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5/29)

#15

“우아아아.”

셀리스의 눈이 동그래지더니 턱까지 점차 아래로 내려갔다.

15년을 살았다. 15년 동안 셀리스의 인생에서 보석처럼 빛났던 순간들이 가득 있었고, 오늘 그 보석들은 빛을 잃었다. 여기에 새로운 다이아몬드가 빛나고 있었으니까.

“여기가 셀바토르 공작저로군요…….”

레슬리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셀리스를 바라보았다. 지금 당장이라도 그녀는 눈물을 뚝뚝 흘리다가 기절할 듯 보였다.

뒤를 힐끔 바라보니 제나도 같은 생각인지 하녀에게 혹시 모르니 셀바토르 공작가의 주치의, 자일로를 데려오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셀리스 양, 그럼 제가 저택을 안내해 드릴게요.”

그 말에 어느새 눈물을 뚝뚝 흘리던 셀리스는 감동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레, 레슬리 양 덕분이에요. 제가 공작님과 같이 식사를 하고 공작저에서 잠들 수 있다니…….”

셀리스는 결국 눈물을 펑펑 터트렸다. 그걸 보던 레슬리는 웃으면서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훔쳐 주었다.

“고작 하루라 부끄러운걸요.”

레슬리의 계획은 셀리스가 수도에서의 볼일이 전부 끝날 때까지 공작저에 머물게 하는 것이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렇게 긴 시간을 폐를 끼칠 수 없다며 에펜타니 백작 내외가 고개를 저은 탓이었다.

‘저희는 파티 시작 전부터 축제 시작 전까지만 머물 여관을 찾으면 되니까요.’

백작 내외는 다행히도 나쁘지 않은 여관을 찾아낸 모양이었고, 거기서 머물기로 하였다.

문제는 셀바토르 공작저에서 머물 수 있다는 말에 기대감에 부풀어 있던 셀리스였다. 수도에 올라온 셀리스를 만나러 갔을 때, 결국 셀리스는 레슬리를 보고 눈물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분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기절까지 했는데……!’

고대하던 셀바토르 공작과의 첫 만남에서 기절한 셀리스는 아직도 그 일을 신경 쓰고 있는 듯 보였다. 그래서 레슬리와 사이레인은 고민 끝에 셀리스를 하룻밤만 공작저로 초대하기로 했고 처음부터 셀리스는 탈수를 일으킬 듯 눈물을 흘렸다.

“감동이에요. 제가 살아서 공작저에 발을 들일 수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어요.”

셀리스의 말에 레슬리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었다.

“살아서요?”

왜 이상하게 그 말이 귀에 들리는 걸까? 뭔가를 들켰다는 듯 셀리스가 뜨끔한 표정을 짓더니 주변을 살펴보고는 낮게 속닥거렸다.

“유령인 상태로는 들어올 수 있지 않을까 예전에 상상했었거든요.”

“……살아서 오게 되어 정말 다행이네요.”

레슬리의 말에 셀리스는 울다가 붉어진 눈으로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손을 붙잡고 커다란 저택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레슬리의 방과 개인 서재, 아직도 용도를 정하지 못한 방 그리고 옷 방을 차례대로 구경하고, 늘 밥을 먹는 식당과 루엔티가 머무르는 서재를 지나 골동품을 모아 두는 방까지 갔을 때, 레슬리는 뭔가 즐거워졌다.

마치 탐험 같았다. 잘 아는 집인데도 셀리스가 놀라며 감탄할 때마다 제 어깨가 저절로 으쓱해졌고 늘 보던 물건도 새로워 보였다.

사이레인의 고집으로 세운 셀바토르 공작과 자신의 동상 앞을 지나갈 때는 조금 부끄러워졌지만, 복도에 걸린 거대한 초상화를 지나갈 때는 다시 어깨를 으쓱거리며 미소를 지었다.

“가지고 가고 싶어요……. 그림으로라도 그려도 될까요?”

“조금 이따가 같이 그려 봐요.”

그리고 다시 손을 잡고 이끌었다. 탐험이 새롭게 시작되었다. 주방에서는 바타를 소개해 주고 정원에서는 정원사인 엔델과 그를 도와주던 사람들, 그리고 저택 복도에서는 마델과 서올리를 소개해 줬다.

연무장에서는 하르트와 셀바토르 공작가의 기사들을 소개해 주자, 셀리스는 연무장을 벗어나면서 르카디우스 제국인이 아닌, 다른 나라 사람이 기사단장을 하는 건 처음 본다며 놀란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거기다 공작저 동관에 머무는 테펜텔을 만났을 때 셀리스는 숨을 멈췄다.

“안녕?”

막 일어난 듯한 테펜텔은 유창한 르카디우스 제국어로 말을 걸었다.

“아, 안녕하세요. 저는 셀리스 튜더…….”

“셀리스 튜더 에펜타니 백작 영애 맞지? 나는 테펜텔 덴이란다. 공작의 친구지.”

셀리스는 그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테펜텔이 공작의 친구라는 게 믿기지 않는 눈치였다. 테펜텔은 그런 셀리스를 보더니 입술을 끌어당겨 웃었다.

“믿기지 않는 모양이지? 좋아, 그럼 아셀라가 혼란의 시대 때 무슨 일을 했는지 이야기의 주인공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몰래 이야기해 줄까?”

어딘가 신난 기색으로 테펜텔은 두 사람을 이끌고 서재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지도를 펴 놓고 자신의 무용담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테펜텔의 이야기 속에는 화상을 입기 전 공작도, 훨씬 더 젊은 사이레인도, 척박한 땅밖에 가진 것이 없던 테펜텔과 아직 하녀였던 제나 이야기도 있었다. 피스토레 황제의 이야기를 할 때면 테펜텔은 슬쩍 둘의 눈치를 보았다.

그 이야기가 얼마나 흥미진진하던지. 레슬리와 셀리스는 저택 탐방도 잊고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결국 이야기의 끝은 테펜텔을 따라온 한 사람 덕분에 갑자기 찾아왔다. 작게 숨을 몰아쉬던 남자는 무언가 아롬벨의 언어를 쏟아부었는데, 상황을 보니 잔소리를 퍼붓는 듯 보였다.

어딘가 시무룩해진 테펜텔은 두 사람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는 그 남자를 따라 나갔다. 그 모습은 어딘지 레슬리에게 익숙했다.

‘아버지와 제나인가?’

아니면 늦게 잔 어머니와 제나?

아쉬움을 뒤로하고 두 사람은 저택을 계속 돌아다니며 이곳저곳을 구경했고, 그러다 제나를 만났다.

휴식을 위해 잠시 응접실에 앉아 있는 두 사람에게 제나가 차를 내왔다. 하녀가 해도 될 일이지만, 인사를 하려고 일부러 제나가 차와 다과를 챙겨온 것이었다. 레슬리는 자랑스럽게 셀리스에게 제나를 소개해 주었다.

“우리 셀바토르 공작저에서 집사를 맡고 계신 제나 도란테스예요.”

제나를 소개받은 셀리스는 당황하다가 제나에게 받은 차를 엎지르고 말았다. 그 모습이 마치 공작저에 막 들어왔을 때 자신과 같아 웃음을 터트릴 뻔했지만, 레슬리는 간신히 입술을 꾹 깨물고 버틸 수 있었다.

“집사가 여자라니 솔직히 놀랐어요.”

제나가 새 찻잔을 가져오기 위해 응접실을 나갔을 때야 셀리스는 입을 열었다.

“저희 저택이나 친척 집에도 집사는 전부 남자였거든요. 거기다 르카디우스 사람이 아닌 기사단장에 아롬벨의 친구분이라니…….”

후하, 셀리스는 상기된 뺨을 매만지며 작게 숨을 흘렸다. 셀리스의 커다란 눈동자는 빛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반짝거렸다.

“역시 공작님은 대단하신 분이에요. 다른 귀족들이라면 하지 않을 일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내시네요.”

“저도 처음에 놀랐어요.”

레슬리는 작게 키득거리며 제 찻잔에 각설탕을 집어넣었다.

“처음에 이 공작저에 왔을 때 제나가 이렇게 차를 줬거든요. 하녀인 줄 알았는데 어머니가 집사라고 하셔서 정말 놀랐던 기억이 나요. 아, 셀리스 양, 각설탕은 얼마나 넣으실 건가요?”

각설탕을 넣느라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레슬리의 시야에 조금 난감한 기색의 셀리스가 눈에 들어왔다. 아무리 레슬리가 입양된 딸이라는 걸 알지만 이렇게 대놓고 이야기를 할 줄 몰랐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레슬리는 괜찮았다. 입양되었다든가, 그런 사실은 레슬리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은 충분히 사랑받고 있으며 곧 진짜가 될 것이고, 작은 손들이 원하던 복수도 할 테니까.

“네 개 정도 넣어 드리면 될까요?”

레슬리는 괜찮다고 말하는 대신 웃으면서 각설탕 하나를 집어 들었다. 셀리스를 만나기 위해 에펜타니 백작 부부가 머무르는 여관에 갔을 때, 셀리스가 각설탕을 네 개 집어넣는 것을 보았다.

“네, 네 개…… 아니, 아니! 두 개만 부탁드려요.”

셀리스도 그런 레슬리의 속뜻을 알아차렸는지 이내 각설탕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두 개만요?”

레슬리가 되묻자 셀리스는 다시 고민에 빠지더니 이내 손가락 하나를 들어 올렸다.

“하나만 넣어 주세요.”

셀리스는 단것을 좋아해 레슬리와 입맛이 비슷한 편이었다. 레슬리는 각설탕을 세 개나 넣은 자신의 찻잔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꽃이 달린 예쁜 각설탕을 셀리스의 찻잔에 넣어 주었다.

셀리스는 각설탕이 하나만 들어간 찻잔을 우아하게 들어 올리더니 마치 어른들이 하듯 향을 맡고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

셀리스의 표정이 조금 일그러지더니 힐끗, 각설탕이 가득 들어 있는 동그란 그릇에 시선을 보냈다.

“하나 더 넣어 드릴까요?”

레슬리가 묻자 셀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너무 달게 먹는 건 아이 같은 짓이라고 오라버니가 그러셨거든요. 저는 열다섯 살이 되었으니까…… 이제 각설탕은 하나만 넣을 거예요. 나중에는 하나도 넣지 않는 게 목표예요.”

셀리스는 어딘가 우쭐거리는 기색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레슬리는 고개를 돌려 각설탕을 세 개나 집어넣은 제 찻잔을 바라보았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찻잔에 각설탕을 넣지 않았지. 오라버니들도 마찬가지고. 좋아. 다음엔 나도 하나만 넣어야지.’

뜻이 통한 걸 알았는지 서로 시선을 마주친 두 사람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하게 유달리 줄지 않는 찻잔을 매만지며 셀리스가 물었다.

“저, 공작님은 언제쯤 저택으로 돌아오실까요?”

“음……. 황실에 가신 거라서요. 아마 저녁 무렵 돌아오실 거예요. 저녁 식사는 같이할 수 있을 거라고 했어요.”

하필이면 셀리스의 영웅, 공작은 자신의 남편과 함께 갑작스러운 황제의 호출로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그럼 금방 도착하시겠네요!”

밝은 셀리스의 목소리에 레슬리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저녁 무렵이라고 했는데, 이미 저녁때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분명 셀리스와 저택 탐험을 시작한 건 아침 무렵이었는데.

“그러게요. 곧 오시겠어요.”

레슬리는 배시시 웃어 보였다. 드디어 셀리스에게 제대로 자랑스러운 어머니를 자랑할 수 있는 시간이 왔다.

“레슬리 양.”

찻잔을 소리 나게 원목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셀리스가 아까와는 사뭇 다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녀의 눈빛은 신전에서 아라벨라의 시험을 치를 때보다 더욱 진지해 보였다.

“혹시 이번에도 제가 기절한다면 깨워 주세요. 찬물을 끼얹어도 괜찮아요. 이번엔 반드시 공작님의 모습을 이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고 가겠어요……!”

다짐이 느껴지는 셀리스의 말에 레슬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께 부탁드릴 테니, 어머니를 모델로 그림을 그리는 건 어떨까요?”

레슬리의 제안에 셀리스가 다시 눈을 빛냈다.

“자수는 어떨까요? 제 방에 있는 태피스트리를 바꿀 때가 되었어요. 일단 그림을 그려 가면 아마 안나가 만들어 줄 거예요. 안나는 솜씨가 좋거든요.”

“좋은 생각이에요. 저는 종종 스테인드글라스도 괜찮을 것 같았어요.”

“그 정원에서 봤던 동상도 정말 멋졌어요. 조각상도 괜찮을 것 같은데, 이걸 다 만들면 둘 곳이 없겠죠?”

셀리스와 즐겁게 이야기를 하던 레슬리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직도 제대로 용도를 정하지 못한 방의 용도를 찾았다. 레슬리는 환하게 웃었다.

***

‘결국 정했군.’

어둠이 서서히 내려앉는 마차 안에서 공작은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피스토레는 아렌도가 아닌 둘째 콘스텐을 후계로 정했다고 자신에게 말하며 아셀라와 사이레인의 손을 꽉 잡았다.

‘……잘 부탁하네. 믿을 만한 사람은 카리우와 자네들뿐이야.’

“여보.”

며칠 새 기운이 빠져 버린 듯한 피스토레의 얼굴을 떠올리는데, 사이레인이 마차 안에 있는 등에 불을 밝히며 입을 열었다.

“그 둘째는 사제가 되고 싶어 하지 않았나? 아무래도 성격이…….”

사이레인은 눈을 찡그리고 있었다.

르카디우스 제국의 귀족들은 자존심이 강했다. 1천 년을 이어 온 뿌리 깊은 자긍심이 오만과 섞여 그들의 콧대를 세웠다. 그런 귀족들을 피스토레만큼 유약한 성격의 콘스텐이 다룰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해낼 거야. 전쟁터에 나가기 전 피스토레는 그것보다 더욱 유약했거든. 콘스텐의 경우는 양호하지.”

공작의 말에 사이레인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아마도 자신이 모를 적 이야기가 나온 게 싫은 듯했다. 공작은 낮게 웃으며 제 남편에게 머리를 기댔다.

“질투해?”

살짝 시선만 들어 보니 사이레인이 입을 삐죽 내민 상태로 툴툴거리고 있었다. 어느새 레슬리의 버릇을 닮아 버렸다. 이렇게 귀여운 남편이라니. 역시 결혼은 잘했다. 만족감에 저절로 웃음이 입가에 맴돌았다.

공작은 손을 들어 사이레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나저나 여보야.”

한참 후에야 사이레인은 좀 기분이 풀린 목소리로 대화를 이어 나가기 시작했다.

“성격 이야기가 나와서 그런데, 아렌도 말이야. 피스토레보다는 선대의 성격을 더 닮지 않았어?”

그 말에 공작이 눈을 깜빡거렸고, 사이레인은 눈을 찡그리며 제 턱을 매만졌다.

“왜, 그 선택하는 것도 그렇고 묘하단 말이지. 여태까지는 르카디우스 제국 황제들의 특유 성격을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피스토레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해 보니까 선대를 더 닮은 느낌이더라고.”

확실히 아렌도의 성격은 선대를 닮아 있었다. 얼굴을 있는 대로 구기던 사이레인이 갑자기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닮을 수밖에 없나, 할아버지랑 손자니까.”

하지만 공작은 무언가 생각에 빠진 듯 대답이 없었다.

“여보야?”

“사이.”

공작은 가라앉은 암녹색 눈동자로 사이레인을 바라보았다.

“혹시 메데이아가 유산했던 시기를 기억해?”

사이레인이 다시 얼굴을 구기며 기억을 뒤지기 시작했다.

“아렌도와 비슷할 때였지. 한 한 달? 아니야, 한 달도 차이 나지 않았어. 보름? 그 정도쯤 되겠군.”

“보름…….”

메데이아는 딸을 낳았다. 작고 어여쁜 딸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신의 곁으로 떠났었다. 달을 채우지 못하고 급작스럽게 태어난 탓이었을까. 아니면 연약하게 태어난 탓이었을까.

이유는 모르지만 아이는 숨을 거두었고, 그 죽음을 고위 사제와 한 중급 사제 그리고 황실 주치의와 시녀가 증언했다.

설마. 공작은 다급히 제 남편의 팔을 잡았다.

“사이. 메데이아의 아이가 죽었다는 걸 증언한 시녀와 사제들 그리고 주의치를 찾아 줄 수 있어?”

“여보야가 원하면 뭔들 못 하겠어. 그런데……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거야?”

“그래, 혹시 모르니까.”

공작은 제 입술을 깨물었다. 왜 자신은 여태까지 그걸 의심하지 않고 있었지? 아이의 죽음이 흔하던 시대라? 아니면 아렌도의 탄생에 가려졌었나?

“이거 피스토레에게 말해야 하는 거 아니야?”

사이레인의 말에 공작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말하지 마. 피스토레는 견디지 못해.”

제 아들을 얼마나 끔찍하게 생각하던 남자였던가. 뒤늦게 휘몰아치던 전쟁의 후유증으로 죽어 가던 피스토레를 살린 건 그의 아내 아르트엘과 첫째 아렌도의 탄생이었다.

“이것 봐, 셀바토르. 내…… 아이래.”

눈물범벅인 모습으로 피스토레는 환하게 웃었다.

“이렇게 작은 아이가 움직여. 이렇게 작은 아이가…….”

제 첫아들을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며 피스토레는 셀바토르를 바라보았다.

“건강이 조금 안 좋대.”

피스토레는 고개를 숙여 제 어린 아들의 뺨에 작게 키스했다.

수염 때문에 아이가 놀라 울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이는 까르륵 맑게 웃어 보였다. 그 웃음에 피스토레의 얼굴에도 더욱 진한 웃음이 번져 나갔다.

전쟁의 후유증으로 죽어 가던 남자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괜찮다면 네 이름을 조금 따서 이름을 지어도 될까, 셀바토르? 조금이라도 네 강함을 닮을 수 있게……. 건강하게 자랄 수 있게…….”

눈물을 뚝뚝 흘리며 부탁하는 황제에게 고개를 저을 순 없었다.

그렇게 아이의 이름은 아렌도가 되었다.

“확실해지면, 그때 이야기하자고. 일단 그때 증인을 섰던 자들을 찾아 줘.”

사이레인은 아내의 말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 뒤로는 침묵이 흘렀다. 사이레인도, 공작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들의 생각이 틀렸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는 사이 마차는 공작저로 도착했고, 당연한 순서로 레슬리가 환하게 웃으며 두 사람을 맞이했다.

“어머니, 아버지!”

레슬리는 달려와 사이레인의 목에 매달렸다. 가뿐히 레슬리를 안아 든 사이레인은 그늘 없이 환한 레슬리를 바라보다가 뺨을 비볐다.

“아버지?”

수염 때문에 뺨이 따끔거렸지만, 레슬리는 사이레인을 밀어내지 않았다. 그저 눈을 깜빡이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사이레인이 레슬리와 시선을 맞췄을 때는 환한 웃음만 자리 잡고 있었다.

“우리 예쁜 딸!”

“케, 켁!”

사이레인이 다시 레슬리를 끌어안자 레슬리의 입에서 기침이 터졌다.

공작은 작게 한숨 쉬며 고개를 흔들더니 사이레인의 품에서 레슬리를 꺼내 안아 들었다. 그리고 작게 기침하는 레슬리의 등을 토닥였다.

“레슬리가 아파하잖아, 사이.”

혹시 레슬리는 다시 사이레인의 품으로 돌아갈까 봐 어머니의 목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그리고 쌕쌕 숨을 내쉬었다.

레슬리를 귀엽다는 듯 안아 들고 토닥이는 셀바토르 공작의 눈에 낯선 이가 들어왔다. 레슬리의 친구 셀리스였다. 셀리스는 공작과 사이레인을 바라보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마치 소동물과 마주친 듯 공작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저번에 자신을 보자마자 기절한 셀리스를 공작은 기억하고 있었다.

“아! 아, 안녀, 녕하세요! 저, 저는 셀리스 츄터, 아니 튜더 에펜……타니입니다!”

굳어 있던 셀리스는 저택이 울릴 정도로 큰 목소리로 인사하기 시작했다. 아니, 이걸 인사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아직도 공작의 품에 안겨 있는 레슬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셀리스를 바라보았다. 셀리스는 작게 숨을 내쉬더니 눈을 꽉 감고 외치기 시작했다. 마치 몇 번이나 연습해 온 듯 긴말이 쉼 없이 흘러나왔다.

“레슬리 양의 초대로 놀러 왔습니다. 오늘 하루 묵고 가게 해 주셔서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슈엘라 언니는 제 사촌 언니예요! 아! 틸레이얼 자작 부인입니다! 머리카락 색이 많이 닮았다고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사실 저희 아버지도 분홍 머리긴 한데, 언니랑 아버지는 닮았다는 소리를 못 들었는데 저는 들었고요. 똑똑하다는 말도 종종 듣고 있었어요. 아니, 하고 싶은 말은 이런 게 아니라, 다름이 아니라 저는 그저 불러 주셔서 정말로 영광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

숨은 쉬고 말하는 것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긴말이 속사포처럼 쏟아져 나왔다. 사이레인도 뒤에서 눈을 껌뻑거렸고 그런 셀리스의 폭주를 막은 건 셀바토르 공작이었다.

“셀리스 양, 우리 집 저녁 시간은 생각보다 긴 편이지. 식사와 함께 이야기를 들려주었으면 하네.”

입에 음식이 들어가면 조금 천천히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공작의 생각이었고 그건 완전히 빗나갔다.

“세, 셀리스…….”

에펜타니 영애가 아니라 셀리스 양. 공작이 자신의 이름을 불러 줄지는 몰랐는지 셀리스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셀리스 튜더 에펜타니의 두 번째 기절이었다.

***

“너무 놀랐어요.”

가져온 잠옷을 입고 나란히 이불을 덮은 두 사람이 천장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고, 기쁨을 이기지 못한 셀리스가 팔다리를 바둥거릴 때마다 침대가 출렁거렸다.

“이름을 불러 주실 줄이야! 너무 행복해요. 최초의 사제가 된 것보다 더욱 행복해요.”

셀리스는 붉어진 얼굴을 작은 손으로 연신 쓸어내렸다. 그러고는 다시 팔다리를 동동거렸다.

저녁 식사 도중에 참석한 베스라온은 생각보다도 더욱 컸고, 사이레인은 이제 무섭지 않으며 테펜텔은 재밌다고 셀리스는 말했다. 그리고 공작님은 식사하는 모습도 멋있다며, 셀리스는 베개를 껴안고 한참을 떠들었다.

“그런데 레슬리 양은 공작님을 어머니라 부르시네요.”

그 말에 레슬리는 눈을 깜빡였다.

“다들 그렇게 부르지 않나요?”

“저는 그냥 엄마 아빠라고 부를 때도 있거든요. 어린아이 같은 호칭이긴 한데……. 그렇게 부르면서 어머니를 꼭 안아 드리면 내심 좋아하세요.”

말을 끝낸 셀리스가 작게 속닥거렸다.

“맛있는 것도 많이 사 주시고요.”

아무래도 뒷말이 더 핵심인 듯해 두 소녀는 얼굴을 마주 보고 작게 키득거렸다. 레슬리의 침실에 흐르던 웃음소리가 사라지고 난 후 셀리스는 레슬리의 손을 꼭 잡았다.

“고마워요, 레슬리 양.”

셀리스의 커다란 눈동자가 밝은 웃음을 머금었다. 흥분으로 상기된 뺨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셀리스의 눈은 크고 눈꼬리가 처진 모양이라 평소에는 그다지 즐거워 보이지 않았는데, 오늘은 그런 기색 따위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정말로 고마워요. 덕분에 인생의 소원을 하나 이뤄 냈어요.”

“뭘요, 그냥 어머니를 소개해 준 것뿐인걸요.”

제 목에 묶인 리본을 다시 고쳐 매며 레슬리가 옅게 웃었다. 그런 레슬리를 보며 셀리스도 배시시 따라 웃었다.

“레슬리 양은 대단해요.”

갑자기 이야기의 불똥이 레슬리에게 튀었다.

“능력도 뛰어나고, 늘 열심히 하시고, 은발도 반짝반짝한 게 예쁘고요. 그리고 멋져요, 레슬리 양은. 거기다 제 목숨을 살려 주시고 인생 소원까지 들어주셨지요.”

너무 과장되는 듯한 셀리스의 이야기에 레슬리는 볼을 붉혔다.

“과찬이에요, 셀리스 양.”

“나중에요, 혹시 나중에 제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말해 주세요. 있는 힘껏 도울게요!”

그렇게 말하더니 셀리스는 작게 속닥거렸다.

“최대한 약초학 쪽으로 부탁드려요……. 제가 약초학을 잘하거든요.”

레슬리는 이번엔 조금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셀리스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고어랑 신학에 능통하니까, 혹시 필요하면 말하세요.”

“고어와 신학이라…….”

셀리스는 눈을 찡그렸다.

“매일 도와 달라고 할지도 모르겠네요. 저는 고어랑 신학이 약하거든요.”

사실 다른 과목도 약해요. 작게 속닥거리는 셀리스의 말과 함께 밤이 점점 깊어졌다.

***

메데이아가 주최한 파티가 열리는 날이 밝아 왔다. 루엔티는 아직 신전에서 돌아오지 못했으며, 어제 콘라드의 답장이 아슬아슬하게 셀바토르 공작저에 도착했고 주인공 레슬리는 새벽부터 하녀들에게 붙들려 있었다.

“하아암.”

졸려서 연신 하품을 하는 레슬리와 달리, 모두의 눈에는 불꽃이 튀고 있었다. 사실상 레슬리의 첫 파티다 보니 제나까지 달려와 레슬리를 꾸미는 걸 살피고 있었다. 그렇게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드디어 모든 준비가 끝이 났다.

“됐어요, 아가씨!”

마델은 거울 앞에 선 레슬리의 드레스 자락을 정리해 주며 밝게 웃었다. 확실히 공을 들여 꾸미니 그 어느 때보다 예뻐 보였다.

구불거리는 은발 중간중간에는 흑진주가 달려 빛을 내고 있었고, 반묶음으로 된 머리를 고정한 핀은 백금과 레슬리의 눈 색을 닮은 보랏빛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하얀색과 연분홍색이 어우러진 드레스는 처음부터 레슬리를 위해 만들어진 옷인 만큼 어디 하나 부족함이 없었다.

‘예쁘다.’

레슬리는 눈을 깜빡거렸다. 마치 동화 속 공주님이 된 기분에 괜스레 한 바퀴 돌아보고 싶어 빙글 돌자, 꽃이 피어나듯 드레스 자락이 넓게 퍼졌다.

거울을 한참 바라보다가 레슬리는 고개를 돌려 자신을 꾸미느라 새벽부터 고생한 하녀들을 바라보며 볼을 붉혔다.

“다들 고마워.”

레슬리의 칭찬에 하녀들은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랑 아버지는?”

“밑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베스라온 도련님은 연무장 쪽에 계세요. 오늘은 하르트 경도 동행하실 겁니다.”

“하르트 경이?”

그래도 되는 걸까? 레슬리는 눈을 깜빡였다. 공작저에 온 지 4년이 지났지만, 여태 하르트가 그 어떤 파티나 무도회에 참석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하르트는 타국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공작의 주도하에 황실에서 새 성을 받고 귀족의 반열에 올랐다지만, 타국인을 보는 눈은 곱지 않았다. 거기다 하르트는 아직 영토도 없는, 말뿐인 귀족이었다. 그래서 하르트는 셀바토르 공작가의 임무나, 간혹 레슬리 호위 겸 축제나 소풍에 참여하는 게 아니면 늘 공작저에 머물렀다.

‘괜찮을까?’

하르트가 걱정되었다. 누군가가 뒤에서 뭐라 한다 해서 신경을 쓸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기분은 나빠지지 않을까.

레슬리가 고개를 숙이고 눈을 찡그리자,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마델이 서올리에게 작게 속삭였다.

“아가씨께서 긴장하셨나 봐.”

“그럴 만하지.”

보통은 이런 파티에서는 어린 아가씨를 위해 어머니가 파티에 대해 알려 주며 딸을 이끌었지만, 셀바토르 공작은 그럴 사람이 아니었고, 안살림을 책임져야 할 사이레인에게는 그런 기대조차 할 수 없었다.

그나마 틸레이얼 부인이 파티의 예절이나 간단한 팁 같은 걸 레슬리에게 알려 주곤 했지만, 그녀는 아이를 가져 현재 틸레이얼 자작가로 내려간 상태였다.

“긴장되시겠네.”

한 하녀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낯선 사람을 많이 만날 테니 더욱 긴장되시겠지. 거기에 이상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고. 질투에 시비를 건다거나 아님 청혼을 한다거나.”

“아하!”

다섯의 고개가 이해했다는 듯 동시에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러고 보니 레슬리가 열두 살 때, 스물다섯 살이나 되는 미친놈이 청혼서를 보내지 않았던가.

하녀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빨랫방망이를 들고 따라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들은 어떻게 하면 아가씨를 지킬 수 있는지 열렬하게 토론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답은 금방 나왔다.

“아가씨!”

레슬리가 고개를 들자, 사용인들은 어딘가 활활 불타오르는 눈동자로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만약 시비를 걸면 실수인 척 발을 밟아 버리세요!”

“시비? 실수인 척?”

“네! 사람도 많으니까 실수인 척, 콱! 하고 밟아 버리세요!”

시비를 거는 사람 발등을 밟으라니. 잠시 하녀들의 말뜻을 생각하다가 레슬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레슬리는 눈을 깜빡이다가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여태 경이 나를 지켜 줬으니까, 이번엔 내가 지켜 주면 되는 거구나!’

이 간단한 걸 여태 왜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지! 만약 파티에서 누군가가 하르트를 못살게 군다거나 뒷말을 흘린다면 콱 발을 밟아 버리자. 그래도 정신을 못 차리고 하르트를 괴롭힌다면 발등에 구멍이 뚫릴 때까지 밟아 주리라.

서로 다른 의미로 시선을 맞추며 하녀들과 레슬리는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르트의 복수를 위해서 레슬리는 서올리가 가져온 신발 중 가장 뒷굽이 날카로워 보이는 구두를 골랐다. 오늘 처음 신어 보는 높은 신발은 조금 불안했지만, 생각보다 발이 편해 레슬리는 금방 적응했다.

“가자!”

레슬리는 마치 전쟁에 나가는 듯한 결연한 얼굴로 크게 외쳤고 그 뒤를 다섯의 하녀가 위풍당당하게 뒤따랐다. 먼저 입구 쪽에 서 있던 베스라온이 제 여동생을 불렀다.

“레슬리.”

“오라버니!”

남은 계단을 빠르게 내려온 레슬리는 베스라온 앞에 섰다. 레슬리는 신기하다는 눈으로 베스라온을 바라보았다. 베스라온은 회색빛 머리를 뒤로 넘기고 깔끔한 격식의 검은 정장을 입고 있었다.

답답함에 입고 있는 크라바트를 만지작거리며 미간에 주름을 잡고 있던 베스라온은 저에게 달려오는 여동생을 보자마자 한껏 밝은 웃음을 머금었다.

“오라버니가 이런 옷을 입은 건 정말 오랜만에 봐요.”

레슬리는 신기하다는 눈으로 베스라온을 바라보았다. 평소에는 린체 기사단 제복이 아니면 늘 편한 튜닉을 주로 입고 있었다. 무도회나 파티에 나가는 편이 아니었기에 이런 차림은 정말 드문 편이었다.

‘마지막으로 본 게 신년회 때였나?’

아니지, 이번 신년회 때는 기사단 일로 황제 폐하의 경비를 서느라고 참석하지 못했으니까, 작년쯤이던가. 레슬리는 괜스레 베스라온의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며 작년 일을 되짚어 보았다.

“그렇게 오랜만이던가.”

베스라온이 제 옷차림을 바라보다 무의식적으로 크라바트를 만지작거렸다. 다시 미간에 작은 주름이 잡혔다.

“많이 답답하세요?”

“조금? 제복은 이제 익숙해져서 그럭저럭 참을 만한데, 아무래도 이건…….”

베스라온은 잠시 크라바트 쪽으로 손을 올렸다가 도로 내리기를 반복했다. 레슬리는 그런 베스라온의 팔을 잡고 작게 웃었다.

“그래도 잘 어울려요. 오라버니만큼 멋있는 사람은 황궁에 없을 거예요.”

셀바토르 공작가의 사람들이 레슬리를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아이로 생각하듯, 레슬리 역시 셀바토르 공작가의 사람들을 세상에서 제일 멋있게 생각하고 있었다. 잘생기고 다정다감하고 키도 크고 힘도 세고, 모르는 것도 없는 데다가 능력도 뛰어난 두 오라버니가 아니던가.

종종 루엔티는 바보 같은 장난을 쳐서 점수를 깎아 먹을 때가 있었지만, 그래도 제 오라버니들이 너무 좋았다.

그건 물론 아버지인 사이레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간혹 사랑이 너무 지나쳐 부끄러울 때가 있었지만, 레슬리는 제 아버지가 너무도 좋았다.

그래도 제일 좋은 건 어머니였지만. 레슬리는 속으로 모두에게 사과하며 웃음을 머금었다.

그런 레슬리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던 베스라온이 입을 열었다.

“많이 컸구나.”

“네?”

레슬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갸웃거리자, 이번엔 베스라온이 하얀 이를 보이며 더 짙게 미소 지었다.

“4년 전엔 털공이 굴러오는 줄 알았지.”

루엔티가 열 살 때 입던 옷조차 너무 커서 털공처럼 보이던 아이가 어느새 훌쩍 커서 아라벨라까지 되었다. 그제야 레슬리는 베스라온이 4년 전 일을 회상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레슬리의 눈에서 빛이 나기 시작했다.

“저 많이 컸나요?”

“그럼. 그때는 요만했었지.”

베스라온이 짓궂게 허리를 숙이며 거의 바닥에 닿을 정도로 손을 내렸다. 그러자 레슬리가 입술을 빼죽 내밀었다.

“그때도 그 정도로 작진 않았어요.”

“작았어.”

“그럼 지금은요?”

레슬리의 물음에 베스라온은 고민하는 듯 잠시 눈을 찡그리다가 손을 조금 더 들어 올렸다. 그래 봤자 아주 조금 더 올라갔을 뿐이라 동전 하나가 굴러 들어가기에도 부족한 틈이었다.

“이 정도.”

레슬리의 입술이 더욱 앞으로 나왔다. 삐진 게 분명해 보였다. 결국 베스라온은 소리 내 웃음을 터트렸다.

사랑스럽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여동생이라니. 그리고 요 근래 들어 키가 훌쩍 자란 루엔티 놈도 까칠한 성격이 귀여운 동생이었다.

귀여운 동생이 둘이라니, 분명 자신은 상당히 운이 좋은 편이다. 그러다 무엇을 상상했는지 순식간에 얼굴이 어두워졌다.

“레슬리.”

“네, 오라버니?”

“예전에 얘기했던 결혼할 사람의 조건은 기억하고 있지?”

갑작스러운 질문에 레슬리는 베스라온과 눈을 마주치며 깜빡거리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음, 아버지보다 키가 크고 오라버니보다 힘이 세고, 루엔티 오라버니보다 똑똑해야 해요.”

“거기에 귀여워야지.”

베스라온이 한마디를 덧붙었다. 그건 셀바토르 공작의 조건이었다. 과연 그런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하기는 할까, 베스라온조차 의문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말해 두지 않으면 안 된다. 오늘 파티는 생각보다 더 많은 귀족이 참여할 것이고, 그중에는 분명 치근거리는 놈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제 동생은 순수했다.

‘거기다 견제해야 할 놈도 한 놈 있고 말이지.’

누군가를 떠올리는 베스라온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레슬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잘했다고 칭찬하며 베스라온이 다시 물었다.

“혹여나 이상한 놈들이 들러붙으면 어떻게 하라고 했지?”

“오라버니들에게 말하면 돼요.”

그렇지.

베스라온이 고개를 끄덕이는데 셀바토르 공작과 사이레인이 중앙 계단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맞춰 입은 것인지, 사이레인과 공작의 옷은 같은 디자인이었다. 두 사람 다 꽤 신경을 쓴 옷차림이었다.

셀바토르 공작은 검은 머리를 반묶음으로 했는데, 그게 제 머리와 비슷한 모양이라 레슬리는 마음에 들었다.

두 사람에게 다가온 공작은 레슬리가 귀엽다는 듯 머리가 망가지지 않게 조심히 쓸어 주다가 베스라온을 바라보았다.

“답답하지?”

베스라온은 그제야 레슬리와 이야기를 하다가 간신히 잊어버린 크라바트를 떠올렸다.

“어머니는 답답해 보이시지 않네요.”

공작은 어깨가 노출된 드레스로, 목에는 가는 목걸이가 걸려 있을 뿐이었다.

“나도 그 답답한 게 싫어서 제복을 마음에 안 들어 했었지.”

셀바토르 공작도 베스라온처럼 목을 덮는 종류의 옷은 답답해서 싫어하는 편이었다. 제복 역시 다 참을 수 있었으나, 목까지 채워진 단추가 가장 마음에 안 들었었다. 결국 린체의 기사단장이 되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기사단복을 바꾼 것이었다. 그래도 편하지는 않아서, 공작 위에 오르고 나서는 목까지 오는 옷은 잘 입지 않았다.

“레슬리 오늘 정말 예쁘구나. 정말 잘 어울려.”

그 말에 뒤로 한 발짝 물러나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있던 사이레인이 고개를 끄떡였다.

“이 아버지는 아까 천사님이 내려온 줄 알았단다.”

“맞아요. 우리 막내가 천사보다 더 예쁘죠.”

어딘가 굉장히 흡족해 보이는 사이레인과 요즘엔 한술 더 뜨는 베스라온의 말을 공작은 막지 않았다.

레슬리의 뺨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레슬리는 괜스레 발을 바닥에 톡톡 두드리며 시선을 이곳저곳으로 옮기고는 목에 맨 리본을 만지작거렸다.

“저 그래도 조금 걱정돼요. 파티는 처음이라…….”

“레슬리, 신경 쓸 필요 없단다. 네가 예절을 어긴다 해도 아무도 너에게 뭐라 할 수 없어.”

베스라온의 단호한 말에 사이레인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셀바토르 공작은 레슬리를 보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우리 딸은 왜 아직도 그런 사소한 것에 신경을 쓰는 걸까.”

레슬리가 눈을 깜빡거리자, 공작은 한쪽 입꼬리만 올리며 웃었다.

“오늘 보여 주는 게 낫겠구나. 우리 가문이 어떤 가문인지를 오늘 네 눈으로 보렴. 사냥감이 우리를 보고 어떤 눈빛을 가지는지, 어떻게 행동하는지.”

자신이 잘못했다. 귀찮다고 늘 필요한 곳만 잠시 얼굴을 내밀었다가 돌아온 걸 공작은 후회했다.

한두 번쯤은 귀족들이 몰려 있는 파티에 데려가 사냥감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여 줬어야 했다. 나약해지는 모습들이 공작 눈에도 불쌍할 정도니, 착한 자신의 딸이라면 되레 동정심을 가질지도 몰라 조금 걱정되었다.

자신처럼 행동하고, 자신처럼 사고해 달라는 뜻을 제대로 알아들은 총명한 딸은 라일락빛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머니.”

걱정 한 점 없는 맑은 목소리를 들으며 셀바토르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 이제 갈까.”

공작이 걸음을 옮기자, 아직도 부끄러워하는 레슬리와 그런 레슬리를 보며 웃는 베스라온이 따라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사이레인은 누군가와 이야기하는 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사이?”

공작이 남편의 애칭을 부르며 뒤를 돌아보자, 사이레인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사이레인과 이야기하는 사람의 손에는 작은 영상석이 들려 있었는데, 사이레인이 그에게 건네준 듯 보였다.

“사이레인 님, 그럼 이 상태를 그리면 되는 건가요?”

“그렇지, 힌덴. 아, 그 전에 베스라온. 잠깐 너는 이리로 오너라.”

“……싫습니다.”

무언가 이상한 걸 눈치채고 베스라온이 거절하자 사이레인이 눈을 찡그렸다.

“그러지 말고, 어서.”

“도대체 무슨 일인 겁니까.”

베스라온이 눈을 찡그리며 묻자 사이레인이 흡족한 미소를 얼굴 가득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초상화를 그릴 생각이다. 우리 예쁜 딸과 아내님을 그려서 중앙 복도 계단에 걸어 둘 생각이야.”

그래서 영상석인가? 레슬리는 눈을 깜빡였다. 지금 입은 이 드레스 그대로 그리기 위해 영상석으로 기록하고 후에 초상화를 그릴 생각인 듯했다.

“그러니 너는 이리 오거라, 베스라온.”

다시 사이레인이 베스라온을 재촉했다. 베스라온이 눈을 찡그리며 사이레인을 바라보자, 레슬리는 베스라온의 팔에 매달렸다.

“저는 오라버니도 같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베스라온이 감동한 듯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루엔티도 있으면 좋겠는데, 하필 자리를 비웠다.

“그리고 아버지도 같이 있으면 좋겠어요…….”

레슬리가 눈을 깜빡이며 사이레인을 바라보자, 사이레인 역시 감동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다 같이 하자. 루엔티는…… 그림 한구석에 작게 그려 주면 되겠지.”

동그란 원 안에 그려서 구석에 박아 주면 충분하겠지. 분명 돌아오면 분통을 터트리겠지만 사이레인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니까 누가 이렇게 예쁘고 귀여운 레슬리와 너무도 멋진 아내님을 볼 기회를 날리라고 했던가.

‘돌아오면 자랑하면서 놀려야지.’

사이레인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며 재빠르게 영상석으로 두 사람을 기록하는 하인을 바라보았다. 베스라온은 은근슬쩍 잘려서 기록되었다. 나중에 아주 잠시 같이 기록해 줄 예정이다. 지금 그린 초상화는 은밀하게 진행되는 ‘레슬리 거리’에 걸릴 거니까.

드디어 만족한 듯한 제 남편을 보며 셀바토르 공작은 작게 웃었다. 그래, 남편이 좀 주책이긴 하지만 초상화도 나쁘지 않았다.

“분명 우리 딸은 이 파티에서 가장 빛날 테니까.”

***

“이 파티에서 가장 빛나는 사람은 네가 될 거란다.”

메데이아는 제 무릎에 매달리듯 얼굴을 기대고 있는 엘리의 머리카락을 쓸어 주며 속삭였다.

“하지만 저는 아라벨라가 되지 못했는걸요.”

엘리는 투덜거렸다. 자신이 그 레슬리의 밑이라는 게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자신은 그냥 최초의 사제고, 레슬리는 가장 빛나는 자리의 아라벨라라니.

아라벨라 축제는 타국에서도 사람들이 몰릴 정도로 유명한 축제였다. 그런 축제가 가장 크게 열리는 축복의 날 때, 모두가 아름다운 레슬리의 모습만 기억한 채 돌아갈 거라 생각하니 절로 치가 떨렸다. 자신은 분명 잘 보이지도 않는 구석에 박혀 제대로 시선조차 받지 못하겠지.

“엘리, 사랑스러운 아가.”

메데이아가 토라진 엘리를 달래듯 부르자, 그제야 엘리는 고개를 들고 메데이아를 바라보았다.

“누누이 말했잖니. 지금은 잠시 고개를 숙일 때라고.”

“저는 그러고 싶지 않아요!”

빛나고 싶다. 언제나 아름답게 빛나고 싶었다. 모두가 자신을 바라보며 칭송하고 자신의 발밑에 몸을 던지게 하고 싶었다. 잠시라도, 아주 잠시라도 그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아라벨라를 정할 때, 레슬리의 이름을 꺼내고 난 후 엘리는 제 방에 돌아와 자신의 혀를 자르고 싶을 정도였다.

“왜 저에게 그년을 추천하라고 하신 건가요. 전 너무 속상해요, 태후 폐하…….”

엘리의 보석 같은 눈동자에 눈물이 고였다.

“물론 태후 폐하의 말씀이니 시킨 대로 했지만, 그래도…….”

메데이아는 그런 엘리를 바라보며 눈을 찡그렸다. 많은 의미가 담긴 시선이 엘리에게 닿았으나 정작 본인은 그걸 알지 못했다. 엘리가 제 시야를 가리는 눈물을 훔쳤을 때는 평소처럼 온화한 미소만이 남아 있던 탓이었다.

“엘리, 걱정 말렴. 그 아이는 끝에선 허물어질 테니.”

“정말 그럴까요.”

엘리는 눈가를 파르르 떨며 메데이아를 바라보았다.

“저는 아직도 그 아이가 제 위에 있다는 걸 견딜 수가 없어요. 그 아이는 오직 날 위해 태어난 것인데……. 후작가에서는 저랑 눈도 마주치지 못했던 것이라고요! 제 주제도 모르고 날뛰면서 순진한 척 사람들을 속이는 게 너무 가증스러워요!”

엘리의 투덜거림은 길게 이어졌고, 점점 메데이아의 온화한 얼굴에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메데이아를 구한 건 잠시 메데이아의 온실을 찾아온 아렌도였다.

“아렌도.”

시종에게도 알리지 않고 조용히 들어온 아렌도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메데이아에게 매달린 엘리를 보고 눈을 찡그렸다.

“잠시 지나가는 길에 인사를 드리기 위해 들렀습니다만…….”

아렌도의 시선이 다시 엘리에게 닿았다.

“아무래도 선약이 있던 모양이군요.”

“아니에요.”

엘리는 몸을 일으키더니 눈물을 훔쳐 내고는 아렌도를 보며 옅게 웃어 보였다. 처연해 보이는 그 모습은 엘리의 미모와 겹쳐지며 아련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눈가를 살짝 떨며, 엘리는 애써 감정을 추스르는 듯 어깨를 떨었다.

어딘지 가식적인 웃음과 행동에 아렌도의 한쪽 입술이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저는 이제 막 가려던 참이랍니다. 부디 저를 신경 쓰지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세요.”

“그렇군요. 그럼 비켜 주시지요, 영애.”

엘리나 약혼녀라고 부르는 것도 아닌, 마치 자신과 관련이 없는 사람을 부르는 호칭에 엘리는 입술을 깨물었고, 주저 없이 자리를 벗어나려는 찰나, 메데이아가 엘리의 손을 붙잡고는 시선은 그대로 아렌도를 향한 채 말을 이었다.

“황자, 오늘 파티에서 엘리 양의 파트너가 되어 주세요.”

그 말에 엘리의 얼굴은 환해졌고, 반대로 아렌도의 얼굴은 심각해졌다.

환하게 웃으며 엘리가 파티 준비를 위해 나가자 아렌도는 미소 짓고 있는 메데이아를 바라보았다.

“태후 폐하, 아니 할머님.”

불만이 가득한 목소리를 들으며 메데이아는 손수 차를 우리고는 아렌도의 앞에 놓아 주었다.

“엘리가 그렇게도 싫은가요, 황자?”

“……할머님도 보시지 않았습니까. 자기 연민과 아집에 빠져 앞을 보지 않습니다. 현실을 거부하고 있지요. 거기다 스페라도 후작가는 권력을 잃고 쓰러진 지 오래입니다. 그들은 저를 지지해 주지 못합니다.”

아렌도는 고개를 뻣뻣이 들고 메데이아를 바라보았다.

“여태는 할머님의 충고와 동정표를 위해서 약혼을 유지했습니다만, 더는 싫습니다. 멍청하고 아둔한 것을 데리고 평생 살고 싶지 않아요. 황후가 된다면 어떨지 상상도 하기 싫군요.”

아렌도의 매끈한 미간에 잡힌 주름과 경멸적인 시선은 모든 걸 말해 주고 있었다. 메데이아는 잠시 그 표정을 보고 있다가 작게 웃었다. 그리고 에메랄드빛 찻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황제가 될 분이 너무 신경을 쓰고 있었군요. 금방입니다, 황자. 이제 금방이에요. 그리고 그 아이는 황후 자리에 오를 수 없습니다. 곧 쓰임을 다 하고 자신에게 어울리는 자리로 돌아갈 거랍니다.”

“어울리는 곳이라면…….”

아렌도의 물음에 메데이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아렌도와 시선을 마주하며 생긋, 웃어 보였을 뿐이었다.

“그렇군요.”

그 미소에 담긴 의미를 읽어 낸 아렌도는 그제야 굳어 있던 얼굴을 풀고 살짝 미소 지었다.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를 때, 걸리적거리는 건 하나도 없을 거랍니다, 황자. 그리고 약속해요. 그때 황자의 옆에는 미래의 황제에게 잘 어울리는 사람이 앉아 있을 거라고.”

아렌도는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대답했다.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라…… 궁금하군요. 혹시 제가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맞습니까, 할머님?”

메데이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셀바토르 공녀 정도 되면 적당하겠지요.”

결혼할 수 없는 황족을 제외하고, 결혼한 이를 제외하면 가장 고귀한 피는 셀바토르 공작가의 입양 딸, 레슬리 슈야 셀바토르였다.

“입양아라지만 그 피는 스페라도 후작의 것. 혈통 하나는 의심할 바가 없는 귀족의 혈통이죠.”

르카디우스 제국이 건국될 때부터 황실을 모신 귀족 중 한 명인 스페라도 후작가의 핏줄이라면 일단 핏줄로는 합격이었다. 그리고 가장 좋은 점은 셀바토르 공작가의 힘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었다. 가장 고귀한 수호자의 힘과 명성.

셀바토르 공작가 쪽에서 반항이 심하겠지만, 그때마다 황실에 있는 그 입양 딸을 보여 주면 잠잠해질 것이다. 셀바토르 공작가는 그 아이를 퍽 아끼고 있었으니까.

피와 명성, 힘 그리고 셀바토르 공작의 목을 옥죄일 완벽한 목줄. 그 아이는 메데이아의 마음에 쏙 들었다.

‘그리고 어둠.’

왜 그리도 엘리가 레슬리를 싫어하는지 데비엔의 보고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엘리는 자신의 입으로 쉼 없이 레슬리가 제 위에 있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그 감정에 하나가 더해진 걸 모르고 있었다. 바로 공포와 절망이었다.

‘분명 그 힘에 대해 알고 있겠지.’

깊은 숲에서 끌어낸 거대 늑대를 단박에 죽이는 힘. 그걸 엘리와 후작이 모를 리가 없었고 그 힘을 본 순간 엘리는 자신이 절대 이길 수 없는 상대에게 공포를 느꼈을 것이다.

분명 자신보다 아래에 있던 것이, 자신보다 더욱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 사실만으로도 절망스럽고 무서울 것이다. 그런데 더 경악스럽게도, 그녀는, 엘리는 절대로 레슬리를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이다.

절망, 공포 그리고 질투와 한 줌 남은 뒤틀린 자존심. 그 뒤섞인 감정들에 지금 아렌도가 말한 무지와 아집이 더해져 지금의 엘리를 만들어 낸 것이었다.

완벽했다. 엘리는 정말로 완벽하게, 메데이아가 원하는 결과물이 되어 주었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것은 자신의 역할을 잘해 주는 것뿐. 역할을 잘 마치고 나면 무덤 정도는 화사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메데이아는 엘리를 생각하며 살포시 웃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엘리가 레슬리를 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관심이 없었다. 그저 운반책으로서 역할을 잘해 주기만 바라고 있을 뿐이었다.

‘고귀한 피에 스페라도 특유의 힘인 어둠, 셀바토르 공작가의 권력과 명예 그리고 힘. 마지막으로는…….’

에피알테스. 아렌도는 역사상 가장 강력하고 무자비한 황제가 될 것이다.

메데이아는 이제 머지않은 미래를 생각하며 아렌도를 바라보았다.

“황자, 황자는 원하는 것을 모두 얻게 될 겁니다. 제가 그렇게 만들어 드릴 테니까요.”

메데이아의 말에 아렌도는 어딘가 엘리를 볼 때와 비슷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명백히 메데이아를 낮보고 있는 웃음이었지만, 메데이아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때가 되면 내 소원을 이뤄 주겠다는 부탁을, 잊지 말아요.”

“잊지 않겠습니다, 할머님.”

찬사와 모든 힘과 명예가 당연히 자신의 것이라는 듯 아렌도는 차를 한 모금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엘리에 관해 이야기하자고 여기까지 온 건 아닐 테고, 무슨 일이 있나요?”

메데이아는 사실 왜 아렌도가 황궁 가장 구석에 있는 자신의 궁까지 왔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짐짓 모르는 척 찻잔을 매만지며 물었다.

“저번에 선물해 주신 꽃을 받고 싶어서 말입니다.”

아렌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용건을 꺼냈다.

“향이 좋아 늘 곁에 두고 즐기고 있었는데, 어제 갑자기 져 버렸더군요.”

“아아. 그 꽃은 원래 하룻밤 사이에 져 버리고는 한답니다.”

“네, 시종장도 그렇게 말하더군요. 그래서 새 꽃을 받으러 왔습니다. 듣자 하니 그 꽃은 할머님의 온실에만 피어 있다더군요.”

마치 메데이아에게 꽃을 맡겨 놓은 듯한 당당한 태도였다. 하지만 메데이아는 익숙한 듯 그 무례한 태도를 가볍게 흘려 넘겼다.

“그렇군요. 그런데 이를 어쩐담. 저번에 선물해 준 꽃이 마지막이었을 거예요.”

그제야 아렌도의 푸른 눈이 놀란 듯 커졌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정리한 아렌도가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군요. 아쉽습니다. 향이 꽤 좋았는데 말이죠.”

그 뒤로도 할 말이 남았는지 찻잔을 내려다보면서 눈을 찡그렸다. 침묵이 조금 길어졌고, 그 침묵을 충분히 즐긴 후에야 메데이아가 입을 열었다.

“아! 구석에도 심어 놓은 것을 깜빡했네요. 아직 몇 송이가 남아 있을 거예요.”

“……그러면 그걸 제가 가져갈 수 있을까요, 할머님?”

어딘지 다급함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메데이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황자. 내가 황자에게 무엇을 못 주겠어요. 손질해서 보내 드릴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하지만…….”

“오늘 저녁 내로 이피엘을 통해 보내 드리지요.”

그제야 작게 안도의 숨을 내쉬며 아렌도가 몸을 일으켰다.

제 볼일이 끝났으니 더 여기에 머무를 필요가 없어졌다.

“그런데 할머님.”

입구를 향해 걸어가던 아렌도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몸을 빙글 돌려 차를 음미하고 있는 메데이아를 바라보았다.

“혹시 어머님께도 제게 보낸 꽃과 같은 꽃을 보내셨습니까?”

“아니요.”

메데이아는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조금 다른 꽃이랍니다. 모습은 비슷하지만, 향은 전혀 다르답니다.”

메데이아의 말에 아렌도는 잠시 눈을 찡그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는 파티장에서 뵙겠다는 가벼운 인사와 함께 방을 나가 버렸다.

메데이아는 아렌도가 나간 방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리되어야지요. 가장 강력한 황제가.”

메데이아의 눈은 현재를 보고 있지 않았다. 과거와 미래를 바라보듯 어딘가 텅 빈 듯한 눈동자였다.

“그래야 내 소원이 이뤄질 테니까요.”

어딘가 희열에 차 있는 목소리가 조용히 흩어져 사라졌다.

***

“오늘 참석하실까요?”

한 사람의 물음에 같이 담소를 나누던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이번 파티는 참석하실 거예요.”

“셀바토르 공녀님이 아라벨라가 되었다잖아요? 자리를 빛내러 와 주시겠지요.”

“저는 사실 실제로 뵙는 게 이번이 처음이에요. 보자마자 기절할 정도로 무섭다는 게 사실인가요?”

이제 갓 소년티를 벗은 남자가 조금 긴장한 듯 묻자, 맞은편에서 음료를 마시던 여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누스턴 신전에서도 한 영애가 셀바토르 공작을 보자마자 기절했대요!”

여성의 말에 주변에 몰려들었던 사람들이 놀라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왔다. 이 파티에는 후보로 발탁되었던 지방 귀족들과 그들에게 부탁해 같이 참여한 귀족들이 많았기에, 대부분이 셀바토르 공작을 한 번도 보지 못한 귀족들이었다.

“얼마나 무서우면 기절을 했을까요?”

“그래도 저는 당당하게 인사를 하겠어요. 무서워도 사람이잖아요?”

“기절할지도 몰라요. 괜히 괴물 공작가라고 불리겠어요?”

“공작님도 공작님이지만……. 저는 그 남편 되시는 분이 궁금하더군요. 타국의 용병이 하루아침에 공작의 남편이라…….”

모여 있는 사람들은 이젠 목소리를 낮추는 것도 잊어버리고 셀바토르 공작의 이야기에 푹 빠져 버렸고, 그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은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조금 과장을 하자면 이 파티장에 있는 모두가 셀바토르 공작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경비를 서는 기사들조차 눈치를 봐 가면서 공작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만큼 셀바토르 공작은 공식적인 자리에 모습을 잘 보이지 않았다.

“이런.”

갈색 머리를 뒤로 넘긴 한 남자가 시종에게서 와인 한 잔을 받아 들며 웃음을 흘렸다.

“모두가 셀바토르 공작의 이야기를 하고 있군요.”

어딘가 삐뚜름한 웃음을 지으며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자네는 공작의 이야기가 궁금하지 않은가?”

복스러운 배가 시선을 사로잡는 한 중년 남자가 웃자, 마치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남자는 머리를 쓸어 올리며 미소 지었다.

“저는 그런 것에 흥미가 가지 않더군요! 오직 제 흥미는 철학과 그리고 이 나라의 앞길뿐이죠. 괴물이라 불리는 공작은 제 흥미를…….”

“아셀라 벤칸 셀바토르 공작님! 사이레인 델파 셀바토르 님! 베스라온 라엔 셀바토르 님! 그리고 아라벨라이신 레슬리 슈야 셀바토르 님께서 입장하십니다!”

큰 외침에 남자는 다급하게 제 입을 틀어막았다. 하필 입구와 가까이 서 있었기에 더욱 눈치가 보였는지, 남자는 발을 움직여 순식간에 파티장 구석 어딘가로 사라졌다.

셀바토르 공작가가 파티장에 들어서자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일제히 소리를 죽였다.

“정말로 왔네요.”

“저 아가씨가 이번 아라벨라인가요? 혼자만 하얗고 작은 게 꽤 귀여우신…….”

“괴물…….”

귓가에 들려오는 속닥거림을 가볍게 무시하며 공작은 발을 움직였다. 그녀가 걸을 때마다 파티장에 가득 찬 인파가 갈라지며 그녀를 위한 길을 만들어 주었다.

용기 있게 인사를 하겠다는 사람들도, 자신은 그런 공작에게 관심이 없다며 콧대를 높이던 사람들도, 모두 숨을 죽이고 오랜만에 이런 자리에 등장한 셀바토르 공작을 바라보았다.

‘그렇구나.’

레슬리는 그 사람들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그녀는 여태 사람들이 편견과 무지로 공작가를 무서워하고 싫어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오늘 이렇게 수많은 귀족이 모인 자리에서 그들의 눈빛을 찬찬히 살펴보니, 자신이 틀렸다는 걸 깨달았다.

그들의 눈에는 공포와 편견이 서려 있었으나, 그 뒤에는 다른 감정도 숨어 있었다. 경외와 도달할 수 없는 경지의 사람에게 보내는 선망.

다시 공작이 한 발 더 내딛자, 사람들이 순식간에 뒤로 한 발짝 더 물러났다. 그녀를 위한 길은 더욱 넓어졌고, 사림들은 침묵 속에 고개를 숙였다.

“셀바토르 공작.”

그런 분위기를 깨트린 건 업무를 통해 셀바토르 공작과 안면을 익힌 몇 귀족 덕분이었다.

“오랜만에 이 자리에 와 주었군요.”

“오랜만입니다.”

“사이레인 님도 오랜만에 뵙습니다.”

한 노부부가 달갑게 공작과 사이레인을 맞이했고, 공작이 미소를 머금었다.

그와 동시에 사람들은 숨 쉬기를 간신히 허락받았다는 듯 숨을 내몰아 쉬었다. 분위기가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잠시 담소가 오가기 시작했고, 레슬리는 뒤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레슬리의 팔을 누군가가 붙잡았다.

“레슬리 양!”

제 머리카락 색과 맞춘 듯 분홍빛 드레스를 입은 셀리스가 눈을 빛내고 있었다. 레슬리 역시 낯선 자리에서 만난 제 친구가 반가워 환하게 웃었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다녀오렴.”

베스라온이 살짝 등을 밀어 주자, 레슬리는 고개를 끄덕이고 셀리스와 함께 음식이 가득 차려진 테이블로 갔다. 여기에 있다는 듯 손을 흔들자, 베스라온이 살짝 이를 보이며 웃더니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이따가 우리 가족들도 소개해 드릴게요.”

셀리스는 한참 전에 파티장에 도착한 듯 익숙하게 이게 맛있다며 작은 케이크를 건네주고는 웃었다.

레슬리는 케이크를 바라보았다. 담소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한입에 먹을 수 있게 만들어진 동그란 케이크 위에는 작은 과일이 올라가 있었다.

‘셔……!’

한 입 먹자마자 신맛이 온몸을 훑고 지나감과 동시에 몸이 저절로 부르르 떨렸다. 달지 않고 신 케이크라니. 이건 아니었다. 정말 아니었다.

케이크를 슬그머니 밀어 두는 레슬리의 머리에 문득 사악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그 이야기 들으셨어요?”

케이크를 이용한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셀리스가 말을 이었다.

“오늘 제2황자께서 이 파티에 참석하신다고 해요.”

제2황자, 콘스텐 테윈 르카디우스. 아렌도의 약혼녀인 엘리 덕분에 황실의 일에는 늘 귀를 기울이던 스페라도 후작과 살면서도 몇 번 듣지 못한 이름이었다.

“타국으로 수학하러 갔다고 들었는데, 돌아오셨나요?”

위에 올라간 과일이 셨는지 셀리스도 인상을 찡그리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전에 돌아오셨다고 해요. 이게 첫 공식 행사고요. 소문을 듣기로는 아렌도 황자님과 전혀 다른 성격에, 사제가 되고 싶다고 하신다던데, 정말일까요?”

“저도 그렇게 들었어요.”

그나마 사람들에게 퍼져 있는 소문으로는, 콘스텐 황자는 성격이 유약한 편이라 황위를 견디지 못해 사제 쪽을 선택했다는 것이었다.

‘황제 폐하와 비슷하려나.’

새로운 케이크를 집어 든 레슬리는 포크로 케이크를 찍으며 눈을 깜빡였다.

“황제 폐하와 전혀 다른 성격이지 않나요?”

셀리스 역시 레슬리와 같은 케이크를 집어 들더니 볼이 빵빵해질 정도로 케이크를 입안에 넣었다.

“듣……기로는 황제 폐하는, 무심하시고 날카로……운 성격이라고 해요.”

케이크를 우물거리느라고 중간중간에 말이 끊기긴 했지만, 셀리스는 무사히 제가 하고 싶은 말을 전부 했다.

레슬리는 그 말에 포크를 들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부분의 귀족과 평민들에게 알려진 황제의 모습은 지금 셀리스가 말한 모습과 일치했다. 냉정하고 무심하며 날카로운 현 황제, 피스토레 자일스 르카디우스.

하지만 그의 본 성격은 어딘가 유약하고, 종종 눈물도 쏟으며 서류를 피해 도망 다니고 하루에 잠을 10시간 정도 자기를 기원하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보이는 건 몇몇 친구들 앞에서뿐이었다. 레슬리 역시 공작을 따라 몇 번 황제를 만났고, 피스토레는 그런 레슬리를 셀바토르 공녀가 아닌, 친구의 막내딸로 대해 줬기에 그 모습을 보았던 것이었다.

레슬리는 슬쩍 셀리스를 바라보았다. 오늘 처음으로 황제를 직접 뵙는다며, 셀리스는 어딘가 들뜬 얼굴로 새 케이크를 집어 들고 있었다.

‘어머니께 멱살 잡힌다고는 말하지 말아야지.’

레슬리는 애꿎은 케이크를 포크로 콕콕 찌르다가 대화 주제를 바꾸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그 초상화는 어디에다가 거셨어요?”

셀리스는 셀바토르 공작저에서 하룻밤을 묵는 영광과 동시에 엄청난 선물을 받았다. 사이레인에게서 공작의 초상화 한 점을 받은 것이다.

자신의 아내의 열렬한 추종자라는 걸 알자마자, 사이레인은 셀리스를 아주 귀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제 귀여운 딸의 첫 동성 친구에, 제 아내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거기다 틸레이얼 자작 부인의 친척으로 믿을 만한 사람이니, 사이레인은 자신이 아끼던 초상화를 직접 건넨 것이다.

‘제가 이런 걸 받아도 될까요?’

사이레인을 무서워하던 셀리스는 그때만큼은 두려움도 잊은 채, 사이레인과 시선을 맞췄다. 사이레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긋 웃었다. 셀리스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는 어딘가 동료 의식이 깃들어 있었다.

‘우리 아내님과 레슬리를 잘 부탁하네, 에펜타니 양.’

공작도 모르게 한 점을 선물해 준 거라 나중에 이마를 찰싹 맞긴 했지만, 그 이후로 셀리스는 사이레인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아, 그 초상화요.”

셀리스는 부끄럽다는 듯 잠시 주변을 살피더니 레슬리에게 가까이 와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일단 여관에 걸어 두었어요. 저택으로 돌아가면 가장 좋은 자리에 걸어 두기로 부모님과 약속했어요.”

“가장 좋은 자리에요?”

“네, 사실 저희 부모님도 공작님의 열렬한 추종자거든요. 그래서 같이 보면서 매일 벅찬 감동을 하고 있어요.”

어머니의 초상화라면 그럴 만하지. 레슬리는 포크를 입에 문 채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난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셀리스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셀리스 양, 그건…… 괜찮으세요? 그…… 기절…….”

셀리스는 공작을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하지 않았던가. 셀바토르 공작 앞에서 두 번이나 기절해 버린 바람에 정작 공작과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레슬리의 물음에 셀리스는 어딘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맑게 웃었다.

“사실은요! 이제 다섯 번 중에 두 번 정도밖에 기절하지 않아요!”

그 뒤로 초상화를 보고 더 기절한 거야? 레슬리의 눈이 동그래지는 걸 보지 못한 셀리스는 더 당당하게 외쳤다.

“조금 이따가는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거예요. 두고 보세요! 오늘은 반드시 공작님과 10분 이상 대화를 나누겠어요!”

어쩐지 또 기절할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우지 못한 채 레슬리는 방긋 웃었다.

“네, 셀리스 양은 반드시 성공할 거예요.”

두 사람은 그 뒤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된 대화는 셀바토르 공작과 오늘 모습을 드러내는 제2황자에 관한 것이었다.

이야기는 에펜타니 백작 부부를 셀바토르 공작에게 소개해 주기 위해서 끝을 맺었다.

“저희 딸에게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텐 벤트 에펜타니 백작입니다. 그리고 제 아내인 르엘 제니엔 에펜타니입니다.”

셀리스를 똑 닮은 에펜타니 백작은 많이 긴장한 듯 연신 흐르는 땀을 훔치며 간신히 인사를 마쳤다.

“아셀라 벤칸 셀바토르입니다. 뒤는 내 남편 사이레인 델파 셀바토르지요.”

“잘 알고 있습니다. 두 분의 혼란의 시대 때 활약상을 전부 듣고 있었으니까요. 두 전쟁 영웅을 뵙게 되다니 이렇게 기쁜 일이…….”

이야기는 화기애애하게 그리고 오랫동안 진행되었다. 슬쩍 듣기로는 약초 이야기가 오고 가는 것이, 사업 이야기까지 대화가 퍼져 나간 듯 보였다. 제 전공의 이야기가 나오자 백작과 백작 부인의 얼굴에는 활기가 돌고 있었다.

셀리스는 흥분해 목소리가 높아진 에펜타니 백작을 보며 볼을 붉혔다.

“아버지도 참. 그런데 셀바토르 공작가에서 약초에 흥미를 보이시는지는 몰랐어요. 공작저에서 하는 사업 중에서는 약초에 관련된 게 없을 텐데…….”

셀리스의 말에 레슬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셀리스 양이 말해 준 덕분에 관심을 갖게 된 거 아닐까요.”

레슬리가 작게 웃으며 말하자 셀리스의 볼이 다시 붉어졌다. 그나마 공작저에서 공작과 간신히 나눈 몇 마디는 공작에 관한 이야기와 약초 이야기가 전부였기 때문이었다.

“아.”

부끄러움으로 물들어 있던 셀리스가 갑자기 정색했다. 에펜타니 백작 부부 뒤에 서 있던 소년과 눈이 마주친 탓이었다.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두 사람이 동시에 헛구역질을 하며 얼굴을 구겼다.

“저 사람이 제 오라버니예요.”

못마땅한 듯 소년을 바라보며 셀리스는 말을 이었다.

“하필 오라버니가 내 파트너라니…….”

휴우우. 셀리스의 한숨이 길어졌다. 그걸 발견한 소년은 셀리스를 보며 자신도 못마땅하다는 듯 얼굴을 구겼고, 셀리스 역시 더욱 무시무시한 얼굴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자신의 오라버니라도 되는 양, 애꿎은 케이크를 포크로 내리찍었다.

“그런데 레슬리 양의 파트너는 누구이신가요?”

한참을 케이크를 전투적으로 씹어 삼키던 셀리스가 고개를 들고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아, 콘라드 경이에요.”

그러고 보니 아이테라 대공가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콘라드가 보내온 마지막 편지에는 입장은 아버지와 하게 되었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그래도 어머니 몸이 많이 나아졌다며 다음에는 소개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적인 이야기도.

‘많이 편찮으시다고 했었지.’

하지만 그 이야기 외에 더 다른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스웰라 대공비 이야기만 나오면 콘라드는 어딘가 슬픈 표정을 지었으니까.

생각에 빠져 있던 레슬리는 누군가와 부딪혔다.

“죄송합니다. 다치지는 않으셨습니까?”

짙은 갈색 머리에 푸른 눈동자의 사람은 당황한 듯 레슬리의 안색을 살폈다.

“괜찮아요.”

“제가 음료를 들고 있어서…….”

레슬리는 당황해하는 사람을 진정시켰다. 하지만 그 사람은 자신이 마시던 음료 잔을 옆 테이블에 놓아둔 채 드레스 자락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사이 레슬리는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낯이 익어.’

분명 오늘 처음 보는 사람인데, 어디서 마주친 듯 익숙한 얼굴이었다. 콘라드와 비슷한 나이대로 이제 갓 성인이 된 듯 보였다.

‘마법사의 저택인가? 아니면 린체 기사단을 가다가 만난 사람?’

아니면 신전, 대기도회 때 마주친 사람일까. 그나마 자신이 사람을 만날 만한 장소를 떠올리며 끙끙거리는데, 옷자락을 다 살핀 남자가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다행입니다. 음료가 묻으신 것 같진 않아요. 예쁜 드레스인데, 정말 다행입니다.”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쉰 남자는 레슬리와 시선을 마주쳤고 남자의 푸른 눈이 동그래지기 시작했다. 옷자락에 음료가 쏟아지지 않았을까, 온통 거기에만 신경을 쓰다가 이제야 제대로 레슬리의 얼굴을 본 듯했다.

“아, 아아!”

그리고 남자는 대번에 레슬리를 알아보았다.

“셀바토르 공녀님이시군요!”

남자의 말에 이번에는 레슬리의 눈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 레슬리를 알아보는 건 익숙한 일이었다. 그만큼 레슬리는 르카디우스 제국에서 유명 인사였으니까.

스페라도 후작가에서 학대받다가 셀바토르 공작가의 사랑받는 공녀가 된 레슬리의 이야기는 마치 동화처럼 만들어져 평민들 사이에서도 유명했다. 거기에 이번엔 아라벨라까지 되어 그간 잠시 가라앉았던 유명세가 또다시 서서히 따르고 있었다. 특히 귀한 은발은 사람들이 레슬리를 알아보는 데 많이 기여했다.

그래서 보통은 처음 보는 사람이 아무리 자신의 이름을 외쳐도 놀라지 않았으나, 이번에 레슬리의 눈이 동그래진 이유는 남자의 목소리에서 친근함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저를 아시나요?”

레슬리의 물음에 남자의 눈이 다시 커지더니 실수했다는 듯 시선을 이리저리 돌렸다.

“아, 그게 말이죠…….”

남자가 주저하자, 옆에서 보다 못한 셀리스가 앞으로 나서며 레슬리와 남자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리고 무섭게 남자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 시선에 남자는 주춤거리더니, 눈을 또르르 굴렸다.

“그럼 이만 다음에 뵙겠습니다. 만나게 되어 진심으로 반가웠습니다, 두 분.”

그러고는 어설픈 인사를 남긴 채 말릴 틈도 없이 순식간에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셀리스가 남자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며 눈을 굴렸다.

“누구였을까요? 누구든 이상한 사람이야……. 아는 분은 아니었죠?”

레슬리는 셀리스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는 사람이에요.”

“어느 가문의 사람이었을까요.”

잠시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약속이라도 한 듯 먹고 싶었던 케이크 몇 조각을 들었다. 그리고 아직도 약초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공작과 백작 부부 옆으로 찰싹 붙었다.

“이야기는 다 끝난 거야?”

셀바토르 공작의 뒤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베스라온이 묻자 레슬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한 사람을 봤어요.”

레슬리의 말에 베스라온과 하르트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상한 사람?”

“네, 짙은 갈색 머리에 푸른 눈인데…… 갈색 머리와 푸른 눈은 흔한 편이잖아요. 그래서 꼭 어디서 본 것 같았는데…….”

레슬리의 이야기가 끝나기도 전에 시종의 외침이 파티장을 뒤덮었다.

“메데이아 시엔 르카디우스 태후 폐하, 아렌도 페레 르카디우스 황자님, 그리고 약혼녀이신 엘리 데아른 스페라도 양께서 입장하십니다!”

레슬리는 들어오는 사람들을 보며 눈을 찡그렸다. 마주칠 걸 알고 있었는데도 직접 얼굴을 보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레슬리의 기분과는 다르게 오늘 엘리는 예전에 스페라도 후작가에서 봤던 엘리와 비슷해 보였다. 그녀는 아름답고 자신감 넘치고, 모든 게 다 자신의 아래라 믿던 오만한 소녀의 얼굴을 한 채 고개를 들고 당당하게 서 있었다.

오늘 엘리가 저렇게 자존심을 되찾은 건 옆에 서 있는 메데이아와 아렌도, 두 사람 때문이겠지.

아렌도를 파트너로 끼고, 엘리는 제 주변을 감싸는 소곤거림 따윈 들리지 않는다는 듯 턱을 들고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기대에 찬 눈빛이었다.

메데이아와 아렌도는 황족, 유일하게 셀바토르 공작보다 높은 황족이다. 아무리 사람들에게는 메데이아가 황제의 힘에 밀려 황실 구석에서 근근이 살아가는 가련한 태후 정도로 비칠지라도, 그녀는 황족이었다.

엘리는 셀바토르 공작과 레슬리가 메데이아에게 고개를 숙이는 그 순간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걸 위해서인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자신의 파트너인 아렌도보다 메데이아에게 붙어 있었다.

“셀바토르 공작.”

하지만 엘리의 기대는 산산이 조각났다. 메데이아가 먼저 셀바토르 공작에게 인사를 걸었으니까.

“오랜만에 보는군요. 아니지, 신전에서 스치듯 얼굴은 봤으니 그리 오랜만은 아니군요.”

그녀의 표정과 행동 그리고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친근감이 넘쳐흘렀다.

그 행동에 엘리의 표정은 순식간에 일그러졌고, 아렌도는 눈을 찡그렸으며, 레슬리는 놀라 자신의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하필이면 가면이 있는 쪽으로 서 있어 셀바토르 공작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저 옷에 맞춰 바꿔 쓴, 차디찬 짙은 회색의 가면만 보였을 뿐이었다.

“그렇지요.”

화답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가면보다 차가웠다. 한쪽 입꼬리가 올라간 공작은 태후를 보며 말을 이었다.

“시누스턴 신전에서 잠시 뵈었었죠. 그때는 제대로 인사를 드리지 못해 신경이 쓰였습니다.”

“사랑스러운 공녀께서 큰일을 겪었으니 충분히 이해합니다, 공작.”

메데이아는 생긋 웃더니, 이번엔 시선을 가장 뒤편에 있던 하르트에게 옮겼다. 그녀의 시선이 셀바토르 공작가의 제복을 훑다가 하트르의 얼굴에서 멈췄다.

“혹시 뒤에 계신 분은 이트바나 출신인가요?”

“예, 셀바토르 기사단 단장입니다.”

공작의 시선이 닿자 하르트가 절도 있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셀바토르 공작가의 기사단장, 하르트 로엔 베레비엔입니다.”

“확실히 억양을 들으니 알겠군요. 이트바나 사람이 확실해요. 어느 지방의 사람이었지요? 귀족 출신은 아니었을 거예요. 그렇지 않나요? 처음 들어 보는 성이거든요.”

이트바나는 작은 나라로, 귀족 수가 르카디우스의 귀족 수보다 훨씬 적었다. 거기다 미래의 왕비로서 키워진 메데이아는 이트바나 왕국의 모든 귀족을 알고 있었다. 그중에 베레비엔이라는 성은 없었다.

“예, 그렌타 사냥꾼 출신입니다. 그전까지 성은 없었고 셀바토르 공작가로 들어오며 새 성을 받았습니다.”

“역시!”

자신이 맞았다는 듯 메데이아는 화사하게 웃었다. 그 얼굴은 마치 어린아이가 악의 없이 개미를 짓누르는 모습과 똑같아 보였다.

타국 출신에, 귀족의 피도 그나마 인정받는 상인 계급도 아닌 최하위 계급의 사냥꾼 출신. 콧대 높은 귀족들 눈에 하르트가 어떻게 보일지는 자명한 일이었다. 실제로 하르트 주변에 있던 귀족들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심지어 몇몇은 뒤로 한 발짝 물러서기까지 했다.

아마도 공작이 데려온 사람이 아니었다면 하르트는 이 자리에 서 있기도 힘들었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런 모욕 속에서도 하르트는 익숙한 듯 덤덤하게 서 있었다.

“사냥꾼 출신이라……. 검과 갑옷을 훔쳐다 파는 건 아닐지 모르겠네. 가축은 잘 잡으려나?”

엘리가 작게 키득거리며 혼잣말을 흘렸다. 자기 나름대로는 혼잣말이었다지만, 그건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에게도 들릴 정도였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계속해서 공작에게 말을 거는 메데이아와 비웃듯 이야기를 가볍게 쳐 내는 셀바토르 공작에게는 들리지 않은 모양이었지만, 어쩌다 엘리 근처에 서 있던 레슬리와 하르트에게는 똑똑히 들렸다. 실제로 하르트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

레슬리가 엘리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스페라도 영애는 말을 조심하는 법을 배우는 게 좋겠군요.”

그 말에 엘리는 놀란 듯 레슬리를 바라보다 이내 눈을 찡그리며 어딘가 뒤틀린 미소를 지었다.

“못 할 말을 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실제로 사냥꾼들이 그렇지요. 밭과 마을을 망쳐 두는 동물을 잡기 위해 사냥꾼을 고용하면, 그들이 묵던 헛간에는 먼지 하나 남지 않았다는 걸 공녀님도 알고 계실 텐데요?”

엘리는 화려한 명화가 그려진 부채를 팔랑거리며 작게 조소했다.

실제로 스페라도 후작 영지에서 몇 번 일어났던 일이었다. 사람을 해치거나 밭을 엉망으로 만드는 동물들을 잡기 위해 귀족들은 주기적으로 사냥꾼을 고용했다. 몬스터 정도가 아니면 기사단을 움직일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렇게 고용한 사냥꾼들 숙소는 항상 텅 비어 있었다며, 후작은 매번 낮게 혀를 찼다. 그리고 늘 ‘피가 천한 것들은 어쩔 수가 없다.’라며 그들을 비웃었다.

“그건 스페라도 후작이 사냥꾼들에게 제값을 치르지 않아서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이지요.”

하지만 그 뒷면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후작은 사냥꾼을 말도 안 되는 값에 고용한 데다가 사냥한 동물의 고기와 가죽 값의 정확히 절반을 가져갔다. 자신의 영지에서 태어나고 자란 값이라고 말하면서 억지로 뜯어낸 것이었다.

거기다 대금마저 제대로 지급하지 않고 차일피일 미루는 탓에 사냥꾼들은 숙소 물건에 손을 댔던 것이었다.

“무엇보다 지금 내뱉은 말을 책임질 수 있나요, 스페라도 영애? 영애는 셀바토르 공작가의 기사단장을 모욕한 겁니다.”

레슬리가 섬뜩할 정도로 차가워진 눈으로 엘리를 바라보자, 그제야 엘리가 조금 몸을 낮췄다.

제 생각이 틀렸다는 이유보다는 지금 소란을 피우면 메데이아나 아렌도에게 밉보일까 걱정되는 마음에서 나온 생각이었다.

“……그 출신에 대한 당연한 이야길 한 겁니다.”

“출신이 그 사람에 대한 모든 걸 말해 주지 않지요. 예를 들면 고귀한 피를 타고났으면서 가장 천한 짓을 하는 사람이 파티장에도 있지 않습니까.”

“…….”

용케도 제 말인 걸 알아들은 엘리가 이를 갈며 레슬리를 노려보았다.

“하르트 경에게 사과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를 어떻게 할지 기대해. 레슬리는 목소리를 내지 않고 입술을 움직였고 그걸 읽은 엘리가 눈을 찡그렸다.

‘네가 나를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해칠 수 있다는 말처럼 들리네.’

잠시 고민하는 듯싶더니, 제 옆에 있는 아렌도와 메데이아 그리고 파티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을 믿고 막 나가기로 한 모양이었다.

‘못 할 것 같아?’

레슬리 역시 눈을 휘며 웃었다. 그리고 다시 목소리를 내지 않고 입만을 움직였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이제 들은 게 있을 텐데, 엘리.’

그 말에 엘리의 표정이 굳었다. 무언가를 떠올려 보려는 듯 눈동자가 불안하게 움직였다.

‘듣지 못한 건가?’

자신이 어둠으로 거대 늑대를 죽였다는 걸, 이미 엘리가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엘리의 표정을 보니 엘리는 그 사실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불안하고, 모르는 일에 직면했을 때 왼쪽 눈가가 파르르 떨리는 버릇이 그걸 여실히 말해 주었다.

‘아하. 아직 듣지 못했구나.’

레슬리는 엘리를 흔들어 보기로 했다. 데비엔이 계속해서 자신과 어머니의 사이를 갈라 두려고 했듯이, 자신도 엘리와 메데이아의 사이를 틀어 둘 수 있을 것이다.

‘메데이아 태후께서는 딱히 너에게 아무 말도 해 주지 않았구나. 불쌍하게도.’

레슬리는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명백한 조소를 머금었다. 예전에 엘리가 스페라도 후작가에 갇혀 있는 레슬리를 보며 웃었듯, 불쌍하고 가련한 멍청한 제 혈육을 보는 얼굴을 그대로 따라 해 주었다.

“너!”

결국 엘리가 참다못해 목소리를 꺼냈다. 시선이 순식간에 엘리에게 쏠렸다. 엘리는 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깨닫고 입을 도로 다물었다.

“드디어 하르트 경에게 사과하시려는 건가요?”

레슬리의 목소리가 높아질수록 시선은 더 몰렸고, 엘리의 얼굴은 수치심에 붉어지고 있었다.

“아가씨.”

그리고 그런 레슬리를 말린 건 하르트였다.

“저는 정말로 괜찮습니다.”

하르트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엘리의 사과 따윈 필요 없다는 얼굴로 자신을 보는 하르트를 바라보다가 레슬리는 작게 숨을 흘렸다.

“우리 기사단장의 너그러움에 고마워하세요, 스페라도 영애. 그리고 진심 어린 충고를 하나 하자면, 그 무지를 부끄러워하는 법을 배우는 게 좋을 거예요. 무척이나 힘들겠지만 말이에요.”

그리고 일부러 엘리에게 작게 속삭였다.

“조심해. 언제 쓰임을 다한 인형처럼 버려질지 모르잖아?”

“……뭐?”

엘리의 눈동자가 커지든 말든 레슬리는 환하게 웃었다. 예전에 엘리가 이런 식으로 자신을 흔들려고 했던 것처럼.

“뭐, 금방이겠지만. 조금이나마 남은 황궁 생활을 즐기기 바라.”

언니.

레슬리는 눈을 휘며 언니라고 덧붙였다. 엘리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그녀는 손을 뻗어 레슬리의 팔을 잡으려고 했지만 오히려 지나가는 시종에게 부딪치고 말았고, 시종이 들고 있던 음식들이 바닥에 쏟아지며 큰 소란이 일어났다. 그제야 공작과 메데이아의 시선이 엘리에게 닿았다.

레슬리는 베스라온을 한 번 보고 정원을 한 번 바라보았다. 여기 있어 봤자 엘리와 메데이아가 계속 시비를 걸 테니 잠시 자리를 비우겠다는 뜻이었다. 베스라온이 고개를 끄덕이자 레슬리는 정원 쪽으로 걸음을 옮겼고, 하르트는 자연스럽게 그 뒤를 따라갔다.

모든 사람이 파티장에 있는 듯 정원은 인적이 드물었다.

‘소란이 가라앉으면 들어가야지.’

저 자리에 계속 남아 있으면 엘리가 계속해서 하르트와 자신을 걸고넘어질 것이다. 자신은 이미 그 성질머리에 익숙해졌다지만 하르트는 아니었다.

아까 슬쩍 보니 드레스에 음식이 튀었던데 엘리 성격상 옷을 갈아입으러 자리를 비울 게 분명했다. 그러니 잠시만 기다리면 소란은 가라앉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아가씨.”

어딘가 후련해 보이는 얼굴의 하르트였다. 레슬리는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늘 하르트 경이 저를 지켜 주고 지도해 줬으니 오늘만큼은 제가 지켜 줄게요, 경!”

레슬리는 자신만 믿으라는 듯 우쭐거렸다. 비록 발을 밟아 주진 못했지만 저 정도면 자신에게도, 그리고 하르트에게도 나름 통쾌한 일이었다.

“아하하.”

하르트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분명 여기가 파티장이 아니었더라면 연무장에서 웃듯, 큰 목소리로 쩌렁쩌렁하게 웃었을 게 뻔했다.

“감사합니다, 아가씨. 그럼 오늘 실례를 좀 하도록 하지요.”

눈물까지 고였는지 손가락으로 제 눈가를 훔치며 하르트가 말하자, 레슬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작게 속삭였다.

“이것 봐요, 하르트 경. 사실 하르트 경을 놀리는 사람이 있으면 발을 밟아 버리려고 신발도 높은 거로 신고 왔어요.”

그러면서 레슬리는 슬쩍 제 신발을 보여 주었다.

“그래서 오늘따라 키가 커 보이셨군요.”

짓궂은 하르트의 놀림에 레슬리가 슬쩍 실수로 밟는 척하자 하르트가 잽싸게 발을 뒤로 뺐다. 과연 셀바토르 공작가의 기사단장다운 재빠른 행동이었다.

“셀바토르 영애.”

잠시 하르트와 투덕거리며 장난치는데 메데이아와 엘리 사이에서 빠져나온 아렌도가 레슬리를 불렀다. 레슬리가 아렌도를 바라보자, 아렌도는 새파랗게 푸른 눈을 빛내며 레슬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파트너가 안 계신 것 같은데, 제가 그 자리를 대신해도 될까요?”

아렌도의 말을 들은 하르트가 레슬리에게 작게 속닥거렸다.

“저 말고 저분 발을 밟으셔야겠습니다, 아가씨.”

조금 전까지 웃으며 하르트와 장난을 치던 레슬리는 순식간에 가라앉은 눈으로 아렌도를 바라보았다.

“황자님의 파트너로는 스페라도 영애가 계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녀는 몸이 좋지 않은 모양이더군요. 대기실에서 쉰다고 합니다.”

아렌도는 옅은 웃음을 머금으며 손을 내밀었다.

“부디 가련한 저를 구원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아라벨라님.”

붉은색과 황금색이 어우러진 제복을 단정하게 입은 아렌도의 모습은 정말 말 그대로 동화 속 왕자님의 모습이었다.

‘엘리와 잘 어울렸었더랬지.’

겉모습만큼은 흠잡을 데 없는 엘리와 아렌도의 조합은 황자를 노리던 다른 귀족들마저 인정할 정도로 완벽했다. 그래서 예전엔 아주 잠시나마 그걸 동경한 적도 있었다. 그때의 자신이었다면 이 손을 잡았을까?

“죄송합니다, 황자님. 저는 제 파트너를 기다리는 중입니다.”

아니,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는 저 자신의 위치를 너무 잘 알아서 저 손을 잡지 않았을 것이고, 지금 역시 반대의 의미로 레슬리는 자신의 위치를 잘 알고 있었다.

“춤은 다른 분과 춰 주시길.”

평생 잡을 일 없는 손에 시선조차 주지 않으며 레슬리는 보란 듯 화사하게 웃었다. 쭉 뻗은 아렌도의 눈가가 움찔거렸다. 하지만 그는 쉽게 제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파트너가 따로 계셨군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누군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레슬리가 대답할 틈도 없이 아렌도는 제멋대로 추리를 시작했다.

“셀바토르 마법사님은 자리에 계시지 않으니 아니신 것 같고……. 셀바토르 경인가요?”

“제 파트너가 제 오라버니들이든 아니든 그건 황자님께서 신경 쓰실 일이 아닙니다.”

레슬리는 날카롭게 외쳤다. 왜 황자가 자신의 파트너를 신경 쓴다는 말인가. 그가 신경 써야 할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지금쯤 메데이아를 향한 의심의 싹을 서서히 틔우고 있을 엘리였다.

하지만 아렌도는 레슬리의 냉담한 태도에도 여전히 웃음을 머금은 채 대답했다.

“신경을 써야지요. 황가의 충신 중의 충신, 셀바토르 공작가의 공녀님이 아닙니까. 대대로 황가에 충성을 바쳐 오는 가문인데, 주인인 제가 신경을 안 쓰면 누가 공녀님을 신경 쓴단 말입니까.”

주인이라니. 거기다 묘하게 아니, 아렌도는 대놓고 셀바토르 공작가를 낮잡아 보고 있었다. 레슬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실수를 저지르고 계시는군요, 황자님.”

레슬리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자신도 놀랄 정도로 차가웠다.

“아직 황자님께서는 후계자로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황제가 아직 자신의 후계를 정하지 않았다. 가장 가능성이 큰 이가 아렌도라고는 하나, 황태자가 된 것은 아니었다. 그런 상태에서 자신을 귀족의 주인이라고 칭한 것은 굉장히 위험한 발언이었다.

“그리고 우리 셀바토르 공작가의 주인은 셀바토르일 뿐, 그 누구도 우리의 주인이 되지 못합니다.”

선대 황제들과 셀바토르 공작가가 가장 많이 반목했던 이유가 이것이었다.

셀바토르는 오랜 시간 동안 길들여지지 않았다. 그걸 인정하지 못하고 공작가를 억지로 굴복시키려는 황제들과는 첨예하게 대립했으며, 그들을 건드리지 않는 황제들과는 나쁘지 않은 관계를 유지했다. 그리고 공작가를 인정하는 소수의 황제와는 나름 괜찮은 관계를 유지했다.

그 소수의 황제가 바로 현 황제인 피스토레 황제였다.

레슬리는 무조건 황제라고 고개를 숙이는 다른 가문들과 셀바토르 공작가는 다르다는 사실을 이제 잘 알고 있었다.

레슬리의 날카로운 말에 아렌도의 푸른 눈이 잠시 흔들리더니 이내 웃음을 되찾았다. 하지만 아까와는 다르게 어딘가 뒤틀린 웃음이었다.

“말을 잘하시는군요.”

가짜이시면서. 분명 말하지는 않았지만, 뒷말이 귓가에 들렸다.

“그게 무슨……!”

그 말에 격분한 건 레슬리보다는 뒤에서 듣고 있던 하르트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잘 참고 있던 그답지 않게 흥분해 앞으로 나서려고 했다. 하지만 레슬리가 팔을 뻗어 그를 막았다.

“저는 레슬리 슈야 셀바토르입니다. 셀바토르 공작이신 어머니께서는 저에게 이 이름을 주셨고, 그건 다른 사람이 결정할 일이 아니지요. 아무리 고귀한 피라고 해도 말이죠.”

황족이든 아니든, 자신은 셀바토르 공작가의 일원이며 그 사실에 흔들리지 않겠다는 레슬리의 말에 아렌도는 다시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불과 4년 전이었다. 4년 전만 해도 바닥을 기던 아이가 이젠 자신과 시선을 맞추며 어딘가 거슬리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래, 제 동생이 이런 표정을 자주 지었지. 자신은 끝까지 꺾이지 않겠다는 표정. 제 아버지와 닮은 표정이었다. 그래서 더욱 짓밟아 보고, 가져 보고, 주지 않겠다면 빼앗아 보고 싶은 얼굴이었다.

왜 아버지는, 왜.

“생각보다 많이 변하셨군요. 저는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었습니다만…….”

거기까지 말한 아렌도는 손을 뻗었다. 레슬리의 의사 따윈 무시하는 행동이었다.

“그 생각을 바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셀바토르 공녀님.”

레슬리가 그 손을 쳐 내기도 전에 누군가가 아렌도의 팔을 잡았고 그를 제지했다.

“감사합니다, 황자님.”

아렌도가 고개를 돌리자, 흐트러짐 없는 옷차림을 한 콘라드가 그를 바라보았다.

검은색에 가까운 짙은 회색 머리는 반만 뒤로 넘기고, 금색으로 수가 놓인 검은 재킷 안에는 짙은 회색빛의 투 버튼 조끼를 입고 있었다. 셔츠에는 화려한 문양의 카라링스를 달고 있었는데, 커프스와 한 세트인 듯, 라일락빛 보석이 빛나고 있었다.

‘와…….’

늘 입던 성기사단 제복이 아니라서 그럴까. 어쩐지 너무 달라 보여 레슬리는 잠시 화도 잊고 콘라드를 바라보았다.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왕자님 같아 보였다.

잠시 레슬리와 시선을 마주친 콘라드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화사하게 웃어 보였다.

“제가 없는 사이 제 파트너의 대화 상대가 되어 주고 계셨군요.”

여전히 그의 팔을 움켜잡은 채 콘라드는 여느 때와 같은 밝은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아하, 아우님의 파트너였군.”

아렌도는 그런 콘라드의 눈동자를 지척에서 바라보며 쭉 찢어진 눈을 휘었다. 그의 푸른빛 눈동자가 기억을 더듬듯 살짝 양옆으로 움직였다.

“그래, 셀바토르 마법사님과 인연이 있었지.”

“예, 덕분에 레슬리 양과는 친분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셀바토르 공녀라고 예의를 차려 말하던 콘라드는 이번에 레슬리라고 이름을 부르며 더욱 밝게 웃었다. 하지만 황금빛 눈동자는 전혀 웃음을 띠지 않은 채 아렌도를 응시했다.

“흐음. 내가 마법사님과 친분이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안 그런가, 아우님?”

“그건 모르는 일이지요, 형님.”

아렌도가 말하는 아우님의 호칭에 따라 콘라드 역시 형님이라는, 친근하게 들리는 호칭으로 그를 불렀다. 그러나 목소리는 더욱 가라앉아 그 호칭은 차갑게 들렸다.

“실제로 먼저 레슬리 양을 만난 건 제가 아니라 형님이시니까요.”

“그래, 그렇지.”

아렌도는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뒤로 물러났고 그제야 콘라드 역시 꽉 잡고 있던 아렌도의 팔을 놔주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공녀님.”

예의 바른 표정으로 돌아온 아렌도가 잡힌 팔목을 매만지며 나른하게 웃었다.

“그럼 다음 만남을 기대합니다.”

가벼운 인사를 남기고 아렌도는 자리를 떴다. 그제야 레슬리는 작게 숨을 내쉬다가 발을 쾅 하고 굴렀다. 이렇게 콱! 발을 밟아 줘야 했는데!

“무례한 사람!”

종종 스페라도 저택에 엘리를 보러 왔을 때는 마주치는 일이 거의 없어서 몰랐다지만, 아렌도의 성격은 확실히 레슬리의 기분을 더럽혔다. 왜 선대 셀바토르 공작가의 사람들이 황족을 싫어했는지 이해가 가는 성격이었다.

으으, 모가지를 똑 따 버리고 싶다. 멱살을 잡아 버리거나.

레슬리는 눈을 질끈 감고 머리를 흔들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엘리와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콘라드가 레슬리를 조심스레 불렀다.

“레슬리 양. 괜찮으신가요?”

그 물음에 레슬리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볼이 붉어졌지만 아직도 아렌도가 짜증 나, 레슬리는 괜스레 제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죄송합니다. 제가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이런 일을 겪으셨군요.”

자신의 잘못도 아닌데 사과하는 콘라드를 보며 레슬리는 고개를 저었다. 이게 어떻게 콘라드의 잘못이란 말인가, 아렌도의 잘못이지.

‘어떻게 그런 황제 폐하 밑에서 저런 자식이 태어난 걸까.’

몇 번 뵙지는 않았지만, 사석에서 친구로 만난 황제는 동화책에서 보던 이웃집 아저씨처럼 친근했다. 사이레인과도 잘 어울렸으며 가끔 공작의 말에는 기가 죽은 듯 어깨를 움츠리기도 했다.

‘그런데 공녀님은 조져 버린다는 말은 안 하는 건가?’

그 눈치 없는 질문으로 화기애애하던 자리는 순식간에 파탄이 났지만.

“그런데 제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아신 건가요?”

레슬리는 애써 더러운 기분을 털어 내고는 콘라드에게 물었다.

지금 레슬리가 있는 곳은 파티장 밖의 넓은 정원 안이라, 지나다니는 사람이 적은 편이었다. 파티가 시작되고 본격적으로 흥이 오르면 이곳도 꽉 차겠지만, 지금은 다들 홀 안에 있었다.

“아, 도움을 준 분이 계셨지요.”

콘라드의 말에 갑자기 덤불이 부스럭거리더니, 그 안에서 사람이 튀어나왔다. 얼마나 덤불 속에 숨어 있었는지 머리는 마구잡이로 헝클어져 있었고, 거기에 나뭇잎이 꽂혀 있었다.

“아까 파티장에서 만난…….”

레슬리는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동그랗게 떴다. 파티장에서는 정신이 없어 몰랐는데 아렌도를 만나고, 황제를 떠올리다 보니 자연스레 그가 누군지 깨달았다.

남자는 머쓱한 얼굴로 제 머리에 붙은 나뭇잎을 후드득 털어 내고는 손을 탁탁 털더니 레슬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레슬리는 잠시 그 손을 바라보았다. 아까 아렌도가 내민, 하얀 장갑이 끼워진 손과 털다 남은 흙과 나뭇잎이 붙어 있는 손이 대비되었다.

“안녕하세요, 콘스텐 테윈 르카디우스입니다. 방금 만난 아렌도 형님의 동생이죠.”

레슬리가 손을 잡자 콘스텐은 악수를 하며 씩 웃어 보였다.

“콘라드와 나름 친구죠.”

“나름.”

뒤에서 콘라드가 머리를 까딱이며 말하자, 콘스텐은 다시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사실 저놈이랑 저랑 더 형제 같지 않나요? 이름도 비슷하고. 콘스텐, 콘라드.”

“비, 비슷하네요.”

레슬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콘스텐은 제 턱을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아버지의 치명적인 단점이죠. 작명 감각이 없는 거. 형님도 사실 셀바토르 공작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거든요.”

“어머니의 이름이요?”

“네, 아셀라, 아렌도. 비슷하지 않나요? 아버지 말로는 그 사람을 닮으라는 의미로 지었다던데……. 내가 보기에는 그냥 감각 부족이에요.”

콘스텐은 어깨를 으쓱하면서 말을 이었다.

“나는 콘라드와 비슷하게 태어난 인연으로 이름을 비슷하게 지었다는데……. 더더욱 작명 감각이 부족해 보이지 않나요?”

“제 경우는 운이 없었죠. 어쩌다 같은 해에 태어나선.”

콘라드까지 말을 거들었다.

레슬리는 현 상황을 보면서 눈을 깜빡거렸다. 두 사람이 친했구나. 어쩐지 신기해 보였다.

“그럼 황자님께서 아이테라 경에게 아가씨의 위치를 알려 주신 겁니까?”

레슬리 뒤에 서 있던 하르트의 물음에 콘스텐은 제 머리를 쓸어 올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렌도 형님이 셀바토르 공녀님의 뒤를 따라가는 걸 보고 안 되겠다 싶어서요. 그…… 형님은 조금 거친 면이 있어서……. 자기 위주로 돌아가는 면이 좀 있으시죠.”

말을 하며 눈을 찡그리는 모양새를 보니 콘스텐도 아렌도의 성격이 크게 마음에 들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뭐, 하여튼! 무사히 재회를 도왔으니, 슬슬 파티장으로 돌아갈까요?”

콘스텐은 일부러 더 밝은 목소리로 외쳤다. 그 말에 하르트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가시죠, 아가씨. 분명 다른 분들께서 찾고 계실 겁니다.”

오래 자리를 비운 건 아니었지만, 베스라온에게만 눈짓으로 알렸기에 슬슬 자신을 찾고 있을 게 분명했다. 레슬리는 순순히 두 사람의 뒤를 따르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고 보니 콘라드에게 이야기해 줘야 할 비밀이 있었다.

‘여기서 이야기해야 하나?’

레슬리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이야기하기에는 실내 파티장보다는 이곳이 더 적합할 듯 보였다. 조용하고, 인적이 드문 정원. 거기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은밀한 곳에 긴 벤치도 놓여 있었다.

결정한 레슬리는 파티장으로 향하는 콘라드의 팔을 잡고 시선을 맞췄다.

“콘라드 경. 저에게 시간을 좀 내주세요.”

“이야기…….”

콘라드는 생각을 정리하듯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느긋한 표정에 레슬리는 실수로 콘라드의 팔을 잡고 있다는 걸 조금 늦게 알아차렸다.

이상하다. 분명 닿았는데 콘라드의 얼굴빛은 변하지 않고 있었다. 안 되는데, 이러면…….

‘같이 못 놀게 되잖아.’

같이 수도의 맛집을 찾아다니고, 찻집에 앉아 이야기를 하고, 산책로를 걷지 못하나? 그간 레슬리가 콘라드와 같이 다녔던 게 여성과의 접촉에 익숙하지 않은 콘라드와 훈련을 하기 위함이었으니까.

레슬리가 불안해하고 있는데, 콘라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까요, 그럼.”

어딘가 짐짓 여유로운 모습이었지만,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귀는 붉었다. 그건 안타깝게도 레슬리에게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을 뒤에서 보고 있던 하르트는 얼굴을 찡그렸고, 황자는 알고 있었다는 듯 씩 웃었다.

“그럼 나는 먼저 들어가겠네.”

콘라드의 어깨를 툭 치더니 황자는 그대로 뒤를 돌아 파티장으로 돌아갔다.

“아가씨, 저는 호위로 있는 것이니 여기에 같이 남겠습니다.”

하르트의 말에 레슬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뒤꿈치를 들고 하르트에게 속닥거렸다.

“너무 멀리 가지는 마세요. 이상한 사람이 오면 제가 지켜 드릴 수가 없잖아요.”

그 말에 하르트가 입술을 올리며 씩 웃었다.

“네, 아가씨께서 연약한 저를 지켜 주실 수 있게 근처에 있겠습니다.”

레슬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옆을 지나쳐 정원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하르트는 콘라드가 자신의 옆을 지나쳐 갈 때 그를 보며 생긋 웃었다. 콘라드는 그 시선을 피하며 레슬리의 옆에 앉았고, 하르트는 적당히 거리가 떨어진 곳에 서서 주변을 경계했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 비밀 이야기인가요?”

레슬리와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으며 콘라드가 물었다. 아직도 콘라드의 얼굴도 제 얼굴도 붉어져 있었지만, 레슬리는 그걸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어떻게 이야길 하지?’

이야기하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까지는 좋았으나, 말 첫머리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가볍게 시작을 해야 할까? 아니면 얼굴을 싹 굳히면서 진지하게?

그리고 어디까지 이야기를 해야 하는 걸까. 어둠 이야기를 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스페라도 후작가의 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제물이 될 뻔했다는 걸, 12년을 그 작고 작은 다락방에서 학대당했다는 걸 말해야 할까.

레슬리는 제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다가 시선을 올려 콘라드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습관적으로 콘라드는 눈을 휘며 웃었다.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햇빛에 황금색 눈동자가 빛으로 물들었다.

따스한 색이다. 반짝반짝하고, 햇빛을 닮은 포근한 색이야. 신전에서 봤을 때도 그 생각이 들었었지.

“저는…… 힘이 있어요. 조금 특이한 힘이요.”

그 눈을 오랫동안 들여다보다가 레슬리는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이야기하자고 결심만 하고 생각을 정리하지 않아 생각보다 더 서툴고, 쓸모없는 이야기도 많이 섞였다. 그 바람에 말은 끝없이 길어졌다. 하지만 콘라드는 시선을 떼지 않고 그 이야기를 전부 귀담아들었다.

이야기가 끝나자 레슬리는 참아 왔던 숨을 후하, 작게 내쉬었다. 말하는 데 집중해 숨을 쉬는 것도 잊어버린 탓이었다.

“……그랬군요.”

콘라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와 달리 조금 어두워진 얼굴이었다.

“어둠이라……. 기록에서만 남아 있는 힘으로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군요.”

황금빛 눈동자가 잠시 정원을 바라보았다가 다시 레슬리에게 닿았다.

“그리고 왜 셀바토르 공작님과 루엔티 님이 무리를 해 가면서까지 저를 레슬리 양의 신학 선생으로 정했는지 이해했습니다.”

아. 콘라드의 말에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게, 그게요.”

생각해 보면 콘라드가 신학 선생이 된 이유는 레슬리가 혹여나 폭주했을 때를 위함이었다. 순수한 친교가 아니었다. 왜 그 이유를 잊고 있었을까?

손바닥이 땀으로 젖어 들어가기 시작했고 레슬리는 손바닥을 드레스 자락에 문질렀다.

“그게…….”

차마 시선을 마주할 수가 없어 고개를 떨구는데,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습니다.”

웃음기를 한껏 머금은 밝은 목소리에 슬그머니 시선을 들자, 콘라드가 아까와 전혀 달라지지 않은 눈빛으로 레슬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화……나지 않은 걸까?’

누군가 자신을 이용하려 했다면 당연히 화가 났을 텐데.

“사실 조금 상처받긴 했습니다만…….”

그러면서 제 심장 위에 손을 올리며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레슬리의 얼굴이 다시 어두워졌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정말……요?”

조심스러운 물음에 콘라드는 일부러 더 환하게 웃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조금 기쁩니다. 레슬리 양 말대로라면, 만약 그 어둠이 폭주했을 때 레슬리 양에게 가장 필요한 사람은 저라는 소리지요?”

그게 그렇게 되는 건가? 레슬리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아까보다 더 밝아진 눈빛으로 콘라드가 웃었다.

“그거면 충분합니다.”

그래도 레슬리의 표정은 좀처럼 밝아질 기미가 없었다. 결국 콘라드는 자신이 가고 싶었던 가게에 같이 가 주고, 고어를 해석하는 걸 도와 달라는, 레슬리에게는 너무도 간단한 조건을 덧붙였다.

“저만 믿으세요!”

고어 이야기에 흥분한 레슬리가 목소리를 높였다.

“진짜 완벽하게 해석해 드릴게요! 제가 고어는 정말 자신 있거든요. 루엔티 오라버니가 저 천재라고 해 주셨어요!”

레슬리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비밀 이야기도 했고, 콘라드에게서 용서도 받았다. 콘라드가 ‘어려운 고어’라고 말을 하긴 했지만, 밤을 새워서라도 완벽하게 해석을 해 줄 것이다. 거기다 친밀한 만남을 유지할 수 있었다.

레슬리는 옅게 웃음을 머금었다. 레슬리의 자신만만한 모습에 작게 웃던 콘라드가 무언가가 생각났다는 듯 작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레슬리 양, 에펜타니 영애와 레슬리 양이 겪었던 산사태의 조사 결과는 루엔티 마법사님이 말씀해 주실 겁니다.”

“오라버니가요?”

“네. 늦어도 사흘 안에는 저택으로 귀환하실 테니 마법사님을 기다려 주세요.”

콘라드는 그렇게 말하면서 생긋 웃음을 머금었다. 아렌도를 볼 때는 굳어 있던 차가운 눈이, 어느새 풀어져 봄 햇살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그럼 먼저 들어가 보세요. 저는 잠시 여기 있다가 가겠습니다. 지금 가면 귀찮은 분들에게 끌려다닐 것 같거든요.”

콘라드의 말에 레슬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귀찮은 분이라……. 신전에 관련된 사람들일까.

“아, 레슬리 양.”

하르트를 향해 걸어가려는 레슬리의 발을 잠시 콘라드가 멈추었다.

“처음 봤을 때 말씀드려야 했었는데. 오늘 정말 예쁘십니다.”

콘라드의 칭찬에 레슬리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아까처럼 다시 손에 땀이 나, 레슬리는 드레스 자락에 손을 문질렀다.

“콘라드 경도, 오늘 진짜 멋있으세요.”

그 말을 간신히 내뱉고 레슬리는 하르트와 함께 자리를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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