존재인 것 같았다.
“제 오라비는 저를 보통 ‘야’, ‘어이’, ‘저거’ 라고 부릅니다. 처음 만났을 때는 제 존재를 의심한다고 묶어놓고 때렸고 막 깨어났을 때 방 안에 멋대로 들어왔습니다. 조금이라도 신경이 거슬리면 손을 올리려고 하고 욕설도 자주 씁니다. 싸가지가 없습니다. 최악입니다.”
쯔르레이의 폭로에 왕자와 공주 모두 얼빠진 표정이 되었다. 곧 왕자가 분노해서 말했다.
“세이피어스 경이 그렇게 무뢰한인지 몰랐다. 내가 아바마마에게 말해서라도 너를 구해주도록,”
그제서야 자신이 무슨 말을 한 건지 깨달은 쯔르레이는 다급하게 왕자를 말렸다.
“아, 아닙니다.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어차피 얼마 못 갈 인연입니다. 신경써주시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얼마 못갈 인연이라니?”
그 말에 쯔르레이는 생각했다.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휘리오비치와 관련된 일이 끝나면 헤어질거라는 얘기를 어떻게 제대로 할 수 있겠는가. 결국 쯔르레이는 없는 머리를 굴려 이야기를 지어냈다.
“세이피어스가의 사생아들은 일정량의 돈을 받고 연을 끊은 채로 원래 생활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저는 그 대신 세이피어스의 검술을 받고 평민으로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평민으로 돌아간다고? 어째서 그러는 건가요?”
공주가 의문에 차서 물었다. 왕족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가 맞았다. 귀족의 삶을 버리고 평민이 된다는 것은. 편하게 살 수 있을 텐데 어째서? 품위와 명예가 없는 삶으로 돌아간다니.
“찾아야 할 게 있습니다.”
“그건 귀족이 되어서는 찾을 수 없는 건가?”
“네.”
대화가 잠시 끊겼다.
“그래… 알았다. 네 말을 존중하도록 하지. 하지만 네가 받는 훈련은 아무리 생각해도 도가 심하다고 판단된다. 며칠에 한번씩이라도 좋으니 쉬면서 르베니와 시간을 보내주면 안되겠나?”
왕자가 제시한 타협안이었다. 여기까지 왔으면 쯔르레이도 거절할 수 없었다. 결국 쯔르레이는 왕자의 말에 동의했다. 그러자 곧바로 공주가 쯔르레이를 껴안아 버렸다.
“앞으로 잘부탁해요, 쯔르레이양.”
“저, 저야말로 잘부탁드립니다, 공주전하.”
이런 일에 내성이 없는 쯔르레이는 한껏 당황했다. 곧 공주가 껴안은 것을 풀고 쯔르레이의 손을 잡았다.
“그렇게 딱딱하게 부르지 말고 르베니라고 불러줘요.”
“르베니… 전하.”
쯔르레이가 간신히 대답했다. 이 공주의 친화력은 너무 대단해서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 너무 부담스러웠다. 공주가 손을 잡고 흔들었다.
“응, 그래요. 쯔르레이양은 뭐 애칭 같은 것 없나요? 저는 애칭 같은 거 좋아하는데.”
“고향에선 저를 투르라고 불렀습니다.”
“에에, 별로 귀엽지 않은 이름이네요. 아뇨, 뭐라고 하는 건 아니에요! 응! 좋은 이름이네요, 투르. 앞으론 저도 그렇게 부를게요. 투르.”
“네, 감사합니다. 르베니 전하.”
“전하라고 할 것 까지는 없어요. 좀 더 편하게 말해봐요.”
“르베니님….”
“좋아요, 좋아! 투르는 뭘 좋아해요? 뭐하고 같이 놀까요?”
공주의 친화력 가득한 말은 끝이 없었다. 계속해서 다가오는 공주에게서 쯔르레이를 구해준 건 왕자였다.
“그쯤해라, 르베니.”
“왜 그래요, 오라버니. 지금 막 좋은 시간인데.”
“쯔르레이양은 방금 훈련을 마치고 왔으니까 오늘은 좀 힘들거다. 놀고 싶으면 다음 시간에 놀도록.”
“아, 미안해요, 투르. 제가 너무 붙잡았네요. 오늘은 돌아가서 푹 쉬도록 하세요. 그럼 언제 다시 보도록 할까요?”
“…모레가 어떻겠습니까?”
“응, 그럼 그렇게 해요!”
공주가 즐겁게 손을 흔들며 인사하는 걸 바라보며 쯔르레이는 떠났다. 결과적으로는 일주일에 두 번을 공주와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한치의 시간도 아까웠지만 왕족에게 반항할 수는 없었으니 이것이 최대의 한계였다. 아무튼 간에 소문이 나쁘게 난 것은 분명했다. 쯔르레이로서는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엘핀의 평판이 나빠질 것을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지는 것도 없지 않아 있었다.
겨우 공주에게 해방되었고 시간도 남았으니 오늘은 훈련을 재개하기 보다는 공주의 말대로 방 안으로 돌아가 푹 쉬고 싶었다. 침대에 누운 쯔르레이는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잠에 푹 빠진 쯔르레이를 깨운 것은 여느 때와 같이 엘핀의 목소리였다. 차이점이라면 새벽이 아니라 저녁이었던 것이다.
“야, 너 이 새끼, 왕자한테 무슨 헛소리 한거야!”
어정쩡하게 잠에서 깨어난 쯔르레이가 비몽사몽 간에 대답했다.
“잠… 자고 있다. 나가….”
“일어나, 새… 아무튼 일어나라.”
엘핀의 타박은 쯔르레이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계속되었다.
“무슨 일이냐.”
“빌어먹을, 너 이제부터 나보고 오라버니라고 부르고 다녀라, 제대로.”
“무슨 헛소리야.”
“방금 왕자랑 공주랑 다니는 거 마주쳤는데 그네들이 나 보자마자 뭐라고 했는지 아냐. ‘파렴치한’이란다! 주변에 기사들 다 있는 데서.”
그 말에 쯔르레이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달았다. 왕자가 자신이 한 말을 듣고 엘핀에 대한 평가를 전면수정한게 틀림없었다. 쯔르레이가 비웃으면서 말했다.
“그러게 평소에 잘하지 그랬나.”
“이 망할 년이….”
“자네가 그렇게 험하게 말을 하니 나도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는 걸.”
“후… 그래, 알았다. 앞으로 말 조심할 테니까 너도 오라버니라고 불러.”
“싫다.”
“뭐가 문제야, 대체.”
“오라버니라는 단어를 쓰는 거 자체가 소름이 돋는다. 기분 나빠.”
엘핀이 손을 들었다. 쯔르레이는 반사적으로 옆에 있는 베개를 빠르게 들고 방어했지만 엘핀은 손을 들어 그냥 머리를 긁을 뿐이었다.
“그래, 내가 다 잘못했다. 앞으로는 훈련도 없는 걸로 하자.”
엘핀이 결국 마지막 수를 꺼내들었다. 참으로 치졸하고 치사한 방법이었지만 그게 쯔르레이게에는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쯔르레이가 기겁을 해서 말했다.
“이보게.”
“왜 부르시나, 오라버니도 아닌 사람을.”
“약속과 다르잖아!”
“나는 네 오라버니가 아니라서 지킬 약속 같은 게 없다.”
“치사하게….”
쯔르레이가 결국 이빨을 으드득 씹으며 말했다.
“…니….”
“잘 안들리는데.”
“망할, 오, 오라버니.”
“그래야지.”
결국 그 날 두사람 사이에서는 두가지 조약이 체결되었다. 엘핀은 말을 험하게 하지 않고 때리지 않을 것. 쯔르레이는 그를 오라버니라고 부르며 나쁜 말을 퍼트리지 않을 것이었다. 후자의 경우는 이미 늦은 것도 같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