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준비는 이제 끝났습니다.”
엘로스가 저의 긴 머리를 하나로 묶으며 하얀 이를 드러내 보였다. 그의 얼굴에는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으나 기분 좋은 미소가 그걸 가리고 있었다.
“에타이들의 약이 오를 대로 올랐으니 슬슬 총공격전을 진행해 보려고 합니다.”
“그럼 이제 치고 빠지기는 안 해도 되는 겁니까?”
린체 부기사단장인 레센이 묻자 엘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이상 가짜 수색도 진행하지 않아도 됩니다. 모두 고생 많으셨습니다.”
엘로스의 말에 아셀라와 피스토레를 제외한 전원이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레센은 살았다는 듯 얼굴을 맨손으로 박박 문지르며 입을 열었다.
“그간 왜 제대로 붙지 않느냐는 불만에 제대로 답을 못 해 줘서 답답했는데, 이제 부하 놈들에게 말해 줄 수 있겠군요.”
“하아, 저도요.”
레센의 말에 바티네 역시 미간에 주름을 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에타이들을 속이기 위해 진행된 이번 작전은 이 천막에 있는 사람들과 몇몇 소수의 사람만 알고 있었다. 굉장히 중요한 일이었고, 아는 입이 많아질수록 비밀이 새어 나갈 가능성은 커졌으니까.
피스토레가 가짜라는 사실도 모르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늘 피스토레의 대역을 맡은 사람은 정해진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대열에 섰고 싸움이 끝나면 황태자의 깃발이 꽂혀 있는 천막으로 돌아갔다.
처음엔 황태자를 위해서 일부러 치고 빠지는 게 아니냐는 말이 돌았지만, 이게 벌써 몇 차례나 지속되다 보니 아무리 충성심이 높은 린체 기사단과 테센트루아 성기사단이라도 불만이 가득 쌓였다.
“다들 자존심이 강해서 더 그렇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있던 아셀라가 입꼬리만 올려 웃으며 말을 이었다.
“린체 기사단이나 테센트루아 성기사단이나 최고의 기사단이잖아? 분명 승리할 텐데 자꾸만 도망가라! 그러니 짜증이 나는 거지.”
“그렇죠.”
린체 기사단장과 테센트루아 기사단장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기사단은 아주 오랫동안 벼려진 최고의 검이니까요.”
“최고는…… 이쪽이 어울리지 않을까 싶은데.”
아셀라가 물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말하자 엘로스가 미소를 유지한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린체 기사단은 제국 내 최고긴 하지요.”
제국 내. 그 말이 아셀라의 귀에 박혔고 그녀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짙어졌다. ‘우리 테센트루아 성기사단은 대륙 최고지만요.’라는 의미가 자연스레 말꼬리를 따라왔다.
“아하, 요즘 경들께서 심심하신 모양입니다. 얼마 전 친선경기에서 크게 다치셨던 거로 기억하는데.”
“하하하. 그게 언제 일인데요, 셀바토르 경. 아! 혹시 다시 친선경기를 원하시면 언제든 받아들이겠습니다. 저희 꼬맹이도 훌쩍 커서 이번엔 만만치 않을 겁니다.”
한껏 화사하게 미소를 머금은 아셀라는 엘로스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든.”
“언제든!”
분명 두 사람은 웃고 있는데 어쩐지 추워져 피스토레는 팔을 세차게 문질렀고, 차마 단장을 말릴 수 없었던 부기사단장 둘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그런 두 사람의 시선을 끊은 건 테펜텔이었다. 자신의 철퇴를 만지작거리며 의자에 삐딱하게 앉아 있던 테펜텔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짜증 나는 기 싸움은 그만하고. 그래서 언제 총공격을 할 거야? 나는 수색만 하러 여기 온 게 아니라고! 벌써 몇 달째야!”
테펜텔은 짜증이 가득한 목소리로 크게 외쳤다. 싸우려고 왔더니 수색대에만 머물러 몸이 근질근질한 모양이었다. 거기다 어느새 아셀라와 피스토레가 이곳에 온 지 시간이 꽤 흘렀다. 조금 더 있으면 계절이 바뀔 것이다.
엘로스가 조금은 머쓱한 표정으로 테펜텔의 질문에 답을 해 주었다.
“총공격은 닷새 후, 그 전에 작은 마찰을 두 번 일으킬 생각입니다. 그간 에타이들에게 셀바토르 경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으니까요.”
“이번에도 보여 주기구먼.”
테펜텔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철퇴를 만지작거렸다. 이걸로 짜증 나는 놈들의 얼굴을 가볍게 만져 줘야 하는데. 툴툴거리는 소리가 천막 밑바닥을 가득 메웠다.
“한 번은 에타이들과 그리고 마지막 한 번은 레너드 용병단과입니다. 에타이들과 싸울 때는 최대한 끝까지 자리를 지켜 주시고, 레너드 용병단과는…….”
“도중에 사이랑 빠져나와 동굴을 안내하면 되겠네.”
그간은 제대로 만나지 못했다.
뭘 하고 있으려나. 아셀라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떠올랐다. 아까 엘로스와 기 싸움을 할 때 보였던 미소와는 확연히 다른 미소였다.
피스토레가 봤다면 조금 놀릴 수 있었으련만, 그 미소는 이어지는 엘로스의 말에 순식간에 사라졌다.
“네, 그리고 두 번이 지나면 소문을 흘릴 겁니다. ‘공을 세우고 싶은데 마음대로 안 되자, 황태자가 몸이 달았다.’라는 식으로요.”
엘로스의 미소가 피스토레를 향했고, 피스토레는 눈물을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뒤의 이야기는 굳이 듣지 않아도 잘 알 수 있었다. 황제에게 잘 보일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몸이 단 피스토레는 앞장서 에타이들에게 뛰어들고, 그건 분명 에타이들에게 있어서 굉장한 자극이 될 거란 것. 즉, 피스토레는 이제 대놓고 뛰어들면 되는 것이었다.
“내 소문이 어떻게 날지 궁금하네.”
피스토레는 절망적으로 머리를 쥐어뜯으며 낮게 읊조렸다. 그 말에 반대편에 앉아 있던 아셀라가 제 머리를 쓸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뭐 어때. 황제는 좋아할 법한 소문인데. 아르트엘은…… 믿으려 하지 않겠지.”
아셀라의 말에 피스토레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어느새 그의 목소리에는 절망보다는 그리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크흑, 내 사랑……. 식사는 잘 하고 있겠지?”
잘 먹다 못해 간식에 티타임까지 꼬박꼬박 챙기고 있을 것 같은데. 그 말을 아셀라는 물과 함께 꼴깍 삼켰다.
도대체 저 부부는 서로를 어떻게 보고 있는 걸까. 피스토레의 눈에는 아르트엘은 날개를 단 요정일 게 분명했다. 아르트엘에게 피스토레는……. 뭐려나. 백마 탄 왕자? 아니면 자기가 지켜 줘야 할 왕자?
“웩, 닭살 부부…….”
테펜텔이 옆에서 중얼거리자 피스토레가 테펜텔을 노려보았다. 무시무시한 피스토레의 잔소리가 쏟아지기 전에 테펜텔은 잽싸게 고개를 돌려 버렸다.
“두 사람 친해졌네?”
언제 이렇게 된 거지? 드물게 아셀라의 눈이 커다래지면서 그녀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었다.
피스토레도 그렇고 테펜텔도 그렇고, 제 옆을 쉽게 내주는 사람이 아닌데. 자신이 야생 곰을 길들이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거랑.”
아셀라의 물음에 테펜텔이 술잔을 들이마시는 행동을 취하더니 이내.
“이거 덕분이지.”
손을 입가에 대고 무언가를 나불나불 이야기하는 행동을 이었다. 아하, 술과 뒷담의 힘이구먼.
‘잠깐, 뒷담?’
아셀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두 사람에게 공통된 지인이란 자신뿐이 아니던가.
피스토레는 사색이 된 얼굴로 아셀라의 시선을 필사적으로 피하고 있었다.
“아……!”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테펜텔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의자가 뒤로 넘어가며 쿵, 소리를 크게 울렸다.
“자, 자! 그럼 끝난 거지? 가서 준비들 하자고! 난 먼저 가 볼게, 할 게 많아서!”
다급한 움직임 그리고 그보다 더 다급한 행동. 테펜텔은 누구보다 빠르게 천막에서 뛰쳐나갔다. 엘로스와 바티네가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환하게 웃었다.
도망치는 제 친구의 뒷모습에 사람들을 따라 웃은 아셀라도 몸을 일으켰다. 친구의 말대로 이미 회의는 끝났고 마지막을 위한 준비가 남아 있을 뿐이었으니까.
“셀바토르 경.”
그녀를 부른 엘로스가 하얀 이를 보이며 웃더니 슬그머니 용건을 흘렸다.
“아까 말한 친선경기는 정말입니다. 아니, 이쪽에서 부탁드리고 싶어요.”
친선경기, 아셀라와 엘로스처럼 단장들의 사이가 좋을 때는 종종 열리고는 했었다. 혹시 혼란의 시대가 끝나고 그 마무리를 위해서 하자는 걸까?
나름 그럴듯했던 아셀라의 생각은 비껴갔다.
“사실 렌티우스라고 제가 키우는 놈이 한 놈 있는데. 저번에 만나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실력이 좋은 녀석이라. 다른 기사단의 검술도 경험하게 해 주고 싶습니다.”
그제야 완전히 이해가 갔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금발의 소년이 끝에 잡혔다. 확실히 실력이 좋긴 했지.
“좋습니다. 수제자로 키우는 건가요?”
고개를 끄덕이며 묻자, 제 제자가 인정받았다는 게 뿌듯한지 엘로스의 얼굴이 환해졌다. 기사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단숙한 그는 완전한 선생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네, 기회만 된다면 추후 제 자리를 물려주고 싶습니다.”
“어, 단장님! 제가 먼저죠!”
바티네가 제법 진심을 담아 엘로스의 옆구리를 콱 하고 찍었다. 정말로 아픈지 그는 작은 신음을 내며 비틀거렸다.
“렌티우스, 그놈. 좋은 놈인 건 인정하는데 순서는 제가 먼저죠.”
“그래, 그래. 내가 말실수를 했다.”
항복하겠다는 듯 엘로스가 두 손을 들자, 바티네가 환한 웃음과 함께 제 단장을 괴롭히는 걸 멈췄다.
“렌티우스 그놈은 단장님과 내가 신의 곁으로 간 후에나 기사단장이 될 수 있지! 아직 어리니 끈질기게 버텨라, 렌티우스!”
아무래도 렌티우스 경은 바티네에게도 사랑받는 모양이었다. 혼란의 시대가 끝나고 다시 이야기하자고 대화를 마무리한 아셀라는 다시 누군가에게 잡혔다. 이번엔 피스토레였다.
천막 밖으로 나온 아셀라와 걸음을 맞추며 천천히 걷던 피스토레는 이리저리 눈치를 보더니 아셀라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말을 꺼냈다.
“아셀라, 크레시벨 경이 공을 세우고 싶다던데. 이번 임무에 참여하고 싶은 모양이더라고.”
크레시벨은 진짜 피스토레의 경호를 맡고 있었고 이런저런 눈치로 무언가를 깨달은 모양이었다.
피스토레의 말에 아셀라는 아무 말도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피스토레는 자신에게 맡긴다는 아셀라의 침묵을 빠르게 알아챘다.
“나는…….”
저 멀리 서 있던 크레시벨이 아셀라와 피스토레를 발견하더니 이내 강아지 같은 유순한 웃음을 머금으며 허리를 꾸벅 숙였다.
“데려가지 않았으면 해.”
자신의 결정을 말하기 힘겹다는 듯 피스토레의 시선은 어느새 크레시벨이 아니라 아셀라에게 닿아 있었다.
“어……. 그.”
피스토레는 아셀라를 바라보며 얼굴을 구겼다. 자신의 말을 어떻게 그녀에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는 얼굴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종종 봐 오던 그 난감한 얼굴을 아셀라는 말없이 바라보았다.
“크레시벨 경이 자기 일을 소홀히 한다든가 나에게 직접 부탁한 건 아니야. 하지만 느낌이…… 좋지 않아.”
피스토레의 변명 같은 말에 아셀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카온 바란 크레시벨, 아주 어릴 적 부각을 나타내던 천재. 모두의 기대를 받으며 린체 기사단에 입단했고 수습 기사일 때부터 뛰어난 실력과 서글서글하고 밝은 성격을 무기로 순식간에 정기사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그는 그 이상으로 성장하지 못했다. 어릴 적 자신과 지금의 자신을 끝없이 비교하며 남들은 모르게 제 속에 벽을 쌓아 갔다.
천재가 사라지는 안타까운 마음에 아셀라는 몇 번 조언도 해 주고 대련도 해 주었지만, 그는 끝끝내 벽을 깨지 못했고 실력이 조금 뛰어난 정기사로 남게 되었다.
그래도 밝은 성격 덕에 기사단의 분위기를 잘 주도했고, 기사들 간의 불화도 그가 나서면 쉽게 해결되었기에 크레시벨은 아셀라에게서도 평가가 높은 편이었다. 그래서 슬슬 공을 세울 기회를 줄까 생각 중이었는데…….
“좋아.”
아셀라는 담담해진 얼굴로 피스토레를 바라보았다.
“네 감을 믿지.”
“네 부하인데?”
“뭐, 지금이 아니면 공을 세울 기회가 없는 것도 아니고.”
솔직히 지금처럼 좋은 기회는 오기 힘들겠지만, 아직도 르카디우스 제국은 여기저기서 자잘한 사건들이 터지고 있었다. 쓸데없이 몸뚱이가 크니 공격당하기 좋은 것이다.
거기다 지금 높은 공을 세울 거라면 요새를 급습하는 쪽으로 붙어야 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크레시벨의 실력은 급습에 데려가기엔 너무도 부족했다. 크레시벨의 성격 또한 급습에 맞지 않는 편이었고.
아셀라가 피스토레를 보며 다시 말을 잇기도 전에 크레시벨이 빠른 걸음으로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황태자 전하, 단장님!”
맑은 목소리, 크레시벨의 커다란 눈은 무언가의 희망에 차올라 더없이 반짝거렸다. 피스토레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피하지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
“안녕하십니까, 황태자 전하. 단장님.”
앞에서 다시 인사를 하며 크레시벨은 두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혹시 제 이야기를 하고 계셨습니까? 다른 건 아니고 제 이름이 들리길래……. 왜, 다들 자기 이름은 잘 들으니까요.”
다급하게 변명을 덧붙이며 크레시벨은 제 손을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그와 비교될 정도로 담담한 얼굴로 아셀라는 그를 내려다보았다.
“크레시벨 경.”
“예, 단장님!”
“황태자 전하의 호위를 잘 해 주고 있다 들었어. 덕분에 이곳에서도 마음의 안정은 잘 찾았더군.”
뒷말을 기대하는 듯 크레시벨의 눈이 더욱 반짝거렸지만, 이내 그 반짝임은 눈 깊은 곳으로 사라졌다.
“앞으로도 기대하고 있겠네.”
아셀라는 손을 뻗어 크레시벨의 어깨를 토닥이고는 그대로 그를 지나쳐 갔다. 피스토레는 힐끗 뒤돌아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떨구는 크레시벨을 보고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왜, 신경 쓰여?”
“쓰이지. 하지만 내 말을 철회하진 않을 거야.”
피스토레의 목소리에는 씁쓸함이 묻어 나왔지만 동시에 단호함이 느껴졌다. 그런 피스토레를 내려다보며 아셀라는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네가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나는 떠났을 거야.”
피스토레는 마음이 약하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자신이 내린 결정을 쉽게 무르지 않았다. 비록 귀는 가벼운 편이었으나 입으로 담는 말은 천금보다도 무겁게 여겼다. 그리고 그게 황제가 지녀야 할 자질이다.
피스토레는 그의 아버지처럼 꽉 막힌 고집불통이 아니었고,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자신의 말을 번복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누군가는 용맹함이 부족하다고 그를 손가락질했으나, 그러면 어떤가. 피스토레의 옆에는 자신이 있는데. 그가 검을 휘두를 일이 있으면 자신이 나가면 간단한 일이었다. 그는 황좌에 올라 모든 것을 듣고 많은 것을 입에 올리지 않는 황제가 되면 족했다.
‘뭐 그래도 사람이니 말실수할 수는 있겠지.’
아셀라는 피스토레를 보며 어깨를 토닥였다.
“딱 한 번 봐줄게.”
갑자기 자신을 단 한 번만 봐준다는 아셀라의 뜬금없는 말에 피스토레의 눈초리가 가늘어졌지만 가볍게 무시당했다.
*
“할매.”
사이레인이 한 용병과 함께 작은 집으로 들어갔다. 나무판자로 얼기설기 지은 집은 보통 크기의 성인이 살기에 너무도 작은 곳이었다. 하지만 이런 작은 집에서 보통은 4~5명의 사람이 같이 살았다.
오늘 사이레인이 찾아온 할머니는 에타이들을 싫어하면서 용병들을 따르는,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이었다.
“용병들이 왔구먼.”
몸을 구기듯 간신히 들어가자 한 할머니가 그들을 맞이했다. 그녀는 머리는 새하얗게 새어 있었고, 허리는 굽어 지팡이가 없으면 제대로 설 수조차 없을 정도로 나이가 많은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일하러 갔지. 아이는 자고.”
이 집에는 할머니와 아이 한 명 그리고 아이의 아버지와 두 사람이 더 살고 있었다. 아이와 할머니를 제외한 나머지는 일하러 집을 비운 듯 보였다.
할머니는 단 하나뿐인 테이블에 앉아 주름이 가득한 손으로 무언가를 손질하고 있었다. 에타이들이 평소에 입는 옷이었다. 그걸 본 사이레인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얼굴 펴! 이놈아. 너는 안 그래도 무서운 놈인데, 우리 애 울릴 거야?”
할머니의 호통이 떨어지자 사이레인은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뒤에 따라온 용병이 킬킬 웃으며 할머니에게 무언가를 던졌다.
“하이고, 정정하시구먼. 할매, 이거 드쇼. 내가 할매 주려고 일부러 가져왔소.”
종이로 대강 싼 물건은 사슴 고기와 토끼 고기였다. 고기를 받아 든 할머니의 손이 놀라움에 잘게 떨렸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고기를 종이로 싸 테이블 한쪽으로 밀었다.
“쯧……. 이거 이렇게 줘도 되는 거냐.”
“우리가 잡아 왔는데 무슨 문제가 있겠소. 거기다 그거 우리 몫으로 떨어진 거 가져온 거니. 할매는 걱정하지 마세요.”
용병이 괜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할머니는 고개를 떨구더니 아까 호통을 친 사람과 동일 인물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고맙다. 잘 먹으마.”
“그래, 잘 드셔. 할매.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셔야지.”
“여기서 오래 살아 봤자 뭐 하겠어.”
할머니의 목소리는 슬픔과 절망으로 조금 전보다 더욱 가라앉아 있었다.
그녀는 남편과 작은 마을에서 같이 살았다고 했었다. 그 마을에서 태어나 자라 결혼하고 외동딸 키우며 평화로운 노년을 보내고 있었다고, 그렇게 구슬프게 말했었다.
마치 동화책 같은 그녀의 인생을 짓밟은 건 다름 아닌 식량을 수급하려던 에타이들이었다. 작은 마을은 기름 몇 통과 횃불 몇 개로 순식간에 사라졌고, 할머니는 남편과 헤어져 이리로 끌려왔다고 들었다.
“다른 마을에 살던 딸은 무사하다며.”
“쯧……. 내 딸이 나를 어떻게 찾아. 제국군도 이 요새를 찾질 못한다던데.”
거기서 말이 멈추었다. 진득한 침묵이 세 사람의 입을 막았다.
“할매.”
그 침묵을 깬 건 사이레인이었다.
“할매, 나를 도와줘야겠어. 에타이들이 일을 시켰는데 우리끼리는 안 되겠네.”
사이레인의 말에 갑자기 그의 얼굴에 무언가가 날아왔다. 방금까지 할머니의 손에 들려 있던 옷이었다.
“야, 이놈아! 지금 이 옷 짓는 것도 울화통이 터지는데 여기서 더 에타이 놈들을 도우라고? 난 못 한다. 차라리 나를 죽여라, 이놈아!”
사이레인은 말없이 잔뜩 구겨진 옷을 바라보았다. 회색 옷 군데군데에 말라붙은 눈물 자국이 새겨져 있었다. 그걸 본 사이레인과 용병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이레인이 옷을 가져다주러 할머니에게 다가가는 동안 빠르게 용병은 문을 막고 보초를 섰다.
“할매. 이건 아주아주 중요한 일이야. 타스 님께서 시킨 아주 중요한 일. 엠릭 님께서도 이 일이 중요하다고 얼마나 우리에게 상냥하게 말씀하시던지.”
대화만 듣는다면 전혀 이상함을 알아채지 못하겠지만, 사이레인을 아는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릴 말이었다. 타스 님, 엠릭 님. 거기다 엠릭이 상냥하게.
할머니의 얼굴이 상한 음식을 먹은 사람처럼 일그러졌다.
“독 먹었냐, 이놈아?”
사이레인이 입꼬리를 올리며 웃자, 할머니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그녀의 눈은 사이레인이 무언가를 잘못 먹었다고 반쯤 확신한 듯 보였다.
“아주 중요한 일이야, 할매. 이번 일만 잘 하면 민들레를 보러 갈 수 있다니까.”
민들레, 그 말에 할머니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건 자신의 딸을 부르는 그녀만의 애칭이었다. 딸의 머리가 민들레꽃처럼 화사한 금발이라며 그녀가 조금은 억지로 지은 애칭.
“이 부근은 안 피어서 못 봤지? 조금 나가면 볼 수 있어…….”
자신의 딸을 볼 수 있다는 말이었다. 할머니의 손에 힘이 들어가며 덜덜 떨렸다.
“정말로, 정말로 볼 수 있는 거야?”
“내가 거짓말하는 거 봤어, 할매? 걱정하지 말고, 적당히 바람 좀 넣어 줘. 알겠지?”
그 말이 끝이었다. 사이레인은 그대로 몸을 돌려서 밖으로 나갔고 문 앞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용병은 할머니를 보고 꾸벅 인사를 하고서는 사이레인을 따라갔다.
“보, 볼 수 있단 말이지.”
주름진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녀는 자신의 손을 꼭 잡고 작게 ‘볼 수 있어. 드디어 볼 수 있어.’를 반복했다. 그러고는 자신이 바느질하고 있던 옷에 눈물 자국 대신 노란 민들레를 작게 수놓았다.
“할머니, 이거 맛있어요.”
“천천히 먹어라. 다 흘리는구먼.”
작은 여자아이는 코를 훌쩍이며 제 앞에 놓인 사슴 고기를 전투적으로 씹었고 할머니는 치맛자락으로 아이의 입가를 정성스레 닦아 주었다. 아이는 생긋 웃더니 이내 자신의 몫으로 놓인 고기를 입안에 집어넣었다.
“자네는 안 먹는가?”
할머니가 물은 쪽은 아이의 아버지였다.
“……우리 딸이나 더 주쇼.”
그러면서 남자는 간신히 구해 온 술을 연신 들이켰다. 움푹 들어간 뺨과 퀭한 눈은 남자가 이곳에서 얼마 버티지 못한다는 걸 여실히 알려 주었다.
“쯧. 몸 상해!”
거칠게 남자의 술잔을 뺏은 할머니는 고기 몇 점을 더 덜어 남자 앞에 쿵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그런데 무슨 고기요? 이런 걸 줄 놈들이 에타이들 사이에 있던가?”
“용병들이 줬어.”
“아하, 그 고양이 놈들.”
남자는 자조적으로 킬킬거렸다. 할머니는 용병들을 신뢰하는 쪽이었지만, 남자는 아니었다. 에타이들도, 그리고 그놈들의 돈을 받고 일하는 용병들도 다 거기서 거기였다.
“그런 말 말어! 그래도…… 좋은 일이 있을 테니까.”
할머니의 조심스러운 말에 남자의 눈에 의구심이 담겼다.
“곧 달려야 할 일이 있을 거야. 뜀박질을 해야 할 거라고. 그러니 어서 먹어.”
“할매, 그게 무슨 말…….”
남자의 말을 듣지도 않고 고개를 돌린 할머니는 아쉽다는 얼굴로 빈 그릇을 내려다보고 있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가, 다 먹었나? 잠깐 나갔다 올래? 바람 좀 쐬고 오너라.”
“아픈 애한테 왜 그러쇼. 메이야, 들어가서 자라.”
여자아이는 동그란 눈을 깜빡이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나 주변 산책하다 올게요. 오늘은 좀 힘이 나요.”
“멀리 가지 마라.”
여태까지 침대에 누워 있던 아이는 오늘은 힘이 좀 난다는 듯 환하게 웃더니 이내 집을 쪼르르 나갔다.
“무슨 일이요?”
아이가 나가고 문이 닫히자 남자는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혹시나 있을 위험을 줄이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고 또 둘러보다가 작게 속삭였다.
“용병들이 아무래도 밖에 있는 놈들과 손을 잡은 것 같아.”
“……밖에 있는 놈들이라면 르카디우스 제국군 말이요?”
남자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래! 가장 먼저 우리를 대피시키라고 했다는데, 그때 자네랑 내가 사람들을 좀 이끌어야겠어. 자네 왕국 출신은 다들 자네 말에 껌뻑 죽지 않는가.”
할머니는 르카디우스 제국 출신이었지만, 남자는 아니었다. 그는 제국 근처의 시히카 출신이었다.
“그런 그렇지만…….”
“자, 이것부터 받아!”
말꼬리를 흐리는 남자의 손에 할머니가 덥석 쥐여 준 건 작은 물약 병이었다. 사슴 고기를 준 뒤로 한 번 더 들른 사이레인이 할머니에게 전해 준 물약 병. 그걸 바라보는 남자의 눈이 커다래졌다.
“아가도 데리고 탈출해야 하니까 주는 거라고 하네. 나는 그릇을 좀 씻어 와야겠어.”
마음을 정하라는 듯 할머니는 빈 그릇을 챙기더니 요새에 단 하나뿐인 우물로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남자는 말없이 자신의 손에 들린 물약을 바라보았다. 과연 이걸 믿어도 되는 걸까?
남자와 그의 딸은 이곳에서 산 지 오래되었다. 그래서 도망을 치는 자들도 여럿 봐 왔다.
그리고 그 도망자들을, 에타이들과 에타이들에게 간도 쓸개도 바친 인간들이 어떻게 처리하는지도.
‘……말할까.’
남자는 이를 악물었다. 이웃이, 말을 나눴던 친구가 어떻게 죽는지 아는 남자는 자신과 딸이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공포에 굴복한 지 오래였다.
밀고자는 살려 준다. 심지어 그 공이 크면 고향으로 돌려보내 준다고도 했었다. 다른 이들도 아니라 레너드 용병단이 르카디우스 제국 측과 손을 잡고 배신하는 것이니, 이걸 밀고하면 분명 자신과 딸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시히카, 따스한 나라. 르카디우스 제국에 겨울이 올 때마다 남자는 추위를 느낄 수 없던 자신의 나라가 떠올랐다.
자신의 딸은 시히카가 어딘지도 모르고 있었다. 어느새 딸은 고향에서 살았던 날보다 요새에서 컸던 날이 더 오래되었다.
남자의 시선이 문을 향했다. 손에 든 물약이 뜨겁게 느껴졌다. 저 문을 열고 나가 뛰면 된다. 가장 커다랗고 좋은 숙소의 문을 두드리고 외치면 된다. 그러면, 그러면…….
“휴우…….”
남자는 깊은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됐다. 나쁜 놈들은 벌을 받아야지.”
악행을 눈으로 확인했던 놈들보다 가까이 있는 놈들을 믿는다. 비록 실패할 가능성이 컸지만, 남자는 레너드 용병단 쪽에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걸었다.
*
“그래서요.”
아이는 눈을 깜빡이며 입안에 든 사탕을 굴렸다.
“할머니가 사슴 고기를 줬는데, 맛있었어요.”
“그렇구나.”
타스는 커다란 테이블에 아이를 앉혀 두고 생긋 미소 지었다.
유약해 보이는 타스의 웃음은 어쩐지 아버지를 닮아 아이에게 쉽게 호감을 샀다. 거기에 입안에 든 사탕은 타스를 완벽히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했다.
그렇게 몇 년이었다. 이제 아이에게 타스는 경계해야 할 사람이 아닌 자신의 가족 같은 사람이었다.
“용병 아저씨들이 왔는데, 민들레를 볼 수 있다고 했어요.”
“민들레?”
“네에.”
아이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타스는 아이를 윽박지르고 싶은 마음을 누르며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그 외에 다른 소리는 없었니?”
아이가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사탕을 하나 내밀자 덥석 받아 들더니 이내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아빠 줄 거예요.”
환하게 웃더니 아이는 이내 자신이 들은 모든 걸 털어놓았다.
“그렇구나.”
타스는 아이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내했던 보람이 있었다. 레너드 용병단이 자신을 배신했다.
‘깜찍한 짓을 했군.’
아이를 내보낸 타스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는 이를 갈고 있었다. 어쩐지, 괴물이 공격에 자주 나서지 않던 게 이상했다.
얼마 전 일어난 가벼운 마찰에서 황태자와 괴물이 싸우는 모습을 봤다는 보고를 듣긴 했었다. 황위에 오르기 전에 공을 세우고 싶어 몸이 달은 황태자 그리고 그놈을 보호해야 하는 셀바토르.
균열이 일어나는 건 당연해 보였다. 그래서 그 틈을 타 황태자를 납치하면 이쪽에 유리하게 돌아갈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레너드 용병단이 셀바토르와 손을 잡은 지금에 와서는 그 모습마저 의심스러웠다.
왜 용병단이 르카디우스 쪽과 손을 잡았는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보란 듯 날뛰는 황태자는 미끼일 거란 생각에 무게가 실렸다. 자신들을 끌어내고 그대로 목을 칠 먹음직스러운 미끼.
누가 한 나라의 황태자를 미끼로 걸 거라고 생각이나 했겠는가. 어찌 보면 그 대담함에 타스는 속아 넘어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셀라 벤칸 셀바토르…….”
타스는 저도 모르게 그 이름을 내뱉었다가 몸을 잘게 떨었다. 자신이 이전에 머물던 곳에 쳐들어왔던 괴물. 그리고 그때 새겨진 공포는 아직도 타스의 발목을 감고 있었다.
“망할 년.”
이가 갈렸다.
그곳은 자신의 왕국이었다. 자신이 세우고 이륙한 왕국! 그곳에서 자신은 얼마나 행복했던가. 자신의 수발을 드는 사람이 십여 명이나 있었고 손짓 한 번에 금화가 발밑에 쌓였다. 손가락으로 한 마을을 가리키면 그 마을은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어 버렸다.
말 한 마디, 손짓 하나에 뭐든 이뤄지던 자신의 왕국을 단 하룻밤 만에 타스는 잃어버렸다. 사람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저 괴물 때문에.
“휴우우…….”
타스는 몰려오는 두통에 미간을 꾹 눌렀다. 그렇게 자신의 왕국을 잃어 놓고선 이번엔 이 요새마저 잿더미로 만들 뻔했다.
아셀라의 도발에 요새를 비웠더라면 안에 웅크리고 있던 레너드 용병단이 움직였을 것이었다. 자신의 방패막이자 이제는 거의 유일하게 남은 자금원인 평민들을 데리고 도망쳤겠지.
‘아니, 이제 우리에겐 그분이 있긴 하지.’
타스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제 서랍장 깊숙한 곳에 넣어 둔 서신을 떠올렸다.
망해 버린 이트바나로 갔던 건 그에게 있어서 크나큰 행운이었다. 자신들도 사기당했던 가짜 보석으로 레너드 용병단을 실컷 부려먹었고, 그분과도 인연이 닿았으니까.
든든한 뒷배를 떠올리자 타스에게도 조금 여유가 생겼다.
타스는 어느새 거칠하게 수염이 올라온 제 턱을 매만지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 이참에 괴물을 죽이는 건 어떨까. 분명 그분도 좋아하겠지.
하지만 어떻게 그 괴물을 죽인단 말인가. 힘과 마력으로 유명한 셀바토르 가문에서 튀어나온 괴물, 마력과 힘을 전부 가진 마검사.
치열하게 머리를 굴리던 타스의 눈에 방 한쪽에 내팽개쳐진 초상화 한 점이 들어왔다. 에타이들에게 황태자의 얼굴을 익히기 위해 가져온, 근육질에 우람한 체격으로 묘사된 피스토레의 초상화였다.
초상화를 바라보던 타스의 입꼬리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래, 그녀도 대담하게 큰 미끼를 쓰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이쪽도 그대로 해 주면 되는 것이다. 이게 미끼라는 게, 함정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누굴 쓸까.’
이럴 때 제일 좋은 게 혈육인데. 괴물도 자신이 던진 혈육에 굳지 않았던가.
‘제 애도 아닌데!’
타스는 작게 킬킬거렸다. 그 덕에 도망쳐 나왔으니 그 아이는 잘 쓰인 것이다.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노예상에 파는 부모도 있는 세상이다. 말하고 걷고 생각할 수 있을 때까지 키워 준 것만 해도 다행인 거지.
잠시 제 입가를 쓸던 타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번에는 누굴 미끼로…….
“형님!”
쾅 소리와 함께 엠릭이 씩씩거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생각을 방해받은 타스의 얼굴이 구겨졌다.
“내가 이 방에 있을 땐 함부로 문을 열지 말라고…….”
“형님,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습니까!”
타스를 무시하고 엠릭은 무작정 방 안으로 들어갔다.
“도대체 그 레너드 용병단은 언제까지 데리고 있을 작정입니까. 어차피 뒷배도 생겼겠다, 적당히 가지고 놀다가 버리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엠릭의 얼굴에는 얼마 전 사이레인에게 맞은 상처로 얼룩 져 있었다. 아마도 저 멍은 오래 갈 것이다. 그리고 엠릭의 마음에 난 상처는 평생 갈지도 모르지.
“…….”
멍청한 놈. 타스는 속으로 혀를 찼다. 식당에서도 난리를 피운 것을 간신히 막아 줬더니 여전히 눈치를 차리지 못해 기어코 맞아 왔다. 저딴 놈을 수족이라고 가까이 두고 있었다니. 자신이 한심스러워질 따름이었다.
잠깐만. 이놈 때문인가? 타스는 여기저기에 멍 자국을 달고 있는 엠릭을 바라보았다.
그래, 이놈 때문이구나! 이놈이 자꾸 용병단을 자극하는 바람에 그놈들이 배신을 한 게 분명했다. 가짜 보석이 들켰을 리는 없으니까!
“형님!”
“시끄럽다!”
타스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미간을 팍 좁혔다. 적당히 가지고 놀았으면 될 것을 너무 자극하는 바람에 신경 써야 할 일이 늘어나지 않았던가. 거기다 어서 뒷배에 가 몸을 의탁하고 싶어 하는 타스랑 포르와는 달리 엠릭과 엠릭을 따르는 놈들은 황태자를 잡고 싶어 안달을 내는 상태였다.
엠릭의 탓을 시작하자마자 순식간에 요새에 있는 모든 문제가 엠릭의 탓이 되어 버렸다. 이 쓸모없는 걸 어디에다가 팔아 치울 수도 없고.
순간 타스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무언가 이상한 낌새에 다시 타스를 부르려던 엠릭이 의구심이 담긴 눈으로 그의 형님을 바라보았다.
“엠릭.”
잠시의 침묵 끝에 고개를 든 타스의 얼굴은 평소와도 똑같아 보였다.
“걱정하지 마라. 그 멍청한 용병들은 미끼로 쓸 거니까.”
“미끼 말이요?”
“그래, 황태자를 잡을 미끼. 그냥 버리기엔 아는 것이 많고 그렇다고 계속 데리고 있을 수도 없으니까. 미끼가 적당하지.”
그렇게 말하며 타스는 엠릭을 바라보았다. 멍청한 놈의 얼굴에는 희열이 가득 차 있었다. 아마도 저놈 머릿속에는 죽어 가는 사이레인의 모습만이 가득하겠지.
“미끼를 사용하는 건 좋은 것 같습니다. 형님.”
이를 드러내며 웃는 엠릭을 보고 타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 생각에도 미끼가 적당한 것 같구나.”
*
첫 번째 마찰이 끝났다. 거기서 에타이들은 화가 나 제대로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는 황태자와 그걸 간신히 말리는 아셀라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화가 난 황태자는 제 분을 이기지 못하고 끝내 아셀라를 향해 제 투구를 집어 던지기까지 했다.
비록 뒤돌아 있어 황태자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화가 난 듯 험악하게 일그러진 아셀라의 얼굴은 숨어 있던 에타이에게 잘 보였다.
‘황태자는 황제 위에 오르기 전에 그럴듯한 공을 세우기 위해 몸이 달아 있다.’
‘셀바토르 소 공작과 황태자 사이에 분열이 일어났다.’
에타이들의 입맛에 맞게 생성된 소문은 빠르게 타스의 귀에 닿을 것이다. 두 번째 마찰 때는…….
“자연스러웠다, 그치?”
사이레인이 밝은 얼굴로 아셀라를 보며 입술을 올렸다. 누군가는 배신하고 또 배신하려고 준비하는 상황에서 저렇게 밝은 얼굴이라니.
아셀라는 사이레인을 바라보며 웃었고 그녀를 따라온 테펜텔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시끄러운 놈…….”
“뭐래. 아직도 진 거로 꽁해 있냐?”
그러면서 사이레인이 테펜텔의 등을 큰 소리가 나게 때렸고, 그녀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이왕 같은 배를 탔으니 잘 해 보자고.”
“……?”
테펜텔은 맞았다는 것보다 사이레인이 밝은 얼굴로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자신과 싸울 때만 해도 아니, 마주칠 때마다 이놈의 얼굴은 썩어 있지 않았나? 아니, 그 전에 이놈 왜 이렇게 친한 척이지?
용병들이 으레 그렇듯 오늘의 적이 내일의 동료가 되고는 했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앙금을 털어 내는 놈은 또 처음이었다.
‘내가 못 이긴 놈이라 그런가?’
그럴 수도 있긴 한데, 정확한 답이 되지 않았다. 뒤를 돌자 사이레인을 따라온 용병들이 테펜텔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자신들도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그때, 답이 나왔다.
“사이.”
동굴 안쪽으로 들어가 있던 아셀라가 손짓으로 누군가를 불렀다.
사이, 사이라니. 그런 사람이 있던가? 순간 동굴에 있던 기사들과 용병들 그리고 테펜텔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었다.
“불렀어?”
그리고 그 부름에 자연스레 움직인 건 누구도 아닌 사이레인이었다.
“이 부근을 잘 봐 둬.”
그렇게 말하며 아셀라는 동굴 안쪽을 가리는 덩굴을 팔로 걷어 내며 무언가를 말했다. 사이레인은 말 잘 듣는 어린 학생처럼 고개를 끄덕끄덕하더니 몸을 조금 낮추기까지 했다.
기묘한 모습이었다. 용병들의 눈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커다래졌다. 마치 강아지처럼 누군가를 따르는 대장이라니.
“전부 기억했어?”
“대강.”
사이레인의 대답에 아셀라는 맑은 웃음과 함께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었다. 순간 정적이 감돌았다.
“안 돼, 사이레인!”
용병 중 한 명이 잽싸게 뛰어나갔다. 그는 분명 사이레인이 멋대로 남의 머리를 만졌다고 화를 낼 거라 생각한 듯 보였다. 하지만 오산이었다.
“……다른 곳이나 안내해 줘.”
퉁명스럽지만 싫지 않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대답에 달려가던 용병은 한쪽 팔과 다리를 허공에 든 우스꽝스러운 상태로 굳어 버렸다.
“좋아, 가자.”
아셀라는 그런 사이레인이 귀엽다는 내색을 숨기지 않았다. 그녀가 먼저 몸을 돌리자, 사이레인이 아셀라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허어어어? 이제는 두 진영에서 동시에 믿기지 않는다는 탄성이 튀어나왔다. 저것은 우리의 대장이 맞는가. 용병들은 놀란 채 덜덜 떨었고, 그건 기사들과 테펜텔도 마찬가지였다.
테펜텔은 마치 고장 난 인형처럼 눈만 껌뻑이는 린체의 부기사단장 레센을 툭 쳤다.
“이봐요. 레센 경.”
“예, 예? 예예……. 아니, 무슨 일…….”
레센은 머리를 흔들면서 대답했다. 목소리가 흐릿한 게 어쩐지 아직 제정신이 아닌 느낌이었다.
“……제가 아셀라를 오랫동안 봐 온 게 아니라서 그런데…… 원래 저럽니까?”
의구심이 가득 찬 눈으로 레센을 바라보자 레센이 미친 듯 고개를 저었다. 마치 물을 싫어하는 강아지에게 물을 뿌렸을 때와도 같은 반응 속도였다.
“아니, 아닙니다!”
너무 고개를 세차게 젓느라 힘들었는지 레센은 숨을 색색 내쉬며 말을 이었다.
“저도…… 처음 봅니다.”
레센은 아주 오래전부터 아셀라를 상관으로 모셔 왔던 인물이었다. 즉, 그가 못 봤더라면 아셀라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건 처음이라는 것.
테펜텔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왜 아셀라가 굳이 레너드 용병단과 접촉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서 가겠다고 자원했는지, 왜 요즘 이상해졌는지 알겠다. 아니, 그 자리에 있던 용병단과 기사단 전부 알 수 있었다.
좋아, 조금 이따가 놀려 먹어야지. 속으로 킬킬거리던 테펜텔의 눈이 가늘어졌다. 사이레인에게 혹시 모를 도주로를 알려 주던 아셀라의 표정이 어두워진 탓이었다.
“그런데…… 음.”
말을 멈춘 아셀라가 동굴 안쪽을 바라보며 얼굴을 굳었다. 사이레인과 아셀라가 보고 있는 곳에는 길이 하나 있었는데 무언가가 그녀의 눈에 거슬린 듯했다.
그녀는 등불을 가져와 동굴 안쪽을 살펴보더니 이내 손짓으로 레센을 불렀다.
“레센 경.”
“네, 단장님.”
눈앞의 광경에 머리를 여러 번 털고서야 간신히 제정신을 차린 레센이 아셀라의 옆에 다가갔다. 두 사람은 심각한 얼굴로 말을 나누기 시작했다.
대강 듣기로는 첫 발견자이자 동굴을 확인한 사람이 저 레센이란 사람인 듯했고, 동굴을 재확인하러 온 지금 무언가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
하지만 사이레인에게 동굴은 문제가 아니었다. 아셀라와 레센이었지.
‘저 남자는 누구지.’
레센에게 밀려 뒤로 한 걸음 물러선 사이레인은 눈을 가늘게 떴다. 단장, 단장이라 불렀으니 부하인가? 자신과 리스 같은 부하 사이면 괜찮은데 어쩐지 친밀해 보이는 모습이 언짢았다.
남들이 보기에는 그저 담담한 얼굴로 일 이야기를 나누는 상사와 부하의 모습이었으나, 사이레인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어쩐지 속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고, 사이레인은 무서운 눈으로 동굴 안쪽을 확인하는 레센을 노려보았다. 레센은 아무 이유도 모른 채 잠시 덜덜 떨어야 했다.
아니라고 외치고 싶었다. 자신은 셀바토르 단장님과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그저 충실한 부하와 상사일 뿐이라고, 이건 오해라고 그렇게 동굴이 떠나가라 외치고 싶었다.
‘아니 다른 사람도 아니라 단장님이랑 나라니.’
눈물이 조금 흘렀다. 자신이 그간 단장님에게 괴롭힘을 당한 게 얼마나 많던가.
능력 있는 자는 내 곁에서 죽어라. 조금 과격하게 말하자면 그게 바로 아셀라의 신조였다.
그 신조 덕분에 레센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나날이 길었고, 침실에 거미줄이 생긴 걸 보고 경악했다. 그나마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긴 후로는 집에 꾸준히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아셀라의 괴롭힘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나는 경이 할 수 있으리라 믿네.’
그렇게 말하며 자신을 사지로 내몬 게 몇 번이던가. 신이 자신의 앞에서 ‘어서 이리 오거라. 지쳤지? 내 품에서 편히 쉬어라. 아이야.’ 하고 포근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던 게 몇 번이란 말인가!
눈물을 삼키며 주변을 살펴보던 레센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아셀라가 가리킨 곳에 그가 몰랐던 무언가가 있었다.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을 이끌고 주변을 확인해 봐야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단장님.”
무언가 문제가 생긴 게 확실해졌다. 레센은 조금 어두워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고 그 위로 아셀라의 차가운 눈빛이 내려앉았다.
“실수는 할 수 있지. 다음은 없으리라 믿네, 레센.”
레센의 대답에 아셀라는 아무런 감정이 없는 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테펜텔.”
레센과 이야기를 끝낸 아셀라가 이번에 부른 건 테펜텔이었다. 사이레인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던 테펜텔이 아셀라의 옆에 섰다.
레센은 사이레인과 피스토레를 지나쳐, 동굴 입구 쪽에 서 있는 기사들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
“음?”
레센이 자신을 지나쳐 갈 때, 사이레인은 자신의 옆에 서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언제부터 자신의 옆에 서 있던 걸까. 보통의 기사들이 주로 입는 경갑옷을 걸치고 있었으나 어쩐지 기사 같아 보이진 않았다.
이내 사이레인은 그 이유를 깨달았다. 투구를 벗는 남자의 손에는 굳은살이 제대로 박여 있지 않았던 데다가 눈이 흔들리고 있었으니까. 이런 상황에 익숙하지 않은 인간처럼 보였다.
‘수습…… 뭐 그런 건가?’
그렇게 생각하자 상황이 맞아떨어졌다. 경험을 쌓아 주기 위해 데려온 걸까. 높은 놈들만 데려온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하며 사이레인이 눈을 가늘게 뜨는 순간 사이레인과 피스토레의 시선이 마주쳤다.
긴장한 피스토레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울려 퍼졌다.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동굴로 따라온 그 순간부터 피스토레는 조금 기가 죽어 있었다. 이유는 자신의 옆에 서 있는 남자 때문이었다.
평민, 용병, 떠돌이. 그런 단어는 피스토레를 겁먹게 하지 못했다. 괴물이라는 친구와 같이 자란 그가 아니던가.
피스토레가 겁을 먹은 이유는 지극히 간단했다. 아셀라보다 머리 하나는 큰 체격하며 어딘가 암울하고도 험악하게 생긴 인상 때문이었다.
‘아버지와 닮은 것 같기도 하고.’
피스토레는 그렇게 생각하며 투구로 엉망이 된 제 머리를 정리했다. 피스토레 혼자 느끼는 위압감 때문일까, 저절로 황제가 떠올랐다. 언제나 높은 황좌에 앉아 자신을 내려다보기만 하던 아버지의 눈에는 늘 실망감만이 서려 있었다.
그 높디높은 황좌까지는 자신의 목소리나 노력은 잘 들어오지 않나 보다. 그러니 늘 아버지의 눈은 차갑고 그 심장 안에는 자신의 자리가 없었겠지. 어쩐지 입안이 씁쓸해져, 피스토레는 저도 모르게 제 목을 매만졌다.
“이봐.”
그때 피스토레의 머리 위로 묵직한 음성이 내려앉았다. 피스토레는 흠칫, 몸을 잘게 떨었다.
반사적인 것이었다. 아버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보니 사이레인의 목소리가 아버지의 목소리처럼 들린 탓이었다.
이자는 아버지가 아니야. 스스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들자 사이레인이 시선을 맞췄다. 짙은 눈썹 밑으로 청록색 눈동자가 번뜩였다.
“물어볼 게 있는데.”
사이레인은 조금 주저하듯 말을 끊었다.
“방금 지나간 레센인가 뭔가 하는 남자와 아셀라는 무슨 관계지? 부하인가?”
아셀라. 제 친구의 이름이 피스토레의 귀에 박혔다. 그녀의 이름을 막 부르는 사람은 이 세상에 몇 명 되지 않을 텐데.
자신의 아버지조차 그녀의 이름을 부르지 못했다. 셀바토르 소 공작, 아니면 린체 기사단장 셀바토르 경, 그렇게 불렀지.
피스토레는 신기한 눈으로 평민 용병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아까의 감정이 조금 사라졌다. 거기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방금 두 사람이 보여 준 분위기는 매우 수상쩍지 않았던가. 피스토레는 조금 용기를 내기로 했다.
“부하네. 부기사단장이야. 아주 오랫동안 레센 경은 아셀라를 모셔 왔지. 아! 그리고 얼마 전에 결혼도 했네. 벌써 딸도 한 명 있어.”
혹시나 하고 덧붙인 말이 효과를 발휘했다. 사이레인은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부끄럽다는 듯 헛기침을 몇 번 했다.
“아니, 나는 그런 걸 물어본 적이 없는데…….”
대답을 안 해 줬더라면 레센 경은 최초로 시선에 찔려 죽은 남자가 됐을지도 몰랐다.
웃음이 조금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조금 더 용기를 가지고 피스토레는 붉어진 제 목덜미를 만지작거리는 사이레인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최전방으로 떠나오기 몇 달 전, 아르트엘과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아셀라가 이상형을 찾으면 그건 기적이야!”
피스토레의 방을 찾아온 아르트엘은 언제 봐도 아름다운 모습으로 재잘거렸다.
“아셀라의 이상형이 누구길래?”
제가 사랑스러운 아내의 볼에 입을 맞추며 묻자 아르트엘의 눈이 반짝였다.
“놀라지 말고 잘 들어 봐.”
얼른 말하고 싶은 마음과 피스토레가 놀랄 모습에 대한 기대감으로, 아르트엘의 뺨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도 사랑스러워 피스토레는 웃음을 머금었다.
“아셀라의 이상형은 말이야. 일단 자기랑 비슷한 힘을 가지고.”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아셀라와 결혼할 사람이 셀바토르의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다면 그건 문제였으니까. 아마 황제도 결혼 허가를 내 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아르트엘의 말에 피스토레는 눈을 크게 떴다.
“귀여운 사람이래!”
‘귀여운…… 사람.’
피스토레는 천천히 제 옆에 있는 남자를 훑었다. 사이레인이라고 했었지. 용병에 평민, 고아.
솔직히 말하자면 사이레인의 출신만 본다면 아셀라와 어울리지 않았다. 아셀라의 이상형을 몰랐을 때 들었더라면 조금은 반대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곧 셀바토르 공작이 될 사람이니까.
하지만 그녀의 이상형을 들은 지금은 반대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힘은 테펜텔을 이겼다고 들었는데.’
테펜텔이 고국의 술이라고 가져온 그슨의 술은 무엇이든 줄줄 풀어놓는 마법의 술이었다. 테펜텔은 자신의 영지와 자신의 자리를 대신하는 학자 출신의 남편 이야기를 늘어 두었다. 그리고 사이레인에게 진 슬픈 과거 역시 구구절절이 풀었다.
피스토레는 술병을 들고 슬프게 외치던 테펜텔을 떠올렸다. 그리고 처음 사이레인을 만났을 때 묘하게 만족하는 미소를 짓던 자신의 친구도.
일단, 첫 번째 관문은 통과했다. 이제는 마지막 관문이자 최종 관문인 ‘귀엽다’인데.
피스토레는 눈을 가늘게 뜨고 사이레인을 훑었다. 겉보기에는 귀여움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하지만 마음이 있다면 괜찮지 않을까?
“그런데 자네. 조심스러운 질문인데.”
“뭐지?”
“아셀라를…….”
“사이, 피스토레.”
그때 앞서 있던 아셀라가 손짓으로 두 사람을 부르는 바람에 대화가 끊겼다. 사이레인과 피스토레는 조금 굳은 얼굴로 서 있는 두 여자의 곁으로 다가갔다.
“무슨 일이지?”
“문제가 생겼어. 아무래도 이 동굴, 며칠 사이에 뭔가가 살게 된 것 같아.”
그렇게 말하며 아셀라는 작은 램프를 들고 있는 팔을 뻗었다.
빛은 동굴 안쪽을 비춤과 동시에 흙에 찍혀 있는 발자국 역시 드러냈다. 사이레인과 피스토레는 말없이 다가가 발자국을 관찰했다. 묘한 크기의 짐승의 발자국은 생긴 지 며칠 되어 보였다.
테펜텔이 옆에서 어깨를 으쓱였다.
“늑대 종류긴 한데, 이 숲에 사는 늑대 발자국이 이렇게 크지는 않지. 혹시 너는 짚이는 게 있어?”
“그래, 보통 동물은 아닌 것 같군.”
이 숲에 사는 늑대형 몬스터가 뭐가 있더라. 웨어울프? 사이레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웨어울프라고 하기엔 너무 작았다. 거기다 그놈들은 더욱 깊숙이 사람의 손 따위 닿지 않는 곳까지 들어가야 만날 수 있었다.
“마수일지도 몰라.”
어느새 사이레인의 등 뒤로 다가온 아셀라가 얼굴을 굳히며 말을 이었다. 늑대형 마수라면 골치가 아팠다. 마수 중에서는 지능을 가지고 있는 놈들도 많았으니까.
“안전이 확보되지 않으면 여기로 사람들을 데려올 순 없어.”
동굴 안쪽에 찍힌 발자국도 확인하던 피스토레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그는 어느새 빛이 닿는 곳 가장자리에 서 있었다.
가장 중요한 건 요새에 잡혀 있는 평민들의 안전이다. 전쟁터로 스스로 걸어 들어온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힘없이 끌려와 휘말린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을 지키는 게 황제의 몫 아닌가.
피스토레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가장 좋은 방법은 다른 피난처를 찾는 것이다. 하지만 가능할까?
총공격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사이에 요새와 멀리 떨어지지 않고 요새에 있는 평민들을 전부 수용할 수 있으며, 적당한 뒷길이 있는 이런 동굴을 발견할 수 있을까?
‘안 돼. 시간도 없고…… 인원도 없어.’
그간 보여 주기식이긴 했지만, 피스토레는 성실하게 수색에 참여했고 작전 회의에서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들었다. 피스토레의 머리에는 지금 린체 기사단과 테센트루아 성기사단의 모든 정보가 들어 있었고, 그는 재빠르게 수색에 참여할 인원 따위 없다는 결론을 냈다.
거기다 에타이들이 가까워져 오는 총공격전에 예민해진 상황. 새 피난처를 찾겠다고 주변을 헤집다간 들킬 가능성도 컸다.
“하지만 다른 동굴을 찾아보기에도 시간은 없으니, 안쪽을 확인해 보자. 아셀라.”
피스토레의 말에 아셀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지만 전부 자리를 비울 순 없어. 밖에도 그놈들이 있을지 모르니까. 그러니까 동굴 안쪽을 살피는 건 너와 나, 그리고 테펜텔…….”
그때, 피스토레와 가장 가까이 있던 테펜텔이 어둠을 향해 철퇴를 휘둘렀다. 무언가 맞아 떨어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그보다 더 빠르게, 피스토레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어둠 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피스토레가 사라짐과 동시에 테펜텔이 움직였고 아셀라는 검을 빼 들었다. 그러다 이내 손을 멈추었다.
“쯧.”
무언가를 계산하듯 빠르게 주변을 훑어본 아셀라는 가볍게 혀를 차더니 그대로 피스토레와 테펜텔이 사라진 방향으로 뛰어갔다.
“너희는 여기에 있도록 해!”
사이레인은 당황한 듯 웅성거리는 기사들과 용병들에게 크게 외친 후 아셀라를 따라 빛도 닿지 않는 동굴 안쪽을 향해 뛰어갔다. 하지만 이내 사이레인의 얼굴이 굳어졌다.
생각보다 동굴 안쪽은 더욱 어두웠다. 아직 어둠에 익숙해지지 않은 눈으로는 아무것도 구별해 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돌아가 램프를 가져올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미 충분히 뒤처져 있었으니까.
끌려 들어간 피스토레는 물론 바로 그 뒤를 따라간 테펜텔, 거기다 아셀라 역시 보이지 않았다. 바로 쫓아왔으니 벌써 이렇게 보이지 않을 리가 없는데.
“……!”
안쪽으로 한 발 더 내디딘 사이레인의 눈이 커다래졌다. 이래서였구나.
동굴 안쪽으로 가는 길목에 구멍이 있었다. 언뜻 보기엔 갖가지 풀들과 낙엽으로 가려져 있던 구멍은 순식간에 제 위에 발을 얹은 사람을 끌어내렸다. 몸이 끝없이 밑으로 내려앉았다.
‘큭!’
사이레인은 이를 악물었다. 떨어지면서 머리를 부딪치긴 했지만, 크게 다친 건 아닌 듯했다.
조금 어질어질한 머리를 붙잡고 몸을 일으켰다. 주변을 둘러보자 자신이 있던 곳과는 전혀 다른 곳이 눈에 들어왔다. 아까보다 더욱 커다랗고 넓은 곳. 심지어 커다란 호수까지 있었다.
‘절벽이랑 연결된 곳이니……. 이리로 가면 강인가?’
절벽의 끝자락에는 강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 조금 더 나아가면 바다, 교역선이 어지럽게 다니는 해안가로 이어졌다.
동굴 안쪽에 이런 구멍이 있을 줄이야.
‘그 망할 놈.’
러센이라고 했었나, 레센이라고 했었나. 이런 구멍도 못 찾고 여기가 안전하다고 보고했다니, 믿기지 않았다.
잠시 끝없이 떨어지는 물과 생각보다도 깊어 보이는 호수를 바라보고 있던 사이레인은 이내 고개를 돌렸다. 아까 떨어질 때 도끼를 떨어트린 탓이었다.
다행히도 그의 도끼는 사이레인이 있는 곳에서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 놓여 있었다.
‘아셀라도 이 안쪽에 있나?’
무언가에 끌려간 피스토레도, 테펜텔도 이곳에 있겠지만 딱히 걱정되지는 않았다. 철퇴도 휘두르는 용병에 신체 건강한 견습 기사인데 뭐가 걱정되겠는가. 위에 있는 놈들도 걱정이 없었다. 가장 걱정되는 건 아셀라지. 그건 너무나도 당연한 게 아닌가?
아셀라가 다치거나 그럴까 봐 걱정된다는 건 아니었다. 자신과 동등하게 싸우는 사람이 누구에게 다치고, 누구에게 죽겠는가.
그래도 눈에서 보이지 않는 것과는 다른 의미였기에 사이레인은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동굴 밑쪽은 물이 떨어지는 곳으로 빛도 새어 들어와, 오히려 아까보다 더 밝은 편이었다.
먼저 간 아셀라를 찾기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리고 숨어 자신을 노리는 무언가를 사냥하기에도.
사람의 흔적을 찾아 걷던 사이레인은 도끼를 쥐고 있는 손에 힘을 주고는 그대로 휘둘렀다. 거대한 도끼는 돌 위에서 자신을 노리고 뛰어내린 늑대를 정확히 노렸다.
“캐앵!”
도끼가 무언가를 부수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피가 사방으로 퍼졌다. 일격이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다른 늑대들보다 커다란 늑대가 땅바닥을 굴렀다.
‘이놈들이었나?’
아까 위에서 본 발자국과 대강 비교해 보니 맞는 것 같았다.
“컹!”
무리 중 한 마리가 죽자 다른 놈들도 자극을 받았는지 네 마리도 넘는 늑대들이 사이레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위에서 떨어지고, 바위 틈새에 숨어 있고, 심지어 어떻게 갔는지 그의 뒤쪽에서 달려드는 놈도 있었다.
“후우…….”
사이레인은 일부러 숨을 내쉬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평정심이었으니까.
몇 마리가 덤비든 상관없었다. 그저 전부 다 베어 넘기면 그만이다. 가장 먼저 위에서 내려오는 놈부터.
도끼가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허공을 가로질렀고 그대로 늑대 한 마리가 물속에 처박혔다. 사이레인은 그대로 도끼를 뒤로 움직였다. 등 뒤에서 달려들던 늑대는 도끼 끝에 맞아 저 멀리 날아갔다.
도끼를 쥔 팔을 노리고 달려드는 늑대를 베어 넘기고 다시 뒤쪽에서 달려드는 늑대를 처리하는 것까지는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마지막에 일어났다.
‘젠장!’
실수했다. 이 늑대들은 상당히 영악했다. 일부러 그를 뒤쪽과 옆쪽에서 밀며 막다른 곳으로 유인했고, 때문에 그는 어느새 바위 안쪽으로 밀려 있었다.
자신에게 달려들던 늑대를 베어 넘긴 도끼가 콰직 소리를 내며 동굴 벽면에 꽂혀 버렸다. 한 번에 죽이기 위해 힘을 줬던 까닭에 깊숙이 꽂혀 버린 도끼는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크르르르.”
그러길 기다렸다는 듯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십여 마리가 사이레인을 포위했다. 늑대들은 자신들이 이겼다는 듯 자신만만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사이레인은 늑대들을 바라보면서 커다란 손으로 목덜미를 훑었다.
곤란한데. 늑대 사냥이야 종종 하던 거였지만 이렇게 많은 수를 혼자 상대해 본 적은 없었다.
거기다 이놈들은 덩치뿐만 아니라 체력도 보통의 늑대와는 차이가 났다. 실제로 도끼 뒷부분으로 얻어맞은 놈이 아무렇지도 않게 사이레인에게 이빨을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최대한 일격에 죽여야 한다는 건데.’
도끼는 바위에 박혀 있고…… 도끼를 뽑으려 몸을 돌리면 늑대들이 바로 덮쳐 올 것이다. 사이레인은 품속에 단검을 꺼내 들고 눈을 찡그렸다.
어떻게 할까?
이길 것이다. 그건 명확했다. 하지만 부상이 따를 게 분명했다.
최소한으로 부상을 줄일 방법을 생각하는데 갑자기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와줘?”
시선만 돌려 주변을 바라보자, 제 옆쪽에 있는 바위 위에 아셀라가 앉아 있었다. 아셀라는 아무렇지도 않게 턱을 괴고 앉아 사이레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호수에 빠졌던 것인지 검은 머리카락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음…….”
사이레인은 아셀라를 한 번, 늑대들을 한 번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셀라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음을 머금었다.
“오래 걸렸네?”
아셀라는 보통 사람의 키보다 두 배는 넘는 바위에서 가볍게 뛰어내렸다. 발치에는 늑대들이 죄다 쓰러져 있었다. 아셀라가 혹여나 늑대를 밟을까 조심스레 사이레인에게 다가가는 동안 그의 눈은 아셀라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물에 빠졌었어?”
아셀라가 가까이 오자 사이레인이 대뜸 입을 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셀라는 호수에서 헤엄치다 온 사람처럼 푹 젖어 있었다. 분명 위에 걸치고 있던 제복 윗옷은 사라지고 가벼운 셔츠 차림이었다.
“아, 나는 호수 위에서 떨어졌어.”
아셀라는 아무렇지도 않게 긴 머리에서 다시 물을 짜며 말을 이었다.
구멍은 여러 개였다. 몇 개의 구멍은 피했지만 이내 아셀라도 밑으로 추락했다. 그리고 그대로 호수 속에 잠겼다.
아셀라의 대답에 사이레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시커먼 윗도리는?”
시커먼 윗도리? 제복을 말하는 건가? 아마도 그녀의 제복은 저 물밑 어딘가에 걸려 있거나 강으로 쓸려 내려갔을 것이다. 하필 입고 있던 제복이 어딘가에 걸리는 바람에 빠져나오는 데 애를 먹었으니까.
결과적으로 물을 먹지도 않았고 다치지도 않았지만, 피스토레와 테펜텔을 놓쳐 열을 좀 받긴 했었다.
“떨어지면서 어디 걸리는 바람에 그냥 벗어 버렸어. 어차피 물 먹어서 무거울 테고.”
머리의 물기를 전부 짜낸 아셀라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아셀라가 잠시 생각에 잠긴 사이 그녀의 머리 위에 무언가가 턱 하니 얹혔다. 사이레인이 입고 있던 윗옷이었다.
“젖은 상태로 있으면 감기 걸려.”
감기……? 아셀라는 눈을 깜빡였다. 감기라니. 지금 자신에게 감기 걸린다고 제 윗옷을 건네준 건가?
그녀에게 있어서 감기나 병 같은 단어는 거리가 멀었다. 애당초 자신은 셀바토르가 아니던가.
비가 내리는 상황에서도, 눈이 내리는 곳에서도 자신에게 감기를 말하며 윗옷을 건네주는 이는 없었다. 오히려 이런 거치적거리는 걸 입는 게 더 짜증 나는 일이었으니까.
“흐응.”
하지만 아셀라는 윗옷이 나쁘게 느껴지지 않았다.
“고마워, 잘 입을게.”
아셀라의 인사에 사이레인은 붉어진 얼굴로 목덜미를 훑었다.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짓을 했다는 걸 이제야 깨달은 모양이었다.
귀엽긴. 아셀라는 웃으면서 윗옷을 걸쳤다. 사이레인의 물건치고는 꽤 깨끗하고 나름 깔끔한 것이 일부러 가져온 게 분명해 보였다. 평소에는 무언가를 걸치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사이레인은 부끄러운 듯 시선을 피하며 늑대들과 싸우며 빼낸 도끼를 만지작거렸다. 그러는 동안 아셀라는 몸을 숙여 사이레인이 베어 넘긴 늑대들을 확인했다.
‘늑대 마수…….’
이 동굴을 찾고, 수색하고, 피난처로 확정한 건 약 한 달 전. 그사이에 이런 놈들이 들어와 있을지는 몰랐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이놈들이 살고 있었던 걸지도. 레센은 무언가를 빠트릴 정도로 허술한 사람은 아니나 동굴 밑으로 빠져 본 적은 없을 테니까.
‘골치가 아파지겠네.’
이런 놈들은 꼭…….
“대장이 있을 텐데.”
들려온 말에 뒤를 돌자 사이레인이 자신처럼 늑대를 살펴보며 말을 하고 있었다.
“이런 늑대 마수들은 주로 무리를 짓고 대장이 이끌잖아. 하지만 이 크기는 대장이라 보기 어렵군.”
사이레인이 턱을 매만지며 대장이 있을 만한 곳을 찾는 듯 주변을 훑었다.
“마수와 싸워 본 적이 있었어, 사이?”
마수는 전문적으로 토벌하는 사람들이 아니면 잘 알지 못했다. 기사들 중에서도 마수와 마주친 적이 없는 이가 대부분이었다. 마수들은 사람들의 발이 잘 안 닿는 곳에 있었으니까.
지금만 봐도 라니스 숲 안쪽에 있는 절벽 밑 숨겨진 동굴에서 발견되지 않았는가.
“떠돌이니까. 별의별 일을 다 겪었지.”
사이레인은 그렇게 말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얼른 용병과 견습 기사를 찾아야 하는데…….”
견습? 아셀라가 그걸 물어볼 틈은 없었다. 갑자기 동굴에 비명이 울려 퍼졌다. 북을 두드리는 듯한 억양이 섞인 비명, 테펜텔이었다. 아셀라와 사이레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생각하기도 전에 다리가 먼저 움직이고 손은 자연스레 무기를 쥐었다. 테펜텔의 비명은 조금 떨어진 바위 사이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테펜텔은 아셀라도 인정한, 실력을 갖춘 용병이었다. 실제로 테펜텔과 호흡을 맞추는 몇 년간 아셀라는 테펜텔이 비명을 지르는 걸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적들의 칼에 찔렸을 때도 테펜텔은 비명을 지르긴커녕 철퇴를 휘두르지 않았던가.
그런 테펜텔이 비명이라니. 아셀라의 걸음이 빨라졌다.
“테펜……!”
바위를 돌아 보인 광경에 아셀라는 말을 멈추었다. 그건 사이레인도 마찬가지였다.
“……뭐야.”
사이레인은 눈을 찡그린 채 얼굴을 구겼고, 아셀라는 눈을 깜빡였다.
“으아아!”
테펜텔은 그녀답지 않게 괴성을 내지르며 바위 위에 올라가 있었다.
그 밑에는 거대한 지네들이 몰려 있었다. 어린아이 크기의 지네들은 테펜텔을 잡아먹으려는 듯 괴상한 소리를 내며 바위에 붙어 있었다.
“키이익!”
테펜텔을 잡으려 간신히 바위에 기어오른 한 마리가 오히려 그녀의 발에 맞아 나가떨어졌다. 바닥에 부딪친 지네가 내는 괴상한 소리 때문에 머리가 울릴 정도였다.
“아셀라! 살려 줘! 용병, 너도 와서 도와줘!”
하얗게 질린 테펜텔은 반쯤 울먹이고 있었다. 테펜텔이 필사적으로 도망친 바위가 동그란 편이라, 지네들이 아직 테펜텔이 있는 곳까지 올라가지 못한 듯 보였다.
하지만 이내 지네들은 꾀를 내었다. 탑을 쌓듯 제 동료들을 밟아 순식간에 바위를 기어올랐고 안 그래도 하얗게 질려 있던 테펜텔의 얼굴이 더욱 하얗게 질렸다.
“키에에엑!”
지네가 울부짖자 입처럼 보이는 곳에서 녹색 침이 뚝뚝 떨어졌고 테펜텔을 위협하듯 수십 개의 다리가 꿈틀거렸다.
“……!”
끔찍한 지네의 모습을 본 테펜텔은 기절 직전이었다. 아셀라는 잠시 고개를 흔들더니 검을 빼 들고 테펜텔이 있는 바위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녀의 검에서 불길이 솟아올랐다.
“사, 살았다…….”
아셀라의 불길에 잿더미가 된 지네들이 바람에 흩어졌고, 사이레인의 도끼에 반 토막 난 지네들이 사방에서 꿈틀거렸다.
간신히 바위 위에서 내려온 테펜텔은 경기를 일으키는 얼굴로 지네를 피해 아셀라의 뒤로 숨었다.
“지네가 무서워?”
그간 온갖 벌레를 봐도 꿈쩍도 하지 않던 테펜텔이었는데. 그녀의 고향 아롬벨은 습기가 많아 벌레가 많은 나라기도 했고. 그런데 지네 몇 마리에 이렇게 떨 줄이야.
“어렸을 적에 지네한테 물린 적이 있거든. 엄청엄청 아팠었어. 엄마한테 맞은 것보다 더.”
그렇게 말하며 테펜텔은 아직도 꿈틀거리는 지네를 보며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크면서는 보통 크기의 것들은 괜찮아졌는데 저렇게 큰 걸 보니까…….”
과거의 아픔이 다시 몰려든 모양이었다. 그렇게 말하며 테펜텔은 저도 모르게 손을 흔들었는데 그 팔을 본 아셀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물렸어?”
아셀라가 성큼 다가와 굳은 얼굴로 테펜텔의 팔을 잡았다.
그녀의 팔목에 약한 상처가 나 있었다.
“아, 이거.”
상처를 내려다본 테펜텔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피스토레를 감싸다가 좀 다쳤어. 걱정은 하지 마. 물린 것도 아니고 스친 거니까. 팔도 제대로 움직여.”
테펜텔의 말에도 굳어진 아셀라의 얼굴은 펴질 기미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네 마수는 마비 독을 가지고 있는 걸로 유명했으니까.
“정말 괜찮아. 봐 봐, 잘 움직이잖아?”
테펜텔은 그렇게 말하며 보란 듯 팔을 휘둘렀다. 마비의 증세도 없고 그녀의 혈색도 나빠 보이지 않았다.
테펜텔 정도 되는 용병이 자신의 몸 상태를 모를 리 없었다. 그리고 괜찮다며 저 자신도 속이다가 결국 상황을 불리하게 만드는 바보는 아님을 아셀라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 이상하다 싶으면 바로 말해. 혹시 모르니까.”
아셀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났지만, 사이레인은 한심하다는 눈이었다. 사이레인을 바라보는 테펜텔의 눈이 가늘어졌다.
“뭐, 인마.”
명백히 시비조가 서린 목소리였다. 테펜텔의 목소리에 사이레인이 입꼬리를 올렸다.
“아니, 다른 나라도 아니라 아롬벨의 용병이 지네를 무서워한다니 놀라워서. 거기다 물리기까지?”
“사람이 무서워하는 게 있을 수도 있는 거지. 그리고 안 물렸다고!”
“아하, 나는 무서워하는 것 따위 없는데.”
사이레인의 말에 테펜텔이 그를 노려보았다. 사이레인의 덩치와 키에 눌릴 법도 했지만 테펜텔은 아랑곳하지도 않고 그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곰 새끼가…….”
“레너드는 사자거든. 무식하긴.”
“무식? 야! 내가 이래 봬도 귀족이거든? 너 내가 제대로 차려입고 나타나면 얼굴도 못 들걸?”
‘둘이 잘 노네.’
아셀라는 사이레인과 테펜텔이 싸우는 모습을 한 발짝 뒤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남들이 봤으면 서로 죽이기 일보 직전의 모습이었지만, 어쩐지 그녀의 눈에는 투닥투닥 사이좋게 싸우는 걸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흐응, 진녹색 눈이 가늘어졌다.
“자, 두 사람 다 그만해.”
싸움이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이유를 핑계로 아셀라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래, 이건 피스토레를 빨리 찾기 위함이야.
테펜텔은 피스토레가 지금 어디에 있을지 알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그녀는 가장 마지막까지 피스토레를 따라가지 않았던가.
“테펜텔, 피스토레는?”
자연스럽게 둘 사이에 끼어든 아셀라가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호수 쪽에 숨어 있을 거야.”
아셀라의 물음에 사이레인을 노려보던 테펜텔이 시선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그 샌님, 대단하던데? 솔직히 얕잡아 봤는데. 놀라웠어.”
갑자기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늑대 마수는 가장 가까이에 있고 가장 약한 피스토레의 다리를 물고 구멍으로 끌었다.
급작스러운 상황과 갑자기 느껴지는 고통에 당황한 듯 피스토레는 속수무책으로 끌려갔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려는 듯 이를 꽉 물었고, 늑대가 구멍에 떨어져 착지하는 그 순간 품속에서 단검을 꺼내 들어 늑대를 찔렀다.
“비명이나 빽빽 지를 줄 알았는데 말이야.”
테펜텔이 알고 있는 아롬벨의 왕자였다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만약 피스토레가 아롬벨의 왕자처럼 비명을 내지르고 살려 달라고 울부짖었더라면 주변에 있는 마수들이 전부 모여 아무리 테펜텔이라도 골치가 아플 뻔했다. 거기다 경험이 부족한 검 실력이긴 했지만 피스토레는 테펜텔과 손을 맞춰 늑대 마수들과 싸웠다.
비록 지네까지 합세하며 그 수가 늘어나 도중에 헤어지긴 했지만, 테펜텔이 다수의 마수를 끌어왔으니 분명 피스토레는 안전할 것이다.
‘조금 놀랐단 말이지.’
그간 그슨의 술을 마시며 피스토레와 친해졌으나 내면에는 아직 의문을 품고 있던 테펜텔은 이번 사건으로 완전히 그걸 털어 냈다.
“나름 황실의 검을 배운 놈이니까.”
아셀라는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피스토레는 약해 보였지만 아주 어릴 적부터 황태자로서의 교육을 충실히 받았고, 검 실력도 나쁘지 않았다.
황가의 핏줄을 이은 사람치고는 심약한 편으로 평가를 받았으나 그 심약함이 황제의 기준임을 잊으면 안 되었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그 황제 밑에서 버티지도 못했을 테니까.
황제와 아셀라 같은 사람들 사이에 껴 있어서 그렇지, 피스토레도 평균 이상은 되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어서 찾아야 해. 그놈, 대련 경험은 많지만 마수를 상대해 본 경험은 없어.”
교육으로 다수의 기사와 대련을 통해 경험을 쌓았지만 마수를 상대할 일은 없었다. 분명 오래 버티지 못하리라. 아셀라는 불안한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걸? 내가 대부분 다 끌고 왔거든.”
“그래도…….”
“당연하지! 저 여자 용병 말이 맞아.”
사이레인이 불쑥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셀라가 피스토레를 신경 쓰는 게 못마땅한 눈치였다.
“그놈, 견습 기사잖아. 황실 기사면 어마어마한 놈 아니야? 핏줄도 고급일 거고. 그러니 걱정할 필요는 없어. 실력도 겁…… 아니 엄청 뛰어날 테니. 주변에 있는 놈들을 전부 조질 수 있겠지.”
……조져? 새로 들어 본 단어에 아셀라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셀라의 주변은 전부 귀족이었다. 그것도 황실과 고위 귀족의 자제들이 대부분이었기에 언행이 거친 이들은 없었다. 부드러운 비단 밑에 칼을 숨겨 둔 이들이 대다수였지.
용병들을 많이 만나 봤지만, 그들 역시 아셀라의 앞에서는 자연스럽게 입을 조심했고 그건 사이레인도 마찬가지였다.
그간 아셀라가 만나 온 용병들과는 다른 이유였지만, 사이레인 역시도 상당히 말을 조심하고 있던 편이었다. 그런데 오랜만의 만남에서 이상한 사건이 터지고 다른 놈만 걱정하는 모습에 그만 실수를 해 버리고 만 것이었다.
“견습이라도 늑대 대갈빡 정도는…….”
말을 잇던 사이레인의 눈이 커다래지더니 슬그머니 시선만 내려 아셀라를 바라보았다. 생소한 단어에 놀란 아셀라와 제 실수로 놀라 땀을 삐질 흘리는 사이레인의 시선이 마주쳤다.
“어……. 그러니까 내 말은.”
수습한다며 보이는 손동작이 이상했다. 마치 사이레인이 늑대의 머리를 치는 듯한 기묘한 손동작에 아셀라의 눈이 더욱 커다래졌다.
“아! 저기 있다!”
테펜텔이 그를 구원했다. 정확히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 바위 사이에서 튀어나온 피스토레와 그를 발견한 테펜텔이었다.
“아셀라!”
바위 사이에서 튀어나온 피스토레는 제 친구를 발견하자마자 눈물을 글썽거리며 세 사람이 있는 쪽으로 뛰어왔다.
머리며 옷이 더러워지고 찢긴 걸 보니 퍽 고생한 듯 보였다. 아무리 테펜텔이 대다수의 마수를 데리고 갔다지만, 그래도 몇은 피스토레가 처리했을 테니까.
“피스토레.”
아셀라가 제 친구의 이름을 부르며 가까이 가자 사이레인의 얼굴이 한층 더 썩었다.
“아셀라……. 흑.”
“고생했어.”
아셀라는 제 옷자락을 잡고 울먹거리는 피스토레를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마수를 상대해 본 경험도 없는 친구 놈의 얼굴은 잠시 사이에 홀쭉해져 있었다.
“문제가 있어.”
다행히도 사이레인의 얇은 인내심이 끊어지기 전에 피스토레는 아셀라의 옷자락을 놓았다. 그리고 목소리를 낮추더니 한쪽을 가리켰다.
“늑대들과 싸우다가 알아낸 건데 아무래도 이 근처에 대장이 있는 것 같아. 무리 중 몇 마리가 저리로 들어가더라고.”
비록 마수나 몬스터와 싸운 경험은 없었지만, 지식만은 풍부한 피스토레는 늑대들의 이동으로 대장이 있을 법한 장소를 추려 내었다.
세 사람의 시선이 피스토레가 가리키는 곳으로 향했다. 동굴에 있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넓은 호수 끝자락이었다. 높은 바위가 어지럽게 있는 곳, 그곳이 피스토레가 가리킨 곳이었다.
“저 바위 뒤에 있는 건가. 숨기도 좋아 보이고 있을 법해 보이네.”
“대장의 위치를 찾는 데 애를 먹을 줄 알았는데.”
테펜텔의 말에 아셀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늑대 사냥이나 해 보자고.”
아셀라가 머리를 쓸어 올리며 말하자, 테펜텔과 사이레인이 입꼬리를 올리며 제 무기를 꺼내 들었다. 피스토레는 단호한 표정으로 아셀라의 뒤로 숨었다.
피스토레의 눈과 짐작이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거대한 바위 뒤로 돌아 바위와 모래로 가득 찬 길을 조금 걷다 보니 정찰을 하러 나온 늑대 한 마리와 마주칠 수 있었다.
“커엉……!”
동료에게 알리기 위해 목청을 높이려던 늑대는 제 할 일을 다 하지 못했다. 소리를 크게 내지르기도 전에 목이 바닥을 굴렀기 때문이었다.
사이레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늑대의 목을 친 도끼를 다시 붙잡았다.
“이 앞에 대장이 있겠네.”
한 사람이 간신히 지나갈 법한 좁은 길을 바라볼 때, 피스토레의 눈은 어딘가 절망에 빠져 있었다.
“……나는 한 마리를 처리하기 위해서……. 크흡.”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어 보니 사이레인이 늑대 마수를 일격에 죽인 게 적잖이 충격이었던 모양이었다. 깊은 절망에 빠진 피스토레는 어느새 뒤로 빠져나온 사이레인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걸 몰랐다.
‘그러고 보니, 이놈.’
아셀라와 사이가 좋았더랬지. 생각해 보니 러센인가 러근가 하는 놈의 사정도 잘 알고 있었고. 오랫동안 기사단에 머물렀던 것 같았다.
‘견습이 아닌가?’
용케도 사이레인의 생각이 거기까지 닿았다. 그럼 도대체 이놈은 뭐란 말인가. 뭐기에 아셀라의 이름을 막 부르고 친해 보이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냥 정기사라고 보기엔 자신 없는 모습과 뛰어난 검 실력은 어딘가 모순되어 있었다.
“이봐, 너.”
모르면 물어보면 되는 거지. 아까도 그러지 않았던가. 사이레인은 빙빙 돌아가는 건 질색이었다. 모르면 물어보면 되는 거고 말하고 싶으면 말하면 되는 거다.
“어, 어?”
“아셀라랑 어떻게 아는 사이지?”
선두에 테펜텔과 서 있는 아셀라를 힐끗 바라본 사이레인이 목소리를 한층 낮추고는 말을 이었다.
“부하가 아닌가? 그럼 뭐지? 동료? 아니면 그냥 아는 사이? 그것도 아니라면…….”
“친구, 친구네!”
사이레인의 오해가 극에 달하기 전에 피스토레가 빠르게 그 오해를 잘라 내었다. 아까도 레센 경과 아셀라의 사이를 의심했던 자이니 쉽게 무얼 오해하는지 알 수 있었다.
“부, 부모님들께서 나름 사이가 좋아서 어릴 적에 같이 자랐지.”
반은 진실이고 반은 거짓이었다. 어릴 적부터 같이 자란 것은 사실이나 셀바토르 공작과 황제의 사이는 좋지 않았다.
그나마 공작 부인과 돌아가신 황후, 피스토레의 어머니의 사이가 나쁘지 않았던 덕에 교류가 끊기지는 않았다.
“거기다 나는 아내도 있어! 엄청엄청 이쁘고 요정 같다고!”
분명 아셀라는 좋은 친구이자 조언자였고, 완벽한 조력자였다. 그걸 부인하지 않는다. 그 사실을 부인할 바에야 차라리 제가 아버지와 같은 핏줄임을 부인하지.
하지만 연인은 아니다. 정말로 아니었다. 황실에서 오매불망 자신의 귀환을 기다릴 아르트엘에게도 실례였고 무엇보다 피스토레 본인에게도 실례였다.
상상조차 가지 않는 일이었다. 친구와 연인이 된 자신이라니!
피스토레의 필사적인 모습에 사이레인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자네.”
그 틈을 타 피스토레가 역공을 시작했다. 안 그래도 궁금하던 차였다. 아무리 아셀라의 취향이라고 해 봤자 마음이 서로 안 맞으면 끝이니까.
“아셀라를 좋아하나?”
피스토레의 질문에 사이레인의 청녹색 눈동자가 커다래지더니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어?”
그리고 얼굴을 한 번 쓸고 눈을 다시 깜빡이더니 아셀라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무언가를 깨달은 얼굴, 사이레인의 그 표정에 피스토레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빙고.
아셀라는 처음 이자의 초상화를 봤을 때 곰 같다 했었지. 곰, 곰 귀엽지. 봉제 인형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대표적인 동물이 곰과 토끼가 아니던가.
아셀라가 이미 이자를 보고 곰이라고 생각한 시점에서 이 사이레인이라는 용병은 완벽한 제 친구의 이상형이었다.
‘좋아, 좋아.’
아셀라도, 사이레인도 좋다고 하면 결혼을 밀어붙이자. 아니, 이미 좋다고 하는 시점에서 자신이 할 일은 최대한 황제의 반대를 막는 것뿐이겠지만.
아직은 아셀라도, 셀바토르 공작도 모르는 사실이었지만, 최근 황제는 아셀라의 결혼을 자신이 주도하려고 하고 있었다. 자신이 고른 남편과 그녀를 결혼시켜 셀바토르 공작가마저 자신의 발밑에 무릎 꿇게 하려는 속셈이었다.
셀바토르 공작과 아셀라가 그 멍청한 명령에 굴복할 리는 없지만 상당한 압박이 들어갈 게 분명했고 그럼 귀찮은 일이 벌어질 것이다.
피스토레는 그걸 막고 싶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황가는 아이테라 대공가와 셀바토르 공작가를 전부 손에 넣고 휘두름으로써 조언자를 잃어버린다. 길을 가르쳐 줄 조언자의 입을 막으면 언젠가는 르카디우스 제국의 황가는 길을 잃을 것이고.
‘그 끝은 쉽게 상상이 가지.’
결국 제국은 몰락할 게 분명했다.
거기다 셀바토르 공작가와 마찰을 일으켜 봤자 좋을 일도 없었으며 무엇보다 피스토레는 친구로서 아셀라를 지켜 주고 싶기도 했다.
‘뭐, 겸사겸사 결혼의 행복감을 아셀라도 알면 좋은 거고.’
아르트엘과 자신이 얼마나 행복하던가. 그 사랑스러움을 아셀라도 조금이라도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도 없지는 않았다.
마음은 자각한 것 같으니 이제 어떻게 다가가게 할지의 문제만 남은 건가.
현실적으로 벽은 높았다. 아셀라는 르카디우스 제국의 고위 귀족이고 사이레인은 작위도 없는 평민, 그것도 고아에 떠돌이 용병이었으니까.
‘내가 도와주면 되는 거지.’
에타이들을 전부 잡아들이고 나면 공을 세웠다며 기사 작위를 내려 주자. 준귀족이 된다면 아셀라와 결혼하는 데 조금은, 아주 조금은 도움이 되겠지. 거기에 자신도 사이레인의 편에 선다면 조금 더 도움이 될 것이다.
피스토레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의 행복한 미래가 자신에게 달려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인가 피스토레의 눈에는 사이레인 자체도 나쁘게 보이지 않았다.
“내가 도울게, 그대는……. 어?”
중대한 결심을 하고 고개를 들자 자신의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사이레인은 이미 성큼성큼 앞서 나가고 있었다. 어딘가 상기되고 당당한 표정으로.
피스토레의 눈이 커다래졌다. 설마 저놈 지금 아셀라에게 고백하려는 건가?
“자, 잠깐!”
“쉿.”
피스토레의 절박한 만류도, 그리고 사이레인의 고백도 아셀라에 의해 막히고 말았다.
바위에 붙은 아셀라는 턱짓으로 한곳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늑대들의 무리와 함께 거대한 늑대 한 마리가 있었다.
“……대장이로군.”
방금까지 살짝 들떠 있던 얼굴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늑대 마수는 보통의 늑대들보다 거대했는데, 대장은 늑대 마수 중에서도 독보적으로 큰 덩치를 가지고 있었다.
“저놈만 죽이면 되는 거지.”
테펜텔이 어딘가 즐거움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철퇴를 잡자, 피가 묻어 있는 쇠사슬이 잘그락거렸다.
“사이, 너는 저기로 가서 주변에 있는 놈들을 맡아. 피스토레, 너는 위험하지 않게 이곳에 있고. 테펜텔 너는 뒤로 돌아간 후에 사이를 도와줘. 도망치는 놈들이 생기면 그놈들 위주로 잡아.”
아셀라는 빠르게 세 사람에게 할 일을 부여했다.
“대장은?”
테펜텔의 물음에 아셀라가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웃었다. 그녀의 미소에는 약하지만, 분명히 즐거움이 묻어 있었다.
“저건 내 몫.”
제일 재밌는 건 자기가 가져가겠다는 말이었다. 테펜텔이 입술을 삐죽 내밀고 투덜거렸지만, 돈을 주는 고용주에게 대놓고 항의하지는 않았다.
사이레인과 테펜텔이 아셀라가 정해 준 위치에 서자, 그녀가 턱짓으로 신호를 보냈고 말 그대로 살육전이 시작되었다. 지네가 아닌 늑대 마수에게 테펜텔은 무자비하게 철퇴를 휘둘렀고 그건 두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상당히 수가 줄어 있던 늑대 무리는 더욱 빠르게 수가 줄었고 세 사람이 사방에서 나타났기에 도망을 치지도 못했다.
세 사람의 발목을 잡지 않기 위해 아셀라가 말한 자리에 숨어 있던 피스토레는 그 광경을 보면서 혀를 내둘렀다. 대장을 공격하는 아셀라와 그런 아셀라를 노리고 달려드는 늑대들을 가볍게 쳐 버리는 사이레인. 생각보다 두 사람의 합이 잘 맞았다.
아셀라는 제 키에 맞는 장검을 쓰고 있었고, 사이레인은 거대한 도끼라, 어쩐지 두 사람은 손발이 척척 맞았다. 사실 그건 테펜텔도 마찬가지였으나 피스토레는 그건 지워 버렸다. 나중에 금화를 더 얹어 주면 되는 거니까.
일단 사이레인의 작위를 기사가 아니라 자작쯤으로 해 보자. 아니, 조금 더 힘을 써서 백작 정도? 아무리 피스토레라도 작위를 함부로 내릴 수는 없지만 제 친구가 저렇게 즐거운 걸 보니 절대 놓쳐서는 안 될 사람이라는 게 확실해졌다.
이미 피스토레의 머릿속에서는 셀바토르 공작의 결혼식이 거행되면서 최고 사제가 주례를 서는 모습이 그려지고 있었다.
“어, 어?”
그런데 그 상상이 깨진 건 한 늑대 때문이었다. 그것은 굽이진 바위틈에서 기어 나오고 있었다. 늑대와 싸우는 세 사람의 모습을 한 발짝 뒤에서 바라보고 있었기에 피스토레만 발견한 듯했다.
얼핏 보기에도 대장과 비슷한 크기. 피스토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마수들은 힘으로 서열을 정한다. 가장 강한 놈이 대장이었고 대장이 위험할 시 무리의 전체가 적에게 달려들었다.
그런데 아주 간혹 대장이 둘인 경우가 있었다. 매우 희귀한 일이었고 발견되면 기록으로 남길 정도였다. 피스토레에게 그걸 알려 준 백작은 아마 피스토레는 그걸 볼 일이 없을 거라고 단언했고, 피스토레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 그 믿음이 산산이 깨져 나갔다.
안 되는데. 피스토레는 침을 꿀꺽 삼켰다. 반쯤 빠져나오는 두 번째 대장과 세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평소라면 알아채고도 남았을 이들이었지만, 워낙 늑대들이 끈질기게 달라붙는 바람에 두 번째의 존재를 아직 모르는 듯 보였다.
“아, 진짜 끈질겨!”
테펜텔이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크게 외쳤다. 회복이 빠른 마수들이다 보니 아무래도 테펜텔의 철퇴와는 합이 맞지 않았다.
사이레인은 아셀라에게 덤벼드는 늑대 한 마리를 베어 넘기고 낮게 낄낄거리며 웃었다.
“야, 너 웃냐?”
“그럼 웃지, 우냐? 그것도 한 번에 못 보내 주는데?”
사이레인의 말에 머리끝까지 약이 오른 테펜텔이 이를 악물고 자신에게 덤벼드는 늑대에게 힘껏 철퇴를 휘두르자 퍽, 소리가 나며 한 방에 늑대가 떨어져 나갔다.
“봤냐!”
테펜텔이 의기양양하게 사이레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사이레인은 매정하게도 이미 고개를 돌린 지 오래였다. 분통 터져 하는 테펜텔과 그런 테펜텔을 무시하는 사이레인을 뒤에 두고 아셀라는 대장과 대치 중이었다.
‘끈길겨.’
생각보다 강한 놈이었다. 발톱도, 이빨도 날카롭고 단단했다. 가죽 역시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연구해 보고 싶을 정도로 제대로 공격이 먹히지 않았다.
힘으로 무식하게 밀어붙여 가장 골치 아픈 이빨과 발톱을 부러트려 버릴까 고민하던 아셀라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검이 버티질 못한다.
이미 몇 번이나 검을 깨 먹은 전적이 있는 아셀라는 간신히 길들인 검을 또 부숴 먹고 싶지 않았다.
남들이 들으면 기함하겠지만, 이럴 땐 타고난 힘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지곤 했다. 보통의 셀바토르보다도 뛰어난 힘 때문에 맞는 무기를 찾기가 몇 배는 힘들었다. 좀 버틸 만하면 부서지고, 좀 길들였다 싶으면 깨져 버렸다.
‘그나마 아버지의 검이 가장 괜찮은데.’
한 번이지만 아버지의 검을 빌려 써 본 적이 있었다. 아셀라의 괴력을 감당해 내면서도 잘 길든 검은 그녀의 마음에 쏙 들었다. 그래서 달라고 했지만 당연하게도 거부당했다. 빼앗고 싶긴 했는데 어머니가 결혼할 때 가지고 온 검이라 쉽게 뺏을 수도 없었다.
‘아니지.’
아셀라는 늑대가 휘두르는 거대한 앞발을 피하며 생각을 바꾸었다. 그 정도로 소중한 검이면 축하받을 날에 선물로 받으면 되는 거 아닌가? 예를 들자면…… 자신이 셀바토르 공작이 되는 날? 완벽하다.
아셀라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셀바토르가의 인간들은 대대로 제 자식에게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고 그건 아셀라의 아버지인 현 셀바토르 공작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마 자신도 그렇겠지.
누군가와 결혼해 아이를 낳는 것까지는 나름 상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이에게 애정을 쏟아붓는 자신의 모습은 도무지 그려지지 않았다. 남들이 보기엔 조금은 매정해 보이는 어머니가 될지도 모른다.
그래도 아셀라는 자신의 아이도 자신을 이해할 거란 걸 확신하고 있었다. 마치 지금의 자신과 아버지가 그렇듯 덤덤하고도 문제가 없는 그런 사이가 될 것이다.
누군가는 이게 셀바토르 공작가가 힘과 마력을 가져간 대신 잃어버린 저주 같은 것이라고 했지만, 아셀라의 생각에 이건 그냥 대대로 내려오는 성격이었다. 셀바토르 성격의 표본인 아버지와 그 아버지를 쏙 빼닮은 자신. 하지만 어머니는 달랐다.
‘어머니는 나를 좋아하지.’
일전에도 아버지와의 싸움에서 이기지 않았던가.
어머니에게 졸라 보자. 어차피 공작 위를 자신에게 물려주면 아버지도 어머니를 위해 산 섬에서 평화로운 나날을 보낼 테니 검 따위 필요 없지 않은가. 그러니 그건 내가 갖는 게 맞는 거지.
해결책을 찾은 아셀라는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자신의 목덜미를 물어뜯으려는 늑대의 입에 검을 가져다 박았다.
끼, 끼긱.
아셀라의 검이 늑대의 이빨과 부딪치며 마치 검과 검이 마주쳤을 때 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대로 힘을 줘 이빨을 부러트려도 되겠지만 당장 쓸 검이 없어지는 건 사양이었다.
이빨을 받아 낸 자세가 조금 불안정했던 탓인지 날카로운 이빨이 아셀라 쪽으로 조금 기울었다. 이빨이 제 얼굴에 닿기 전 그녀의 미소가 짙어졌고 순식간에 검에서 냉기가 흘러나왔다.
“……?!”
이상함을 느낀 늑대가 뒤로 물러나기도 전에 그대로 입안에서 날카로운 얼음이 솟아올랐다.
그게 끝이었다. 아무리 단단한 가죽과 날카로운 이빨을 가지고 있더라도 입안만큼은 다른 동물들처럼 약하다.
쿵! 늑대의 몸이 옆으로 넘어가며 자욱한 흙먼지를 일으켰다. 아셀라는 검에 묻은 피를 털어 내며 쓰러진 늑대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됐다. 이제 끝났으니 남은 늑대들을 처리하고 위로 올라갈 방도를 찾아봐야지.
“사이…….”
뒤를 돌며 이름을 부르던 아셀라의 얼굴이 굳어짐과 동시에 그녀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대장과 싸우느라고, 검 생각을 하느라고 잠시 정신을 판 사이, 대장급으로 보이는 거대한 늑대가 한 마리 더 나와 있었다. 그 늑대는 사이레인과 대치 중이었는데 한쪽 뒷발이 둔기에 맞은 듯 덜렁거리고 있었다.
날카로운 금속음이 들렸다. 이빨을 막아 내는 사이레인의 얼굴이 구겨져 있었다.
후웅! 늑대가 잠시 주춤하는 틈을 타 사이레인이 크게 도끼를 휘둘렀지만, 늑대는 그보다 조금 더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아까 아셀라가 싸웠던 놈보다 힘은 부족하지만, 더 빠른 놈 같아 보였다.
“젠장…….”
순식간에 사이레인 키의 두 배는 되어 보이는 바위 위로 올라간 늑대를 보며 그가 이를 까득 갈았다.
“크르르르…….”
늑대 역시 약이 오를 대로 올랐는지 이를 보이며 사이레인을 위협하고 있었다. 아셀라는 검을 들고 사이레인을 돕기 위해 그에게 다가가려고 했다.
“아셀라, 나 말고 용병을 도와!”
용병을? 그러고 보니 테펜텔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설마, 또 지네가 다시 나타난 건가?’
주변을 살피자 아셀라는 자기 생각이 정답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테펜텔은 이를 악물고 철퇴를 휘두르며 싸우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표정이 좋지 않아 보였다. 거기가 피로가 누적된 건지 살짝 비틀거리기까지 했다. 심지어 팔이 잘 안 움직이는 듯 철퇴를 휘두르는 움직임이 둔해져 있었다.
‘설마.’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기억이 있었다. 호숫가로 오기 전 봤던 테펜텔의 상처. 가볍게 스친 상처처럼 보였고 테펜텔 역시 마비는 오지 않았다고 했지만 가장 유력한 후보였다.
‘지네 마비 독은 귀찮은데.’
쳇, 가볍게 혀를 찬 아셀라가 입을 열었다.
“사이, 버틸 수 있겠어?”
일단 테펜텔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지네들부터 처리하는 게 급선무였다. 아셀라의 말에 사이레인이 늑대를 노려보며 고개를 끄덕였고, 아셀라는 재빠르게 테펜텔을 돕기 위해 호수 쪽으로 달려갔다.
아셀라가 등을 보이자 기회라고 생각한 건지 늑대가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결과만 이야기하자면 늑대의 판단은 옳았다. 늑대는 아셀라가 다른 대장 늑대를 죽이는 걸 목격했고 자신이 이기지 못할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저렇게 틈을 보일 때 공격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면 단 하나, 사이레인이었다.
우둑. 포물선을 그리며 아셀라에게 덤벼들던 늑대의 앞발이 뭉개졌다. 그사이 아셀라는 테펜텔이 있는 곳에 무사히 도착했다. 분노와 고통에 물든 샛노란 눈이 사이레인을 향했다.
“왜, 아프냐?”
도끼를 든 사이레인은 입을 삐죽 올렸다. 마치 그의 말을 알아들은 듯 늑대의 울부짖음이 한층 더 강해졌다.
‘젠장.’
무식한 힘으로 달려드는 늑대의 공격을 받아 내며 사이레인은 얼굴을 구겼다. 늑대는 마지막 힘까지 짜내어 그를 죽이려 하고 있었다.
아직 힘이 넘치는 늑대에 비교해 사이레인은 상당히 피로가 누적된 상태였다. 동굴에 들어와 늑대를 몇 마리나 잡았던가. 아까 테펜텔을 구하기 위해 지네를 잡은 것도 있었다.
적이 사람이라도 지칠 만한데 상대는 보통 사람들보다 더욱 강한 마수였다. 들어오는 공격에 밀리지 않기 위해 사이레인은 이가 나갈 정도로 깨물고 도끼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무기를 놓치면 끝장이다. 가장 본능적인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아셀라의 도움을 받아서 이길 수는 없다는 생각이 뒤를 이었다.
이런 놈들 목 하나쯤 가져다주면서 고백을 해야지. 오히려 도움을 받으면 꼴 보기 싫어질 게 분명했다.
‘좋아.’
다시 힘이 샘솟는 것 같았다. 사이레인은 달려드는 늑대를 향해 도끼를 휘둘렀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사이레인 쪽으로 승기가 돌아왔다. 아까 테펜텔이 휘두른 철퇴에 제대로 맞은 뒷다리가 제 역할을 못 한 데다가 앞발도 도끼에 의해 힘이 들어가지 않은 덕분이었다.
높은 곳에서 착지한 늑대의 자세가 흔들렸다. 이 틈이다. 사이레인은 마지막 공격을 날리기 위해 비틀거리는 늑대의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날카로운 외침이 들렸다.
“안 돼!”
그 외침에 알 수 있었다. 실수했구나.
늑대는 꾀를 내어 일부러 틈을 보였다. 거기다 지금 사이레인이 휘두르는 도끼를 막기 위해 움직이지 않는 앞발을 희생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대신 늑대의 이빨이 그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검고, 붉은 입안과 수십 개의 날카로운 이빨을 자세히 볼 정도로 거리가 가까워졌다.
“커엉!”
옆에서 누군가가 늑대를 공격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늑대는 비명을 내질렀고 이빨은 얼굴 대신 사이레인의 어깨를 스쳐 지나갔다.
“크륵!”
괴상한 소리를 내며 화가 잔뜩 난 늑대는 이번에 방해꾼, 피스토레를 향해 달려들었다. 간신히 용기를 내 달려든 피스토레는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늑대의 모습을 보고 바로 몸을 움직였으나 늑대 쪽이 조금 더 빨랐다.
그리고 늑대보다는 사이레인 쪽이 더 빠르게 팔을 움직였다.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나며 늑대가 옆으로 기울었다.
“사, 살았다.”
털썩 주저앉은 피스토레는 피가 묻은 검을 떨어트리며 가쁜 숨을 내쉬었다. 사이레인이 위험해지는 걸 보고 달려와 늑대의 눈을 공격한 것 하나로 힘을 다했는지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마치 갓 태어난 초식동물이 된 기분에 피스토레는 헛웃음을 흘렸다.
“괜찮나?”
사이레인은 그런 피스토레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 괜찮네…….”
사이레인의 손을 붙잡고 일어난 피스토레의 시선이 피가 줄줄 흐르는 어깨에 닿았다.
“자네! 피가 나네.”
피스토레의 외침에 사이레인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더니 입꼬리를 올렸다.
“뭐, 이 정도야. 그나저나 다시 봤어! 견습이면서 이렇게 달려들 용기도 있고!”
사이레인은 피스토레가 자신을 구해 준 게 꽤 고맙고도 신기한 모양이었다. 그는 그대로 팔을 올려 피스토레의 등짝을 친근하게 때렸다. 퍽, 퍽. 이상한 소리가 들리며 피스토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셀라.”
그런 두 사람에게 다가온 건 지네들을 전부 처리하고 온 아셀라와 테펜텔이었다. 둘은 아파서 눈물을 찔끔 흘리는 피스토레와 사이레인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 견습 기사 놈, 대단한데? 늑대에게 달려들어 나를 구해 줬어.”
사이레인은 웃으면서 이번엔 피스토레를 흔들었다. 멀미가 나는지 피스토레는 입을 막고 뻐끔거리고 있었다. 안타까운 피스토레의 모습에 아셀라와 테펜텔의 얼굴이 더욱 굳어졌다.
“그런데 견습 기사라니?”
간신히 먼저 정신을 차린 테펜텔이 사이레인에게 묻자, 그가 평온한 얼굴로 피스토레의 어깨에 팔을 올리며 씩 웃었다.
“이놈! 꽤 좋은 놈이잖아.”
“어……. 아셀라, 말 안 했어?”
테펜텔이 주저하며 제 옆에 있는 친구를 바라보자 그녀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저었다.
“사이.”
고개를 든 아셀라의 얼굴은 아까보다 조금 더 어두워져 있었다.
“황태자야.”
“어?”
“그놈, 견습 기사가 아니라 우리나라 황태자라고.”
뭐? 그 말에 사이레인의 얼굴이 환한 웃음과 함께 굳었다.
움직이지 않는 시선만 간신히 내려 피스토레를 바라보자 하얗게 질린 피스토레가 어색하게 웃으며 뒤늦은 자기소개를 했다.
“르, 르카디우스 제국의 황태자 피스토레네.”
아셀라는 작게 고개를 흔들었고, 테펜텔은 웃음을 터트렸으며 피스토레는 멀미를 참느라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사이레인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