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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럭!”
금발의 성기사가 기침할 때마다 피가 흘러나왔다. 그를 부축하며 아셀라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 저택 전부가 아니, 이 요새 전부가 함정이었다. 거기다 어디서부터 함정이 시작됐는지 알기 힘들 정도로 교묘하게 꾸며져 있었다.
거대한 저택 안에서 유일하게 말소리가 나는 방이 있어 확인했더니 방에는 타스가 아닌 다른 사람이 있었다. 평소 타스가 입던 옷을 입고 그와 비슷하게 꾸민 남자는 갑자기 쳐들어온 밤손님을 보고는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그대로 제 몸을 희생해 불을 질렀다.
빠져나가려고 하는 순간 불이 난 방으로 에타이들이 들어왔고, 결국 이 지경까지 오고 말았다.
타스의 실수인지 아니면 또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들을 이끄는 대장이 없어 쉽게 처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에타이들을 처리하는 속도보다 저택이 불길에 휩쓸리는 속도가 조금 더 빨랐고, 아셀라와 다른 사람들은 저택에 갇힌 신세가 되고 말았다.
아셀라는 속으로 작게 혀를 찼다. 여기까지 들어오면서 르카디우스 측 그 누구도 눈치를 채지 못했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이 공격을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했던가. 많은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성공률을 조금이라도 올리기 위해 얼마나 고민했던가. 그런데도 함정에 빠지고 말았다.
그건 단 하나를 의미했다.
배신자는 실제로 존재했다. 그것도 자신에게 영향을 미칠 정도로 가까운 위치에.
‘배신자는 멀리 있던 게 아니었나?’
아셀라는 배신자가 있다는 사실을 짐작했었다. 그러나 이 전쟁터에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간 에타이들이 보여 준 행동이나 그녀의 귀로 들어온 정보들이 그렇게 말해 줬으니까. 배신자는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 마치 구경하듯 서 있을 거라고.
하지만 아니었다.
잘못된 생각의 결과는 참혹했고, 이건 명백히 자신의 잘못이었다.
아셀라는 자꾸만 쓰러지려는 남자를 붙잡고 발걸음을 옮겼다. 피스토레와 나머지 사람들을 만나 이 저택을 탈출해야 했다.
‘레이셀은 어떻게 되었지?’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건네졌던 쪽지를 아셀라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의 보고에 따르면 에타이들은 아무 문제없이 우리의 계획대로 움직이고 있다고 쓰여 있었다.
레이셀은 아주 오랫동안 셀바토르 가문에 대대로 종사해 왔던 가문의 장남이었다. 죽으면 죽었지 자신을 배신할 사람은 아니었다.
……죽은 걸까. 아셀라는 이를 갈았다. 그것도 배신자가 한 일일까.
머리를 굴리는데, 옆에서 미약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죄, 죄송합니다. 셀바토르 경…….”
피를 줄줄 흘리며 남자가 거듭 고개를 숙였다. 성력을 쓰느라 빛나는 그의 손은 피가 흐르는 복부를 감싸 쥐고 있었다. 하지만 피는 멈추지 않고 계속 흘러내렸다.
“독인가? 성력이 영 힘을 못 쓰네.”
몰려드는 에타이들을 처리한 테펜텔이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그럴지도. 아니면 마법일지도 모르지.”
“테센트루아 성기사단이 같이 올 걸 예상하고 있었으니 분명 성력을 대비해 뭔가를 해 놨겠지.”
성력을 쏟아붓고 있는데도 성기사의 얼굴은 점점 창백해지고 있었다. 독과 마법, 두 개 다일지도 몰랐다. 실제로 불이 치솟고 있는 이 방 안에서 미약한 마력이 느껴졌으니까.
“일단 저를 두고 황태자 전하께 먼저……. 쿨럭!”
입고 있는 옷이 붉게 물들 정도로 남자는 피를 토했다. 손과 복부를 감싸던 빛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정신 차려, 경. 나는 엘로스에게 잔소리를 듣고 싶지 않다고.”
아셀라는 혹시 몰라 지참한 물약을 입에 넣어 주며 중얼거렸다.
엘로스는 자신이 오지 못하는 대신 아끼는 부하들을 참여시켰다. 엘로스가 제 사람을 얼마나 아끼는지 잘 알고 있기에 아셀라는 낙오자 없이 이 요새를 탈출할 생각이었다.
“있지, 아셀라.”
저택에 더 에타이들이 남아 있지 않다는 걸 확인한 테펜텔이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성기사의 부축을 도우며 그녀는 아셀라를 바라보았다.
“아까 그 가짜 놈 말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이 사람을 먼저 노렸지?”
타스와 비슷한 외양에 타스의 옷을 입고 있던 남자는 마치 세 사람을 전부 노린 듯했지만, 모두 알고 있었다. 그의 망연자실한 시선은 가장 왼편에 서 있던 성기사에게 닿아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가 가장 큰 피해를 보았다.
“아무나 공격했던 거라면 정중앙에 있던 네가 피해가 컸을 텐데 말이야.”
테펜텔의 말에 아셀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노린 이유는 단순했다.
“성기사가 있으면 귀찮아지니까.”
성력을 가지고 있는 이가 있다면 그 사람을 먼저 죽이는 게 편한 길이었다. 만일 아셀라가 반대의 상황이었더라면 그녀 역시 성력을 가진 이부터 노렸을 게 분명했다.
걸리는 게 있다면, 지금 모두의 복장은 특이점이 없는 평범한 복장이라는 것. 그런데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이 정확히 한 명을 노렸다는 것이었다.
테센트루아 성기사단의 문양도 없는데 어떻게 그는 정확히 성기사를 노렸을까? 거기다 한 명만 저택에 들어왔음을 어떻게 알았을까.
“…….”
테펜텔의 생각도 거기까지 미쳤는지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아셀라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어서 나가자고. 여기 연기가 너무 매워. 피스토레 쪽도 안전하지 않을 테고.”
테펜텔은 남자를 부축하는 팔에 힘을 주더니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피스토레는 밖에서 나머지 사람들과 함께 도주로 차단을 맡고 있었다. 그들은 경험도, 실력도 출중한 자들이었다. 거기에 레너드 용병단도 있었으나 현 상황이 이런 만큼 걱정이 안 될 수 없었다.
“그래, 어서 나가자고.”
해야 할 일이 점점 불어나고 있었다. 타스를 잡아야 했고, 요새를 정리해야 했고, 사이를 만나야 했고, 배신자를 찾아 처단해야 했다.
“와, 이거 봐라.”
두 사람의 걱정은 그대로 적중했다.
피스토레는 지금 도주하는 타스와 포르 앞에 서 있었다. 수십의 에타이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네 명은 눈을 가늘게 떴다. 설마, 피스토레의 말이 맞을 줄이야.
‘저쪽으로 가 보지.’
타스의 저택으로부터 라니스 숲으로 향하는 길은 여러 개가 있었다.
처음에 피스토레와 다른 이들은 레이셀이 알려 준 가장 안쪽 길에 서 있었으나, 피스토레가 한 곳을 가리켰다. 그가 말하는 곳은 가장 넓고 사방이 노출되어 있는 큰 길이었다. 아무리 봐도 도망치는 자가 선택하기엔 적합해 보이지 않았다.
‘이 길은 레이셀 경이 알려 주신 길입니다, 황태자 전하.’
한 린체 기사가 어색한 웃음과 함께 그에게 공손히 말을 전했다. 지금 지키고 있는 길이 가장 타스와 부딪칠 가능성이 크니 이대로 있자는 뜻이었다.
평소였더라면 그대로 물러났을 피스토레는 그에게 시선조차 돌리지 않은 채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저 길이네. 저 길이 맞아.’
‘……?’
‘타스 그자는 저 길을 선택할 거야. 정 안 되면 나하고 몇 명만 저 길로 가 보겠네. 안 되겠나?’
그 말에 린체 기사 둘과 성기사가 시선을 교환했다. ‘황태자 전하가 원하면 해 드려라.’는 아셀라의 말도 있었기에 그는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지금이 되었다. 날카로운 신호 소리에 달려가자 타스를 막고 있는 피스토레가 보였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타스와 포르, 그리고 수십의 에타이들에게 검을 겨누며 린체의 기사는 조용히 피스토레에게 물었다. 그러자 피스토레는 시선을 타스에게 고정한 채 대답했다.
“여태까지 들어 본 바로는 저 타스라는 사람은 허영심이 많았네.”
위험에 빠지자 혈육을 던지고 도망간 남자, 스스로를 왕이라 칭했던 남자.
그리고 피스토레가 요새에 들어와 본 것은 태풍이 오면 쓸려 나갈 듯 낡은 집들 사이에 우뚝 서 있는 고급스러운 저택이었다.
그 저택을 보고 피스토레는 직감했다. 혈육조차 중요하지 않은 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스스로의 허영심일지도 모르겠다고. 그렇다면 저런 좁은 길, 흙탕물이 가득한 길로는 도망가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럼 어디일까, 어느 길을 그는 선택할까. 의문을 가지고 둘러보던 피스토레의 눈에 들어온 것은 이 길이었다. 가장 널찍하고 정비가 잘된 길.
실제로 타스와 포르는 깔끔한 복장에 말까지 타고 있었다. 그 뒤에는 재화를 든 상자를 옮기는 이들도 있었다. 절대로 도망가는 이들의 모습은 아니었다.
“신기하네, 저쪽에 함정이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지?”
포르가 자신을 막은 이들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찍어 맞춘 걸 수도 있지.”
타스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갑자기 나타난 이들이 신기하긴 했지만, 고작 열 명 정도였다. 그에 비교해 여기는 수십. 못 이길 싸움이 아니었다.
“처리해.”
무심하게 손을 들고는 타스와 포르는 말을 몰았다. 에타이들이 달려들었고, 그대로 두 사람은 도망가려는 듯 보였다.
안 돼. 모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대로 도망가게 내버려 두면 안 된다. 그걸 알고 있는 피스토레가 몰려드는 에타이들을 피하며 가까이에 있던 바위 위로 올라섰다. 그리고 자신의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높게 치켜들었다.
“나는 르카디우스 제국의 하나뿐인 황태자.”
그 말에 서로 엉켜 싸우던 르카디우스 측도, 에타이도, 그리고 무심하게 지나치던 타스와 포르도 전부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긴장과 공포로 덜덜 떨면서도 피스토레는 타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욕심이 많은 자여, 르카디우스 황가의 하나뿐인 핏줄이 탐나지는 않는가?”
그의 손에 들린 건 대대로 황족에게만 주어지는 르카디우스 제국의 황실 문양이 박힌 문장 패였다. 황금과 루비, 그리고 다이아몬드로 만들어진 패가 햇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났다. 가짜라면 절대로 가지고 있지 못할 진짜 황족을 위한 패.
그걸 본 타스가 눈을 크게 뜬 채 입을 열었다.
“잡아.”
“막아라!”
타스의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맨 앞에 서 있던 기사가 몰려드는 에타이들을 향해 검을 겨눴다.
기사들과 용병들이 막긴 했지만 수에서 밀리는지라 피스토레는 올라가 있던 바위에서 폴짝 뛰어내렸고, 뒤쪽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 나갔다. 사람들이 싸우는 소리가 순식간에 멀어졌다.
“도망가?”
“쫓아라!”
뒤에서 함성과 함께 발이 빠른 몇몇 남자들이 무서운 속도로 피스토레를 추격했다.
‘조금만 버티면!’
피스토레는 입술을 꽉 깨물고 뛰었다. 조금만 버티면 된다. 조금만 버티면 타스의 저택에 들어간 세 사람이 나올 것이고 사이레인도 합류할 테니까.
아셀라, 테펜텔, 사이레인……. 솔직히 이 셋 중 한 명만 와 준다면 문제없으리라. 그러니 자신이 할 일은 타스가 도망가지 못하게 막는 것이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를 때쯤, 한 놈이 지형을 이용해 피스토레의 바로 뒤에서 나타났다.
“내가 잡았다!”
남자는 신이 난 듯 피스토레를 향해 손을 뻗었고, 이내 비명 지르며 팔을 거뒀다.
“커헉!”
피스토레가 바짝 뒤로 따라붙은 놈을 향해 검을 휘둘러 공격했다. 마수와 싸운 경험이 없었다 뿐이지 어릴 적부터 대련 경험은 풍부했으니 이 정도는 문제없었다. 그간의 경험을 토대로 피스토레는 착실하게 남자를 몰아붙였다.
피스토레의 고운 외모에 속아 설마 그가 자신을 공격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못했던지 에타이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이 새끼가!”
다시 들어오는 공격을 피스토레는 받아쳤다. 그 푸른 시선은 에타이의 검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눈을 감지 말고 천천히, 그리고 차근하게. 겁을 먹지 말고! 피스토레는 작게 숨을 정리하며 에타이의 검을 받아 냈고 그대로 손목을 틀어 검을 쳐 냈다.
카앙! 날카로운 금속음이 울리고, 에타이는 찌르르 울리는 제 손목을 붙잡았다. 이 역시도 스승이 알려 준 방법이었다.
무기를 떨어트린 남자는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았다. 안도한 피스토레가 검 끝을 에타이의 목에 들이밀자 그는 사색이 되어 도망쳤다.
하지만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저 멀리서 다른 사람들이 피스토레를 쫓아 달려오고 있었으니까. 그중에는 타스도 있었다.
“저기 있다!”
한 사람이 피스토레를 발견하자, 타스는 언덕 위에서 멈춰 서 피스토레를 내려다보았다.
“황태자! 지금 잡히면 좋은 대우를 약속하지.”
개소리. 피스토레는 타스의 말을 가볍게 무시했다. 아무리 좋은 대우라고 해 봤자 잡히면 죽음이라는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무시하고 다시 도망치려는 피스토레의 발목을, 이어지는 타스의 말이 잡았다. 그사이 몇몇의 에타이들이 숲속을 삥 돌아 피스토레의 뒤로 접근하고 있었다.
“셀바토르가 올 때까지 시간을 끌 모양인데, 그게 가능할까? 덫에 걸린 쥐는 잡혀 죽는 게 순서야!”
역시 함정이었구나. 피스토레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타스를 노려보았다.
희망이 없는 건 아니었다. 아셀라와 테펜텔이 들어간 뒤로 꽤 시간이 흘렀고, 아셀라는 저택이 함정임을 알아챘을 가능성이 컸다. 그러니 바로 빠져나오겠지.
조금만 버티면 된다. 처음과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런 피스토레를 타스는 가소롭다는 듯 내려다보았다.
“조금만 기다리면 돼. 셀바토르가 와 줄 거야! 뭐,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황태자?”
피스토레를 조롱하듯 그의 목소리를 흉내 내자 주변에 있는 에타이들이 폭소를 일으켰다.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피스토레의 얼굴이 붉어졌고, 그의 눈초리는 더욱 매서워졌다.
“그럼 잠시 기다려 줄까. 곧 즐거운 일이 시작될 테니까.”
타스는 입꼬리를 올리며 어딘가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황태자, 너희만 질 좋은 미끼로 낚시를 하는 건 아니거든.”
질 좋은 미끼? 저도 모르게 그 단어를 입에 담으려는 순간 갑자기 커다란 소리와 함께 어디선가 불길이 치솟았다.
어디인지 찾아볼 필요도 없었다. 타스의 저택은 요새에서 가장 좋고,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으니까.
“드디어!”
이 자리에 있는 사람 중 놀란 건 피스토레 혼자였다. 저택의 주인인 타스는 기다렸다는 듯 환하게 웃었다. 그는 자신의 저택이 큰 소리를 내며 무너지는 걸 보더니 이내 고개를 돌려 피스토레를 바라보았다.
“너는 셀바토르가 금방 빠져나올 거라고 생각했지? 틀렸다! 그 괴물은 쉽게 빠져나오지 못해!”
자신을 닮은 미끼에 에타이들, 거기에 엠릭 놈까지 남겨 두었다. 지금쯤 엠릭은 신나서 셀바토르에게 달려들고 있겠지. 총공격에 후발대로 참여한 놈들을 데리고 돌아오겠다는 자신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서.
“……그랬다는 거지. 네 희망은 없어, 황태자. 즐겁군, 즐거워! 진작 이렇게 할 걸 그랬어.”
타스는 자신의 말에 절망한 듯 어두워진 피스토레의 얼굴을 보며 낄낄거렸다.
됐다. 이제 다 끝났다. 자신을 여태까지 괴롭히던 괴물의 숨통도 끊었고 그 참에 귀찮던 놈도 같이 치웠다. 거기다 이렇게 선물도 마련하지 않았는가.
‘분명 그분은 좋아할 거야.’
타스는 단 한 번 본 자신의 후원자를 떠올리며 미소 지었다.
딱히 그분이 피스토레를 데려오라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척하면 척이었다. 그분의 위치상 가장 거슬리는 건 저 황태자였다.
데려가면 아름다운 얼굴에 우아한 미소를 머금고 자신에게 천금을 내려 주겠지. 갖은 금과 보석들, 평생을 쓰고 써도 부족할 정도로 내려 줄 게 틀림없었다.
‘아니지, 아니야. 작위를 내려 줄지도 모르는 일이지?’
타스는 갑자기 든 생각에 미소 지었다. 그래, 귀족이 되지 말란 법이 있던가. 게다가 자신이 얼마를 받든, 그 돈은 르카디우스 고위 귀족들이 벌어들이는 돈에 비하면 코흘리개가 받는 용돈 수준일 게 뻔했다.
후계자를 잃은 황실과 셀바토르 공작가는 크게 휘청거릴 테니, 그 틈을 타면 신흥귀족도 꽤 그럴듯한 자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자리를 잡고 주변 귀족들과 관계를 맺은 다음엔 남은 생 동안 부와 명예로 즐기기만 하면 된다. 만족스럽다.
타스는 입꼬리를 씩 올렸다. 자신의 뒷배가 그렇게만 해 준다면 굳이 자신은 에타이로 남아 있을 필요도 없었다.
‘포르부터 치워 버려야겠군.’
보상을 받을 이가 많으면 많을수록 보상은 줄어든다. 당연한 이치였기에, 타스는 단숨에 엠릭에 이어 포르마저 쳐 낼 결심을 했다.
“타스 님. 잡을까요?”
생각에 빠져 시간이 꽤 흐른 뒤였다. 에타이들에게 둘러싸인 피스토레는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고 빠져나갈 구멍을 찾고 있었고, 에타이들은 착실하게 자신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잡…….”
“잠시!”
타스가 손을 들어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피스토레가 갑자기 크게 외치더니 간절한 얼굴로 타스를 올려다보았다.
“내, 내 말 좀 들어 보게, 응? 나는 르카디우스 제국의 황태자야. 자네에게 꽤 많은 걸 해 줄 수 있다네.”
아까까지만 해도 독기에 오른 눈은 사라지고 처연함과 공포만이 피스토레의 얼굴에 가득 떠 있었다.
“나를 살려 준다면 뭐든 해 주지. 황금을 줄까? 아니면 주먹만 한 다이아몬드는 어떤가! 아니지, 자네는 귀족이 될 수도 있네.”
“……죽기 싫어서 저러나 봅니다.”
타스의 옆에 서 있는 남자가 작게 소곤거리자, 타스 역시 동의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표정은 진심이었으니까.
그렇담 조금 더 어울려 줄 수도 있지. 그분보다 더 좋은 제안을 하면 저쪽으로 갈아타도 나쁘지 않고.
“귀족이라니, 어디 들어나 보지!”
“고맙네, 고마워.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르카디우스 제국의 황태자지. 이 말은 미래의 황제란 뜻이야! 그러니 내가 못 할 일은 없네. 자네에게 고위 귀족의 자리를 내려 주지. 백작…… 아니, 후작은 어떤가? 다른 후작가들에 못지않은 힘을 쥐여 주지! 그리고 생각해 보게. 황가는 하나뿐인 핏줄을 살려 준 은혜를 절대 잊지 않을 걸세.”
횡설수설 피스토레는 머리를 흔들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타스는 그 이야길 아주 잘 이해했다. 즉, 저자는 자신을 고위 귀족에 올려 줌과 동시에 황제를 구한 명예를 드높여 준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피스토레가 말한 것은 아니었지만…….
‘황제를 내가 조종할 수도 있겠어!’
약점을 잡았고 목줄을 잡았다. 이 정도면 자신은 황제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타도 문제가 없는 것이다! 고작 에타이들 몇을 거느리고 코딱지만 한 요새에 앉아 스스로를 왕이라 부르던 지난 나날이 부끄러워질 정도였다.
르카디우스 제국과 고귀한 핏줄인 황제, 그리고 그 황제를 조종하는 자신.
타스는 온 제국인들과 수많은 귀족들, 거기에 황제까지 자신의 앞에서 고개를 조아리는 상상을 하자 몸이 흥분으로 잘게 떨리는 걸 느꼈다. 자신의 이름은 역사서 가장 윗줄에 쓰일 것이고 앞으로 모든 이들이 자신의 이름을 칭송할 것이다.
물론 그분과 함께하려고 했다. 새로운 제국의 첫 발자국을 자신이 찍으려고 했었다. 그러나 피스토레와 이렇게 마주하고 나니 생각이 바뀌었다. 그분보다는 피스토레를 제 입맛대로 구슬리기 더 쉬울 것 같았다.
‘그분은…… 내가 감당하긴 힘들지. 차라리 저놈이 더 나을 거야.’
한 번 만나 봤던 자신의 후원자를 떠올리며 타스는 입술을 핥았다. 완벽한 미래를 떠올리면 떠올릴 때마다 입술이 극도의 흥분으로 말라 왔다.
“좋아, 그대를 살려 주지.”
타스는 크게 외쳤다. 주변에 있는 에타이들이 당황해 웅성거리는 게 느껴졌지만 그런 것 따윈 신경 쓰이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이 르카디우스 제국의 고위 귀족이 된다면 버려야 할 자들이 아니던가. 적당히 속여서 르카디우스 제국 측 진영까지 자신과 황태자를 데려가게 해야지.
그리고 그 자리에서 목을 베면 되는 것이다. 자신의 공도 세우고 쓰레기 청소도 하고. 완벽한 계획이었다.
“대신 나를 후작 따위가 아니라 공작으로 만들어라! 내가 다른 놈들에게 고개를 숙이는 건 웃긴 일이니까!”
욕망이 득실득실한 타스의 말을 들으며 잠시 피스토레는 주춤했다.
“싫으면 지금 죽이면 되는 거고!”
“아니, 아니네! 해…… 해 주겠네. 공작…… 그래, 공작의 자리를 그대에게 주지.”
피스토레의 답을 듣고 타스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저자를…….”
“반대합니다.”
갑자기 타스의 뒤편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리고 타스의 팔이 저 멀리 날아간 건 그때였다.
“어?”
타스는 순식간에 날아가 피스토레의 앞에 떨어진 제 팔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고통은 조금 후에 찾아왔다. 하지만 그걸 제대로 느낄 새도 없었다. 어느새 시야가 바뀌었고 그는 땅에 누워 누군가의 발에 짓눌리고 있었다.
“이, 이게 무슨……. 쿨럭!”
타스는 자신을 발로 누르고 있는 여자를 필사적으로 노려보았다. 불에 그을리고 탄 검은 제복을 입은 여자는 늪지대가 생각나는 암녹색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겨우 이딴 새끼와 같은 작위를 받게 된다면 저는 공작 위를 반납하겠습니다. 황태자 전하.”
예의 바르게 불만을 표하는 여자는 불구덩이 속에서 걸어 나온 아셀라였다.
“도, 도망가! 괴물이다!”
타스가 바닥을 구르자, 주변에 있던 에타이들이 질겁하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래서 타스를 먼저 잡아야 했다. 에타이들의 가장 우두머리인 타스만 잡아서 바닥에 꿇린다면 남아 있는 에타이들 전체의 기를 죽일 수 있으니까. 평소에 타스가 강압적인 정책을 써서 자신의 위상을 드높인 만큼 효과는 엄청났다.
“야, 야. 이 새끼들아! 나를 구하라고!”
타스의 외침에도 피스토레를 포위하고 있던 에타이들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아니,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지금이 기회라는 듯 사라졌다.
잠시 타스는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조금 뒤 늦게나마 자신을 짓밟고 있는 여자를 올려다보았다. 타스의 눈이 경악으로 커다래졌다.
“셀바토르……!”
고통 때문인지, 저택이 타오르는 불길에 드리운 역광 때문인지 뒤늦게 아셀라임을 알아본 타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너…… 셀바토르! 네가 어떻게 벌써 저택을 빠져나온 거야! 내가 너 때문에 저택도……!”
어떻게 벌써 저택을 빠져나온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준비해 둔 함정이 부족하지는 않았을 터. 성기사가 한 명 들어간다는 연락도 미리 받고 그에 대한 대비를 해 두지 않았던가. 거기다 저택 곳곳에 마력을 억제하는 장치를 해 놔서 아무리 셀바토르라 해도 제힘을 다 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 셀바토르에게 엠릭이 붙게 했는데…… 엠릭 이놈은 어떻게 된 거지?
‘죽은 건가?’
아셀라의 발밑에 잡힌 상태에서도 타스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엠릭 그 멍청한 놈을 여태껏 데리고 있던 이유는 단 하나, 뛰어난 싸움 실력 때문이었다. 웬만한 정기사와 붙어도 문제없이 이기는 싸움 실력과 그런 싸움을 연이어 가도 지치지 않는 체력.
그건 타스가 엠릭에게 있어서 가장 높게 사는 부분이었고, 또한 그의 만행을 눈감아 줄 이유였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 힘도 못 쓰고 죽다니!
“엠릭 놈……. 제기랄, 이렇게 중요한 때에…….”
타스가 절망에 빠진 목소리로 이를 갈았다.
아셀라는 타스의 말로 대강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타스가 그녀를 확실히 잡기 위해 거추장스럽게 발목을 붙잡았던 장치 말고도 엠릭을 준비했지만, 무슨 문제가 생겼는지 엠릭이 빠져나갔다는 사실을. 그리고 타스가 오랫동안 같이 지냈던 엠릭을 버렸다는 사실 역시 알 수 있었다.
‘쓰레기.’
아셀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는 이런 종류의 인간을 가장 질색했으니까. 어떻게 제 몸 하나 살자고 어떻게 옆에 있는 동료나 가족을 판단 말인가.
“아셀라!”
허겁지겁 뛰어온 피스토레가 아셀라의 옆에 서더니 그녀를 요리조리 살펴보았다.
“무, 무사한 거지? 걱정했어, 아셀라. 갑자기 저택이 터지질 않나 불이 치솟질 않나.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다고.”
조금 하얗게 질린 피스토레의 낯빛이 걱정이 진심이었음을 알려 주었다. 타스 때문에 가라앉은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덕분이야, 피스토레.”
아셀라는 자신을 걱정하는 피스토레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이번에는 확실히, 피스토레의 공이 컸다. 자신이 빠져나오고 있다고 믿은 피스토레가 말도 안 되는 개소리를 지껄여 가면서 시간을 끌어 주지 않았던가.
피스토레가 시간을 끌지 않았더라면 그는 이미 타스의 손아귀에 있었을 것이고, 타스는 라니스 숲 어딘가에 숨어 뒷배에게 갔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된다면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았을 텐데.
“내가 뭘. 그냥 나는 너를 믿은 거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저런 저택에서 죽을 리가 없잖아.”
아셀라의 미소에 완전히 안심한 피스토레가 살짝 피곤이 섞인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셀라가 죽는다는 것 자체가 상상이 가지 않아 되는대로 지껄인 건데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었다.
“테펜텔이 큰 역할을 해 줬어. 마법도 제대로 안 써지는 상황에서 케른 경이 당했거든. 지금도 저 뒤에서 철퇴를 휘두르고 있어. 퍽 즐거운 모양이야.”
아셀라의 말에 피스토레의 얼굴에 옅은 그늘이 드리웠다. 두 명 있는 성기사 중 한 사람이 당했다니. 물약이 있긴 하지만 성력이 비할 바는 아니었다. 혹여라도 크게 다친다면 상처 치료가 어려울 수도 있었다.
“이런…….”
“뭐, 죽지는 않았으니까. 그래도 당분간은 성력을 쓰기 힘들 거야. 독인지 저주인지 모를 것 때문에 성력을 이미 많이 썼거든.”
“크헉!”
아셀라는 대답하면서 타스를 짓밟고 있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아셀라가 피스토레와 이야기를 하는 동안 빠져나가기 위해 몸부림치던 타스가 다시 신음을 흘렸다.
“게다가 잡아야 할 걸 잡았으니 더더욱 문제가 없지. 사이와 합류하고 빠르게 돌아가자고.”
아셀라는 미소 지었다. 이제 돌아가기만 하면 평화로운 나날뿐이리라.
사이랑 같이 공작저에서 늘어지게 낮잠이나 자야지. 이제 늦잠을 자도 괜찮을 것이다. 누가 전쟁 영웅이자 셀바토르가의 공작인 자신에게 뭐라 하겠는가.
가끔 에타이들 잔당이 발견되면 그거나 처리하러 나가면 될 터였다.
제나는…… 조금 걸리기는 하는데, 당분간은 봐주겠지. 자신이 아침잠이 많다는 걸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니까.
아셀라의 머릿속에는 사이레인을 데려갔을 때 그녀의 부모님이 반대한다거나 다른 귀족들이 자신의 결혼을 막을 거라는 생각 따위는 조금도 존재하지 않았다.
“일단 돌아가면 상황 정리는 네가 해, 피스토레. 나는 공작저에서 잠이나 잘 거야.”
“뭐? 그 많은 양을 나 혼자 다 하라고? 너는 안 도와줄 거야?”
“내가 그걸 왜 도와. 너 서류 정리 잘하니까, 네가 전부 해. 거기다 보좌관도 있으니 너 혼자는 아니네. 난 이제 여유로운 삶을 즐길 거라고.”
“그런 게 어딨어! 이건 억지야, 탄압이라고! 너무해, 아셀라!”
“크흐흐…….”
나머지 뒤처리는 죄다 피스토레에게 넘길 심산이었던 아셀라의 발밑에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순식간에 방 안을 가득 메울 정도로 거대한 서류 더미를 떠안게 될 뻔한 피스토레의 시선도 타스에게 향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타스에게 닿았는데도 그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크하하하!”
오히려 들으라는 듯 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돌아가? 낮잠? 여유로운 삶? 웃기군, 웃겨! 이 근래 들은 말 중 가장 우스운 소리야!”
고통과 절망으로 붉게 충혈된 눈으로 타스는 필사적으로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어딘가 미친 듯한 타스의 얼굴에 피스토레는 저도 모르게 뒤로 한 발 뒤로 물러났고, 아셀라는 다리에 힘을 줘 그를 짓눌렀다.
“커억! 크, 흐흐…… 흐흐. 너희는 못 돌아가. 여유로운 삶에 낮잠 따위 즐길 일 없다고. 거기 황태자, 걱정하지 말지. 그대는 뒤처리 따위 홀로 도맡지 않을 거야. 하하…….”
고통이 섞인 신음을 내뱉으면서도 타스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결국 아셀라가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입을 뗐다.
“그것참 놀랍군. 마치 믿을 게 더 있다는 얼굴이야. 누굴 믿을 거지? 저 뒤에서 테펜텔에게 밀리고 있는 포르를 믿을 건가? 아니면 네 명령을 무시하고 자리를 비운 엠릭? 그도 아니면 손도 닿지 않을 정도로 저 멀리에 있는 뒷배인가.”
“엠릭 놈…… 역시 내 명령을 무시했군. 꽤 괜찮은 관을 짜 뒀는데 말이지. 일찌감치 처리해 뒀어야 했는데. 이봐, 셀바토르. 너도 근처에 묘하게 거슬리는 놈이 있다면 즉각즉각 처리하라고. 나처럼 뒤통수를 맞지 말고.”
고통 때문에 머리가 돈 것인지. 이상한 말을 지껄이는 타스를 잠시 내려다보다가 아셀라는 검을 빼 들고는 타스의 목을 겨눴다.
“묘하게 거슬리는 놈은 없는데, 대놓고 거슬리는 놈은 있군.”
아셀라는 이대로 타스의 숨통을 끊을 생각이었다.
타스에게서는 알아내야 할 것이 많았다. 그간 에타이와 연루된 자들의 명단이라든지, 내통한 나라라든지. 그것도 아니라면 그를 밀어 주는 뒷배의 이름 같은 것들이 타스의 머릿속에 잔뜩 남아 있었다.
하지만 아셀라는 그걸 포기해도 상관없었다.
이놈은 자신의 손에서 한 번 도망쳤던 놈이었다. 한 번 빠져나간 놈이 두 번은 못 빠져나갈까. 확실히 끝을 보고 싶다. 그 생각이 아셀라의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혹시나 자신이 이럴까 봐 테펜텔에게는 포르를 죽이지 말고 생포하라고도 말해 두었으니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조언 고마워, 잘 가.”
아셀라는 짧은 감사 인사를 끝으로 검을 치켜들었다. 설마 자신을 진짜 죽이려 할지는 몰랐는지 타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검을 막으려는 듯 뭔가를 중얼거렸지만, 아셀라는 신경 쓰지 않았다.
“자, 잠깐! 아셀라!”
그런 아셀라를 막은 건 바로 옆에 있던 피스토레였다. 그의 외침에 아셀라의 검이 타스의 바로 눈앞에서 멈추었다. 흐으으……. 소리와 함께 타스의 바지가 짙은 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지금 죽이면 안 된다고! 수도로 끌고 가 그간 에타이들에게 가족을 잃은 이들이 울분을 풀 수 있게 해 줘야지. 거기다 알아내야 할 것도 많아. 아버지가 산 채로 끌고 오라는 명도 내리지 않았나.”
“전쟁 중에 사람 하나 죽는 게 뭐 대수라고. 황제 폐하께는 내가 말하지. ‘치열한 전투 끝에 실수로 죽이고 말았습니다.’라고. 그러면 되지 않을까. 포르를 잡아 두라고 했으니 정보 쪽은 괜찮아.”
“되기는! 누가 네가 실수했다는 걸 믿겠어? 말이 되는 변명을 해.”
“그럼 네가 해. 네가 죽였다고 하면 황제 폐하도 별말 안 하실 테지. 너를 깔보던 다른 귀족들도 고개를 숙일 거다. 이놈으로 네 명예를 드높여, 피스토레.”
아셀라는 흔쾌히 피스토레에게 자신의 검을 넘겨주었다. 얼떨결에 그녀의 검을 받아 든 피스토레는 잠시 비틀거리더니 눈을 깜박이며 진심이냐는 듯 아셀라를 바라보았다.
“네가 여태까지 발을 잡아 두었으니, 거짓도 아니지.”
아셀라는 진심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흔쾌히 자신이 사냥한 먹이를 건네주는 암사자의 모습에 피스토레는 잠시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아니. 나는 절차에 따라 죽이자는 거지. 적어도 자신의 가족을 죽인 놈 얼굴을 보여 줘야 하지 않겠나.”
평민 중에서도, 귀족 중에서도 에타이들과의 전투로 가족을 잃은 이는 많았다. 누군가는 자신의 아이를, 누군가는 아내나 남편을, 혹은 부모를. 연인이나 친구를 잃은 자는 말할 것도 없었다.
피스토레는 아셀라에게 검을 건네주며 옅게 웃었다.
“아셀라, 조금의 위험이라도 없애고 싶은 네 뜻은 알겠어. 하지만 유가족에게 조금이나마 안정을 돌려줘야 하지 않겠어? 이자는 원래 계획된 대로 광장에서 사형을 집행하자고.”
자신의 검을 받아 든 아셀라는 검을 한 번, 그리고 오줌 싼 채 눈을 질끈 감고 있는 타스를 한 번 바라보더니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렇게 하자.”
아셀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검집에 검을 집어넣는데, 테펜텔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울러 펴졌다.
“아셀라! 에타이들의 후발대가 돌아왔어!”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테펜텔이었다. 피가 묻은 철퇴를 갈무리하며 테펜텔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의 뒤로 기사들과 레너드 용병들이 부상자를 데리고 왔다.
“후발대라니?”
피스토레가 멍하니 묻자 뒤에 서 있던 린체의 기사가 숨을 고르며 말을 이었다. 테펜텔도 그 뒤에서 숨을 헐떡였다.
“총공격전을 위해 부대를 둘로 나눠 둔 모양입니다. 어떻게 알았는지 한 부대가 요새로 돌아왔습니다. 아니…… 미리 이야기된 걸지도 모르지요.”
기사의 말끝에는 확신이 서려 있었고, 그의 날카로운 시선은 타스에게 닿아 있었다. 기사의 말이 끝나자마자 테펜텔이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미안, 포른가 뭔가 못 죽였어. 아니, 아니지. 못 잡았어. 갑자기 들이닥치는 바람에 간신히 빠져나왔거든. 얼른 그놈 챙겨서 가자고. 생각보다 많이 밀려왔어. 우리 쪽이 너무 불리해.”
죽이지 말라니까. 하지만 잔소리는 말이 되어 흩어지지 않았다. 간신히 빠져나왔다는 말이 정말인지 테펜텔을 포함한 모두의 모습은 엉망이었기 때문이었다.
테펜텔과 린체의 기사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나서 밧줄로 타스를 묶기 시작했다. 한 기사는 품속에서 끈처럼 생긴 마법구를 꺼내 타스의 팔과 다리를 한 번 더 묶었다. 황태자 전하가 챙겨 준 거라고 옆의 사람에게 작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사이 아셀라는 사람들을 훑었다. 분명 아까보다 수가 조금 줄어 있었다.
그때 테펜텔이 달려온 방향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한둘이 아닌 소리. 후발대라더니 생각보다 인원을 많이 배치해 둔 듯했다.
“그럼 너희 먼저 빠져나가. 이놈 잘 챙기고.”
조금 무례하게 아셀라는 턱짓으로 넋이 나가 있는 피스토레를 가리키며 검을 뽑아 들었다.
“너는?”
타스를 피가 통하지도 않을 정도로 꽉꽉 묶으면서 테펜텔이 아셀라를 바라보자 그녀는 고개를 돌려 어딘가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아셀라의 시선이 향한 곳은 사이레인이 있을 법한 곳이었다.
“난 우리 남편 구하러 가야지.”
아마 지금 사이레인의 상황은 좋은 편이 아닐 것이다.
사이는 종종 아기 새처럼 무언가를 떠들었다. 자신이 데리고 있는 용병들과 처음 용병단을 만들었을 때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리고 어쩌다 에타이들의 의뢰까지 받게 되었는지.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엠릭에 대해서도 입을 열었다.
‘나에게 억하심정을 가지고 있나 봐. 매일 나만 보면 시비를 건단 말이지.’
언젠간 자기가 직접 조져 버릴 거라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사이레인의 말을 떠올린 아셀라는 엠릭이 타스의 말까지 어겨 가면서 갈 만한 곳을 쉽게 추려 냈다. 사이레인과 대다수의 레너드 용병단이 있는 곳이겠지.
“그래, 그럼 중간 지점에서 만나자고.”
타스를 묶은 밧줄이 혹여나 풀려 도망가지 않도록 제 손목에 묶은 테펜텔의 말에 아셀라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진다는 그 말은 고치게 하자.’
그렇게 다짐하면서 아셀라는 평민들의 피난처인 동굴 쪽으로 향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갑자기 화살이 날아와 아셀라의 발 앞에 꽂히기 전까지는.
“쉽게 튈 수 있을 줄 알았냐, 이 새끼들아!”
화살을 쏴 아셀라를 멈추게 한 것은 테펜텔에게 반쯤 져서 약이 오를 대로 오른 포르였다. 그녀의 머리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졌는데, 고통 따위는 느껴지지 않는다는 듯 눈은 매섭게 빛났다.
“아……. 저거 완전히 끝내고 왔어야 했는데. 귀찮게 됐네.”
테펜텔은 포르를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직접 싸워 본 바로는 포르는 꽤 상대하기 귀찮았다. 활 실력이 상당한 데다가 접근전도 강했다. 잔꾀도 많아 왜 타스가 자신의 옆에 앉혀 놨는지 쉽게 알 수 있을 정도였다.
포르를 시작으로 후발대로 갔던 에타이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한 명, 한 명 중무장한 데다가 그 수가 많아 아까처럼 쉽게 이길 수 없어 보였다.
아셀라가 눈을 찡그린 채 주변을 둘러보자 테펜텔에게 잡혀 있는 타스가 킬킬 웃음을 흘렸다.
“거봐, 내가 쉽게 빠져나갈 수 없다고 했지. 셀바토르, 네 무덤은 여기야!”
“무서워서 오줌이나 지린 놈이 말이 많아.”
낮게 읊조리며 아셀라는 매서운 눈으로 타스를 노려보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자신도 수를 하나 숨겨 두긴 했지만, 여기까지 오는 데 시간이 걸릴 게 분명했다. 분명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다 끝나겠지. 어떤 쪽으로든.
아셀라가 한 발 앞으로 나가자 테펜텔이 환하게 웃음 짓더니 갈무리해 집어넣었던 제 철퇴를 꺼내 들고 그 옆에 섰다. 잘그락, 사슬이 움직이며 내는 소리가 어쩐지 섬뜩하게 들렸다.
“야! 이걸로 한 대 더 맞아야지!”
테펜텔이 철퇴를 힘껏 치켜들고 이야기하자 포르는 몸을 흠칫 떨더니 재빠르게 자신의 뒤에 서 있던 사람의 뒤로 몸을 숨겼다.
“공격해! 전부 죽여! 악의 무리로부터 타스 님을 구출해라!”
포르의 외침이 울려 퍼지자마자 에타이들이 무기를 빼 들고 아셀라 측으로 달려들어 왔다.
몰려드는 흙먼지와 귀가 먹먹해지는 함성에 아셀라는 고개를 돌려 피스토레를 바라보았다. 이런 일이 처음인 피스토레는 어딘가 멍한 눈빛으로 정신을 차리려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피스토레, 정신 단단히 잡아.”
전쟁 중에는 아군과 적군이 뒤엉켜 싸우기 때문에 자신이 누굴 공격하는지도 모르는 경우도 허다했다. 아무리 아셀라가 피스토레에게 주의를 기울인다 한들 사람들 사이에 가려져 아군의 검을 맞으면 끝이었다. 애당초 이 수를 상대하면서 계속 주의를 기울일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그래.”
피스토레는 조금 가라앉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의 안색이 조금 창백했지만, 지금은 그것까지 신경 써 줄 여력이 없었다. 에타이들이 바로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쾅! 사람들이 부딪치며 싸움이 시작되었다. 이렇게 난잡한 전투는 처음이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 정도로 아비규환이었다.
테펜텔은 자신의 목표였던 포르를 집요하게 쫓아가며 철퇴를 휘두르고 있었고, 피스토레는 기사들과 함께 침착하게 에타이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가볍게 들어오는 공격을 피하며 아셀라는 눈을 찡그렸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저들은 자신이 마법을 쓰지 못하게 하기 위해 무언가를 준비한 듯 보였다.
실제로 그녀가 마법을 쓸 기미를 비추면 순식간에 거리를 벌린 후 화살과 옅은 빛이 나는 동그란 물체를 꺼내 들었다.
‘저건가?’
타스의 저택에서도 묘하게 빛나는 것이 굴러다녔었다. 그리고 마력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지.
저거로구나. 아셀라는 확신할 수 있었다.
다행히도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물건을 전부 가지고 있는 건 아닌 듯 보였다. 세 사람의 허리춤에 달린 주머니에서만 빛이 새어 나왔으니까.
‘하긴 저번에 단단히 당했으니 준비를 할 만하지.’
타스는 자신을 그저 힘이 센 검사라고만 생각했다가 에타이들이 가지고 있던 가장 커다란 요새를 너무도 손쉽게 잃어버리지 않았던가. 그러니 이 정도 대비는 놀라운 사실이 아니었다.
아셀라는 동그란 물체를 든 놈들과 거리를 벌렸다. 마도구는 비싼 데다가 손에 넣기도 힘든데, 저걸 어떻게 손에 넣었을지에 대한 의문은 잠시 뒤로 밀어 두었다.
“사라졌어?”
아셀라를 상대하던 사람들이 눈을 껌뻑였다. 분명 아까까지 저기 있었는데. 잠시 사람들이 일으킨 흙먼지가 바람에 더 짙어진 사이 그녀가 사라졌다.
궁수들은 활시위를 팽팽히 당긴 채 주변을 다급하게 둘러보았다.
“위도 살펴야지.”
“으아악! 미친놈아!”
혀 차는 소리와 함께 나무 위에서 아셀라가 뛰어내렸다. 갑자기 바로 앞에 떨어진 아셀라를 보고 패닉을 일으킨 궁수가 활시위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았고 활은 그대로 다른 놈에게 적중했다. 마도구를 들고 있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하나 줄었고.’
활에 맞아 비틀거리는 에타이를 집어 든 아셀라는 그대로 궁수들 쪽에 집어 던졌고, 궁수 둘과 다른 마도구를 든 사람이 바닥에 쓰러졌다. 마도구가 땅으로 흩어지고 사람들 발에 밟혀 바스러졌다.
‘둘.’
상황을 파악하며 검을 휘두르자 두엇이 쓰러졌다. 이제 마도구를 든 남자는 아셀라를 피해 등을 보이며 허겁지겁 도망치고 있었다.
아셀라는 쓰러진 에타이의 검을 발끝으로 쳐 올렸다. 그대로 검을 던지자 숲속으로 도망가던 남자가 옆으로 쓰러졌다.
“마지막.”
처리 완료. 아셀라는 뒤에 달려드는 놈을 팔꿈치로 얼굴을 찍고 손을 탁탁 털었다.
자신이 몇을 처리하는 동안 에타이들의 수는 줄긴커녕 더욱 늘어나 있었다. 도주도 고려를 해 봐야 하나,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무리 일당백을 하는 놈들로만 골라왔어도 밀려드는 수를 있길 수는 없었다.
거기다 자신들은 새벽부터 몸을 움직였지만, 저들은 근처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했던 자들. 테펜텔도 다른 기사들도 지쳐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자꾸만 구석으로 밀리는 기분이 들었다. 자신 혼자였더라면 빠르게 이 상황을 빠져나갔겠지만, 지금은 걸리는 게 너무 많았다. 부상자에, 레너드 용병단에 거기다 동굴에 피신해 있는 수많은 평민들까지.
여러 정황을 살폈을 때, 에타이들은 동굴도 알고 있으리라. 만일 자신들이 지거나 그대로 도주하면 에타이들은 남은 평민들에게 무슨 짓을 할까?
‘물러나면 안 돼.’
까드득. 아셀라는 눈을 찡그리며 다시 검을 고쳐 쥐고는 그대로 싸움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사방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건 피스토레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셀라가 자신을 보호해 줄 것을 알지만, 옆에서 사람이 쓰러져 눈을 뜨지 않는 것을 계속 보다 보니 어느덧 피스토레는 심적으로 몰려 있었다.
‘아니야, 나는 할 수 있어.’
자신을 믿는 이가 몇이며 자신이 짊어져야 할 사람은 몇이던가. 겨우 이 정도도 견뎌 내지 못하면 자신은 닥쳐올 미래를 이길 수 없으리라.
그렇게 피스토레는 자신을 달랬다. 최대한 울렁이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자신은 잘할 수 있다고. 그리고 살아서 돌아갈 수 있다고.
“이봐, 르카디우스 제국의 고귀한 황태자 전하.”
묶여 있던 타스가 그에게 말을 걸기 전까지는.
“…….”
피스토레는 말없이 타스를 노려보았다. 나무에 묶여 있는 남자는 볼품없어 보였지만, 눈은 어딘가 혼탁한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어디선가 본 듯한 눈에 피스토레는 고개를 돌렸다.
‘저런 놈과는 말을 섞지 않는 게 최고지.’
말을 섞지 말아야 한다.
타스는 처음부터 에타이가 아니었다. 어디선가 흘러 들어온 외부인이었다.
르카디우스 제국의 역사가 긴 만큼 대립하던 에타이의 역사도 길었다. 그 긴 시간 동안 원래부터 에타이였던 이들과 에타이로 새로 합류한 이들로 나뉘었고, 차별이 생기기 시작했다.
원래부터 에타이가 아니었던 이들은 엠릭의 뒤에 붙어 있던 사람들처럼 일정의 역할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건 하나의 법이었고 그들의 머릿속에 심어진 인식이었다.
하지만 그걸 깨고 타스는 위로 올라갔고, 하나의 요새를 자신 마음대로 주무르는 수준까지 갔다.
그는 전투가 능한 것도 아니었고 특별한 기술을 지녀 기술자로 대접받은 것도 아니었다. 분명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그를 무시하기로 한 피스토레는 땀으로 미끄러지는 검과 방패를 고쳐 들었다. 기사들이 앞서 오는 에타이들을 막아 주고 있어, 조금 지쳤지만 타스를 감시하며 한숨 돌릴 수 있었다. 꼴사납게 허덕이던 숨이 가라앉았으니 다시 전쟁에 낄 생각이었다.
“그래, 무시하며 들어. 나는 그저 단 한마디를 하고 싶을 뿐이야.”
피스토레가 소란으로 뛰어들기 직전임에도 타스는 묘하게 여유로웠다. 긴박한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게 잠시 뜸까지 들이던 타스는 보란 듯이 입꼬리를 올리면서 기묘한 말을 꺼냈다.
“아니, 그냥 너무 노력하지 말라고 말해 주고 싶었네. 르카디우스 제국의 황태자 전하.”
어느새 자신의 상태를 전부 잊은 듯 타스는 평온한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말투 역시 차분하고 여유로워 어딘가 조롱하는 듯한 말투임에도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간 에타이들 위에서 왕처럼 군림한 사람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타스의 얼굴은 선량했다. 눈매는 둥글었고, 언제나 웃음을 머금고 있었던지라 웃음을 그리는 곡선은 자연스러웠다.
타스의 첫인상은 척 보기에는 검보다는 책이 어울리는 사람, 높은 자리에 올라 떵떵거리며 사람을 호령하기보다는 상처 입은 누군가의 옆에 앉아 그를 보듬어 줄 것 같은 사람이었다. 피스토레와도 같은 인상이었다.
유약해 보이기도 했고 기대면 어쩐지 포근히 감싸 줄 것 같은 다정한 인상에, 다들 여러 가지 목적을 가지고 타스에게 접근했고 그대로 그에게 먹혀 버렸다. 타스는 사람의 틈새를 교묘하게 잘 파고들었으니까.
“노력하지 말라고? 여기서 우리가…….”
“내 말을 들어 봐. 여기서 너희는 질 거야 같은, 틀에 박힌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니네. 그저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어차피 그대는 인정받지 못하니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는 소리야.”
뭐? 타스의 느긋한 말에 피스토레는 이마에 흐르는 피를 닦을 생각도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
타스는 엉망이 된 몰골로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는 피스토레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도 자네는 얼마나 축복받은 인간인가. 타고난 피 덕분에 친구를 잘 사귀어서 가만히 있어도 목숨은, 화려한 삶은 보존할 테니 말이야. 모두가 꿈꾸는 삶이 아니던가! 굴곡 없는 안온한 삶. 대신 명성도, 사람들의 인정도 모든 걸 뺏기겠지만.”
타스는 어린 제자에게 조언하는 선생의 얼굴로 피스토레를 올려다보았다. 인간의 틈을 파고드는 건 그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나, 이렇게 상처가 잘 보이는 인간의 경우는 숨 쉬기보다 쉬웠다.
아버지의 인정을 받지 못한 나약한 아들, 황가의 성격을 닮지 못한 황태자. 그리고 그 옆을 지키는, 절대로 따라가지 못할 친구.
누가 들어도 순식간에 상황이 그려지지 않는가.
피스토레가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깨무는 걸 보면서 타스는 웃음을 흘렸다.
“그에 비교해 르카디우스 제국의 황제, 그는 정말 불쌍하군. 정말로 불쌍해. 아들이라고는 하나뿐인데 실패작을 낳았으니. 황태자, 그대는 돌아가자마자 아비의 앞에서 고개를 숙여야 할 것이야.”
감사하다고, 그렇게 인사를 전해야지. 타스는 말을 덧붙이며 정말로 안타깝다는 듯 시선을 반쯤 내리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피스토레를 보며 상냥하게 웃었다.
“나였다면 바로 적들의 칼 앞에 던져 버렸을 텐데.”
타스의 그 말에 피스토레는 숨을 멈추었다.
흔하게 일어나는 기 싸움이다. 알고 있었다. 평소에도 미리 자신을 꺾어 두려던 고위 귀족들과 자주 하던 것이 아니었던가.
서로의 틈을 찾아 어떻게든 상처를 주고 찍어 누르려는 행위는 황족으로 태어난 그에겐 익숙한 것이었다. 그의 아버지 역시 숨 쉬듯 그를 누르지 않았던가.
문제는 지금 피스토레의 정신 상황이 안 좋다는 것이었다.
평소였더라면 조금 꺼림칙했어도 이 상황을 무난하게 넘겼을 것이다. 싸움이 붙기 전이었더라면 불안한 마음을 다시금 다잡고, 흔들림 없이 지나갔을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크게 요동치고 있었다.
이 임무가 시작되기 며칠 전부터 쌓아 둔 긴장감, 새벽부터 일어나 움직이는 바람에 누적된 피로감. 거기다 옆에서 계속 쓰러지는 익숙한 얼굴들과 사방에서 터지는 비명. 주변의 모든 게 그를 한계로 몰고 있었다.
부정적인 마음은 한계가 없다지만, 안타깝게도 긍정적인 마음은 한계가 있었다.
피스토레는 갑자기 시야가 하얗게 물드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무언가 알 수 없는 것들이 자신에게 달려오고 있음을 보았다.
환상이었다. 적들이 자신을 죽이려 달려오는 모습은 실제가 아닌 환상이었다. 지금 피스토레는 숲속에 있었지만, 눈앞에 펼쳐진 건 어둠과 자신 그리고 적들뿐이었으니까.
아니, 뒤에 누군가가 있었다. 하지만 피스토레는 고개를 돌리지도 못하고 겁에 질려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적들을 바라보았다. 뒤로 물러나고 싶었지만 누군가에게 막혀 움직일 수 없었고 사방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웠다.
컥!
갑자기 어둠 속에서 두꺼운 손이 피스토레의 목덜미를 붙잡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두꺼운 손에는 황금과 루비가 박히고 머리를 두 개 가진 뱀이 섬세하게 새겨진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숨을 쉴 수도 없이 피스토레의 목을 잡은 손은 인정도 없이 그를 그대로 적들에게 내던졌다.
‘못난 놈.’
누군지 뒤를 돌아볼 필요도 없었다. 그의 아버지였다.
“헉!”
피스토레는 거칠게 숨을 토해 냈다. 환상임을 아는데도 실제로 목이 졸린 듯, 적들에게 내던져진 듯 숨이 가빠졌다. 안색이 새하얘졌다.
“전하!”
옆에서 같이 싸우던 기사가 놀라 그에게 다가왔다. 기사는 다가오는 적들을 밀어내며 필사적으로 외쳤다.
“정신 차리십시오! 여기서 정신을 놓으면 죽습니다!”
바로 앞에 있는 기사의 목소리가 저 멀리 아득한 곳에서 들리는 듯했다. 피스토레는 저도 모르게 제 목을 매만지며 눈을 깜빡였다.
정신을, 그래. 정신을 차려야 해. 하지만 머리가 핑핑 돌았다. 눈을 감았는데도 아까 환상이 눈꺼풀 안쪽에 새겨진 듯 떨어지지 않았다. 요란한 소리가 귓가로 흘러 들어오지 않고 이리저리 움직였다. 정신을 차려야…….
“나는 괜찮네. 신경 쓰게 만들어서 미안하군.”
피스토레는 잘 움직이지 않는 고개를 억지로 끄덕이며 검을 다시 고쳐 들었다. 그래, 자신은 괜찮다. 겨우 이 정도로 쓰러질 수 없다.
피스토레는 일부러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깨물었다. 고통이 밀려오며 흐릿해진 시야가 돌아왔다.
“일단 저자를 다시 묶어야겠어. 입에 재갈도 씌우고……. 아.”
타스가 묶여 있던 자리를 본 피스토레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리고 그건 주변에 있던 다른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가 있어야 할 자리엔 묶여 있던 밧줄과 마도구의 흔적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타스가 도주했다.
‘어떻게?’
혹시 몰라 밧줄에 가져온 마도구를 손과 발에 채웠다. 밧줄이야 주변에 넘쳐나는 무기를 하나 슬쩍 집어 자를 수 있다지만 어떻게 마법구를 무효화시켰을까. 아까 몸수색을 할 때 무효화시키는 도구는 없었는데. 왜? 어떻게?
다시 숨이 가빠졌다.
지금 그 이유를 따져 봤자 도움이 되는 건 없었다. 결과는 같았으니까. 간신히 잡은 타스는 도주했고, 책임은 피스토레에게 있었다.
자신이 그의 말에 흔들리지 않았더라면, 그랬더라면 밧줄과 마법구를 푸는 타스를 제지했을 것이다.
실제로 타스가 피스토레에게 말을 건 시간과 피스토레가 환상을 본 시간을 다 합치면 고작 몇 분 되지 않았지만, 그 짧은 시간은 피스토레를 한없이 밑으로 끌어 내리기 충분한 시간이 되었다.
“야! 피스토레, 정신 차려!”
급하게 달려온 테펜텔이 피스토레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지만, 타스의 말로 헤집어진 상처와 죄책감에 피스토레는 쉽게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리고 그가 약해진 틈을 타 에타이들이 그를 집중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타스 님을 구했다! 이제 황태자를 잡아!”
“젠장, 아셀라는 어디로 간 거야!”
달려오는 적들에게 철퇴를 휘두르며 테펜텔은 얼굴을 구겼다. 자신들이 온다는 걸 안 에타이들은 철저하게 그들에게 맞춘 방어와 공격을 했다. 테펜텔의 철퇴는 두꺼운 철로 만든 방패에 막혀 평소의 제 힘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까드득.
“이놈 데리고 있어.”
테펜텔은 자신을 조롱하듯 방패 뒤에서 공격을 퍼붓는 놈들을 보며 이를 갈더니 피스토레를 한 기사에게 던져 버렸다. 그러고는 그대로 땅을 박차고 달려 방패를 든 놈에게 부딪쳤다.
큰 소리가 울려 퍼지며 방패를 든 사람이 땅으로 쓰려졌고 테펜텔은 그대로 방패를 뺏어 들고는 철퇴를 휘둘렸다.
“내가 여기서 뒤지더라도 너희는 다 죽이고 간다.”
테펜텔은 에타이들을 노려보며 낮게 말을 흘렸다. 거짓이 하나도 섞이지 않은 진실에 에타이들이 주춤거렸고, 방패와 부딪친 테펜텔의 머리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으아…….”
테펜텔이 한 발 다가오자 에타이들이 뒤로 물러났다. 금방이라도 도망가고 싶다는 듯 몸을 덜덜 떠는 놈도 있었다. 하지만 도주로는 없었다.
“효율성 있게 움직여, 테펜텔.”
갑자기 에타이들 뒤에서 나타난 아셀라가 쓰러진 에타이들을 가뿐히 뛰어넘으며 테펜텔에게 다가왔다. 순식간에 주변을 정리한 아셀라는 눈을 가늘게 뜨며 입을 열었다.
“타스 놈은 어디 갔지?”
“…….”
아셀라의 말 한마디에 순간 주위가 침묵으로 물들었고 그건 충분한 답이 되었다. 아셀라는 눈을 찡그리며 타스가 묶여 있던 자리를 노려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잘못이 없어. 다 내 잘못이야, 아셀라.”
피스토레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조심스레 앞으로 나왔다.
“내가 그놈을 감시했는데, 한눈을 파는 바람에 그만…….”
죄책감으로 점철된 말끝이 뭉개졌다. 지독한 죄책감을 느끼는 피스토레를 다들 안쓰럽게 여기긴 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라 타스를 놓친 실수는 너무나 커서 아무도 그를 달래지 못했다.
잠시 말없이 피스토레를 바라보던 아셀라는 그의 옆을 지나쳐 타스가 묶여 있던 나무 근처로 다가갔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무언가를 집어 들었다.
빛을 잃은 듯한 구슬, 아셀라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타스가 준비했던 마도구였다.
아까 몸수색을 할 때는 이게 없었지. 아셀라는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을 주었다.
아까 흩어진 마도구 중 한 개가 구르고 굴러, 밟히지도 않고 여기까지 온 듯 보였다. 그리고 타스는 그걸 이용해 자신의 손발을 묶은 마도구를 풀었고, 피스토레를 어지럽힌 후 도주했다.
카득! 유리로 만들어진 마도구가 손안에서 산산이 깨져 나갔다. 피스토레는 홀로 저지른 실수라고 했지만 아니다. 명백히 그녀의 탓이기도 했다.
‘정말 한심해.’
아셀라는 유리 조각이 박혀 피가 흐르는 손을 아무렇지도 않게 털어 내며 몸을 돌렸다. 실수는 자신과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하필 이 중요한 순간에.
“나는 에타이들의 시선을 끌며 타스를 잡으러 간다.”
아셀라는 주변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을 꺼냈다. 이곳으로 오면서 그녀가 주변에 있던 에타이들을 대강 처리해 놨기에 잠시나마의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도 오래가진 못하겠지.
아까 나무 위에서 살펴봤을 때 더 많은 수의 에타이들이 이리로 몰려오고 있었다. 그러니 어서 상황을 정리해야 하고 다시 움직여야 했다. 아셀라의 진녹빛 시선이 린체의 기사에게 닿았다.
“경, 그대는 시선이 쏠린 사이 황태자 전하를 모시고 돌아가도록. 나머지는 나를 따라와라.”
“네, 알겠습니다!”
아셀라가 검에 묻은 피를 닦아 내며 명령하자 크게 대답한 기사는 바로 몸을 움직여 피스토레에게 다가갔다.
“전하, 저를 따라와 주십시오. 제가 안전하게 전하를 진영까지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잠시만 아셀라와 이야기를 좀 나누겠네. 잠시면 되네.”
정중하고도 충성심 깊은 목소리로 기사는 피스토레에게 말을 걸었으나, 그는 잠시만 기다려 달라 말하고서는 바로 전략을 짜는 듯 테펜텔과 무언가를 이야기 중인 아셀라에게 다가갔다.
“꼭 돌아가야 하나?”
그는 절박한 눈으로 아셀라의 그을린 옷깃을 붙잡았다. 여기서 돌아가면 안 된다. 적어도 자신이 저지른 실수는 자신의 손으로 되돌려야 했다.
‘타고난 피 덕분에 친구를 잘 사귀어서 가만히 있어도 목숨은, 화려한 삶은 보존할 테니 말이야.’
타스의 말이 귓가에 메아리쳤다. 피스토레는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이상하게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도 못하고 웅웅 울리는 목소리를 떨쳐 내려 계속 고개를 저었다.
“피스토레.”
결국 작게 한숨 쉰 아셀라가 자신의 옷자락을 붙든 피스토레의 손을 잡았다.
피스토레는 이번 임무에서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여태까지 버텨 준 게 용할 정도로 그는 힘을 냈고 아셀라의 기대 이상을 해내 주었다. 하지만 이제 한계 다다랐고, 휴식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아셀라는 돌아가지 않으려고 하는 그의 친구를 이해했다. 어릴 적부터 책임감 하나만큼은 강하지 않았던가.
“너는 잘 해냈어. 타스를 놓친 건 네 잘못만이 아니야. 내 실수도 있어. 지금 너는 한계에 몰려 있으니 중요한 건 휴식이지. 그러니 일단 경과 함께 돌아가. 뒤처리는 내가 할게.”
그 말과 함께 아셀라는 피스토레의 손을 놓고는 완전히 몸을 돌렸다.
어? 피스토레는 텅 빈 듯한 눈으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그 누구도 피스토레의 그런 모습을 보지 못했다. 에타이들이 다시 몰려오고 있던 탓이었다.
“경! 어서 황태자 전하를!”
아셀라가 그렇게 말하며 잠시 검집에 넣어 두었던 검을 뽑아 들었다. 그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전부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눈빛만큼은 무서웠다. 저쪽도, 그리고 이쪽도 전부 궁지에 몰려 있었다.
“아까 말을 맞춘 대로 저 커다란 나무쯤 오면 우리가 먼저 나가 맨 앞에 있는 놈과 궁수부터 잡는 거야. 될 수 있으면 부상을 최소화해.”
“알았어, 그리고 저건 내 거야. 손대지 마.”
아셀라의 말에 테펜텔이 고개를 끄덕이며 포르를 노려보았다. 다른 놈들의 방해로 벌써 두 번이나 포르를 놓쳤다. 이번엔 반드시……!
포르를 처리하고 거슬리는 궁수도 처리하면 그나마 좀 순탄할 것이다.
하필 피스토레 측에 있던 테센트루아 성기사가 조금 전 싸움으로 신의 곁으로 가 버렸다. 남은 건 성력을 쓸 수 없는 성기사와 물약 몇 개뿐이었다.
가장 맨 앞에 달려오는 포르를 바라보며 아셀라가 나지막이 테펜텔에게 말을 던졌다.
“테펜텔, 버틸 수 있겠어?”
“이래 봬도 체력은 좋은 편이라고.”
테펜텔은 입꼬리를 히죽 올렸다. 철퇴를 든 손이 조금씩 떨리고 있었지만, 이 정도는 돌아가서 잔뜩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고 늘어지게 자면 되는 것이다.
“전하, 어서 가셔야 합니다.”
테펜텔과 아셀라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린체의 기사는 피스토레에게 다가와 그를 독촉했다. 어서 떠나지 않으면 발목이 묶인다.
그런데 피스토레의 얼굴이 이상했다.
“……황태자 전하?”
“아셀라!”
의아함을 느끼고 자신의 팔을 잡으려던 기사를 밀치고 뛰어나간 피스토레가 그녀의 팔을 붙들었다. 에타이들과의 간격을 재던 아셀라의 몸이 크게 휘청거리며 팽팽하던 긴장이 깨졌다.
피스토레를 따라오던 린체의 기사도, 아셀라의 옆에 있던 테펜텔도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나도 잘할 수 있어! 실수를 한 건 미안해. 하지만 나도, 나도…….”
아셀라는 그런 피스토레를 돌아보지 않고 에타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젠장, 기회를 놓쳤다. 이미 아셀라가 봐 두었던 나무를 훌쩍 지나 이리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도……!”
“피스토레.”
아셀라는 그제야 피스토레를 바라보며 옅게 웃었다. 평소와는 명백히 다른 웃음이었다.
어. 피스토레의 눈이 다른 의미로 커다래졌다.
아셀라와 아주 오랫동안 지내온 피스토레는 아셀라가 제대로 열 받았을 때 어떻게 행동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웃지.
“켁!”
아셀라의 미소에 바로 제정신으로 돌아온 피스토레가 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깨닫기도 전에 몸이 공중으로 들렸다. 아셀라가 한 손으로 가볍게 피스토레의 멱살을 잡고 끌어 올린 탓이었다.
“으악! 황태자 전하! 다, 단장님, 그러시면 안 됩니다!”
“아하하학!”
발을 버둥거리는 피스토레와 열 받아 피스토레의 멱살을 움켜쥔 아셀라를 보고 주변 사람들은 경악에 질렸다. 린체의 기사는 충격에 바로 달려와 아셀라를 말렸고, 다른 사람들은 놀라 그대로 굳었다. 그리고 테펜텔은 옆에서 폭소를 터트렸다.
“아, 아셀라. 내가 정신이 나가서. 내가 잘, 못을……. 커헉.”
피스토레가 필사적으로 잘못을 빌었다. 아셀라의 힘은 아까 타스가 불러왔던 환상 속 아버지의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방금까지 귓가에 메아리치던 타스의 목소리와 아버지의 환상이 함께 사라졌다.
“제발 황태자 전하를 내려놓아 주십시오! 그거 황실 모독죄입니다! 반역죄라고요! 단장님, 제발!”
린체의 기사가 어찌할 줄 몰라 하며 아셀라와 피스토레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황가의 위신이 밑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실제로 황족의 몸에 이리 무례하게 손을 대면 사형이었고, 반역죄로 몰려 가문 전체가 사라질 수도 있었다.
부하의 말을 들으며 아셀라는 오히려 손에 힘을 줬다. 그런데 그게 뭐, 어쩌란 말인가. 이 나라에 자신을 대체할 인간이 있던가?
아셀라는 오히려 손에 힘을 줬고 테펜텔의 웃음소리가 커다래졌다. 테펜텔과 조금 친해진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피스토레.”
“으, 응!”
시간이 조금 흐르고, 아셀라가 아직도 미소를 유지한 채 그의 이름을 부르자 피스토레가 미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한 생각에 침몰되지 말고 가만히 내 말이나 따라.”
“네!”
경쾌한 대답이 울려 퍼지고 나서야 피스토레는 땅으로 내려올 수 있었다. 허억, 헉. 거친 숨을 몰아쉬며 피스토레는 자신의 목덜미를 매만졌다.
얼굴에 웃음기가 잔뜩 남은 테펜텔이 피스토레의 등을 쳐 줬다.
“……단장님.”
린체의 기사가 아셀라의 옆에 서더니 조심스레 그녀를 불렀다. 피스토레가 도망치기엔 이미 늦었다.
“쯧, 이러나저러나 남아 있게 되었군.”
아셀라는 눈을 찡그렸다. 최대한 안전한 곳에 있게 해 주고 싶었는데. 아까 도망친 놈들도 다시 합류했는지 지금 달려오는 에타이들의 수는 어마어마했다.
“저기 있다, 잡아라!”
가장 맨 앞에서 말을 타고 달려오던 에타이가 소리를 질렀다.
“온다.”
다시 긴장이 흘렀다. 테펜텔은 언제든 뛰어나갈 수 있게 다리에 힘을 주었고.
“야아아악! 저, 저 곰 놈이!”
그 힘으로 고함을 내질렀다.
갑자기 숲속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튀어나온 나머지 레너드 용병단이 에타이들을 공격했고, 사이레인의 도끼에 타고 있던 말을 잃은 포르가 그대로 낙마했다.
“여보야, 내가 왔어!”
사이레인은 피가 뚝뚝 흐르는 도끼를 번쩍 치켜들고는 아셀라를 보며 해맑게 웃어 보였다. 자신의 목표를 뺏겨 분에 날뛰는 테펜텔 따위 조금도 보이지 않는 듯한 미소였다.
사이레인이 엠릭을 처리하고 가장 먼저 달려간 곳은 당연하게도 타스의 저택이었다. 으리으리했던 저택은 불길에 휩싸여 무너지고 있었다.
보통 불길이라면 저택이 이렇게 순식간에 무너질 리가 없을 텐데. 사이레인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화약을 설치해 놨었나?”
사이레인을 따라온 한 용병이 중얼거렸다. 그래, 화약을 설치해 놨나?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결과가 나올 리가 없었다.
미친놈들! 사이레인은 입술을 잘근 깨물고 무너지는 저택 가까이 다가갔다.
거대한 입구는 가장 먼저 불길에 휩쓸렸는지 무너진 저택 일부에 막혀 있었다. 어디 들어갈 틈이 없나? 저 안에 아셀라가 있을 텐데.
불길 속에 갇혀 있을 자신의 아내를 생각하니 마음이 급해졌다.
“사이레인!”
결국, 사이레인은 손을 뻗어 아직도 불타고 있는 돌덩이를 움켜잡았다. 치이익. 뜨거운 돌이 손에 닿으며 살이 익는 소리가 들려왔다. 놀란 사람들이 그를 말리기 시작했다.
“위험해, 화상 입을 거야!”
“비켜!”
사이레인은 자신을 말리는 놈들을 팔로 밀어내며 유일한 저택의 입구를 막고 있는 돌 무리를 치우기 시작했다. 빨리 저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어서, 어서 빨리. 들어가야 해.
“자, 잠깐만! 대장. 저기 저길 봐 봐!”
한 용병이 사이레인의 몸을 잡고 어딘가를 가리켰다. 땀으로 범벅이 된 사이레인의 눈이 용병이 가리키는 곳으로 향했다. 말을 타고 있는 에타이는 사이레인도, 나머지 레너드 용병들도 아는 사람이었다.
사이레인은 들고 있던 돌을 떨어트렸다. 숲 어딘가를 가리키며 제 옆에 있는 사람과 뭔가를 중얼거리다 무기를 들고 어딘가로 향했다.
“저거…… 포르의 시종 놈 아니야?”
늘 포르의 옆에 찰싹 붙어 다니던 놈이었다. 저놈이 있다면 근처에는 반드시 포르가 있다고 생각해도 좋을 정도였으니.
“포르가 저 근처에 있나?”
“그러겠지. 포르에게서 떨어지면 죽는다고 믿는 놈이니까.”
나머지 용병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사이레인을 말리던 남자는 그를 붙잡은 손을 놓았다.
“사이레인, 저쪽으로 가 보자. 나는 만나 본 적 없지만, 네 아내는 대단한 사람이라며. 아직도 불길에 갇혀 있지는 않을 것 같다. 오히려 저쪽이 더 확률이 높아 보여.”
그럴지도 모른다. 사이레인과 레너드 용병단이 솟구치던 연기를 보고 달려왔을 땐 시간이 꽤 흐른 뒤였다.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에타이 놈들이 거치적거리던 것도 있었지만, 여기까지의 거리가 멀었으니까.
남자는 재빠르게 자신의 품에서 수통을 꺼내 화상을 입은 사이레인의 손에 쏟아부었다. 화상을 입은 자리에 물이 지나가며 조금 고통이 나아졌다.
“가자. 나머지 놈들이 죄다 저리로 몰려간 모양이니 네 아내를 도와주러 가자.”
“……그렇게 그놈을 따라와서 중간에 미리 매복해 있었지.”
사이레인이 도끼를 휘두르며 말을 끝내자 아셀라가 흐응, 작게 콧소리를 냈다.
그래, 그랬단 말이지. 어쩐지 늦는다 싶었더니 매복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보다는 자신을 걱정했다는 말에 흡족함이 밀려왔다.
아셀라가 달려드는 에타이를 길쭉한 다리를 이용해 그대로 걷어차며 물었다.
“내가 걱정됐어?”
“그럼!”
사이레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셀라의 뒤에서 달려드는 놈을 신의 곁으로 보내 주더니 상체를 조금 돌려 아셀라를 바라보았다.
“얼른 오고 싶었는데, 미안…….”
말끝이 흐려지고 커다란 덩치를 한 남자가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그 모습을 보며 아셀라는 옅게 웃었다. 아까 피스토레에게 보여 준 웃음과 언뜻 보기에는 비슷해 보였지만, 전혀 다른 의미였다.
‘귀여워라.’
전쟁 중만 아니었더라면 저 머리를 마구 쓰다듬어도 됐을 텐데. 아셀라는 아쉬운 마음에 작게 한숨을 흘리며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팔을 뻗어 사이레인의 손을 잡았다.
그의 말대로 커다란 손은 화상을 입고 여기저기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부드러운 실크가 닿기만 해도 쓰라릴 텐데 이 상태로 도끼를 잡고 휘두르다니.
아셀라는 물약 뚜껑을 열어 그대로 사이레인의 손에 쏟아부었다.
“이제 좀 괜찮을 거야.”
비록 성력에는 미치지 못해도 린체의 기사단이 보급받는 물약은 꽤 좋은 것이었으니 이 정도 화상은 금방 회복되리라.
“아셀라…….”
사이레인이 감동한 듯 눈물을 글썽이며 아셀라를 내려다보았고 그녀는 다시 미소 지어 보였다. 훈훈한 광경이었다. 비록 싸우는 중만 아니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누가 저 둘에게 우리 아직 전투 중이라고 말해 줄래?”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테펜텔이 눈을 이상하게 뜨며 말하자, 마침 옆에서 에타이와 대립하고 있던 린체 기사와 피스토레가 동시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는 감히 저 두 분 앞에 설 용기조차 없습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네.”
잠시 둘을 바라보다 결국 테펜텔이 한숨 쉬며 몸을 움직였다. 용기 있는 내가 나서야지. 그렇게 대답하며 테펜텔은 잡고 있던 에타이를 그대로 내던졌다.
“거기 감동적인 연인분들. 타스가 도주한 곳을 알아냈어.”
그러면서 한 방향을 가리켰는데 그곳은 라니스 숲 가장 안쪽으로 가는 곳이었다.
“타스 놈, 라니스 숲 안쪽을 가로질러 가는 도주로를 몰래 만들어 놨었나 봐. 포르 놈이 말했어.”
사이레인에게 제 목표를 빼앗긴 줄 알고 날뛰던 테펜텔은 포르가 죽지 않았다는 걸 알자마자 그대로 달려들었고, 세 번째 싸움에서 포르는 도망치지 못했다. 그리고 마침내 테펜텔은 승리했다.
싸움에서 진 포르는 목숨을 살려 주는 대가로 자신이 아는 것을 모두 불었고, 거기에는 타스와 그녀만이 알고 있던 비밀 도주로도 포함되어 있었다. 엠릭은 모르는 사실이었다.
“저리로 도망쳤다고?”
“그렇다던데. 철퇴를 내보이니까 식겁해서 줄줄 불었어.”
내 철퇴는 진실의 철퇴라고. 고향에서도 철퇴만 들이밀면 다들 진실만을 말하더라고. 그렇게 말을 끝내며 테펜텔은 자랑스러운 듯 가슴을 펼치며 웃었다.
아셀라는 그런 테펜텔을 가볍게 무시하며 주변을 훑었다.
레너드 용병단과 사이레인이 돌아와 준 덕분에 상황은 호전되었다. 하지만 아셀라가 자리를 뜨기에는 아직 위태로운 감이 남아 있었다.
‘그냥 나 말고 다른 사람을…….’
생각에 빠져 있던 아셀라의 등을 누군가가 가볍게 밀었다. 놀란 아셀라가 뒤를 돌자 옅게 웃고 있는 피스토레가 보였다.
“피스토레?”
“다녀와, 아셀라. 너는 타스를 꼭 잡고 싶어 했잖아.”
그렇게 말하며 피스토레는 어서 가라는 듯 아셀라의 등을 밀었다.
“네 빈자리는 내가 최선을 다해서 메꿔 볼게. 내 실수로 벌어진 일이니 내가 책임지겠어.”
아셀라를 바라보는 피스토레의 얼굴은 아까보다 훨씬 좋아 보였다.
“……네 실수만은 아니야. 타스 놈이 마도구를 풀고 도주할 수 있었던 건 내 실수였으니까.”
마도구는 섬세하다. 큰 충격을 받으면 도구에 새겨진 마법진이 깨지거나 흐려지면서 마력의 흐름이 바뀌어 제 역할을 못 했다. 그래서 아셀라는 일일이 부수는 것보다는 마도구를 바닥에 떨궈 충격을 주는 쪽을 선택했었다.
그런 마도구가 깨지지 않고 타스가 묶여 있는 곳까지 굴러갔을 줄이야. 운이 좋아도 억세게 좋은 놈이었다.
“그러니 너무 너 자신만 탓하지 말라고.”
아셀라는 씁쓸한 얼굴로 피스토레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말에 피스토레의 눈이 동그래지더니 이내 소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네가 실수하는 건 처음 봐.”
새로운 발견을 했다는 듯 밝아진 피스토레를 보며 아셀라는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다녀온다.”
“네 빈자리는 내가 잘 메꿔 볼게.”
그 말을 끝으로 아셀라는 타스가 도주했다는 방향으로 완전히 몸을 돌려 발을 옮겼다.
“사이, 가자.”
많이 데려갈 필요는 없겠지. 그녀의 말에 사이레인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연스럽게 아셀라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빠른 속도로 타스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걸을 때마다 허벅지까지 자란 풀들과 하늘을 가릴 정도로 우거진 나무들이 두 사람의 길을 방해했다. 울창한 숲은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까딱하면 길을 잃어버리기 좋았다.
거기다 몬스터에 사람도 잡아먹는 들짐승들도 들끓었다. 그런 것들에게 걸렸다가는 시간이 지체돼 타스를 놓치기 쉬울 것이다.
“대강 어디쯤 도주로가 있을지 짐작이 가.”
다행히도 사이레인은 에타이들 못지않게 라니스 숲에 익숙했다. 그간 에타이들이 이리저리 살뜰하게 부려먹는 바람에 자연스레 숲 지리를 익힌 것이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동물 무리가 있는 곳을 피해 어디론가 아셀라를 이끌었다.
“예전에 한 놈이 이 근방에서 이상한 걸 봤다고 말해 준 적 있어.”
처음 레너드 용병단이 요새로 들어왔을 때, 한 사람이 길을 잃고 말았다. 나름 길을 잘 찾는 놈이었지만 울창한 숲은 쉽게 요새로 가는 길을 알려 주지 않았고, 그렇게 돌고 돌다가 이 부근까지 도달했다.
길을 잃었던 그가 본 것은 무언가를 만들러 가는 듯 도구를 지고 있는 평민 무리와 그들의 선두에 서 있는 타스였다. 호기심에 수풀에 숨어 평민 무리를 따라갔다가 다시 따라 요새로 돌아왔더라고.
그렇게 말하며 사이레인은 마뜩잖다는 듯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후에 그놈이 본 평민들은 요새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하더군.”
입막음한 거지.
사이레인의 말에 아셀라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 부근이 맞겠구나. 슬슬 눈에 보이는 꺾인 나뭇가지나 발자국이 두 사람의 예상이 맞았다는 걸 여실하게 알려 주었다.
확신을 하고 조금 더 나아가자, 숲에서는 보기 힘든 색의 옷을 입은 사람이 허겁지겁 도망치는 게 보였다.
타스다. 아셀라와 사이레인이 동시에 무기에 손을 얹었다. 아셀라는 눈짓으로 숲 안쪽을 가리켰다. 사이레인에게 저리로 돌아가 앞을 가로막으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뒤를 친다면 쉽게 잡을 수 있겠지.
말뜻을 알아들은 사이레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숲 안쪽으로 몸을 틀었고.
“셀바토르 단장님!”
갑자기 튀어나온 누군가에게 가로막혔다.
*
꼴사납다. 타스의 머릿속에 가득 찬 한 마디였다. 팔 하나는 사라지고, 아끼던 보랏빛 옷도 엉망이 되어 버렸다. 저번 요새에서 탈출할 때도 이렇게 참혹하진 않았다.
게다가 그 당시 저 괴물에게 도망칠 때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다음에는 반드시 자신이 괴물을 사로잡겠다고, 그렇게 다짐했었는데.
타스는 몰려드는 참혹함에 이를 갈았다. 또 이렇게 추한 꼴을 보여 가며 도망칠 줄이야. 그것도 단 한 사람 때문에!
‘됐어. 그분에게 가면 되는 거야.’
타스는 자신이 그분을 배신하고 피스토레에게 붙으려고 했던 사실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어차피 그 사실을 아는 에타이 놈들은 다 죽을 테고, 피스토레나 셀바토르가 그분에게 그 사실을 말하지도 않겠지. 그분과 그들은 사이가 나쁘지 않은가.
거기다 그분은 자신의 배신을 모를 것이다. 그분은 꾸준히 르카디우스 측 정보를 자신에게 물어다 줬으니까.
덕분에 타스는 용병 놈들의 도움으로 사슴과 함께 들어온 첩자를 잡을 수 있었고, 그놈의 이름을 팔아 르카디우스 측에 들어가는 정보를 조작할 수 있었다.
이번에 잠입한 놈들 중 누가 성기사인지 친절하게 초상화까지 보내 준 분이 그분이었다. 비록 평소와는 다른 방법으로 정보를 보내 조금 의아스러웠지만, 정보는 모두 타스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그놈들은 내 뒤에 누가 있는지도 감도 못 잡고 있지.’
좋다. 더더욱 완벽하다. 셀바토르와 그 멍청한 황태자가 자신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꼴을 가장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잠시 만족감이 얼굴에 흘렀다.
좋은 구경을 하면서 몸을 숙이고 잠시 그분의 그림자 속에 묻혀 있자. 몸이 회복되고 때가 되면 반드시 튀어나와 셀바토르, 저 괴물을 죽이고 말리라.
‘나를 배신한 용병 놈들도 반드시 죽여 주마.’
반드시, 반드시! 이 치욕을 갚고 말리라!
“……!?”
거듭 다짐하며 필사적으로 도주하던 타스를 누군가 확 낚아채 이끌었다. 어느새 타스는 저항할 틈도 없이 거대한 바위 뒤로 이끌려 갔다.
“누구냐!”
“쉿, 조용히 하십시오, 타스 님. 들킵니다.”
필사적으로 타스의 입을 막으며 주위를 살피는 남자는 린체 기사단복을 입고 있었다. 린체 기사단, 그 여자가 이끄는 기사단이 아닌가. 끝인가?
타스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걸 느끼며 빠르게 자신의 품속에서 단도 하나를 꺼내 남자에게 겨눴다. 이렇게 잡힐 수는 없었다.
마지막 발악이라도 해 보려는데, 갑자기 남자가 환한 웃음을 머금었다.
“그 단도로는 저를 죽이실 수 없습니다. 타스 님.”
어쩐지 강아지를 닮은, 순박해 보이는 남자는 눈가를 접으며 웃더니 허리춤에 달린 주머니에서 물약 하나를 꺼내 타스에게 내밀었다.
“이걸로 일단 상처를 치료하십시오.”
다른 신전도 아닌 테센트루아 성기사단의 축복을 받은 물약을 잠시 바라보고 있던 타스가 입꼬리를 올렸다. 이자는 적이 아니다. 진짜 적이었더라면 바로 힘으로 자신을 제압하지, 자신을 지금처럼 물약까지 줘 가며 회유할 이유는 단 하나도 없었다.
“그분이 날 위해 보낸 건가?”
“……예, 그분께서 타스 님을 도우라 저를 보내셨습니다. 최근에 받으신 정보 역시 제가 보낸 것입니다.”
대답이 한 박자 늦었다. 어쩐지 어리숙해 보이는 남자를 바라보는 타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정말일 수도 있지만 반대의 경우일 수도 있으니 확인해 볼까.
“마셔 봐.”
“네?”
갑작스러운 타스의 말에 남자의 눈이 동그래졌다.
“물약을 먼저 마셔 보라고. 그대는 린체 기사단복을 입고 있지. 내 적이 아니라는 걸 조금이라도 확인시켜 줘야 하지 않겠나?”
타스의 말에 남자는 잠시 입술을 깨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눈에 바로 보이는 걸로 입증하겠습니다. 마시는 건 후에 효과가 나타날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게 말한 남자는 바로 허리춤에 달려 있는 검을 빼 들어 그대로 자신의 팔을 그었다. 피가 주르륵 흘러 땅으로 뚝, 뚝 떨어졌다.
고통에 이를 악물면서 남자는 보라는 듯 타스에게 자신의 팔을 내밀었고 그 상처에 물약을 뿌렸다. 물약이 닿자 깊은 상처가 점점 옅어지기 시작했다.
그제야 남자는 이를 물고 깊은 숨을 토해 냈다. 이마에 맺혀 있던 땀이 턱을 타고 땅으로 떨어졌다.
“그분께서 나를 위해 보낸 게 확실하군.”
물약이 가짜가 아니라는 건 확인했다. 타스는 웃으면서 남은 물약을 낚아채고 그대로 들이켰다. 물약을 마시자마자 고통이 사라지며 몸의 피로감 역시 순식간에 날아갔다.
“……믿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생각보다 고통이 심했는지, 남자는 옅은 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럼 제 말을 따라 주시기 바랍니다. 저기 보이는 나무 밑에 말 한 마리를 묶어 두었습니다. 그걸 타고 도주하십시오.”
남자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는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뒤에 따라오는 사람들은 제가 막도록 하겠습니다.”
말을 들은 타스는 고개도 끄덕이지 않고 바로 몸을 돌려 나무가 있는 쪽으로 뛰어갔다.
다급해 보이는 뒷모습을 보며 남자는 하, 작게 웃음을 흘렸다. 저런 놈을 잡기 위해서 그 오랜 시간을 고생했단 말인가. 저절로 헛웃음이 튀어나올 정도로 작고 초라한 뒷모습이었다.
됐다. 이제 끝이다. 저놈과 싸움도, 몇 년을 괴로워했던 이 감정도 그리고 자신 역시 오늘로써 끝이 날 것이다.
얼마나 괴로웠었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천재라 불리며 살아왔던 자신은 어느 순간 하나의 벽도 넘지 못하는 평범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동경하는 이는 끝없이 나아갔다. 자신이 손끝도 미치지 못하는 벽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가볍게 밟고 지나가며, 단 한 번의 막힘도 없이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비교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아니, 동경을 시작한 것부터가 잘못이었다. 한때는 더없이 순수했던 감정이 변질하고 변질하여 이상한 것이 되어 버렸다.
지금 자신이 하는 행동은 잘못되었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처음엔 아주 작은 일이었다. 행동하면서도 이런 추잡한 짓까지 한 스스로에게 경멸감이 들었지만, 곧 자신의 행동이 흠집 하나 낼 수 없다는 걸 알고 나서부터는 점점 행동이 거칠어졌다. 결국 타스에게 정보를 넘기는 일까지 하고 말았다.
첩자로 들어갔던 레이셀의 존재를 알린 것도 그였다. 선배이자 조언자였던 레이셀의 죽음은 남자의 밑바닥에 남아 있던 아주 조금의 마음도 사라지게 만들었다.
그러니 이 전쟁 중에 가문의 이름을 팔아서까지 이런 약을 구했지. 남자는 자조적으로 웃으며 품속에 넣어 둔 병을 만지작거렸다. 물약과는 다른 병이었다.
“……크레시벨 경.”
천천히 고개를 들자 자신을 내려다보는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아셀라 벤칸 셀바토르, 그의 단장이자 오랜 시간 동경했던 사람이었다.
“단장님.”
크레시벨은 여느 때와 같이 환한 웃음을 지으면서 아셀라의 앞으로 걸어갔다.
“여기서 뭘 하는 거지? 경이 맡은 임무는 이게 아닐 텐데.”
아셀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도대체 왜 여기에 크레시벨이 있는 걸까. 갑자기 타스가 없어져 뛰어왔더니 크레시벨이 타스가 있어야 할 자리에 대신 서 있었다.
“단장님! 임무를 무단으로 이탈한 죄는 추후에 달게 받겠습니다. 하지만 일단 제가 한 일을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크레시벨은 눈을 빛내며 아셀라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단장님, 제가 타스를 잡았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라 제가요.”
“너 뭐야.”
천천히 아셀라와의 거리를 좁히는 크레시벨을 막은 건 그녀의 옆에 서 있던 사이레인이었다. 크레시벨은 사이레인을 빤히 쳐다보더니 뒤늦게 사이레인이 누구인지 알아본 듯 입을 열었다.
“……아, 레너드 용병. 죄송하지만 단장님과 할 이야기가 있으니 그쪽은 빠져 주시기 바랍니다.”
“아니. 그건 안 되지.”
사이레인은 시선은 그대로 크레시벨에게 고정한 채, 천천히 도끼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너같이 수상쩍은 놈을 우리 여보야에게 가까이 보내라고?”
“말이 심하시군요. 부디 주제 파악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어엿한 린체 기사단 소속이니까요.”
“일개 용병인 나도 임무지를 이탈하는 게 얼마나 큰일인지 알고 있지. 그렇게 임무를 내팽개쳐 놓고 숲 안쪽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놈 말을 믿으라고? 개소리를.”
두 사람 사이에 살벌한 기운이 흘렀다. 크레시벨도 어느새 검손잡이에 손을 올리고 있었고 사이레인은 이미 도끼를 앞으로 내밀고 있었다. 결국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든 건 아셀라였다.
“크레시벨 경. 주제 파악을 해야 하는 건 아무리 봐도 경이군. 돌아가. 벌은 무거울 테니 각오해 두고.”
그렇게 말하며 아셀라는 크레시벨의 옆을 지나치며 그를 노려보았다. 아셀라의 눈빛에 당황한 듯 크레시벨은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사이는 내 남편이 될 사람이니 앞으로는 예의를 갖추도록.”
크레시벨이 타스가 어디로 갔다고 말을 하지도 않았건만, 아셀라는 정확히 타스가 향한 곳으로 발을 옮겼다. 타스가 마음 놓고 허겁지겁 도망치는 바람에 아까보다 더욱 많은 흔적을 남겨 준 덕분이었다.
“잠시만요!”
아셀라가 크게 휘청거렸다. 갑자기 뒤에서 크레시벨이 달려들었다.
여태까지 단 한 번도 자신을 이렇게 무례하게 잡은 사람이 없는데, 오늘따라 두 명이나 생겨났다. 피스토레와 크레시벨.
못마땅함에 얼굴이 저절로 일그러졌다. 마음은 안달이 났는데 자꾸만 잡히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단, 단장님. 혹시 저 용병과 결혼을 하신다는 말씀입니까?”
크레시벨은 무언가 쌓아 올린 것이 무너지듯 절박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를 무시하려던 아셀라가 돌연히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크레시벨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천천히 자신의 허리 쪽에 매달아 둔 단검에 손을 뻗었다.
“단장님, 말씀해 주십시오. 정말로 저런 떠돌이 용병과 결혼하십니까?”
“내가 누구랑 결혼하든 그건 경이 신경 쓸 일이 아니야.”
단검에 손이 닿았다.
“그게 왜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
갑자기 크레시벨이 고꾸라지듯 몸을 숙이며 소리를 내질렀다. 놀란 새 떼가 하늘로 날아오를 정도로 큰 목소리에는 깊은 절망만이 느껴졌다.
크레시벨이 얼굴을 들었을 때는 절망, 질투, 동경, 괴로움…… 수많은 감정이 섞여 오히려 아무런 감정조차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담담한 얼굴이 있었다.
“제가 너무 늦었네요, 단장님. 당신의 완벽함을 깨트리는 건 제가 먼저야 했는데. 용병 새끼에게 선수를 빼앗길 줄이야.”
뭐?
그 말에 열 받은 사이레인이 앞으로 나서기도 전에 크레시벨이 무언가를 아셀라에게 던졌고, 그녀는 재빠르게 단검으로 수상쩍은 물건을 쳐 냈다.
“큭!”
하지만 전부 피할 수는 없었다. 일부러 그렇게 만든 것인지 유리병은 충격에 쉽게 깨졌고 안에 들어 있던 액체 일부가 아셀라의 얼굴에 튀었다. 그녀는 그대로 짧은 비명과 함께 얼굴을 감싸 쥐었다.
뜨겁다. 액체가 닿은 얼굴 절반이 불에 탄 듯, 극심한 고통이 밀려왔다.
“하하, 또 그걸 쳐 내시다니 역시 단장…….”
크레시벨의 말은 그게 마지막이었다. 사이레인이 한 번의 도끼질로 그를 신의 곁으로 보내 주고, 다음의 도끼질로는 그의 목이 땅으로 내려올 수 있도록 도와주었기 때문이었다.
“아셀라!”
사이레인은 제 도끼도 내버려 둔 채 얼굴을 감싸 쥔 그녀에게 다가왔다.
척 보기에도 아셀라의 상태는 심상치 않아 보였다.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피부는 끔찍할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다.
사이레인은 번쩍 아셀라를 안아 들었다.
“돌아가자! 일단 돌아가면…….”
성력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있던가? 사이레인의 숨이 가빠졌다. 없다. 한 놈은 죽었고 다른 한 놈은 성력이 고갈되었다고 했었지.
“아니야, 일단 돌아가자. 그놈 성력이 어느 정도 돌아왔겠지.”
사이레인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어서 돌아가야 한다. 조금이라도 빨리 돌아가 일그러진 얼굴을 어떻게든 되돌려 주고 싶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셀라가 제 품에서 내려갔다.
“아니, 괜찮아.”
아셀라는 한쪽 눈으로 사이레인을 바라보았다.
“타스를 잡아야 해.”
아셀라는 고통으로 엉망이 된 숨을 천천히 고르며 말을 이었다.
“여기서 돌아간다면 정반대 방향으로 가게 되지.”
만일 여기서 성기사가 있는 요새나 진영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분명 얼굴은 고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타스는? 그 끈질긴 바퀴벌레 같은 놈은 추후 더 큰 재앙이 되어 돌아올 게 뻔했다.
저번에도 그랬다. 요새를 부수고 참모진을 다 잡아 두었으니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녀의 예상과는 다르게 타스는 세를 꽤 불려 계속해서 발목을 잡았다.
이건 마지막 기회였다. 그러니 자신은 타스를 잡으러 가야 했다. 그게 자신의 의무였고, 자신이 원하는 일이었다.
“아픈 건 참을 수 있어.”
아셀라는 옅게 웃으며 사이레인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사이레인은 말없이 아셀라를 바라보다가 자신의 주머니 안쪽에서 붕대와 약통을 꺼내 들었다. 그러더니 커다란 손에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조심스럽고도 조심스러운 손길로 천천히 일그러진 얼굴에 약을 발라 주었다.
눈물과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청녹색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셀라가 어떤 마음으로 선택했는지 잘 알기에 그는 돌아가자는 말은 하지 않았다.
“……가자.”
약을 다 바르고 붕대까지 감아 주고 난 뒤에야 사이레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팔로 얼굴을 문대 눈물을 닦았다. 그러고 나서는 저 먼저 성큼성큼 타스가 있는 쪽을 걸어갔다. 빨리 잡아 요새로 돌아가겠다는 의지가 보여 아셀라는 작게 웃으며 그 뒤를 따랐다.
그러다 무언가가 생각난 듯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상체를 돌리자 쓰러진 크레시벨의 모습이 보였다. 크레시벨이 성인식도 치르지 않은 작은 견습 기사일 때부터 그를 봐 왔다.
어릴 적 아셀라를 떠오르게 할 정도로 빠른 성장에 기뻐하고, 천재라 불리며 자만해하다가, 벽에 가로막혀 절망하던 모습과 점점 뒤틀려 가던 모습을. 그래서 도와주었지만 뒤틀릴 대로 뒤틀린 크레시벨은 도움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단장인 자신을 목표로 삼고 사소한 것 하나하나를 본인과 비교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어 언젠가 일을 내지 않을까 했었는데…….
‘쯧, 못난 놈.’
아셀라는 혀를 찼다.
차라리 검을 뽑아 들고 자신을 죽이려 덤벼들지. 그러면 그걸 핑계로 죽을 때까지 두드려 패 줄 텐데. 그랬더라면 뒤틀린 게 좀 나아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크레시벨은 타스와 손을 잡는 만행까지 저지르더니 고작 자신의 얼굴을 좀 망가트리는 데 제 목숨을 걸었다. 한심하기 짝이 없는 선택이었다.
*
어느새 달이 머리 위에 떠 있었다. 숲길을 얼마나 달려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울창한 숲이라 속도를 내진 못했지만, 말은 충분히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이 이상 데려가긴 무리였다.
타스는 지친 말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그리고 고삐를 풀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젠장, 쓸모없는 놈.”
그분께서 보내신 린체 기사단복의 놈은 참 쓸모가 없었다. 타고 가라며 말을 준비해 준 것과 자신을 쫓아오는 이들을 막은 건 좋았지만, 말이 빈 몸이었다.
라니스 숲은 르카디우스 제국의 끄트머리에 있는 숲이라 수도까지는 어느 정도 여비나 식량이 필요했는데, 그런 작은 물건조차 없었던 것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놈은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놈이었다.
‘됐어. 여차하면 이걸 팔면 되는 거고.’
타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품속에 넣어 둔 보석들을 떠올렸다. 그간 요새에서 왕처럼 살아오며 모아 온 보석이었다. 하나하나가 한 가족이 몇 년 동안 풍족히 살아도 될 만한 값어치를 지닌 것들이었다.
이왕 그분의 그림자 밑에서 쉬기로 한 거, 여행도 다니며 지친 심신을 다스리는 것도 나쁘지 않지. 그렇게 생각하며 타스는 몸을 숙였다.
타스가 도착한 곳은 거대한 바위 두 개가 서로 기대고 있는 곳이었다. 그 밑을 샅샅이 훑던 타스가 바위틈을 가리고 있던 담쟁이 넝쿨을 걷어 내자, 몸을 숙여야 간신히 들어갈 만한 작은 문이 나타났다.
숨겨진 문을 보며 타스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위험한 사태를 대비해 몇 개의 굴을 파 두었다. 토끼 굴처럼 여러 입구를 지닌 굴은 숲 여기저기에 퍼져 있었다. 거대한 동굴에 있는 호수 밑에도 숨겨져 있었고, 자작나무 밑에서 숨겨져 있었다. 언제 어디서든 피신할 수 있게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타스가 바위 밑으로 반쯤 기어들어 간 그 순간, 갑자기 몸이 우악스러운 힘으로 이끌려 나왔다. 돌이 박힌 땅에 몸이 쓸리며 저절로 비명이 튀어나왔다.
“누, 누구야!”
“누구긴.”
커헉, 몇 시간 전에 느꼈던 고통이 다시 느껴졌다. 자신을 누르는 자의 발목을 있는 힘껏 움켜쥐고 주먹으로 때렸지만, 미동도 없었다.
간신히 시선을 올리자 붕대로 얼굴의 반을 가린 여자가 자신을 매섭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달빛을 등진 여자는 천천히 자신의 검을 치켜들었다.
안 돼.
타스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까처럼 운이 좋으면 좋으련만. 하지만 주변에는 그를 도와줄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자신이 여태까지 업신여기던 용병이 잘 가라는 뜻으로 손가락으로 제 목을 그어 주고 있을 뿐이었다.
안 돼. 나는 여기서 이렇게 죽을 수 없어.
“내가 손잡은 이가 누군지 알려 줄 테니 나를 살려 줘!”
타스는 필사적으로 외쳤다. 저들도 자신이 뒷배를 가진 걸 알았으니 그 정체를 궁금하게 여기겠지. 그분은 자신을 꽁꽁 감추었으니 정확한 정보를 아는 건 오롯이 자신뿐이었다.
“나만이 진실을 알고 있어, 나만이! 나랑 손을 잡은 게 누군지 너는 상상도 못 할걸, 셀바토르! 생각보다 그 사람은 너와 가까이 있다고. 손만 내밀어도 닿을 거리에…….”
제 생명을 살리기 위해 타스는 외쳤지만, 자신을 내려다보는 차가운 눈에 희망이 사그라드는 걸 깨달았다.
자신의 적수는 실수하지 않는 인간이었다. 전 요새에서 한 번, 아까 멍청한 황태자에게서 또 한 번 빠져나온 건 자신의 운을 다 썼기에 가능했다는 걸 깨달았다.
눈에 고여 있던 눈물이 주륵 흘러 흙바닥으로 떨어졌다. 정말 이대로 죽는 건가? 정말 이대로?
이게 찬란했던 자신의 인생의 끝이라고 생각하자 눈물이 계속해서 흘러내렸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었다. 왜 저 여자가 얼굴이 저렇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더 큰 상처를 입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야 자신이 조금이라도 편히…….
“아까 죽은 놈이겠지.”
그때였다. 타스의 귀에 사이레인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아까 죽은 놈?
‘설마 아까 그놈이 죽었나?’
저 여자 얼굴에 저런 상처를 남기고? 하지만 그분이 보낸 사람이 자신을 위해 죽는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던가. 그저 저들의 귀를 홀려 자신이 다른 쪽으로 도망쳤다고 그렇게 말해도 되는 것을.
저 여자의 얼굴을 다치게 하고 목숨을 내놓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끄나풀이 하는 것치고는 과한 처사였다.
‘아, 그렇구나.’
타스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는 지금 상황을 정확히 깨닫지는 못했지만, 자신에게 유리한 부분을 알 수 있었다.
저들은 자신에게 뒷배가 있다는 걸 알지만 누구인지 알지 못했고, 아까 만난 린체의 기사는 자신에게 거짓말을 한 또 다른 배신자였다. 그분은 아직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아아, 그분이…….”
타스는 일부러 절망적인 표정을 지으며 입을 다물었다. 침묵은 편리하다. 뭐든 좋을 대로 해석될 것이다.
이젠 저 여자가 든 검이 자신에게 내려오는 게 무섭지 않았다. 셀바토르에게는 더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으니까. 그분은 자신 못지않게 저 여자를 괴롭히고 괴롭히다가 결국 죽음에 몰아넣겠지.
꽃에 둘러싸여 있는 그분과 눈을 감은 채 쓰러져 있을 저 여자를 생각하니 모든 게 만족스러워졌다. 자신의 적에게 가장 큰 타격을 입힌 건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이 될 테니까!
“잘 가. 타스.”
그 말을 끝으로 타스는 눈을 감았다. 기나긴 전쟁이 끝을 맺는 순간이었다.
“휴…….”
아셀라는 아무렇지도 않게 검을 검집에 집어넣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데도 시선은 눈을 감고 숨을 거둔 타스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오랜 시간 자신을 괴롭혀 온 놈의 최후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조용했고, 초라했다.
혼란의 시대가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하였더라. 자신의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선대 공작들도 끝내지 못했던 시대가 이제 흘러가고 있었다. 다시 되돌아오진 않겠지.
‘……어쩐지 믿기지 않네.’
아셀라는 손을 쥐었다 폈다. 지금이라도 타스가 벌떡 몸을 일으키고는 ‘속았지, 셀바토르!’ 그러고선 공격을 퍼붓거나 도주할 것만 같아 몸 안에 퍼져 있는 긴장감이 사라지지 않았다.
거기다 크레시벨. 정말로 저놈의 뒷배는 크레시벨이 맞았을까? 그 의문 역시 머릿속에 꽉 차 있는 상태였다.
빈자리에 크레시벨을 끼워 맞추면 꽤 그럴싸하게 맞아 들어갔다. 크레시벨은 자신의 가까이에 아주 오랫동안 있었으면서 야망이 있었고 힘이 있는 가문의 출신이었으니까.
하지만 마지막이 자꾸만 걸리적거렸다. 크레시벨이 에타이와 손을 잡은 장본인이었더라면 굳이 그렇게 끝을 맺게 할 리가 없었다. 거기다 갑자기 침묵한 타스의 마지막 반응도 걸렸다.
머리가 아파져 아셀라는 눈을 찡그렸다. 끝없이 밀려오는 일에 속이 울렁거렸다. 그때 갑자기 뒤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고생했어, 여보야. 얼른 돌아가자.”
사이레인은 그런 아셀라를 꼭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다. 아셀라는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그러고는 그 안온한 품에서 길게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긴장감이 서서히 사라지며 피곤함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게 느꼈다. 크레시벨의 일이며, 타스를 죽인 것에 대해 피스토레에게 말해야 하는 일과 저 시체라도 수도로 데려가야 하는 일 등의 뒤처리가 남았지만, 지금은 일단 쉬고 싶었다.
아셀라가 자신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 오자 사이레인은 조심스레 더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아셀라는 눈을 꼭 감은 채 환하게 웃었다.
“그래, 돌아가자.”
아셀라와 사이레인이 타스의 시체와 함께 요새로 돌아오고 나서는 일은 막힘없이 진행되었다. 타스가 죽고 포르도 붙잡힌 데다가 엠릭은 절벽 밑으로 떨어져 행방불명이 되었다. 한 무리를 이끌 사람이 없는 상태에서 나머지 에타이들을 제압하는 건 일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끝낸 후 진영으로 돌아가자, 총공격을 끝내고 돌아와 있던 엘로스와 다른 테센트루아 성기사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
조금 전까지 신께 감사 기도를 드리며 그 누구보다 환하게 웃고 있던 엘로스의 얼굴은 참담해 보였다. 그가 들었던 보고에는 아셀라의 상태는 빠져 있었으니까.
약을 바르고 붕대로 감는 등의 응급처치를 하긴 했지만, 붕대 밑 얼굴은 참혹했다. 거기다 미세하게 느껴지는 마력의 기운이 성력을 방해하고 있었다.
혹시나 싶어 더욱더 성력을 불어넣어 보았지만, 얼굴에 난 상처는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엘로스는 작게 혀를 찼다. 아마도 크레시벨 경이 뿌렸다는 그 물약은 목숨을 빼앗는 용도가 아닌, 오롯이 깊은 상처를 남기기 위해 만들어진 게 분명했다.
“조금이라도 일찍 오셨더라면…….”
물약에 들은 마력이 제대로 활성화가 되기 전이었더라면 아니, 막 활성화가 됐을 때쯤이었더라면 어떻게 해서든 손을 더 써 볼 수 있었을 텐데. 안타까움과 참혹함에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엘로스는 말을 잃어 갔다.
결국 먼저 입을 연 건 뒤쪽에 서 있던 사이레인이었다.
“안 됩니까?”
사이레인의 질문과 몰려드는 시선에 엘로스는 입술만 깨물다 간신히 대답을 꺼냈다.
“……시간이 너무 지났습니다. 안타깝지만 제 힘으로는 더는 차도가 없을 듯합니다.”
엘로스의 말에 피스토레가 앞으로 나섰다.
“엘로스 경께서는 신의 검이라 불리는 테센트루아 성기사단의 단장이 아닙니까.”
엘로스가 테센트루아 성기사단의 단장을 맡을 수 있었던 이유에는 경험과 모두의 선망을 받은 인품도 있었지만, 고위 사제와 비슷할 정도로 강한 성력도 있었다. 그래서 엘로스만을 믿었는데.
“크레시벨 경이 뿌린 물약은 특수한 물약입니다. 물약을 제조할 때 특수하게 처리한 마도구의 가루를 넣어 만드는데 추후 마력을 발휘해 성력을 방해하게 하지요. 르카디우스 제국 측에서는 수입이 되지 않는 물건일 텐데.”
“설마 크레시벨 경, 가문의 이름을 팔아서…….”
바티네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팔짱을 끼고 있던 테펜텔이 슬그머니 피스토레의 허리를 쿡 찔렀다.
“그 크레시벨 가문이 저런 물약을 구할 수 있는 가문인가 보지?”
“……크레시벨 가문은 꽤 큰 규모의 상단을 거느리고 있었던 데다가 물약 수입에 힘을 쏟아붓고 있었으니까.”
피스토레는 마른세수를 하듯 얼굴을 쓸며 대답했다.
“세상에…….”
천막에 있었던 모든 이들이 할 말을 잃고 차가운 얼음처럼 굳어 버렸다. 이 전쟁 통에 가문의 이름을 팔아서 저런 걸 구했을 줄이야.
하지만 아셀라만큼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렇군요.”
마치 남의 일이라도 되는 듯 아셀라는 담담한 목소리로 이해했다. 오히려 굴곡 없는 그 목소리가 모두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셀바토르 경. 먼저 수도로 올라가십시오. 제가 바로 최고 사제님을 만날 수 있게 편지를 써 놓겠습니다.”
엘로스는 다급하게 아셀라의 팔을 잡았다. 자신은 못 하더라도 최고 사제께서 성력을 써 주시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셀바토르 경은 이제 전쟁 영웅으로 이름을 드높일 사람이었다. 어느 정도의 상처는 과거 영광이라 말할 법하지만, 이 정도로 큰 상처는…….
“처음보다도 상처가 옅어졌군요. 나는 괜찮습니다.”
아셀라는 고개를 저으며 옆에 놓아둔 작은 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엘로스의 성력 덕분인지 아니면 사이레인이 발라 준 물약 덕분인지, 처음 봤을 때보다 흉은 아주 옅어져 있었다.
그래도 남들이 보기엔 끔찍한 수준이었다. 천천히 제 얼굴에 붕대를 감으며 아셀라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피스토레에 테펜텔, 엘로스에 바티네, 거기에 사이레인까지. 모두가 이 천막에 몰려 있었다.
“지금 이 천막에 다들 모여 있으면 안 될 텐데요. 내 부단장에게만 일을 주지 말고 모두 나가서 수도로 올라갈 준비를 하세요.”
수도로 올라갈 준비를 해야 할 지금이 가장 바쁠 때인데 모두 천막에 몰려 있다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아셀라의 말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슬그머니 시선을 교환한 사람들이 하나둘 밖으로 나갔다.
“아셀라.”
남은 사람은 사이레인과 아셀라, 단둘뿐이었다. 사이레인은 천천히 아무렇게도 않게 제 할 일을 하려는 아셀라에게 다가왔다. 그새 울었는지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눈가는 붉어져 있었다.
“그…… 최고 사제인가 하는 사람에게 가 보면 안 될까. 모르는 일이잖아.”
사이레인의 말에 아셀라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저렇게 사이가 울면서 부탁하니 들어주고 싶긴 했다. 아마 시간이 넉넉했더라면 사이의 말에 따랐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최고 사제에게 가는 건 시간 낭비일 뿐이었다.
“엘로스 경은 고위 사제와 비슷할 정도의 성력을 가지고 계시지. 그런 경이 성력을 최대한 쏟아부었는데도 조금 옅어지기만 할 뿐 나아지지는 않았어.”
그러니 최고 사제가 성력을 쏟아부어도 이 상처는 조금 더 옅어지기만 할 뿐 낫지 않을 것이다. 혹시나 기적이 일어나면 없어질지도 모르겠지만, 기적을 고작 자신의 얼굴에 난 상처 따위를 없애는 데 쓰면 아깝지 않은가.
“엘로스 경의 말이 맞아. 시간이 너무 늦었어.”
아무리 그녀라 해도 이렇게 큰 상처는 입고 싶지 않았다. 그것도 얼굴이니 앞으로 꽤 불편하겠지. 그래도 자신이 이 상처와 맞바꾼 미래는 분명 달콤할 것이다.
아무도 죽지 않는 평화의 시대가 드디어 온 것이다. 피스토레에게 잘 어울리는 시대기도 했고, 자신이 늘어져라 잠을 자도 괜찮을 때였다.
거기다 원래 크레시벨이 노렸던 건 검을 잡는 오른팔이었다. 오른팔보다는 얼굴이 낫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이 상처도 썩 괜찮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아셀라…….”
그녀의 대답에 울고 마는 건 사이레인이었다.
“내, 내가 앞으로 이런 일 따위…… 이런 일 따위 절대로 안 생기게 해 줄게.”
울먹거리며 사이레인은 아셀라를 꼭 끌어안았고, 아셀라는 등을 토닥이며 작게 웃었다. 생각보다 그녀의 남편은 눈물이 많았다. 그래서 귀여운 거지만.
“사이.”
달래듯 천천히 뺨을 쓸자, 사이레인이 고개를 들고 시선을 맞춰 왔다. 이젠 코끝까지 붉어져 있었다.
“돌아가면 우리 결혼식도 생각해 봐야지.”
“결혼식.”
“서로 좋아하는 사람들만 부르자. 번거로운 절차는 다 생략해도 되겠지.”
그거 좋겠다. 이상한 놈들은 부르지 말고 간단하게 하는 거야. 셀바토르 공작가의 정원은 넓고 아름다우니 신전까지 가지 말고 정원에서 해도 괜찮을 것이다.
분명 돌아가자마자 제나가 잔소리를 퍼붓겠네. 자신에게 집사 일을 말도 없이 떠넘겼다고, 결혼식도 왜 이렇게 하냐고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분명 제나는 정원을 아름답게 꾸며 줄 것이다.
혼란의 시대가 끝나고 나서 첫 번째 결혼식이 될 테니 최고가 되어야 한다는 소리와 함께.
상상만 했는데도 제나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해 아셀라는 웃었다. 너무 오랫동안 저택을 떠나 있었더니 잔소리마저 그리울 지경이었다.
“그거 괜찮네.”
사이레인은 눈물진 눈가를 접으며 웃어 보였다. 분명 자신들의 결혼식은 멋질 것이다.
*
“안 된다.”
그 말 한마디에 소파에 앉아 있던 아셀라는 눈을 찡그렸고 사이레인의 눈은 몇 배로 커졌다.
분명 아무런 방해 없이 결혼 허락이 떨어질 줄 알았는데, 다른 사람도 아닌 공작 부인이 반대를 내놓았다. 놀란 듯 보이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공작 부인은 우아하게 찻잔을 탁자 위에 올려 두었다.
“어머니. 제가 누구와 결혼하든 어머니는 제 편이 되어 주신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왜…….”
얼굴의 반을 가리는 하얀 가면을 쓴 아셀라가 공작 부인을 부르자, 그녀는 할 말이 남았다는 듯 손을 들어 아셀라의 입을 막았다.
“그래, 내가 분명 그렇게 말했지. 원하는 사람이 없으면 결혼하지 않아도 된다고.”
공작 부인의 푸른 눈이 이상하게 굳어 있는 사이레인을 훑었다. 사이레인은 고개도 들지 못하고 탁자 위에 올라온 찻잔에 시선을 고정했다. 긴장감에 목울대가 꿈틀거렸다.
“하지만 용병은 안 된다.”
탁, 소리를 내며 공작 부인의 손에서 흔들리던 깃털 부채가 접혔다. 부인은 부채 끝으로 어리석은 제 딸을 가리켰다.
“용병은 명예를 내릴 수 없단다. 내 딸아.”
공작 부인의 말에 아셀라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런 딸을 바라보며 부인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내가 너에게 원하는 자를 데려오라 한 건 우리 가문은 그자를 위로 끌어 올릴 힘이 있기 때문이지. 그러니 네가 데려온 남자는 문제가 없어. 하지만 용병단을 이끌고 있다면 말이 달라지지.”
귀족은 용병대를 이끌지 않는다. 만일 이끌더라도 상단을 만들고 그 상단을 통해 이끄는 방식이었지. 사이레인처럼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다. 거기다 아셀라와 결혼하고 나서 용병 일 하며 떠돌아다니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아셀라가 뒤늦은 깨달음에 머리를 쓸어 올리고 있을 때, 공작 부인의 시선은 사이레인에게 닿았다.
“사이레인이라고 했나요.”
“네, 네!”
잔뜩 굳은 사이레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이레인, 레너드 용병단을 해체할 수 있나요?”
공작 부인의 질문에 사이레인의 얼굴에 긴장감이 사라지고 다른 감정이 떠올랐다.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런 사이레인에게 쐐기를 박듯 공작 부인은 단언했다.
“그대의 손으로 레너드 용병단을 해체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내 딸과 결혼할 수 없습니다. 사이레인.”
어차피 정해진 일이었다. 사이레인은 반듯하게 올렸던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아셀라가 숲속에서 자신을 꼬실 때부터 어렴풋이 느끼고 있던 것이 아니었던가. 저 손을 잡으면 자신은 더 이상 레너드 용병단에 머물지 못한다고. 그래도 해체를 말할 줄이야.
공작저를 빠져나와 번화가의 한 찻집에 자리를 잡은 사이레인은 답답한 마음에 차가운 물을 연이어 들이켰다. 가게 점원이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는 게 느껴졌지만, 지금 그에게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어쩌지.’
레너드 용병단은 그에게 있어서 집이었다. 힘겹게 싸우다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고, 자신을 맞이해 주는 사람들이 있는 곳. 그건 다른 레너드 용병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용병단을 자신의 손으로 해체할 수 있을까?
사이레인은 괜스레 제 손을 쥐었다 폈다. 상처로 가득한 손이었고, 다른 용병들도 같은 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같은 손을 가지고 결혼 때문에 그들을 내쫓는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어찌해야 할지 모르고 머리만 헝클어트리던 사이레인의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대장?”
사이레인이 고개를 들자, 부대장인 리스와 로인 그리고 다른 레너드 용병들 몇이 서 있었다.
사이레인을 따라 수도로 올라온 레너드 용병들은 셀바토르 공작저에서 마련해 준 숙소에서 묵고 있었는데, 마침 구경을 나온 듯 보였다. 아니면 자신이 걱정돼서 나왔다든가.
후자는 아닌 듯 보였다. 모두의 손에는 수도의 특산품이라고 크게 쓰여 있는 봉투가 들려 있었고, 커다란 밀짚모자를 쓰고 있는 사람도 보였다. 심지어 새 옷을 입고 자랑하는 놈도 있었다.
다들 수도 관광을 아주 즐겁게 한 듯 굉장히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얼굴에 반짝반짝 빛까지 났다.
나쁜 놈들, 타들어 가는 제 속도 모르고. 사이레인은 얼굴을 구기며 고개를 휙 돌렸다.
“뭐 해, 대장. 왜 여기 있어? 오늘 결혼 이야기가 잘 안 됐어?”
완전히 다 나은 로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자에 꾸겨 앉아 있는 사이레인을 내려다보았다.
로인 역시 ‘수도의 특산물! 작은 튀김 빵! 두 명이 먹다가 둘이 죽어도 모를 맛!’이라고 크게 쓰인 빵 봉투를 들고 있었다. 로인 놈은 글을 모르니 아마 유일하게 글을 읽을 수 있는 리스가 말해 준 걸 우르르 몰려가 산 듯 보였다.
커다란 찻집이 순식간에 고소한 튀김 빵 냄새로 가득 찼다.
“대장 차였어?”
“그런가 보다. 하긴, 그쪽 집안은 대단한 집안이라며.”
“대장이 뭐 어때서! 성질머리가 좀 더럽긴 하지만……. 그래도 나름 괜찮잖아.”
“맞아, 밥을 엄청나게 먹어서 식량 비축을 박살 내긴 해도 좋은 사람이라고.”
“요리한다면서 독극물을 만들지만, 나름 착한 대장이지.”
다들 동그란 튀김 빵을 우걱우걱 집어 먹으며 본인을 앞에 두고 앞담화를 시작했다. 다들 즐거운 얼굴로 밝게 사이레인을 까기 시작했다. 그간 묻어 놨던 말들이 전부 튀어나오는 듯했다.
이것들이. 사이레인의 얼굴이 점점 더 꾸깃꾸깃해졌다. 아까까지 느끼고 있던 애달픈 감정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게 느껴졌다.
“대장.”
한 봉지를 그대로 털어 넣은 리스가 손을 탁탁 털며 사이레인에게 다가갔다. 그러더니 맞은편 의자를 빼고는 그 자리에 털썩 앉았다.
“할 말이 있는데.”
“뭔데.”
사이레인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나쁜 놈들, 내가 얼마나 저희를 생각했는데! 자신의 앞에서 대담하게 앞담을 까다니, 이건 말이 좋게 나오려 해도 좋게 나올 수가 없었다.
삐졌냐? 로인과 다른 용병들이 사이레인 근처에 몰려섰다. 입가에 묻은 빵가루까지 닦아 낸 리스가 사이레인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또 무슨 이야기로 사람 화를 돋우려고? 귀도 기울이지 않겠다는 듯 얼굴을 구기고 있던 사이레인은 리스의 말에 순식간에 경악했다.
“대장, 우리가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말이야. 용병단을 여기서 해체하자.”
‘하는 건 어떨까.’라는 식의 의견을 묻는 말도 아니었다. ‘하자.’ 확신만이 있는 말.
거기다 다 같은 생각인지 사이레인의 주변에 서 있던 용병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오래전에 결정을 내린 듯 개운하고 담담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용병들 사이에서 당황한 건 사이레인뿐이었다. 그가 놀라서 몸을 일으키자, 의자가 큰 소리를 내며 뒤로 넘어갔다.
“용병단을 해체하다니?”
“앉아, 앉아서 이야기해.”
다행히도 한적한 평일이라 손님은 사이레인과 용병들뿐이었다지만 리스는 사이레인의 옷자락을 잡아당겨 그를 도로 의자에 앉혔다.
“너희 설마 내 결혼 때문에…….”
“아, 우리 대장. 자의식이 너무 강하네. 우리가 너를 그렇게 신경 쓸 리가 없잖아.”
로인이 웃으면서 그의 말을 빠르게 부정했다. 그러고는 어서 말하라는 듯 리스를 향해 턱짓했다.
“네 결혼 때문에 낸 결정도 아니고, 급하게 낸 결정도 아니야.”
리스는 그렇게 말하며 빈 빵 봉지를 구겼다. 마치 지금 자신이 하는 말은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라는 듯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사실은 너에게 듣고 계속 고민했어.”
사이레인에게서 그 말을 듣고 리스는 고민에 빠졌다. 들리는 바로는 르카디우스 제국의 황족과 유일하게 맞먹을 수 있다는 셀바토르 집안이 과연 그를 받아 줄까. 그리고 그건 다른 용병들도 마찬가지였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서도 긴장이 되지 않았던 건, 그 일보다 사이레인의 걱정이 앞장섰기 때문이었다.
리스도, 사이레인도 그리고 나머지 레너드 용병들도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어린 시절부터 같이 자라 왔다. 그러니 가족이 이상한 취급을 받는 건 원치 않았다. 소설 속 여주인공처럼 버려지는 게 아니냐며 글을 읽을 수 있는 용병 몇이 분통을 터트리기도 했다.
그렇게 고민하고 또 고민하다가 그날이 되었고, 리스는 일부러 요새의 문을 막고 추후 요새 안에 침입한 르카디우스 사람들과 합류하는 역할을 맡았다. 사이레인이 반했다던 그 여자를 보기 위함이었다.
누군지 보고 판단해 주겠다며 기세등등했던 리스와 다른 용병들은 망토를 뒤집어쓴 아셀라를 보고 기세를 누그러트렸다. 달빛 밑에 서 있던 여자는 그저 모습만으로도 기품이 흘렀고, 시선을 마주친 순간 자신들이 함부로 판단할 수 없다는 압박감을 받았다.
적어도 소설 속 이야기처럼 버려지진 않겠다. 그리고 서로 좋아 죽는 듯하니 잘 살겠다. 그게 나머지 용병들이 내린 답이었고, 리스는 그 자리에서 홀로 한 발짝 더 나아가 결심을 끝냈다.
“그러니 해체하자.”
문제는 단 하나, 자신들이었으니까.
“셀바토르 공작저 측에서 꽤 좋은 제안을 해 줬어. 그 여자…… 아니, 셀바토르 소 공작님께서 너에게 약속했던 거 말이야.”
아셀라는 돌아오자마자 레너드 용병단에게 제나를 보냈고, 그녀는 용병들에게 단 한마디를 전했다.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것을 하며 살 수 있게 해 주겠다.’
기술을 배우고 싶다면 기술을 배울 수 있는 곳을, 글을 배우고 싶다면 학교를, 장사하고 싶다면 원하는 자리에 가게를 내어 주겠다고 약속했다.
“너도 알잖아. 로인은 글을 배우고 싶어 했고 제넌은 자기 가게를 열고 싶어 했지! 베올은 그냥 평범한 가정을 가지고 일하는 삶을 바라 왔어.”
“……하지만 아이들은? 고아원은. 우리가 그만두면 그 돈들을 감당할 수 있나?”
사이레인의 목소리는 죄책감과 미련에 무겁게 들렸다.
레너드 용병단의 수입 대부분은 새 고아원과 고아원에 들어가지 못한 아이들의 정착금으로 쓰였다. 돌봐야 할 아이들은 한둘이 아니었고, 많은 돈을 벌어도 돈을 보내고 나면 고작 동전 몇 개가 손 위에 남아 있을 뿐이었다.
위험한 일을 하며 고수입을 올려도 그 정도였는데, 과연 평범한 일을 하면서 아이들에게 돈을 계속 보낼 수 있을까?
“역시 그걸 걱정했구나.”
그 말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로인이 씩 웃더니 품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읽어 봐, 사이레인. 크리엘에게서 온 거야.”
크리엘. 그 이름에 사이레인의 눈이 동그래졌다. 자신이 용병단을 꾸려 뛰쳐나오기 전, 남아 있던 아이 중 가장 어린아이였다. 몇 살이었더라, 세 살? 네 살? 그 정도도 안 됐던 것 같은데.
사이레인은 커다란 손으로 작게 접힌 종이가 찢어질까, 조심스레 펼쳤다. 종이를 펼치자 그 안에는 작지만 둥글둥글한 글씨가 가득 쓰여 있었다.
리스 언니에게.
언니, 제가 드디어 일자리를 구했어요. 제가 저번에 보낸 편지에 말했던 유명한 드레스 가게에서 재봉 일을 하게 되었어요! 아직 제가 성인식을 치르기 전이라 조수지만, 열심히 하면 바로 더 좋은 자리를 약속하셨어요.
제 꿈에 한 발 더 다가선 거예요! 저는 기뻐요. 제가 원하는 일자리를 구하기도 했지만, 이걸로 저는 더 언니와 다른 분들께 돈을 받지 않아도 되니까요.
언니, 부디 사이레인 오빠와 다른 언니, 오빠들에게 전해 주세요. 저를 마지막으로 고아원의 아이들은 전부 컸고, 스스로 돈을 벌 나이가 되었다는걸요.
부디 더 돈을 벌어야 한다는 마음에 위험한 일을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이제 레너드 용병단의 모든 언니 오빠들이 원하는 일을 했으면 좋겠어요.
저는 이제 다 컸어요! 다음에 한번 놀러 오세요. 저는 이제 사과 파이도 만들 줄 안답니다. 그럼 이만 줄일게요.
-크리엘 올림, 총총총.
“이게 무슨…….”
편지를 든 사이레인의 손이 떨렸다. 그 작던 아이가 벌써 자라 이런 편지를 쓸 정도가 되었다고? 아직도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우리의 지원을 받던 아이는 크리엘이 끝.”
그렇게 말하며 로인은 어깨를 으쓱였다.
“이미 나머지 아이들은 다 자랐어. 너 몰랐지만 벌써 결혼해서 아기를 가진 애도 있다?”
“맞아. 우리가 제일 늦었어, 우리가.”
“엄밀히 따지자면 그놈이 빠른 거지.”
“중간에 용병 일 그만두고 정착한 차일이 부럽더라. 딸이 벌써 걸어 다닌다던데.”
“뭐, 하여튼.”
리스가 상황을 정리하듯 손을 크게 휘휘 젓자 뒤에서 한마디씩 거들던 이들이 조용해졌다.
“나머지 아이들이 우리를 본받아 고아원에 후원을 하고 있어. 우리의 할 일은 이제 끝이라는 거지. 그러니 너도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해. 우리도 원하는 일을 할 거야, 그치?”
리스의 말에 다들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뭔가를 하고 싶었던 듯 밝게 자신이 묻어 놨던 이야기를 꺼냈다. 리스는 입꼬리를 올리며 씩 웃었다.
“그간 수고했어. 대장.”
우리를 이끌어 줘서 고마웠어.
채 성인도 되지 못했던 아이들이 만들었던 레너드 용병단의 마지막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수도에 있는 용병 길드에 용병 패를 반납하는 건 쉬웠으니까.
길드를 나온 사이레인의 손에 남은 건 레너드라는 이름이 새겨진 작은 나무 패 하나뿐이었다. 해체된 용병단에게 확인서처럼 주어지는 나무패, 그것이 레너드 용병단이 있었다는 증거가 되었다.
“……굳이 해체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사이레인이 미련이 뚝뚝 흐르는 목소리로 리스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미련 따위는 남아 있지 않았다.
“그냥 네가 용병단을 맡아서 이끌어도 됐을 거야, 리스. 애들은 너를 잘 따르니까 내가 빠져도 괜찮았을 텐데.”
사실은 처음부터 끝이 정해져 있었다. 자신들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는 돈을 모을 때까지, 그리고 나머지 아이들이 제대로 자립하고 정착할 때까지.
모두를 하나로 묶기 위해 사이레인은 용병단을 만들었다. 평생 이루지 못할 것 같았던 목표를 다 이뤘으니 이제 끝내는 게 맞았다.
그래서 해체를 선택하긴 했지만, 이렇게 쉽게 보내 주기에는 너무도 아쉬워 사이레인은 저도 모르게 낡고 낡은 나무패를 꽉 쥐었다.
“아, 됐어.”
사이레인의 말에 리스는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손을 크게 흔들었다.
“여태까지 레너드의 밑에서 살아왔으니 허전한 건 이해하겠지만, 익숙해져, 대장. 거기다 이제 공작님의 부군으로 살게 된다며. 기사 작위도 받는다며? 그때 용병 길드에 이름이 올라가 있으면 이래저래 곤란하지.”
“어? 사이레인 귀족 되는 거야?”
“귀족이랑 결혼하는데 귀족나리지!”
오오오! 함성이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왔다. 지금 깨달은 건가. 멍청한 놈들. 사이레인은 고개를 저었다.
“고아에서 떠돌이 용병, 떠돌이 용병에서 귀족! 성공했네, 대장.”
한 용병이 웃으면서 사이레인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러더니 고개를 푹 숙이고는 작게 속삭였다.
“나중에 돈 빌리러 올게.”
귀족이면 돈 많을 거 아니야, 그치? 그렇게 말하며 눈을 찡긋하는 놈과 뒤에서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놈들을 보자, 여기서 끝내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불현듯 치밀었다.
“가라, 가.”
사이레인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걸 보자 용병들은 왁자지껄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몇은 수도에 남지만, 대부분은 수도를 떠나 원하는 지역에 정착하거나 기술을 배운다고 했고, 오늘 바로 떠나는 사람 중에는 리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니 이것이 레너드 용병으로서는 마지막이었다.
“잘 가라.”
사이레인의 인사에 모두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은 쭉 수도에 있을 테니 오라는 말을 덧붙이고 사이레인이 공작저에서 온 마차를 타고 사라졌을 때, 나머지 용병들은 씩 웃었다.
“드디어 갔네.”
“마음만 착해서는.”
그러더니 다들 어디로 갈 것인지, 언제 갈 건지 떠들기 시작했다. 셀바토르 공작저에서 준 자금과 소개장이면 어디든 가서 자리를 잡기 쉬울 것이다. 원하면 땅도, 집도 사 준다고 했으니 가기만 하면 된다.
리스는 용병단 길드 문 옆에 놨던 짐을 번쩍 들었다.
“리스, 진짜 벌써 가게?”
“좀 더 구경하다 가.”
“난 바닷가로 가잖아. 지금 출발해도 못해도 한 달이다. 한 달.”
아쉬워하는 몇이 그녀를 붙잡았지만 리스는 갈 길이 바쁘다며 먼저 자리를 떴다. 일부러 마차도 받지 않고 돈만 챙겨 수도를 걸었다. 번화가를 지나고 성문에 도착할 때쯤.
“리스!”
“언니이이!”
그녀를 다급히 따라온 용병들 몇몇이 그녀를 다급하게 불렀다. 성문을 통과하려다 리스가 몸을 돌리자, 저 멀리서 허겁지겁 달려오는 용병들이 보였다.
“나, 나도 같이요, 언니.”
“저도요. 부대장.”
다급하게 따라온 듯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로 리스를 올려다보며 웃었다.
“부대장, 바다로 간다고 하고 그대로 사라질 거였죠?”
그 해맑은 말에 리스는 들켰다는 듯 제 뺨을 만지작거렸다.
그녀는 굳이 한 곳에 정착할 생각이 없었다. 떠돌아다니며 용병 일 하는 게 리스의 적성에 맞았으니까. 다들 어디에 정착할 건지, 무얼 배울 건지, 어떤 가게를 차릴 건지 너무 즐겁게 떠들어 혹시 싶은 놈들에게도 물어보지 못했는데.
“나도 이리저리 움직이는 게 좋아서.”
“한 곳에 있으면 갑갑해요. 용병 일도 체질에 맞고.”
아무래도 리스와 같은 생각을 한 이들이 몇몇 더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럴까.”
혼자보단 여럿이 좋으니까. 고개를 끄덕이는 리스가 갑자기 진지해진 얼굴로 용병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첫 정착지는 바다야. 정말 바다가 보고 싶었다고.”
바다에 도착하면 다시 용병 길드에 가서 등록하자. 그렇게 말하고 웃으며 다섯은 성문을 나섰다.
마차에서 내린 사이레인의 얼굴은 복잡해 보였고, 어딘가 축 처져 있었다. 그리고 그런 사이레인을 맞이한 건 아셀라였다. 푸른 피슈를 걸치고 있던 아셀라는 문 앞까지 나와 사이레인의 손을 잡았다.
“사이.”
조심스레 뺨을 쓸자 사이레인이 시선을 맞추더니 걱정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그렇게 말하며 사이레인은 자연스럽게 아셀라의 손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그녀가 들고 있던 등을 들었다.
잠시 두 사람은 말없이 드넓은 공작저의 정원을 걸었다.
아셀라는 고민에 빠졌다. 달래 주고 싶은데 이 상황에서는 뭐라고 해야 하는 걸까?
“다들.”
고개를 살짝 숙이고 할 말을 고르던 아셀라의 귓가에 사이레인의 목소리가 닿았다. 아셀라가 고개를 들자, 사이레인이 씩 웃고 있었다.
“제가 원하는 곳을 찾아간 거지. 고마워, 아셀라. 덕분이야.”
그렇게 말하며 사이레인은 공작저를 바라보았다. 이제 자기가 머무르는 곳은, 돌아와야 할 곳은 여기였다.
“……뭘, 할 일을 한 거지.”
아셀라가 그렇게 말하자 사이레인은 웃으면서 바람에 흐트러진 아셀라의 피슈 자락을 다시 여며 주며 말을 이었다.
“나는 첫째는 딸이 좋겠어.”
“딸?”
아셀라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레인의 표정은 완전히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응, 딸. 딱 여보야를 닮으면 귀엽고 귀여울 거야.”
그런가? 아셀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제 생각엔 사이레인을 닮아야 귀여울 듯한데. 잠시 짙은 주홍빛 머리를 가진 딸을 상상해 보았다. 곰을 닮은 게 꽤 귀여울 듯싶었다.
머리를 양 갈래로 묶어 볼까. 제 키와 사이레인의 키를 받으면 꽤 크겠지? 그래도 귀여울 것 같다.
“그래, 귀엽겠다.”
“그치?”
서로 다른 딸을 머릿속으로 상상한 채 아셀라와 사이레인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
결혼식은 고위 귀족의 결혼식치고는 간단하게 열린 듯 보였다. 다른 고위 귀족들처럼 신전을 하루 비워 두고 하는 것이 아니라 공작저의 정원에서 열렸으니까.
하지만 이제 집사가 된 제나가 온 힘을 다해 정원을 꾸몄기에 화려함에 부족함은 없어 보였으며, 몰려든 하객들만큼은 황족의 결혼식이라 착각할 정도였다.
최고 사제와 테센트루아 성기사단의 단장과 부단장, 거기에 고위 사제들도 결혼식에 참석했으며 황제가 된 피스토레와 아르트엘 역시 그녀의 결혼을 축복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아셀라는 첫째를 출산했다. 안타깝게도 베스라온이었다. 새 옷까지 준비하며 방방 뛰었던 사이레인의 어깨가 다시 처지는 순간이었다.
마지막 희망을 둘째에게 걸었으나, 그 역시도 루엔티였다. 사이레인은 곱게 딸의 꿈을 접었다.
그리고.
“네, 저는 황실의 검이라 불리는 린체의 기사단장이 돼서 모든 적을 조져 버리고 싶습니다!”
어린 베스라온의 목소리가 아름답게 꾸며진 황실 정원에 울려 퍼졌다.
아셀라는 눈을 크게 뜨고 할 말을 잃었으며, 린체 기사단장이 되고 싶냐 물었던 피스토레는 입에서 찻물을 뿜었다.
아르트엘이 제1황자인 아렌도 때문에 자리를 비워서 다행이다. 그녀가 있었더라면 웃음소리로 난리가 났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아셀라는 눈가를 꾹 눌렀다. 두통이 밀려오는 듯했다.
하지만 베스라온의 입은 멈추지 않았다.
“반드시 선봉에 서서 적들의 모가지를 모두 부러트려 놓겠어요!”
아셀라를 똑 닮은 진녹색 눈이 아까보다 더욱 빛이 났다. 베스라온은 진심이었다. 반드시 남은 에타이 놈들도 조져 버리겠다는 베스라온의 밝은 목소리를 들으며 아셀라와 피스토레의 시선이 동시에 사이레인에게 향했다.
“…….”
덩치 큰 곰은 말이 없었다. 그저 아내님의 눈치를 힐끗힐끗 보며 어깨를 축 늘어트릴 뿐이었다.
그리고.
“꺄아아악!”
쾅-! 굉음이 울려 퍼지며 비명이 사방에서 들려왔다. 셀바토르 공작가의 사용인 몇이 사방으로 튀는 잔재를 피해 열심히 도망치고 있었다.
“고, 공작님. 루엔티 도련님이 마법으로 연습장을 무너트리셨습니다!”
한 사용인이 다급하게 그녀에게 말했지만, 굳이 보고를 들을 필요는 없었다. 아셀라도 루엔티를 위해 만들었던 연습장 절반이 날아가는 걸 두 눈으로 보고 있었으니까. 언제나 담담하던 제나가 뒤에서 비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어머니.”
새하얀 털 코트를 입은 열 살의 루엔티가 아셀라에게 걸어왔다. 걸을 때마다 간신히 묶은 꽁지가 흔들거렸다.
“새 연습장을 지어 주세요. 연습장이 날아갔어요. 이번엔 더 크게 지어 주세요, 저거 너무 작았어요.”
코를 훌쩍이며 저는 하나도 잘못한 게 없다는 듯 루엔티가 당당하게 말했다. 루엔티의 뒤로는 아직 연습장 파편이 날아다니고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사용인들이 불길을 잡으려 물을 퍼다 나르는 게 보였다.
‘두 명으로 충분하겠어.’
불꽃이 사방으로 퍼지고 건물이 폭파하며 비명이 울려 퍼지는, 아비규환 같은 광경을 보며 아셀라는 웃었다.
그래, 두 놈이면 충분하다. 이 이상은 제가 감당할 수가 없었다.
아셀라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뒤에서 제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엄마.”
저를 조곤조곤 부르는 목소리에 눈을 뜨자 작은 여자아이가 저를 올려다보며 눈을 빤짝이고 있었다. 커다란 라일락색 눈동자에 마치 아무도 밟지 않는 첫눈 같은 은발을 길게 기른 아이, 셀바토르 공작저에서는 볼 수 없는 색이었다.
“엄마아.”
아셀라가 답이 없자 레슬리는 두 손을 꼭 모은 채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였다. 눈을 크게 뜨는 건 잊지 않았다. 살짝 머금은 미소 때문에 두 뺨이 더욱 오동통해 보였다. 혼신의 힘을 다해 먹였더니 살이 조금 찐 것이다.
“콘라드 경이랑 바다를 보러 가고 싶은데, 안 될까요?”
엄마라고 부르면 자신이 약해지는 걸 안 저의 귀여운 딸은 가끔 이렇게 자신을 부르며 눈을 반짝이곤 했다.
귀여워라, 아셀라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차디찬 겨울, 저에게 거래하러 왔던 깡마르고 볼품없던 아이는 어느새 이렇게 자랐다.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자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만져졌다.
“다녀오렴.”
아셀라의 대답에 레슬리의 얼굴이 환해졌다.
“대신 베스랑 엔티를 데리고.”
콘라드는 경악할 만한 조건을 걸며 아셀라는 웃었다. 예상치 못한 딸이 생겼지만, 행복한 삶이다. 아셀라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