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 하극상 (1)
“이종도 교수님이세요?”
태주가 물었다.
“어. 결과가 궁금해서 전화했나?”
혼잣말을 하듯 대답한 승화가 스피커폰 상태로 통화를 연결했다.
“여보세요?”
[“어, 나야. 태주는?”]
휴대폰 너머로 이 교수의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지금 옆에 있어.”
목소리가 그리 다급하게 들리진 않아 한결 마음이 놓인 승화였다.
[“옆에? 그럼 벌써 결과가 나온 거야? 어떻게 됐는데?”]
응시자들의 집합 시간 정도만 알고 있던 이 교수가 재촉하듯이 물었다.
“어떻게 됐냐고? 당연히 합격이지. 그것도 전체 1등으로.”
대답도 하기 전에 입꼬리부터 올라간 승화가 태주의 놀라운 성적을 당당하게 알렸다.
[“전체 1등? 우와! 역시 클래스가 다르네.”]
마치 바로 옆에서 내지른 듯 이 교수의 우렁찬 환호성이 수화부 스피커를 뚫고 육성으로 터져 나왔다.
프레데터 등급의 달성까진 확신하고 있었지만, 혹여나 태주에게 부담이 될까 1등에 대한 기대감은 내색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피커폰이니까 하고 싶은 말 있으면 그냥 해.”
귀에 대고 통화하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여긴 승화가 손에 든 휴대폰을 태주 쪽으로 내밀며 이 교수에게 말했다.
[“아, 그래? 태주야, 내 목소리 들려?”]
한층 톤이 높아진 이 교수가 반색을 하며 물었다.
“네, 교수님, 덕분에 시험 잘 보고 왔습니다.”
휴대폰 쪽으로 살짝 허리를 굽힌 태주가 수업을 빼 준 것에 대한 감사를 표했다.
[“내 덕분은 무슨. 다 네가 잘해서 그런 거지. 아무튼 고생했어. 옆에 있는 줄 알았으면 영통으로 하는 건데.”]
“그나저나 전화는 왜 했어? 토요일이라 강의도 없을 텐데.”
문득 궁금증이 밀려든 승화가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며 용건을 물었다.
[“아, 좀 전에 협회에서 연락을 받았거든.”]
“연락? 태주 씨의 소식이 벌써 닿았어?”
[“아니. 시험에 대한 건 맞는데, 푸드 체인 테스트가 아니라 던전 실습 때문에 연락이 왔어. 평가에 적합한 E급 게이트가 캠퍼스 부근에서 생성됐다고.”]
“진짜? 아니, 뭐, 그런 눈치 없는 게이트가.”
빤빤했던 승화의 미간에 순간적으로 주름이 졌다.
E급 게이트의 생성 시기와 싱가포르에서의 체류 시점이 겹치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럼 어떡해? 지금 바로 표 끊고 들어가야 돼?”
일순간 마음이 조급해진 승화가 앞머리를 정수리까지 쓸어넘기며 물었다.
[“으음. 안 그래도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고민을 좀 해 봤는데,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나는 시점이 게이트 생성 후 최소 72시간 이후이기도 하고, 어차피 E급 게이트라 공략에 애를 먹을 가능성도 희박하니까 태주가 쉴 수 있는 시간도 벌고, 다른 교수님들 수업에도 피해가 가지 않게 일단 오늘은 연락만 돌리고, 진입은 월요일에 하려고. 한 저녁 7시쯤.”]
다행히 이 교수는 태주의 컨디션을 최우선으로 고려한 대안을 마련해 둔 채 연락을 취한 것이었다.
“월요일 저녁 7시? 그럼 우리야 고맙지. 내일 당장 소집이면 일정상 좀 빠듯할 뻔했는데.”
전화를 끊자마자 공항으로 향할 기세였던 승화가 이 교수의 융통성 있는 일 처리 방식에 한숨을 돌렸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교수님.”
당사자인 태주 역시 여유를 되찾은 것에 대한 고마움을 표했다.
물론 내일 당장 게이트에 들어간다고 해서 실력 발휘가 안 된다거나 심적인 부담이 더해지는 건 아니었지만.
[“내가 약속했잖아. 웬만하면 진입 시점을 조절해 보겠다고. 아, 대신 다른 선배들한테는 절대 비밀이다. 알았지?”]
가뜩이나 모두의 반대를 무릅쓰고 4학년 수업에 참여시킨 마당에 신입생에게 맞춰 시험 일정까지 조정했다는 사실이 발각될 경우 교수로서의 공정성과 형평성에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었다.
“네. 따로 공지가 돌 때까진 모른 척하겠습니다.”
그러한 리스크를 모를 리 없는 태주가 이 교수의 당부에 지혜로운 처신을 약속했다.
[“그래. 그럼 오늘은 푹 쉬고, 나중에 한국에서 보자. 괜히 선물 같은 거 사 오지 말고.”]
태주와 말을 맞춘 이 교수가 가벼운 농담으로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뭐야, 그러니까 더 부담되잖아.”
곁에서 듣고 있던 승화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이 교수의 장난기를 나무랐다.
[“에이, 농담이야 농담. 내가 언제 그런 부탁이나 했다고.”]
“아니요. 안 그래도 싱가포르에 유명한 커피 브랜드가 있다고 해서 교수님 생각이 났습니다.”
눈치 빠른 태주가 교수실로 활을 받으러 갔을 때 알게 된 이 교수의 카페인 사랑을 떠올리며 말했다.
[“커피? 이야, 커피는 또 나의 버프이자 포션이지.”]
태주의 눈썰미에 감탄한 이 교수가 자신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그럼 기대할게. 승화 너도 옆에서 좀 보고 배우고.”]
“어, 그래. 우리 밥 먹으러 가야 되니까 그만 끊는다.”
더 이상 중요한 용건은 없다고 판단한 승화가 이 교수의 농담에 건성으로 대답한 뒤 일방적으로 통화를 종료했다.
“태주 씨, 가요. 오늘은 제가 풀코스로 쏠 테니까.”
태주에게 온전히 집중하기 위해 자발적인 금주까지 택했던 승화가 술을 마셔도 된다는 생각에 해방감을 감추지 못했다.
“네, 그전에 전화 한 통만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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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주가 최 이사에게 받은 명함을 왼손에 들어 보였다.
“전화요? 어? 이건.”
명함에 적힌 이름을 확인한 승화가 두 사람의 만남이 이미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흠칫 놀랐다.
“네. 안에서 이사님을 뵀거든요. 여러모로 도움을 받은 것도 있고.”
“어휴, 그럼 얼른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죠. 아, 제가 옆에 있는 게 불편하면 잠시 빠져 있을까요?”
승화가 엄지로 자신의 뒤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니요. 어차피 매니저님과 공유할 내용인데요 뭐.”
휴대폰을 꺼내든 태주가 스피커폰 상태로 전화를 연결했다.
“여보세요?”
[“아, 후배님, 설마 작별 인사를 하러 전화한 거예요?”]
명함을 건넨 이후에 나눈 첫 통화임에도 불구하고, 단번에 목소리를 알아들은 최 이사였다.
“아니요. 실은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릴 타이밍이 없어서 이렇게 따로 전화를 드렸습니다.”
[“아아, 그거요. 안 그래도 후배님 편을 든 이후엔 제가 먼저 자리를 피했어요. 괜히 같이 있는 모습을 보이면 다른 응시자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서.”]
“네. 그래서 저도 굳이 선배님의 뒤를 쫓아가진 않았습니다.”
[“잘했어요. 따로 가르쳐 주지 않아도 눈치껏 착착 움직여 줘서.”]
다른 이들의 시선을 의식했던 최 이사가 태주의 현명한 대처에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아 참, 그리고 후배님이 저와의 약속을 너무나도 빨리, 또 완벽하게 지켜 줘서 저 역시 협회 본부와 피크닉 측에 아까 말한 요구 사항들을 일찌감치 전달해 뒀어요.”]
“감사합니다. 제 부탁 말고도 신경 쓰실 일이 많으실 텐데.”
[“신경 쓸 일이야 많지만, 후배님의 부탁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으니까요. 제 말 무슨 뜻인지 알죠?”]
최 이사에게 있어 태주는 자신의 오랜 바람을 이루어 줄 유일한 열쇠이자 변화의 선봉장이었다.
“네. 알고 있습니다.”
[“그래요. 그럼 준프로가 된 거 축하하고, 앞으로도 이렇게 연락하면서 지내요.”]
“네, 선배님. 그럼 출국하기 전에 연락드리겠습니다.”
“태주 씨, 근데 약속을 지켰다는 게 뭐예요? 요구 사항들은 또 뭐고.”
두 사람의 수수께끼 같은 대화를 조용히 듣고 있던 승화가 통화를 마치기 무섭게 질문을 쏟아냈다.
“아, 그건 밥 먹으면서 천천히 설명해 드릴게요.”
물론 급할 것이 없는 태주에겐 저녁 메뉴를 정하는 것이 더 우선이었지만.
“근데 뭐 사주실 거예요?”
*
*
*
다음 날, 오후.
인천 공항에 도착한 태주가 출국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 “어! 저기 나온다!”
입국 한 시간 전부터 나와 기다리고 있던 취재진들의 카메라가 일제히 태주를 향했다.
‘와아, 왜 이렇게 많이 왔지?’
기자들의 숫자는 출국 당시보다 정확히 3배가 더 늘어 있었다.
찰칵! 찰칵! 찰칵! 찰칵!
빗소리를 연상케 하는 셔터음과 함께 사방에서 플래시가 터졌다.
“태주 씨가 1등을 한 게 확실히 효과가 있네요. 이렇게 알아서들 모여 주고.”
한 박자 늦게 취재진을 발견한 승화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자신이 연락을 돌린 기자들의 수보다 훨씬 많은 인원이 포토 라인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전 가서 차부터 대기시켜 둘게요.”
커다란 캐리어 두 개를 끌며 태주의 뒤를 쫓던 승화가 카메라의 포커스를 피해 슬쩍 옆쪽으로 빠졌다.
- “신태주 씨, 역대 최초, 최단, 최고의 기록으로 푸드 체인 테스트를 통과하셨는데, 지금 기분이 어떠십니까?”
한 기자가 눈길을 끄는 목청으로 태주의 소감을 물었다.
“아, 기분이요.”
태주가 기자들이 미리 바닥에 테이프로 표시해 둔 정지선 위에 멈춰 섰다.
“기록에 집착했던 건 아닌데, 그래도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와서 기분은 좋습니다.
들뜬 기색 하나 없는 차분한 목소리가 오히려 운 좋게 얻은 성적이 아님을 방증하고 있는 듯했다.
- “신태주 씨, 국제헌터협회에선 이번 기록을 인류의 정체되지 않는 무한한 성장 가능성의 한 표본이라고까지 명명했는데, 본인이 생각했을 때도 자신의 한계가 아직 멀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번엔 다른 언론사에서 질문을 이어갔다.
특히 질문의 내용에서도 알 수 있듯 국제헌터협회의, 심지어 아시아 지부가 아닌, 본부 측에서 공개적인 입장을 표명한 상황이었는데, 이는 특별 여권을 신청한 태주에게 희소식이나 다름이 없었다.
예외적인 발급 자격 중 하나인 ‘업계의 발전에 기여한 공을 인정받은 선구자적인 인물’에 점점 더 부합하는 이미지를 형성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글쎄요. 한계를 생각하기엔 너무 이른 시기라 그에 대한 답변은 나중으로 미루도록 하겠습니다.”
인류 최초의 7차 각성 등극에 대한 가능성을 묻는 질문이었지만, 성장의 주된 원동력이라 할 수 있는 시스템의 비밀조차 완벽히 밝혀내지 못한 시점이라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확답을 줄 수 있는 부분은 아무것도 없었다.
- “그럼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십니까?”
“으음. 딱히 계획이라고 할 것까진 없지만, 일단 내일은 중요한 시험을 하나 앞두고 있어서 거기에만 집중해야 될 것 같습니다.”
- “시험이요? 중간고사 기간은 이미 지난 걸로 아는데, 혹시 무슨 시험인지 알 수 있을까요?”
기자가 던전 실습을 염두에 둔 태주의 대답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그냥 학교 시험입니다. 중간 겸 기말이요.”
게이트 주위로 기자들이 몰릴 것이 걱정됐던 태주가 시험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말을 아꼈다.
물론 조용히 기자들을 움직이는 최 총장이 태주의 인생 첫 레이드와 같은 좋은 홍보 수단을 모른 척 넘어갈 리 없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