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 사역 요건 (5)
‘피하라고?’
하 대표를 마주하고 있던 태주의 시선이 소리를 따라 본능적으로 돌아갔다.
‘어? 뭐야, 저건.’
트럭에서 내리고 있던 몬스터들의 사체 더미에서 미약하게나마 숨이 붙어 있던 녀석이 불쑥 튀어나왔다.
키야아악!
리자드맨 계열의 몬스터가 날카로운 괴성을 지르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 “다들 피해!”
작업을 멈춘 직원들이 집하장 내부에 마련된 대피 시설로 황급히 달려갔다.
목소리는 다급했지만, 이런 상황이 처음은 아니라는 듯 다들 정해진 매뉴얼에 따라 일사불란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틱! 틱! 틱! 틱!
몸을 피하고 있던 직원들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던 호출 버튼을 보이는 대로 눌렀다.
하 대표의 설명대로 거의 모든 직원들이 비각성자라 각성자로만 구성된 특수 경비원들을 부르지 않는 한 상황을 수습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삐! 삐! 삐! 삐!
호출 버튼을 누르는 순간, 붉은 경고등은 깜빡거렸고, 요란한 사이렌 소리는 집하장 전체를 불안한 소음으로 가득 채웠다.
물론 사이렌 소리를 들은 경비원들이 집하장까지 도착하는 데 걸리는 시간보다 태주의 화살이 몬스터의 심장에 도달하는 시간이 훨씬 더 짧았지만.
▶ 선택한 물품을 소환하시겠습니까? (Y/N)
몬스터가 설치는 꼴을 두고 볼 수 없었던 태주가 화해의 상징인 썬더 드래곤의 뿔로 만든 전격의 활을 하 대표가 보는 앞에서 꺼내 들었다.
▶ 체이싱 애로우[C]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곤 목표물까지의 거리가 상당한 것을 고려해 명중률을 극대화할 수 있는 유도 화살을 장착했다.
‘미안하지만, 피는 조금만 흘려다오.’
활시위를 당기기 무섭게 태주의 손끝을 떠난 체이싱 애로우가 몬스터의 심장부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날아갔다.
쉬이익!
활에 붙은 버프가 화살의 속도를 50퍼센트나 더 증가시키다 보니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사이에 조준 지점을 관통하고 있었다.
푹!
키야아악!
명중과 동시에 괴성을 내지른 몬스터의 몸뚱이가 화살의 힘에 밀려 뒤로 넘어졌다.
쿵!
- “……?!”
몬스터의 위협적인 포효에 뒤도 안 돌아보고 뛰어가던 직원들이 비명처럼 들려온 두 번째 괴성에 분주한 발걸음을 멈췄다.
- “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살아 있던 몬스터가 화살에 박힌 채 널브러져 있는 모습이 직원들의 눈에 들어왔다.
-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태주가 온 사실을 모르고 있던 직원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던 바로 그때.
- “어! 저기다!”
몬스터가 넘어진 방향을 힌트 삼아 화살이 날아든 위치를 가늠해 보고 있던 한 직원이 활을 든 채 서 있는 태주를 발견했다.
- “어? 어디 어디!”
순간, 대피 시설에서 나온 직원들의 시선이 동시에 태주가 있는 곳을 향했다.
- “근데 누구지?”
- “글쎄. 나도 멀어서 잘 안 보이는데?”
집하장의 면적이 워낙 넓다 보니 멀리 있던 직원들은 가늘게 눈을 뜬 채 궁수의 정체를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
- “무슨 일이십니까!”
한 박자 늦게 나타난 특수 경비원들이 긴박한 목소리로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 “트레일러에 실려 있던 몬스터 한 마리가 죽지 않고 살아 있었습니다.”
경비원 근처에 있던 직원 한 명이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 “네? 몬스터가요? 지금 그놈은 어디 있습니까?”
검을 든 경비원이 사방을 경계하며 물었다.
- “저, 그러니까 그게, 있었는데, 없어졌습니다.”
- “네? 그게 무슨.”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이제 막 현장에 도착한 경비원이 듣기엔 다소 혼란스러운 답변이었다.
- “대체 몬스터가 어디 있다는 겁니까?”
- “저기요.”
직원이 턱 끝으로 지목한 곳엔 몬스터의 사체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 “어? 저건 죽은 거잖아요.”
현장을 확인한 경비원이 의아한 얼굴로 말했다.
- “아니요. 죽은 게 아니라 죽인 겁니다. 바로 저 사람이요.”
직원이 멀리 떨어져 있던 태주를 검지로 가리키던 바로 그때.
“어? 야! 태주야!”
잠시 자리를 비웠던 재룡이 아버지와 함께 있는 태주를 향해 머리 위로 손을 흔들며 반갑게 소리쳤다.
- “뭐? 태주? 그럼 지금 활을 쏜 사람이 신태주야? 그 세계 최초의 매직 아처?”
- “어쩐지 정확하다 했어. 막말로 미스가 나는 순간 사람이 다칠 수도 있었는데.”
- “근데 그런 대단한 친구가 왜 이 시간에 여기 있지?”
- “그러게. 대표님 아들이 아는 척을 하는 걸로 봐선 친구 같은데?”
- “맞네. 옆에 같이 있는 분이 우리 대표님이잖아.”
- “역시 끼리끼리 어울린다고, 최소한 대표님 아들 정도는 돼야 친구도 먹을 수 있나 보네.”
- “아마 같은 학교라 그럴걸? 전에 회사에서 보너스까지 줬잖아. 대표님 아들이 한국대에 합격했다고.”
- “그나저나 무슨 활인지는 몰라도 엄청 좋아 보이네. 저런 건 얼마씩 하나?”
- “왜. 월급 모아서 하나 사게?”
- “글쎄. 월급으로 살 수나 있을지 모르겠네.”
몬스터를 제거한 궁수의 정체가 태주라는 것을 알게 된 직원들의 수군거림이 집하장 전체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하하하하! 역시나 명불허전이구나.”
태주의 정교한 활솜씨를 처음으로, 그것도 코앞에서 목격한 하 대표가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대표님께서 좋은 활을 선물해 주신 덕분입니다.”
태주가 하 대표에게 받은 썬더 드래곤의 힘줄로 만든 격노의 활시위를 검지로 가볍게 튕기며 겸허하게 답했다.
“하하. 겸손한 것도 여전하구먼.”
하 대표가 흡족한 표정으로 태주의 팔뚝을 토닥였다.
“태주야, 미안. 내가 마중을 나갔어야 되는데.”
두 사람이 있는 곳까지 한달음에 달려온 재룡이 특유의 순박함 웃음으로 태주를 맞이했다.
“괜찮아. 대표님께서 워낙 세심하게 챙겨 주셔서.”
“아버지가? 으음. 그냥 예의상 하는 말은 아니고?”
하 대표의 얼굴을 힐끗 쳐다본 재룡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그 눈빛은. 그리고 이 녀석아, 너 대체 어디 있다 이제 나타난 거야? 내가 감독할 땐 함부로 자리 비우지 말라고 누누이 얘기했어, 안 했어? 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던 재룡의 등짝을 두툼한 손바닥으로 경고하듯이 때린 하 대표가 현장을 통제하지 못한 책임을 물으며 따끔하게 다그쳤다.
“와아, 진짜 어렸을 때랑 똑같네. 맨날 공부할 때는 안 보고, 잠깐 휴대폰 볼 때만 들어와서 딴짓한다고 혼내시더니.”
등판이 얼얼해진 재룡이 세상 억울하다는 얼굴로 볼멘소리를 해댔다.
“뭐, 인마?”
“관리 감독을 소홀히 한 게 아니라 직원들 도와서 잠깐 창고 쪽에 갔던 거예요.”
작업자들만 착용하는 특수 장갑을 끼고 있던 재룡이 두 손을 내밀며 부재의 이유를 해명했다.
“아니, 그리고 쪽팔리게 꼭 직원들이 보는 앞에서 때리셔야겠어요? 태주 보기에도 민망하게.”
내심 자신의 열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재룡이 태주와 직원들의 눈치를 보며 아버지를 원망했다.
“민망? 쪽팔려? 야 이 녀석아, 지금 직원들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이었는데, 넌 그깟 체면이 대수냐? 그나마 태주가 있어서 이렇게 신속하게 정리된 거지, 안 그랬으면, 안전 불감증이다 뭐다 아주 언론에서 시끌시끌할 뻔했어. 알아?”
재룡의 잘못이 아니란 건 알고 있었지만, 작업 중에 일어나는 사고의 대부분은 회사의 이미지와 직결되는 민감한 사안일 뿐만 아니라, 변명의 여지가 있든 없든 인명피해와 관련된 모든 책임은 대표에게 돌아가는 것이었기 때문에, 조금 과하긴 해도 자존심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일깨워 주려는 하 대표였다.
물론 아직은 대표로서의 책임보단 체면이 더 중요한 나이였지만.
“아아, 알았으니까 그만 좀 하세요. 그 정돈 저도 아니까. 태주야, 가자. 이제부터 내가 구경시켜줄게.”
아버지의 잔소리에 한쪽 눈을 찌푸린 재룡이 태주의 가이드를 자처하며 트레일러 쪽으로 앞장섰다.
“어?”
활을 거둔 태주가 재룡보다 먼저 일일 가이드를 약속한 하 대표의 안색부터 확인했다.
“…….”
태주와 눈이 마주친 하 대표가 아들과 동행해도 좋다는 눈짓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 그래.”
하 대표의 허락을 얻은 태주가 꾸벅 고개를 숙인 뒤 재룡의 뒤를 따랐다.
“여긴 집하장이라는 곳인데, 잡몹부터 보스몹까지 없는 게 없어. 아까처럼 살아 있는 녀석들도 가끔 있고.”
마치 친구를 초대해 집 구경을 시켜주듯 아버지의 잔소리를 들을 때와도 180도 달라진 텐션이었다.
“근데 트럭보다 큰 몬스터는 어떻게 운반해?”
다량의 피를 원하는 태주가 운반 중인 몬스터들의 사이즈를 눈여겨보며 물었다.
“아, 그럴 땐 조각을 내서 운반을 하든지 아님 마정석처럼 돈이 되는 부분만 현장에서 잘라내는 편이야.”
“아아, 그렇구나.”
아쉽지만, 초대형 몬스터의 사체를 통해 효율적으로 충족도를 채우기 위해선 설인의 피를 탐식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직접 레이드를 뛰는 수밖에 없었다.
- “학생, 아까 도와줘서 고마워.”
- “이야, 활솜씨가 아주 굿이야, 굿.”
- “실물이 훨씬 더 잘생겼네. 키도 훤칠하니 크고.”
- “저기, 미안한데, 사진 한 장만 찍어 주면 안 될까? 우리 아들 녀석이 워낙 팬이라.”
- “어, 나도. 나도.”
작업을 재개하려던 직원들이 집하장을 천천히 둘러보고 있던 태주를 향해 감사와 칭찬을 쏟아냈다.
“네? 아, 네.”
직원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게 된 태주가 예정에 없던 팬 서비스 시간을 어쩔 수 없이 가지게 되었다.
찰칵! 찰칵! 찰칵! 찰칵!
기자들을 상대했을 때보다 훨씬 더 많은 촬영음이 사방에서 들려왔다.
- “저, 태주 씨, 저희들하고도 한 장만 찍어 주세요.”
- “전 보호구에 사인 하나만요.”
이번엔 특수 경비원들이 남다른 팬심을 드러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듯 비각성자인 일반 직원들보단 각성자인 특수 경비원들이 태주의 압도적인 능력과 거침없는 행보에 대해 더 큰 놀라움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태주야, 아무래도 다른 데로 가야겠다.”
보다 못한 재룡이 태주를 둘러싼 직원들을 직접 떼어내기 시작했다.
“자, 자, 다들 작업에 집중해 주세요. 죄송합니다. 네. 사진은 여기까지만 찍겠습니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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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와아, 다들 이렇게나 적극적인 줄 몰랐네. 나한텐 사진은커녕 이름도 안 물어보던 사람들이.”
태주를 해체 작업이 이루어지는 곳으로 데려온 재룡이 왠지 모를 섭섭함을 드러냈다.
“이거 아주 생각할수록 기분이 묘해. 태주야, 넌 어떻게 생각해?”
혼잣말처럼 툴툴거리던 재룡이 태주를 돌아보며 물었다.
“글쎄.”
물론 다른 곳에 시선을 빼앗긴 태주의 귀에 재룡의 푸념이 들어올 리 없었지만.
‘바로 저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