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화 〉늑대 걸음을 굽히지 말아라
엘핀이 쯔르레이를 들고 간 곳은 왕실 마법사가 기거하는 곳이었다. 반쯤 정신을 놓은 채 기력을 회복하던 쯔르레이는 침대에 뉘인 채로 왕실 마법사가 해주는 마법 치료를 받게 되었다.
“밤마다 몸이 편안했던 건 이거 때문인가….”
“그래, 내가 직접 부탁해서 받는 거니까 고맙게 여기라고.”
그런 상태로 만든 주제에 할 말이냐 라고 답하고 싶었지만 이 훈련은 분명 쯔르레이가 원해서 하는 거였으니 뭐라고 할 처지는 못되었다.
“왕실 마법사라면 제놈 그라시아라는 그 사람은 아닌 건가?”
“그라시아는 개인적인 이유로 왕국에 자리를 뒀을 뿐 왕국에 충성을 바친 건 아니야. 왕실 마법사라는 귀찮은 자리에 앉을 이유는 없지.”
“귀찮다니요!”
엘핀의 말에 조용히 쯔르레이의 치료를 하고 있던 왕실 마법사가 끼어들었다.
“굉장히 명예로운 자리라고요. 귀찮은 자리라니 그런 무례한 말은 삼가주세요.”
“아, 아 그래, 알았다고. 하여간 말 하나를 허투루 넘기지 않아.”
“아는 사이인가?
쯔르레이가 생각보다 친해보이는 둘의 모습을 보고 말했다. 둘의 사이는 확실히 며칠 만났다고는 생각하기 힘든 친근함이 있었다.
“아카데미 동문 수학이다.”
“네, 맞아요. 제가 1등이었고 이 놈이 2등이었죠.”
왕실 마법사라는 여자는 굉장히 자부심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기사 1등이라는 것은 자랑할만한 일이니 크게 이상할 것도 없었다. 여자는 1등인 것보다는 엘핀을 이겼다는 것에 더 중점을 두고 있는 것 같았지만.
“이름부터 말하는게 정상 아니냐.”
“아, 그렇군요. 제 이름은 핍셀이에요. 핍셀 유르카. 핍셀이라고 불러주세요. 쯔르레이양.”
“쯔르레이입니다.”
이때까지 쯔르레이의 앞에서 조용히 있던 여자는 어디간건지 한번 말문이 트인 핍셀은 계속해서 수다를 떨었다. 치료는 적잖이 잘 진행 되고 있는 듯 몸은 편했지만 시끄러워서 정신적으로 피로가 왔다.
“그래서 말이에요. 이 녀석이 독한 건 학창시절부터 유명했거든요. 그걸 쯔르레이양에게도 적용해서 훈련이니 뭐니 할지는 몰랐지만 말이에요. 아무튼 엘핀의 아버지는 참 구제불능이지만 가끔은 좋은 일도 하는 거 같네요. 이렇게 이쁜 동생도 만들어주고. 저 같으면 바로 어화둥둥하고 업고 다니기라도 할텐데 이 녀석이 맨날 갈구죠? 성격이 그렇다니까요, 성격이. 남들 앞에선 칼 하나 안들어갈 것 처럼 굴고는 아는 사람들 앞에선 성격이 어쩜 그렇게 싸가지가 없는지.”
“적당히 해라, 너.”
“어머, 내가 뭐 틀린 말이라도 했나? 학창시절에 얘 별명이 뭐였는지 아세요? 독사에요, 독사. 독해서 독사, 성격이 더러워서 독사. 아 제 별명은 물론 귀여운 양이었답니다. 푹신푹신하고 몽글몽글하죠?”
“시비 걸리면 바로 들이박아서 양이었어. 산양.”
“닥쳐. 아무튼 간에 이 녀석이 하루는 자기 훈련한다고 종일 연무장에 박혀있다가 쓰러졌는데…. 아, 치료가 다 끝났네요.”
다행히도 핍셀의 수다는 치료가 마치자 끝났다. 그녀 역시도 쯔르레이가 왕자의 부름을 받았음을 알기 때문에 더 시간을 잡을 생각은 없는 것이다. 쯔르레이가 침대에서 일어나 한번 걸어보자 훨씬 몸 상태가 가뿐해진 걸 느낄 수 있었다.
“굉장하네.”
“그렇지? 좀 더 칭찬해줘도 좋아요. 바로 이 핍셀 유르카! 유망한 왕궁 치유 마법사라고요.”
“고마워요.”
“다 됐으면 그만 가지. 네 방으로 돌아가서 준비해야 돼.”
“준비…?”
“왕자를 만날 때 그 꼴로 갈 수는 없을 거 아니야.”
실로 그 말대로였다. 쯔르레이는 현재 흙먼지로 뒤덮힌 데다가 옷은 점점 넝마조각이 되어가는 소년용 훈련복이었다. 이런 복장으로 왕자가 초대하는 걸 받았다가는 불경죄로 처벌 받아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러나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방으로 돌아간 쯔르레이는 곧 후회했다. 수많은 메이드와 휘리엘이 쯔르레이의 방에서 대기하고 있던 것이다.
“…간단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왕자님을 뵙는데 가볍게 하고 갈 수는 없으니까요. 좀만 참아보세요.”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메이드의 표정들은 세상 둘도 없는 기대감이 번뜩이고 있었다. 쯔르레이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
“쯔르레이 세이피어스입니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왕자 전하”
“르펜바하 제르민 아르 볼타르다. 초대에 응해주어 고맙다.”
쯔르레이가 어색하게 양손으로 치맛자락을 들어올리며 인사했다. 쯔르레이는 최대한 표정이 구겨지지 않도록 주의하고 있었다.
메이드들의 치장은 쯔르레이가 생각하던 것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수준이었다. 일단 메이드들은 쯔르레이의 더러워진 옷을 벗기고 그대로 목욕탕에 집어넣어 빡빡 씻겼다. 이상한 냄새가 나는 향유를 물에 뿌리기도 했고 머리에 바르기도 했다. 왕자가 불렀는데 이렇게 늑장 부려도 되는지 되려 쯔르레이가 걱정할 정도로 오랫동안 씻겨졌다.
깔끔하게 씻고 나온 쯔르레이는 그 모습이 일견 성스러워 보일 정도로 아름다워 몇몇 메이드들은 참을 수 없는 신음을 내기도 했다. 금발 머리칼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마저도 쯔르레이를 비추는 것이 사랑스러웠다. 쯔르레이는 연무장에서 굴러 더러워진 얼굴조차도 아름다웠으나 완전히 깔끔하게 씻은 얼굴의 파괴력은 그 배는 되었다.
그 후의 작업도 녹록치 않았다. 여러 작은 아동용 드레스를 메이드들이 쯔르레이에게 입혀보기 시작한 것이다. 대체 왕자가 불렀는데 이렇게 늦어도 되는 건가? 쯔르레이의 걱정은 깊어져 갔다.
결국 결정된 드레스를 입혀지고 머리를 네줄기로 땋아 머리핀으로 엮이고 나서야 쯔르레이는 해방될 수 있었다. 쯔르레이는 순간 훈련이 차라리 더 낫다고 생각할 정도로 고역인 일이었다.
메이드들은 쯔르레이를 꾸미면서도 여러 예의범절에 대해서 속성으로 가르쳐주었는데 이런 인사 역시 거기서 배운 것이었다. 다행히도 자세가 크게 어긋나지는 않았는지 왕자는 별 말 하지 않았다.
“앉게나.”
왕자가 너무 늦었다고 화를 내지 않을까 걱정하던 것이 무색하게 왕자는 쯔르레이를 테이블에 앉게 해주었다. 쯔르레이가 조심스럽게 테이블에 앉았다. 테이블에는 여러 과자가 널려 있었고 세 명 분의 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또 누가 오시는 건가요?”
“아, 내 동생이 올 거다. 널 부른 것도 그 때문이야.”
동생이라면 당연히 왕국의 공주일 것이다. 그러나 쯔르레이에게 있어서는 의문만 더 증폭되는 얘기였다. 자신에게 관심이 있어서 부른게 아니라 동생 때문이라고? 자신이 공주와 무슨 연관이 있어서?
하지만 왕자가 곧 온다던 공주는 쯔르레이보다 더 늦었고 둘 사이에는 서로 아무 대화 없이 시간만 흐르고 있었다.
“과자… 좋아하나?”
“네? 조, 좋아합니다.”
눈치가 보여 막 먹지는 못하고 조금씩 과자를 먹던 쯔르레이에게 왕자가 말을 걸었다. 설마 이런 걸로 뭐라고 할 생각은 아니겠지. 다행히도 왕자는 더 말을 하지 않고 조용히 있었다. 그리고 다시 또 시간이 지나자 왕자가 말했다.
“차도 마셔보지.”
“아, 네.”
쯔르레이는 왕자의 말대로 차를 한모금 들이켰다. 아이들을 위해서 나온 차라 그런지 쓴 맛보다는 단 맛이 더 강했다. 꽤 맘에 드는 차였다. 이쯤되자 쯔르레이도 긴장이 풀렸다. 왕자는 말이 없고 온다는 공주는 오지 않으니 자연스러룬 일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될 정도로 시간이 지나서야 공주가 나타났다.
“오라버니!”
“르베니.”
“아이참, 모처럼 내가 시간을 내주었는데 아무 것도 하지 않다니!”
공주의 말에 쯔르레이와 왕자의 표정이 모두 변했다.
“…?”
“너 설마….”
“아, 들켜버렸다. 헤헤.”
공주는 곧 실토했다. 자신이 두 사람 사이의 시간을 만들어준다고 도착하고 나서도 숨어서 그 둘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둘의 지지부진한 대화를 보고 참지 못하고 뛰쳐나왔다는 것이다. 참 어이없는 이야기였다. 무엇을 보고 둘한테 시간을 만들어 준다는 것인가.
숨어서 지켜보던 기척이 있던 것은 눈치채고 있었지만 왕자의 호위기사 같은 것일 줄 알았지 공주일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쯔르레이는 그 기척이 굉장히 어설프단 걸 눈치챘어야 했다.
“정식으로 소개하지, 내 동생. 제 1왕녀 르베니다.”
“안녕하세요, 쯔르레이양. 르베니 셀메니에 아르 볼타르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아, 안녕하세요. 저는 쯔르레이 세이피어스라고 합니다. 공주 전하.”
“너무 그렇게 딱딱하게 말하지 않아도 좋아요. 쯔르레이양은 몇 살이신가요. 지금? 저는 올해로 11번째 생일을 맞이했답니다.”
물론 공주가 그렇게 말했다고 해서 쯔르레이가 편하게 말을 놓지는 않았다. 그럴 정도의 상식은 갖고 있었다. 설령 공주가 정말로 그걸 원한다고 해도 그래서는 안되는 것이다.
“10살입니다, 전하.”
“어머, 그럼 내가 언니네요! 우리 앞으로 잘 지내봐요!”
“네, 환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둘 사이의 인사가 끝나자 왕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그럼 나는 이만 가볼게, 르베니.”
무표정하던 왕자의 얼굴도 동생을 상대로는 풀리는 건지 남매다운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쯔르레이로서는 어처구니 없는 얘기였다. 불러놓고 왜 가는 거야?
“에, 오라버니가 벌써 가면 어떡해? 좀 더 있다 가. 오라버니가 얘기해줘.”
그 말에 왕자는 살짝 갈등에 빠진 표정으로 고민하다가 결국 다시 자리에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