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 사역 요건 (6)
태주의 눈에 들어온 것은 작업대마다 연결된 배수 시설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물이 아닌 피를 흘려보내는 장치였는데, 몬스터의 사체를 해체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활용 가치 없는 체액이 실시간으로 버려지고 있었다.
‘분명 저게 모이는 곳이 있을 텐데.’
재룡의 물음에 건성으로 대답하던 태주가 단순한 호기심인 척 정화 시설의 위치를 물었다.
“근데 저 밑으로 빠진 피는 다 어디로 가는 거야? 바로 하수구에 버리기엔 문제가 좀 있을 것 같은데.”
“당연히 문제가 있지. 안 그래도 저거 때문에 환경부에서 주기적인 나오는데. 과징금도 어마어마해. 심하면 공장 자체가 폐쇄될 수도 있고.”
“어? 그럼 정화 시설 같은 게 따로 있는 거야?”
“어. 지하 2층에 오폐수 처리기가 있는데, 일단 액체 상태의 모든 불순물은 다 거기로 모여.”
“아아, 오폐수 처리기.”
발을 담글 수 있는 구조인지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나마 여러 장소를 번거롭게 오갈 필요가 없다는 것이 희소식이라면 희소식이었다.
“아, 오전에 태동 길드에서 잡은 녀석들은 저쪽에서 작업하고 있어. 한번 가 볼래?”
작업대 사이를 느긋하게 거닐고 있던 재룡이 D구역이라고 표시된 기둥을 검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 근데 태동이면 A급 게이트에서 나온 것들이겠네?”
“어. 아까 집하장에서 잠깐 봤는데, 현장에 투입된 작업자들 말로는 무슨 정글 형태의 던전이었대. 그래서 그런지 몬스터들의 종류도 대부분 네 발 달린 맹수형이었고.”
“클리어가 쉽진 않았겠네. 모의 던전 때도 정글 컨셉이 나오면 다들 힘들어했는데.”
알 수 없는 초목들이 빽빽하게 우거진 정글의 경우 보호색을 띤 몬스터의 기습 빈도가 높아 레이드의 진행 속도가 더디다는 단점이 있었다.
“듣기론 오승훈 대표님께서 직접 참가하진 않으셨다는데, 태동 자체가 워낙 메이저 길드에 수준 높은 헌터들도 많아서 크게 문제는 없었나 봐. 뭐, 실제론 개고생했는데, 자존심상 무난한 척하는 것일 수도 있고.”
역시나 각성자들이 가진 우월감과 선민의식, 그리고 그들에 대한 사회적인 과대평가에 불만을 품고 있는 재룡은 당사자들이 내린 자체적인 평가를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실제로도 길드의 명성을 유지하기 위해 레이드 과정에서 일어난 구체적인 피해 규모를 축소하거나 은폐하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 얘가 바로 태동에서 잡은 보스몹이야. 완전 크지? 얘만 트레일러 하나를 통으로 써서 옮겼어.”
특수 장갑을 착용 중인 재룡이 해체 작업이 한창인 보스몹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툭툭 치며 말했다.
“저, 아저씨, 마정석은 분리했어요?”
재룡이 근처에 있던 작업자에게 물었다.
- “네. 저기 버킷 안에 있습니다. 필요하시면 가져다드릴까요?”
작업복의 대부분이 녹색 피로 물든 직원이 고단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아니요. 그냥 제가 가서 볼게요. 감사합니다.”
집중을 방해했다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이 든 재룡이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태주야, 이거 봐. A급에서 나온 건 확실히 빛깔부터 다르지 않아?”
버킷 앞으로 다가간 재룡이 녹색 핏자국이 남아 있는 신생아 크기의 마정석을 태주에게 들어 보였다.
마정석은 몬스터의 크기와 강함의 정도에 따라 그 형태가 결정됐는데, 체구가 클수록 마정석의 전체적인 길이나 무게 또한 증가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게. 내가 던전 실습의 전리품으로 받은 것보다 훨씬 더 좋아 보이는데?”
마정석이 가진 개인적인 상징성은 감히 비교할 수 없었지만, 같은 보스몹이라고 해도 게이트의 등급이 낮으면 객관적인 가치에서 밀릴 수밖에 없었다.
“에이, 그래도 그건 얘기가 좀 다르지. 명색이 첫 번째 레이드에서 얻은 인생 최초의 전리품인데. 아마 신태주라는 프리미엄 때문에 이거보다 몇 배는 더 비싸게 팔릴걸?”
물론 재룡의 말대로 소유자의 특별한 사연이 담긴 아티팩트나 마정석은 시세대로 값어치가 매겨지는 것이 아니었지만.
“참고로 던전에서 채굴한 강화석과 마나석은 사체 처리장이 아닌 광물 처리장으로 옮겨지는데, 아티팩트와 마정석, 그리고 강화석은 무조건 길드의 소유고, 상대적으로 양이 넉넉한 마나석이랑 몬스터의 사체는 그 판매 대금을 정확히 5 대 5로 나누고 있어. 물론 출장비는 별도고.”
갑의 위치인 길드의 입장에선 다소 아쉬운 정산 비율이었지만, 애초에 던전 채굴 회사가 등장하기 전까진 손도 대기 어려웠던 영역이라 부수입을 챙긴다는 생각으로 불만을 제기하지 않는 것이 현실이었다.
“야, 너 되게 전문가 같은데? 실무적인 부분에 대해서도 척척 설명하고.”
“에이, 뭘 이 정도 가지고. 아, 이번엔 세척실을 보여 줄까? 아니다. 차라리 보관 창고부터 볼래?”
태주의 칭찬에 멋쩍은 미소를 짓던 재룡이 의욕적인 목소리로 다음 코스를 추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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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사체 처리장의 전반적인 투어를 마친 두 사람이 하 대표가 마중을 나와 있던 시작점으로 돌아왔다.
“오늘 내 가이드 어땠어? 아무리 생각해도 아버지랑 다닐 때보다 훨씬 더 낫지?”
태주의 칭찬을 듣고 싶었던 재룡이 내심 기대하는 눈빛으로 물었다.
“어. 가이드 실력은 S급이었어.”
사체 처리장의 내부 구조를 유심히 기억해 둔 태주가 엄지를 치켜세우며 말했다.
“어, 진짜? 와아, 이거 완전 영광인데? 아버지한테 자랑해야겠다.”
원하는 대답을 얻은 재룡이 밀착 안내의 수고로움마저 잊은 얼굴로 순박하게 웃었다.
“이제 슬슬 밥 먹으러 갈래? 아무래도 시간이 좀 늦을 것 같아서 기름진 음식보단 가벼운 일식 쪽으로 예약해 뒀는데.”
장갑을 벗은 재룡이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아, 물론 여기도 본사처럼 구내식당이 맛있긴 하는데, 아까처럼 직원들이 몰리면 제대로 밥도 못 먹을 것 같아서.”
태주의 인기를 몸소 실감한 재룡이 집하장에서의 어수선한 상황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해.”
태주가 재룡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근데 대표님한테 인사는 드리고 가야 되는 거 아니야? 오늘 이렇게 사체 처리장도 둘러볼 수 있게 허락해 주셨는데.”
“아버지한테는 내가 나중에 따로 얘기할게. 어차피 지금 사무실로 올라가 봤자 잔소리만 길어지거든.”
“그래. 그럼 난 잠깐 화장실 좀 갔다 올 테니까 먼저 차에 타고 있어. 염 기사님 차로 가는 거 맞지?”
“어. 그럼 주차장 쪽으로 와. 아, 화장실이 어딘지는 알지?”
“아까 오다 봤어.”
“그래. 그럼 나 먼저 가 있을게.”
태주를 홀로 남겨둔 재룡이 먼저 사체 처리장의 입구를 나섰다.
‘일단 10분은 벌었고.’
CCTV가 없는 화장실 안으로 들어선 태주가 맨 끝에 있는 칸으로 들어가 문을 잠근 뒤 인벤토리를 열었다.
▶ 선택한 물품을 소환하시겠습니까? (Y/N)
재룡이 선택한 아이템은 기척 차단의 효과가 있는 염 기사의 선물인 칠흑 같은 어둠으로 위장한 암살자의 복면이었다.
▶ 스킬 『은신』이 발동되었습니다.
마력을 숨긴 태주가 이번엔 몸 전체를 투명하게 만들었다.
‘이 정도면 됐겠지?’
▶ 스킬 『점멸』이 발동되었습니다.
화장실에 들어가는 모습까지만 CCTV에 찍힌 태주가 순간 이동 능력을 발휘해 오폐수 처리기가 있는 지하 2층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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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으, 냄새.’
목적지에 도착한 태주가 피비린내를 동반한 코를 찌르는 악취에 복면 위로 드러난 눈살을 찌푸렸다.
‘다행히 아무도 없네.’
물론 그 덕분에 상주하는 직원이 없어 들킬 일이 없다는 이점이 있었지만.
‘늦어도 8분 안에는 돌아가야 의심을 사지 않는다.’
나름의 데드라인을 정하고 온 태주가 재룡의 안내를 받았을 때 봐 둔 위치로 지체 없이 자리를 옮겼다.
오폐수의 경우 다양한 정화 단계를 거쳐야 했는데, 협잡물을 제거하기 위한 1차 처리 과정 전, 다량의 피가 함유된 액체 상태의 불순물들을 수영장처럼 생긴 넓은 공간에 잠시 모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 선택한 물품을 소환하시겠습니까? (Y/N)
재앙 등급의 부츠를 꺼내든 태주가 신고 있던 신발을 잠시 인벤토리 안에 집어넣었다.
▶ 착용한 물품을 인벤토리에 넣으시겠습니까? (Y/N)
신체는 물론 착용 중인 장비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은신 스킬의 특성상 벗어 둔 신발의 투명화 효과는 지속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후우.”
부츠로 갈아 신은 태주가 저주로 인해 불규칙해진 호흡을 가다듬었다.
참방!
저장 탱크의 모서리에 걸터앉은 태주가 두 발을 일렁이는 액체 속에 발목까지 담갔다.
‘시간 없으니까 빨리 마시고 가자.’
부츠의 존재와 입수 과정은 재룡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아티팩트의 사역 요건을 공유하거나 공개적인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경솔하다는 생각에 떳떳하지 못한 방식임을 알면서도 몰래 탐식하는 방법을 택한 태주였다.
▶ 장화의 갈증이 조금 해소되었습니다.
‘그렇지.’
설인의 피를 직접적으로 마시게 했을 때에 비해 순도는 조금 떨어질 수 있었지만, 그래도 한 발을 빨대처럼 꽂고 있는 것보단 수월하게 충족도를 채울 수 있었다.
물론 가장 큰 장점은 수조 속의 액체가 계속 유입되고 빠져나가는 구조라 피를 조금 빼돌려도 전혀 티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었지만.
그로부터 약 5분 후.
‘이제 그만 일어나야겠는데?’
시간을 체크하고 있던 태주가 액체 속에 잠겨 있던 두 발을 평행하게 들어 올렸다.
피가 묻은 부츠를 신은 채 자리에서 일어날 경우 족적이 남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장의 피를 탐식하는 포식자의 흡혈 장화’의 사역 요건 충족도 (1/100)
태주의 눈앞에 유의미한 변화를 알리는 반가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어?! 올랐다!’
숫자가 바뀌는 것을 처음으로 목격한 태주가 자신도 모르게 환호성을 지를 뻔했다.
‘나중에 따로 날을 잡고 와야겠다.’
사체 처리장의 방문 목적을 성공적으로 달성한 태주가 후일을 기약하며 부츠를 집어넣었다.
물론 다음부터는 재룡의 안내 없이 혼자서, 그리고 지금처럼 은밀하게 이곳으로 돌아올 예정이었지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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칙!
화장실의 맨 마지막 칸으로 돌아온 태주가 혹시나 몸에 배어 있을지 모를 약간의 피비린내를 은은한 향수로 감추던 바로 그때.
‘어?’
잠시 무음으로 해둔 휴대폰에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뭐야, 빨리 나오라는 게 아니었네?’
발신자의 정체는 재룡이 아닌 승화였다.
‘매니저님이 이 시간에 어쩐 일이지?’
은신 스킬을 해제하고 복면까지 집어넣은 태주가 잠갔던 문을 열며 메시지를 확인했다.
[태주 씨, 축하해요. (웃는 이모티콘)]
‘으음?’
느닷없는 축하 메시지를 받은 태주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