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 신입생이 되었다-234화 (234/242)

234. 사역 요건 (1)

- “아직 안 나온 거 맞죠?”

- “네. 그런 것 같아요.”

참가 인원이 많아 정확한 숫자를 세어보진 않았지만, 무리의 규모에 구애받지 않는 남다른 존재감으로 인해 태주의 빈자리는 더욱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 “저기, 13번 학생!”

궁금한 것은 꼭 물어봐야 직성이 풀리는 기자 한 명이 포토라인과 멀지 않은 곳에서 비밀 평가지를 작성하고 있던 13번 응시자를 콕 집어 불러냈다.

- “네? 저요?”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린 13번 응시자가 검지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키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 “네. 신태주 학생은 아직 안 나왔어요?”

형식적인 인사를 건너뛴 기자가 태주의 행방에 대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 “아, 태주요. 이제 곧 나올 거예요.”

- “이제 곧 나온다고요? 교수님도 나오셨는데, 왜 아직까지 게이트 안에 있는 거죠?”

명쾌한 답변을 얻지 못한 기자가 포토라인 너머로 상체를 뻗으며 질문을 이어갔다.

- “같이 나오다가 중간에 다시 돌아갔어요. 싸우다 반지를 떨어뜨린 것 같다고 해서.”

- “네? 반지요?”

기자가 13번 응시자의 설명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바로 그때.

- “어? 저기 나오네요.”

이름 모를 기자의 갑작스러운 질문 공세에 슬슬 짜증이 나고 있던 13번 응시자가 게이트에서 나오고 있는 태주의 반가운 모습을 볼펜 끝으로 가리켰다.

- “어! 진짜 나왔다!”

찰칵! 찰칵! 찰칵! 찰칵!

태주를 발견한 기자들이 연신 플래시를 터뜨렸다.

‘으음?’

번쩍이는 불빛들과 빗소리를 연상케 하는 시원한 셔터음이 태주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

기자들과 눈이 마주친 태주가 가벼운 눈인사를 건넸다.

레이드 후기에 대한 추가 인터뷰를 약속하긴 했지만, 비밀 평가지를 작성하는 것이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스슥. 슥슥.

조교로부터 익명성이 보장된 비밀 평가지와 볼펜을 건네받은 태주가 선배들의 눈을 피해 빠르게 명단을 작성했다.

흰색 별과 흰색 동그라미엔 1위 자리를 위협하지 않는 선배들로 적당히 채워 넣었다.

민주엽과 공슬아를 후보에서 제외한 것이다.

물론 경쟁자인 주엽에겐 검은색 별을 줄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까지 하진 않았다.

도발 스킬로 상대를 곤경에 빠뜨린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더구나 검은색 별에 적합한 인물은 따로 있었다.

장세종과 박성규.

마음 같아선 두 사람 모두에게 검은색 별을 주고 싶었지만, 규정상 한 명만 지목할 수 있었기에 마지막 빈칸은 박성규의 이름 석 자로 채워졌다.

[●: 장 세 종]

[★: 박 성 규]

평가를 마친 태주가 비밀 평가지를 두 번 접어 투표함처럼 생긴 상자 안에 집어넣었다.

“자, 다들 모여 봐. 평가지 안 낸 사람 있으면 빨리빨리 작성하고.”

학생들을 불러 모은 이 교수가 머리 위로 비밀 평가지를 흔들어 보였다.

“으음. 일단 단 한 명의 낙오자나 부상자 없이 무사히 테스트를 마친 것에 대해 박수 한번 치고 시작하자. 자, 박수.”

평가보다 중요한 것이 학생들의 안전이었기에 들어가기 전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한시름을 놓게 된 이 교수였다.

물론 몸 상태는 변함이 없어도 표정까지 그대로인 건 아니었지만.

짝! 짝! 짝! 짝!

손뼉을 치고 있는 학생들 속 세 사람의 표정이 유독 어두웠다.

박성규, 장세종, 그리고 민주엽.

특히 민주엽은 스스로에게 실망한 얼굴이었다.

학부 시절이 아닌 각성 이후를 통틀어 최악의 패배감을 맛보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주변에서 들려오는 동기들의 수군거림이 주엽의 심기를 더욱 불편하게 만들었다.

- “야, 너 흰색 별에 누구 뽑았어?”

- “흰색 별? 야, 너 비밀의 뜻 몰라?”

- “알지. 근데 오늘 같은 경우는 이미 정해진 게 아닌가 싶어서.”

말끝을 흐리던 81번 학생의 시선이 힌트를 주듯 태주가 있는 곳을 향했다.

- “뭐, 그렇긴 하지. 일단 보스전에서의 기여도만 봐도 100퍼센트였으니까.”

눈짓의 의미를 알아챈 65번 학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 “게다가 이기적으로만 플레이한 게 아니라 실격될 뻔했던 애들도 여러 번 도와줬잖아.”

- “하긴, 시험 중에 다른 사람을 챙기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

얼음 박쥐에게 둘러싸인 장세종과 설인의 롤링 어택에 깔릴 뻔한 52번 학생을 구한 것에 대한 이야기도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감점법의 특성을 고려해 이미지 관리에도 신경 썼던 태주의 노림수가 제대로 적중한 것이다.

물론 병을 주고 약을 준 장세종의 케이스는 52번 학생이 받은 도움과 결이 달랐지만.

- “아아, 내 여행 계획은 결국 물 건너가는구나. 아까 보니까 500이 아니라 1000만 원도 받을 수 있는 물건 같던데.”

이번엔 마정석에 눈독을 들였던 9번 학생이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태주가 있는 곳을 쳐다봤다.

- “뭐야, 너 진짜 기대했던 거야? 와아, 인간이 양심이 없네.”

옆에 있던 33번 학생이 코웃음을 쳤다.

- “너 아까 보스전 때 못 봤어? 막말로 폭발형 화살에 은신까지 쓰는데 그걸 네가 어떻게 이겨. 털에 찔릴까 봐 제일 먼저 도망친 주제에.”

- “야, 도망치긴 누가 도망쳤다고 그래. 그냥 반격을 도모하면서 안전거리를 확보한 거지.”

- “아무튼 은신 능력은 주엽이랑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거 같아. 어쩌면 더 오래 지속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

33번 학생의 예상대로 태주의 은신 스킬은 주엽의 한계치를 이미 넘어서고 있었다.

1초당 마나가 10씩 소모되지만, 마나의 여유가 넘쳐나는 태주로선 분 단위가 아닌 시간 단위로 스킬을 지속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 수업 시간에 미리 공지한 대로 최종 학점은 비밀 평가지의 집계와 심사위원들의 채점 결과를 합산해서 학기 말에 공개될 거야.”

모의 테스트 때와 달리 누가 몇 개의 흰색 별을 받았고, 누가 1등을 차지했는지에 대한 발표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참고로 정확한 성적 산출을 위해 근거 없는 혹평이나 담합 등의 부정행위는 철저하게 가려낼 거니까 혹시라도 공감할 수 없는 의견을 낸 사람이 있다면 기대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모의 던전 당시, 늘 네댓 개의 검은색 별을 받았던 태주의 입장에선 속 좁은 선배들의 견제를 방지할 수 있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누구라고는 안 하겠지만, 후배가 더 좋은 점수를 받는 건 건방진 것도 아니고, 하극상이 벌어진 건 더더욱 아니니까.”

악의적인 지목에 대해 경고하던 이 교수의 눈길이 순간적으로 박성규와 장세종을 향했다.

“자, 그럼 다들 늦게까지 수고했고. 이번 주 수업은 휴강이니까 다음 주에 보도록 하자.”

- “수고하셨습니다!”

- “야, 근처에서 맥주나 한잔하고 갈래?”

- “맥주? 그래.”

- “기숙사 가는 사람 선착순 2명. 택시비는 내가 낼게.”

- “어! 나! 나!”

이 교수의 간결한 총평을 끝으로 지친 몸을 이끈 학생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잃어버렸다는 반지는 찾았어?”

어느새 다가온 주엽이 태주의 등에 붙은 번호표를 떼어 주며 물었다.

“네. 근데 고드름 파편 밑으로 들어가 있어서 찾는 데 애를 좀 먹었습니다.”

태주가 함 교수에게 받은 반지가 끼워진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

원래는 왼쪽 검지에 끼던 물건이지만, 활을 움켜쥐고 있는 손에서 반지가 빠졌다고 하면 의심을 살 수도 있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위치를 바꾼 것이었다.

“아, 선배 것도 떼어 드릴까요?”

“아니. 난 이미 다 버리고 왔어.”

두 팔을 벌린 주엽이 한 바퀴 돌아 보이며 말했다.

“그나저나 은신 스킬은 또 언제 배운 거야? 보스몹의 대가리를 날린 그 무시무시한 화살은 또 뭐고. 설마 오늘을 위한 비장의 무기로 숨겨 놨던 거야?”

본게임에서 제대로 당한 주엽이 성장의 정도를 가늠할 수 없는 태주의 생소한 능력들에 호기심을 보였다.

“아니요. 일부러 숨긴 게 아니라, 딱히 쓸 일이 없었던 겁니다. 보스몹의 저항이 생각보다 강해서 어쩔 수 없이 꺼내든 카드였고요.”

“그래? 그럼 더 강한 상대를 위한 더 강력한 카드도 존재하겠네? 네 말대로 보스몹의 저항이 거셌긴 했어도 고작 E급 게이트에 불과하니까.”

함 교수만큼이나 태주의 한계가 궁금했던 주엽이 평소와 달리 집요한 모습을 보이며 물었다.

“글쎄요.”

확답을 피한 태주가 의도적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어차피 학부생 땐 E급 게이트만 들어갈 수 있어서 설령 있다고 해도 선보일 일이 없지 않을까요?”

“뭐야, 결국 안 가르쳐 주겠다는 거네?”

잠시나마 기대했던 주엽이 태주의 묵비권 행사에 헛웃음을 지었다.

“좋아. 뭐, 때가 되면 알아서 드러내겠지. 모름지기 세상을 뒤흔들 만한 능력은 감춘다고 해서 감춰지는 게 아니니까.”

질문을 그친 주엽이 태주의 한쪽 어깨를 토닥였다.

“오늘 수고했어. 아, 대엽이가 특히 좋아하겠네. 네가 날 눌러 줘서.”

“……?!”

태주가 주엽의 말에 흠칫했다.

자신의 패배를 인정해서가 아니라, 친형인 주엽을 대신 이겨 달라 했던, 그래서 누군가의 재능에 대한 열등감과 무력감을 느끼게 해주고 싶다 했던 대엽의 은밀한 부탁에 대해 아는 눈치였기 때문이다.

“네? 그게 무슨.”

자신을 떠보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일단은 모른 척 시치미를 떼고 보는 태주였다.

“모른 척하기는. 이왕 이렇게 된 거 맛있는 거보단 비싼 걸로 사 달라 그래. 천하의 민주엽을 당황하게 만들었는데, 그 정도 대가는 받아야지. 안 그래?”

주엽이 설인의 사기적인 방어력 앞에서도 의연함을 잃지 않았던 태주의 눈동자를 처음으로 흔들리게 만들었다.

“그럼 난 이만 집에 가 볼 테니까 넌 저기부터 가 봐. 다들 네가 언제 오나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데.”

취재진들이 있는 곳을 턱 끝으로 가리킨 주엽이 먼저 발걸음을 돌렸다.

“네. 그럼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주엽에게 인사를 건넨 태주가 포토라인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전설 등급의 반지를 잃어버렸다는 핑계로 보스가 있는 곳까지 되돌아간 이유에 대해선 철저히 말을 아낀 채.

*

*

*

지금으로부터 약 40분 전.

보스의 방에서 나와 입구 쪽으로 이동한 지 10분 정도가 흘렀을 무렵, 이 교수에게 양해를 구한 태주는 보스몹의 사체가 있는 곳으로 홀로 돌아간 상태였다.

‘될까?’

바닥에 흥건한 설인의 파란 피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태주가 긴가민가한 얼굴로 인벤토리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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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계가 없어서 그런가? 역시 전설 등급하고는 차원이 다르네.’

태주의 손엔 염 기사에게 선물 받은 재앙 등급의 부츠가 들려 있었다.

전장의 피를 탐식하는 포식자의 흡혈 장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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