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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제발…… 가지 마. (29/81)

29. 제발…… 가지 마.2021.06.09.

리아의 말에도 태호는 기가 막힌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말만 침대지, 전혀 침대 같지 않은 크기의 침대가 방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었다. 꽤 넓은 방이었지만, 태평양처럼 넓은 침대가 놓이니 자연스럽게 좁은 것처럼 느껴졌다. 리아가 고른 침대는 알래스카 킹사이즈였다. 성인 4명이 넉넉하게 잘 수 있는 침대로 잠결에 옆으로 두세 번은 굴러야 서로 몸이 닿을 수 있을 크기였다. 매장에선 볼 수 없고 구하기도 어려워, 주문 제작을 해야 할 텐데, 저걸 또 언제 준비한 거지? 말문이 막힌 태호는 연신 헛웃음만 지었다. 하, 최대한 넓은 침대를 고를 거라고 예상하긴 했지만, 알래스카 킹을 구해올 줄이야! 이번엔 확실히 그가 한 방 먹었다. 리아는 행복한 얼굴로 생글생글 웃으며 침대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그리고 반려동물을 다루듯 침대를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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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잠버릇이 좀 심한 편이거든. 이 정돈 넓어줘야 편히 잘 수 있어. 그동안 얌전하게 자느라 얼마나 불편했는데…….”

침대를 덮은 침구류 역시 알래스카 킹사이즈에 맞춰 따로 제작한 물건이다. 신혼집에 들어오기 전 작업을 끝내야 했기에, 리아는 웃돈을 주고 익스프레스 서비스를 요구했고 다행히 제날짜에 배달되었다. 잠자코 침대를 노려보던 태호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좋아. 네가 편하게 자고 싶다면야…….”

이렇게까지 머리를 굴려 가며 거리를 유지하는 그녀가 야속하면서도 한편으론 깜찍하게 느껴졌다. 리아가 원한다면 어느 장단이라도 맞춰줄 생각이었다. 가끔 터무니없게 나와서 문제일 뿐……. 태호 자신도 신혼여행에서 원형 침대를 써먹었으니, 이번 건은 무승부로 받아들이는 게 정신 건강에 좋을 것이다.

“그래도 오늘이 신혼집 첫날인데 같이 저녁 먹자. 내일부턴 따로 먹고.”

재킷을 벗은 태호가 넥타이를 풀며 말했다. 그러자 리아는 아까보다 더 행복한 얼굴로 생글생글 웃었다.

“어머, 이런 어떡하지? 퇴근 직전에 신제품을 시식했거든. 나 아무래도 저녁은 무리일 것 같아.”

거짓말은 아니다. 퇴근하려는데, 민수가 이것저것 신제품을 한 아름 안고 그녀 사무실로 찾아왔다. 평소라면 한입 먹고 말았겠지만, 첫날이니까 함께 저녁 먹자는 말이 나올 줄 알고 일부러 바닥까지 싹싹 긁었다. 서먹서먹한 분위기에서 함께 식사할 마음은 전혀 없었으므로. 나, 아직 기분 안 풀렸다고! 리아는 그렇게 눈빛으로 말하며 가슴 앞으로 팔을 모아 팔짱을 꼈다. 태호는 넥타이 풀던 것을 멈추고 말없이 리아의 싸늘한 시선을 마주했다. 오늘은 신혼집에서의 첫날이다. 시작부터 그녀와 부딪치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계속 있다간, 입에서 싫은 소리가 나올지도 모른다. 태호는 재킷을 집어 들고 그대로 등을 돌려 침실을 걸어 나갔다. ***

“이 시간에 웬일이야?”

태문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태호 앞에 자리를 잡았다. 막 저녁을 먹으려던 태문은 태호의 연락을 받고는 부랴부랴 집을 나섰다. 평소엔 바쁘다며 차 한 잔도 마시지 않고 가버리는 동생이 갑자기 만나자고 하니, 이상할 수밖에……. 게다가 오늘은 신혼집으로 입성하는 첫날이 아닌가! 그런데 왜 불러낸 거지?

“오랜만에 형이랑 밥이나 먹으려고.”

태문이 오기 전에 이미 주문을 끝냈는지, 종업원이 식탁 위로 음식을 나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밥 먹자고 불렀다더니, 태호는 밥 대신 묵묵히 술잔을 비웠다. 딱 봐도 부부 전선에 이상이 생긴 게 분명했다. 시댁에 있을 때는 가족 눈치 보느라, 잠시 휴전 중이었나? 리아와 태호가 앙숙 중의 앙숙이었다는 것을 알기에, 태문은 연거푸 술잔을 비우는 태호를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보았다.

“형은 형수랑 부부싸움 안 하지?”

빈 술잔을 내려놓으며 태호가 툭 던지듯 물었다. 그러자 자타공인 팔불출 태문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하하하, 어떻게 해서 한 결혼인데 싸우겠냐? 어쩌다 토라지는 경우는 있어도 우리 사이에 부부싸움이란 없다. 내가 소정이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물론 우리 소정이도 날 엄청나게 사랑하지. 막 무서울 정도야.”

태호가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잘 알면서도, 태문은 부부 금실을 자랑하느라 바빴다. 진심 꼴불견이군. 태호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술병을 들었다. 그러자 태문이 얼른 술병을 빼앗아, 대신 술을 따라주었다.

“그때 그 일은 지금도 고맙게 생각해. 태호, 너 아니었으면, 우리 결혼 못 했다.”

그 말에 태호는 피식 입매를 비틀며 단번에 술잔을 비웠다. 그리고 다시 잔에 술을 채웠다. 소정과 태문이 결혼할 수 있게 도운 일등 공신을 꼽으라면 단연 태호였다. 태호의 집요하고 끈질긴 설득에 강 회장 내외도 결국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만약에 그때 태호가 없었다면, 태문은 최고 실세인 정치인의 딸과 결혼했을 것이다.

“고마울 것까지야……. 우린 거래를 한 거잖아.”

태호는 태문에게 강 회장이 한 사장의 사탕발림에 넘어가지 않게 옆에서 보좌해달라고 주문했다. 오랜 세월, 한 사장은 강 회장의 오른팔임을 자처하며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기에 신뢰가 대단했다. 특히 강 회장은 한 사장이 자신을 대신해 교도소에 갔다 왔다고 믿었다. 물론 강 회장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그가 억울하게 모든 죄를 뒤집어쓸 뻔했다고 생각했다. ㈜정직이 쪼개지게 된 결정적 이유는 당시 강 회장이 관리하던 가공 육류에서 식용에 사용할 수 없는 성분이 검출됐기 때문이다. 다행히 시장으로 제품이 유통되기 직전, 누군가의 밀고로 제시간에 출동한 경찰에 의해 전량 수거되었다. 그리고 한정안 사장, 그때 당시 과장이었던 그가 강 회장 대신 모든 책임을 지고 수사를 받았다. 결국 한 사장은 식품위생법 위반으로 3년 형을 받고, 복역하다가 1년 후 특별사면으로 출소했다. 그 이후로 강 회장의 신뢰는 더욱더 두터워졌다. 아들인 태문과 태호의 말보다 한 사장의 말에 더 귀를 기울일 정도였다. KJ쇼핑 사장 자리에 한 사장을 임명하려는 한 사장을 벌써 몇 번이나 말렸는지 모른다.

“그런데 갑자기 부부싸움 한 건 왜 물어? 너, 리아와 싸웠어?”

“……글쎄.”

태호는 씁쓸한 얼굴로 손에 든 술잔을 빙글빙글 돌렸다. 이런 걸 가지고, 부부싸움이라고 할 수나 있을까? 오히려 화를 냈다면 상대하기 쉬웠을 텐데……. 생글생글 웃으며 자신과의 거리를 두는 리아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다. 그리고 그녀의 가식적인 웃음에 마음이 아팠다. 민훈에게는 진심으로 웃어주면서, 왜 그에게는 영혼 없는 미소를 던지는지. 물론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가슴이 텅 빈 것처럼 허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후.”

태호는 한숨을 내쉬고는 단번에 잔을 비웠다. *** 리아는 거실 소파에 우두커니 앉아, 벽에 걸린 시계를 쏘아보았다. 이미 시간은 자정을 넘어 새벽 1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와, 어디 한번 해보자, 이거지? 저녁 생각 없다는 말에 휭 밖으로 나가더니, 지금 시간이 몇 신데 태호는 아직도 귀가하지 않고 있었다. 전화 한 통도 없고 말이야.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곤 하지만, 늦어도 너무 늦는 거 아닌가? 한두 살 먹은 아이도 아니고, 어련히 알아서 집에 들어오겠지만, 그래도 은근히 걱정되긴 한다. 리아는 손에 쥔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전화라도 해볼까? 속으로 중얼거리던 리아는 갑자기 휴대폰을 떨어뜨리며 양팔을 문질렀다.

“아우, 닭살!”

마치 태호의 진짜 아내가 된 것만 같아서 기분이 이상했다. 자신이 무슨 현모양처라고 늦게 들어오는 남편을 걱정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어련히 알아서 연락했을 것이다. 하지만 몇 초 후, 리아는 다시금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남 비서에게 연락해볼까? 강태호의 그림자란 소릴 듣는 사람이니까, 지금 그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연락하기엔 너무 늦은 시각이 아닐까? 퇴근해서 집에서 잘 쉬고 있는 사람에게 전화하는 건, 갑질과 동시에 민폐겠지? 그래도 연락도 없이 새벽 1시까지 안 들어오고 있는데 이렇게 가만히 있으라고! 걸어? 걸지 마? 쉽게 마음을 정하지 못한 리아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휴대폰 화면을 노려보았다. 띠리릭―. 그때 현관문 잠금장치가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앗! 왔나 보다. 리아는 용수철처럼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괜히 거실에서 서성거리고 있으면 걱정해서 잠도 안 자고 기다렸다고 오해할지 모른다. 잠깐만! 후다닥 침실로 뛰어가던 리아는 우뚝 제자리에 멈춰 섰다. 오해하는 건 오해하는 거고, 그래도 한마디 하긴 해야겠다. 지금이 도대체 몇 신데 말도 없이 이렇게 늦는 거야! 같이 사는 동거인으로서 지켜야 할 규칙이 있는 거다. 마음을 바뀐 리아는 싸늘하게 표정을 바꾸며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많이 늦었네?”

현관문 열리는 소리를 들은 게 언제인데, 어째서인지 태호는 아직도 현관에 있었다. 그는 어딘지 모르게 지친 모습으로 벽에 몸을 기대고 서 있었다. 태호에게 다가가던 리아는 풍겨오는 강한 술 냄새에 미간을 찌푸렸다.

“너 술 마셨어?”

“응. 형이랑 저녁 먹다가 한잔했어.”

그 말에 리아는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 한잔은 무슨 한잔! 적어도 열 잔은 한 얼굴이네.”

태호나 그녀나 술이 센 편이라, 웬만해선 취하지 않았다. 그러나 가끔 주량 넘게 마실 때가 있었는데, 그러면 리아는 그대로 기절한 듯 잠들어버리고 태호는……. 앗! 순간 태호의 술버릇이 생각난 리아는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한발 늦고 말았다. 태호가 그녀를 덮치듯 끌어안더니 벽으로 밀어붙였다.

“야! 이거 놔. 빨랑 못 놔?”

리아는 태호와 벽 사이에 낀 상태로 힘겹게 버둥거렸다. 태호의 술버릇은 리아를 숨도 못 쉬게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은 것이다.

“……리아야, 리아야.”

그가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 뜨거운 숨결을 토해냈다.

“놓으라니까!”

하지만 뿌리치면 뿌리칠수록 그녀를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결국 품에서 벗어나는 걸 포기한 리아는 손바닥으로 태호의 등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안 되겠다. 살살 달래서 재워야지.

“도대체 무슨 술을 이렇게 많이 마신 거야?”

그녀가 차분한 목소리로 묻자, 태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형이 ……그러니까 형이…….”

자기들은 부부싸움도 안 한다고 약 올렸거든. 서로 너무 좋아서 미치겠다고 웃으니까. 너와 난, 그보다 더한 사이였는데……. 그런데 이젠 먼 과거가 돼버렸으니까. 그래서 그게 너무 속상해서 마셨어. ……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술기운에 혀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태호는 리아의 목덜미에 얼굴을 비비며 혼자만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웅얼거렸다. 무슨 일이래? 후계자 경쟁으로 태문과 사이가 안 좋다고 하더니, 술 마실 일은 또 있나 보다. 리아는 태호에게 몸을 맡긴 채, 어두운 천장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그가 힘이 빠질 때까지 이러고 있어야 할 것 같다. 그러고 보니, 헤어진 이후로 꽤 오랫동안 태호의 술 취한 모습을 보지 못했다. 태호의 또 다른 술버릇은 리아가 어디를 가든 댕댕이마냥 그녀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거였다. 그가 그렇게 나올 때마다 리아는 강아지를 대하듯 그의 뺨에 뽀뽀를 퍼붓고 머리를 쓰다듬어주곤 했었다. 문득 리아의 머릿속에 궁금증이 떠올랐다. 그녀와 헤어지고, 태호는 이런 술버릇을 누구한테 보였을까? 사귀던 연인들에게 그랬겠지? 그가 다른 여자를 껴안는 모습을 상상하자, 바늘로 심장을 찌르는 고통이 밀려들었다. 그래서일까? 저도 모르게 힘이 솟은 리아는 두 손으로 태호의 가슴을 힘껏 밀어냈다. 순간 작은 틈이 생기자, 리아는 재빨리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몇 걸음도 채 옮기기 전에 태호의 손에 다시 붙잡혔다. 그가 뒤에서부터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리아야.”

술에 취한 탓에 그는 지금 사리 분별이 어려운 게 분명했다. 혹시 두 사람이 헤어지던 날로 혼동한 건 아닐까?

“가지 마.”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숙인 채, 그가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난 너 없으면 안 돼. 제발…… 가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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