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 하극상 (5)
‘뭐? 털이 축 늘어졌을 때를 노리라고?’
지금처럼 털끝이 빳빳하게 서 있을 때 공격을 시도하는 건 마나를 낭비하는 것에 불과했다.
‘그래서 언제 늘어지는데?’
물론 경화가 풀리는 타이밍이나 조건을 밝히는 건 온전히 태주의 몫이었지만.
쿠아아아아아!
좀처럼 내려올 생각이 없어 보였던 보스몹이 드디어 바닥으로 안착했다.
쿵!
동굴 바닥이 울릴 만큼 요란한 착지가 곳곳에 흩어져 있던 학생들의 이목을 단숨에 집중시켰다.
- “어! 내려왔다!”
- “고슴도치 새끼가 어디서 감히 잔재주를!”
- “야! 뒤쪽에서 치자!”
이때다 싶었던 아이들이 보스몹을 향해 총공격을 펼쳤다.
물론 공세를 펼칠 시점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태주는 선배들의 교전을 지켜보며 해법을 강구하고 있었지만.
깡! 깡! 깡! 깡!
성규와 세종의 실패를 목격한 궁수와 무투가들이 소극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반면, 전사와 어쌔신들은 아직까지 검증된 바 없는 장검과 단검을 이용해 설인의 살가죽을 공략하려 했다.
- “야! 이거 칼도 안 먹히는데?”
- “털 사이가 촘촘해서 찌르기도 소용없어!”
- “E급 주제에 너무 딴딴한 거 아니야?”
치고 빠지기를 반복하던 근거리 딜러들이 검의 내구도만 떨어지는 것을 염려하며 하나둘 물러서기 시작했다.
- “주엽아! 이제 어떡하지?”
“어떡하긴 뭘 어떡해. 일단 빠지고 봐야지.”
S급 어쌔신인 주엽이라고 해서 특별한 해결책이 있는 건 아니었다.
“파이어볼!”
동기들에게까지 피해를 입히고 싶지 않았던 슬아가 근거리 딜러들이 빠진 틈을 이용해 농구공만 한 불덩이를 보스몹에게 날렸다.
쿠아아아아아!
날카로운 손톱을 할퀴듯이 휘두르던 설인이 자신을 향해 빠른 속도로 접근하고 있는 파이어볼을 발견하곤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어쭈, 피해?”
자존심에 금이 간 슬아가 자신의 공격을 간발의 차이로 피한 건방진 설인에게 두 번째 파이어볼을 날릴 준비를 했다.
바로 그때.
“……?!”
별다른 도움닫기 없이도 긴 체공 시간을 자랑하던 설인이 지상으로 내려오기 직전, 거대한 신체를 웅크렸다.
‘찾았다. 빈틈…….’
설인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던 태주의 한쪽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찰나였지만, 몸을 공처럼 동그랗게 말기 위해 겉으로 노출되지 않는, 다시 말해, 서로 맞닿을 수밖에 없는 복부와 앞쪽 허벅지의 털만 힘없이 늘어뜨리는 장면을 똑똑히 목격했기 때문이다.
팍!
발바닥이 아닌 털끝으로 꽂히듯이 바닥에 착지한 보스몹은 아이들의 비유처럼 영락없는 성게의 형체가 되어 있었다.
쿠아아아아아!
위협적인 포효와 함께 앞구르기를 시작한 보스몹이 킹 핀을 노리는 볼링공처럼 학생들을 향해 롤링 어택을 가했다.
- “어! 온다!”
- “왜 하필 이쪽이야!”
보스몹의 첫 번째 타깃이 된 학생들이 롤링 어택의 진행 경로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방으로 내달렸다.
쿠아아아아아!
목표물들이 흩어진 것을 인지한 보스몹이 이번엔 방향을 틀어 학생들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 “이런 씨, 왜 따라오고 난리야!”
- “야! 누가 실드 좀 쳐라!”
물리적인 공격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학생들이 보스몹과 때아닌 술래잡기를 펼치던 바로 그때.
- “으아악!”
한 번씩 뒤를 돌아보며 뛰던 선배 한 명이 바닥에 부서져 있던 고드름 조각에 발끝이 걸려 앞으로 고꾸라졌다.
철퍼덕!
- “하필이면, 이 씨.”
홀로 남겨진 52번 응시자가 네 발로 기듯 필사적으로 몸을 일으켰지만, 자비 따윈 없는 설인의 날카로운 털끝은 모든 것을 깔고 지나갈 기세로 맹렬히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바로 그때.
▶ 스킬 『점멸』이 발동되었습니다.
52번 응시자의 곁으로 자리를 옮긴 태주가 순간 이동과 동시에 선배의 몸을 어깨로 밀쳐냈다.
퍽!
태주의 숄더 차지에 밀려난 52번 응시자의 몸이 누가 집어던진 것처럼 두 발이 땅에서 떨어진 채 수평으로 날아갔다.
- “어어어어!”
52번 응시자를 보스몹의 진행 경로 밖으로 무사히 내보내는 데 성공한 태주가 털끝에 찔리기 직전, 신속하게 몸을 피했다.
▶ 스킬 『점멸』이 발동되었습니다.
선배의 예상 추락 지점에 미리 도착해 있던 태주가 공중에서 허우적거리던 52번 응시자의 몸을 두 팔로 안전하게 받아냈다.
툭!
건장한 체격의 전사 클래스 선배였지만, 근력 수치가 워낙 강화된 상태라 어린아이처럼 쉽게 받아낼 수 있었다.
“선배, 괜찮아요?”
52번 응시자를 가볍게 들어 안고 있던 태주가 선배의 상태를 확인했다.
- “어? 어, 난 괜찮아.”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구출 작전에 어안이 벙벙한 52번 응시자가 태주에게 부딪힌 어깨를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닥에 고드름 파편이 많으니까 조심하세요.”
안전이 확보되고 나서야 선배를 내려준 태주가 살가운 당부의 말을 덧붙였다.
- “어, 그래. 고마워.”
52번 응시자가 생명의 은인인 태주에게 진심 어린 감사를 표했다.
쿠아아아아아!
태주와 52번 응시자를 모두 놓친 보스가 다른 목표물을 향해 맹렬히 돌진했다.
‘슬슬 일어날 때가 됐는데.’
반격 타이밍을 엿보고 있던 태주가 성과 없는 공격을 이어가던 보스몹의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어! 일어난다.’
얼음 동굴 안을 정신없이 휘젓고 다니던 보스몹이 구르기 자세를 풀고 구부렸던 허리를 펴기 시작했다.
▶ 스킬 『점멸』이 발동되었습니다.
빈틈은 정면에 있었기에 보스몹과 마주 보는 위치로 재빨리 이동한 태주였다.
쉬이익!
활시위를 당긴 채 순간 이동을 한 태주가 설인의 복부를 향해 파이어 애로우 한 발을 날렸다.
팅!
“……?!”
태주가 쏜 회심의 화살이 급속도로 경화된 털끝에 가로막혀 허무하게 튕겨 나갔다.
롤링 어택을 위해 숨이 죽어 있던 털들이 허리를 펴는 과정에서 동시에 세워지다 보니 화살촉이 파고들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생각보다 부족했던 것이다.
‘아무래도 다시 웅크릴 때를 노려야겠네.’
태주가 타인 앞에선 처음 선보이는 화살인 버스터 애로우를 장착했다.
▶ 버스터 애로우[B]를 선택하셨습니다.
털이 축 늘어지는, 다시 말해, 몸을 동그랗게 마는 시간 동안 발사할 수 있는 화살의 개수는 단 한 개.
그 한 번의 기회를 살리기 위해선 마나로 생성한 폭발형 화살인 버스터 애로우가 제격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던전의 형태가 붕괴의 위험이 있는 얼음 동굴이라는 점을 감안해 3초간의 차징으로 발동되는 대폭발 효과는 자제할 생각이었지만.
- “야! 섰다!”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치던 한 학생이 구르기를 그친 보스몹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이번엔 안 놓친다! 파이어볼!”
슬아의 공격을 시작으로 후방에 빠져 있던 법사 클래스 학생들의 동시다발적인 역공이 시작됐다.
- “윈드 커터!”
- “에너지 볼트!”
물론 5미터에 육박하는 거대한 설인을 쓰러뜨리기엔 무언가 아쉬운 화력이었지만.
쿠아아아아아!
사방에서 날아드는 법사들의 마법 공격을 온몸으로 흡수하듯이 받아낸 보스몹이 자신의 방어력을 과시하듯 메아리가 칠 정도로 사납게 포효했다.
“아니, 무슨 털이 타지도 않지?”
보스몹의 성질만 돋우는 꼴이 된 슬아가 불 속성 마법에도 끄떡없는, 마치 실드를 치고 있는 듯한 설인의 사기적인 털가죽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 “근데 태주가 쏜 화살도 안 먹히지 않았어?”
슬아의 혼잣말을 들은 동기 한 명이 파이어볼과 같은 불 속성 공격을 시도했던 태주의 실패 사례를 떠올리며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넸다.
- “그러게. 나도 그 부분은 좀 의아했어.”
이번엔 근처에 있던 다른 동기가 맞장구를 쳤다.
태주의 실력에 의심을 품는 이들이 생겨난 것이다.
- “교수님, 이쯤에서 테스트를 종료하는 건 어떨까요?”
잠시 볼펜을 멈춘 조교 하나가 이 교수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건의했다.
일방적인 레이드가 될 것이란 예상과 달리 1 대 101이라는 압도적인 수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 공략법을 찾지 못하고 있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 “저러다 자칫 예기치 못한 사고로 이어질 것 같아서요.”
생각지도 못한 변수의 등장.
학생들의 안전을 위해 사전 답사를 하긴 했지만, 대부분 던전 입구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점까지만 간단하게 둘러볼 뿐, 보스의 방까지 들여다보고 나오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더구나 철옹성과 같은 보스를 E급 게이트에서 만난다는 건 확률적으로도 이 교수 개인의 부주의가 아닌 불운에 가까운 해프닝이었다.
“으음.”
선택의 기로에선 이 교수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래. 평가에 필요한 자료들은 충분히 수집했으니까 일단 밖으로 나가서 협회 측에 뒤처리를 부탁하자.”
조교의 건의를 받아들인 이 교수가 직접적인 개입이 아닌 시험의 중단을 결정했다.
사전 답사의 부족함만을 이유로 이 교수를 비난할 순 없었지만, 만에 하나 회복 마법으론 돌이킬 수 없는 극심한 피해가 학생들에게 발생할 경우 인솔자로서의 책임을 회피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자! 평가는 여기까지만 할 테니까 다들 게이트 쪽으로 이동하자!”
이 교수가 뿔뿔이 흩어져 있던 아이들에게 큰 목소리로 외쳤다.
물론 태주에게 있어 퇴각이란 선택지는 불리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었지만.
‘뭐? 이대로 끝낸다고?’
다음 롤링 어택을 기다리고 있던 태주가 이 교수의 외침에 두 귀를 의심했다.
자신의 실력을 의심받고 있는 상황에서 물러날 경우 비밀 평가를 앞두고 있는 선배들로부터 좋은 점수를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S급도 아닌 E급 게이트에서?’
더구나 전리품은커녕 보스몹의 공략에 실패했다는 사실이 게이트 밖에서 진을 치고 있는 기자들의 귀에 들어가는 순간, 부정적인 기사들이 양산되는 것은 물론, 예비 등록을 앞두고 있는 태주의 행보에도 큰 걸림돌이 될 수 있었다.
‘절대 그럴 순 없지.’
▶ 스킬 『은신』이 발동되었습니다.
태주가 버스터 애로우와 마찬가지로 타인에게 공개적으로 선보인 적이 없는 투명화 스킬을 사용했다.
화살이 날아가는 시간조차 단축시킬 작정으로 근거리 딜러와 다를 바 없는 가까운 거리에서 찰나의 순간을 노리기 위함이었다.
- “어? 태주 얜 갑자기 어디로 갔지?”
- “뭐야, 순간 이동한 거 아니었어?”
점멸 스킬로 인해 잠시 사라진 것이라 여기고 있던 학생들이 홀연히 자취를 감춘 태주의 묘연한 행방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 “교수님, 태주가 안 보이는데요?”
태주의 흔적이 증발된 것을 처음으로 알아챈 응시자가 이 교수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뭐? 태주가 안 보인다고? 그게 무슨.”
뜻밖의 제보에 당황한 이 교수가 황급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태주야! 신태…….”
애제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이 교수가 본능적으로 목청을 높이던 바로 그때.
펑!
때아닌 폭발음과 함께 약점이 없어 보였던 보스몹의 철옹성 같은 몸뚱이가 그대로 나가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