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든 일은 천막을 나서자마자 바로 시작되었다. 기사 중 검은 머리에 푸른 눈을 가진 이들이 선발되었고, 피스토레와 키는 비슷하지만 체격은 훨씬 좋은 성기사 한 명이 대역으로 뽑혔다.
성기사는 피스토레의 걸음걸이나 행동 같은 걸 어설프게나마 따라 하며 완벽한 그의 대역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수색대로 지목된 세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수색할 지역을 추렸고, 다음 날 새벽빛이 땅 위를 비추자마자 바로 출발했다. 앞서 몇 번이고 수색을 나온 테펜텔이 익숙하게 앞장섰다.
“오늘 우리의 목표는 이 절벽이야.”
어젯밤 테펜텔과 아셀라는 라니스 숲 남서부 지역에 요새가 있을 만한 곳을 몇 곳 추려 냈는데 그중에는 절벽도 있었다. 깎아지듯 떨어지는 절벽은 한눈에 보기에도 위험해 기사단은 물론 몬스터나 위험한 동물들도 피하는 곳 중 하나였다.
하지만 최근 정찰에서 절벽 밑에서 에타이들이 움직이는 걸 포착했기에 가장 가능성이 큰 곳 중 하나였다.
“일단 이 부분부터 여기까지.”
테펜텔은 작은 종이에 그려진 절벽 일부분을 찍더니 쭉 그었다. 오늘 확인할 곳이었다. 본래라면 다시 알려 주는 일 없이 바로 절벽으로 출발했겠지만, 오늘은 예외였다. 피스토레가 있었으니까.
‘잘 할 수 있을까?’
테펜텔은 힐끔 굳은 얼굴로 지도를 진지하게 내려다보는 피스토레를 바라보았다.
척 보기에도 이 나라의 황태자는 검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고, 테펜텔은 이미 기사들에게서 피스토레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지 오래였다. 다들 괜찮은 이야기를 했으나 전투에 관해 물으면 말을 흐렸다.
괜찮으려나. 적어도 수색에 따라올 체력 정도는 되어야 할 텐데. 그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힘들다고, 어렵다고 그대로 땅에 주저앉는 건 아닐까.
아셀라가 괜히 데려온 건 아니겠지만 불안이 엄습했다. 아롬벨의 왕자 같은 사람은 아니겠지. 테펜텔의 머릿속이 어지러워졌다.
단 한 명뿐인 아롬벨의 왕자는 불만이 많은 사람이었다. 조금만 불편해도 성질을 냈고, 무기를 잡으면 자신의 손이 부서지는 줄 알았다. 원하는 것도, 욕심도, 그리고 불만도 많던 아롬벨의 왕자.
‘그래서 죽었지.’
왕위에 오를 만한 인물이 아니라 판단되자마자 그는 숨을 거두었다. 돌연사. 모두가 그렇게 들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여기는 뭐 그런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불평을 한다면 기분이 좀 더러워지긴 하겠네.’
테펜텔은 상처투성이인 손으로 제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티 내지는 않을 것이다. 테펜텔의 입장에서 피스토레는 돈을 주는 고용주였으니까.
르카디우스 황실은 테펜텔에게 꽤 만족스러운 돈을 지급했고, 추가금도 넉넉하게 쥐여 주었다. 조금만 더 모으면 완벽히는 아니더라도 영지를 조금이나마 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녀의 영지는 몇 년 동안 이어진 최악의 가뭄으로 크게 휘청거리고 있는 상태였다. 테펜텔의 부모님은 어떻게든 영지를 살려 보려고 사방으로 노력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테펜텔은 차기 영주로 영지를 살리기 위해 용병 일을 택했다. 돈을 버는 대로 영지로 흘러갔고, 테펜텔의 손에는 남는 게 없었다.
아무리 강인한 그녀도 세월에는 버티기가 힘들었고 반복되는 그 상황에 조금 지쳐 가던 때, 자신을 셀바토르라 소개하는 여자를 만났다.
‘뛰어난 실력을 갖춘 이는 더더욱 값을 받아야지.’
그렇게 말하며 어마어마한 금액을 불렀다. 타국인을 좋아하지 않는 르카디우스 황실을 설득시킨 것도 그녀였다. 덕분에 테펜텔은 숨통이 좀 트였고 생각보다 더 빠르게 영지의 빚을 해결할 수 있었다.
아셀라 역시 테펜텔의 활약으로 득을 봤으니 서로 상부상조하는 관계였지만, 그래도 테펜텔은 그녀에게 좀 고마운 감정이 있었다.
‘그래.’
테펜텔은 어깨에 닿을 만큼 길어 버린 제 머리를 매만지며 생각을 정리했다. 눈앞에 있는 이 고귀한 황태자가 아롬벨의 왕자만큼 불만이 많아도 최대한 참고 참자. 못 가겠다고 투덜거리면 업어서라도 데려다주면 되겠지.
하지만 이내 테펜텔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게 잘못된 생각이라는 걸 깨달았다.
피스토레는 생각보다, 아니 기대보다 훨씬 더 빠르게 테펜텔을 잘 따라왔다. 간혹 지형 때문에 뒤처지긴 했지만, 기사들의 도움으로 금방 따라잡았고 절벽에 도착할 때까지 그는 아무런 불평도 쏟아 내지 않았다. 분명 힘들었을 텐데.
“아셀라.”
테펜텔이 아셀라를 부르자, 제복 위에 짙은 초록 망토를 두른 그녀가 시선을 맞췄다.
“생각보다 더 잘 따라왔네.”
누구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아셀라는 정확히 피스토레임을 알아차렸다.
“겨우 이 정도도 따라오지 못할 만큼 약하지는 않아.”
테펜텔과 다른 기사들의 눈에는 아직도 의구심이 서려 있었다. 그걸 가볍게 무시하며 아셀라는 입을 뗐다.
“금방 알게 될 거야. 괜히 데려온 게 아니라니까. 그리고 제 위치는 잘 아는 놈이지.”
비록 황제의 기준이 높아 허덕이고는 있지만, 피스토레 역시 이 나라의 황태자였다.
아직 새벽이슬이 맺혀 있는 시간인지라 숲의 바람은 차가웠다. 아셀라는 눈을 가늘게 뜨고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테펜텔과 수색에 능한 자들을 골라 데려왔기에 절벽 수색은 빠르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무언가를 발견할 수는 없었고 첫날은 그렇게 사라졌다.
둘째 날이 밝았다. 어제보다는 지친 얼굴이었지만 그래도 잘 따라오던 피스토레가 갑자기 발을 멈추었다.
“……?”
그의 시선이 한곳을 향했다. 피스토레의 시선이 박힌 곳은 빛도 잘 들지 않을 정도로 유달리 우거진 숲이었다.
“피스토레, 무슨 일이야.”
결국 그의 근처로 다가온 아셀라를 바라보며 피스토레가 조심스레 입을 뗐다.
“아셀라, 저기에 뭔가가 있어.”
“뭐?”
피스토레의 말에 아셀라와 테펜텔 그리고 기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숲 안쪽으로 향했다. 하지만 거기에는 불길하게 우는 새와 숲 그늘만 있을 뿐이었다.
“아니야, 정말 뭐가 있다니까?”
의심쩍은 시선을 받은 피스토레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필사적으로 항변했다. 그러다 이내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말을 흘렸다.
“정말 뭔가 있는 기분이야.”
눈치까지 슬쩍슬쩍 보는 게 자신이 없는 모양이었다. 잠시 그런 피스토레와 숲 안쪽을 바라보던 아셀라가 손을 들었다.
“먼저들 가서 수색하고 있어. 나는 이 주변을 둘러보고 갈 테니까.”
“어? 괜찮겠어?”
테펜텔이 놀라 눈을 깜빡이자,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아셀라는 머리가 풀리지 않게 다시 묶었다.
“지리는 이미 전부 익혀 놨어. 이 부근은 우리 진영과도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니니, 이상한 게 있으면 빠르게 처리하는 게 좋겠지.”
피스토레의 말대로 이상한 게 있다는 걸 확신한 목소리였다. 아셀라의 말에 테펜텔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하더니 이내 발을 떼었다.
“알았어, 너무 늦을 것 같으면 먼저 진영으로 돌아가 있어.”
가볍게 고개를 끄덕거린 아셀라가 빠르게 숲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걸음을 떼자 놀란 다람쥐 한 마리가 나무로 재빠르게 올라갔고 토끼 두 마리가 깡충 뛰어 덤불 밑으로 기어들어 갔다.
그뿐이었다. 숲 안쪽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내려오고 새들이 울고, 작은 동물들이 아셀라를 보고 놀라 도망치는 그뿐. 피스토레가 ‘뭔가’라고 부를 정도는 없었다.
그러나 위험한 것이 있으리란 아셀라의 믿음은 바뀌지 않았다. 단순히 황태자인 피스토레의 자존감을 높여 주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저기.”
햇볕이 유달리 뜨겁던 여름날, 별장으로 놀러 간 어린 피스토레는 한 곳을 가리켰다. 넓디넓은 정원에서는 아셀라와 피스토레 그리고 아르트엘이 공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그들을 지켜야 할 기사들은 조금 멀리 떨어져 있었고, 시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확히는 남들의 얼굴만 맞추는 독보적인 아르트엘의 공 실력 때문이었다. 거기에 이 별장은 단 한 번도 적에게 허점을 내어 준 적 없어 안전하다는 인식이 강했다.
그렇게 세 아이만 정원 한곳에 덩그러니 남아 있을 때, 피스토레가 한 곳을 가리킨 것이었다.
“저기 뭔가가 있어.”
아셀라도 아르트엘도 채 열 살이 되지 않던 때였다. 아셀라는 그때 처음으로 피스토레의 얼굴이 차갑게 내려앉은 걸 보았다.
“아무것도 없는데?”
금색 공을 든 아르트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피스토레는 고개를 저으며 뭔가가 있다는 주장을 물리지 않았다.
“있어.”
“없다니까.”
없다는 아르트엘과 있다는 피스토레의 신경전이 팽팽해졌을 때, 아셀라가 입을 열었다.
“기사들에게 확인해 보라 하자.”
그렇게 말하며 기사들을 부르는 순간, 풀숲에서 뭔가 튀어나왔다. 오랫동안 피스토레를 지키던 하인이었다. 늙은 하인의 손에는 독이 듬뿍 발린 단검이 들려 있었고 그는 주저 없이 피스토레를 노리고 단검을 휘둘렀다.
아셀라에게 제압당한 늙은 하인은 지하 감옥으로 끌려가기 전 동기를 주절주절 늘어 두었는데, 솔직히 지금 와서는 기억나지도 않는 이유였다. 그 사건이 일어나고 며칠 후 한 백작가가 몰락한 걸 봐서는 그와 연관이 되어 있겠지.
그 사건을 시작으로 피스토레는 몇 번이나 가리켰고 그가 가리키는 곳에는 무언가가 있었다.
‘독을 가지지 못한 새끼 뱀이 살아남으려고 독 대신 가진 것이로구나.’
셀바토르 공작, 아셀라의 아버지는 그걸 보고 황가의 문양인 뱀에 빗대어 말했다. 독기를 품은 성격이 아닌 피스토레가 살기 위해 가진 감이라고. 그러니 꽤 믿을 만한 것이라고도 했었지.
주변 지리가 잘 보이는 높은 바위 위로 올라간 아셀라가 주변을 훑으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얼굴까지 가릴 정도로 뒤집어쓴 망토가 거치적거려 벗을까 고민하는 사이 무언가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있다. 확실히 피스토레는 틀리지 않았다.
아셀라는 입꼬리를 틀어 올려 미소를 지으며 바위 아래에 있는 남자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번뜩이는 청녹빛 눈이 그녀와 마주쳤다.
“숲속에 곰 새끼가 다 있네.”
아셀라가 검을 빼 들자, 남자 역시 거대한 도끼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상처투성이인 투박한 손에 힘줄이 돋아났다.
카앙―! 쇠와 쇠가 부딪치는 소리가 숲속에 울려 퍼졌다.
아셀라의 검과 사이레인의 도끼가 부딪치는 순간, 두 사람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리고 그건 사이레인을 따라온 다른 용병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뭐, 뭐야. 저놈!”
한 남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사이레인과 같은 고아원에서 자란 그는 단 한 번도 사이레인이 힘에서 밀린 걸 본 적이 없었다.
최근 한 아롬벨의 용병과 싸울 때 엇비슷한 느낌이 나긴 했지만, 그래도 사이레인이 그 여자 용병보단 우위였다. 덕분에 그 여자의 왼쪽 어깨에 상처도 입혀 주었지.
그랬던 사이레인이 지금 뒤로 밀리고 있었다.
하지만 놀란 건 아셀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큭.”
짧은 신음을 흘린 사이레인이 바로 도끼를 잡고 공격을 퍼부었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이 무식한 힘을 이기지 못할 게 분명했다. 막았다고 해도 땅에 주저앉아 다음 공격에 목이 떨어졌을 것이고, 막지 못했다면 팔이나 목이 떨어졌겠지.
검과 도끼가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그걸 지켜보는 용병들의 얼굴을 더더욱 하얗게 질렸다.
‘안 되겠네.’
아셀라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녀의 주변에서 이 정도 힘을 가진 건 자신의 아버지 셀바토르 공작뿐이었다. 몇 번 공격을 막아 내던 아셀라는 검을 틀어 사이레인의 공격을 흘렸다. 도끼가 땅에 박히며 묵직한 소리를 내었다.
그로 인해 필연적으로 몸이 굽은 그때, 아셀라는 발을 들어 그대로 사이레인의 복부를 걷어찼다. 퍼억! 둔탁한 울림이 퍼짐과 동시에 사이레인이 이를 깨물었다.
사이레인이나 아셀라나 갑주를 걸치지 않고 있었다. 아셀라는 셔츠에 바지 그리고 망토 차림이었고, 사이레인은 가죽으로 만든 가벼운 걸 입고 있었을 뿐이었다. 복부는 텅 비어 있었다.
“어?”
이번엔 아셀라 쪽에서 당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가 이 정도로 걷어차면 평범한 사람은 뼈가 부러지거나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는데, 사이레인은 바로 도끼를 움직였다. 경이로운 움직임이었다.
‘새로운데?’
아셀라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이렇게 자신과 검을 맞대는 사람은 오롯이 셀바토르 공작, 그녀의 아버지뿐이었다. 다시 자신에게로 들어오는 도끼를 피하며 그녀는 사이레인을 바라보았다.
그도 마찬가지로 자랐을 테지. 자신과 비슷한 힘을 가진 이를 만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처음 초상화를 봤을 때 느꼈던 감각이 잘못된 게 아니었다.
‘아. 이런.’
방심했다. 서걱 소리가 나며 목 쪽에 고정해 두었던 망토 끈이 잘려 나갔다. 그 와중에 정확히 목을 노린 것이었다. 후드도 함께 벗겨지면서 시야가 밝아졌다. 아끼는 망토인데, 짜증이 울컥 치밀었다.
“어, 어. 저 얼굴! 나 알아, 괴물!”
용병 중 하나가 아셀라를 손가락질했고, 아셀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젠 괴물이라 부르는 건가. 저번 에타이들은 자신을 마녀라고 부르지 않았나.
마녀, 괴물. 무엇으로 부르든 상관없었지만, 호칭을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것만은 사양이었다. 가볍게 목을 날려 입을 다물게 해 볼까, 검을 쥔 손에 힘을 주는 순간 용병이 제 생명을 살렸다.
“사이레인, 저 여자 네 목표 맞지? 아침에 보여 줬잖아!”
뭐? 아셀라는 눈을 깜빡였고 사이레인은 차가운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마, 말하면 안 되는 거였나? 미안, 사이레인…….”
주절거리던 용병은 사이레인의 눈빛을 받고 깨갱 꼬리를 내렸다. 하지만 이미 아셀라는 그의 말을 다 들은 후였다.
“서로가 목표였어?”
이런 일도 드물지. 아셀라는 미소를 머금었다.
“사이레인, 바렌베르크 왕국 출신에 레너드 고아원 출신. 성은 없고 이름은 원장이 지어 줬지. 열세 살에 바로 용병단을 꾸렸고 그 뒤로 아롬벨로 이동했다가.”
아셀라는 여태 조사한 사이레인에 대해 읊으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이트바나로 갔지.”
우연이었다. 레너드 용병단은 돈이 되는 일이라면 거처를 옮겨 가며 무엇이든 했으니까.
그러다 마지막으로 받았던 의뢰가 이트바나 국경에서 완료되어, 그대로 국경을 넘었을 것이다. 사이레인과 용병들이 이동했을 때의 이트바나는 이미 메데이아에 의해 제국으로 편입된 후였으니까.
남아서 제 터전을 지키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메데이아를 따라 르카디우스 제국으로 넘어가는 이들도 많았다.
사이레인이 노린 것은 그 이주민들이었다. 이주민들은 돈을 모아 르카디우스 제국까지 안전하게 갈 수 있도록 호위를 고용했다.
그리고 그 시기에, 에타이들 역시 이트바나로 건너갔다. 이미 이트바나라는 이름은 잃었지만, 아직 자신들은 망하지 않았다고 믿던 사람들이 있던 나라. 거기서 에타이들을 만났으리란 생각은 너무도 손쉬운 것이었다.
에타이들은 르카디우스 제국에 반감을 품은 이들이라면 누구든 자신의 안으로 끌어들였으니까. 하지만 이트바나에서는 그런 사람들을 찾기 힘들었을 것이다. 메데이아 덕분에 이트바나의 사람들은 르카디우스 제국에 크게 반감을 품지 않았다.
메데이아가 제국으로 넘어가기 전부터 이트바나는 크게 기울어져 있었다.
귀족들은 세금을 올리고 사치를 부렸으며, 메데이아의 옆자리를 차지해 이트바나의 왕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싸웠다. 매일같이 크고 작은 분란 일어나고, 바닥을 긁어 세금을 내도 다음 날 똑같은 양의 세금이 부과되었다.
그렇게 이트바나의 사람들이 죽어 가던 때, 메데이아가 나섰다. 그녀는 자신의 나라를 르카디우스 제국의 황제에게 바쳤고 자신의 옆에 앉을 이 역시 그녀 스스로 선택했다.
그 결과 이트바나의 사람들을 억누르던 막대한 빚과 세금이 사라졌고, 귀족들의 분란에 대신 싸우거나 휩쓸려 죽을 위험도 사라졌다.
메데이아의 독단하에 급진적으로 일어난 일이라 불만을 가진 이들도 많았지만, 이내 그 불만은 사그라들었다. 가장 큰 불만을 가졌던 이트바나의 귀족들은 목이 떨어져 더 제 소리를 내지 못했고, 르카디우스 제국에 정착한 사람들은 더 나은 곳에서 살면서 서서히 불만이 사라져 갔으니까.
이트바나가 망했다는 사실에 에타이들이 달려갔지만 얻을 수 있는 건 아주 조금의 사람들뿐이었다. 지금의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는 숫자는 아니었겠지.
그런데 레너드 용병단이 어쩌다 보니 흘러 흘러 거기까지 갔으니, 에타이들의 입장으로는 놓치면 안 될 놈들이긴 했다.
‘어떻게든 자금을 털어 용병단을 묶어 놨겠지.’
실제로도 자신과 테펜텔을 상대할 수 있는 놈들은 드물었다.
하지만 아셀라는 에타이들이 약속한 자금을 저들에게 전부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에타이들의 곡창 지대는 자신이 손수 불태우지 않았던가. 그들의 자금줄을 하나하나 끊어 놨던 것도 그녀와 린체의 기사단이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에타이들의 자금 상황이란 뻔한 것이었다.
아셀라는 머리를 쓸어 올리며 자신을 보고 굳은 용병들과 아직도 도끼를 쥔 손에 힘을 주고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한 사이레인을 보고 생긋 웃었다.
“내가 아는 건 이 정도인데. 사이레인 너는 어떻지?”
친근한 듯 자신을 부르는 아셀라를 노려보던 사이레인의 눈이 움찔했다.
“괴물.”
후웅! 사이레인의 거대한 도끼가 바람을 가르더니 정확히 아셀라를 가리켰다.
“그리고 내가 죽여야 할 상대.”
아셀라의 진한 녹색 눈이 가늘어졌다.
“아쉽네. 나는 나름 내 목표라고 조사도 했는데.”
묵직하게 들어오는 공격을 가볍게 피하며 그녀 역시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가볍게 자기소개나 해 볼까. 아셀라는 작게 중얼거리며 공격을 흘려 버렸다.
자신의 공격을 피하면서도 흘려 보내기까지 하는 아셀라를 보는 사이레인의 얼굴이 구겨졌다. 아셀라는 그런 사이레인을 바라보며 검을 휘둘렀다.
“나는 아셀라 벤칸 셀바트로. 셀바토르 공작가의 후계자이고.”
캉! 검과 도끼가 부딪쳤다. 자세가 제대로 잡히지 않은 탓에 사이레인 쪽이 밀렸다. 급하게 달려온 용병 한 명이 아셀라를 향해 검을 휘둘렀고 그녀는 가볍게 피했다.
“저리 가!”
사이레인이 도와주러 온 여자를 밀어냈다. 이 중에서 아셀라를 상대할 사람은 자신뿐임을 정확하게 깨달은 탓이었다.
“르카디우스 제국의 검이라 불리는 린체 기사단의 단장이고. 아, 공작이 되면 그만둘 거야.”
카앙! 다시 검과 도끼가 부딪쳤다. 이번엔 아셀라 쪽이 밀렸고, 사이레인의 뒤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하지만 그녀는 공격을 흘리며 몸을 피했다. 도끼는 애꿎은 나무에 박혔다.
재빠른 여자. 사이레인이 꽉 다문 잇새로 중얼거렸다.
“아라벨라를 한 적도 있어. 음…… 또 뭘 말해야 하지? 자기소개를 해 본 적이 없다 보니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네.”
늘 모두가 자신을 알고 있었다. 셀바토르라는 이름을 꺼내기도 전에 그녀를 알아보고 알아서 몸을 낮췄다. 대기도 때 신전에 가면 신을 모시는 사제들도 아셀라를 한눈에 알아보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건 황제도, 황태자인 피스토레도 그리고 타국에서 온 메데이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찌 보면 첫 자기소개가 아닌가. 그 사실을 깨달은 아셀라는 눈을 크게 떴다.
카앙!! 세 번째로 검과 도끼가 마주쳤다. 이번엔 팽팽한 힘겨루기가 시작됐다. 검과 도끼, 자신들의 무기 너머로 시선을 맞춘 채, 아셀라가 미소 지었다.
“나는 마검사야.”
그녀의 말을 끝으로 불길이 치솟았고 사이레인의 눈이 커다래졌다.
거칠게 불이 붙은 검을 쳐 내며 뒤로 물러났다.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한 사이레인의 머릿속에 요새를 나서기 직전 엠릭이란 놈이 다가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괴물을 상대하러 가는 거야? 그러고 보니 정보를 제대로 주지 않았군.”
기분이 나쁜 놈인 데다가 때때로 시비까지 걸어오는 놈이라 상대하고 싶지 않았지만, 엠릭은 끈질기게 사이레인에게 붙었다. 무시할 생각으로 시선도 마주치지 않고 대꾸도 하지 않았다.
“뭐야, 듣는 척도 안 하는군. 상당히 귀중한 정보인데.”
사이레인이 듣든 말든 엠릭은 입술을 틀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어딘가 광적인 느낌이 서려 있는 엠릭의 눈동자. 사이레인은 그걸 놓치고 말았다.
“나는 괴물을 직접 상대했다고.”
엠릭이 자신만만하게 내뱉은 그 말에 레너드 용병단의 시선이 엠릭에게 닿았고 사이레인 역시 짜증이 잔뜩 섞인 시선을 보냈다.
“직접 상대했었다고?”
“그래! 경험자의 조언이 가장 중요한 건 용병인 네가 잘 알고 있겠지.”
엠릭은 자신만만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 괴물…… 아니 그 여자는 말이야. 생각보다 별것 없어. 여태까지 과장된 소문만 들어 봤지?”
“…….”
“힘이 세긴 하지만 힘만 믿고 밀어붙이는 경향이 있지. 기술만 따지자면 얼마 전에 만나 본 아롬벨의 용병보다도 못해.”
아롬벨의 용병, 그 말에 철퇴를 휘두르던 여자가 떠올랐다. 만만치 않았지만 그래도 못 이길 상대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들어 본 소문과는 사뭇 다르지 않은가. 괴물이라 불릴 정도면 보통 실력이 아닐 텐데.
“정말이라니까! 그렇죠, 누님!”
사이레인이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 눈치자 엠릭은 평민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던 포르까지 끌어들였다. 잠시 엠릭을 바라보다 포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힘은 확실히 강해. 하지만 조금 무식할 정도로 저돌적이지. 덕분에 나랑 타스 형님 그리고 포르 누님이 살아남은 거지. 왜 힘센 놈들이 으레 그러잖아? 너는 제외하고.”
가볍게 씩 웃은 포르는 그대로 둘을 지나쳐 요새 안으로 들어갔다. 나름 요새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포르까지 그러자 조금 흔들렸다. 잠시 고민하던 사이레인은 엠릭을 보고 질문을 던졌다.
“그 마녀, 마검사라는 소문이 있던데 진짜인가?”
마검사는 귀했으니까 소문이 뜬소문이 아닌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상대를 잘못 골랐다. 엠릭을 처음 봤을 때 더러웠던 그 기분을 쭉 유지해야 했다.
엠릭은 사이레인이 자신을 믿기 시작하자, 한쪽 입꼬리를 씩 올리더니 입에 물고 있던 싸구려 시가를 툭툭 건드렸다.
“고작 담뱃불이나 붙이는 정도지.”
무식하게 힘만 가지고 밀어붙인다니. 사이레인을 이를 꽉 깨물었다. 이렇게 날카로운 검술을 가진 이는 여태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이게 무식하다면 이 세상에 무식하지 않을 이는 없었다.
거기다 문제는 하나 더 남아 있었다.
‘담뱃불이나 붙이는 정도라고?’
사이레인이 뒤를 돌아보았다. 순식간에 불길은 주변을 휩쓸고 있었다. 놀란 용병들이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불이야!”
메마른 계절이 아니긴 했지만 그들이 있는 곳은 숲. 불탈 것들이 천지로 널려 있었다. 사이레인이 재빨리 떨어졌다.
아셀라로서는 의외였다. 당황한 듯 주변을 살피는 게 그녀가 마검사인 걸 정말로 몰랐던 모양이었다.
“꽤 유명한 사실인데 몰랐어?”
이미 알았지만 너무 허황된 이야기로 치부했거나 에타이들이 정보를 제한한 게 틀림없었다.
“에타이 놈들은 너무 믿지 않는 게 어때? 적인 내가 보는데도 불쌍할 정도야.”
진심이었는데, 사이레인과 용병들은 어쩐지 그 말에 화가 난 듯했다.
싫으면 말고.
아셀라는 사이레인이 불에 신경이 팔린 틈을 놓치지 않고 공격을 퍼부었다. 이런 놈들은 정신이 홀려도 금방 제정신을 되찾으니 지금이 기회였다.
눈앞에서 불이 번쩍이고 시야가 점멸하자 사이레인이 크게 비틀거렸고, 그때를 노려 아셀라가 검을 크게 휘둘렀다.
아까 아셀라의 목 쪽에 걸려 있던 망토 끈이 잘려 나간 것처럼, 검날이 사이레인의 턱을 스쳐 갔다. 턱부터 뺨까지, 깊은 상처가 났다.
사이레인은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훑었고 커다란 손에 피가 고였다. 상처 입은 사이레인의 얼굴이 구겨지기 시작했다.
“너…….”
“아셀라!”
사이레인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뒤에서 사람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났다. 아셀라가 위협용으로 질러 놓은 불 때문인 듯 보였다.
아셀라는 가볍게 뛰어 자신이 원래 있던 바위 위로 올라갔다. 용병단과 사이레인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녀를 따라갔다.
그녀는 사이레인을 바라보며 자신의 뺨을 톡톡 두드렸다. 사이레인이 상처를 입은 곳이었다.
“그럼 다음에 또 봐, 곰.”
아셀라의 짙은 녹색 눈이 웃음을 머금고 반달처럼 휘었다.
잠시 그녀를 바라보던 사이레인은 다급하게 숲의 그늘로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보며 아셀라는 작게 콧노래를 불렀다. 이게 얼마 만에 느껴 보는 즐거움인지.
“아셀라.”
테펜텔이 달려왔을 때는 이미 사이레인과 용병들은 자리를 뜬 후였기에, 그녀가 본 것이라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검을 집어넣는 친구 한 명뿐이었다.
습관대로 머리를 쓸어 올리며 아셀라는 테펜텔을 맞이했다. 주변을 살펴보는 테펜텔의 눈이 가늘어졌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불은 사그라들었다지만 주변이 온통 그을린 흔적이었다. 맑은 하늘에서 갑자기 벼락이 떨어진 게 아니라면 불은 아셀라가 마법으로 일으킨 게 분명했다.
“몬스터라도 만난 거야? 트롤? 오크 같은 놈들은 아닐 거고…….”
이미 테펜텔은 아셀라가 만난 게 인간이 아니라 몬스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몇 명의 인간이라면 굳이 그녀가 마법까지 쓸 일은 아니었을 테니까. 적어도 재생력이 뛰어난 트롤 정도면 모를까.
그런데 이 근방에 그런 놈들이 나오던가? 테펜텔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에 아셀라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사이레인의 도끼에 감겨 있던 낡은 천. 가까이 다가가 들어보니 안전을 기원하는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저도 모르게 아셀라는 허리를 숙여 천 조각을 집어 들었다.
‘수를 놓은 것도 아니고 그냥 그린 거네.’
보통은 수를 놓을 텐데. 어설픈 솜씨로 봐서는 바늘도 제대로 잡지 못하는 어린아이들이 만든 게 아닐까 싶었다.
아셀라의 입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이런 걸 소중하게 도끼에 감아 두고 다니는 용병이라니.
“아셀라, 그래서 뭐가 나왔던 거야?”
테펜텔이 저 멀리서 그녀를 재촉하듯 묻자, 아셀라는 천 조각을 품속에 넣으며 대답했다.
“별거 아니야. 곰 한 마리를 만났어.”
그리고 또 만날 것 같네. 아셀라는 가벼운 걸음으로 몸을 돌려 걸었다.
잠시 아셀라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테펜텔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었다.
‘쟤가 곰을 좋아하던가.’
생일은 모르지만, 알게 되면 곰이 그려진 걸 선물해 주자. 엉뚱한 오해를 하며 테펜텔은 아셀라의 뒤를 따라 걸었다.
*
콰앙! 커다란 소리가 식당을 가득 메웠다. 테이블이 크게 휘청거리면서 가득 담긴 스튜가 넘쳐흘러 엠릭의 소매를 적셨고, 식당에 적막이 가라앉았다.
테이블을 내려친 사이레인은 무섭게 엠릭을 노려보았다.
“왜 거짓말을 했지?”
화가 난 사이레인이 잇새로 꽉 억누른 듯한 목소리를 흘렸다. 엠릭의 옆에 앉아 있던 한 에타이는 사이레인의 모습에 슬며시 시선을 밑으로 내렸다. 하지만 엠릭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소맷자락에 묻은 스튜를 닦아 내며 말을 이었다.
“거짓말이라니? 내가 네놈에게 무슨 거짓말을 했다는 건지 모르겠군.”
“……!”
뻔뻔스러운 대답에 사이레인의 얼굴이 구겨졌다. 안 그래도 험악한 얼굴인데, 화를 내니 더욱 무서워졌다. 사이레인과 엠릭의 팽팽한 분위기에 늦은 저녁을 먹던 몇 명은 자신의 그릇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무슨 거짓말을 했는지 모르겠다고?”
“커, 컥!”
화가 난 사이레인은 그대로 엠릭의 멱살을 잡아 들어 올렸다. 설마 자신을 이렇게 대할 줄은 몰랐는지, 아니면 사이레인의 힘이 이 정도로 강할 줄은 몰랐는지 엠릭의 얼굴이 벌게졌다.
“네놈 눈에는 숲을 불태울 정도의 힘이 담뱃불을 붙일 정도로 보이나?”
아. 그제야 엠릭은 전말을 알아차렸다. 이 무식한 용병은 하루도 안 되어 르카디우스 제국의 괴물과 마주친 모양이었다.
엠릭은 사이레인을 내려다보며 누런 이를 보이며 웃었다.
“그건 네놈의 실력이 부족한 탓이지. 고작 그딴 거 하나 못 막아서 나한테 달려와?”
“그런 거?”
사이레인의 이마에 힘줄이 솟아올랐고, 자연스레 엠릭의 멱살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는 와중에도 엠릭은 사이레인을 도발하는 걸 멈추지 않았다.
“아, 하하. 얼굴에 상처까지 입었군. 하급 용병다워서 좋은데? 바닥을 기는…… 놈들에겐 이 정도도 과분……하지.”
하급 용병. 거기서 사이레인은 왜 이 엠릭이란 자가 자신에게 제대로 된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이건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었다. 레너드 용병단과 에타이들은 같은 배를 탄 사이다. 비록 사이레인도 엠릭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나 이런 상황에서 거짓된 정보를 주는 건 아군을 죽이겠다는 소리였다.
“이 미친 새끼가.”
손에 힘을 주자 숨이 통하지 않는지 엠릭의 숨이 점점 엷어졌다. 견디지 못하겠는지 주먹을 휘둘렀지만, 사이레인에게 타격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이……거 놔!”
결국 발길질까지 했지만, 엠릭의 목을 잡은 손에 들어간 힘은 약해지지 않았다. 엠릭의 얼굴이 점차 하얗게 변함과 동시에 사이레인을 때리는 주먹과 발길에 힘이 풀렸다.
사이레인을 따라 들어간 레너드 용병 몇이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엠릭을 바라보다 그를 말리려는 순간, 누군가가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죽어 가는 엠릭을 살린 건 타스였다. 보아하니 식당을 빠져나간 에타이들 중 한 명이 타스를 불러온 모양이었다.
원장님께 이르는 꼬맹이도 아니고. 어이가 없어진 사이레인은 거칠게 엠릭을 내던졌다.
테이블 위로 떨어진 엠릭은 컥컥거리며 한동안 숨을 골랐다.
“내가 보석을 주고 그쪽을 고용한 이유는 이 요새의 방어와 공격을 위해서지, 내 부하를 해치기 위함이 아닌데.”
타스가 조용히 다가와 사이레인과 다른 에타이들의 부축을 받는 엠릭을 바라보았다.
“그쪽 부하가 나에게 거짓을 말했다.”
“엠릭이 말입니까?”
타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적어도 적에 대한 정보는 정확히 제공했어야지.”
전투가 아닌 가벼운 수색을 위해 나선 상태였다. 그 여자가 무슨 생각으로 넘어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만일 전력으로 붙었더라면 위태로울 뻔했다.
거기다 주변에 동료들이 있었던 게 분명했다. 실제로도 전투가 시작되고 얼마 안 돼 아롬벨의 용병이 바로 달려오지 않았던가.
무엇보다 마검사. 마검사나 마법사를 상대할 때는 신중에 신중을 기울여야 했다. 특히나 그 정도 실력의 마검사라면 더욱더.
아까의 싸움은 무방비한 상태로 늑대 아가리로 기어들어 간 판국이나 다름없었다.
타스를 바라보는 사이레인이 이를 갈았다. 이번만큼은 타스는 사이레인의 편을 들 것이다. 자칫 잘못했다간 귀중한 전력을 잃을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사이레인의 착각이었다.
“그건 그쪽 잘못입니다, 사이레인.”
타스의 입에서 덤덤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뭐?”
바람 빠진 듯한 목소리가 사이레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우리가 레너드 용병단을 그 비싼 값을 주고 고용했을 땐, 일에 대한 처신도 맡긴 겁니다. 그만큼 능력이 있을 거라 믿었으니까요.”
한마디로 속인 엠릭은 잘못이 없고, 그 상황을 가볍게 빠져나오지 못한 사이레인에게 잘못이 있다는 태도였다. 타스는 사이레인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거기다 셀바토르 공작에 관한 소문은 이미 용병들 사이에서도 파다할 텐데요? 거기에 속아 넘어간 당신의 잘못이 아닐까요.”
뒤에 서 있던 레너드 용병이 앞으로 한 발 나섰다.
“그건 좀 이상하지요! 용병들 사이에서 떠도는 소문은 심각하게 과장된 것이 많았습니다. 하늘을 날며 검기를 날린다는 소문도 있었어요. 그래서 확인차 물었더니, 저자가 아니라는 답을 한 겁니다.”
용병은 겨우 벽에 기대어 앉아 숨을 고르는 엠릭을 가리켰다.
“실제로 싸워 본 사람을 믿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지요!”
“그렇다 하더라도.”
타스가 차분하게, 하지만 매섭게 용병을 노려보았다.
“어느 정도는 각오하셔야지요. 괜히 그런 과장된 소문이 돌고 괴물이라 불리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뭐, 뭐? 이봐!”
앞으로 나서려는 용병을 사이레인이 팔을 들어 막았다. 타스를 바라보는 눈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앞으로 이런 일이 없었으면 하는데.”
“약속드리지요. 엠릭도 적절한 벌을 내리겠습니다.”
벌은 무슨. 다시 이가 갈리는 걸 간신히 참은 사이레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그대로 식당을 나섰다. 식당을 나서는 사이레인의 뒤로 힘겨운 웃음소리가 쏟아졌다.
저 망할 놈. 사이레인은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용병에게 있어서 고용주와의 마찰은 가장 피하고 싶은 일 중 하나였다. 돈을 주는 인간이었으니까.
하지만 저런 놈들일 줄은 몰랐다. 엠릭이라는 자는 일부러 자신에게 거짓된 정보를 알려 준 게 분명했다. 그리고 포르와 타스는 그 행위를 묵인하고 감싸 주었고. 하급 용병들 사이에서 싹수가 보이는 신입을 미리 밟아 두기 위해 하는 짓거리였다.
용병단을 꾸리기도 전에 이름을 날리던 사이레인에게 감히 그런 짓을 하는 놈들은 없었기에 사이레인이 간과하고 있던 것 중 하나였다. 아니, 사실은 이런 중요한 상황에서 저딴 추잡한 짓을 할지는 몰랐다.
입으로는 늘 고귀한 신념을 외치면서 행동이 이따위라니, 곧 망하겠군. 반드시 저 엠릭이란 놈을 조져 버리겠다고 다짐하며 사이레인은 식당을 벗어났고 같이 식당을 나온 용병이 그를 나지막이 불렀다.
“사이레인. 괜찮아?”
살벌한 기색에 그는 기가 죽은 듯 슬며시 물었다. 하지만 사이레인은 대꾸도 하지 않고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다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에타이 놈들은 너무 믿지 않는 게 어때? 적인 내가 보는데도 불쌍할 정도야.’
사이레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사……이레인?”
조심스레 동료가 부르는 게 들렸지만 무시했다. 머릿속이 복잡스러웠다. 오늘 처음 본 적의 말이 이렇게 신경 쓰이다니. 잠시 이를 갈다 결정을 내린 사이레인은 자신을 따라오던 동료를 불렀다.
“로인, 가서 에타이 놈들이 우리 값을 치를 수 있는지 확인해 봐.”
“어, 어? 전부 이미 확인한 사항 아니야? 그리고 우린 선금도 두둑이 받았잖아. 보석 상자!”
그래, 그랬었지. 에타이들은 선금으로 보석을 상자째 내밀었다. 비록 작은 상자지만 고급 보석들로만 채워져 있어 값어치가 상당했다. 거기다 그들은 사이레인이 지목한 가게로 들어가 감정평가를 받기까지 했다.
의심할 바 없는 최상급 보석들이었다. 자신이 무작위로 지목한 가게에서 받은 데다가 용병단에서도 보석을 볼 줄 아는 놈이 고개를 끄덕여 그러려니 했다.
그러나 의심이 깊어져 자꾸만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일단 확인해 봐, 알겠지?”
“으음……. 알았어.”
눈을 찡그린 채 고개를 갸웃거리던 로인은 사이레인의 말에 이내 몸을 돌렸다.
잠시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사이레인은 머리를 긁었다. 오늘 처음 본 여자의 말에 이렇게 휘둘려도 되는 걸까.
사이레인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지만 잠시였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깊은 한숨을 흘렸다.
‘의심해도 나쁠 건 없지.’
애써 그렇게 생각하며 사이레인은 자신의 숙소로 돌아갔다.
*
‘……없어.’
사이레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도끼 끝에 감아 두었던 천이 사라졌다.
어릴 적 고아원 친구들과 함께 그린 것을 늘 도끼 끝에 매달아 두고 다녔는데, 도끼를 손질하려고 보니 없었다. 너무 낡고 오래되어 떨어지지 않도록 새 천으로 이어 감아 놓은 게, 오늘 싸움에서 떨어져 나간 모양이었다.
사이레인은 어딘가 허전해 보이는 도끼 끝을 바라보다가 얼굴을 구기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언제 없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낡디낡은 천이었다. 고아원을 나오기도 전에 그린 것이었으니까. 아무리 대충 셈해 봐도 10년은 넘은 물건이다 보니 가지고 있는 것도 사이레인 혼자뿐이었다.
다들 칠칠치 못한 성격에 잃어버리거나, 오늘의 그처럼 낡아서 사라져 버렸거나 그것도 아니면 처음부터 어디 짐 가방 밑에 쑤셔 박아 놓고 완벽히 잊어버렸다.
그러니 잃어버린 것을 안타까워만 해도 괜찮을 것이다. 아무도 사이레인에게 뭐라 하지 못할 게 분명했다. 가장 오래 가지고 다녔던 건 그니까. 하지만…….
“…….”
자신의 거대한 도끼를 무섭게 노려보며 애꿎은 머리만 헝클어트리던 사이레인은 결국 몸을 일으켰다. 그간 매달고 있던 천에 대한 의리도 있고 천이 떨어졌을 만한 곳도 명확했던 탓이었다.
오늘 셀바토르라는 여자를 만났던 그 장소, 거기에 있겠지. 실제로 그녀가 불을 썼지 않은가. 그때 새 천으로 이어 놓은 매듭이 그을리며 천이 바닥에 떨어졌을 가능성이 높았다.
‘한번 둘러보고 없으면 그냥 오자.’
이미 잠든 놈들을 깨우지 않기 위해 벽에 걸린 겉옷을 조심스레 빼낸 후 사이레인은 빠르게 숙소를 벗어났다. 늦은 밤, 요새 경비병 외에는 사이레인을 막는 사람은 없었다.
“어딜 가는 거야?”
“야간 수색.”
경비병조차 간단한 질문 후에 요새의 문을 열어 주었다. 에타이들만이 돌던 야간 수색은 어느새 용병들까지 돌고 있었으니까.
약간의 비웃음과 경멸이 담긴 경비병의 시선을 받으며 요새를 나선 사이레인은 후드를 푹 눌러썼다.
그래, 자신은 순찰 겸 가서 한번 살펴보는 것이다. 나온 김에 살펴보는 거야 어렵지 않은 일이니까. 비록 오늘은 그가 순찰을 돌 차례가 아니었고 낮에 싸웠던 장소는 순찰 장소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이긴 했지만.
달빛도 잘 들지 않는 우거진 한밤의 숲을 사이레인은 작은 등불 하나에 의지해 빠르게 걸었다. 낮의 열기는 사라지고 차디찬 한기만이 숲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있어야 할 텐데.’
가면서도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그 자리에 과연 남아 있을까, 불에 타 버린 건 아닌가.
홀로 빠르게 걸어서 그런지 아니면 마음이 급해서 그런지 생각보다 이르게 도착했다. 잘리고 그을린 싸움의 흔적들이 사이레인을 맞이했다.
어느새 저쪽 편에 걸려 있던 달이 머리 위에 떠, 달빛이 나뭇잎들 사이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사이레인은 허리를 숙이고 천을 찾아 헤맸다. 어디쯤에 있을까. 그 여자가 불을 썼던 이쯤일까 아니면 처음 검과 도끼가 마주쳤던 이 부근일까. 비록 아까보다 달빛이 선명해지긴 했지만, 사이레인의 시야는 작은 등불 하나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등불 끝에 무언가가 보였다. 사이레인의 눈이 가늘어짐과 동시에 그는 빠르게 뒤로 물러나며 도끼 대신 가져온 검을 뽑아 들었다.
땅을 비추고 있던 등불을 높게 들자, 흔들거리는 빛은 한 여자를 그려 냈다.
“굉장히 빠르네.”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어둠 속에서 나타난 건 낮에 싸웠던 그 여자였다. 검은 머리를 하나로 묶고, 낮보다 편한 복장에 망토를 걸친 여자는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있었다.
“……너.”
“안녕?”
아셀라는 자신에게 검을 겨누고 있는 사이레인을 보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인사는 중요한 거지.
하지만 상대방은 인사를 할 생각이 없는 듯 인상만 쓴 채 아셀라를 노려보고 있었다.
털을 바짝 세운 고양이 같은 모습에 사이레인에게 다가가려던 아셀라는 그냥 턱을 괸 채 그대로 앉아 있었다. 사람과 친해지는 데는 시간이 든다. 그리고 그건 동물도 마찬가지였다. 아셀라는 말없이 사이레인을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으로 여기까지 온 거지?”
도대체 저 여자는 무슨 생각으로 여기에 있는 걸까. 잠에 빠져들 한밤이었다. 복장을 보아하니 자신처럼 수색이나 보초를 위함도 아니었다. 저절로 머릿속에서 의문이 떠올랐다.
“아, 별건 아니고.”
그때 아셀라가 자신의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펼쳐 들었다. 그걸 본 사이레인의 복잡한 머리는 이내 가라앉았다. 자신이 찾고 있던 천이었다.
“주인을 잃은 것 같아서 찾아 주려고.”
그렇게 말하며 아셀라는 낡은 천을 펼쳐 사이레인에게 보여 주었다.
“네 것이지. 사이레인.”
사이레인은 비록 답이 없었지만, 천에서 떨어지지 않는 시선으로 긍정했다.
정말로 이 천을 찾으러 여기까지 올 줄이야. 어쩐지 신기해졌다.
보통 이런 물건 하나를 찾으러 여기까지 오지는 않는다.
이 부근은 르카디우스 제국 쪽에서도 그리고 에타이들 쪽에서도 수색 범위로 잡지 않는 곳이었다. 간간이 출몰하는 몬스터들 때문이었다. 나름 위험한 지역을 저 작은 등불 하나에 의존해 온 것이다.
저 용병에 대한 흥미가 조금 더 일었다. 야밤을 이용해 사람들을 공격하는 몬스터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실력이라는 걸까. 아니면 에타이들에게 뒷말이 나와도 괜찮을 정도로 이 천이 중요한 걸까.
뭐가 되었든 마음에 들었다. 낮에 검으로 이야기를 나눴을 때도 괜찮은 느낌이었지.
흘러나온 머리카락을 귀 뒤로 정리하며 아셀라는 그대로 천을 사이레인에게 던져 주었다. 설마 이렇게 간단히 천을 넘겨줄지는 몰랐는지 엉겁결에 천을 받은 그의 눈이 동그래졌다.
“뭐야, 주인 아니야?”
그 모습에 놀리듯 아셀라가 묻자 사이레인은 천을 한 번, 아셀라를 한 번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맞아.”
사이레인은 천을 다시 잃어버릴까 품에 넣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왜 나에게 이걸 주는 거지?”
생각해 보면 기묘한 일이다. 저 여자는 르카디우스 제국의 귀족이었고, 자신은 에타이들에게 고용된 용병이었으니까.
게다가 낮에도 아롬벨의 용병과 합세해 밀어붙였더라면, 전부는 아니었어도 분명 자신 동료들 중에선 사상자가 나왔을 게 분명했다. 실제로 자신도 방심 속에서 위태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아셀라라는 저 여자는 자신과 동료들을 그냥 보내 주었다. 그리고 잃어버린 줄 알았던 천까지 주워 주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그냥 버리는 천 조각이나 다름없을 텐데도.
“소중한 거 아니었어? 천에 그려진 문양, 용병들이 안전을 기원하며 수를 놓는 문양 같던데.”
“그건 맞는데.”
흐응, 콧소리를 내며 아셀라는 턱을 괴고는 사이레인을 바라보았다.
“왜 낮에는 너희를 도망치게 놔뒀는지, 왜 너에게 소중한 천을 주워 줬는지 묻는 거라면.”
사이레인을 바라보는 아셀라가 환하게 웃었다. 어딘가 음흉해 보이기도 하고, 위험해 보이기도 해서 사이레인은 본능적으로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나는 네가 마음에 드니까.”
“어?”
갑자기 튀어나온 대답에 사이레인의 눈이 동그래지더니 이리저리 헤엄치기 시작했다. 흘러나온 머리를 정리하는 아셀라의 눈이 반짝였다.
“야망도 있고 그걸 이룰 능력도 있지. 나는 실력 있는 놈들이 좋거든.”
인재들을 발견하고 키우는 건 즐겁다. 여자라는 이유로 집사가 아니라 하녀장을 생각하던 제나나, 제 실력에 맞지 않는 돈을 받아 가며 일하던 테펜텔이나.
그런 사람들을 데려다가 능력에 맞는 위치를 주고 커 가는 걸 보는 건 아셀라의 작은 취미 중 하나였다. 관심만 있고 그들을 데려와 제 위치에 놔줄 능력이 없었더라면 조금 슬펐겠지만, 그녀는 셀바토르였다. 권력도, 힘도, 돈도 그리고 인재들을 알아보는 능력도 차고 넘칠 정도로 있었다.
그런 아셀라의 눈에 사이레인이 들어온 것이다.
즐거워라. 데려다가 잘 클 만한 자리에 두고 충분한 지원을 하면 얼마나 커질까. 소드마스터까지는 아니더라도 명성을 떨치는 기사가 될 것이다. 아니, 성격상 기사가 안 맞으면 용병 왕 정도도 괜찮지.
‘그렇게 보면 메데이아, 그녀도 나쁘지는 않은데…….’
잠시 아셀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메데이아, 독을 한껏 머금은 꽃 같은 여자. 그녀에게 호감은 갔지만 그 못지않게 본능이 위험하다는 경고를 울리고 있었다. 자신들의 관계는 앞으로 그녀의 행보에 달렸다.
아셀라는 나무 그루터기 위에 굴러다니던 돌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그, 나는!”
그런데 갑자기 사이레인이 목소리를 크게 내었다. 놀라서 사이레인의 쪽을 바라보니 아직도 눈이 핑글핑글 돌고 있었다. 어버버, 헛소리를 잠시 내뱉더니 이내 소리를 내질렀다.
“나는 그럴 생각이 없다!”
저건 무슨 개…… 아니 곰 소리지. 아셀라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아, 설마.
‘오해했나?’
앞에 한 말만 들은 걸까. 뒤에 나름 충분한 설명을 덧붙였는데. 그러고 보니 마음에 든다는 말을 했을 때부터 청녹빛 눈이 미친 듯 좌우로 흔들리고 있었던 듯했다. 저놈 못 들었구나.
“어…… 그래.”
그렇구나. 아셀라가 한쪽 입꼬리만 올린 채 고개를 끄덕이자, 사이레인은 눈을 몇 번 껌뻑거리더니 희미한 등불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얼굴이 붉어졌다. 아셀라의 표정과 대답에 자신이 오해했다는 걸 그제야 깨달은 모양이었다.
한참을 말도 못 하고 입만 달싹이더니 제 얼굴을 손으로 가린 채, 커다란 몸을 천천히 허물어트렸다. 아직도 등불은 꼭 쥐고 있던 탓에 붉어진 귀가 아셀라의 눈에 들어왔다.
“아하하!”
결국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저 덩치에 저런 행동이라니! 생각보다 더 귀엽지 않은가.
아셀라의 웃음소리에 고개를 번쩍 든 사이레인은 그녀를 원망스러운 눈으로 바라는 보았지만 말은 하지 못했다.
“그…… 관심은 없는데, 다른 쪽으로 관심은 있어.”
너무 웃어서 배가 아파 왔다. 아셀라는 눈물을 훔치며 자신을 무섭게 노려보는 사이레인을 바라보았다.
“상황은 살펴봤어? 에타이 놈들은 너희에게 지불할 돈이 없다니까. 내가 그놈들의 자금줄을 하나하나 잘라 놨거든. 지금쯤이면 입에 들어갈 식량도 부족할걸.”
아셀라의 말에 사이레인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너.”
“아셀라.”
너라는 말에 아셀라는 입꼬리를 올리며 정정해 주었다.
“아셀라라고 이름을 부르기 싫으면 아셀라 벤칸 셀바토르 소 공작님이라고 불러. 아니면 아셀라 벤칸 셀바토르 린체 기사단장님도 괜찮아.”
길다. 잠시 고민하던 사이레인은 이내 나직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셀라.”
“응.”
생긋 웃으며 아셀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머쓱한 듯 잠시 얼굴을 연신 손바닥으로 쓸던 사이레인이 입을 열었다.
“너는 내가 에타이들을 배신하고 너희 쪽에 붙기를 바라는 건가?”
“그래.”
이번에도 단답이 돌아왔다. 잠시 사이레인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뭘 해 줄 수 있지?”
“뭐든, 네가 원하는 거라면 다.”
뭐든? 저 말은 조금 우스웠다. 사이레인은 비죽 한쪽 입꼬리만 올린 채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무리 저 여자라 해도 이 질문에 답은 힘들겠지.
“나를 귀족으로 만들어 줄 수 있나?”
르카디우스 제국의 귀족들은 오만했으니까. 평민 출신의 용병 따위가 자신들 사이에 섞이는 걸 원치 않을 게 분명했다. 한때 르카디우스 제국 출신 귀족 밑에서도 일해 본 사이레인은 확신했다.
다른 왕국의 귀족들도 그랬지만, 특히나 르카디우스 제국의 귀족은 마치 자신들과 용병단은 다른 생물인 것처럼 행동했다. 그는 사이레인과 레너드 용병단을 ‘근본도 모르는 자들’이라고 부르며 아무도 자신들과 섞이고 싶지 않아 할 거라 말했었다. 그러니 저 여자도 마찬가지일 테지.
“만들어 주지.”
기대와는 다른 대답이 떨어졌다. 사이레인의 눈이 커다래지고, 아셀라의 입꼬리는 호선을 그었다.
“뭘 그리 놀라. 내가 말했잖아.”
달빛은 머금은 채 아셀라는 사이레인을 바라보았다.
“뭐든 원하는 건 다 이뤄 줄게.”
사이레인은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자신을 바라보는 아셀라를 바라보았다.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도 흔들림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어쩐지 그 확고함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잠시 제 목덜미를 쓸던 사이레인이 입을 열었다.
“안 돼.”
어쩐지 청녹색 눈이 무겁게 가라 앉아 있었다.
“돈 때문에? 아니면 명성?”
아셀라의 물음에 사이레인은 답을 하지 않았다.
보통 용병이라면 도망치고도 한참 남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레너드 용병단은 요새에 머물렀다. 무언가 약점이라도 잡혀 있는 걸까?
‘설마 레너드 용병단에서도 인질을 잡아 뒀나.’
평민들을 감언이설로 꾀어 요새의 노역을 시키다가 적이 들어오면 방패로 쓰는 놈들이니 가능성이 컸다.
아셀라는 작게 이를 갈았다. 요새를 찾으면 바로 들어가 타스의 목을 자른다. 머리에 쓰레기만 가득 찼으니 머리통이 아깝지는 않겠지.
아셀라는 바닥을 구르는 타스의 목을 상상하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답을 주지는 않았지만 이대로 아셀라를 보낼 생각은 아닌지, 뜬금없는 질문을 던지며 사이레인이 제 목덜미를 매만졌다.
“혹시 보석을 잘 볼 줄 알아?”
“보석?”
아셀라의 고개가 살짝 옆으로 기울었지만, 이내 대답을 해 주었다.
“어느 정도는 보지.”
크게 흥미가 있는 분야는 아니었으나 보석을 보는 눈은 귀족들의 기본 소양이었다. 그런데 이걸 왜 물어보는 걸까.
잠시 고민에 빠진 아셀라를 구해 준 건 사이레인이었다.
“보석 하나를 봐 줄 수 있을까.”
아하. 대강 상황이 이해가 갔다.
용병의 입에서 보석이 나올 말을 하나밖에 없다. 용병에게 주어지는 보수가 아니던가.
테펜텔 역시 르카디우스 제국에서 사용하는 동전보다는 금과 보석을 선호했다. 특히나 사이레인처럼 국경을 넘나드는 용병단은 더욱더 보석이나 금을 선호했다.
“나보다는 감정사를 불러서 확인을 받는 게 좋지 않아? 그리고 용병대에는 보석을 보는 놈이 하나쯤 있을 텐데.”
용병대에서는 혹여나 가짜나 저질 보석으로 자신들을 속이는 걸 방지하기 위해 늘 한두 명쯤 보석을 확인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조차 없다면 상점의 감정사를 이용했다.
“확인했는데 믿을 수가 없어. 우리 쪽 애는 보석을 잘 보는 편도 아니고…….”
어쩐지 멋쩍어 사이레인은 말꼬리를 흐렸다. 그와 반대로 아셀라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짙어졌다.
“적인 나는 믿을 수 있고?”
“…….”
입이 콱 막혀 버렸다.
사이레인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아셀라가 몸을 일으켰다. 슬슬 서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어느새 달이 기울었고 사이레인의 손에 들린 등불은 꺼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좋아, 대신 날짜는 내가 정할게.”
잠시 셈을 하던 아셀라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사흘 아니, 나흘 후에 볼까. 자주 수색 길을 벗어나면 네가 의심받을 테니. 대신 낮이 좋겠네. 태양이 정 가운데에 있을 때.”
사이레인이 우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흘 후, 낮, 정오. 잊어버리지 않게 몇 번이고 되새겼다.
“아, 그리고 저쪽으로 가면 적당한 게 있을 거야.”
적당한 거? 물어보기도 전에 아셀라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놀란 사이레인이 등불을 높게 들자, 어느새 저만치에 서 있는 그녀가 보였다. 아셀라는 후드를 깊게 눌러쓴 채 손을 흔들었다.
“잘 가, 수색자.”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처음 만났을 때처럼 손을 살랑살랑 흔든 아셀라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머리를 긁적이던 사이레인은 아셀라가 가리킨 쪽으로 걸어갔고 거기서 사슴 몇 마리를 발견했다.
“사슴?”
왜 늦게 돌아왔는지 추궁하려던 에타이들은 사이레인이 지고 온 사슴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그저 사이레인을 탓할 뿐이었다.
“네가 너무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는 바람에 탈주했다고 보고하려고 했어, 알아? 뭐 그래도 이런 걸 잡아 왔으니, 한 번은 봐주지.”
경비병은 사이레인 때문에 신경을 썼던 게 짜증이 나는지 입으로는 연신 툴툴거리면서도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고기를 먹을 수 있겠군. 이게 얼마 만이람?”
사슴을 옮기면서 에타이가 작게 중얼거린 말을 사이레인은 놓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식사에 고기가 올라오지 않은 기간이 오래되었다. 처음엔 사흘에 한 번씩 고기를 먹을 수 있었는데, 그 기간이 나흘로 늘었다. 그리고 또 어느새 닷새, 엿새로……. 그렇게 기간이 늘어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식사에 고기가 올라왔던 건 보름 전.
사이레인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식사를 따로 하니 식사도 차별을 두는 건 줄 알았는데.’
레너드 용병단은 거대한 건물 하나를 숙소와 식당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처음엔 에타이들도 이용하는 식당을 이용했으나, 자주 시비가 붙어 따로 식사하게 되었다. 그래서 자신들을 차별하는 의미로 그런 건 줄 알아서 항의한 적도 있었다.
기억을 되짚어 보니 어제 엠릭인가 엠넥인가 하는 놈이 먹던 스튜도 나름 건더기가 풍부해 보였지만, 그 안에 고기는 없어 보였지. 왜 그걸 이제야 눈치챘을까.
“사이레인!”
“어딜 다녀오는 거야, 단장! 우릴 두고 도망간 줄 알았다고.”
숙소로 돌아오자, 레너드 용병들이 그를 맞이했다. 다들 너무 늦게 들어온 사이레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에타이 놈들이 밤새 수색을 시킨 거야?”
우람한 체격의 한 여자는 사이레인이 고개를 끄덕이면 그대로 에타이들에게 달려갈 듯 이를 갈고 있었다.
“아니, 그건 아니야.”
사이레인의 말에 아쉬운 듯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녀뿐만 아니라 여기저기에서 불만을 말하고 있었다.
“에타이 놈들, 돈을 줬다고 너무 부려 먹고 있어. 지나가기만 해도 시비를 건다고.”
“거기다 어제 사이레인에게 시비를 걸었어.”
“미친, 전부 모가지를 따 버려.”
로인 놈, 알아 오랬더니 용병들 사이에 껴서 에타이들의 험담을 흘리고 있었다.
“모가지로는 부족하지, 일단 온몸에 털을 다 뽑고 사막에 굴리는 거야.”
“고문 같고 좋은데? 여기서 제일 가까운 사막이 어디더라. 지도를 좀 봐야겠다.”
“로인.”
로인이 지도를 찾아 몸을 벌떡 일으키자, 사이레인은 조용히 그의 어깨를 잡고 숙소 밖으로 끌고 나왔다.
“알아봤어?”
숙소 뒤편으로 가자마자 사이레인은 로인을 재촉했고, 그는 아픈 어깨를 부여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알아봤지! 그런데 눈에 띄는 건 없더라고.”
“눈에 띄는 게 없다고?”
“맞아! 무기 창고나 이런 델 쭉 돌아봤거든? 그런데 뭐가 빈다든가 그런 건 없어. 식량 창고도 훑어보았지만, 문제없던데?”
물론 좀 빈 게 있지만, 그건 아직 보급 마차가 안 와서 그런 거고. 말을 주절주절 이어 나가는 로인을 뒤로하고 사이레인은 생각에 잠겼다.
그래, 보급 마차. 꾸준히 보급 마차는 무언가를 싣고 들어왔지. 비록 천으로 덮여 있어서 그게 뭔지는 몰랐지만.
“로인, 가서 식량 창고 다시 확인해 봐.”
“식량 창고를 다시 확인하라고?”
“그래, 이번에 하나하나 다 뒤져. 감자 포대든, 보리를 담아 둔 항아리든. 가리지 말고 싹 다. 알겠지? 그리고 이틀 후 보급 마차가 오지. 그것도 천을 벗겨 봐.”
“그, 그것도?”
로인이 겁먹은 듯 눈을 크게 떴다. 식량 창고와 보급 마차, 에타이들이 가장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들이 아니던가. 하지만 이내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해 볼게!”
“그래.”
사이레인은 로인의 어깨를 토닥였다. 좋아, 일을 끝냈으니 숙소로 돌아가면 선금으로 받은 보석 몇 개를 챙기자. 그리고 나흘 후 그 여자를 만나면 보여 줘야지.
‘나흘…….’
어쩐지 열이 나는 것 같아, 사이레인은 맨손으로 입가를 쓸었다. 뺨에 난 상처가 생각보다 거슬리지 않았다.
*
“요즘 어디를 그렇게 다녀와.”
후드에 묻은 새벽이슬을 털어 내는 아셀라를 피스토레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옆에는 따라가려다가 따돌려진 테펜텔이 입을 삐쭉 내밀고 있었다.
어쩐지 기분이 나빠 보이는 두 사람이었으나 아셀라는 가볍게 무시하며 후드를 벽에 걸어 두었다.
“밤 산책.”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그 용병을 만난 건 고작 두 번. 피스토레와 테펜텔에게 알려 주기는 일렀다.
사이레인과 레너드 용병단을 이쪽 편으로 만들려면 경계심을 최대한 누그러트리게 만들어야 했다. 아까도 털을 바짝 세운 새끼 고양이 같은 꼴이 아니던가.
추후 조금 경계가 누그러지면 선금에 몇 배를 제시해 보자. 무릇 용병에게 제일 중요한 건 돈이다.
‘아니, 그 전에 뭔가 원하는 게 있어 보이는 눈치였지.’
자신을 귀족으로 만들어 줄 수 있냐고 했다. 귀족, 귀족이라. 자연스레 아셀라의 눈길이 피스토레에게 닿았다. 뭔가를 테펜텔과 열렬히 떠들던 피스토레가 아셀라의 눈빛을 받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왜, 왜?”
“아니야.”
여차하면 저놈의 이름을 팔면 되는 거지. 곧 황제가 될 피스토레의 이름과 자신의 이름을 합치면 신귀족이라는 건 쉽고도 간단한 일이 된다.
‘하지만 진정으로 원하는 건 그게 또 아닌 것 같았는데.’
도대체 뭘까, 곰 같던 용병이 원하던 것은. 뭘 해 줘야 이쪽으로 오려나. 그 속에 숨기고 있는 것은 뭘까.
옷을 정리하던 아셀라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나흘 후에 만나기로 했으니까. 조용히 자신의 팔짱을 낀 채 아셀라는 생각에 잠겼다.
순식간에 붉어지던 얼굴이며 귀며, 자신이 착각했다는 걸 알자 조용히 얼굴을 감싸 쥐던 모습은 다시 생각해도 저절로 웃음이 터졌다.
자신에게 청혼하던 남자들과는 달랐다. 아직은 지위를 잇는 여자들이 별로 없어서 그런가, 은근히 자신을 아래로 보는 놈들이 많았는데. 그래서 거절하거나 뭐든 이루어 줄 수 있다고 말하면 자존심 상해 몸을 떠는 놈들이 많았다.
공개 청혼을 하기에 공개 거절을 했더니, 분노로 몸을 떨면서 자신에게 아무 개소리나 지껄이던 놈이 떠올랐다. 자신이 사람들 앞에서 창피당하지 않게 받아 줘야 한다든가 뭐라든가. 그해에 들었던 소리 중 가장 개소리였지.
말하기도 귀찮고 말해 봤자 못 알아들을 게 뻔해 사람들 앞에서 가볍게 반으로 접어 주고, 뒤로는 가문의 힘을 이용해 그놈과 그놈의 가문을 가볍게 눌러 주었다. 그 뒤로는 자신의 앞에서 개소리하는 놈들이 사라져서 편했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어쨌든 사이레인은 그런 놈들 같아 보이진 않았다. 그리고 꽤 귀여웠고.
“아셀라……?”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그녀를 현실로 되돌려 둔 건 테펜텔이었다.
“왜?”
아무렇지도 않은 척, 아셀라는 테펜텔을 바라보았다.
분명 아까 이상한 얼굴이었는데. 테펜텔과 피스토레의 눈이 가늘어졌다.
무언가 이상한 기류가 제 친구에게 찾아왔다.
*
그 뒤로 두 사람은 자신의 일에 집중했다. 아셀라는 요새를 찾기 위한 수색을 펼쳤고, 사이레인은 종종 전면전에 나섰다.
그는 성기사나 제국의 기사들과 부딪쳤지만 평소만큼 싸우지 않았다. 그저 몇 번 검을 부딪치고 뒤로 스리슬쩍 빠졌고 그건 다른 용병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둘이 약속했던 날이 돌아왔다.
“왔어?”
이번엔 화사한 낮의 햇살을 받으며 일광욕을 즐기던 아셀라는 사이레인을 보자 손을 흔들었고, 그는 상자를 내밀었다. 에타이들에게 받은 보수로 가득 찬 상자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이레인이 받은 보석은 굉장히 질이 나쁜 보석이었다.
보석을 감정한 레너드 용병이나 그때까지 제 터전을 지키고 있던 이트바나의 보석 감정사들을 나무랄 건 없었다. 사이레인에게 주어진 보석은 저품질의 보석에 마법을 걸어 최상급 보석처럼 만든 것이었으니까.
한때 몇 명의 마법사들이 마음먹고 사기를 친 적이 있었다. 보석들은 꽤나 감쪽같아 감정사들과 귀족들마저 속아 넘어갔다.
문제는 시간이었다. 마법이 걸린 상자에서 나온 보석의 광채와 투명도는 시간이 갈수록 떨어졌고, 서너 달 사이에 보석은 원래의 등급으로 돌아갔다. 그사이 마법사들은 거액의 돈을 가지고 도주를 했었다.
나름 완벽한 계획이었다. 서너 달이면 도망갈 시간도 충분했고, 귀족들은 자신의 체면만은 중요하게 여겨 입을 다물 테니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한 귀족이 마법사들의 보석으로 만든 귀걸이를 아르트엘에게 선물했고, 아르트엘은 입을 다물 인물이 아니었다. 그리고 국경을 넘기 직전의 마법사들을 잡은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아셀라였다.
마검사이자 과거에 이 사기 사건을 담당했던 아셀라는 대번에 보석을 알아보았다.
“에타이 놈들…….”
꽉 물은 잇새로 들끓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이레인의 손에 든 상자가 엄청난 힘에 우그러들며 보석들이 흙바닥에 쏟아졌다.
하, 짧게 한숨을 쉰 사이레인은 그대로 상자를 바닥에 던져 버리고는 피곤하다는 듯 아셀라가 걸터앉아 있는 나무 그루터기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말없이 자신에게 정수리를 보여 주는 남자를 아셀라는 빤히 바라보았다. 지금 이 남자의 머릿속은 상당히 복잡할 것이다.
보수로 받은 것이 가짜다. 레너드 용병단의 이름으로 선지급한 돈들을 메꿀 방도가 사라졌고, 용병들의 생계가 위태해졌다. 거기다 떠난다고 해도 에타이들이 레너드 용병단을 그대로 보내 줄까.
“이번 일만 끝나면…….”
자책감 서린 목소리가 밑에서 흘러나왔다. 하지만 심란한 그의 목소리와는 다르게 아셀라는 별생각 없이 사이레인의 머리를 내려다보았다.
만져 봐도 될까? 뭔가 용병답지 않게 복슬복슬해 보이는 주홍빛 머리카락이 시선을 붙잡았다.
잠시 고민하던 아셀라는 그대로 손을 내려 머리를 쓰다듬었다. 보기보다 거칠거칠한 감촉이 느껴졌다. 그래도 어딘가 만족스러웠다. 지금 놀라서 눈을 크게 뜬 이 모습도 정말로 마음에 들었다.
“너, 너?”
놀란 사이레인이 다급하게 몸을 돌렸고, 붉어진 얼굴을 보자마자 다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셀라가 웃자 눈을 크게 뜬 사이레인은 머리를 긁더니 이내 다시 몸을 돌려 앉았다. 다시 만져도 된다는 뜻이겠지. 아셀라는 이번엔 거리낌 없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거칠한 게 생각보다 마음에 들었다.
“에타이들의 자금 현황은 알아봤어?”
사이레인은 못마땅한 얼굴로 아셀라를 한 번 노려보다가 이내 한숨을 푹 쉬었다. 아예 포기한 모양이었다.
“자금 현황은 못 알아봤어. 하지만 느낌이 좋지는 않더군.”
아직 로인에게서 자세한 말이 들어오진 않았지만, 확실히 꺼림칙했다. 붉어졌던 사이레인의 얼굴이 다시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여태까지 사이레인과 용병단이 번 돈은 그들이 세운 고아원으로 들어갔다. 아이들을 학대하던 원장 밑에서 나온 아이들을 보호할 곳으로, 첫 보수를 받자마자 바로 만든 것이었다. 그렇게 보수 대부분을 고아원으로 보냈고, 나머지는 용병들이 나눠 가졌다.
다들 원하는 곳에 원하는 직업을 가지고 정착하고 싶어 했다. 상인이 되고 싶다는 놈도 있었고, 선생이 되고 싶다는 사람도 있었다. 뭐가 돼도 좋으니 가정을 꾸려 한곳에 머물고 싶다는 이도 있었다. 그들은 고향도 모르는 떠돌이였으니까.
간혹 누군가가 레너드 용병단을 떠돌이라고 불렀을 때나, 동료들이 불안에 휩쓸렸을 때.
‘고향은 만들면 되는 거지. 우리가 정착하는 곳이 바로 고향이다.’
사이레인은 그렇게 말하며 씩 웃곤 했었다. 그러면 불안해하던 용병들도 이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고아원에 보낼 자금과 동료들이 정착할 자금을 차근히 모으고 있었다.
그런데 하필 가장 중요한 순간에 실수를 해 버리다니. 까득, 이가 절로 갈렸다.
용병이 하지 않던 일들조차 마다하지 않고 했기 때문에 레너드 용병단은 용병들 사이에서도 평판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다들 무시하고 있던 에타이들의 의뢰를 받아들였으니.
거기다 다급하게 요새로 오느라고 레너드 용병단의 자금과 무기, 약초를 썼기에 더더욱 타격이 컸다.
맨 처음 받은 착수금이 가짜니 아마도 아셀라를 맡게 되면서 받은 추가금도 가짜일 게 분명했다. 쓰게 된 돈을 회수할 방법이 사라졌다.
“앞날이 깜깜하군…….”
사이레인은 혼잣말을 흘리며 인상을 구겼다. 그때 위에서 목소리가 쏟아졌다.
“뭘 고민해.”
아셀라가 담담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던 탓에 사이레인이 놀라 고개를 들자 바로 시선이 맞았다.
“나에게 와.”
시선이 맞자 아셀라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자신과 비슷한 녹색이면서도 더 맑은 색의 눈을 내려다보며 그녀는 말을 이었다.
“지금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들을 내가 다 처리해 주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사이레인의 눈이 가늘어지자, 아셀라는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였다.
“정말로. 르카디우스 제국에서 가장 기름진 토지를 가지고 있는 건 바로 우리 아버지야.”
셀바토르 공작령은 비록 수도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지만, 비옥한 땅이었다. 계절의 간극이 크지 않아 동사하거나 열병에 걸려 죽는 사람이 없었고, 작물이 잘 나는 데다가 세금이 적어 평민들이 가장 살고 싶어 하는 곳으로 뽑혔다.
“거기에 너희 용병들이 정착할 수 있게 도와주지. 적당한 직업도 골라 줄 거야.”
“어어?”
사이레인의 눈이 커다래졌다. 잠깐, 자신이 머릿속으로 생각하던 걸 저 여자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상인이 되고 싶으면 그것도 좋지. 나는 꽤 좋은 상단을 가지고 있거든. 아! 아직 아버지가 가지고 있긴 한데, 곧 내가 가질 테니 그건 걱정하지 마. 내가 너희들의 고향을 만들어 주지.”
아셀라는 머리를 쓸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고아원도 문제는 없지. 원하는 만큼 세워 줄게.”
그다음 또 뭐가 있었더라. 아셀라가 말을 잇기도 전에 사이레인이 그녀를 저지했다.
“너 어떻게 알았지? 설마 마법으로 내 머릿속을 알아본 건가?”
마검사가 마법사도 어려워할 법한 그런 고난도 마법을 할 줄 알았던가. 하지만 마법을 쓰는 건 느끼지 못했는데, 설마 마법석인가? 아니면 이 근처에 마법사가 숨어 있는 함정이었나? 수많은 생각이 사이레인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니, 너 소리 내서 말했어.”
다 꽝이었다.
아셀라의 대답에 사이레인의 얼굴이 다시 붉어지기 시작하더니 몸을 웅크렸다. 그런 사이레인을 바라보는 아셀라의 눈은 마치 작디작은 동물을 바라보는 듯했다.
“다른 사람 앞에서도 이렇게 해?”
불현듯 궁금해진 것을 묻자, 사이레인의 고개가 미친 듯 양옆으로 흔들렸다.
“아니!”
절대로 자신은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언제나 레너드 용병단의 기둥이자 단장으로, 무너지는 모습 따위 보여 준 적이 없었다. 그리고 비록 아셀라만큼은 아니었지만, 다른 용병들과 기사들에게도 꽤 명성을 떨치지 않았던가.
그래, 이상한 일이었다. 이상한 일. 왜 자신은 적이고 만난 지 며칠 되지 않는 여자 앞에서 별의별 꼴을 다 보이고 있단 말인가.
“흠, 그래. 다른 놈들은 이런 모습을 모른단 말이지.”
그래서 아셀라가 작게 중얼거리는 걸 사이레인은 놓치고 말았다.
아셀라가 사이레인의 어깨에 팔을 걸치더니 옅게 미소를 머금었다.
“어때, 여러 모습을 나에게 다 보여 줬는데 슬슬 이쪽으로 넘어오는 건?”
이젠 아주 대놓고 물어본다. 사이레인은 조금 머쓱한 얼굴로 눈을 가늘게 떴다. 매력적인 제안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바로 갈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에타이들은 다친 레너드 용병들을 인질로 잡고 있었다. 다친 놈 중에서는 걷지도 못하는 놈들도 많았다. 그들을 한 명 한 명 안전히, 그리고 천천히 옮길 수만 있다면.
‘힘든 일이지만 이 여자는 가능하겠지.’
잠시 아셀라를 바라보다 사이레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대신 인질들 안전을 보장해 줘.”
“인질?”
“다친 놈들을 인질로 잡고 있어. 요새 안에는 사제도 약초도 부족해. 덕분에 돌팔이 같은 놈이 애들을 보내 주지 않아. 거기다 끌려온 평민들도 있어. 요새에서 일어나는 잡다한 일들을 시키더군.”
사이레인의 말에 아셀라의 진녹색 눈이 가늘어졌다. 아, 역시. 짐작은 했지만, 요새 안은 더욱더 상황이 안 좋은 모양이었다. 다친 용병들까지 인질로 잡을 줄은 몰랐다.
“그리고 점점 탈주자들이 생겨서 도주도 힘들어. 에타이 놈들 전투보다는 경비에 더 신경을 쓰고 있어.”
그나마 에타이들에게 유리한 점은 르카디우스 제국 놈들이 자신들의 요새 위치를 모른다는 것, 그리고 인질이었다. 하지만 인질로 잡혀 있던 이들이 도망쳐 르카디우스 제국 쪽으로 들어가게 되면 그 유리함을 전부 잃게 된다.
‘마지막 발악인가.’
얼마 못 갈 임시 대처였다. 도망치더라도 이번엔 숨겨 둔 마지막 요새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목숨이라도 부지하려는 걸까? 그럴 만한 놈들이긴 했다.
‘그래도 뭔가 석연치 않단 말이지. 마치 뒤에 누가 있다는 듯…….’
설마. 아셀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안 좋은 느낌이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하지.”
하지만 얼굴에 불안감을 나타내지 않은 아셀라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빠져나오는 건 무리일 테니, 일단 이렇게 몇 번 더 만나자고. 꼬리가 길면 에타이 놈들이 알아차릴 수 있겠지만 꼬리가 밟히기 전에 그놈들을 먼저 밟아 주면 되는 거지.”
사이레인이 아셀라를 바라보자 아셀라가 그를 내려다보며 웃었다.
“사이레인을 포섭했어.”
천막으로 돌아온 아셀라는 피곤하다는 듯 털썩 의자에 앉으며 말을 꺼냈다. 테펜텔과 피스토레 그리고 엘로스의 시선이 그녀에게 닿았다.
“수고하셨습니다, 셀바토르 경.”
“목표였던 자를 포섭한 거야? 대단한데, 아셀라.”
“수색은 더 나갈 필요가 없는 건가?”
쏟아지는 질문에 아셀라는 눈을 찡그리며 말을 이었다.
“일단 에타이 놈들이 이상함을 알아채지 못하게 수색은 나갈 거야. 하지만 예전처럼 꼼꼼히 할 필요는 없지. 적당한 수준으로 하자고.”
아셀라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고 엘로스가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럼 전면전 역시 시간끌기용으로 이대로 하는 게 좋겠군요.”
“길게는 안 되겠지만 최대한 시간을 끌어야지.”
아셀라는 머리를 쓸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생각보다 요새 안 상황이 더 안 좋아. 전투에 직접 나가는 용병들과 에타이들마저 제대로 식사 배급이 안 되는 모양이더군.”
아셀라의 말에 모두의 눈이 찌푸려졌다. 가장 중요한 사람들조차 식사 배급이 원활하지 않다면 인질로 잡혀 있는 평민들의 상태는 안 봐도 뻔한 것이었으니까.
“거기다 용병들 역시 다친 이들이 인질로 잡혀 있어. 일단 이들을 구출할 방법을 찾아야 해.”
“구출할 방법이라.”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고 평민들과 부상자들을 빼낼 방법을 토론하기 시작했다. 그런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전투를 벌였다간 어떻게 될지 뻔했으니까.
‘첩자를 한 명 넣어 두는 게 좋겠군.’
요새의 위치를 알게 됐으니 평민인 척 정보를 캐는 놈을 집어넣어야지.
요새 안 상황도 상황이지만 더 급한 게 있다. 아까 사이레인과 대화할 때 든 감각, 등을 타고 흐르던 그 감각은 절대 무시할 게 아니었다.
그녀의 추측이 맞다면 에타이들에게 새 뒷배가 생겼다. 그리고 그녀의 감이 맞다면 그 뒷배는.
‘르카디우스 제국 측에 있어.’
아셀라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
“안녕, 사이.”
사이레인은 자신을 ‘사이’라는 말도 안 되는 애칭으로 부르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사이레인이 르카디우스를 따르기로 하면서 아셀라와 사이레인의 만남은 지속되었다. 둘은 의심을 피하기 위해 최대한 시간을 들여 숲을 돌아다니다가 만났다.
몇 번의 만남 이후, 사이레인은 아셀라가 자신에게 명령을 내릴 줄 알았다. 이쪽으로 넘어오라고 강요하거나 요새의 위치를 말하라고 명령할 줄 알았지만, 아셀라는 딱히 그런 걸 강요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르카디우스 제국 측 누군가를 데려오는 일도 없었다. 그저 저렇게 이상한 별명을 붙이고 자신의 이야기를 조금 늘어 둘 뿐이었다.
귀족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사이레인으로서는 반가운 일이었으나 그래도 왜라는 의문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안녕.”
오늘 여자는 연한 녹색의 윗옷에 검은 바지를 입고, 머리를 하나로 묶고 있었다. 평민들이 주로 입는 옷이었는데도 어딘가 기품이 흐르고 있었다. 곧은 자세 때문일까 아니면 귀족으로 태어나 자란 탓일까.
잠시 고민하던 사이레인은 이내 쓸데없는 생각을 털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오늘은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
“부탁?”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있던 아셀라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몸을 일으켜 가벼운 걸음걸이로 사이레인에게 다가왔다.
‘키가 크네.’
여태까지 봤던 여자 중 가장 키가 큰 것 같다. 성격도 그렇고 검 실력도 그렇고 시원시원한 느낌이지. 드레스 같은 건 안 입으려나? 잘 어울릴 것 같은데. 푸른색? 아니면 눈을 닮은 녹색? 그것도 아니라면…….
“사이.”
“어어?”
어느새 바로 자신의 앞에 서 있던 아셀라가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사이레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심각하게 해? 잠시 집중해 줬으면 하는데.”
“아, 그래.”
사이레인은 눈을 크게 깜빡거리더니 머쓱한 듯 제 목덜미를 큰 손으로 훑었다.
“무슨 일인데?”
아셀라는 확실하게 사이레인의 눈동자가 자신에게 집중된 걸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별건 아니고, 요새 쪽에 첩자를 심어 둘까 하는데. 너희에게 무리가 가는 건 아니야. 그저 그놈이 요새로 들어갈 수 있게 틈을 벌려 달라는 거지.”
“틈을?”
“그래, 혹시 있을 탈주자 때문에 경비가 강하다며. 그것만 통과할 수 있게 손을 빌려줘. 그 뒤는 그놈이 알아서 할 거야.”
아셀라의 말에 사이레인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셀라의 말을 듣자마자 사이레인의 머릿속에는 이미 많은 방법이 떠올랐다.
“평민들을 이용하는 건 위험하고……. 짐수레를 이용해 볼까. 사냥감을 잡아서 그걸로 옮기는 거지.”
사냥감을 잔뜩 잡아서 그 사이에 숨어 경비를 통과한다. 나쁘지 않은 방법이었다. 아셀라가 고개를 끄덕이자 사이레인이 입을 열었다.
“첩자는 우리 일을 도울 사람인가?”
“아니, 그놈은 따로 알아봐야 할 게 있어.”
“흐음…….”
사이레인은 다시 목을 쓸었다. 어째 저쪽으로 넘어간다고는 한 것치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 가만히 대기하는 지금 상태가 좀이 쑤시기도 했고, 자신에게 믿음이 없는 건가 그런 생각도 들었다.
사이레인의 얼굴에 떠오른 생각을 읽어 낸 아셀라가 그의 어깨를 가볍게 툭 쳤다.
“지금 너희가 바로 움직이긴 위험하지. 다친 용병들도 거기에 있고 평민도 있고. 무엇보다 도주로나 방법도 정해지지 않았지.”
지금은 잠시 몸을 웅크릴 때야. 그렇게 말하며 아셀라는 사이레인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아직 레너드 용병단 전원이 찬성한 일도 아니라며.”
사실이었다. 사이레인과 대다수의 용병은 르카디우스 제국 측으로 붙는 걸 찬성했으나, 몇은 아직도 반대 중이었다.
그 이유로는 르카디우스 측으로 돌아서면 배신자의 낙인이 찍혀 앞으로 일을 받기 힘들 수 있다는 것과 르카디우스 제국의 귀족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땅과 지위를 준다고? 자기 그림자만 밟아도 소스라치게 놀라며 욕해 대는 놈들이 잘도 그러겠다!’
한 용병은 비아냥이 잔뜩 담긴 목소리로 크게 외쳤다. 귀족들, 특히 르카디우스 제국 측의 귀족들은 콧대가 높은 걸로 유명했다. 그런 놈들이 제 옆에 설 수 있게 해 주겠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면서 사이레인의 말에 반대했다.
차라리 에타이놈들도 르카디우스 제국놈들도 지긋지긋하니 그냥 야밤에 도주하자는 놈들도 생겨났다.
“뭐, 그건 금방 처리될 거야.”
사이레인은 아셀라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다들 자신의 눈앞에 있는 여자를 만나 보지 못해서 그런 게 분명했다. 아셀라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고 자연스럽게 이끄는 능력이 있으니 분명 반대하는 놈들도 이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대장이 훌륭해서?”
물음이 아닌 확신이 섞인 말이었다. 아셀라의 말에 사이레인은 얼굴을 붉히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런 건 아닌데.
아셀라는 얼굴을 붉히는 사이레인이 귀엽다는 듯 웃었다.
“그럼 첩자 건은 그렇게 하지.”
한참을 웃던 아셀라는 사이레인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아직도 웃음기가 진득하게 묻어났다.
“사냥감은 우리 애들을 풀어서 한번 알아보도록 하지. 사슴 무리를 발견하면 좋은데. 그 외에 더 필요한 건?”
사이레인은 자신을 담고 있는 녹색빛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뭐라고 하지? 사실 아직 필요한 건 없었다. 무언가 일을 해야 필요한 게 생기지.
그래도 무언가를 말해 볼까 싶어, 다친 이들을 위해 사제를 대기시켜 달라고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테센트루아 성기사들이 사방에 널려 있지 않던가. 웬만한 사제보다 강력한 체력을 가진 그들이라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럼 뭘 부탁하지? 뭔가 말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에 사이레인은 눈을 두어 번 껌뻑이다가 입을 열었다.
“어……. 나중에 대련이나 할래?”
갑자기 튀어나온 말이었다. 대련 신청을 받은 아셀라는 놀라지 않았지만, 사이레인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왜 하필 대련이야! 자신의 입을 때려 주고 싶은 사이레인과 달리 아셀라는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너랑 비슷한 힘을 가진 사람하고는 붙어 본 경험이 없지? 난 아버지가 그나마 비슷했거든.”
순수하게 사이레인이 대련을 하고 싶었다고 생각한 아셀라는 그가 망했다는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걸 보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아, 테펜텔도 만나 봤지. 그녀도 꽤 강한데.”
“테펜텔?”
머리를 미친 듯 헝클어트리다 사이레인은 고개를 들었다.
“아롬벨의 용병.”
아, 그 철퇴를 쓰는 용병 말인가.
“이겼지.”
사이레인은 입꼬리를 씩 올리며 웃었다. 눈이 반짝였다.
“확실히 철퇴를 쓰는 애는 처음이라 힘들긴 했는데, 못 이길 정도는 아니던데?”
어쩐지 우쭐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아셀라는 저도 모르게 마치 자신의 털을 자랑하는 강아지 같다고 생각했다. ‘이거 보세요, 제 복슬복슬한 털을 모두가 봐 주세요!’라는 말도 안 되는 말이 소설처럼 그의 주변을 둥둥 떠다녔다.
아셀라가 그렇게 생각하는 걸 모르는 사이레인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빠르긴 엄청 빠르던데. 팔을 베어 낼 생각이었는데, 어깨에 상처만 입히고 물러났어.”
“테펜텔이 다쳤어?”
아, 실수했나? 승리에 도취하여 말을 내뱉던 사이레인의 눈이 커다래졌다.
친한가? 방금 말, 둘이 되게 친하다는 것처럼 들리지 않았나? 친구 팔을 벤다고 해서 화가 난 거 아닌가? 아니, 그 전에 우리는 적인데. 아니지. 지금은 한배를 탄 동료인데.
머리가 핑글핑글 돌다 못해 폭발하려는 사이레인을 막은 건 아셀라의 맑은 웃음소리였다.
“아하하하!”
“어……. 어?”
“그래서 요즘 어깨를 덮는 옷을 입고 다녔구나, 테펜텔!”
화가…… 난 게 아닌가? 사이레인은 슬그머니 아셀라의 눈치를 보았다. 제 친구를 다치게 해서 화가 난 줄 알았는데 오히려 기분이 좋아 보였다.
웃음이 묻어나는 입가를 쓸며 아셀라는 말을 이었다.
“뭐, 쉽게 당할 놈은 아니니까. 너도 그리고 테펜텔도 좋은 경험이었겠지.”
거기까지 말한 아셀라는 사이레인을 보고 말을 이었다.
“적당한 사냥감을 발견하면 연락을 줄게. 그때 잘 부탁해. 사이.”
다시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애칭을 부르며 아셀라는 숲속으로 사라졌다.
‘일단 내 말에 동의하는 놈들만 데리고 나가야겠지.’
요새로 돌아오면서 사이레인은 바쁘게 머릿속으로 계획을 짰다. 전부 말을 듣는 건 아니니 몇몇만 골라서 사냥을 가면 될 것이다. 첩자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데리고 들어오면 알아서 잘 숨겠지.
‘이제 자기 이야기는 안 하려나.’
일다운 일이 시작되었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어쩐지 아셀라가 이야기하는 르카디우스 제국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다 생각하니 조금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지. 오히려 그쪽으로 넘어가면 더 자주 만나게 되니까…….
요새 안쪽으로 돌아오던 사이레인의 발걸음이 멈추었고, 웃음이 번졌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대장이 오셨군.”
이죽거리는 에타이들과 그를 맞이하는 엠릭 사이에 누워 있는 건 로인이었다. 얼마나 맞았는지, 팔이 뒤틀려 있었고 온몸은 멍투성이였다. 명백히 에타이들에게 폭행당한 흔적이었다.
흙바닥을 적시고 있는 피에 사이레인의 눈이 뒤집혔다.
“용병 대장, 부하 관리 좀…… 커헉!”
말을 끝내기도 전에 엠릭의 코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휘청거리는 엠릭의 복부에 바로 주먹이 꽂혀 들어갔다. 그는 신음을 흘리며 결국 피가 묻은 흙바닥에 주저앉았다.
“이게 무슨 짓이야!”
“이 미친 새끼가!”
엠릭이 쓰러지자 남은 놈들이 사이레인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반항은 무의미했다. 에타이들의 요새 안에서는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안 되겠다 싶었는지 몇 놈들이 달려들었지만, 그들을 그대로 매단 채 사이레인은 엠릭을 향해 다시 주먹을 휘둘렀다.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울렸고 모두의 얼굴이 사색이 되어 갔다.
“으악, 단장!”
결국 요새 밖으로 나갔다 돌아온 레너드 용병들이 소리를 듣고 달려와 사이레인을 말릴 때까지 그는 로인을 구타했던 에타이들을 향해 주먹을 날리고 있었다.
“대장! 그만해, 죽겠어!”
양옆에서 사이레인을 결박하듯 팔을 잡고 끌어냈지만, 그는 여전히 무서운 눈길로 바닥에 쓰러진 에타이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분노로 숨이 옅어졌고 저절로 이가 갈렸다.
“이놈이 먼저 잘못한 거라고!”
얼굴을 제대로 맞은 에타이가 제 얼굴을 감싸면서 크게 외쳤다. 그의 손 밑으로는 피가 주르륵 흐르고 있었다.
“먼저 식량 창고 근처에서 기웃거리고 있었어! 수상하잖아!”
“기……길을 잘못…… 들었다고 내가…….”
쓰러져 있던 로인이 힘겹게 말을 흘렸다. 쌕쌕 숨을 몰아쉬는 것이 상당히 위태해 보였다.
“길을.”
사이레인이 끊어지듯 말을 내뱉었다. 분노로 숨이 옅어졌다. 마치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을 눈앞에 둔 듯, 에타이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길을 잘못 들었다지 않나.”
이 조져 버릴 새끼들아. 사이레인이 분노로 이를 갈았다.
“맞아! 우리는 그 근처를 다닐 권리도 없다는 거야? 애당초 그 부근은 가지 말라고 한 적도 없었잖아.”
사이레인의 말에 그를 만류하던 용병이 앞으로 나서며 크게 외쳤다. 요새 안에 있던 평민들이 웅성거리며 이쪽을 바라보는 게 느껴지자, 엠릭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붉게 물들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
사이레인이 아직도 땅을 기고 있는 엠릭을 바라보며 잇새로 말을 내뱉었다. 안 그래도 험악한 얼굴에 힘이 들어가자, 에타이들은 고통도 잊은 듯 시선을 피했다. 거기다 다른 용병들도 가세하니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아니, 그래도 식량 창고는…….”
“닥쳐.”
언제 자리에서 일어난 것인지 엠릭은 변명을 하듯 웅얼거리는 남자를 거칠게 쳤다. 그리고 매섭게 사이레인을 노려보더니 그대로 기절한 동료를 버려두고 홀로 자리에서 떴다. 남은 에타이들은 허둥지둥 기절한 동료를 챙기더니 이내 그의 뒤를 따라 도망쳤다.
“로인! 괜찮아?”
“우리 이제 어떻게 하지.”
지금 사이레인이 주먹을 휘두른 사람들은 이 요새에서 어느 정도 위치에 서 있는 놈들이었다. 거기다 엠릭, 그는 타스의 최측근이 아니던가. 저번에도 사이레인에게 시비를 걸다가 된통 당한 놈이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로인을 족친 게 분명했다.
“저놈들 그냥 안 넘어갈 거야. 어쩌지, 사이레인? 리스?”
분명 불이익이 있을 것이다. 조금은 걱정스럽고 조금은 무섭다는 듯, 한 용병이 말을 흘렸다.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 대던 놈들이 아니던가. 조금만 뭐라고 하면 끈질기게 붙으며 자신들을 괴롭혔던 놈들이었다.
“뭘 어쩌긴 어째!”
리스라 불린 여자는 짜증 난다는 듯 사이레인의 팔을 탁 놓더니 이를 박박 갈았다. 로인이 다쳐 화가 난 것 외에 다른 일이 그녀를 화나게 만든 듯했다.
침묵하며 이를 갈던 용병은 사이레인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대장.”
리스가 사이레인을 부르자 아직도 분이 안 풀린 사이레인은 그녀를 바라보는 걸로 대신 답했다.
시선이 닿자 리스는 주변에 서 있는 용병들도 들을 수 없는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르카디우스 제국 놈들 쪽은 정말로 안전해?”
“어, 야……. 르카디우스 제국 놈들은 믿을 수가 없다며.”
사이레인의 다른 팔을 잡고 있던 남자가 눈을 크게 뜨자, 리스가 이를 갈며 남자와 사이레인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건 그렇지만, 저 엠릭이란 놈 면상에 제대로 주먹을 날려 주고 싶어. 로인 일은 절대로 쉽게 넘어가지 않을 거야. 오늘 대장이 날려 주긴 했지만, 부족해.”
아예 얼굴을 곤죽으로 만들어 줘야 한다는 듯 리스는 분에 찬 목소리로 말을 이였다.
“얼굴에 사라지지 않는 훈장이라도 새겨 줘야 하는데. 그냥 여기를 떠나는 걸로는 분이 안 풀리잖아.”
르카디우스 편에 서서 얼굴에 칼자국을 내 주겠다는 말을 고상하게 하는 리스였다.
“우리를 배신하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르카디우스 제국 귀족 놈들 콧대는 알아줘야 하잖아.”
다그치듯 묻는 리스의 말에 사이레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셀라는 절대로 그럴 사람이 아니야. 내가 장담하지.”
자신도 이유를 모르는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사이레인의 말에 두 용병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자신들의 대장이 뭔가가 이상했다.
“뭐, 그렇게 말한다면 내가 다른 놈들을 설득해 보지.”
하지만 이내 리스는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지금 그녀에게 제일 중요한 건 한 방 먹이는 거였으니까. 아니면 다리 사이를 가볍게 차 줘도 괜찮고. 리스는 히죽 웃었다.
*
며칠 후, 첩자는 아무런 문제없이 요새로 숨어들었다. 반대하던 나머지 용병들이 로인의 일로 사이레인의 말에 따르기로 한 덕분이었다.
“셀바토르 소 공작님께서 건네신 겁니다.”
죽은 사슴들 사이에 숨어 요새로 들어온 첩자는 사이레인에게 뭔가를 건넸다. 사슴 피를 뚝뚝 흘리는 남자에게서 받아 든 것은 평범해 보이는 병이 든 상자였다. 병마개를 뽑아 안을 살펴보자, 붉은색의 액체가 들어 있었다.
병에는 아무런 무늬가 없어 정보를 알 수가 없었다. 약이라면 만든 이의 이름이나 어디서 만들어졌는지 새겨져 있을 텐데, 병은 그냥 매끈하기만 했다.
‘약초 냄새가 조금 나는 거로 봐서 물약인 것 같은데.’
사이레인이 설명을 요구하듯 자신에게 물약을 건넨 남자를 바라보자 그는 바로 입을 열었다.
“중앙 신전의 고위 사제님들께서 만든 약입니다. 다친 분들에게 쓰라고 하셨습니다.”
“와우.”
사이레인을 따라 나온 용병이 작게 탄식을 흘렸다.
사제들이 만든 약은 효과가 좋은 대신 비쌌다. 그런데 고위 사제가 만든 약이라니.
지금 사이레인의 손에 들린 작은 물약 하나만 팔아도 번듯한 곳에 집을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귀한 게 한 무더기나 사이레인의 손에 들려 있었다.
“많이 다치신 분이 계신다고 들어서 최대한 좋은 것으로 준비해 왔습니다.”
첩자는 그렇게 말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전신에 묻은 피를 닦아 냈다. 따라온 용병이 사이레인의 뒤에서 한 병 빼돌려 팔자고 하다가 얼굴에 주먹을 맞고 입을 다물었다.
“혹시 그분께서 식량 상황을 말해 주셨습니까?”
이미 사이레인은 아셀라에게 로인이 요새 상황을 파악하다가 많이 다쳤다는 쪽지를 건네 놓은 상태였기에 첩자가 그걸 묻는 건 이상한 상황이 아니었다.
“밀과 잡곡이 있어야 할 포대에는 모래가 들어 있었다더군.”
로인이 식량 창고에서 확인한 건 그것 하나였다.
“고기도 다 떨어지고, 식량도…….”
잠시 중얼거리던 첩자는 사이레인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소 공작님의 쪽지입니다.”
에타이들은 사냥으로는 식량 상태가 충분치 않을 테니, 강에서 물고기를 잡으려 할 것. 그때 평민들을 데리고 지원. 강 근처에는 레너드 용병단과 요새에 있는 평민들이 전부 숨을 만한 동굴이 있음.
에타이들의 요새를 찾기 위해 벌였던 수색은 헛되지 않았다. 린체 기사단은 절벽을 수색하다가 이어진 강을 따라갔고, 거기에서 동굴 하나를 발견했다.
물줄기와 식물에 가려진 동굴은 오래전에 버려진 걸로 확인되었다. 비록 깊지는 않았지만 꽤 넓어서, 다수의 사람이 숨기에 적합해 보였다고 했다.
“여차하면 여기로 숨어라?”
사이레인이 다 읽자마자 종이 끝부터 작은 불꽃이 일어나더니 그대로 재가 되어 바람에 흩어졌다.
“예. 하지만 동굴이 어딘가와 연결됐는지 확인이 안 돼서 같이 확인을 해 보자고 하셨습니다.”
작게 대답하며 첩자로 온 남자는 주변을 흘깃 돌아보았다.
사슴 무리에 토끼까지 잡아 온 터라 에타이들의 시선은 짐수레에 완벽히 고정되어 있었다. 레너드 용병들도 솜씨 좋게 그들 사이에 섞여, 혹여나 사라진 사이레인을 찾지 않게 눈속임을 잘 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소 공작님은 에타이들 뒤에 새로운 뒷배가 생겼다고 추측하셨습니다.”
안 그래도 낮은 목소리가 한층 더 낮아졌다. 사이레인은 남자의 말을 듣기 위해 몸을 숙여야 했다.
“에타이들은 자신들이 살아서 그 뒷배에게 가기 위해, 레너드 용병단과 여기에 있는 평민들을 방패막이로 쓸 생각입니다.”
저번처럼 말이죠.
실제로 에타이들의 공격은 약해지고 있었다. 전에는 르카디우스 측에서 먼저 적당히 치고 빠지기를 하고 있었으나, 어느 순간부터 에타이들이 먼저 뒤로 빠지고 있었다. 최대한 사상자를 피하려는 움직임은 눈에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사이레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모든 걸 내팽개치고 가려고 하기에는 에타이들 상부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황태자한테 집착을 버리지 않는 놈들이 꽤 있던 탓이었다.
“그 일은 앞으로 제가 알아볼 것입니다. 그걸 알아보기 위해 여기에 온 거지요.”
마치 사이레인의 생각을 읽은 듯 대답한 남자는 말을 이었다.
“소 공작님은 그 전에 미끼를 걸고 에타이들을 끌어내실 겁니다.”
“요새가 비겠군.”
남자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평민들을 데리고 동굴로 가면 추후 우리 기사단이 모시러 갈 겁니다.”
손에 든 물약으로 걸을 수 있을 정도로 사람들을 회복시킨 다음 움직인다. 피난처가 된 동굴은 숨겨진 곳이라 에타이들은 모르는 곳이고, 거기에 잠시만 있으면 테센트루아 성기사단과 린체 기사단이 보호하러 올 것이다.
사이레인은 말없이 손안에 놓인 물약을 바라보았다.
“아셀라는 어디로 가지? 요새 쪽으로 오나?”
사이레인의 물음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남자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사이레인이 질문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소 공작의 이름을 불렀기 때문이었다.
“소 공작님께서는 공격대에 들어가실 겁니다. 빈 요새를 공격해 타스, 포르 그리고 엠릭이라는 주동자들의 목을 치실 겁니다.”
그녀는 이리로 온다. 잠시 입가를 쓸던 사이레인이 품속으로 물약을 집어넣었다.
“좋아. 그대로 따르지. 하지만 나도 요새에 남아 타스의 목을 치겠어.”
“……마음대로 하십시오.”
남자는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평민들을 움직일 수는 있겠습니까?”
물음에 사이레인은 말없이 뒤를 가리켰다. 아까 사이레인에게 맞은 용병이 코를 감싸 쥐고 낑낑거리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저놈이 발이 넓어. 여기 있는 평민들과도 친하게 지내고 우리 중에서는 에타이들과도 가장 사이가 좋지.”
“네, 제가 좀 그렇죠!”
언제 맞았냐는 듯 용병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분에게 평민들을 이끌게 하려는 겁니까?”
“아니, 에타이들의 이름을 팔 거다.”
요새에 있는 평민들은 협박과 납치로 끌려온 사람도 있었지만, 에타이들의 감언이설에 속아 자진해 남아 있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까지 속이기 위해선 에타이들의 이름을 팔아 피신시키는 게 가장 중요했다.
“제 이름으로 애들이 다 도망간 걸 알면, 타스 새끼 좀 날뛰겠는데?”
사이레인이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벌써 그날이 기대되었다. 타스 놈과 엠릭 놈의 모가지를 자신의 도끼로 떨어트려 줄 날. 어차피 그놈들은 머리통이 필요 없어 보이니 바닥이라도 구르게 해 줘야지.
그때를 위해 도끼날을 갈아 놔야겠다. 날이 무뎌 한 방에 끝내지 않으면 모두가 슬플 테니까.
‘그리고 아셀라도 위험할 수는 있으니.’
아무리 길고 날뛰는 사람이라도 어쩌다가, 아주 간혹 위험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니까 자신이 요새에 있는 건 현명한 선택이었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선택에 사이레인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짙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