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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지금만큼은 넌, 내 거야. (30/81)

30. 지금만큼은 넌, 내 거야.2021.06.13.

“……난 너 없으면 안 돼. 제발…… 가지 마.”

세상에 쉬운 이별이 어디 있겠냐마는, 두 사람의 이별 과정은 특히 더 힘들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었다. 리아는 헤어지려 했고, 태호는 헤어질 수 없다며 화를 냈다. 팽팽하게 맞선 이견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태호는 리아를 붙잡고 ‘난 너 없으면 안 돼.’라 거나, ‘제발 가지 마.’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때 하지 못했던 말이 가슴 깊숙이 후회로 남아서일까? 태호는 그녀를 끌어안고 낮게 중얼거렸다.

“……리아야. ……가지 마.”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리아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사람 마음 약해지게 왜 목소리가 이리도 애절한 거야. 나중에 술 깨고 나면 어떻게 얼굴을 보려고 이러는지 모르겠다. 어차피 필름 끊어졌다고 둘러댈 테니, 상관없으려나? 상대가 강하게 나오면 강해지고, 반대로 약하게 나오면 약해지고 마는 성격인 리아는 버럭 화를 낸다면 몰라도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애원하는 태호를 도저히 뿌리칠 수 없었다.

“알았어. 잠시만이야.”

결국 리아는 이번 한 번은 모른 척 눈감아주기로 했다. 그가 술 취하는 건 자주 있는 일이 아니니까. 허락이 떨어지자, 태호는 그녀를 더욱더 힘껏 끌어안았다. 조금의 빈틈이라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처럼…….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가 정말로 그녀를 너무나 사랑하는 줄 착각할 것이다. 과거엔 그랬지만, 지금은 아무런 감정도 남아 있지 않은데 말이다.

“하.”

리아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자신을 꽉 끌어안은 태호의 두 손을 가볍게 토닥거렸다. 만약 5년 전 그때, 그가 지금처럼 매달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랬다면 헤어지지 않았을까? 괴롭더라도 그의 곁에 남았을까? 잠시 생각에 잠겼던 리아는 곧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렇지 않다. 그땐 헤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멀쩡하던 회사가 뿌리째 흔들리며 곤두박질쳤는데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 주위의 사람들은 태호의 아버지인 강 회장이 주원식품을 부도 위기로 몰았다고 입을 모았다. 심증은 있지만 물증만 없었을 뿐, 모든 정황증거는 강 회장을 가리켰다.

―아버지가 그러셨을 리가 없어.

태호는 끝내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미 재벌로 성장한 KJ그룹이 왜 구태여 주원식품을 내리누르냐고 하면서. 하지만 리아의 생각은 달랐다.

―왜겠어? 아예 처음부터 싹을 밟아버리려는 거지.

그 당시 주원식품은 국내 판매뿐 아니라, 해외로의 수출 규모를 늘리며 제2의 도약에 준비하던 중이었다. 혹여 주원식품이 커질까 두려운 나머지 강 회장이 꾸민 일이라고 리아는 굳게 믿었다. 그녀가 아는 한, 강 회장은 피도 눈물도 없는 비정한 재벌이었으니까. 주 회장은 한 번도 ㈜정직이 둘로 쪼개진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다. 리아가 그 배경을 알게 된 것은 대학 입학 후, 수진을 만나고 나서다. 신입생 환영회에서 처음 만나 친구가 된 수진은 자신의 아버지가 KJ푸드 한정안 사장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리아는 신경 쓰지 않았다. 부모가 경쟁사에 몸담았다고 자식까지 사이가 나쁠 필요는 없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 기일을 맞이한 수진이 하소연하듯 이야기를 쏟아냈다.

―나도 얼핏 듣긴 했는데, 당시 식품 생산과정에 문제가 생겼대. 근데 그걸 해결하는 과정에서 잡음이 많았나 봐.

주 회장과 강 회장의 의견이 극명하게 엇갈렸고 결국 회사가 갈라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수진의 아버지 한 사장은 강 회장 대신 식품위생법 위반으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았단다.

―말도 마. 그때 우리 집 완전 초상집 분위기였대. 우리 엄마, 그때 맘고생 하다가 병 얻어서 일찍 돌아가신 거고.

그래서인지 수진은 단 한 번도 강 회장과 그 집안에 관해 좋은 소릴 하지 않았다. 부하 직원에게 죄를 떠넘길 수 있는 강 회장이라면, 경쟁사 하나쯤 부도로 내모는 일은 아무것도 아닐 거라고 리아는 생각했다.

―너희 아버지, 보기보다 잔인하신 분이야.

매정한 말을 쏟아내는 리아의 얼굴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태호는 화난 듯 입을 일자로 다물었지만, 눈빛은 상처받은 것처럼 불안스럽게 흔들렸다. 지금도 그때의 눈빛을 떠올리면 가슴이 아프다. 그리고 동시에 짜증이 난다. 왜 네가 그런 눈으로 바라보는 건데? 네 아버지 때문에 지옥을 맛본 건 우리 가족이라고!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한 민 여사가 쓰러졌을 땐, 수진의 어머니가 겪은 것처럼 마음의 병을 얻어 돌아가시는 건 아닌가, 덜컥 겁이 났다. 그런데 그런 자신보다 태호가 더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더 그를 멀리하려고 했다. 결정을 번복하고 다시 그에게 돌아갈 것 같아 두려웠다. 태호가 해외 지사로 발령받았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리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5년이 지나고 본의 아니게 태호와 결혼까지 하게 되었지만, 아직도 마음 깊은 곳 속에는 강 회장에 관한 원망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한남동 강 회장 댁에서 일주일을 지내게 되자, 의구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가까이에서 본 강 회장은 그녀가 생각하던 인물과 너무나 달랐다. 비열하고 냉혈한 사업가라는 사람이 아내의 잔소리에 꼼짝을 못 하고, 은근슬쩍 아들의 눈치를 살피거나, 막내딸 앞에선 어김없이 딸 바보가 되었다. 리아에게는 살갑게 다가오지만 않았을 뿐이지,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려 노력하는 게 눈에 보였다. 가족에게만은 다정한 걸까? 수많은 사람을 희생시킨 독재자도 가족에게만은 부드럽다니까.

“……리아야.”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리아는 상념에서 깨어나며 태호의 손을 풀고 뒤를 돌아보았다. 아직도 술에 취한 걸까? 그는 짙은 애정이 물씬 담긴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 눈빛, 헤어진 후엔 완전히 사라졌던 눈빛이다. 리아는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태호의 뺨을 감쌌다. 그를 시험해보려고 한 행동은 아니었다. 그저 그립던 눈빛을 보게 되자, 저절로 몸이 움직였다. 태호는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그녀의 손바닥에 가만히 입술을 가져갔다. 아직 술에서 깨어나지 않은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선 이렇게 다정하게 나올 리가 없었다.

“너, 5년 전, 그때 그 강태호야?”

그녀의 말이 이해되지 않는 듯, 태호는 미간을 구기며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그리고 또다시 그녀의 손바닥에 살며시 입을 맞추었다. 그 작은 움직임이 리아에게 확신을 주었다. 술의 힘이 5년이라는 시간을 연기처럼 사라지게 한 게 분명하다. 그러니까 지금 여기에 선 남자는 그녀가 사랑했던 5년 전 강태호가 맞다. 그렇다면……. 리아는 발돋움하며 두 손으로 그의 목을 끌어안고 천천히 입술을 가져갔다. 그녀도 잠시만이라도 5년 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도 그러는데 그녀도 못 하라는 법은 없었다. 왜 너만 그때로 돌아가서 감정에 취하는데? 왜 나만 멀쩡하게 너의 주정을 다 받아줘야 하는 거냐고. 너 혼자 제멋대로 감정에 휘둘리는 건 반칙이야! 리아는 그대로 입술을 밀어붙였다. 입술이 닿자, 그가 흠칫 뒤로 물러서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곧 입술이 열리며 그가 먼저 맹렬히 파고들었다. 이번엔 리아도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지금 그녀는 현재가 아닌 과거의 주리아니까. 잠시 현실을 망각한 그에게 장단을 맞춰주는 것뿐이다. 그러니까 싫은 척, 뒤로 뺄 필요는 없었다. 지금만큼은 그녀도 예전으로 돌아가 마음껏 사랑하고 싶었다. 어차피 필름이 끊겨서 기억하지 못할 거잖아. 네가 즐기는 만큼 나도 즐길 거야. 지금만큼은 넌, 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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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떻게 침실로 왔는지 정확하겐 기억나지 않지만, 힘들진 않았다. 그는 깊고도 진한 키스 이후, 산소가 부족했는지 양처럼 온순해졌다. 그는 몸을 기댄 채, 순순히 침실로 왔고 리아는 비틀거리는 그를 밀어버리듯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빠른 손놀림으로 넥타이와 셔츠 단추를 풀었다. 태호는 어느새 잠이 들었는지 고분고분하게 그녀의 손에 몸을 맡겼다.

“하아.”

태호의 셔츠를 벗긴 리아는 길게 숨을 내쉬며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올렸다. 잠시만 한숨 돌렸다가 파자마로 갈아입힐 생각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가 팔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고 자신 쪽으로 잡아당겼다.

“앗!”

리아는 태호의 맨가슴에 뺨을 댄 자세 그대로 그의 몸 위로 쓰러졌다.

“태호야, 이거 놔. 강태호!”

하지만 강철 같은 팔은 그녀를 꽉 끌어안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 이런, 깜빡했다! 태호에게는 술 취해 잠든 후에 나타나는 특이한 잠버릇이 있다. 그건 바로 술 취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녀를 꽉 끌어안는 것이다. 그전에 멀찍이 떨어져 있어야 했는데……. 리아는 태호의 맨 가슴에 얼굴을 댄 채, 방심한 자신을 꾸짖었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좀 놔봐. 숨 좀 쉬자고.”

달래고 화내고 뿌리치고, 모든 방법을 다 동원했지만, 그녀를 안은 팔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 정말 미치겠네. 일부러 골탕 먹이려고 이러는 건 아니겠지? 아주 커다란 4인용 알래스카 킹 침대를 구해왔음에도……. 리아는 그날 밤, 태호 품에 안긴 채로 신혼집에서의 첫날밤을 보내야 했다. ***

“……아.”

다음 날 태호는 머리가 빠개질 것 같은 두통을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다. 하지만 두통은 날카로운 칼날로 속을 긁어내리는 것 같은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태호는 신음을 흘리며 갓난아이처럼 몸을 웅크렸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평소보다 좀 많이 마시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숙취가 심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닌가? 빈속에 너무 많이 마셨나? 집에 도착하고 나서부턴 필름이 끊어진 것처럼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드문드문 영상이 이어지긴 했지만, 실제인지 꿈인지 확실하지 않았다. 리아가 먼저 끌어안고 키스한 것 같은데……. 그렇다면 분명 꿈일 것이다. 하늘이 무너지지 않고서야, 그녀가 먼저 그에게 키스했을 리가 없다. 현관에 몸을 힘없이 몸을 기댔던 게, 그가 기억하는 마지막이었다. 그리곤 믿을 수 없게 달콤한 꿈밖엔 떠오르지 않았다. 얼마나 황홀했으면 아직도 심장이 쿵쿵 소리를 냈다. 오랜만에 사랑을 나누는 꿈이 너무나 생생해서 지금도 온몸에 닿던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동시에 두통과 속쓰림이 그를 괴롭혔다. 혼자 엉큼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그를 벌주려는 것처럼…….

“아…….”

태호는 손바닥으로 가슴을 누르며 작게 신음을 흘렸다. 그때 밖에서 리아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남 비서님, 아침 일찍 전화해서 미안한데요…….”

   *** 태호는 날이 밝아오고 나서야 그녀를 놓아주었다. 리아는 그의 손이 풀리자마자, 재빨리 침대 가장자리로 몸을 굴려 멀찍이 떨어졌다. 하지만 편히 잠들기에는 이미 늦은 시간이었다. 결국, 태호의 고약한 잠버릇(?)으로 밤새도록 고생한 리아는 평소보다 일찍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태호를 깨우는 대신 남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사님, 어제 과음해서 아마도 조금 늦게 출근할 것 같아요.”

[네? 이사님이 술을 드렸다고요?]

술 마시는 게 뭐 어떻다고, 깜짝 놀란 듯 남 비서의 목소리가 커졌다.

“네. 어제 강태문 전무님과 저녁 하면서 한잔했다던데요.”

[아니, 일요일 내내 체해서 고생하신 분이, 며칠 만에 술을 드셨다고요?]

“체하다니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녀의 질문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리아가 듣기에도 매우 당황한 목소리로 남 비서는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알겠습니다. 오늘 오전 일정 비워두겠습니다.]

갑자기 왜 이러지? 리아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침실로 들어갔다. 언제 일어났는지 태호는 창백한 얼굴로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남 비서에게 오늘 늦을 거라서 이야기해뒀어.”

“그럴 필요 없어. 나 괜찮아.”

그럴 필요 없긴. 당장에라도 기절할 것 같은 핏기 없는 얼굴로 앉아 있으면서. 태호는 숙취로 안색은 좋지 않았지만,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이었다. 어젯밤 일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 듯했다. 만약에 조금이라도 생각난다면 저렇게 가만히 있진 않겠지? 뭐라고 비아냥거리거나, 짜증을 부렸을까? 이번엔 그녀가 먼저 그에게 키스한 거니까. 하지만 사건의 발단은 그가 먼저 술에 취해 그녀를 껴안았기 때문이다. 피차 비긴 걸로 하고, 없었던 걸로 덮을까? 아니면 그 때문에 제대로 잠을 못 잤다고 한마디 해야 할까? 리아는 팔짱을 낀 자세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생각을 읽은 듯 태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젯밤에 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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