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화 (29/29)

외전3. 결혼식

원래 스페라도 후작가의 저택이 있던 자리에는 새로운 저택이 들어섰다.

거대한 저택은 제국 전체에서 몰려든 장인들이 혼을 갈아 만들었다. 값비싸고 귀한 재료들이 아낌없이 들어갔고, 정원 구석구석 작은 풀 한 포기조차 완벽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 전에 이곳에서 살던 이들더러 보라는 듯 아름답고 화려하게 지어진 저택은 다른 나라 사람들은 물론 수도에서 사는 사람들조차 한 번씩 구경을 올 정도였다.

하지만 이 저택보다 더 유명세를 끈 것은 성인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 공작이었다.

성인이 되자마자 공작 위에 오른 어린 공작은 자신의 능력을 입증이라도 하듯, 자리에 앉자마자 어머니인 셀바토르 공작과 함께 여러 일을 해냈다. 때로는 가지고 있는 어둠의 능력으로 일을 처리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천재라고 칭송받는 명석한 머리로 미궁에 빠져 있던 일들의 해결책을 내놓기도 했다.

어렸을 적 불우한 일을 겪고도 훌륭하게 자라난 그 어린 공작의 결혼식이 바로 내일이었다.

“아가씨.”

세이아나 공작가의 하녀복을 입은 마델이 레슬리를 깨웠다. 부드러운 잠옷을 입고 폭신한 침구에 몸을 묻은 레슬리는 자신의 이름을 계속 부르는 마델의 목소리에 간신히 눈을 떴다. 긴 은색 속눈썹 밑에서 나타난 라일락색 눈동자에는 졸음이 가득했다.

“조금 더 자면 안 돼……?”

일어나야 한다는 걸 알았지만, 너무 피곤했다.

하나의 가문이 정착한다는 게 쉽지 않을 거란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각오도 다져 두지 않았던가. 하지만 상상 이상으로 일이 너무도 많았다.

새로 받은 영지에 들러 사람들에게 인사도 해야 했고, 수도에 머무르면서 여러 가지 정책을 논의해야 하기도 했으며, 위험한 일이 있으면 발로도 뛰어야 했다. 거기다 옛날부터 자신의 위치를 지키고 있던 귀족들은 갑자기 나타난 자신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분들에게 실력을 인정받아 보렴.’

셀바토르 전 공작은 레슬리를 도와주지 않았다. 그저 웃으면서 ‘긍지가 높은 분들이니 쉽진 않을 거야.’라고 말해 줬을 뿐이었다.

각 분야에서 가장 긍지가 높은 귀족들에게 자신을 인정시키는 일은 쉽지 않았지만 최근 들어 조금씩 좋은 평가를 얻기 시작했다.

아무튼 그렇게 여러 가지 일을 한꺼번에 하려니 죽을 맛이었다. 거기에 콘라드와의 결혼식도 더는 미룰 수가 없었기에 근 몇 달은 정말, 정말로 눈코 뜰 새가 없이 바빴다.

셀바토르 공작가의 사람들이 도와주고 자신이 고용한 세이아나 공작저의 사람들이 전부 달려들었음에도 결혼식 준비는 쉽게 끝나지 않았다. 셀바토르 전 공작과 사이레인이 자신의 딸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며 계속 퇴짜를 놓은 탓이었다.

결국, 은퇴한 제나가 달려와 이러다간 길바닥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되겠다고 조용히 화를 내고 나서야 간신히 결혼식 준비를 끝마칠 수 있었다.

그렇게 준비한 결혼식이 내일이었다.

“내일만 지나면 푹 주무실 수 있어요. 여행도 가시잖아요.”

마델이 안타까운 목소리로 레슬리를 일으켰다. 결혼식이 지나고 나면 여행을 떠나기로 콘라드와 말을 맞춘 상태였다.

바다를 보러 가자고 했었지.

가족과 같이 가서 본 바다는 너무도 아름다웠고 레슬리의 마음에 쏙 들었다. 다녀온 후에도 종종 언급했기에 콘라드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바다가 아름다운 곳으로 여행지를 잡았다.

‘정말로 예쁜 곳이니, 슈야 마음에도 쏙 들 거예요.’

그렇게 말하며 웃었지.

콘라드를 떠올린 레슬리는 번쩍 눈을 떴다. 그래,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하필 2주 전, 신전을 공격하는 무리가 나타났고 테센트루아 성기사단은 그들을 제압하러 떠났다. 이번에 기사단장이 된 콘라드도 예외 없이 끌려갔다. 그리고 오늘은 그들이 귀환하는 날이었다.

간신히 졸음을 참고 침대를 벗어났다.

“마델, 목욕 준비는?”

“이미 끝내 놨지요!”

세이아나 공작가의 하녀장이 된 마델은 씩 웃으면서 레슬리를 욕실로 데려갔다. 새하얀 자기 욕조에는 딱 좋은 온도의 물이 가득 들어 있었다.

씻고 나오자 커다란 수건을 들고 있는 서올리와 다른 하녀들이 재빠르게 레슬리를 닦아 주었다. 졸린 상태에서 목욕까지 한 레슬리는 살짝 몽롱한 상태로 하녀들에게 이리저리 끌려다녔다.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단장이 어느 정도 끝난 상태였다. 이미 며칠 전에 미리 골라 둔 드레스를 입었고, 머리도 정성스레 땋아서 늘어트렸다.

일부는 세밀하게 땋고, 일부는 늘어트린 은빛 머리카락 위에는 달과 작은 꽃 모양으로 만들어진 장신구가 얹어졌다. 세이아나 공작가의 문양이었다.

조금 전까지 부스스한 머리였는데 무얼 바른 건지 반짝반짝 윤이 나는 데다가 좋은 향기가 흘렀다. 거울이 비친 얼굴에서는 어제 밤을 새면서 서류를 본 흔적 따위 찾아볼 수도 없었다.

“모두 나날이 솜씨가 좋아지네.”

레슬리의 칭찬에 레슬리를 꾸민 하녀들이 어깨를 으쓱이며 콧대를 높였다.

“공작님 덕분이죠. 저택 사람들이 뭔가 배우는 걸 아낌없이 지원해 주시니까요.”

마지막으로 레슬리의 손톱에 향유를 발라 주면서 한 하녀가 웃었다.

세이아나 공작가에서는 일하는 사람들에게도 배움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글을 모르던 이들은 글을 배웠고, 간단한 산수를 배우는 사람도 있었다. 화장법이나 꾸밈법을 배우는 사용인들도 많았으며, 제나를 동경해 집사 일을 배우는 이도 있었다.

“그러면 다행이지. 혹시 부족한 건 없어?”

“부족한 게 있을 리가요! 식사도 잘 나오고, 잠자리도 편안하고. 제가 이런 말까진 안 하려고 그랬는데요, 제 친구들에 친척들까지 전부 제가 공작저에서 일하게 된 걸 얼마나 부러워했는데요.”

레슬리의 말에 하녀가 고개를 격하게 흔들며 대답했다. 몇몇 귀족 집안의 저택에서는 주인이 먹고 남은 음식을 먹게 하기도 했고, 깨끗하지 않아 벌레가 나오는 숙소를 제공하는 저택도 있었다.

하지만 세이아나 공작가에서는 절대 그런 일을 허용하지 않았다.

레슬리는 자신이 예전에 겪은 일을 누군가가 또 겪기를 원치 않았다. 그래서 사용인들의 식탁은 다른 귀족가의 사용인들에게 화제가 될 정도로 풍성했다. 제철 과일은 물론 고기와 생선 요리도 먹을 수 있었고, 여름에는 귀하디귀한 얼음을 사용한 요리도 종종 식탁에 올랐다.

풍족한 먹거리와 편안한 잠자리, 넉넉한 급여에 무언가를 배우는 데 제한을 두지 않자 세이아나 공작가는 이내 좋은 사람들로 가득 찼다.

“그러면 다행이야.”

레슬리는 거울을 보면서 웃었다. 처음에는 실패도 많이 했고 지금도 완벽한 상태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사람들이 좋아하는 걸 보면 기분이 즐거워졌다.

‘이제 시간을 들여서 더 많은 사람이 비슷한 혜택을 받게 해야지.’

속으로 그렇게 다짐하는데 서올리가 신발 한 짝을 가지고 왔다. 드레스와 레슬리의 은발에 맞춰 제작한 신발은 더없이 아름다웠고 또한 위태해 보였다. ‘벗는다.’라는 표현보다는 ‘떨어진다.’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굽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공작님, 여기 신발을 가지고 왔습니다만…….”

신발을 가져오는 서올리의 눈도 그리고 말끝도 흐려져 있었다.

레슬리는 종종 높은 굽의 신발을 신긴 했지만 그건 잠시였고, 그래도 편안함 쪽에 중심을 둔 신발을 애용했다. 하지만 오늘 레슬리가 고른 신발은 아름다웠지만 오래 신기는 힘들어 보이는 신발이었다.

“이 신발로 괜찮으실까요? 저는 솔직히 걱정됩니다.”

“맞아요, 예쁘긴 한데 오늘 공작님은 춤도 많이 추셔야 할 거고. 내일도 일찍 일어나서 종일 서 계셔야 할 텐데. 조금 더 편안한 신발을 신는 건 어떠실까요?”

“이 신발도 지금 드레스에 잘 어울리실 거예요.”

서올리를 시작으로 마델과 다른 하녀들이 앞다투어 자신이 추천하는 신발을 가지고 왔다. 전부 레슬리의 드레스와 잘 어울렸고 처음 고른 신발보다는 굽이 낮은 편한 신발이었다.

“아니, 오늘은 이걸 신을래.”

평소였다면 레슬리는 하녀들의 말을 따랐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단호한 레슬리의 행동에 하는 수 없이 하녀들은 레슬리가 신발을 신는 것을 도왔다.

모든 단장이 다 끝나고 레슬리는 커다란 거울 앞에 섰다.

‘잘 어울린다. 예뻐.’

본인 스스로도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결이 좋은 은발을 늘어트리고, 위에는 달과 꽃 모양의 보석으로 만들어진 티아라를 썼다. 티아라와 함께 제작된 목걸이는 우아함을 뽐내기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리고 붉은 루비가 박힌 귀걸이는 찬란하게 빛나 레슬리를 밝혀 주고 있었다.

거기다 긴 연분홍색 드레스 자락 사이로 보이는 높은 굽의 신발은 레슬리의 만족감을 불러왔다.

“공작님, 너무 굽이 높지 않을까요? 평소에 신던 것보다 더 높아서 저는 걱정스러워요.”

드레스 자락에 향수를 뿌리면서 마델이 마지막으로 물었다. 걱정스러움이 묻어나는 목소리에 입술을 한 번 오므리더니 레슬리는 눈을 깜빡이면서 대답했다.

“하지만 이 정도는 돼야 가족들 사이에서 안 묻히는걸.”

아. 그제야 마델과 서올리를 포함한 다른 하녀들은 왜 레슬리가 저 신발을 골랐는지 알 수 있었다.

셀바토르 가문에서 레슬리는 가장 작은 편이었다. 열두 살에 공작저로 오고 나서부터 저택의 모든 사람이 달려들어 레슬리를 열심히 먹였으나 키는 많이 크지 못했다. 자일로는 아마 어릴 적 너무 못 먹은 탓일 거라고 말하며 한숨을 쉰 적도 있었다.

그리고 레슬리도 어렴풋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유전이라고 믿기에는 엘리도, 스페라도 후작 부인도 보통은 넘는 편이었으니까.

그래도 레슬리는 불편함보다는 편안함을 중요시했기에 높은 신발을 신어 본 적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오늘과 내일만큼은 무리해 볼 생각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어머니랑 아버지가 오시는 날이잖아.”

셀바토르 공작, 아니 이젠 셀바토르 전 공작이 된 아셀라와 사이레인이 수도로 올라오는 날이었다.

베스라온이 공작 위를 잇자마자 아셀라와 사이레인은 셀바토르 공작령으로 내려갔고, 지금까지 거기서 머무르고 있었다. 햇빛이 잘 들어 늦잠을 자기에 좋다나. 그녀다운 말이었다.

그렇게 수도를 벗어난 두 사람이 며칠 전 레슬리의 결혼식으로 수도에 올라왔고 오늘 파티부터 내일 결혼식까지 참석할 예정이었다.

“공식적인 장소니까, 내가 다 컸다는 걸 보여 드려야지.”

레슬리는 단호하게 외쳤다.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셀바토르 사람들의 눈에는 레슬리는 아직도 열두 살 모습 그대로인 모양이었다. 그러니 오늘만큼은 반드시 우아하고 아름다운 자신의 모습으로 다 컸다는 걸 증명해 보일 생각이었다.

자신만만한 레슬리를 보며 마델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이 눈치가 좀 없는 편이긴 했으나 이미 주먹을 불끈 쥐고 저런 말을 한다는 게 레슬리의 이상향과 거리가 멀다는 걸 말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더 귀엽게 느껴질 뿐이었다.

그리고 그건 다른 하녀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레슬리의 드레스 자락을 정리하거나 주변의 소품을 치우는 듯 부산하게 움직이면서도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아가씨는 잘 하실 수 있을 거예요.”

간신히 먼저 표정을 정리한 서올리가 머리끝을 매만져 주며 외치자, 레슬리는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동그란 눈이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었다.

마델이 신발 뒤쪽 리본을 묶어 주는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아, 집사님이신가 봐요.”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아직 아닌 것 같은데. 그렇게 중얼거리며 문을 연 마델의 눈이 커다래졌다. 방문객이 누구인지 깨닫자마자 마델은 몸을 숙였다.

“아이테라 님.”

레슬리의 방문을 두드린 것은 집사가 아니라 콘라드였다. 마델의 말에 거울 앞에 서 있던 레슬리가 몸을 빙글 돌리고는 그대로 문 쪽으로 가 품에 폭 안겼다.

“라드.”

“집사에게 부탁해서 제가 데리러 왔습니다.”

콘라드는 웃으면서 제 품에 안긴 레슬리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고개를 살짝 숙이고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가 간지러워 레슬리는 품 안에서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맞췄다. 콘라드의 황금색 눈동자가 웃음을 머금고 빛이 났다.

“아름다워요, 내 사랑.”

그리고 자신에게 안기는 바람에 조금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귀 뒤로 넘겨 주었다.

레슬리는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친 채 대답했다.

“라드도 정말 멋있어요.”

사실이었다. 콘라드는 새하얀 테센트루아 성기사단복을 주로 입었지만, 오늘은 달랐다. 평소 보기 힘든 검은 정복에는 붉은색으로 문양이 들어가 있었다. 금과 다이아몬드로 만들어진 카라링스는 콘라드의 눈 색과 같은 장신구였고 머리는 반만 뒤로 넘겨 고정했다.

콘라드의 모습은 새로웠다. 늘 하얀색과 금색이 어우러진 성기사단 제복을 주로 입곤 했으니까. 평소는 단정하고 금욕적인 모습이라면 오늘은 정반대였다.

예전에 메데이아가 최초의 사제 후보들을 위로한다고 열었던 파티에서도 비슷한 차림이었으나, 그때보다 더욱 성숙해진 얼굴과 자태였다.

그런 콘라드를 보던 레슬리의 눈이 한 곳에서 멈췄다.

“커프스.”

짤막한 단어가 입에서 튀어나왔다. 붉은색과 검은색으로 꾸민 콘라드의 소맷자락에 달린 커프스는 연한 분홍색이었다.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조합에 눈을 깜빡이자, 콘라드가 기분 좋은 웃음을 머금었다.

“설마…….”

“네, 어울리지요?”

그렇게 말하며 콘라드는 레슬리의 손을 잡았다. 손목에서 반짝이는 커프스와 레슬리가 입은 섬세한 장미 무늬 레이스가 소매를 장식한 드레스는 같은 색이었다.

어떻게 내가 오늘 이 드레스를 입는 걸 알았을까. 콘라드는 수도를 비웠었는데.

설마! 하는 생각에 몸을 돌려 마델과 서올리를 바라보자 두 사람이 밝게 웃었다. 두 사람이 콘라드에게 말해 준 모양이었다.

조금 치사하다는 듯 레슬리가 콘라드를 노려보자 그는 웃으면서 가볍게 뺨에 키스했다. 간지러움에 살짝 몸을 움츠리니 뺨에 닿은 입술에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런데 오늘은 더 특별해 보이는군요. 다른 의미로요.”

모를 수가 없었다. 평소에 안기면 가슴팍에 닿던 레슬리의 머리가 이젠 어깨에 닿았으니까.

콘라드의 물음에 레슬리는 우쭐거리면서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 모습이 퍽 사랑스러운지 콘라드의 눈매가 휘었다. 레슬리를 바라보는 황금색 눈동자가 빛이 나는 듯했다.

“지금 키스하고 싶은데 화장이 지워져서 안 되겠죠?”

“……안 돼요.”

안타까워라. 콘라드가 보란 듯 어깨를 축 내렸다. 눈꼬리가 처지며 안타까운 분위기가 흘렀다.

마치 버림받은 강아지 같은 모습에 레슬리는 고민에 빠졌다. 시선만 돌려 방을 바라보자 하녀들은 방을 정리하느라 부산을 떨고 있었다.

아무도 안 보고 있다는 걸 확인한 레슬리는 살짝 발을 들어 콘라드의 뺨에 키스했다.

“이걸로 참아요, 라드.”

작게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퍼졌다. 약혼자고 내일은 결혼식이었지만, 어쩐지 아직 다른 사람들 앞에서 애정 표현을 하는 건 익숙하지가 않았다.

뺨이 달아오르는 게 느껴져 레슬리는 손을 부채 삼아 흔들었다. 뒤에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부끄러워하는 모습에 콘라드는 웃으면서 팔을 내밀었다. 정중한 자세였다.

“아쉽지만 그럼 내려갈까요?”

“네, 좋아요.”

내민 손 위에 레슬리가 손을 올리자 탄탄한 팔이 위태로움 없이 안전하게 작은 손을 잡았다. 나란히 선 두 사람은 한숨이 저절로 새어 나올 정도로 완벽한 한 쌍이었다.

긴 계단을 내려가 파티를 위한 홀 입구 앞에 서자, 집사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부모님과 오라버니들은?”

“모두 안에 계십니다. 다른 손님들도 전부 입장하셨습니다.”

주인공이 나올 차례라는 뜻이었다. 레슬리는 크게 숨을 한 번 들이쉬었다. 두 오라버니는 몰라도 어머니와 아버지는 오랜만에 만나는 자리였다.

조금 긴장이 되어 숨을 정리하는데 콘라드와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콘라드는 자동으로 레슬리를 보며 웃었다. 애정이 담긴 눈빛에 어쩐지 안심이 되었다.

“열도록.”

레슬리가 정면을 바라보며 말하자 집사가 손짓했고 거대한 문을 잡고 있던 두 하인이 빠르게 움직였다. 기름을 먹여 부드러운 거대한 문은 소리도 없이 열렸고 문이 열림과 동시에 환한 빛과 함성, 악단의 연주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사람들의 시선은 당연하였다.

레슬리와 콘라드가 홀 안으로 한 발 내딛자, 이미 홀 안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달려와 레슬리 앞에서 인사를 건넸다. 레슬리와 콘라드는 미소와 함께 축하에 화답했다.

“세이아나 공작님.”

우직한 목소리와 함께 레슬리와 인사를 나누던 두 사람이 빠르게 앞에서 물러났다. 목소리의 주인은 셀바토르 공작인 베스라온이었다.

린체의 기사단 제복이 아닌 정복에 셀바토르 공작가의 문양이 새겨진 망토를 차려입은 베스라온이 웃으면서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레슬리는 정중히 드레스 자락을 잡고 인사를 했다.

“셀바토르 공작님, 바쁘신 와중에 이렇게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축하해야 할 일이니 당연히 와야지요.”

그 인사를 끝으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침묵은 웃음소리로 깨어졌다. 레슬리는 환하게 웃으며 베스라온에게 다가갔다. 라일락색 눈동자가 반가움과 행복함으로 반짝거렸다.

“오라버니, 와 주셔서 감사해요. 일도 많으실 텐데.”

“당연히 와야지. 일이 중요한 게 아니잖니. 우리 귀여운 동생.”

아셀라가 공작 위에서 내려오고 셀바토르 공작이 된 베스라온은 레슬리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그래서 결혼식은 몰라도 오늘은 못 오시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역시 기우였다.

그런 제 동생이 귀여운지 베스라온은 습관적으로 레슬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다가 큼큼, 헛기침하며 다시 손을 내렸다.

“선물은 저택 밖에 있는 마차에 있단다. 너무 많아서 한꺼번에 나르기가 힘들 테니 집사에게 말해 손을 빌려주마.”

도대체 얼마나 많은 선물을 가져왔기에 세이아나 공작가의 사용인들로는 다 나르기 힘들 정도라는 걸까. 가장 큰 방을 비워 놔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레슬리는 배시시 웃었다.

그런 레슬리에게 다가온 두 번째 사람은 루엔티였다.

“레슬리, 우리 막내!”

덧니가 보일 정도로 환하게 웃는 루엔티 역시 깊은 바다가 떠오르는 짙푸른 색의 정복을 입고 있었다. 머리는 깔끔하게 뒤로 넘겼고 긴 머리는 어깨에 걸쳐져 있었다.

얼굴에는 동그란 외알 안경이 달려 있었는데 백금과 자잘한 루비가 달린 안경 줄이 샹들리에에서 쏟아지는 빛을 반사했다. 레슬리가 얼마 전 선물한 안경 줄이었다. 그걸 자랑하듯 당당하게 걸어오던 루엔티가 우뚝 걸음을 멈췄다.

“콘라드…….”

철천지원수를 보는 듯한 목소리였다. 루엔티가 매섭게 콘라드를 노려보았지만, 오랫동안 그와 친분을 유지했던 콘라드는 무서움 따위 모르겠다는 얼굴로 환하게 웃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루엔티 님.”

그런데 미소와 상냥한 인사가 불을 붙인 모양이었다. 어느새 루엔티의 덧니는 사라졌었다. 두 사람 사이에서 보이지 않는 불꽃이 튀었다.

레슬리는 튀겨지는 불꽃보다 조금 밑에서, 당황한 듯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한두 번의 일은 아니었다. 루엔티는 콘라드를 다름 아닌 자신의 손으로 공작저에 데려왔다는 걸 분통 터져 했으니까. 거기다 최근엔.

‘키가 비슷해졌군요.’

키마저 따라잡혔다. 루엔티도 성인이 된 후로도 부쩍 컸지만, 콘라드도 무섭게 큰 쾌거였다. 레슬리는 안타깝게도 자라지 않았다.

자신을 무섭게 노려보는 루엔티를 보다가 콘라드가 눈가를 접으며 살포시 웃었다.

“예쁘게 봐주십시오, 마법사님. 슈야랑 결혼해 내일 세이아나가 되는 저니까요.”

일부러 한 말이었다. 루엔티가 열 받으라고 작정하고 한 말이었다. 루엔티가 이를 가는 게 들렸고 다시 콘라드가 웃음을 터트렸다.

어릴 적에는 적당히 받아 주고 넘어갔었는데 어느새 콘라드가 루엔티를 놀리고 있었다. 루엔티 역시 쉽게 당해 주진 않았지만, 레슬리와 관련된 일이라면 콘라드의 승리였다.

“레슬리, 우리 딸.”

콘라드를 향해 이를 갈며 협박을 하려던 루엔티도 멈추었고, 레슬리와 이야기를 하던 베스라온도 입을 다물었다. 때마침 악단의 연주가 끝나며 정적이 내려앉았다.

또각, 힐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를 내며 장신의 여자가 걸어왔다. 그러자 사람들이 앞다투어 길을 내어 주었다. 선망의 눈길이 발끝에 따라붙었다.

“어머니!”

우아하게 그리고 어른스럽게를 외치던 레슬리의 다짐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레슬리의 눈이 더없이 빛났다.

한 손에 술잔을 든 여자는 셀바토르 전 공작인 아셀라였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보다는 편해 보이는 긴 드레스 차림이었으나, 자세에서부터 우아함이 넘쳐흘러 부족함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의 뒤에는 남편인 사이레인이 서 있었다.

“어머니, 아버지!”

레슬리가 빠르게 걸어 아셀라의 손을 잡았다. 늪지대가 떠오르는 진한 녹색 눈동자에 반가움이 떠올랐다.

“오랜만이구나, 우리 딸.”

“레슬리, 아버지도 왔단다. 아버지도.”

아셀라의 뒤에 서 있던 사이레인이 앞으로 나섰다. 두 사람의 복장은 부부라는 걸 뽐내기 위해서인지 비슷했다. 편안하지만 격식은 부족함이 없었고, 가문의 인장이나 위치를 나타내는 문양 따위 박혀 있지 않았다. 그러나 존재 자체만으로도 고귀한 푸른 피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도 저렇게 되어야 하는데.’

“우리 딸이 오랜만에 아버지를 만났는데 왜 표정이 안 좋을까.”

“너무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서…….”

사실 그렇게 오랜만은 아니었다. 아셀라가 공작의 자리를 베스라온에게 넘겨주고, 레슬리가 독립한 지는 반 달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게 얼마나 길었던가.

레슬리가 작게 코를 훌쩍이자 순간 사이레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황제를 죽이고 신을 죽이는 대역죄를 저질렀다고 해도 저런 얼굴을 볼 수는 없으리란 확신이 들 정도였다.

굳어 버린 사이레인을 뒤로하고 아셀라가 앞으로 나섰다.

“레슬리, 너는 잘해 왔잖니.”

혹시라도 화장이 망가질까 쓰다듬는 손길은 더 없이 조심스러웠고 애정이 느껴졌다. 아셀라는 주름진 얼굴로 웃었다.

“내가 아예 떠나는 것도 아닌데.”

“그래도 너무 쓸쓸해요.”

독립을 잘 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부모님의 얼굴을 보자마자 레슬리는 품 안에 안겨 엉엉 울고 싶었다. 조금이라도 어렸다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 눈가가 붉어진 것과 목소리가 조금 가라앉은 것 외에는 큰 변화는 없었다.

그 모습을 본 아셀라가 입꼬리를 올렸다.

“울 줄 알았는데 울지는 않는구나.”

“저는 더는 셀바토르 공녀가 아니라 세이아나 공작이니까요.”

레슬리는 옅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세이아나 공작이 되면서 레슬리가 책임져야 하는 사람들은 한둘이 아니었고 부모님의 기대에 답하고 싶었으니까.

열두 살 적, 콘라드는 레슬리에게 어리니 더 크게 울어도 된다고 한 적이 있었다. 이제 레슬리는 그 말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나이와 위치가 되었다.

“다 컸어.”

아셀라는 레슬리의 이마에 짧게 키스했다. 마치 축복을 내리는 듯한 모습이었다.

“운다면 세이아나 공작의 자문가로 잠시 머무를까 했더니, 안 그래도 되겠네. 그렇지, 사이?”

살짝 장난이 섞인 목소리였다. 하지만 레슬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시선이 불안하게 움직이다가 슬그머니 손을 들어 아셀라의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그, 그건 긍정적으로 생각해 주세요, 어머니. 어머니가 저택에 계시면 저도 좋고 아직 모든 일에 전부 적응한 건 아니라서…….”

용기를 내어 그렇게 말하는 뺨은 붉어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아셀라와 사이레인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때 입구 쪽이 소란스러워졌다.

“사이레인, 아셀라!”

환하게 두 사람의 이름을 외치며 들어온 사람은 피스토레였다. 그 옆에는 아르트엘과 콘스텐이 서 있었다. 환하게 웃으며 세 사람에게 걸어오는 피스토레는 예전보다 조금 더 주름진 얼굴이었다.

“얼굴이 좋아졌군. 역시 공작령으로 내려가 쉬는 게 좋은 모양이지? 잠도 제대로 자고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피스토레는 흰머리가 섞인 검은 머리를 쓸어 올렸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난 두 사람의 얼굴에는 미소가 완연했다.

“나도 어서 내려가 편안히 쉬고 싶은데 말이지.”

“황위는 쉽게 물려주기가 힘들어서 안타깝군, 피스토레.”

원래 황위는 황제의 죽음과 함께 이뤄졌다. 현 황제가 숨을 거둬야 황태자가 황위에 올랐지만, 피스토레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가 원하는 건 편안한 노후였다. 오랜 친구가 예전에 자신에게 말한 대로 무덤에서나 쉴 생각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이제 곧이야.”

피스토레는 웃었다. 아르트엘이 고개를 끄덕였고, 옆에 서 있는 콘스텐은 조금 긴장된다는 듯 제 소맷자락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어느새 레슬리나 콘라드 못지않게 훌쩍 큰 콘스텐은 아셀라의 시선에 마치 포식자 앞에 선 개구리처럼 침을 꼴깍 삼켰다. 이제 황실의 일에 많이 적응된 그도 아셀라는 무서웠다.

그런 콘스텐을 보며 아셀라는 느긋이 입꼬리를 올렸다.

“기대되는군.”

“괜찮다면 수도에 몇 달 더 머무르게. 못해도 내년에는 큰일이 하나 생길 테니까.”

내년 봄쯤에 콘스텐을 황위에 올리겠다는 소리에 아셀라는 잠시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몇 달이나 남았으니 잠시 자고 와도 충분하겠지.”

“잠을 몇 달이나 자게? 그러지 말고 황궁에 좀 머물러 줘. 나 심심하단 말이지.”

아르트엘이 조금 뾰로통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아셀라는 고개를 저었다.

꼭 필요한 일이 아니라면 굳이 수도에 올라와 머리 아픈 일을 다시 하고 싶진 않았다. 남편이랑 같이 사는, 복잡한 것 없는 지금의 생활이 마음에 들었으니까.

“그럼 오늘만큼은 나랑 떠들어 주는 거야.”

아르트엘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아셀라의 옆에 서서 팔짱을 끼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네 명의 오랜 친구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레슬리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와인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성공이야.’

사람들의 말에 대답하며 레슬리는 우아하게 붉은 와인을 입에 머금었다.

쓰다. 미간에 주름이 팍 잡히려는 걸 간신히 피고 대신 미소 지었다. 이 정도는 언제나 마신다는 듯, 여유로운 웃음이었다.

“세이아나 공작님은 언제 봐도 우아하시군요.”

그 한마디! 얼마나 듣고 싶었던 말이었던가. 레슬리의 얼굴에 꽃이 폈다. 하지만 애써 표정을 갈무리한 레슬리는 눈웃음으로 화답했다. 콘라드가 옆에서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곡이 여러 번 바뀌었다. 천천히 흐르는 곡이기도 했고 경쾌한 춤곡이기도 했다. 레슬리는 그간 콘라드와 두 번, 베스라온과 루엔티 그리고 사이레인과 한 번 춤을 췄다. 거기에 아르트엘과도 한 번 춤을 추고 나니 조금 기력이 빠졌다. 무엇보다.

‘……아프네.’

레슬리는 눈을 찡그렸다.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면 괜찮을 텐데, 주최자로 계속 이리저리 불려 다니고 사람들의 춤을 전부 거절할 수 없어 계속 춤을 췄더니 슬슬 뒤꿈치가 아려 오기 시작했다.

방을 나서기 전, 마델이 천을 덧대 줬는데도 이 정도라니. 레슬리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잠시라도 앉아 볼까.

“슈야?”

레슬리의 옆에서 그녀를 에스코트하고 있던 콘라드가 그런 레슬리의 변화를 알아챘다.

“어디 불편하신가요?”

“음, 아니에요.”

레슬리는 괜찮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미간에 잡힌 희미한 주름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걸 보는 콘라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피곤하다면 잠시 쉬다 오는 건 어떨까요?”

“주최자가 자리를 비울 수는 없잖아요. 나는 괜찮아요.”

그렇게 말하며 레슬리는 콘라드와 팔짱을 낀 팔에 조금 힘을 주더니 툭, 하고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러고는 시선만 올려 눈을 마주치더니 웃어 보였다. 그런 레슬리의 모습에 콘라드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제가 혼자 있어도 되는데…….”

“불안해서 안 돼요. 다들 라드만 보면 눈을 반짝이잖아요. 아, 저기 베이본 백작님이 계시네요.”

어서 같이 가 봐요, 이번에 거래를 새로 시작한 분이잖아요. 그렇게 말하며 레슬리는 콘라드의 팔을 이끌었다.

순순히 레슬리에게 끌려다니면서 콘라드가 입꼬리를 올렸다. 콘라드는 지금 자신의 약혼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았으니까. 덤으로 왜 미간에 주름이 잡혔는지도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슈야, 목이 마르지 않나요?”

이번에 새로 거래를 시작한 베이본 백작 부부와 한창 상단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데 콘라드가 조금 허리를 숙여 레슬리의 귓가에 속살거렸다. 레슬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말끝에 웃음이 묻어 나왔다.

“샴페인을 가져올 테니, 잠시만 기다려요.”

그렇게 잠시 콘라드가 자리를 비웠고 이야기를 나누는 레슬리의 주변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다가왔다. 다들 레슬리의 눈에 들기 위해 안달이 나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레슬리는 공작이었고, 셀바토르 전 공작과 현 공작의 사랑을 받고 있었으며, 황제조차 아끼는 사람이었으니까.

“공작님, 결혼을 축하드립니다. 비록 내일이긴 하지만 미리 선물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저희 영토에서 나는 특산물을 가져왔습니다. 부디 입맛에 맞으셨으면…….”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여러 가지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다. 콘라드가 옆에서 손을 잡아 주었으면 좋았으련만, 그렇게 생각하며 레슬리는 웃었다.

“감사합니다. 선물은 부디 집사에게 건네주세요.”

“주엘로 영토의 특산품이라면 귀한 물고기로군요. 꼭 한번 먹어 보고 싶던 것인데 감사드립니다.”

한 명, 한 명 차근히 대답을 해 주며 레슬리는 슬그머니 시선으로 콘라드를 찾았다. 샴페인을 가지러 간 것치고는 시간이 좀 걸리고 있었다. 그러다 이내 시선마저 몰려든 사람들에게 막혀 버렸다.

숨을 작게 삼킨 레슬리가 다시 대화에 임하려는데.

“실례합니다만.”

누군가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콘스텐이었다. 그는 눈을 접으며 사람들을 보며 웃었다.

“저도 대화에 끼어도 괜찮을까요?”

콘스텐의 말에 귀족들의 고개가 위아래로 격하게 흔들렸다.

피스토레가 가진 온화한 성격에 아르트엘의 강단 있는 결정력을 물려받은 콘스텐은 귀족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었다. 거기다 미혼.

사람들의 눈이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보다 더욱 빛이 났다.

“그럼요,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콘스텐에게 쏠렸다. 갑작스러운 등장에 틈이 생겼다.

그사이 사람들 틈 사이에서 튀어나온 팔이 레슬리를 살짝 잡았다. 놀라 고개를 돌리자 콘라드가 웃으면서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댔다. 황금색 눈동자가 웃음을 머금고 휘었다.

레슬리는 순순히 콘라드의 손에 이끌려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갔다. 화려한 복장을 한 사람들과 눈이 부실 정도로 밝은 샹들리에, 수도에서 제일 인기가 좋은 악단의 연주 소리가 두 사람을 스쳐 지나갔다.

“샴페인을 가지고 온다더니요?”

“음료보다는 다른 게 더 급하신 것 같아서요.”

그렇게 말하던 콘라드는 무도회장을 나서 복도에 들어서자마자 웃으면서 레슬리를 번쩍 안아 들었다. 레슬리의 눈이 커짐과 동시에 문을 잡고 있던 두 하인의 눈도 커다래졌다.

“닫아라.”

그러든 말든 하인들에게 문을 닫을 것을 명령한 콘라드가 재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불시에 몸이 안긴 레슬리는 콘라드의 목에 팔을 둘렀다.

“어, 어디를 가는 거예요? 자리를 오래 비우면 안 되는데.”

시선은 아직 무도회장 쪽을 향해 있었다. 저기에는 부모님과 두 오라버니와 친구들과 황제와 황후, 황태자까지 있는데 주최자인 자신이 자리를 비우다니.

“잠시 자리를 비우는 건 티가 나지 않습니다. 거기다 콘스텐을 가져다 놨으니 알아서 잘 처신하겠지요.”

미래의 황제이자 현 황태자를 아무렇게나 이용하는 콘라드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 그런 레슬리를 내려다보던 콘라드가 뺨에 입을 맞추자 웃음소리가 조금 더 오래 흘러나왔다.

그렇게 콘라드가 향한 곳은 정원이었다. 어느새 어둑해진 정원이었지만 여기저기에서 마법구가 빛을 발하고 있는 데다가 달빛이 환해 그렇게 무섭지는 않았다.

사람들이 있을 법한 산책로가 아닌 정원 한구석으로 간 콘라드는 자신의 망토를 평평한 바위 위에 깔더니 그 위에 조심스럽게 레슬리를 앉혔다.

“라드?”

그리고 그 앞에 무릎을 꿇더니 조심스러운 손길로 신발을 벗겼다. 레슬리의 눈이 동그래졌다가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고 콘라드의 미간에는 주름이 잡혔다.

위험할 정도로 높고 아름다운 힐 밑에서 나타난 건 상처 입은 하얀 발이었으니까. 마델이 덧대어 준 천에는 이미 피가 묻어 있었다.

“이 발로 여태까지 걸어 다니신 겁니까?”

“그게…… 음,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콘라드의 말에 레슬리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발의 상태는 더 심했다.

잠시 그런 레슬리를 올려다보다 콘라드는 자신의 무릎 위에 조심스레 레슬리의 발을 올렸고 이내 황금빛 성력이 발을 감싸 안았다.

따스하고 안심이 되는 힘. 레슬리는 눈을 깜빡였다. 강력한 성력에 레슬리의 눈동자도 잠시나마 황금색으로 물들었다.

“됐습니다.”

콘라드가 손을 떼자 거기에는 언제 상처를 입었냐는 듯 매끄러운 발이 나타났다. 언제 봐도 신기한 힘에 레슬리는 발을 내려다보았다.

“고마워요, 라드.”

“고맙긴요.”

그렇게 대답한 콘라드가 레슬리의 신발을 풀숲으로 던져 버렸다. 신발을 다시 신어야 할 테니 마델이 덧대 준 천을 집어 들던 레슬리가 입을 벌렸다. 자신도 저걸 다시 신을까 고민을 하긴 했지만 던져 버리다니.

레슬리가 당황해 뭐라고 하기도 전에 발에 다시 콘라드의 손이 닿았다.

“……?”

고개를 살짝 숙이자 발목을 잡은 콘라드가 조심스럽게 레슬리의 발에 신발을 신기고 있었다. 아까 던져 버린 신발이 아닌 다른 신발이었다. 힐은 높지 않았지만 폭신하고 편안한 신발. 언제 가져온 걸까.

“하인을 시켜 가져오게 했습니다. 마델이 골랐다고 하더군요.”

신발을 신긴 콘라드가 긴 손가락으로 발목에 리본을 고정해 주며 말을 이었다.

“무리했어요, 슈야. 그 어떤 자리라 할지라도 몸을 망치면 안 됩니다. 슈야가 다치는 걸 셀바토르 전 공작님이나 다른 분들이 좋아할 리가 없잖아요.”

레슬리는 콘라드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아쉬움에 발을 쭉 뻗고 신발을 바라보자 콘라드가 눈을 가늘게 떴다. 레슬리는 황급히 드레스 자락을 정리해 발을 가리고 콘라드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언제부터 안 거예요? 아까 물어볼 때 알았어요?”

일부러 말을 돌리는 레슬리를 보며 작게 한숨 쉰 콘라드는 시선을 레슬리에게 맞춰 주었다.

“사실 그 전보다 일찍 알긴 했어요. 그런데 신발이 좀 늦어서.”

“그랬구나.”

대화가 끊기자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종소리에 깨졌다. 묵직한 종소리에 두 사람의 시선이 같은 곳으로 향했다.

“하루가 지났네요.”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였다. 레슬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콘라드가 씩 웃으면서 레슬리를 올려다보았다. 아직도 레슬리는 바위 위에 앉아 있었고, 콘라드는 그 앞에 무릎을 꿇은 상태였다.

“오늘이 우리 결혼식 날이네요.”

“그, 그렇네요.”

어쩐지 얼굴이 가까워졌고 레슬리는 부끄러움에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시선은 피하지 않았다. 그러자 콘라드가 화사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길었네요. 신학 선생에서 친구로, 그리고 약혼자에서 이제 남편이니까요.”

콘라드가 몸을 조금 일으켜 허리를 굽히자 아까보다 얼굴이 더 가까워졌다. 레슬리는 시선을 내렸다.

“평범한…… 축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런가요? 저는 길었어요. 슈야에게서 처음 친구라고 확정받았을 때 얼마나 가슴이 아프던지.”

레슬리 슈야 셀바토르, 축복의 이름을 받고 대기도회 때 콘라드를 만났을 때 이야기였다.

“영원히 안 되는 건가 했다니까요. 단것도 열심히 먹었는데. 그러고 보니 슈야는 내가 단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늦게 알았죠.”

“그건……!”

라드가 너무 꼭꼭 숨긴 탓이었잖아요. 그렇게 말하고 싶어 고개를 들자 시선이 마주쳤다.

어느새 숨이 얽히고 속눈썹이 깜빡이는 게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레슬리를 바라보는 태양 같은 눈 속에 놀라 눈을 크게 뜬 레슬리의 모습이 그대로 비쳤고, 눈동자는 그대로 휘었다.

“슈야.”

따스한 음색과 함께 입술에 따듯한 것이 닿았다.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지만, 싫지 않았다.

레슬리가 고개를 들자 입술이 조금 더 깊게 맞물렸다.

“기대되네요.”

간질간질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직 입술이 맞닿은 채라 레슬리는 간지러움에 몸을 작게 떨었다.

“조금 후에 우리가 신 앞에 영원을 맹세하고 계속 같이 있을 수 있다는 게 기대돼요.”

어릴 때부터 평범한 삶은 아니었으니 그 뒤로도 평범한 삶은 아닐 것이다. 높은 위치, 막중한 책임감에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모여 있으니까.

하지만 레슬리는 괜찮을 거라고 확신했다. 누구보다 소중한 사람들이 곁에 있어 주지 않는가. 눈앞에 있는 콘라드는 자신이 죽을 때까지 옆에 있어 줄 것이다.

“응, 나도 기대돼요.”

레슬리가 웃으며 다시 콘라드의 입에 키스했다. 어느새 길어진 나무의 그림자가 두 사람을 감추었다.

***

결혼식은 화려했다. 사람들이 보낸 꽃과 꽃잎이 청명한 하늘을 수놓았고, 녹음이 가득한 정원에는 긴 붉은 카펫이 깔렸다. 그 양옆으로는 수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하얀 드레스를 입은 레슬리는 천천히 그 카펫 위를 걸어갔다. 조금 굽이 낮은 신발은 편안했고 태양 밑에서 빛나는 은발 위에는 티아라와 면사포가 씌워져 있었다.

천천히 카펫 위를 걸어가며 레슬리는 익숙한 얼굴들을 바라보았다. 아셀라와 사이레인, 베스라온과 루엔티, 거기에 제나와 레슬리가 어릴 적부터 모셔왔던 셀바토르 공작가의 사용인들도 와 있었다. 간신히 은퇴 후 타샤레아 도시에서 느긋한 생활을 즐기던 자일로까지 와 있었다.

한쪽에서는 피스토레와 아르트엘, 콘스텐, 지금은 뒤로 물러난 렌티우스와 테센트루아 성기사단이 박수를 보내고 있었고, 조금 더 걷자 테펜텔과 친구가 된 바인이 레슬리를 바라보며 환호하고 있었다.

그 옆에는 셀리스와 에펜타니 백작 부부 그리고 틸레이얼 부인이 앉아 있었는데, 셀리스와 틸레이얼 부인의 푸른 눈에서 눈물이 뚝뚝 흐르고 있었다.

콘라드의 어머니인 스웰라 대공비와 동생인 프리트도 앉아 있었다. 어느새 부쩍 큰 프리트는 자신의 형을 보며 눈을 빛내고 있었다.

고개를 조금 돌리자, 하르트와 레소 반트 경과 셀바토르 공작가의 기사들이 전부 서 있었다. 셀바토르 공작저가 텅텅 비었겠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레슬리는 웃었고 면사포가 살며시 흔들렸다. 긴 카펫의 끝에는.

“레슬리.”

콘라드가 서 있었다. 어제와는 다른 새하얀 정복을 입은 콘라드가 내민 손을 레슬리가 붙잡자 얼굴에 웃음이 퍼져 나갔다.

두 사람이 주례 앞에 서자 주례가 시작되었다.

잠시 후, 오래전부터 공들여 준비한 결혼반지가 두 사람에게 건네졌고 콘라드가 조심스럽게 레슬리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웠다.

레슬리의 차례였다. 레슬리는 조금 떨리는 손으로 콘라드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웠고 나이가 지긋한 주례는 웃으면서 식의 끝을 알렸다.

“이로써 두 사람은 부부가 되었음을 알려 드립니다.”

앉아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소리가 터져 나왔다. 반은 환호였고 반은 울음이었으며 불만이 적게나마 섞여 있었다.

“내 사랑, 내 아내.”

면사포를 걷은 콘라드가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내 사랑, 내 아내. 영원토록 변하지 않을 말이었다.

내 사랑, 내 남편. 그렇게 화답하는 레슬리의 뺨을 콘라드의 손이 조심스럽게 쓸었다. 거기에는 레슬리가 낀 것과 똑같은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영원히 함께해요.”

“네, 영원히요.”

대답과 동시에 서로의 입술이 맞닿았다. 환호 소리와 함께 꽃잎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화사하고 평범한 한 봄날이었다.

-The End

괴물 공작가의 계약 공녀 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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