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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라면 먹고 잘래? (18/81)

18. 라면 먹고 잘래?2021.05.02.

달콤한 환상은 잠시일 뿐. 침실로 돌아와 태호가 그녀를 침대에 내려놓자, 리아는 설레는 마음을 신속히 거두었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어리석어서, 그대로 방치했다간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뛸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기 전에 단단히 단속해야 한다.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연기가 너무 과했어.”

리아는 상황을 강조하려 짐짓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족들은 우리가 사랑 없이 결혼한 거 알잖아. 집에서까지 사랑하는 척 연기할 필요 없어.”

“발 움직이지 마.”

말을 듣기는 하는지 태호는 고개를 숙인 채 상처 소독에만 집중했다. 붕대 감기를 끝내고야 리아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5년 동안 서먹서먹하게 지내고 싶어? 그게 네가 원하는 건가?”

“서먹하게 지내는 건 아니더라도, 일부러…….”

“리아야.”

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자, 리아는 하던 말을 멈추었다. 가끔 저렇게 목소리를 깔면, 왠지 입을 다물어야 할 것 같다.

“어제도 오늘도, 난 내 행동이 과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태호는 바닥에서 몸을 일으켜 리아가 앉은 침대에 나란히 앉으며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넌 우리 집에서 다쳤어. 지금 여기서 너와 가장 가까운 사람은 나고. 그게 허울뿐인 남편이든, 아니든.”

남편이란 말에 갑자기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아니, 그보단 비아냥거리지 않고, 조용하게 말하는 그가 너무나 낯설었다. 갑자기 왜 이래? 리아는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잠시 당황스러웠다.

“아무리 정략결혼이라도 너와 나, 우린 이젠 부부야. 한 팀이라고. 내가 널 챙기지 않으면, 아무도 널 챙겨주지 않아.”

그건 맞다. 아무리 정략결혼, 쇼윈도 부부라도 상대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서 삶의 질이 달라질 것이다. 그럭저럭 살 만할지, 아니면 숨이 막힐 정도로 거북할지. 매우 예외이긴 하겠지만 나름 행복할지.

“물론 가족들 앞에서까지 사랑하는 척하지 않아도 돼. 그러나 적어도 너와 나, 서로 같은 편이라는 걸 인식시킬 필요는 있어. 그래야 네가 편해.”

단지 그래서? 리아는 태호의 저의가 의심스러웠다. 이곳은 후계자 게임이 펼쳐지고 있는 정글의 세계다. 그가 순수한 동기로 그녀 편을 든다는 게 선뜻 믿기 어려웠다. 하지만 곧 생각을 바꿨다. 강태호가 얼마나 매사에 빈틈없이 계산적인 사람인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제 그의 아내다. 옛날식으로 표현하면 그의 소유가 되었다는 거고, 현대식으로 표현하면 동반자가 되었다는 뜻이다. 쉽게 설명하자면 그녀는 이제 자기 편이니 자기가 직접 챙기겠다는 소리다. 한마디로 ‘내 거, 아무도 손대지 마!’ 이런 거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니, 태도의 변화를 이해 못 할 것도 없었다. 그래도 분위기가 어색한 건 어색한 거라서, 리아는 슬그머니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이 시간에 웬일이야? 벌써 퇴근한 거야?”

“응. 시차 때문에 힘들어서……. 눈 좀 붙여야겠어.”

피곤한 듯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그가 대답했다. 잠깐, 저번처럼 옷 갈아입는다고 막 벗는 건 아니겠지? 리아는 재빨리 저만치 옆으로 떨어졌다. 절대로 벗은 몸을 보는 게 창피해서가 아니다. 다만 볼 땐 보더라도 너무 가까운 데서 보면 눈이 나빠질까 그런 거다. 내 눈은 소중하니까. 넥타이를 푼 태호는 셔츠 맨 위 단추를 끄르며 침대맡에 등을 기댔다. 언뜻 보기엔 피곤해 보였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피곤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늘 그는 그 어느 때보다 활기찼고, 일찍 퇴근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미팅을 끝내고 회의실을 나가던 배우 강수미가 발을 헛디뎌 비틀거리자, 태호가 그녀를 부축해주며 모든 게 바뀌었다. 중심을 잃은 그녀가 품 안에 쓰러지는 순간, 상큼한 레몬 향이 코끝을 자극했다. 이건? 리아가 사용하는 보디로션과 같은 향이었다. 자연스럽게 리아가 떠올랐고, 본가에 홀로 있을 그녀가 걱정돼 견딜 수 없었다. 어젯밤 발까지 다쳤는데……. 결국, 남 비서에게 오후 일정 조절을 맡기고 급히 집으로 향했다. 거실 소파에 앉은 리아를 보고 나서야, 답답하던 마음이 조금이나마 풀리는 것 같았다.

“점심은?”

셔츠 두 번째 단추를 끄르려는데, 리아가 침대에서 일어서며 물었다.

“……!”

별생각 없이 물어본 거겠지만, 마치 아내가 남편 식사를 챙겨주는 것 같아 감동하고 말았다. 평소엔 식사했건 안 했건, 전혀 신경 쓰지 않던 그녀였기에…….

“아직.”

태호가 짧게 대답하자, 리아는 무심한 얼굴로 물었다.

“라면 먹고 잘래?”

라면 먹고 잘래? 라면 먹고 갈래? 가 아니라?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태호는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리아가 예쁘게 눈꼬리를 휘었다. 결혼하고 나서 처음으로 보여주는 연기가 아닌 진짜 미소였다.

“내가 ‘낌새 라면’ 끓여줄게. 옷 갈아입고 내려와.”

방금 잘못 들은 건가? 내가 끓여줄게? 믿기지 않는다는 듯 태호의 눈이 가늘어졌다. 오랜 연애 기간, 대부분 그가 요리했고, 리아가 뭘 요리한 적은 거의 없었다. 있다면 식빵에 딸기잼과 땅콩버터를 바른다거나,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붓는 정도? 그랬던 리아가 라면을 끓여주겠다니……. 태호에게는 상다리 부러지게 진수성찬을 차려준다는 말로 들렸다. 우리는 이제 한 팀이란 말에 그녀만의 방식으로 화답하는 걸까? 이유가 어찌 됐든 상관없었다. 그녀가 그를 위해서 뭔가를 만들어준다는 것이 중요했다. 한편으론 은근히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갑자기 저리 친절하게 나오면 적응이 어려우니까. 그래도……. 하아, 가슴 설레게 기분은 좋았다.  

  ***

“자, 여기.”

리아는 제법 뿌듯한 얼굴로 라면을 담은 그릇을 태호 앞에 내려놓았다. ……음, 냄새는 라면이 맞는데. 태호는 이상한 비주얼의 음식을 조심스럽게 노려보았다. 맞은편에 앉은 태희도 같은 표정이었다.

“라면이 좀 불었어요, 아가씨. 우리 집 가스레인지랑 화력이 달라서요.”

리아는 마지못해 젓가락을 드는 태희에게 양해를 구했다.

“아, 네.”

태희는 영혼 없는 얼굴로 대답하며 라면 그릇으로 눈길을 내렸다. 와, 이게 뭐냐, 정말? 전문 요리사가 있었지만, 주원식품 따님이 직접 ‘낌새 라면’를 끓여주겠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 누구보다 완벽하게 끓일 거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현실은 그게 아니었다. 완전 망해버렸다. 라면은 좀 불은 정도가 아니라, 칼국수처럼 퍼져서 라면인지 칼국수인지 구별이 어려웠고, 물도 얼마나 많이 넣었는지 한강 같은 멀건 수프 아래서 라면 면발이 살려달라고 허우적거렸다. 비주얼이 이러니 맛이 좋을 리 있나! 간도 밍밍하고, 하나도 얼큰하지 않았다. 그런 태희의 속마음을 읽은 듯 리아가 설명을 덧붙였다.

“해장하는 건데, 너무 맵고 짜면 안 되잖아요. 일부러 좀 싱겁게 끓였어요.”

와, 누가 마케팅팀장 아니랄까 봐! 처참한 수준으로 망치고도 변명이 제법이었다. 에잇, 이런 걸 누가 먹어! 태희는 짜증 난 얼굴로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맞은편에 앉은 태호와 눈이 마주치자, 다시 서둘러 젓가락을 집었다. 호랑이가 노려보듯 번뜩거리는 눈빛 하며 그녀를 산 채로 잡아먹을 기세였다. 태희는 할 수 없이 한약 먹는 기분으로 라면을 입에 넣었다. 흑, 맛없는 거 먹으면 살찌는데…….

“맛 괜찮죠, 아가씨?”

태호가 무서워 허겁지겁 먹는 건데, 리아는 맛있어서 빨리 먹는 줄 아는지 흐뭇한 엄마 미소를 떠올렸다. 때리는 오빠보다 말리는 새언니가 더 밉다더니……. 태희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리아 앞에 놓인 샌드위치 접시를 노려보았다.

“새언니는 왜 안 먹어요?”

“전 집에선 라면 안 먹어요.”

갓 구워낸 바삭한 크루아상 샌드위치를 한입 베어 물며 리아가 말했다.

“회사에서 품평하느라, 하도 먹어서 집에까지 와서 먹긴 질리더라고요.”

그렇다고 집에서 전혀 안 먹는 건 아니지만……. 솔직히 리아가 보기에도 오늘 그녀가 끓인 라면은 면발도 퍼지고, 물 조절에 실패해 영 아니긴 했다. 그냥 요리사가 끊이게 놔두지, 괜히 직접 한다고 했나? 잠깐 후회도 됐지만……. 그럴 수야 없지! KJ푸드 오너 집에서 KJ푸드 제품이 아닌, 주원식품 ‘낌새 라면’을 끓일 기쁨을 양보할 순 없었다. 그게 정확히 어떤 기분인지 알려나? 맵시 콜라 공장에서 고가 콜라 한 병을 쭈욱 들이켜는 기분이랄까? 마치 눈보라를 뚫고 적진 한가운데 승리의 깃발을 꽂는 것처럼 통쾌했다. 단, 너무 흥분한 나머지 그녀가 요리엔 젬병이라는 사실을 깜빡했다. 리아가 망치지 않고 할 수 있는 건, 용기 선을 따라 끓는 물을 붓고 얌전히 기다리는 컵라면 정도였다. 그것도 요리라고 한다면 말이다. 그래도 입맛 까다로운 태호가 불평 없이 묵묵히 먹는 걸 보면, 아주 망한 건 아닌가 보다. 태희는 새 모이 먹듯 젓가락질을 깨작거렸지만, 숙취로 입맛이 없어서 그런 거라고 맘 편하게 해석했다. 결국, 태희는 반도 없어지지 않은 그릇을 옆으로 밀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먹다 말고 어디가? 국물 한 방울 남기지 말고 다 먹어.”

하지만 태호의 살벌한 말투에 도로 의자에 앉았다.

“오빠, 나 지금 다이어트 중이라…….”

“다이어트는 내일부터 하고, 마저 먹어.”

“네.”

태희는 찍소리 못하고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 불은 면발 따위에 목숨을 걸 순 없으니까.

“아가씨, 김치랑 같이 먹어요.”

지금 누구 때문에 이 난리인데! 리아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김치 그릇을 태희 쪽으로 밀었다. 불여우가 따로 없었다. 꼬리가 아홉 개 달린 호랑이 작은오빠와 꼬리가 아홉 개 달린 여우 새언니. 완벽한 한 쌍의 구미호 커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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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음 날, 유정과 수진을 만나기로 한 리아는 운전기사가 모는 차를 타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발바닥이 아니라 발등을 다친 거라 운전하는 데 아무 문제 없는데도, 태호는 그녀가 운전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보면 강태호는 은근히 과보호 성향이 있는 것 같다.

“신혼여행은 어땠어?”

자리에 앉기도 전에 유정이 질문부터 던졌다. 정략결혼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유정은 은근히 핑크빛을 기대하는 것 같았다.

“어떻긴, 뭐가 어때? 그냥 그렇지.”

리아의 시큰둥한 대답에 유정은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수진은 티 날 듯 말 듯 입꼬리를 올렸다. 오늘 리아가 유정을 만난다는 소리에 수진은 월차까지 내가며 달려왔다. 신혼여행 중에 무슨 일이 있었나, 혹시 그새 태호에게 넘어간 건 아닐까 하는 걱정에 도무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런데 낌새를 보니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다. 그래도 확실히 확인해둘 필요는 있었다.

“그럼 인터넷에 떠도는 사진은 뭐야?”

수진은 공항에서 찍힌 사진을 휴대폰으로 보여주었다. 리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각도가 애매해서 그렇지, 별거 아냐.”

“정말? 우린 또 신혼여행에서 뭔 일 생겼나 했지.”

“뭔 일은 무슨…….”

리아는 혼잣말처럼 투덜거리며 레모네이드를 쭉 들이켰다. 전혀 아니라고 하기엔 조금은 양심에 걸렸다. 꼭 껴안고 원형 침대에서 잠을 자고, 비키니 상의를 벗기고 선크림을 발라주는 등등. 나름 굵직한 일이 많았으니까. 만약 일광화상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뭔 일까지 생겼을까? 낯선 여행지에서 일어나는 불장난은 로맨스 소설의 단골 소재이기도 하다. 하지만 환상은 길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에 돌아온 순간, 땅을 치며 후회했겠지.

“강수미, 재계약했더라. 스캔들 났는데도 계속 쓰는 걸 보면, 둘이 뭔가 있긴 있나 봐.”

신혼여행을 되짚던 리아는 수진의 말에 현실로 돌아왔다.

“두 사람 정말 그렇고 그런 사이인 거야?”

흥분한 듯 유정이 목청을 높였다.

“그렇고 그런 사이든 말든. 난 관심 없어.”

리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유리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심기가 불편해져 얼음을 입에 넣고 와그작 씹었다. 그런 리아를 유심히 바라보던 수진은 손에서 미끄러진 것처럼 휴대폰을 떨어뜨렸다. 얼음을 꺼내먹고 유리잔을 내려놓는 리아의 동작과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혹시라도 리아가 못 보고 지나칠까, 일부러 당황한 듯 말을 보탰다.

“어머, 미안. 이게…… 어쩌다.”

리아의 시선이 저절로 휴대폰에 닿았다. 수진의 휴대폰 화면 속 안에서……. 태호와 강수미가 서로를 애틋하게 끌어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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