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14/29)

#14

이것은 꿈일까. 스페라도 후작가의 늙은 집사 로윈은 눈을 깜빡였다.

4년 전 겨울은 아직도 늙은 그의 눈꺼풀 안쪽에 달라붙어 있었다. 작은 아가씨가 살길을 찾아 도망가고 그 작은 발걸음은 큰 태풍이 되어 스페라도 후작가를 덮쳤다.

주인이 사라지고 마님은 스페라도 후작가를 버렸다. 후계였던 큰 아가씨 역시 죄인이 되어 버려 저택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르카디우스 제국이 세워질 때부터 황제의 옆을 지켰던 스페라도 가문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주인이 없는 저택은 사라지기 마련인지라 대대로 스페라도 가문을 모셔 오던 로윈은 이 저택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기를 4년, 드디어 로윈의 희망이 현실이 되었다.

“로윈.”

“마님…….”

거의 4년 만에 돌아온 마님을 보며 로윈은 눈물을 글썽거렸다. 스페라도 후작 부인은 그런 로윈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을 이었다.

“그간 자리를 비워 미안하네.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이런 일에 무지하지 않나. 거기다 사람들의 시선이 무서워 도망치고 말았네.”

긴 속눈썹 밑에서 라일락색 눈동자가 눈물을 머금고 파르르 떨렸다.

“자네도 알다시피 사람들의 시선이라는 게 얼마나 두렵던가. 그리고 이 저택은 그 무시무시한 사람의 기억이 서려 있던 곳이라 나에게는 용기가 필요했어…….”

은근슬쩍 후작의 탓으로 넘기는 말과 그간 로윈의 간절한 편지에 한 번도 답을 해 주지 않은 후작 부인의 모습이 조금 씁쓸했지만, 로윈은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돌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님.”

“그래, 그렇게 생각해 줘서 고맙군.”

스페라도 후작 부인은 이해해 줘서 고맙다는 듯 생긋 웃음을 머금었다. 르게인 자작저에서 머무르며 그녀의 드레스와 장신구는 조금 초라해졌지만, 미모만큼은 아직도 화사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럼 물러가서 쉬게. 그간 고생이 많았어. 휴가도 괜찮겠지. 그 사달이 나고 나서 4년간 제대로 쉬어 본 적이 없지 않을 텐가.”

자신이 없어도 될까. 하지만 4년간 제대로 자지도 못했던 로윈은 그 말이 굉장히 달콤하게 들렸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그럼. 휴가를 주지. 그간 맘 편히 가족을 보기도 힘들었겠지. 집에 다녀오는 것은 어떤가?”

후작 부인은 제품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내 로윈의 손에 들려 주었다. 주머니 안에는 상당한 양의 동전이 들어 있었다.

“마님, 이건…….”

“수고비네. 물론 그간 제대로 주지 못했던 월급도 차차 지급할 거야. 일단 이걸로 가족을 보고 푹 쉬고 오게나. 그리고 다녀오면 나를 도와주게. 스페라도 후작가를 일으켜야지.”

로윈은 후작 부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주름진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마님.”

로윈의 시선이 데리엘 너머에 닿았다. 그녀의 뒤에는 같은 복장을 한 사람들이 서 있었는데, 몇몇은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뒤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후작 부인이 고개를 돌려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우리 친정에서 데려온 하인들이네. 일손이 부족할 것 같아서. 빠르게 오느라고 몇은 행색이 엉망이기에 후드를 쓰게 했지.”

어림잡아도 십 수 명은 될 듯한 사람들을 보며 로윈이 웃음을 머금었다. 안 그래도 손이 부족하던 참이었다. 이 정도의 일손이라면 그간 밀려 왔던 저택 보수를 해도 괜찮을 듯했다.

“르게인 자작님이 힘을 써 주셨군요. 저 정도의 인력을 보내려면 돈이 꽤 들었을 텐데.”

로윈의 말에 조금 당황한 듯 후작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지. 아버님과 오라버니께서 힘을 좀 써 주셨지. 거기다 이 사람들을 통솔할 인재도 보내 주셨네.”

“정말 다행입니다. 다행이에요, 마님.”

“자, 내가 마차를 준비해 뒀네. 푹 쉬고 오게, 로윈.”

로윈은 어딘지 서두르는 후작 부인이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으나, 오랜만에 휴식을 받았다는 마음에 간단히 짐을 꾸려 저택을 나섰다.

로윈이 마차를 타고 저택을 떠나는 걸 창가에서 지켜보던 후작 부인은 드디어 안도의 숨을 흘렸다.

“하아. 드디어 갔네요. 그런데 왜 로윈을 쫓아내야 한다고 했던 거예요?”

고개를 돌리자,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던 남자가 방을 둘러보고 있었다. 헝클어진 밀색 머리와 죽어 가는 얼굴빛에서 푸른 눈만은 형형색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스페라도 후작이 자신의 집으로 돌아왔다.

“나의 그리운 저택…….”

후작은 아내의 말을 듣는 듯 마는 듯 하면서 저택을 둘러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여보, 내 말 듣고 있어요?”

“듣고 있어!”

날카롭게 소리 지른 후작은 거친 숨을 내쉬며 자신의 방이었던 곳을 훑었다.

엉망이었다. 아름답던 자신의 초상화는 벽에서 떨어져 바닥을 뒹굴고 있었고, 우아한 은촛대는 사라졌다. 벽면을 장식하던 황금 잎사귀마저 긁어서 팔았는지 흉측한 상처만 남아 있었다.

후작은 마치 자신의 심장에 상처가 난 듯 비통해 보이는 표정으로 흠을 매만졌다.

“이렇게 오랫동안 이 저택에 그놈이 남아 있던 이유가 뭐겠어. 분명 도둑질이야. 그런데 그놈 앞에 내가 나타나 봐. 분명 그 정보를 값비싼 값에 팔아넘길 게 분명해.”

후작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불안한 듯 이를 부딪쳤다. 듣기 싫은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지금까지 저택이 다른 귀족들 손에 갈가리 찢겨 넘어가지 않은 게 로윈이 그간 애쓴 덕분이었지만, 후작에게는 로윈의 충성심마저 자신 좋을 대로 해석되었다.

“이것 봐! 이걸 보라고!”

후작은 엉망이 되어 버린 집을 가리켰다. 화려하고 우아하던 저택은 귀신이 나올 것처럼 음침해졌고, 텅 비어 버렸다.

“여기 걸려 있던 거장의 그림은 어디로 갔지? 장인이 만든 가구들은? 황금으로 만들었던 동상은! 전부 어디 갔냔 말이야! 우리 저택은 르카디우스 제국이 세워질 때부터 존재했던, 유서 깊은 저택인데, 지금은 꼭 폐가 같잖아!”

스페라도 후작의 외침을 듣고 있던 후작 부인이 귀가 아프다는 듯 제 귀를 막고 소리를 질렀다.

“당연하잖아요! 당신이 자리를 비우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알아요? 로윈이 아니었다면 이 저택이 통째로 날아갔을 거라고요!”

날카롭게 소리치며 후작 부인은 눈을 찡그렸다.

‘이러려고 여기에 온 거야?’

신경질적으로 손끝을 잘근잘근 씹으며 후작 부인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돌아왔다는 소문이 벌써 수도 전역에 퍼진 것 같았다. 분명 다들 그녀를 즐겁게 물어뜯고 있겠지. 상냥한 웃음을 짓고, 동정 섞인 목소리 밑에 조소와 비난을 깔 것이다.

모든 수도의 사람들이 자신 이야기를 하는 듯해, 데리엘은 창가에서 물러나면서 신경질적으로 커튼을 내렸다.

스페라도 후작은 그런 아내를 보며 작게 이를 갈았다. 그간 자리를 비웠다고 아내는 자신을 깔보고 있는 게 분명했다. 간신히 도착한 르게인 자작가에서 자신을 4년 만에 처음 마주한 데리엘의 표정이 어땠던가.

‘차라리 괴물을 봐도 저보단 고운 얼굴로 봤겠어.’

후작은 이를 갈다가 몸을 돌려 개인 서재로 들어갔다.

서재 역시 엉망이었다. 흑단 나무로 장인이 정성스럽게 만든 책상은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졌고, 서재를 가득 메운 값비싼 책들 역시 팔려 나가 책장의 절반 이상이 비어 있었다.

오래도록 청소를 하지 않은 것인지, 그나마 남아 있는 소파와 의자에는 하얀 천이 덮여 있었다. 후작은 신경질적으로 천을 치웠다가 거세게 이는 먼지에 손사래를 치며 쿨럭거렸다.

‘그건 무사하겠지?’

그걸 위해서 여기에 온 건데.

후작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슬그머니 책꽂이에 달린 장식을 밀자 책꽂이의 한 칸이 소리도 없이 비밀스러운 공간을 드러냈다.

전 스페라도 후작이 그의 사랑스러운 아들을 위해 만들어 준 이 공간은 아버지와 자신만의 비밀이었다. 전 스페라도 후작이 사망한 이후로는 아무도 모르는 자신만의 비밀 공간이 되었고, 늘 후작은 이 안에 자신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숨겼다.

후작은 바로 손을 뻗어 안쪽에 있는 상자를 꺼냈다. 나무 상자 안에 있는 것은 낡디낡은 수첩 하나와 이상하게 끊어진 사슬이었다. 있다. 후작은 사슬과 수첩을 바라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잘 도착하셨나요?

사랑하는 이와 눈물 나는 재회를 하셨으리라 생각해요. 제가 편지를 보내는 건 다름이 아니라 스페라도 후작가에는 특별한 힘이 있다고 들어서입니다.

모두에게 악몽 같은 거대한 힘이라지만, 오랜 주인이 그 힘을 다루지 못할 리가 없다고 나는 믿는답니다. 부디 그 비밀스러운 방법을 내게도 알려 주기 바라요.

그럼 수도에 올라오시는 날을 기대하겠습니다.

-당신의 친구로부터.

르게인 자작가에서 돌아오니 후작의 방에 놓여 있던 편지였다. 후작은 그걸 누가 보냈는지 쉽게 알 수 있었다.

오랜 주인. 그녀는 힘의 주인이 아니라 오랜 주인이라고 말했다.

그건 초대 스페라도 후작부터 지금의 가주인 자신까지 가리키는 말이었다. 힘을 가진 아이들이 커서 가주가 되기 전까지 그들을 다루는 건 대대로 가주들이었으니까.

‘힘을 다루는 법.’

후작은 4년 전 레슬리의 팔찌를 만들고 남은 사슬을 펼쳐 보았다. 처음보다 조금 짧아지긴 했지만, 레슬리 정도의 아이는 충분히 묶어 둘 수 있을 것 같아 보였다. 들키지 않겠다고 사슬을 부숴 팔찌에 넣지만 않았더라면 더 길었을 텐데.

후작은 안타까운 눈으로 쯧, 하고 혀를 차고는 사슬을 도로 상자 안에 넣고 이번엔 수첩을 꺼냈다. 낡고 낡아 조심히 보지 않으면 곧 부스러질 수첩의 표면을 쓸다가 후작은 문득 수첩을 펼쳐 들었다.

[여섯 번째 실험. 두 명의 은발 아이가 죽어 갔지만, 이렇다 할 결과가 없었다. 애통하다.]

[약간의 어둠을 얻었지만, 힘이 너무도 약하다. 적어도 사람을 공격할 정도가 되어야 하는데. 왜 이렇게 약한 걸까.]

[불이 역시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정자를 만들어 첫 제물을 바친 불을 보호하기로 했다.]

[실험을 거듭하는데 점점 불이 검은색으로 변하는 것 같다. 다른 이들은 기분 탓이라고 했지만 뭔가 꺼림칙하다.]

‘불이 점점 검은색으로 변했다고?’

후작은 눈을 찡그렸다. 자신이 기억하던 제물의 불은 처음부터 지옥의 불처럼 짙은 검은빛을 띠고 있었다.

후작은 기록을 읽다가 아무 생각 없이 맨 마지막 장을 펼쳐 보았다. 여태까지는 필요한 부분만 찾아 읽고 바로 닫아 버렸지만, 오늘은 왜인지 갑자기 마지막 장을 읽고 싶었다.

공간 하나 없이 빽빽하게 기록된 다른 장과는 다르게 맨 마지막 장에는 단 한 줄만 적혀 있었다.

[우리가 크나큰 실수를 했다.]

“크나큰 실수를 했다?”

“저, 저기…… 후작님.”

후작이 눈을 찡그리는데 누군가 갑자기 그를 불렀다. 놀라 벌떡 일어나 자신을 부른 이를 바라보자 한 하녀가 서재 입구 쪽에서 자신을 보며 머뭇거리고 있었다. 아내를 따라온 르게인 자작가의 하녀 중 한 명인 그녀는 후작의 호통에 몸을 움찔하더니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그…… 황실에서 기사분들이 오신다고 합니다. 어서 피하시라고 알려 드리러 왔어요.”

“뭐, 뭐?”

왜 하필 이럴 때 온단 말인가.

지금 그는 도망자 신세라 황실 기사단과 마주쳐 봤자 좋을 일이 없었다. 후작은 하녀를 내보내고 다시 자신의 비밀 공간에 수첩과 사슬을 집어넣은 뒤 허둥지둥 서재를 나왔다.

후작이 자리를 뜨고 텅 빈 개인 서재에 누군가가 조용히, 발소리를 죽이며 들어왔다. 아까 후작을 부르러 온 하녀는 주변을 돌아보더니 후작이 한 대로 장신구를 잡아당겨 숨겨진 공간을 찾아내었다.

“사슬과 수첩……. 주인님께 알려 드려야겠네.”

상자 안과 창밖에 앉아 있는 갈색 얼룩무늬 새를 번갈아 바라보며 그녀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

바로 공작저로 돌아가기에는 먼 거리라 공작가 사람들은 하룻밤을 여관에서 머무르기로 했다. 몰려든 귀족들 때문에 방이 있을까 레슬리는 걱정했지만, 그건 기우였다. 셀바토르 공작이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여관 주인은 민첩한 몸놀림으로 여관의 가장 위층을 통으로 내주었다.

“어머니.”

식사가 끝난 후, 레슬리는 조심스레 공작이 머무르는 방문을 열었다. 침대에 들기 전까지 서류를 보고 있던 셀바토르 공작이 레슬리를 보며 미소 지었다.

“왔구나.”

레슬리를 보자마자 자신이 보던 서류를 옆으로 치우며 옆자리 의자를 빼 주었다. 탁자 위에는 땅콩과 초콜릿이 듬뿍 박힌 쿠키가 놓여 있었는데, 자신을 위해 미리 준비해 둔 것인지 공작은 쿠키가 가득 담긴 그릇을 레슬리 쪽으로 밀었다.

“저, 그런데 무슨 일로 부르신 건가요?”

마침 할 이야기가 있어서 잘됐지만. 작은 연분홍 리본이 달린 모슬린 잠옷을 입은 레슬리는 의자에 앉아 쿠키를 하나 집어 들고 오물거렸다.

진득한 초콜릿과 고소한 땅콩이 입안 가득 씹히자, 저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콘라드가 준 사탕과 비스킷 이후로 먹는 첫 쿠키였다.

조금씩 먹다가 어느새 크게 쿠키를 덥석 베어 먹는 레슬리를 귀엽다는 듯 바라보면서 공작은 차 한 잔을 따라 앞에 놓아 주었다. 그리고 조심스러운 손길로 뺨을 쓸었다.

“기껏 살을 찌웠더니 이렇게 홀쭉해져서는.”

고작 스무 날을 조금 넘게 신전에 머물렀을 뿐인데 레슬리의 뺨은 홀쭉해져 있었다. 그건 공작과 사이레인에게는 다른 무엇보다 심각한 일이었다.

그러기를 한참, 공작은 안쓰러운 눈으로 레슬리를 바라보기만 할 뿐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레슬리.”

“네, 어머니.”

레슬리가 침묵을 더 버티지 못하고 먼저 말을 걸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던 차에 공작이 드디어 말문을 열었다. 하지만 이내 다시 입을 다물고 눈을 찡그렸다.

“어머니, 제가 먼저 말씀드려도 될까요?”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자신이 먼저 말문을 터야 할 듯 보였다.

“그래, 먼저 말해 보렴.”

공작이 허락하자 레슬리는 잠시 제 컵을 톡톡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저…… 어머니.”

레슬리는 슬그머니 눈치를 보며 말을 시작했다. 셀바토르 공작이 어서 말해 보라는 듯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그게…… 데비엔 고위 사제에게 제힘을 들키고 말았어요. 그리고 콘라드 경에게도요.”

그 말을 간신히 내뱉고 레슬리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간 레슬리는 공작의 말에 따라 충실하게 제힘을 숨겨 오고 있었다. 셀바토르 공작저에서도 레슬리가 어둠의 힘을 가지고 있는 걸 아는 사람은 공작과 사이레인, 베스라온과 루엔티 그리고 제나와 하르트가 전부였다.

셀바토르 공작은 레슬리의 힘을 감추고자 했다. 남들에게 알려지면 비장의 패로 쓰기 힘들었으니까.

거기다 황실이 이용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피스토레가 반대하더라도 다수의 귀족이 항의하면 어떻게 될지 몰랐다.

그랬는데 하필이면 데비엔에게 들키고 말았다. 레슬리는 죄송스러운 마음에 고개를 숙였다.

“괜찮단다.”

그리고 예상한 대답이 돌아왔다. 어머니라면 분명 저렇게 말해 주실 줄 알았다. 괜찮다고, 네 잘못은 없다고. 그래서 더더욱 가슴 한편이 욱신거렸다.

“하지만…….”

“정말 괜찮단다. 어차피 조금 더 있었으면 알려질 사실이었어.”

“알려질 사실이었다니요?”

공작은 옅게 웃으며 질문의 답을 질문으로 대신했다.

“데비엔의 주인이 누군지 아니?”

공작의 질문에 레슬리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후작은 아니라고 했어요.”

“그래, 그렇지. 그녀의 주인은 황족 중에 숨어 있단다.”

황족……. 누굴까. 레슬리는 눈을 찡그렸다.

르카디우스 제국에서 황족은 귀한 편이었다. 황제들은 늘 황후 한 명만을 자신의 아내로 두었고, 그 밑에선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한 명의 아이만이 태어났다. 두 명의 아이를 둔 황제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그래서 선선대 황제가 황위를 잇지 못한 아들에게 대공의 지위를 내릴 때도, 약간의 혼란이 일어났다. 르카디우스 제국에서는 대공이라는 위치는 처음이었고, 때문에 셀바토르 공작가에 비해 어떤 권한을 더 내려야 할지를 정하지 못했다.

셀바토르 공작가는 이미 르카디우스 황실보다 더 오랫동안 존재했으며 각 전쟁 때마다 가장 큰 공을 세웠던 특별한 가문이었으니까. 그보다 더 많은 권한을 주기에는 셀바토르 공작가의 눈치가 보였고, 그렇다고 완전히 똑같은 권한을 주기에는 제 아들이 신경 쓰였다.

고심 끝에 선선대 황제는 아이테라에게 셀바토르 공작가와 비슷한 권한을 주되, 호칭만은 대공으로 정하였다.

“일단…… 황제 폐하는 아닐 것 같아요.”

레슬리는 한참 만에 대답 하나를 내놨다. 공작은 남은 차를 홀짝이며 되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했니?”

“만약 황제 폐하가 데비엔과 손을 잡았다면, 어머니께 멱살을 잡혔을 테니까요.”

이젠 레슬리의 입에도 붙어 버린 관용구였다. 다른 말도 많이 붙었지만, 그건 셀바토르 공작 앞에서는 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래, 맞아. 피스토레는 그런 사람이 아니지.”

그녀의 오랜 친구는 자신이 믿는 몇 사람에게 감정을 숨기지 않는 이였고, 그 안에는 셀바토르 공작이 들어 있었다. 그가 데비엔의 진짜 주인이었다면 분명 어디선가 묘하게 티가 났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스페라도 후작가의 제물 사건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지난 4년은 그 사실을 확신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알았다면 뒤집어엎었겠지.’

제 두 아들을 끔찍이도 좋아하는 황제였다. 황제 자리에 오르기 전에도 길거리에서 아이만 보면 늘 먹거리를 쥐여 줄 정도로 어린아이들을 귀여워하기도 했다.

특히 어릴 적엔 자주 아팠던 아렌도 황자를 안아 들고 회의에 참석했던 일은 아직도 이야깃거리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만일 알고 있었다면 반드시 자기 아들에게 말해 주었을 것이다.

‘100년. 거의 100년 전이었지. 마지막 어둠술사가 나온 게.’

기록에는 어둠술사라 하기에도 부끄러울 정도로 그 위력이 약하다고 적혀 있었다. 그 말은 제물을 바치지 않고 그 아이가 타고난 힘만을 이용했다는 뜻이었다.

“황제는 데비엔의 주인이 아니란다.”

공작의 말에 레슬리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쉽게 누구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잘못 말하면 황족 모독죄인 데다가 황제와 황후는 르카디우스 제국의 황족답지 않게 나름 순수한 분들이었다. 두 명의 황자가 가장 의심스러웠으나, 레슬리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누군지 잘 모르겠어요.”

그 말에 공작은 웃으면서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메데이아 태후란다.”

“네?”

레슬리의 눈이 순식간에 동그래졌다. 메데이아 태후라면 바로 어제 만났던 사람이 아닌가. 그런 사람이 데비엔의 주인이라고?

“이유는 잘 모르겠다만, 그녀는 예전부터 아렌도 황자를 제국의 주인으로 삼고 싶어 했었지.”

그녀는 제 아들뻘 되는 나이의 아렌도를 알뜰하게 챙겼다. 물론 2황자인 콘스텐도 챙기긴 했으나 1황자인 아렌도에 비교하면 초라한 보살핌이었다.

레슬리는 공작의 말에 놀란 듯 눈을 깜빡거렸다.

“그럼 메데이아 태후 폐하…… 아니, 메데이아가 제 힘에 대해 알게 된 건가요?”

“그렇지. 그리고 너도 알다시피 이미 엘리가 그 밑으로 들어가 있어. 그러니 힘에 관한 건 어차피 곧 알려질 사실이었단다.”

그렇구나. 하긴 엘리에게는 레슬리가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더 숨길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제 새로운 보호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 뭐든 먼저 털어놓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잠시 레슬리를 보고 있던 공작이 이번엔 먼저 물었다.

“그 일 때문이니? 강에서 늑대를 만난 일?”

비어 버린 레슬리의 찻잔에 꽃향기 나는 차가 가득 찼다. 자신이 좋아하는 차라 두 번째 잔도 달갑게 받은 레슬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늑대를…… 만났어요. 셀리스 양을 끌고 가려고 했고, 저를 잡아먹으려고 해서 몸을 지키려고 했어요.”

레슬리는 그때 상황을 떠올리며 눈을 찡그렸다.

거대한 늑대들의 한 끼 식사가 될 뻔한 그때, 어둠이 먼저 움직여 주었다. 자신의 몸에 쏟아져 내린 피를 생각하면 아직도 몸이 잘게 떨렸다. 데비엔을 상대하느라고, 그리고 콘라드에게 어둠을 들켰던 충격에 잠시 뒤로 밀어 두었던 낯선 감정들이 몸을 타고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레슬리는 일부러 환하게 웃으며 셀바토르 공작을 바라보았다. 자신은 열여섯 살이나 되었고, 이 일은 이제 낯선 일이 되지 않을 것이니까. 스페라도 후작을 떠올리며 레슬리는 작게 주먹을 쥐었다.

공작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시누스턴 신전 숲에서 거대 늑대라…….”

갑작스러운 산사태에, 숲 안쪽에서만 살던 거대 늑대가 왜. 공작의 암녹색 눈이 가늘어졌다.

“어머니?”

셀바토르 공작의 표정이 이상해지자 레슬리가 조심스레 공작을 불렀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란다. 그래서 그 늑대들을 처리하다가 데비엔에게 들킨 거구나. 그리고 콘라드에게도.”

“네, 죄송해요…….”

“죄송할 건 없지. 신전 측에서 제대로 호위를 못 한 탓인데.”

산사태라니, 그것마저도 일부러 일어난 일인 게 분명했다. 분쟁 지역과 아무리 가까운 지역이라고는 하나 산사태의 영향을 받을 정도는 아녔다. 그랬더라면 바로 신전에서 사람들을 대피시켰을 것이다. 약자를 데리고 있는 신전은 늘 그런 위험에 민감했으니까.

“레슬리, 너는 괜찮은 거니?”

“그럼요! 당연하지요. 저는 괜찮아요, 어머니.”

레슬리는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셀바토르 공작과 시선을 맞추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조금 무섭고 거부감도 들었었는데…… 이젠 괜찮아졌어요.”

레슬리의 감정 상태는 엉망진창이었다. 처음으로 무언가를 죽였다는 죄책감과 몸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는 자기 합리화, 늑대가 달려들어 할퀴었을 때 느꼈던 아픔, 피가 사방으로 튀었을 때 느꼈던 공포. 하지만 그 감정은 항상 하나의 결론으로 귀결되었다.

‘후작과 엘리도 저렇게 만들 건데, 늑대 따위에게 흔들리면 안 돼.’

레슬리는 손에 든 찻잔을 꽉 쥐었다.

그래, 자신은 괜찮았다. 아니, 반드시 괜찮아져야 했다. 스페라도 후작가의 사람들의 끝을 간절히 바라던 건,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이 아니던가.

그 사람들 숨통을 끊어 놓을 수 있는 기회가 왔을 때, 레슬리는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아니면 4년 전처럼 후작과 엘리는 어떻게든 살아남을 게 뻔했으니까.

레슬리는 어지러운 속을 들키지 않으려고 일부러 눈을 마주치고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런 레슬리의 속을 파악한 것인지 셀바토르 공작의 눈이 가늘어졌다.

잠시 침묵하던 공작은 이내 레슬리를 보며 팔을 벌렸다. 자동으로 그 품에 안기자 공작이 레슬리의 등을 토닥였다.

“미안하구나.”

갑자기 들려온 공작의 말에 레슬리가 눈을 크게 떴다. 갑자기 왜 사과를 하시는 걸까.

“네가 그런 일을 겪게 해서 미안해. 무언가를 죽이는 건 달가운 감정이 아니지. 그리고 익숙해져야 할 일도 아니란다.”

낮고 부드러운 공작의 목소리를 들으며 레슬리는 그 품에서 눈을 깜빡거렸다.

“나는 네가 그 감정을 몰랐으면 했는데…….”

그 말끝에 작은 한숨이 걸려 나왔다. 품 안에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왜인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어머니, 저는 괜찮아요. 각오하고 있던 일이고…… 이럴 때를 대비해서 어둠을 배운 거잖아요.”

“그래, 그렇지. 그래도 나는 네가 그걸 평생 모르는 삶을 살게 하고 싶었단다.”

결코 달가운 감각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특히나 이 아이처럼 여리고, 또 복수하고 싶어 하는 아이는 더더욱 그 감정을 알지 못하게 숨기고 싶었다. 셀바토르 공작도, 레슬리도 잠시 할 말을 고르는 듯 침묵했다.

‘나는 정말로 괜찮은데.’

레슬리는 다시 한 번 더 찻잔을 꼭 잡았다. 그러고 보니, 어머니는 자신에게 힘을 넘겨준 작은 손들에 대해 잘 모르시지. 4년 전에도 그들이 원하는 건 복수가 아니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잠시 생각을 정리하다가 레슬리는 공작이 걱정하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시선만 살짝 들어, 공작의 품속에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머니, 저 콘라드 경에게 제 힘에 대해 말해도 될까요?”

레슬리의 말에 무언가를 생각하듯 눈을 가늘게 뜬 공작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도 괜찮단다. 그는 믿을 만하니까.”

제 딸을 노리는 게 마음에 안 들기는 하지만, 그 정도로 믿을 만한 이를 찾는 건 힘들었다. 문제는 그 아버지인 아이테라 공작이었지.

“대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맹세해 달라 말하렴.”

그 말에 레슬리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런 자신의 딸이 귀여워 머리를 쓰다듬으며 시선을 맞추자 레슬리가 눈을 사르르 접으며 밝게 웃어 보였다.

“레슬리.”

조금은 헝클어진 머리를 귀 뒤로 넘겨 정리해 주며, 공작은 말을 이었다.

“아라벨라 자리를 포기해도 괜찮단다.”

***

“이런. 조사가 길어질 것 같네.”

렌티우스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줄기를 보며 눈을 찡그렸다.

후보들이 떠나자마자 하늘은 그 빈자리를 대신하겠다는 듯 강한 폭우를 쏟아 냈다. 덕분에 다들 조사를 멈추고 급하게 친 천막 속에서 비를 피하고 있었다.

“얼마나 걸릴까요.”

콘라드는 그런 비를 원망스럽다는 듯 바라보았다.

안 그래도 셀바토르 공녀를 제대로 호위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문책을 당하느라 제대로 된 배웅도 하지 못했다. 레슬리에게는 조사 때문이라고 둘러대긴 했지만, 사실은 문책 때문이었다.

조사 결과라도 어서 보내 주고 싶은 마음에 조사에 참여했는데, 하늘이 도와주지 않았다.

“시간도 시간이지만, 이런 상태면 대부분의 흔적이 쓸려 나가겠지.”

렌티우스는 푹 젖어 버린 제 머리를 마구잡이로 털어 내며 밖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콘라드를 보고 말을 이었다.

“일단 너는 저택으로 돌아가라.”

“네?”

“동생이 기다리지 않냐. 가서 동생 좀 달래 줘.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초조했었지?”

큰 솥뚜껑 같은 손으로 콘라드의 등을 철썩 치며 렌티우스가 씩 웃었다.

“여긴 내가 남아 있으마. 뭔가 알게 되면 바로 알려 줄 테니까, 마음 놓고 수도로 돌아가.”

“선배님도 할 일이 많으시잖아요.”

다른 사람도 아니라 테센트루아 성기사단의 기사단장이었다. 호위를 맡아 주러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그가 상당히 무리했다는 걸 콘라드는 잘 알고 있었다.

“여기 오기 전에 일 대부분을 처리하고 왔어. 뭐 그래도 안 되면 개인 휴가 좀 쓰고 그러지 뭐.”

“휴가를 쓰시다니요…….”

평소에도 아이들과 놀아 줄 시간도 부족하다며 투덜거리던 렌티우스였다.

“괜찮아. 괜찮아. 애들이랑 아내님은 나중에 시간 날 때 같이 소풍 가 주면 될 것 같고……. 거기다 거대 늑대가 숲 안쪽에서 튀어나왔는데 가만히 있을 수가 없잖아.”

렌티우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거대 늑대는 다른 늑대들에 비해 그 몸집이 몇 배나 더 커서 양이나 염소를 한 번에 물어 죽이곤 했었다. 거기다 늘 대여섯 마리씩 무리를 지어 다니기 때문에 한 마리라도 발견된다면 반드시 무리를 전부 죽여야 했다. 아니면 사람이 먹힐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보통은 숲 안쪽에서 생활하는 놈들인데 왜 튀어나온 거지.”

“산사태 때문이겠죠.”

콘라드는 작게 혀를 찼다. 산사태가 일어나 거대 늑대들을 자극했고, 덕분에 레슬리와 셀리스가 공격당했다.

‘의심 가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니지만.’

데비엔 고위 사제. 콘라드는 당장이라도 상부에 이 일을 보고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고위 사제의 영향력은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었으니까. 거기다 신전은 황실과 귀족들의 압박이 먹히지 않는 또 다른 세계였다.

답답함에 콘라드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그때, 흠뻑 젖었다는 말로는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푹 젖은 사제가 천막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허어억.”

사제는 가냘픈 신음을 흘리며 몸을 덜덜 떨었다.

“이런, 괜찮으십니까?”

렌티우스가 커다란 천을 덮어 주며 천막 가운데에 있는 불가로 사제를 안내했다.

“비, 빗줄기가 이렇게 아픈 것인지는 몰랐네요.”

불 앞에 앉은 사제는 손을 내밀면서 내일 분명 온몸에 멍이 들어 있을 거라고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 무슨 일로 나갔다 오신 겁니까?”

콘라드가 불 위의 주전자에서 따듯한 물을 따라 사제에게 건네주며 묻자, 사제는 작게 웃으며 컵을 받아 들었다.

“그게, 아까 신경 쓰이는 게 있어서 말입니다.”

“신경 쓰이는 게 있다니요?”

“아까 제가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한 분을 치료해 드리지 않았습니까.”

안 그래도 지반이 약해진 탓에 한 사람이 레슬리와 셀리스처럼 산기슭을 굴러 강에 빠질 뻔했었다.

다행히도 구해 냈지만, 온몸에 자잘한 상처가 생겼고 다친 사람을 치료했던 게 이 사제였다.

“치료를 위해서 신력을 사용하는데 뭔가가 이상하더라고요. 미묘한 거슬림이었습니다. 제가 그런 쪽으로는 신전에서 가장 예민하거든요. 다시 확인해 보기도 전에 비가 쏟아졌지만……. 뭐 하여튼 그걸 확인하고 왔습니다.”

사제의 말에 렌티우스와 콘라드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아직 사제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편지를 써야겠어요. 마법사의 저택에 도움을 구하는 편지 말입니다.”

“마법사를 불러 처리할 생각입니까? 우리의 힘으로도 충분히 가능할 텐데요.”

렌티우스가 얼굴을 찡그렸다. 신전에 마법사를 부르려면 이래저래 절차가 까다로웠다. 신전 측에서도 달가워하지 않았고, 그건 마법사의 저택도 같은 입장이었다.

“확인차 마법사가 꼭 필요합니다.”

그걸 가장 잘 알고 있음에도 사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말리기 위해 조금 더 불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사뭇 진지해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아까 신력을 사용했을 때, 반발 반응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조금 시간을 두고 다시 신력을 사용하니 미묘하게 반발 반응이 있더군요.”

“신력에 반발 반응이 있었다는 말은…….”

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평범한 산사태가 아닙니다. 저건 마법으로 사고를 일으킨 거예요.”

***

중간에 자신을 마중 나온 베스라온과 루엔티를 만나 셀바토르 공작저로 돌아온 지 며칠이 지났다. 하지만 레슬리는 어쩐지 즐겁지가 않았다.

테이블 위에 엎드린 채 작게 한숨 쉬며 눈을 깜빡였다. 오늘도 제나가 화병에 새 꽃을 꽂아 주었지만, 그것마저 즐겁지 않았다.

‘아라벨라를 포기해도 된다니.’

하나의 목표를 위해 달려왔는데 그 목표를 손에 넣은 순간 포기해도 된다는 말을 듣자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그럼 계약은 어떻게 되는 걸까.’

레슬리는 괜스레 꽃잎 한 장을 따서 빙글빙글 돌려보았다.

4년 동안 자신을 충분히 아껴 주고, 사랑해 주었다는 걸 의심하는 건 아니었다. 넘어졌다는 이유로 원래 계단은 사라지고 자동으로 움직이는 계단이 나타나지를 않나, 저택 한 층을 다 내준다고 하더니, 저번 생일 때는 레슬리가 자주 가던 디저트 가게를 선물로 받았다.

거기서 멈추지 않았지. 베스라온은 길가에 있는 모든 가게를 인수해 레슬리가 좋아하는 가게로 바꾸자고 제안했고, 사이레인을 그럴 바에 아예 거리 하나를 통째로 사들이자고 주장했다. 그리고 루엔티는 그 말에 반박했고.

‘역시 루엔티 오라버니야!’

하지만 그렇게 루엔티를 반긴 레슬리의 환호와는 다른 의견이 튀어나왔다. 축제를 잊지 말라는 반박이었다. 종합하자면 거리를 전부 사서 축제를 좋아하는 레슬리를 위해 365일 축제를 열자는 말이었다.

그때 일을 생각하며 레슬리는 작게 키득거렸다. 그 일은 2차 시험을 치르러 가기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러니 가족들의 사랑을 의심할 마음 따윈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계약이라는 말이 너무 걸려.’

그런 단어는 가족 사이에 쓰이지 않으니까. 전혀 관련 없는 남남끼리 쓰는 단어니까. 손가락 걸기를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레슬리는 4년 전 제 무지함을 탓했다. 계약이라고 말하지 말고 손가락 걸기를 했었더라면, 조금 친근한 느낌이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어 헛된 생각을 털어 버렸다.

‘……위험할 수 있단다. 나는 네가 그런 위험에 빠지는 걸 원치 않아. 그러니 생각해 보고 말해 주렴.’

레슬리는 공작의 한마디를 떠올리며 꽃잎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 말 한마디를 하는데도 셀바토르 공작은 그녀답지 않게 한참을 뜸 들였었다.

“분명 뭔가 더 할 말씀이 있던 것으로 보이셨는데.”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다가 직전에 멈추신 걸까. 어머니가 속에 삼킨 그 말이 뭘까. 답답한 마음에 테이블을 두드리는 손길이 거세졌다.

“레슬리.”

“베스라온 오라버니.”

오늘은 쉬는 날인지 편한 갈색 튜닉을 입고 있는 베스라온이 레슬리에게 다가왔다.

“허락도 없이 들어와서 미안하다. 음, 방문이 열려 있어서.”

아까 레슬리가 들어오면서 제대로 문을 닫지 않은 모양이었다. 몸을 벌떡 일으켜 자세를 제대로 잡고 앉은 레슬리가 베스라온을 보며 웃었다.

“괜찮아요. 어서 들어오세요. 차 드시겠어요?”

그러고는 종을 울려 마델에게 차를 부탁했다. 마델이 차를 가지러 간 사이 베스라온이 레슬리를 보며 먼저 말문을 열었다.

“무슨 걱정이 있는 듯해서 말이다. 집으로 돌아왔는데 제대로 웃지도 않고 밥도 먹질 않았지. 거기다 늘 방에서 혼자 밥을 먹고. 파티도 거절하고 말이야.”

사이레인과 바타가 야심차게 준비한 환영 파티마저 레슬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모습에 무뚝뚝하던 베스라온마저 제 동생이 걱정된 모양이었다.

“어머니랑 무슨 일이 있던 거니?”

최대한 상냥한 목소리로, 최대한 나긋나긋하게 묻는 베스라온을 보며 레슬리는 옅게 웃었다. 그리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말을 꺼냈다.

안 그래도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은 심정이었다. 레슬리는 공작이 자신에게 한 말과 자기 생각을 서투르게 전부 털어놓았다. 베스라온의 눈동자가 커다래지더니 이내 웃음을 머금었다.

“어머니가 정말 너를 아끼시는구나. 알고는 있었지만, 말을 아끼실 줄은 몰랐어.”

“저에게 아라벨라를 포기하라 하셨는데도요? 거기다 제대로 이유를 설명해 주시지도 않았어요.”

레슬리의 뚱한 대답에 아직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베스라온이 대답했다.

“어머니는 기본적으로 말을 아끼시는 성격이 아니시지. 자신의 행동에 제약을 받는 것을 싫어하시고.”

레슬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어머니는 그런 분이었다. 말을 많이 하시는 편은 아니었지만, 필요한 말을 아낀 적은 없었다. 그게 어떤 결과를 불러오든 간에 그녀는 늘 거리낌 없이 의사를 표시했었다. 필요하다면, 전쟁터라고는 하나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황제의 멱살을 잡을 정도였으니까.

“그런 어머니가 혹시나 네가 다칠까 봐 말을 아낀 거지.”

베스라온은 조금이나마 어머니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안전에 심혈을 기울이는데도 레슬리에게는 사건 사고가 잇달아 일어났다. 그리고 그 아이가 앞으로 걸어갈 길은 위험했다. 그러니 지금만이라도 상처받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저는 어머니가 다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잠시 베스라온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레슬리는 발을 동동 굴렀다.

“제 일인데 저에게만 알려 주지 않는 건 불공평해요. 거기다 이제 저도 다 컸는걸요. 매일매일 훈련해서 체력도 많이 붙었어요. 저는 어머니랑 약속을 했으니 그 약속을 지키고 싶어요.”

열여섯 살이 되었고, 이제 연무장을 5바퀴나 돌아도 숨이 차지 않았다. 매일 바타가 해 주는 밥을 남김없이 먹어 키도 자랐으며, 하르트에게서 검을 배워 검술도 조금이나마 할 수 있게 되었다.

지식 역시 크게 성장했다. 가장 약했던 신학은 사제들도 놀랄 정도였고, 가장 잘했던 고어는 자신이 아카데미를 다녔다면 늘 수석을 차지했을 거라 확신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니 저도 어머니께 도움이 되고 싶단 말이에요!”

갑자기 튀어나온 큰 목소리에 레슬리는 놀라 작게 딸꾹질을 터트렸다.

“그럼 조금 있다가 올라가서 다시 이야기해 보렴. 분명 어머니는 너에게 약하니 다 말해 주실 거란다.”

이 저택에서 레슬리에게 약하지 않은 사람을 찾기는 힘들었으니 다들 레슬리의 편이 되어 줄 것이다. 베스라온의 말에 레슬리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조금 이따가 같이 가 주시면 안 돼요, 오라버니?”

“그래, 같이 가 주마. 손가락도 걸어 줄까?”

그러자 레슬리는 환하게 웃으며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이제 레슬리도 제법 커서 베스라온과 약속할 때 평범한 사람들처럼 새끼손가락을 걸 수 있었다. 그래도 워낙 손 크기가 차이가 크게 나서 조금 우스꽝스러운 꼴이었지만.

“죄송해요, 아가씨.”

너무 늦게 들어온 마델이 조심스레 문을 열며 찻주전자와 두 개의 찻잔을 가지고 들어왔다. 파란 레이스 위에 분홍 리본이 예쁘게 그려진, 레슬리 전용 찻잔이 베스라온 앞에 놓였다. 베스라온은 레슬리의 손 크기에 맞춰서 나온 작은 찻잔을 제 커다란 손으로 조심스레 들었다.

“손님이 오셨더라고요. 그래서 조금 주방에서 늦게 나왔어요.”

“손님?”

마델의 말에 드물게 베스라온이 되물었다.

“네, 도련님. 지금 제나 집사님께서 손님을 3층 응접실로 안내하라고 들으셨다고 하셨습니다.”

손님도 드문데 3층 응접실의 문이 열렸다. 귀중한 손님을 받을 때만 열린다는 셀바토르 공작가 3층 응접실의 마지막 손님은 열두 살의 레슬리였었다.

“어머니가 3층 응접실을 여셨어?”

레슬리가 놀라 크게 묻자 마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네, 근데 그 손님들…… 르카디우스 제국의 복식이 아니었어요. 거기다 다들 후드를 눌러쓰고 계셔서 얼굴도 안 보이는지라 전 조금 무섭더라고요. 공용어도 아니었고…….”

마델은 조금 불안해 보였다.

르카디우스 제국에서는 타국인을 자주 볼 수가 없었다. 그나마 가장 많이 보는 타국인은 옆 나라인 시히카와 스엘팅턴 사람들 정도였다. 하지만 시히카와 스엘팅턴의 사람들은 르카디우스 사람들과 생김새도 닮았고 비슷한 문화를 공유하는 데다가, 공용어를 사용해 거부감이 없는 편이었다.

후드를 눌러써 얼굴도 보이지 않는 머나먼 타국의 손님. 레슬리는 알 수 없는 일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깜빡거렸다.

“손님이라니.”

그 베스라온조차 적잖게 당황한 듯 보였다.

그건 레슬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이 저택에서 살면서 가장 귀하다고 여긴 것은 유명한 화가의 그림도, 보석도, 귀한 고서도 아닌 손님이었다. 보통 귀족들 사이에선 흔하디흔한 편지조차 꼭 필요한 몇 통만 드나들었을 뿐이다.

레슬리가 크고 나서는 그녀를 초대하기 위한 편지가 많아졌지만, 그건 최근의 일일 뿐이었다.

‘누가 온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던가.’

베스라온은 눈을 가늘게 뜨고 기억을 헤집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자신은 아무 말도 듣지 못했다. 어머니나 아버지가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에게 손님의 이야기를 빠트렸을 리는 없으니, 지금 온 손님은 초대를 받지 않고 온 손님이라는 뜻이었다.

그걸 증명하듯 밖은 갑작스러운 손님들을 맞이하는 사용인들의 분주한 움직임으로 소란스러웠다.

“오라버니.”

레슬리가 동그래진 눈으로 베스라온을 바라보자 그는 몸을 일으켰다.

“손님이 왔는데 앉아 있을 수는 없지.”

“저도 갈래요.”

레슬리는 몸을 일으켜 로비로 향하는 베스라온의 뒤를 따랐다. 중앙 계단 쪽으로 가면 갈수록 왁자지껄한 소리가 더욱 커졌고 바쁘게 움직이는 사용인들이 많아졌다.

“오라버니, 손님이라니 누구일까요?”

“글쎄, 나도 짐작 가는 바가 없구나.”

그러더니 제 겉옷을 벗어 레슬리에게 입혀 주었다. 베스라온에게는 상체에 딱 맞는 편한 실내복이 레슬리에게는 원피스만큼 헐렁해, 발목을 덮었다.

레슬리는 왜 베스라온이 자신에게 겉옷을 입혀 주는지 밑을 바라보았다가 이유를 깨달았다.

다른 귀족들은 집에서도 깔끔하게 차려입고 있었다지만, 셀바토르 공작저에서는 다들 자신이 원하는 옷을 입었다. 셀바토르 공작은 답답한 걸 싫어해 늘 가벼운 옷을 입고 있었고, 사이레인과 베스라온은 튜닉을 주로 입었다.

레슬리 역시 귀족의 실내복이라 하기에는 얇은 원피스를 즐겨 입는 편이었다. 그래서 혹시 몰라 베스라온이 제 겉옷을 입혀 준 것이다.

“아, 가서 갈아입고…….”

레슬리가 당황하며 제 옷을 내려다보았다. 말을 채 잇기도 전에 루엔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오십시오. 먼 거리를 오느라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그나마 늘 집에서도 깔끔하게 차려입고 다니던 루엔티가 먼저 급작스러운 손님을 맞은 모양이었다. 옆에는 제나가 서 있었다.

“부디 저를 따라오시길.”

그런데 두 사람이 말하는 언어가 이상했다. 르카디우스 제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 어디더라, 어디서 이 언어에 대해 들었더라. 기억해 내기도 전에 레슬리와 베스라온은 중앙 계단에 도착했고, 레슬리는 그 자리에서 공작저의 로비를 내려다보았다.

셀바토르 공작저의 저택은 마치 성처럼 가운데가 뚫려 있는 상태라 중앙 복도까지만 나오면 로비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덕분에 레슬리는 위험하다고 말리는 베스라온의 목소리를 들으며 난간에 붙어 몸을 쭉 뺐다.

“쉬실 수 있게 방을 청소해 두었습니다.”

제나 역시 손님들을 따라온 사용인들을 맞이하느라고 정신이 없어 보였다.

이 오랜만에 맞이한 손님들에게는 특이한 점이 몇 가지가 있었는데, 얼굴조차 보이지 않게 옷을 꼭꼭 싸매고 있다는 것과 르카디우스 제국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옷을 뒤집어쓰고 있다는 점이었다.

‘마델이 말한 그대로네.’

잠시 레슬리는 손님들이 이야기하는 소리를 듣고 있다가 드디어 저 언어가 어느 나라에서 사용하는 말인지 기억해 냈다.

예전에 루엔티와 서재에서 공부할 때 지도를 펴 놓고 각 나라의 이야기를 했던 적이 있었다. 그 나라의 문화와 언어 그리고 통용되는 화폐와 역사까지. 루엔티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언어라면 예시로 몇 문장을 들려주기도 했었다.

많은 나라의 언어를 들었지만, 그중에서도 아롬벨의 언어를 똑똑히 기억한 이유는 저 통통 튀는 듯한 독특한 발음 때문이었다. 르카디우스 제국어는, 특히 수도의 사람들이 쓰는 말은 노래하듯 부드럽게 흘러가지만, 아롬벨의 언어는 마치 북을 튕기는 듯한 즐거운 억양이 있었다.

“공용어가 아니에요! 저건 아롬벨의 언어 같은데…….”

레슬리가 난간에서 떨어지지 않고 놀라움에 오히려 몸을 더 빼자, 작게 한숨 쉰 베스라온이 레슬리를 만류했다.

하지만 그건 신경 쓰지 않는 듯 동그래진 눈으로 레슬리가 종알종알 말을 이었다.

“아롬벨의 사람들일까요? 아롬벨의 사람들을 책에서 본 적이 있어요. 우리랑 다르다고 적혀 있었는데, 피부색이 우리랑 다르다고 했어요. 생김새랑 문화도 전혀 다르다고…….”

말을 잇던 레슬리가 입을 다물었다. 아까부터 동그랬던 눈이 더욱 동그래지며 이젠 입까지 벌어지고 있었다. 거기다 주변을 지나가던 사용인들 역시 놀라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베스라온이 레슬리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손님들이 하나둘 후드를 벗고 있었다. 그 후드 아래에서 보인 그들의 피부는 마치 밤과 같이 검은빛을 띠고 있었다.

피부가 검은색이라니. 레슬리는 눈을 깜빡거렸다.

셀바토르 공작가의 기사들처럼 태양에 피부가 그을린 것도 아니고 테론 삼촌처럼 석탄이 묻은 것도 아니었다. 마치 밤하늘을 한 가닥 빌려 와 몸에 두른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눈은 피부색과는 다르게 굉장히 밝은색이었다.

레슬리가 놀라 숨을 헐떡이며 베스라온에게 매달렸다. 머리로는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처음 보는 광경에 몸이 멋대로 움직였다.

“쉬이, 괜찮아.”

베스라온은 그런 레슬리의 등을 토닥이며 지금 모자를 벗은 이를 빤히 바라보았다. 레슬리 역시 그 사람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아롬벨 사람들의 피부색은 우리보다 더욱 짙은 편이지. 그 외에는 다른 점은 없단다.”

“그, 그렇군요.”

레슬리는 고개를 끄덕이고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려는 듯 숨을 작게 내쉬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놀란 마음이 가라앉았다. 베스라온은 처음 본 손님들이 놀랍지도 않은지, 침착하게 레슬리의 마음이 가라앉는 걸 도왔다. 놀람이 가라앉고 시간이 조금 더 지나자 이젠 부끄러움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사람마다 다 다른 법이라고 했는데.’

자신도 은발이라는 이유로 스페라도 후작가에서 그런 상황을 겪었으면서 피부색이 다르다고 처음 본 손님들을 무서워하다니. 레슬리가 볼을 붉히며 고개를 떨구자, 베스라온이 웃으면서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처음 봤으니까 놀라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

그 말에 레슬리는 시선을 살짝 돌려 베스라온의 암녹색 눈동자와 눈을 맞췄다.

“오라버니도 이렇게 놀라셨어요?”

레슬리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베스라온은 시선을 돌리면서 말을 이었다.

“루엔티 놈도 처음 저 손님들을 봤을 때 놀라서 굳어 버린 적이 있단다.”

자신의 이야기는 빼고 루엔티의 이야기로 넘어가는 걸 보니 저 손님들을 처음 봤을 적 베스라온도 놀랐던 모양이다.

레슬리는 작게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러고는 이제 내려 달라고 말하려는데, 베스라온의 시선이 누군가에게 집중되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베스라온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거기에는 가장 마지막에 모자를 벗은 사람이 서 있었다.

고동색 머리는 목덜미가 보일 정도로 짧았고 머리에는 황금색 구슬에 술이 달린 장식을 걸고 있었다. 옅은 갈색 눈동자는 얼마나 옅은지 햇빛이 닿으면 분명 다른 색으로 보일 것 같았다. 키는 작지만 몸은 기사 못지않게 우락부락했고, 이곳저곳에는 상처가 가득했다.

“저분은…….”

잠시 중얼거리던 베스라온은 알겠다는 듯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레슬리와 베스라온이 바라보고 있던 사람이 중앙 계단 쪽을 보며 크게 외쳤다.

“아셀라 셀바토르! 내 친구!”

중년 여성의 목소리였다. 레슬리는 눈을 깜빡거렸다.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유창한 공용어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제대로 말해 주질 않아서 내가 여기까지 오게 만드는 거야?”

그녀의 시선 끝에는 미소 지으며 걸어오는 셀바토르 공작이 있었다.

“편지 한 장 보냈다고 답장 대신 본인이 올지 몰랐군. 불청객이나 다름없어.”

불청객이라고 손님을 타박했으나 공작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반가움이 물들어 있었다.

“언제나 손님은 폭풍처럼 와야 즐거운 법이지!”

그러면서 그녀는 셀바토르 공작을 덥석 끌어안고 그녀의 등을 팡팡 쳤다.

“그건 자네에게만 그런 게 아닌가, 테펜텔.”

테펜텔이라 불린 여자는 셀바토르 공작의 타박에도 즐거운 듯 크게 웃었다.

“늙으면 키가 좀 작아질 줄 알았더니만 여전히 크군. 날 위해 좀 작아지는 게 어떤가, 아셀라?”

“헛소리를. 그런데 왜 자꾸 남의 축복의 이름은 빼먹는 거야?”

“르카디우스 제국놈들 이름은 너무 길어. 이름 길이에 따라 고귀함이 정해지나? 짧게 해도 괜찮은데 말이야!”

테펜텔은 크게 웃으며 자신의 친구를 바라보았고 그사이 베스라온과 레슬리는 로비에 도착했다.

“이게 누구야. 베스라온!”

“오랜만에 뵙습니다, 테펜텔 님.”

레슬리를 안아 들고 있는 베스라온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날 보고 이제 어버버하진 않는군. 처음 봤을 때는 엄청나게 놀란 듯 말을 더듬더니만. 루엔티 놈도 이젠 의젓해 보여서 꽤 놀랐지.”

테펜텔은 히죽히죽 웃으며 고개를 숙이고 헛기침하는 베스라온과 모른 척 아예 고개를 돌리고 딴청을 피우는 루엔티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레슬리는 그 말에 작게 키득거렸다. 오라버니들도 만만찮게 놀란 모양이었다.

“그런데…… 결혼했었나, 베스라온? 그 아이는 네 딸?”

마지막으로 테펜텔의 시선이 아직도 베스라온의 품에 안겨 있는 레슬리에게 닿았다.

“이렇게 큰 손녀가 있는데도 나에게 말도 안 해 줬던 거야? 이건 배신이야, 아셀라! 말했더라면 어마어마한 선물을 보내 줬을 텐데!”

“배신은 무슨.”

혼자 느끼는 배신감에 테펜텔이 몸부림치자, 셀바토르 공작은 그녀를 가볍게 비웃어 넘기며 베스라온의 품에서 레슬리를 데리고 왔다. 그리고 보란 듯 안아 들고는 옅은 미소를 머금으며 테펜텔을 바라보았다.

“내 딸이야.”

“뭐?”

테펜텔의 눈동자가 레슬리가 처음 그녀를 봤을 때만큼 커졌다.

“내 딸.”

공작이 다시 말하자, 아까까지 호쾌했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파랗게 질린 얼굴로 도리질하기 시작했다.

“거, 거짓말하지 마! 이렇게 귀여운 아이가 네 딸일 리가 없어!”

“정말이야. 내 딸이네. 못 믿겠으면 제나에게 물어보든가.”

그 말에 제발 아니라고 말해 달라는 듯 간절한 눈동자로 테펜텔이 뒤를 돌아보았다. 테펜텔이 데려온 사람들에게 방을 배정하고 있던 제나가 그 시선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 아가씨랍니다.”

마치 ‘너희 집엔 레슬리 없지? 부럽지?’ 이런 의미가 섞인 목소리였다.

테펜텔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제나를 한 번, 레슬리를 한 번 그리고 마지막으로 셀바토르 공작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로 셀바토르 공작에게 다가가더니, 손을 내밀어 레슬리를 번쩍 들었다.

엉겁결에 손님의 손에 번쩍 들린 레슬리는 당황해 굳어 버렸다. 그리고 그제야 테펜텔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르카디우스 제국인보다 더욱 깊고 진한 눈매였다. 그리고 그 피부 덕에 몰랐지만, 눈매에는 주름이 있었다. 어머니와 비슷한 나이신 걸까.

레슬리가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전에 테펜텔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떻게 아셀라에게서 이런 딸이 태어난 거지?”

레슬리를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거기서 멈추지 않고 신난 듯 레슬리를 빙글빙글 돌리기까지 했다. 마치 할머니가 갓 태어난 손녀가 너무 귀여워 어찌할 줄 모르는 움직임이었지만, 생각보다 그 움직임이 격하다는 게 문제였다.

“우리 아들이랑 결혼시킬래, 아셀라? 가장 아끼는 셋째 아들놈을 줄게.”

“싫어.”

단호한 거절에 다시 레슬리를 바라보더니, 더욱 간절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처, 첫째 놈도 줄게! 남편이 둘인 거라고! 거기다 내 영토도 줄게!”

“싫다고.”

공작은 작게 한숨 쉬더니 레슬리를 빼앗아 왔고 아직도 테펜텔의 외침에 머리가 핑글핑글 도는 레슬리를 토닥였다.

“귀엽지?”

자랑스러운 목소리에 테펜텔은 고개가 떨어져라 끄덕였다. 레슬리는 다시 테펜텔에게 넘어갈까 다급하게 어머니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그런 레슬리를 보며 낮게 웃던 공작이 테펜텔을 바라보았다.

“피스토레도 똑같은 소리를 하더군. 다들 우리 딸이 퍽 탐나는 모양이야.”

“피스토레!”

자신에게 황실의 혼담이 왔었다는 사실에 레슬리가 놀라기도 전에 테펜텔이 크게 머리를 흔들었다.

“그 운 좋고 손 빠른 놈!”

“남 황제의 이름을 막 불러 대면 안 되지.”

“여긴 셀바토르 공작저가 아닌가.”

테펜텔은 호쾌하게 웃었다. 그녀가 웃을 때마다 짧은 머리에 달린 황금색 구슬 장식이 흔들거렸다.

“어, 어머니. 저분은…….”

간신히 진정된 레슬리가 셀바토르 공작의 품에서 고개를 들고 묻자, 테펜텔이 잊어버리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테펜텔 덴. 아롬벨의 사람이며 바덴의 영주란다.”

그러고는 시원시원한 웃음을 지었다.

“네 어머니의 친구이자 전우지. 앞으로 종종 보게 될지도 모르니 잘 부탁한다.”

말을 마친 테펜텔은 레슬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투박하고 거친 것이, 사이레인과 공작을 떠올리게 하는 손이었다.

“레슬리 슈야 셀바토르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레슬리가 머뭇거리면서 무릎을 굽히려고 하자 테펜텔은 고개를 젓더니 다시 손을 내밀었다.

악수라니. 그건 레슬리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인사 방법이었지만, 손님을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조심스레 손을 뻗어 잡았다. 거칠거칠하지만 따스한 감촉이 밀려옴과 동시에 레슬리의 몸이 크게 요동쳤다.

“반가워, 아셀라의 딸. 레슬리 슈야 셀바토르라고? 아셀라보다 그 미들 네임인지 축복의 이름인지 하는 이름이 낫구먼. 그런데 왜 르카디우스 제국 놈들은 이름을 두세 개씩 붙이는지 모르겠어!”

레슬리의 작은 몸이 정처 없이 흔들렸다. 테펜텔의 기준으로는 그다지 세게 흔든 것이 아니었으나, 레슬리에게는 태풍과도 같았다.

다시 눈앞이 핑글핑글 돌기 시작했고, 그런 레슬리를 구원한 건 다른 사람도 아닌 사이레인이었다.

“남의 딸에게 무슨 짓거리야!”

어디를 다녀왔는지 망토까지 두른 사이레인이 레슬리를 번쩍 안아 들었다. 베스라온에게, 셀바토르 공작에게 그리고 마지막은 사이레인에게 들린 레슬리는 널찍한 어깨에 매달려 숨을 정리했다.

“사이레인! 이 운 좋은 두 번째 남자!”

테펜텔은 다시 호쾌하게 웃으며 사이레인을 바라보았다.

“아셀라를 네가 데리고 갈지 어떻게 알았겠나. 아니지, 아셀라가 너를 데리고 갈지 전혀 몰랐던 거지.”

“우리 아내님 안목이 좀 높지.”

“나는 당연히 아셀라는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 거라 생각했어! 아니면 그 피스토레 놈하고 결혼하든가. 아니지, 피스토레 정도로는 아셀라를 감당하기가 힘들지.”

“우리 아내님이 좀 대단하지. 그러니 어울리는 사람은 나뿐이야!”

말이 뒤죽박죽 엇나가는 듯하면서도 어설프게 이어지고 있었다. 이 어지러운 대화에 끼지 못하는 건 다행히도 레슬리뿐이 아니었다.

“헛소리들은 그만하고.”

셀바토르 공작이 나서 두 사람의 대화를 막았다. 그리고 사이레인에게서 레슬리를 데려왔다.

“응접실로 가자고! 제나, 나는 늘 마시던 술로! 출출하니 간단한 먹거리도 부탁해!”

테펜텔은 웃으면서 크게 외치더니 제나와 공작이 안내하기도 전에 성큼성큼 중앙 계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셀바토르 공작의 옆을 지나칠 때, 테펜텔의 걸음이 조금 느려졌다.

“선물을 가져왔어, 아셀라.”

테펜텔이 웃음기가 서린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

타국의 손님은 3층의 응접실이 아니라 셀바토르 공작의 집무실로 안내되었다. 그녀가 셀바토르 공작에게 말한 마지막 한마디 때문이었다.

“좋은 집무실이네.”

테펜텔은 집무실 한가운데에 놓인 긴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셀바토르 공작의 집무실에는 쓸모없는 물건 하나 없이 깔끔하며 무미건조했다. 딱 집무실 주인의 성격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었다.

하지만 어딘가 부드러운 분위기도 흘러나오고 있었다. 예를 들자면 책상 한편에 놓여 있는, 주인이 떨어트린 듯 보이는 연분홍색 리본이라든가, 셀바토르 공작가의 인간들에게는 작을 게 분명한 폭신한 1인용 소파가 그걸 여실하게 드러냈다.

테펜텔은 낮게 웃다가 자신의 맞은편에 앉은 셀바토르 공작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누구 딸이야?”

제나가 자신의 앞에 차가운 음료를 놓기가 무섭게 그걸 전부 들이켠 테펜텔은 살 것 같다고 외치며 얼음이 가득 든 음료 잔을 내려놓았다.

“정말로 네 딸일 리가 없어. 냄새가 안 닮았잖아.”

그러면서 자신의 코를 톡톡 쳤다. 테펜텔의 그 말에 사이레인은 자신의 몫으로 나온 낮은 도수의 술을 마시다가 테이블 위에 쾅 소리가 나게 술잔을 내려놓더니, 무시무시한 눈으로 테펜텔을 바라보았다.

“레슬리는 우리 부부 딸이야. 다시 한 번 그딴 소리를 지껄이면 이 저택에서 쫓아 버릴 줄 알아, 테펜텔.”

사이레인의 경고에 테펜텔은 졌다는 듯 손을 들어 보이더니 작게 투덜거렸다.

“베스라온과 루엔티한테는 안 그랬던 놈이.”

“그놈들하고 우리 딸이 똑같나!”

“베스와 엔티가 불쌍해.”

눈을 찡그리던 테펜텔은 이내 제 품을 뒤져 두꺼운 양피지 묶음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는 쓱 셀바토르 공작 쪽으로 밀었다.

“자, 부탁한 에피알테스에 관한 자료야.”

그러고는 마침 제나가 자신이 좋아하는 슈크림 빵과 함께 가져온 두 번째 잔을 반쯤 들이켰다.

“부탁이니 다른 곳에 보이지 마. 이제 전설 취급을 받아 아무도 믿지 않는다고는 해도 귀한 자료니까. 여기서 보고 바로 나에게 돌려줘, 아셀라.”

테펜텔의 입안에서 얼음이 아작아작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그런데도 답답한지 테펜텔은 연거푸 찬물을 들이켰다.

“약속하지.”

공작은 손을 내밀어 양피지를 묶고 있는 붉은 끈을 잡아당겼다. 아롬벨의 고어로 쓰여 있는 기록은 생각보다 더 오래되었는지, 양피지 이곳저곳이 낡아 있었다. 손대기만 해도 바스러질 것 같은 기록을 셀바토르 공작은 조심스레 한 장, 한 장 넘기기 시작했다.

“휴, 내가 우리 영토의 비밀까지 털어 너에게 줄 줄이야. 이놈의 비싼 목숨값…….”

테펜텔을 투덜거리며 제 목을 매만졌다. 그녀의 목에는 옅은 상처가 나 있었다.

“정 걱정되면 여기로 오지? 내가 자리 하나 정돈 만들어 줄 수 있어.”

셀바토르 공작은 담담하게 웃으며 양피지를 읽어 내려갔다. 공작의 제안에 테펜텔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도리질 쳤다.

“싫어! 여기 인간들은 나만 보면 손가락질하기 바쁘단 말이야. 피부가 검은 것 외에는 다 똑같은 인간인데.”

“그런 놈들 손가락 하나둘 잘라 주면 금방 못 하게 될걸?”

도와줄까? 사이레인은 제나가 가지고 온 빵을 하나 덥석 물며 아무렇지도 않게 답했다. 그 말에 테펜텔은 잠시 상상하더니 빵을 하나 삼키고는 대답했다.

“됐어. 르카디우스 놈들 전부를 잘라야 할지도 몰라. 그나저나 레슬리라니 이름은 이쁘네. 레슬리 슈야 셀바토르.”

테펜텔이 동그란 빵을 하나 더 입에 집어넣으면서 레슬리의 이름을 다시 입안에서 우물거리다가 제 손에 들린 빵을 바라보았다.

“슈……? 슈크림!”

그러더니 제 손에 들린 빵을 꾹 눌러 보았다. 웃기지도 않는 말장난을 치고선 저 혼자 웃는 테펜텔을 가볍게 무시한 사이레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레슬리가 좀 이쁘지.”

“완벽한 아내 바보, 딸 바보구먼. 전쟁터에서는 용병 왕이라 불렸던 인간을 찾아볼 수가 없어. 하긴 아셀라랑 결혼했으면 그 정도는 돼야지.”

그 말이 마치 당연한 자랑거리라도 되는 양 사이레인은 뿌듯하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무언가가 생각난 듯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잠깐, 바텔은 어딨지? 같이 안 온 거야?”

사이레인의 물음에 빵을 하나 더 집어 먹으며 테펜텔이 태연하게 답했다.

“이르게도 물어보는군. 바텔은 영토에 머무르기로 했어. 우리 부부가 전부 자리를 비우면 안 좋으니까.”

“오랜만에 바텔이랑 한잔하고 싶었는데. 몸은 허약한 샌님이 술은 잘 마셔서 좋았단 말이야.”

“한 번 더 남의 남편을 샌님이라고 부르면 챙겨온 술을 주지 않을 줄 알아, 사이레인. 학자라는 좋은 단어를 내버려 두고 왜 그렇게 부르는지 모르겠어.”

“술을 가져왔나? 그슨의 술이야?”

“그래, 너랑 아셀라가 특히 좋아하던 그슨의 술이야. 밤에 다 같이 한잔하자고. 피스토레도 끼면 좋을 텐데 말이야.”

테펜텔은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면서 살며시 웃었다. 어설픈 르카디우스 차기 황제와 완벽한 소공작과 제 용병단을 해체하고 온 용병 왕, 그리고 가난한 영토를 부흥시키기 위해 용병으로 참여한 타국의 영주.

어찌 보면 우스운 조합이었지만 그때는 참담한 상황과는 역설적이게도, 그들에게는 나름 즐거운 나날이었다.

“피스토레는 어떻게 지내나 몰라. 감 하나만은 묘하게 좋은 놈이었지.”

전쟁에는 어울리지 않던 사람이었다. 유약한 감성에 사람이 죽어 가는 전쟁터에서 매일 눈물을 흘리다가 탈진해 쓰려지려고 한 적도 있었다.

그런 피스토레가 혼란의 나날 때 살아남을 수 있던 두 가지 이유 중 하나는 그의 곁을 지킨 셀바토르 공작이었고 다른 하나는 유별하게 뛰어난 감이었다.

그가 불안하다 외치는 곳에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함정이나 적들이 있었고, 안전하다 느끼는 길에는 그 무엇도 없었다. 그런 피스토레의 감은 다른 선택에도 적용되었다.

처음엔 테펜텔 역시 그 이야기를 믿지 않았지만, 몇 번 그 광경을 목격하고 나니 신기가 든 게 아니냐 말하면서도 피스토레의 감을 믿게 되었다.

“르카디우스 제국 황제들의 능력이 그 감이 아니냐고 몇 번이나 의심했다니까.”

테펜텔의 말에 사이레인과 묵묵히 양피지를 읽어 내리던 셀바토르 공작마저 고개를 끄덕였다.

“아, 황태자는 정해졌나?”

그녀가 막 생각났다는 듯 등받이에 기댔던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눈을 빛냈다.

“아직 그 첫째랑 둘째 중 황태자는 정해지지 않은 거지?”

“그래.”

테펜텔의 물음에 공작은 양피지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곧 정해질 것 같더군.”

피스토레도 자신도 어느 정도 나이를 먹었다. 공작인 자신이면 몰라도 한 나라의 황제가 아직 후계가 없다는 건 위험한 일이었다.

그래서 최근 피스토레는 한층 더 힘겨워하고 있었다. 자신의 두 아이를 모두 좋아하는 데다가 마음도 유약한 놈이니 더욱 고르기가 힘들겠지.

“사적인 감정이 섞이는 거 아니야?”

테펜텔의 질문에 공작이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는 않을 거야. 그래도 황제니까.”

그걸 구분시키기 위해 선대 황제가 황태자였던 피스토레를 전쟁터로 내몰았던 것이었다.

“흐음.”

타국의 일이라는 걸 알았기에 테펜텔은 궁금해하면서도 더는 황태자의 일에 관해 묻지 않았다. 나중에 정해지면 알려지겠지. 그렇게 덧붙이는 테펜텔을 보며 사이레인이 씩 웃었다.

“이 나라로 오라니까?”

“이상한 놈이 황태자가 되면 차라리 너희가 우리 쪽으로 오지? 괜찮은 영토 하나는 마련해 주지.”

테펜텔이 사이레인을 보며 손가락을 까딱거리자 사이레인의 표정이 썩어들어 가기 시작했다.

잠시 사이레인과 테펜텔이 투닥거리는 사이, 셀바토르 공작은 양피지를 완독했다. 양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아롬벨의 고어로 쓰여 있어 읽는 데 시간이 조금 지체되었다.

“테펜텔.”

제나가 가져다준 네 번째 음료를 들이켜다가 말하라는 듯 테펜텔이 시선을 맞췄다.

“이게 다인가? 치료법은 적혀 있지 않은 건가?”

불만족스러운 셀바토르 공작의 목소리에 테펜텔은 고개를 끄덕였다.

“치료법 따위가 적혀 있으면 ‘악몽’이란 이름이 붙지 않았겠지.”

에피알테스, 본래는 ‘악몽’을 뜻하는 단어였다. 하지만 끝없이 이어지던 전염병을 악몽처럼 여긴 사람들은 그걸 에피알테스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전염병이 빠르게 퍼짐과 동시에 에피알테스라는 이름도 퍼져 나갔다.

결국 에피알테스는 제 본래 뜻이었던 ‘악몽’을 잃어버렸고, ‘악몽’은 다른 단어로 대체되었다.

“악몽이라는 이름을 뺏어 올 정도로 강한 병이었으니까.”

테펜텔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이더니 말을 덧붙였다.

“이래 봬도 있는 자료, 없는 자료 다 털어 왔다고. 너니까 보여 주는 거야, 아셀라. 너에게 진 빚이 많으니까 말이야.”

“이런.”

테펜텔의 말을 들으며 셀바토르 공작은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이게 마지막이었는데.”

레슬리가 2차 시험을 치르는 동안 공작은 거대한 황실의 서고에서 책들과 기록을 읽었고, 루엔티는 마법사의 저택을 뒤졌다. 베스라온 역시 셀바토르 공작가의 도움을 주는 사제와 함께 신전의 서고에서 에피알테스의 자료를 찾아보았다. 하지만 충분하지 않았다.

에피알테스는 이미 전설이 되어 버린 이름이었고, 르카디우스 제국은 악몽에 대해 제대로 된 자료를 기록해 두지 않았다. 그나마 있던 기록도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 읽기가 힘들 정도였다. 그래서 그녀는 내심 테펜텔이 가져올 자료에 기대하고 있었다.

‘적어도 방어하는 법이라도 적혀 있으면 좋으련만.’

사실 테펜텔에게 물었던 치료법 따윈 바라지도 않았다. 그래도 한 번쯤은 막아 내거나, 그 위력을 약화할 방법이 있지 않을까 기대했었다.

속상한 마음에 눈을 찡그리며 작게 숨을 흘리자 테펜텔이 슈크림이 가득 든 빵을 입에 물고 눈치를 보더니 조심스레 말을 흘렸다.

“어……. 이트바나 쪽에는 좀 더 기록이 있을지도 모르지. 비록 성은 다 불탔다지만 오랫동안 남아 있던 기록이니 누군가는 기억하지 않을까?”

“그럴 리가.”

공작은 씁쓸하게 웃었다.

기록의 파편이나 기억하는 자를 남길 정도로 메데이아는 어리석지 않았다. 에피알테스의 기록을 기억하는 자, 그리고 그 사람을 기억하는 자까지 철저하게 손을 썼을 것이 분명했다.

‘도대체 뭘 원하는 건지.’

다시 작은 숨이 흘러 집무실 책상 위로 퍼졌다. 아렌도를 황위에 올리고, 에피알테스를 손에 넣고. 그리고…… 그리고 그 뒤엔? 분명 그 너머를 보고 있는데, 셀바토르 공작의 눈에는 그게 잘 보이지 않았다.

아렌도를 황위에 올려 그 권력을 나눠 갖기에는 그는 적합한 인물이 아녔다. 아렌도는 르카디우스 제국 황족의 핏줄답게 욕심이 많았고, 집착 역시 뛰어났다. 그 성격은 불같던 선대 황제의 성격을 쏙 빼닮았다.

‘애당초 피스토레가 유별났던 거였지만.’

아렌도와 선대 황제가 그간의 르카디우스 황제들을 닮았고 피스토레가 별종이었다. 오죽했으면 선대 황제가 귀한 황실의 핏줄을 전쟁터로 내몰았을까. 그리고 피스토레의 둘째인 콘스텐 역시 그런 아버지의 성격을 꽤 닮아 있었다.

‘메데이아는 어디를 보고 있는 건지.’

“맞다. 아셀라.”

그런 셀바토르의 눈치를 살살 살피던 테펜텔이 제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바텔이 전해 주라더군. 네 편지를 받고 나름 자신도 이것저것 알아본 모양이야. 음, 무슨 실마리라도 있지 않을까? 너도 알지만, 바텔은 똑똑하니까.”

하지만 테펜텔도 셀바토르 공작도 알고 있었다. 바텔의 기록은 원하는 답을 주지 못할 거라는 걸. 몇 개의 나라에 남아 있는 기록도, 마법사의 저택도 그리고 신전도 이렇다 할 답을 내놓지 못했다.

그럼에도 셀바토르 공작은 희망을 놓지 않고 바텔이 작성한 기록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내 미소 지었다.

“이걸 먼저 건네줬어야지, 테펜텔.”

***

집무실 문이 닫힌 지 한참이 지났다. 그리고 공작저 집무실의 문 안쪽과 똑같이, 밖의 상황도 밝은 편은 아니었다.

레슬리는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아라벨라가 돼서 돌아왔더니, 갑자기 그걸 그만두라고 말하고는, 후로는 이렇다 할 말씀도 없었다.

물어보고 싶어도 공작님의 얼굴이 어두워 말도 못 꺼내고 있었는데, 용기를 내 물어볼 마음이 생기니 손님이 들이닥쳤고 해가 저무는데도 나올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다.

‘재판 때도 이랬지.’

그때는 집무실에 쳐들어가 대답을 들을 수 있었는데.

레슬리는 눈을 찡그리며 차가운 테이블 위에 기대 뺨을 대었다.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어머니가 자신의 대답을 피하고 있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레슬리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눈을 찡그렸다. 공작의 반응으로 테펜텔이 갑자기 찾아온 폭풍 같은 손님이라는 걸 충분히 알고 있는데도 마구잡이로 감정이 날뛰었다.

‘답답해.’

레슬리는 눈을 깜빡였다. 어서 달려가 이야기하고 털어 버리고 싶은데. 그리고 여태 어머니와 못 나눈 이야기를 나누고, 자랑하고 맛있는 걸 먹고, 정원을 산책하고 싶은데.

‘내가 이렇게 인내심이 없는 사람이었나.’

레슬리는 괜스레 힘주어 검은 토끼 인형을 꽈악 끌어안았다. 그러고도 답답함이 풀리지 않아 테이블에 이마를 쿵 하고 박았다.

“레슬리.”

아니, 박으려고 했다. 레슬리의 이마는 테이블에서 조금 떨어진 위치에서 뚝 하고 멈췄다.

“뭐 하는 거야.”

언제 온 것인지 루엔티가 문 앞에 서 있었다.

루엔티는 노크도 없이 성큼성큼 레슬리의 세 번째 방에 들어오더니 제 손을 테이블과 레슬리의 이마 사이에 넣었다. 그리고 천천히 이마를 올려 주었다. 마법의 힘은 사라졌는지 작은 머리는 순순히 루엔티의 손길에 따라 원위치로 돌아갔다.

레슬리가 불퉁한 얼굴로 루엔티를 바라보자, 루엔티는 웃으며 제 안경을 벗어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우리 막내님이 화가 나셨다고 들었는데.”

이미 베스라온에게 들은 것이 있을 텐데도, 루엔티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능청스럽게 굴면서 레슬리의 옆에 앉았다. 그러더니 자연스럽게 레슬리의 간식으로 나온 마들렌을 가져다 한 입 베어 물었다.

“어머니와 싸웠다면서?”

“제가요?”

자신이 언제 어머니와 싸웠단 말인가? 약간의 마찰이 있을 뿐이었지.

“저는 어머니랑 큰 소리를 낸 적도, 나쁜 말을 한 적도 없는걸요.”

레슬리는 루엔티를 바라보며 외쳤다.

“그리고 싸움이라는 건 사이가 나쁜 사람들끼리 하는 거잖아요? 저는 어머니랑 사이가 나쁘지 않아요.”

사이가 나쁜 사람들끼리 언성이 오고 가야 싸움이 아니던가. 레슬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루엔티를 바라보자 루엔티는 입술 한쪽을 끌어 올리며 웃었다.

“싸운 거지.”

레슬리의 몫으로 나온 차까지 자신이 홀짝 마시며 말을 이었다.

“둘 다 말도 안 해. 집안 분위기는 쌀쌀해져 가. 고함이 오가고 주먹질을 해야만 싸운 건 아니지. 말을 하지 않고 서로 얼굴을 보지 않으려 해도 싸운 거야. 그리고 사이가 좋은 사람들끼리도 싸운다?”

놀랍지? 그렇게 말하며 루엔티는 마들렌을 하나 더 집어 먹었다. 레슬리의 간식을 뺏어 먹는 버릇은 없었으나, 손님들을 맞이하느라고 지친 모양이었다. 이 저택에서 아롬벨의 언어를 아는 사람은 몇 명 없었으니까.

마들렌을 전부 집어 먹는 루엔티를 보며 레슬리는 눈을 밑으로 살며시 내렸다.

“싸운다니…….”

“그건 나쁜 게 아니야, 레슬리.”

그사이 마델이 마들렌과 갖은 디저트를 가져와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고, 서올리는 따듯한 코코아 두 잔을 가져왔다. 두 사람 나름대로 레슬리의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서 좋아하는 음식들로 가져온 듯 보였다.

루엔티는 다시 손을 뻗어 마들렌 하나를 입속에 넣었다.

“오히려 좋은 거지.”

좋다니? 레슬리의 눈이 다른 의미로 동그래졌다.

“우리 집이 특이한 거였지. 그간 불화라 불릴 만한 게 거의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공작과 사이레인, 그리고 베스라온과 루엔티면 몰라도 이 공작저에서 그 누구든 레슬리와 불화를 일으키지 않았다. 작은 마찰은 조금씩 일어났으나 금방 해결되어 싸움이라 하기도 민망할 정도였다.

레슬리는 자신이 잘못하면 금방 인정할 줄 알았고, 부족한 점은 빠르게 습득했으니까.

‘한 번 터질 때가 됐지.’

루엔티는 마델이 가져온 바구니에서 사과 한 알을 꺼내 입에 물었다. 통으로 가져온 걸 보니 이건 자신의 몫이었다.

싸움이 없는 평화로운 상태, 그게 말이 되는 상황이던가. 같이 사는 이상 부딪치는 건 당연했다.

거기다 레슬리는 열여섯 살이었다. 떼 좀 쓰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 고집도 부릴 나이. 자신은 어른스럽다며 스스로 생각하며 행동하고 있지만 평생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차라리 지금 터진 게 더 낫지.’

만일 위험한 상황이었다면 손쓸 수도 없이 사이가 갈라졌을 것이다. 쉽게 갈라질 사이는 아니라지만, 지금 레슬리와 공작가를 노리는 인간은 보통이 아니었다. 스페라도 후작가만 해도 거듭 실패했으면서도 끊임없이 레슬리를 불에 넣어 죽이려고 하지 않았던가.

루엔티는 다시 사과를 한 입 더 베어 물었다. 물론 레슬리가 어머니와 처음으로 갈등을 일으킬 줄은 몰랐다. 레슬리는 어머니라면 죽고 못 살았고, 그건 셀바토르 공작인 어머니 역시 마찬가지였다.

‘싸우게 되면 나랑 먼저 부딪칠 줄 알았더니.’

루엔티는 다 먹은 사과를 테이블 위 접시에 올려 두며 말을 이었다.

“한 번 싸우고 나면 속이 좀 시원해져. 관계도 돈독해지지.”

레슬리는 그 말을 믿지 않는 눈치였다. 라일락색 눈동자가 불안한 기색을 머금고 이리저리 움직였다.

“오늘 저녁에 틈을 벌어 줄게. 가서 어머니한테 다 말해 봐.”

조금이나마 레슬리의 눈빛이 밝아졌고 작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집어 든 스콘을 다 먹은 루엔티가 손을 탁탁 털더니 제 머리끈을 풀고는 빙글 돌아 레슬리에게 등을 보이고 앉았다.

“자, 가지고 놀아.”

레슬리는 긴 루엔티의 머리를 빗어 내리고 땋아 리본과 핀으로 장식하는 걸 좋아했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 유달리 루엔티의 머릿결이 좋았던 탓이다. 하지만 루엔티가 딱히 좋아하는 눈치가 아니었기에 슬슬 그만뒀던 것을 오늘 오랜만에 허락해 준 것이었다.

레슬리의 눈동자가 조금 더 빛나기 시작했지만, 쉽게 손을 뻗지 않았다. 그러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이내 루엔티의 머리를 잡았다.

조심스레 붉은색을 입은 주홍빛 머리를 땋아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한참, 루엔티의 모든 머리가 가닥가닥 땋아지고 끝에는 리본과 꽃이 달렸다. 거울을 통해 제 꼴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루엔티가 다시 안경을 집어 들었다.

“기분 좀 나아졌어?”

제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묻자, 레슬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 무슨 일이 있더라도 어머니는 너를 싫어하지 않아. 공작저의 모두가 그럴 거야.”

루엔티는 몸을 일으키고는 안경을 쓴 뒤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누군가가 테펜텔의 일행을 대접해야 하는데 자신이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기에 제나가 상당히 고생하고 있을 게 뻔했다.

“일단 나는 갈 테니까 무슨 일이 있으면 마델에게 말해서…….”

루엔티가 다시 레슬리의 머리를 쓰다듬는데, 누군가가 가볍게 노크하더니 조심스레 방문을 열었다.

“아, 여기 있구나.”

베스라온이었다. 셀바토르 기사단의 일로 하르트에게 다녀온 그의 손에는 작은 철제 상자가 들려 있었다.

“형, 그건 뭐야?”

루엔티는 눈을 찡그렸지만, 반대로 레슬리는 눈을 빛냈다.

솜사탕이었다.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는 상자가 아니던가.

마지막에 봤을 때보다 더 알록달록해진 철제 상자를 보고 레슬리는 몸을 일으켜 베스라온에게 다가갔다. 베스라온은 그런 레슬리가 귀엽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다가 번쩍 안아 들었다.

“우리 막내 주려고 가져왔지. 상인에게 말해서 가져오느라고 시간이 좀 걸렸구나. 기분이 풀렸으면 좋겠다.”

상자를 받아 든 레슬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야, 난 머리도 내줬는데!”

아직도 치렁치렁하게 리본이 달린 제 머리를 만지작거리면서 루엔티가 툴툴거렸다. 머리까지 내어 주며 달래 주었더니 형이 가져온 솜사탕 하나에 역전된 것이 달갑지 않았다.

잠시 그렇게 제 머리에 달린 리본을 풀다가 루엔티가 암녹색 눈동자를 빛냈다.

“레슬리. 솜사탕을 만들어 줄까?”

“만들 수 있어요?”

레슬리의 물음에 루엔티가 자랑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 오라버니가 못 할 게 뭐가 있어.”

일단 당당하게 외친 후 루엔티는 눈을 굴렸다. 분명 저 솜사탕을 만들 수 있는 기계가 있을 것이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도면…… 같은 건 없지만 마법사의 저택 놈들을 뒤지면 뭔가 나오겠지. 타국 출신도 있으니까. 없으면 털어서 만들게 하면 되는 거고.

요리…… 같은 건 잘 못 하지만, 주문으로 가동 정도는 할 수 있으니 충분하지.

약간의 확신을 가진 후 루엔티는 다시 외쳤다.

“이 오라버니만 믿어!”

루엔티의 당당한 외침에 레슬리는 철제 상자를 들고 환하게 웃었고, 그런 레슬리를 보며 베스라온은 잘됐다며 머리를 다시 쓰다듬어 주었다.

“솜사탕이 잔뜩 생기면요.”

레슬리는 제 손에 있는 철제 상자 열며 말을 이었다.

“셀리스 양이랑 나눠 먹고 싶어요.”

“셀리스 양?”

“신전에서 사귄 제 친구예요. 틸레이얼 선생님의 친척이래요.”

셀리스에 대해 조잘조잘 떠들며 이제 기분이 완전히 나아진 레슬리는 솜사탕을 꺼냈다. 처음 봤을 때와는 조금 다르게 뭉게구름 같은 솜사탕이 아니라 네모난 모양의 솜사탕이 상자에서 나왔다.

“아, 레슬리.”

잠시 솜사탕을 바라보던 루엔티가 환하게 웃었다.

“그거 알아? 솜사탕은 코코아에 찍어 먹으면 더 맛있어.”

루엔티의 말에 레슬리가 눈을 가늘게 떴다. 예전에도 루엔티 말을 믿었다가 골탕을 먹은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저번에 사 온 선물 상자 뚜껑을 열자마자 인형이 확 하고 튀어나오지 않나, 타국에서 사 왔다는 귀하디귀한 과자는 알고 보니 정밀하게 만들어진 모형이지 않나. 그 뒤에 진짜 과자와 인형을 선물 받았다지만, 의심의 깊어지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이걸요?”

“그래!”

루엔티는 레슬리를 보면서 정말 순수하게, 환한 웃음을 다시 머금었다. 오히려 그게 레슬리의 의심을 사고 있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루엔티의 언변은 요 몇 년 사이 더욱 성장했고, 여기서 빛을 발휘하고 있었다.

“봐 봐, 수프에 빵을 적셔 먹으면 더 맛있지 않아? 가끔 차에 쿠키를 적셔 먹기도 하지. 이번 솜사탕은 그걸 위해서 좀 단단해진 거야.”

그 말에 레슬리는 괜스레 자신이 들고 있는 솜사탕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단단해지고 네모나게 변한 것이 그럴 만해 보였다. 집어 먹기 편하도록 나름 개량된 것이었으나, 루엔티의 장난으로 순식간에 찍어 먹기 편하게 변한 것이 되었다.

“하지만 입안에 넣으면 사르르 녹는걸요. 게다가 찍어 먹는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는데.”

“그건 입안에 넣어서 그런 거지!”

베스라온이 루엔티를 바라보았지만, 제 형의 눈길을 슬며시 피하며 말을 이었다.

“코코아는 잠시 버틸 수 있어. 그리고 찍어 먹으면 솜사탕이 많이 달아져서 다들 잘 안 하는 거야. 하지만 우리 막내님은 단 걸 좋아하지.”

그리고 웃으며 턱짓으로 반 정도 남은 코코아를 가리켰다.

정말일까, 아닐까. 레슬리는 제 손에 들린 솜사탕을 바라보다가 코코아를 바라보았다. 단것과 단것. 맛있는 것과 맛있게 만나는 거니까…… 더 맛있어지지 않을까.

‘그래, 루엔티 오라버니를 믿어 보자.’

잠시 고민하다 레슬리는 두 눈을 꼭 감고 코코아에 솜사탕을 담갔다. 그리고 이어지는 참극. 눈사람 쿠키의 참극이 더 잔혹하게 재현되었다. 눈을 뜨기도 전에 솜사탕은 사라졌고, 레슬리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리고 크게 웃는 제 남동생을 보며 베스라온이 옅게 미소 지었다.

“훈련장으로 따라와라, 루엔티.”

***

아.

레슬리는 눈을 깜빡였다.

‘잠들었나?’

몸을 벌떡 일으키자, 폭신한 이불이 밑으로 떨어졌다. 주변을 둘러보자 자신의 침실이었고 창에서는 달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신전 시험에서 받은 피로와 여행의 여독이 풀려 있지 않은 상태에서 루엔티의 조언과 장난에 긴장이 완전히 풀려 잠에 든 모양이었다.

지금 이야기를 하는 건 무리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레슬리는 다시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어서 잠에 다시 들 생각이었다. 그리고 아침이 오면 부모님과 이야기를 나눠 보자.

그런데 발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지?’

누굴까. 이 야심한 밤에 자신의 방에 들어올 사람은 누구일까. 나쁜 사람은 아닐 것이다.

4년 전부터 셀바토르 공작저의 경비는 황실 못지않았다. 루엔티가 가져온 엄청난 양의 마법석이 정원과 저택 구석구석에 놓였고,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자들은 공작저를 떠났다. 그 때문에 일손이 확 줄어 버려 한동안 제나가 고생했지만.

게다가 지금은 셀바토르 공작과 사이레인, 베스라온에 루엔티도 저택에 있었고, 급작스러운 손님들로 오히려 경비가 강화된 상황이었다. 그러니 분명 지금 들어온 자는 자신을 해칠 만한 자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침대 밑에 숨어 있던 어둠을 조금씩 움직일 준비를 했다.

레슬리는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며 침을 삼켰다.

“자는군. 깨지 않게 조심해.”

사이레인의 목소리였다. 밖으로 튀어 나가려던 어둠이 다시 침대 밑, 어둠 속으로 사라졌고, 레슬리는 당황해 눈을 꼭 감았다.

“제나에게 듣기로는 그대로 소파에서 잠이 들었다는군. 많이 피곤했나 보지.”

혹시라도 레슬리가 깰까 사이레인은 조심스레 손을 뻗어, 투박한 손으로 레슬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뺨이 홀쭉해진 것 좀 봐. 좀 더 잘 먹어야 하는데.”

조심하는 것치고는 사이레인은 아예 침대 옆에 자리를 잡고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여보, 테펜텔에게 말해서 아롬벨에서 좋은 음식들을 좀 알려 달라고 하는 건 어떨까? 아니지, 아예 괜찮은 요리사들을 보내 달라고 하자고.”

“바타가 울걸.”

뒤이어 들려오는 목소리에 레슬리는 심장이 두근두근 뛰는 것을 느꼈다. 아까부터 사이레인이 누군가와 대화하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눈을 감고 있어서 몰랐는데, 셀바토르 공작이 같이 들어온 모양이었다.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리고 뒤이어 뺨을 쓰는 조심스러운 손길도.

“정말 홀쭉해졌군.”

“망할 신전 놈들. 이 작은 애를 일 시킬 게 뭐가 있다고.”

안아 들고 소중히 다뤄 줘도 부족한 아이인데! 사이레인의 투덜거림에 셀바토르 공작도 동의하는지 그를 말리는 말은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 뺨을 쓰다듬는 손길이 더욱 섬세해졌을 뿐이다.

“그런데 여보야.”

레슬리는 그 손길이 좋아 더욱 눈을 꽉 감고 열심히 자는 연기를 했다. 몸을 살짝 뒤척이기도 하고, 코를 골기도 했다. 어색한 연기에 오히려 일어나 있다는 걸 들킬 뻔했지만, 사이레인이 공작에게 말을 걸어 준 덕분에 공작을 속여 넘길 수 있었다.

“왜 레슬리에게 말을 하지 않은 거야. 분명 다 이야기하겠다고, 나와 마차에서 약속했잖아.”

평소의 사이레인과는 다르게 어딘가 아내를 못마땅해하는 기색이 깃들어 있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아라벨라를 포기하라 하니 애가 축 처져서는 끙끙 앓았잖아.”

“…….”

공작은 그녀답지 않게 침묵했다. 계속해서 레슬리의 머리를 쓰다듬었을 뿐이다.

“하지만…….”

한참 만에 공작이 목소리를 내었다. 목소리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고, 어딘가 아직도 망설이는 기색이 물씬 느껴졌다.

“아셀라, 여보.”

사이레인이 다시 나지막이 공작의 이름을 불렀다.

“당신이 스스로 말했지? 레슬리는 강한 아이라고.”

“그랬었지.”

“그렇지. 강한 아이야. 당신이 뭘 걱정하는지 알고 있어. 내가 레슬리에게 말할 때 옆에 있어 줄게. 이야기를 듣고 레슬리가 화를 내거나 이 저택을 떠나게 되는 선택을 하더라도 내가 당신 옆에 있을 거야.”

떠난다고? 내가? 다른 사람도 아닌 어머니와 아버지께 화를 낸다는 것도 믿기지 않는데, 자신이 이 저택을 떠난다니.

심장이 쿵쾅쿵쾅 큰 소리를 내며 뛰기 시작했다. 왜 자신이 그런 끔찍한 선택을 할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그래……. 고마워.”

잠시 세 사람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그리고 그 침묵을 깬 건 사이레인이었다. 목을 다듬듯 큼, 작게 헛기침을 한 사이레인이 입을 열었다.

“자는 애를 깨울까 무섭네. 일단 가서 내일 다시…….”

가시는 건가? 안 돼! 무슨 일이 있더라도 오늘 이야기를 끝내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도대체 이 일로 며칠을 앓았던가. 자는 척하고 있었다는 부끄러움도 잊은 채, 레슬리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저 안 자요!”

크게 외치고는 혹여나 두 사람이 가 버릴까, 제 얼굴을 쓰다듬던 공작의 손을 덥석 잡았다. 정말로 레슬리가 자고 있었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이렇게 불시에 몸을 일으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공작과 사이레인의 눈이 커졌다.

“자다 깬 거니, 레슬리?”

“어머니랑 아버지 때문은 아니에요. 목이 말라서…….”

레슬리는 공작이 떠날까 봐 그녀의 팔을 꼭 안고 눈을 깜빡였다. 엉겁결에 팔을 레슬리에게 붙잡힌 셀바토르 공작은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러자 사이레인 역시 의자를 가져와 자리 잡았다. 레슬리의 몸에 조금 크게 만들어진 의자는 사이레인에게는 너무도 작아 보였다.

“이야기를 들었구나.”

공작이 나지막이 묻자, 레슬리는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저에게 뭘 숨기시는 건지…… 말해 주세요, 어머니.”

말하기 전까지는 못 나간다는 듯 팔을 더욱 꼭 끌어안았다.

공작은 레슬리의 눈을 한 번 바라보더니 고개를 돌려 제 뒤에 앉아 있는 사이레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작게 눈을 찡그리더니 제 속에 담긴 이야기를 간신히 풀어 두기 시작했다.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레슬리의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놀라야 할 곳이 한두 곳이 아니었다.

셀바토르 공작이 여자아이를 찾던 이유가 오직 메데이아를 방해하고 견제하기 위함이었으며, 아라벨라가 되는 일은 견제의 연장선이었다. 거기까지는 레슬리도 크게 놀라지 않았다. 자신은 계약으로 들어온 관계가 아니던가. 메데이아의 이야기는 전에도 들어서 그런지 거기까지는, 그래, 거기까지는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아라벨라가 되어 다뤄야 하는 것이 에피알테스라는 점에서 레슬리는 저도 모르게 안고 있던 셀바토르 공작의 팔을 떨어트렸다.

에피알테스라니. 그 이름은 전설이 되고, 신화가 되어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이름이었지만, 역사서에서는 아직도 그 참혹함에 대해 상세히 다루고 있었다. 레슬리는 역사서에서 읽고 콘라드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며 몸을 작게 떨었다.

“그리고 스페라도 후작이 수도로 돌아온 모양이더구나.”

후작이? 레슬리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혹시 몰라 후작 부인의 친정인 르게인 자작가에 사람을 심어 두었지. 그리고 어제 그녀에게서 연락이 왔단다. 도착한 건 며칠 되었는데 그간 경계가 삼엄해 조금 늦은 모양이더구나.”

“후작이 수도에…….”

살아 있었구나. 역시 살아 있었어.

“그녀가 보내 준 편지에는 사슬과 고어로 된 수첩 이야기가 나왔단다.”

사이레인이 공작을 거들었다. 고어로 된 수첩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지만 사슬은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팔찌로군요.”

엠로아가 자신에게 주었던 팔찌는 아직도 레슬리의 옷장 가장 안쪽에 보관되어 있었다. 마델은 불길하다며 내버리고 싶어 했지만, 레슬리가 만류했던 팔찌 안에는 잘게 부서진 사슬 조각이 들어 있었다.

‘그걸 아가씨의 수프에 넣어서 먹게 하라고 했어요. 어떻게든 몸속에 집어넣어야 한다고 했는데……. 차마 그럴 순 없어서 팔찌를 만들어서 그 안에…….’

르카디우스 제국을 떠나기 전 레슬리를 찾아온 엠로아가 해 준 말이었다. 아직도 죄책감을 떨치지 못한 그녀의 뒤에는 엠로아를 쏙 빼닮은 작은 여자아이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레슬리는 그 아이를 한 번, 그리고 미안함에 눈물을 뚝뚝 흘리는 엠로아를 한 번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빵 맛있게 먹었어. 잘 가, 엠로아.’

“그래, 네 힘을 막아 내는 사슬일 테지.”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심스레 팔을 뻗어 레슬리를 안았다.

“레슬리, 내 딸아. 너는 죽는 걸 두려워하지.”

모두가 그렇겠지만, 레슬리는 특히 그 의지가 강했다. 그래서 불 속에서도 살아남았고, 절벽에서 떨어져서도 살아남았다.

셀바토르 공작은 그런 아이에게 자신의 힘을 위협할 수 있는 사슬과 후작이 여전히 존재하며, 신화에서나 나올 법한 에피알테스의 속으로 들어가 달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살기 위해 자신을 찾아온 아이를 죽이러 내보낸다니. 그토록 잔인한 일이 어디에 있을까.

레슬리를 안고 있는 공작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래서 나는 부끄럽게도 주저하고 입을 다물었단다.”

레슬리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품에서 작게 숨을 내몰아 쉬다가 품에 꼭 안겼다.

“저는요. 괜찮아요, 어머니. 죽는다는 것도 에피알테스도 무섭긴 하지만…….”

거기까지 말한 레슬리는 품에서 고개를 들고 어머니와 시선을 맞췄다.

“어머니가 저를 지켜 주실 테니까요.”

공작을 보며 환하게 웃은 레슬리는 다시 어머니의 품에 꼭 안겼다.

온몸에 퍼지는 따스한 온기에 레슬리는 생긋 웃었다. 공작이 자신을 이렇게 걱정해서 그녀답지 않게 말을 아꼈다는 것이 내심 감동이었다.

“그리고 이 일은 제가 아니면 할 수 없잖아요.”

자신은 아라벨라가 되었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메데이아는 적이었다. 그런 그녀의 계획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지금 단 한 사람, 자신뿐이었다.

“그러니 제가 할게요. 어머니, 어머니는 저를 지켜 주세요.”

공작은 머뭇거리다가 레슬리의 등을 쓸었다. 얼굴이 보이지는 않지만, 어머니가 옅게 웃고 있을 거라는 걸, 아버지는 뒤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을 거라는 걸 레슬리는 잘 알고 있었다.

‘후작…….’

어머니와의 계약도 있고, 복수를 하고 싶은 후작도 돌아왔다. 에피알테스가 무섭긴 했지만, 물러날 이유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레슬리는 따스한 품에 안겨 웃음을 머금었다.

***

“카리우.”

피곤한 얼굴의 피스토레가 자신의 친척을 맞이했다.

“하늘의 주인을…….”

무릎을 굽히는 제 친척을 보자마자, 피스토레는 몸을 벌떡 일으켜 그를 만류하였다. 황제의 무릎 위에 있던 서류들이 우수수 발밑으로 떨어졌다.

“그러지 말게. 그러지 마, 카리우. 자네가 그러면 홀로 자네를 응접실에서 맞이한 보람이 없지 않나.”

“하지만…….”

“부디, 내가 단 하나뿐인 혈육을 만나는 데 피곤함을 느끼지 않게 해 주게.”

피스토레는 진심을 담아 아이테라 대공의 손을 잡았다. 대공은 황금색 눈동자로 잠시 바닥을 내려 보다가 피스토레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럼, 피스토레 형님.”

아이테라 대공의 말에 그제야 피스토레는 눈 그늘이 짙어진 얼굴로 환하게 웃었다.

“그래, 그래. 카리우, 내 동생! 자, 앉자고. 내가 동생이 좋아하는 와인을 마련해 놨지.”

피스토레는 웃으면서 제 친척 동생의 손을 잡고 소파로 이끌었고 아이테라 대공의 잔에 넘치도록 그가 좋아하는 와인을 따라 주었다.

“감사합니다, 형님.”

대공이 옅은 미소를 머금으며 인사하자 피스토레는 기쁜 듯 웃었다.

피스토레는 진심으로 자신의 친척 동생을 좋아하고 있었다. 단 하나뿐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친척이었고, 어릴 때부터 같이 자라 온 사이였다. 그리고 아이테라 대공, 카리우 곤 아이테라는 진실로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는 신하였다.

그런 제 동생에게 요즘 연달아 나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4년 전 무역선 침몰 사건을 시작으로 스웰라 대공비가 앓기 시작했고, 피스토레는 그 일로 몇 번이나 제 동생을 위로해 주었다.

하지만 불운은 사라지지 않았고, 그 여파는 여실하게 제 동생을 잡아먹고 있었다. 그래서 피스토레는 더욱 가엾은 제 동생을 진심으로 위로하고 있었다.

“오늘 부른 건 다른 일이 아니야.”

셀바토르 공작 다음으로 믿고 있는 그에게 피스토레는 아낌없이 제 와인을 나눠 주었다.

“드디어 결정했거든.”

“무엇을 말입니까, 형님?”

형님. 듣기 좋은 울림이었다. 피스토레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황태자 건 말이야.”

아이테라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결정하셨군요.”

“그래, 드디어…… 결정했지.”

포도주를 마시는 피스토레의 얼굴이 다시 어두워졌다. 어딘가 속 시원해하면서도 또 어딘가 걱정과 불안이 남아 있었다.

“제 의견을 구하시는 걸로 보이진 않군요.”

“미안하지만 이번엔 내 독단으로 결정했네. 그래야 할 문제기도 했고.”

“형님이 미안해하실 이유가 뭐가 있습니까. 저는 형님이 어떤 선택을 하시더라도 그 결정을 지지할 겁니다.”

듣고 싶었던 말에 피스토레는 살짝 웃으며 와인을 들이켰다.

황태자의 문제는 오랫동안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였다. 야욕이 넘치는 첫째 아렌도와 그에 비하면 유약하다고 평가받는 콘스텐. 둘 중 한 자는 황제가 될 것이고, 다른 한 자는 적당한 직책을 받아 계승권을 잃고 자기 일을 찾아갈 게 뻔했다.

사실, 이렇게 오래 고민할 문제는 아니었다. 아렌도는 자신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싶어 영민하게 머리를 굴렸고, 콘스텐은 아렌도에 비해서는 그 욕심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아렌도는 황제 자리에 오르지 못하면 그 분을 이기지 못할 테지만, 콘스텐은 그 감정을 잘 다루겠지.”

어느새 비어 버린 제 잔을 만지작거리며 피스토레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아렌도는 잘할 거야. 욕심이 있고, 야망이 있고, 무엇보다 그걸 뒷받침할 실력이 있지.”

지금 이 순간에도 아렌도는 착실하게 제 편을 늘려 가고 있었다. 메데이아가 도왔다고는 하지만 그의 의지가 없었다면 이렇게 빠르게 결집할 수 없었다.

“피스토레 형님.”

자신을 나지막이 부르는 아이테라를 보며 피스토레는 씩 웃더니 빈 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그래서 나는 콘스텐을 황태자로 선택할 거네.”

“그렇군요.”

당연한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테라는 놀라지 않고 덤덤하게 빈 잔에 와인을 따라 주었다.

“아렌도는 잘할 거야. 잘하겠지. 하지만 그게 문제네. 혼돈의 시대가 끝난 지 얼마나 되었지? 20년을 조금 넘었지. 베스라온이 혼돈의 시대가 끝난 후 태어난 아이였으니 말이네.”

선대 황제서부터 시작한 혼란의 시대는 피스토레가 황위를 물려받고 나서야 완전히 그 끝을 맺었다.

“전쟁의 끝자락에 태어난 아이들은 어른이 되었고, 이제 겨우 전쟁을 모르는 아이들이 태어나고 있어.”

평화로운 세상에서 태어난 아이들에게 계속 그 평화를 물려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의 아이들에게도, 계속해서 혼란의 시대 따윈 모르게 해 주고 싶었다. 마땅히 황제는 그래야 할 자가 아니던가. 제 머리를 쓸어 올리며 피스토레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안 돼, 그래서 아렌도는 안 된다고.”

욕심이 많고 야욕이 많았다. 아렌도는 명예를, 제국 너머의 땅을 그리고 역사를 탐낼 것이 분명했다. 거기다 분명 강력한 힘을 위해 황실은 손을 대지 않을 마법사의 저택과 신전까지 힘으로 억누르려고 할 게 뻔했다. 간신히 피스토레가 맞춰 놓은 균형은 산산조각이 날 것이다.

오롯이 르카디우스 황실만 본다면, 아렌도의 통치는 나쁜 결과는 아니었다. 역사서에 아렌도는 강력한 황제이자, 가장 넓은 영토를 지배한 황제로 기록될 것이다. 하지만 그 시야를 평민들에게까지로 넓힌다면 아렌도는 적당한 황제가 아니었다.

고민 끝에 피스토레는 평화를 지킬 자의 손을 들었다.

“피스토레 형님.”

아이테라는 주름진 제 형님의 손을 토닥였다.

“……수고하셨습니다.”

제 두 아이를 사랑하는 아버지가 제국의 황제로서 힘든 결정을 내렸다는 걸 아이테라도 잘 알고 있었다. 지금 그가 얼마나 흔들리고 있을지도 그리고 얼마나 약해졌는지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다른 이들이 뭐라고 하던 저는 형님의 결정을 지지할 겁니다.”

“말만으로도 고맙네, 동생.”

섧게 웃은 피스토레가 자신의 손을 단단히 잡아 준 동생의 손을 바라보았다.

“이 일은 저만 알고 있는 겁니까?”

“그래, 아직 셀바토르에게도 말을 안 했어. 부르려고 했더니만, 오랜만에 셀바토르 공작저에 손님이 찾아왔다더군.”

하필이면 그도 알고 있는 오랜 친구였다. 테펜텔에게는 황태자의 일에 대해 고민을 털어 두지는 못하겠지만, 술 정도는 같이 마실 수 있을 것이다. 그슨의 술이 맛있었는데. 피스토레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일단 비밀로 해 주게. 메데이아 태후가 최초의 사제들 시험이 엉망이 된 걸 위로하는 기념으로 파티를 연다고 했으니. 그 후에 발표할 생각이야.”

“파티요. 저도 들었습니다. 후보들을 위한 파티를 여신다고 하셨지요.”

잔을 가볍게 부딪친 후 아이테라는 포도주를 들이켰다.

“형님.”

피스토레가 어서 말해 보라는 듯 제 동생을 바라보았다.

“축복의 날 때, 발표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축복의 날 때?”

“예, 파티는 며칠 남지 않았으니. 지금은 너무 이르지 않습니까.”

아이테라의 말에 피스토레가 눈을 찡그렸다.

“하지만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네. 콘스텐이 태어났을 때부터 말이 나왔던 것을 지금 와서야 결정했으니…….”

“그렇게 오랫동안 신중히 결정한 일이니, 발표에도 공을 들이셔야지요.”

아이테라는 제 잔을 비운 후 고민에 빠진 피스토레를 보며 옅게 웃어 보였다.

“콘스텐 황자님께도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파티 때면 이제 막 돌아온 직후일 텐데, 너무 혼란스러워하실 겁니다.”

그런가. 피스토레가 고민에 빠지기 시작했다. 아이테라는 다시 제 형님의 손을 잡으며 낮게 속삭였다.

“거기다 황태자를 정하는 중요한 일, 공을 들여서 화려하지는 않더라도 정성스러운 무대를 준비하면 그 말에 더욱 무게가 실리지 않겠습니까. 콘스텐 황자님, 아니 황태자의 위엄을 보여야지요.”

“하긴.”

아들의 이름이 들리자, 피스토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래. 내가 성급했군. 황태자를 정하는 자리인데 공을 들여야지. 그런데 축복의 날 때 발표를 해도 괜찮을까. 신전의 양해도 구해야 하는데.”

축복의 날은 신전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행사였다.

“형님도 걱정이 많으십니다. 신전도 황실의 은혜 아래 그 발을 머물고 있으니 좋은 날의 시간 한 가닥 정도는 빌려 주겠지요.”

아이테라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다 축복의 날이면 신께서도 머무를 때. 분명 황태자의 앞길에 축복이 가득할 겁니다.”

“그래.”

피스토레는 아까보다 더욱 밝아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동생의 의견을 귀담아들어서 그러도록 하지.”

***

“저런.”

메데이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 황제는 아렌도를 황태자의 자리에 올리지 않았다.

“예상은 했지만…….”

후우. 다시 한숨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피스토레가 다른 황제들과 비슷한 성격이었다면 자신이 이런 일을 벌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오히려 열렬하게 피스토레의 결정을 돕고 귀족들을 모으는 데 집중했겠지.

문제는 피스토레가 르카디우스 역사상 가장 유별난 황제라는 점과 이상할 정도로 뛰어난 감을 가졌다는 데 있었다.

“적어도 레글루스가 살아 있었더라면……. 아니, 그의 성격을 조금이라도 닮았더라면.”

죽어 버린 남편을 이리도 그리워하게 될 줄은 몰랐다. 메데이아는 일어나지 않은 상상에 계속 한숨을 내쉬었다.

“태후 폐하.”

이피엘이 걱정스럽게 그녀를 바라보자, 메데이아는 애써 밝게 웃어 보였다.

“괜찮단다. 이피엘. 언제 내 길이 쉬웠던 적이 있었니.”

그러면서 일부러 더 손을 빠르게 놀려 꺾어 낸 꽃들을 예쁘게, 손수 리본으로 묶어 내려갔다.

“그래, 언제나 내 길은 가시덤불로 가득 찼지.”

다른 이의 길은 처음부터 꽃과 햇살로 가득 찬 길이었다면 자신의 길은 가시덤불과 어둠으로 찬 길이었다. 첫 시작부터가 글러 먹은 것이다.

결국, 메데이아는 깊은숨을 내쉬더니 마음을 심란하게 만든 편지를 난로에 불태웠다. 편지는 순식간에 재가 되어 사라졌다.

“아렌도 황자님께 이 사실을 알려야 하는 게 아닐까요, 태후 폐하?”

이피엘의 물음에 메데이아는 잠시 미간을 찡그리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일단 아이테라 대공이 시간을 벌어 줬으니 생각을 해 보자꾸나.”

그리고 쓸 만한 정보를 준 아이테라 대공에게도 선물을 보내야겠지. 스웰라 대공비는 자신의 자비로 오랜만에 햇빛을 받으며 산책을 하고 식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꺅, 메데이아 태후 폐하!”

갑작스러운 이피엘의 외침이 온실을 뒤덮었다. 메데이아의 하얀 손에 핏방울이 맺히더니 이내 연하늘빛의 고급스러운 테이블보를 붉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다른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차 버린 탓에 실수해 버렸다.

“의사, 의사를!”

이피엘이 다급하게 외치자, 온실 밖을 지키고 있던 하녀들이 우르르 몰려나가고 이피엘은 제 치맛자락으로 급하게 메데이아의 피를 닦아 내었다. 모두가 요란스러운 가운데, 메데아아는 홀로 조용히 제 손을 바라보았다.

“됐다. 너무 소란스럽게 굴지 말렴, 이피엘.”

“하지만…….”

“어차피 아렌도가 완벽한 황제가 되기 전까지는 늘 이런 상태가 될 테니, 벌써 소란스럽게 굴 필요가 없단다.”

아렌도는 황제가 되어야 했다. 르카디우스 제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황제가 되어서 자신의 소원을 이뤄 줘야 했다. 그때까지 자신의 손은 늘 이런 상태겠지.

메데이아는 피로 붉게 물든 제 손을 바라보며 옅게 미소 지었다.

***

파티의 일정은 생각보다 더 빠르게 진행되었다. 레슬리는 파티 자체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달랐다.

후보들을 위한 파티였지만 다른 귀족들도 초청을 받았고, 무엇보다 데뷔탕트를 치르지 않은 사람들마저 초대를 받았기에 어린 영식과 영애들의 기대감은 엄청났다. 데뷔탕트를 치르지 않은 사람들이 참석할 수 있는 파티는 무척이나 제한적이었기에 메데이아가 연 파티는 그들에게 단비 같은 존재였다.

레슬리는 지금 햇빛이 잘 드는 정원 의자에 앉아 편지 더미에서 편지를 골라내고 있었다. 아라벨라가 되어 축하한다는 편지와 파티에 파트너로 같이 가고 싶다는 수많은 편지를 걸러 내고 나니 레슬리의 앞에는 세 통의 편지가 남았다.

연분홍빛 꽃잎으로 장식된 편지는 에펜타니가에서 온 것이었고, 다른 두 통은 가게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하얀색 편지였다.

레슬리는 그중에서 먼저 셀리스의 편지를 집어 들어 읽기 시작했다. 한 줄, 한 줄 편지를 읽을 때마다 저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저는 파티가 너무 기대돼요, 레슬리 양.

부끄럽지만 저는 아직 우리 가문의 작은 파티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파티에도 참석해 본 적이 없었거든요. 레슬리 양도 아시다시피 우리 영토에는 손님이 찾아오기가 힘들어 큰 파티가 열린 적이 없었어요.

오라버니를 졸라서 다른 가문의 파티에 참석해 보고 싶었는데, 어리다고 무시당했죠. 그런 오라버니가 이번엔 저를 부러워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요!

분명 황궁은 엄청나게 아름다운 곳이겠죠? 책에서 본 대로 모든 궁마다 금이 덧입혀졌을까요?

아니라면 답장에 작게 아니라고 적어 주세요. 가서 실망하지 않게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싶어요. 그리고 오라버니도 놀리고 싶고요! 오라버니도 저랑 똑같이 금칠했다고 알고 있거든요.

아니라고 말해 줘야겠다. 웃으면서 레슬리는 뒷장을 읽어 내리기 시작했다. 아르롱 드레스를 샀다는 셀리스는 흥분 상태였다.

모든 것이 완벽해요! 그런데 문제는 제 파트너가 오라버니라는 것과 파티 때 머무를 여관이랍니다. 오라버니가 파트너라니, 울고 싶어요.

우리 가문은 수도에 타운하우스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 머무를 만한 여관을 찾고 있어요. 원래 축제 때 늘 잡는 여관이 있었는데, 제가 최초의 사제 후보가 되어서 이번에는 예약하지 않았거든요.

레슬리 양도 아시다시피 후보에 이름을 올리기만 해도 타운하우스가 없는 가문의 사람들은 황실에서 머무를 수 있잖아요? 그런데 황실에서 정해 준 기간보다 조금 이르게 올라가게 되어서 며칠 묵을 여관을 찾고 있어요.

황실에서 지내도 되지 않겠냐는 말은 하지 말아 주세요, 내 친구! 황실에 한번 들어가면 쉽게 나올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거리 구경이 즐겁답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 고민이 많아요. 좋은 여관을 잡을 수 있게 기도해 주세요.

읽기만 해도 셀리스의 조잘거림이 들려오는 편지를 읽다가 레슬리는 눈을 깜빡였다.

“타운하우스, 여관.”

모든 귀족은 수도에 저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수도에 머무르는 중앙 귀족보다는 각 영토에 저택을 가지고 있는 귀족의 수가 월등히 많았다.

그들 중 몇은 수도에 타운하우스를 가지고 있었고, 나머지는 볼일이 있을 때마다 여관을 잡곤 하였다. 에펜타니 가문은 아무래도 후자 쪽인 듯 보였다.

“여관이라…….”

레슬리는 테이블 위에 편지를 올려 두며 중얼거렸다.

지금 파티로 귀족들의 행렬이 몰리면서 빈 여관은 없을 것이다. 아니, 축제를 위해 괜찮은 여관은 다들 그 전부터 잡아 놨겠지.

‘어머니께 말씀드려 볼까.’

레슬리는 고개를 들어 거대한 공작저의 4층을 바라보았다. 공작저는 쓰지 않는 방도 많았고 레슬리의 방만 해도 네 개나 되었다. 에펜타니 백작가의 사람들이 와서 지내기엔 나쁘지 않겠지. 결정을 내린 레슬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께 말해 보자.’

그리고 다음 편지를 집어 들었다.

하얀 편지 중 하나는 테론에게서 온 편지였다. 편지 중간중간에는 석탄가루가 묻어 있었는데, 그걸 털어 내려다 실패했는지 오히려 지문 자국이 생겨 있었다.

아라벨라가 되었다니 정말 축하한단다, 레슬리. 내 아내도 너무 기뻐하고 있어.

다음에 놀러 오면 저번에 맛있다고 말해 준 파이를 만들어 주겠다고 벌써 사과를 보고 있단다. 미리 만들어 두면 안 될 텐데 기쁜 걸 주체하지 못하는 모양이야.

레슬리 사랑스러운 조카야, 너는 나의 자랑이란다.

아라벨라가 되었다고 편지를 보냈더니, 테론도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다음에 한번 놀러 가야겠다. 두 분이 좋아하는 음식들을 사서 가야지. 레슬리는 그렇게 다짐하며 작게 웃었다.

마지막 편지는 흔히 가게에서 살 수 있는 평범한 편지로, 조금 구겨져 있었고 급하게 썼는지 글씨도 조금 흘려져 있었다. 내용 역시 길지 않았다.

아직 손이 비어 있다면 제 꽃을 받아 주세요, 레슬리 양.

아직도 시누스턴 신전에 머무르고 있는 콘라드의 편지였다.

‘돌아오실 수 있는 건가?’

생각보다 산사태의 여파가 컸던 모양인지 신전의 피난민들과 부상자들은 좀 더 안전한 곳으로 피하게 되었다. 그리고 콘라드는 사람들의 이동과 산사태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레슬리가 두 번째 시험을 치렀던 시누스턴 신전에 남게 되었다.

그래서 파티에는 참석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편지를 보냈었는데, 오늘 온 편지를 보니 상황이 나아져 참석이 가능한 듯 보였다.

‘뭐라고 답장을 쓰지?’

레슬리는 미간을 살짝 좁히고 눈을 찡그렸다. 꽃을 받아 달라는 말은 파트너로 참석하고 싶다는 말이었지만, 쉽게 고개를 끄덕일 수가 없었다. 레슬리에게는 두 명의 오라버니가 있었으니까.

‘베스라온 오라버니도, 루엔티 오라버니도 날 위해서 시간을 내주신다고 했는데.’

셀리스는 오라버니가 파트너가 되어 울상을 짓는 모양이었지만, 레슬리에게는 오라버니와 함께 파트너가 되는 건 기쁜 일이었다. 최근 들어 더더욱 바빠지던 두 사람이었으니까.

잠시 고민하던 레슬리는 이내 답을 내렸다.

‘죄송하지만 거절해야겠다. 어차피 파트너가 없다고 파티에 참석을 못 하는 것도 아니니까 가서 뵈면 되겠지.’

레슬리는 테이블 위에 올려놨던 편지 3통을 집어 들었다. 여기는 펜도 잉크도 없으니 들어가서 답장을 쓸 예정이었다. 그런 레슬리를 루엔티가 불러 세웠다.

“레슬리. 방으로 들어가려고?”

레슬리의 의자 맞은편에 앉은 루엔티는 피곤한 얼굴로 제 머리를 헝클어트리더니, 씩 웃어 보였다.

“오라버니랑 이야기 좀 하다 가자.”

“싫어요.”

레슬리는 입을 삐쭉 내밀고 고개를 저었다. 얼마 전 솜사탕 사건 때문에 아직도 루엔티를 보면 자동으로 눈이 가늘어지고 입이 튀어나왔다.

“에이, 그러지 말고. 우리 막내님 어서 앉아.”

자신의 잘못을 아는 루엔티가 웃으면서 벌떡 일어나 레슬리의 의자를 빼 주었다. 레슬리가 의심스럽게 노려보자, 이번엔 정말 아무 일도 저지르지 않을 거라는 듯 두 손을 들어 보이기까지 했다.

“무슨 일인데요?”

결국, 원래 자리에 앉은 레슬리가 물었다.

“콘라드 녀석에게서 온 편지 읽었지? 이번 파티 파트너가 되고 싶다고 말이야.”

그걸 루엔티가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콘라드 경이 나랑 오라버니께 두 통을 보낸 걸까?’

레슬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루엔티가 작게 한숨 쉬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거 허락해서 콘라드 녀석이랑 같이 다니도록 해. 형은 파티에 가지만, 나는 시누스턴 신전 쪽으로 다녀올 거야.”

루엔티는 반쯤 남은 레슬리의 아이스티를 들이켜고는 몸을 숙여 작게 속삭였다.

“너도 알고 있겠지만, 이번 일은 산사태가 아니야. 그리고 콘라드 녀석이 계속 확인한 결과 이번 일은 마법사가 개입된 걸로 확인되었어.”

마법사가 개입했다니? 레슬리는 놀라 루엔티를 바라보았다. 루엔티는 짜증과 피곤함 그리고 화난 감정이 뒤섞인 오묘한 표정으로 눈을 찡그리고 있었다.

“예민한 상황이라 거듭해서 확인했고, 이제 확실해졌어. 누군가가, 그것도 마법사가 너를 노리고 있는 거야.”

처음에 마법의 힘으로 두 후보가 위험에 빠졌다는 신전 측의 편지를 받고 마법사의 저택은 뒤집혔었다. 신전 측에서 자신들에게 누명을 뒤집어씌우기 위한 모함이라는 것과, 일을 냉정하게 확인하자는 사람들로 나뉘어 최근 마법사의 저택은 조용할 틈이 없었다. 마법사 몇이 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파견되었고 바로 어제, 결과가 나왔다. 마법사의 짓이 확실했다.

“내가 직접 가서 확인하기로 했어.”

루엔티는 피곤하다는 얼굴로 웃으며 레슬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니 당분간은 어머니와 콘라드 옆에 붙어 있어. 두 사람은 불시에 마법이 일어나도 막을 수 있으니까.”

베스라온과 사이레인이 약하다는 건 아니었지만, 불시에 일어나는 기습에 한 사람을 데리고 움직일 만한 사람은 마력과 신력 그리고 체력을 전부 가지고 있는 공작과 콘라드였다.

레슬리의 어둠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최대한 그 힘을 쓰지 않게 하고 싶다는 공작의 말에 루엔티도 동의했다.

“이번에 너를 지키지 못한 일로 콘라드 녀석 풀이 많이 죽었어. 그러니까 이번엔 믿어도 될 거야.”

콘라드의 상태는 풀이 많이 죽었다는 귀여운 말로 포장될 정도는 아니었지만, 루엔티는 그렇게 말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오라버니. 오늘 바로 가시는 거예요?”

“그래, 일찍 끝내고 올게.”

레슬리는 그 말에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 귀여운 모습을 보며 루엔티는 작게 웃었다. 거의 막 신전에서 돌아온 막내랑 놀아 주지도 못하고 또 일하러 가야 했다. 이 얼마나 불행한 일인지!

하지만 한편으로는 어서 시누스턴 신전으로 가고 싶었다.

‘어느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곱게 죽지는 못할 것이다. 감히 누구를 건든 것인지 확실하게 알려 줘야지.

암녹색 눈동자가 무겁게 가라앉았으나, 이내 웃음을 머금었다.

“올 때 솜사탕 사 올 테니까 화 풀고 기다려 줘, 알았지?”

루엔티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레슬리의 은발을 마구잡이로 헝클어트렸다. 루엔티의 손 밑에서 걱정 따윈 묻어나지 않는, 작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다음 권에서 계속

괴물 공작가의 계약 공녀 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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