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 순수한 마음으로 접근했다고는 (17/81)

17. 순수한 마음으로 접근했다고는2021.04.28.

“두 사람 언제부터 사귀었어? 와, 대박!”

민수는 리아와 태호를 둘러보며 과장된 몸짓으로 손뼉을 마주쳤다. 리아는 키스하는 모습을 들켰다는 것보다, 민수가 미호를 태호라고 불렀다는 사실에 신경이 쓰였다. 너무 놀라서 잘못 들은 거겠지?

“민수야, 너 미호랑 아는 사이야?

“미호?”

민수는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러다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구미호라고 불러야지. 누가 ‘구’를 빼먹고 ‘미호’라고만 부르냐.”

“응?”

왜 꼬박꼬박 성을 붙여서 불러야 하지? 민수의 말이 이해되진 않았지만, 뭔가 불길한 일이 일어나는 중인 건 분명했다. 리아가 몸을 떨자, 태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감싸듯 끌어안았다. 그런 두 사람을 민수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태호야, 언제부터 리아랑 사귄 거야? 혹시 클럽에서 생일 파티했던 날?”

대답할 기회도 주지 않은 채, 민수는 혼자 추리에 들어갔다.

“그날 맞지? 와, 태호, 너! 그러면서 지금까지 나한테 한마디도 안 한 거냐?”

리아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둘 다 한국대에 다니니까, 어찌어찌해서 아는 사이라는 건 알겠는데, 왜 민수는 미호를 태호라고 부르는 거지? 리아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민수야. 너 왜 자꾸 미호를 태호라고 불러?”

“그럼 이름 말고 별명 불러?”

“별명?”

“응. 구미호 내가 지어준 별명이야. 꼬리 아홉 개 달린 호랑이. 별명 하난 기막히게 잘 짓지 않았냐?”

망할 놈의 민수가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그러니까 이름이 구미호가 아니라 강태호라는 거지? 리아의 뇌세포는 지금까지 입력된 정보를 토대로 ‘촤르르’ 결론을 뽑아내기 시작했다. 한국대 경영학과에 다니며 민수와 말을 놓는 걸 보면 두 사람은 같은 학년이라는 뜻인데, 민수와 동갑이면서 한국대 경영학과에 다니는 강태호란 남자는 리아가 알기론 딱 한 명뿐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눈엣가시 같던 ‘엄적아’, KJ그룹 차남 강태호. 순간 아름답게 반짝이던 밤하늘이 새카맣게 변해버렸다.

“네가 강태호라고?”

리아는 재빨리 재킷을 벗어 태호에게 돌려주고 멀찍이 물러섰다.

“왜 그래?”

갑자기 변한 리아의 태도에 태호는 미간을 좁혔다. 그녀는 그가 태호라는 걸 전혀 몰랐다는 듯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리아만큼이나 태호도 당황스러웠다.

“이제야 알겠어.”

혼잣말처럼 그녀가 작게 중얼거렸다.

“넌 처음부터 내가 누군 줄 알고 있었어.”

비로소 모든 게 이해되었다. 그를 보자마자 이상하게 끌린 건, 어릴 때 알고 지냈기 때문이다. 운명이어서가 아니라, 그저 몸이 기억하고 자연스럽게 반응한 거다. 클럽에서 그가 그녀를 보고 웃은 건,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이고. 루프톱에서 도와준 것도, 처음 보자마자 말을 놓은 것도 그래서였다. 머리를 짧게 자르고 맨얼굴에 야상 점퍼를 입고 나타난 그녀를 바로 알아본 이유도 마찬가지다. 어려서나 커서나 얼굴에 거의 변화가 없으니, 알아보기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태호는 아니었다. 분명 리아가 기억하기론 덥수룩한 머리에 두꺼운 안경을 끼고, 고리타분한 옷을 입는 전형적인 공붓벌레 외모의 소유자였다. 그랬던 녀석이 왜 저렇게 변한 거지?

“무슨 말이야? 처음부터 누군 줄 알고 있었다니.”

이번에는 태호의 안색이 어둡게 변했다.

“넌 그러면 내가 누군 줄 몰랐어?”

“당연하지.”

분위기가 심각해지려고 하자, 민수는 슬그머니 뒷걸음치더니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내가 무슨 수로 넌 줄 알아? 못난 오리 새끼가 백조가 돼서 나타났는데!”

좀 잔인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사실이었다. 지나가는 댕댕이를 잡고 물어봐라. 그때 그 비주얼과 지금 이 비주얼 보고 같은 사람이라고 하는지.

“그럼 넌 모르는 남자와 처음 만나자마자 키스한 거야?”

낮고 음산한 목소리로 그가 물었다. 어린 시절 추억 때문에 마음을 열고 다가온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고? 그러면 리아는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키스한 건가? 순식간에 마음이 싸늘하게 식었다.

“아니다. 됐다. 나 역시 너를 모르고 있었나 보다. 이름 석 자 안다고, 그 사람을 아는 게 아닌데.”

그 말을 끝으로 태호는 씁쓸히 웃으며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다. 무슨 뜻인지 이해되지 않았지만, 리아는 태호를 붙잡고 물어보고 싶진 않았다. 집으로 돌아온 리아는 자신이 주리아라는 것을 알면서도 왜 태호가 그렇게 나왔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일부러 엿 먹이려고 그런 걸까? 원수라고 할 만큼 어른들 사이가 나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자식들까지 그럴 필욘 없는데……. 하지만 순수한 마음으로 접근했다고는……. 아, 이런! 속말이라도 거짓말은 하지 말자. 리아는 재빨리 정정했다. 접근은 녀석이 아니라 내가 했지. 하여간 아무리 생각해도 명쾌한 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혼자 끙끙대며 고민하던 리아는 결국, 일주일이 지난 후 태호를 찾아갔다. 아무래도 다시 만나서 차근차근 이야기해봐야 할 것 같았다. 사실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혼자 난리 친 건 그녀였으니까. 아무리 원수 집안이라지만, 태호가 일부러 골탕 먹이려고 그런 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야 로미오를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사랑의 도피를 꿈꾸던 줄리엣을 이해하게 됐는데……. 어쩌면 태호는 그녀의 로미오일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쉽게 포기할 순 없었다. 민수에게 연락처를 알아낼 수도 있었지만, 그녀는 무작정 한국대로 찾아갔다. 교양 수업이 끝날 때쯤 강의실 입구에 서 있으면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얼마 전 수업을 드롭한 민수와 마주칠 염려는 없었다. 수업이 끝났는지 문이 열리고 학생들이 쏟아져 나왔다. 잠시 후, 태호가 서너 명의 여자들에게 둘러싸인 채 모습을 드러냈다.

“태호야, 밖에 나가서 먹자. 나, 학식 먹기 싫어.”

“그래요. 내 차로 가요.”

분명 리아를 보았으면서도 태호는 모르는 사람처럼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그대로 그녀를 지나쳤다. 아주 찰나였지만, 그의 얼굴에 귀찮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하!”

리아는 여자들과 걸어가는 태호를 보며 비로소 깨달았다. 그녀에게 물 먹이려고 했던 게 아니라, 그는 그저 오는 여자 안 막고, 가는 여자 안 붙잡은 것뿐이었다. 흥, 얼굴값 한다 이거지! 실망해서인지, 아니면 기가 막혀서인지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처음부터 그를 알아보지 못한 그녀의 잘못이긴 했지만, 그래도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바보처럼 울지는 말자. 괴로워도 슬퍼도 나, 주리아는 안 운다고! 그깟 남자 따위에 울다니, 말도 안 된다. 딱 세 번 만났을 뿐인데, 물론 키스는 두 번이나 했지만. 그렇다고 그를 좋아하게 된 건 절대로 아니었다.

“흑.”

리아는 눈물을 참으려 이를 악물었다. 자꾸만 어깨가 떨리는 건, 찬 바람에 추위를 느껴서 그런 거고, 자꾸만 눈앞이 뿌예지는 건, 오늘따라 미세먼지가 심해서 그런 것뿐이다. 크게 숨을 내쉬고 마음을 진정하고 막 걸음을 떼려는 순간, 갑자기 누군가 그녀의 팔을 확 잡아당겼다. 몸이 돌려지고, 눈 깜짝할 사이에 단단한 품에 갇혀버렸다.

“……울지 마.”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로 흘러들었다.  

16559916006907.jpg

  ***

“이름 석 자 안다고, 그 사람을 아는 게 아닌데.”

그 말을 끝으로 리아와 헤어진 태호는 그날 밤 한숨도 잘 수 없었다. 결국 새벽을 하얗게 불태우고 다음 날, 리아의 학교로 차를 몰았다.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차분하게 대화를 해야 할 것 같았다. 민수의 도움으로 캠퍼스에서 리아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경영대 건물을 빠져나오는 리아를 발견한 태호는 빠르게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계속 뒤에서 따라가는데 리아와 친구와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리아야,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잘생긴 남자가 싫다고 할 여자가 어디 있니? 결국엔 너도 외모에 약한 거였어.”

“……응, 네 말이 맞아.”

리아의 긍정적인 대답에 태호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외모에 약하다고? 태호는 자신의 외모가 남다르다는 건 유치원에서부터 피부로 느꼈다. 그와 짝을 하겠다고 너도나도 졸랐고,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는 시도 때도 없이 좋아한다는 고백이 쏟아졌다. 그게 귀찮아서 더벅머리에 뿔테안경을 쓰고 일부러 촌스럽게 꾸미고 다녔다. 덕분에 여자아이들의 시달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대학교에 들어가서도 같은 모습을 유지하자, 강 회장이 따끔하게 한마디 했다.

―언제까지 피하기만 할 거야? 맞서 물리치는 법도 배워야지.

강 회장의 충고를 받아들인 태호는 단정히 머리를 자르고 뿔테안경을 벗었다.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처음 외출한 날이 클럽에서 생일 파티를 한 날이었다. 그리고 그날 리아와 재회했다. 그러니까 리아가 그렇게 나왔던 이유는 그저 그의 잘생긴 외모 때문이라는 거다. 리아, 너마저……. 산들바람처럼 다가왔던 ‘그린 라이트’는 그렇게 산산조각이 났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고 슬슬 다른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잘생긴 외모로 꾀어볼까?’ 하는 어처구니없는 생각. 이미 어렸을 때, 초콜릿으로 꾀었었는데, 지금은 왜 안 될까? 하는 뻔뻔한 생각. 초콜릿은 물질이지만, 잘생긴 외모는 그 자신의 일부이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리아의 마음을 가질 수만 있다면……. 그녀가 앙숙 사이인 주씨 집안의 딸이라는 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혹시라도 리아가 태문과 결혼하면 어쩌나 하고 초조해했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그때 비하면 지금의 역경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결심하고도, 자신이 강태호라는 사실을 알고 기겁하던 리아의 얼굴이 떠올라, 선뜻 다가갈 순 없었다. 그랬는데 그녀가 먼저 눈앞에 나타났다. 처음엔 잘못 본 게 아닐까?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러나 곧 그녀가 틀림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멀리서도 저렇게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빛나는 존재는 세상에 단 한 사람, 주리아뿐이니까. 그래도 그녀가 자신을 보러 왔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마도 민수를 만나러 왔을 것이다. 역시나 리아는 다가올 생각 없이 멀리서 그를 바라만 보았다. 너무 긴장해서인지 저절로 표정이 굳어버리자, 태호는 과 선배들과 빠르게 자리를 피했다. 하지만 리아를 지나치자마자, 저도 모르게 고개가 돌아갔다. 그녀의 어깨가 여리게 떨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확실하진 않았다. 선배들과 주차장으로 걸어가던 태호는 얼마 못 가고 걸음을 멈추었다.

“선배, 죄송한데. 오늘은 안 될 것 같습니다. 급히 중요한 일이 생겨서요.”

“그래? 할 수 없지. 다음에 먹자.”

“네. 선배.”

선배들과 헤어진 그는 전속력으로 강의실을 향해 달려갔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분명 리아는 울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혼자 둘 순 없었다. 자신이 뭘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면서……. 술래에게 들켰다고 리아가 울음을 터뜨렸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어른들께 들키면 귀찮아서가 아니라, 그저 리아가 우는 모습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초콜릿을 양보했었다. 다행히도 리아는 아직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리아의 뒷모습이 가냘프게 느껴졌다. 품에 안아 감싸주고 싶을 만큼. 뒤에서 팔을 잡아당기자, 리아의 몸이 저절로 그를 향해 돌아갔다. 머리가 뭐라고 생각하기 전에, 몸이 먼저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울지 마, 리아야.”

그렇게 두 사람은 연인이 되었다. 그날부터가 1일이었다. ***

“와아, 새언니, 진짜죠? 작은오빠 대학교 때 클럽 다닌 거 맞죠?”

리아가 태호와의 첫 만남을 떠올리는데, 약점을 잡았다는 듯 태희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런데 새언니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작은오빠랑 같이 클럽 간 적 있어요?”

이런, 과거 연인 사이였던 사실은 특급 비밀인데……. 리아가 자신이 괜한 말을 한 건 아닌지 걱정하는 찰나, 갑자기 태호가 성큼성큼 앞으로 다가왔다.

“발은 어때?”

“어, 괜찮……. 앗.”

말을 끝내기도 전에 그는 어젯밤처럼 리아를 번쩍 안아 올렸다.

“붕대 새로 갈아줄게. 방으로 가자.”

다친 건 발바닥이 아니라, 발등이거든. 혼자 걸을 수 있는데 왜 이러는 거야! 당황한 리아가 벗어나려고 바르작거리자, 태호가 낮게 경고했다.

“가만히 있어.”

그리고 그는 가볍게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두근두근, 가슴이 뛰었다. 하지만 설렘은 금물. 이건 그저 연기니까. 태희의 질문을 피하려고 이러는 거다.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번쩍 들어서 ‘공주님 안기’ 해주는데, 싫다고 할 사람이 어디 있을까? 잠시만이라도 이 순간을 즐기면 안 될까? 아주 잠시만. 리아는 태호의 어깨에 가만히 얼굴을 묻었다. ……아. 못 견디게 그리운 싱그러운 체취가 코끝을 간질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