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 레벨 테스트 (5)
“미쳤다!”
정말 미친 사람처럼 느닷없이 목청을 높이던 현웅이 한껏 상기된 얼굴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몰라 봬서 죄송합니다!”
태주로부터 두어 발짝 떨어진 곳에 멈춘 현웅이 차렷 자세를 한 채 기역(ㄱ) 자로 몸을 굽혔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중간 과정이 생략된 갑작스러운 사과였지만, 그 의미가 무엇인지, 또한 어떠한 깨달음을 통해 고개를 숙이게 된 것인지는 충분히 가늠할 수 있었다.
“갑자기 캐릭터가 바뀌어서 좀 당황스럽네. 일단 고개부터 들어.”
화살 2발로 아버지의 마음을, 그리고 2발을 더 보태 아들의 마음마저 사로잡은 태주가 현웅의 급격한 태세 전환에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네!”
그제야 허리를 편 현웅의 눈빛에선 이미 태주에 대한, 정확히 말하면, 태주의 압도적인 실력에 대한 경외심이 어려 있었다.
“일단 활 잘 썼어. 그리고 활대의 탄성엔 아무런 문제가 없던데?”
태주가 손에 익기도 전에 내린 활을 돌려주며 현웅의 변명을 반박했다.
“네? 아, 네.”
하사품을 받듯 두 손으로 공손하게 활을 받아든 현웅이 태주의 지적에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저, 선생님.”
“어, 왜.”
“저도 선생님처럼 매직 아처가 될 순 없나요?”
불가능마저 가능케 하는 매직 아처의 독보적인 속사 능력에 매료된 현웅이 의욕적인 목소리로 전직의 가능성을 물었다.
물론 처음 받아 보는 질문이 아닌 만큼 거절에 대한 답변 역시 어느 정도 정형화되어 있었지만.
“으음. 미안하지만,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아.”
현웅의 부탁에 잠시 고심하는 척을 하던 태주가 난색을 표하며 말했다.
“어? 왜요?”
“나에 대해 어디까지 찾아봤는지는 모르겠지만, 언론을 통해 이미 언급했듯 이건 노력으로 이루어 낸 전직이 아니거든. 구체적인 이정표를 제시할 수 있을 만한 노하우나 특별한 전조 현상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럼 전 죽었다 깨어나도 선생님처럼 될 수 없는 건가요? 선생님한테 1년, 아니, 그 이상을 배워도?”
“지금으로선 확답을 해줄 수 있는 부분이 없어. 다만.”
완곡한 거절의 의사를 밝힌 태주가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현웅의 숨길 수 없는 아쉬움을 그럴듯한 위로의 말로 달래 주었다.
“확답을 해줄 수 없다는 말엔 긍정과 부정이 공존하고 있다는 거 알지? 무책임한 희망 고문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E급 궁수였던 내가 하루아침에 S급 매직 아처로 전직된 것처럼 너에게도 얼마든지 같은 우연이 발생할 수 있다고 생각해.”
“정말 그럴 수 있을까요?”
“나도 매직 아처가 된지 6개월밖에 안 됐어. 한마디로 더 이상의 매직 아처는 없다고 속단하기 어려운 시점이라는 거지. 어쩌면 수많은 매직 아처들이 올해 안에 동시다발적으로 생겨날지도 모르는 일이고.”
“어? 그럼 저도 살짝 기대해 볼 수 있겠네요. 선생님도 19살 때 매직 아처가 된 거니까.”
태주의 빈말에 한결 표정이 밝아진 현웅이 자신의 상황을 태주의 사례에 끼워 맞추며 위안을 삼았다.
“대신, 기대는 하되 훈련은 게을리하지 마. 어차피 매직 아처가 돼도 궁수라는 본질 자체는 달라지지 않으니까.”
“넵! 명심하겠습니다!”
습관이 된 게으름이 쉽게 고쳐질 수 있을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문제였지만, 일단 훈련에 대한 의욕과 태주를 대하는 태도만큼은 합격점을 줄 수 있었다.
“하하하하!”
아들의 낯선 모습을 지켜보던 조 중장이 목젖이 보일 만큼 호탕하게 웃었다.
“이거 아주 군기가 제대로 들었는데? 지금 당장 입대해도 되겠어.”
아들이 존경할 수 있는 롤 모델 같은 선생님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태주를 적임자로 낙점했던 조 중장이 자신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기뻐하며 눈앞의 상황을 만끽했다.
“아빠, 나 각성자라 군대 안 가는 거 몰라? 나 면제야. 면제.”
현웅의 말대로 각성자 판정을 받은 국민은 국가 비상사태에 상시 동원되는 조건으로 병역의 의무가 법적으로 면제되었다.
물론 ‘상시’라는 표현을 조문에서 삭제하기 위한 각성자들의 움직임이 있을 만큼 군 면제의 혜택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었지만.
“선생님, 그럼 다음 주부터 바로 수업을 시작하는 거죠? 토요일 오전 10시부터 12시까지. 단, 각자의 사정에 따라 스케줄을 조정할 수 있는 걸로. 아빠한테 다 들었어요.”
“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지금 잡혀 있는 일정이 몇 개 있어서 미리 공유를 좀 해야 될 거 같아.”
5월 마지막 주 토요일에 있을 싱가포르에서의 푸드 체인 테스트와 7월부터 시작될 5주간의 인턴십 프로그램을 앞두고 있는 태주가 학부모와 학생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조율이 불가피한 일정을 공개했다.
“어? 설마 다 토요일에 있는 스케줄이에요?”
“어. 일단 5월 마지막 주랑 7월부터 한 5주 동안은 그때그때 시간을 조정해야 될 거 같아.”
“네? 5주씩이나요? 어디 유럽으로 배낭여행이라도 가세요?”
“여행이었으면 과외 자체를 못 했겠지.”
“그럼 무슨 일인데 그러세요? 7월이면 여름 방학 기간 같은데.”
“인턴십.”
“네? 인턴십이요? 그게 뭔데요?”
취업에 대한 관심이 부족한 현웅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쉽게 말해, 길드에 가서 헌터로서의 업무를 미리 체험해 보는 거다. 넌 그런 것도 안 배웠냐?”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든 조 중장이 태주의 대답을 가로채며 아들의 부족한 상식 수준을 나무랐다.
“그나저나 인턴십을 벌써 하십니까? 3, 4학년이면 몰라도 1학년 때부터 지원한다는 얘기는 처음 들어 보는 거 같은데.”
“지원을 한 게 아니라 제안을 받은 겁니다.”
“인턴십인데 제안을 받았다고요? 대체 어느 길드가 제안한 겁니까?”
상식을 운운했던 조 중장이 상식을 벗어난 태주의 이른 인턴십 시기와 그 참여 방식에 두 귀를 의심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협회장님의 주재 하에 5대 길드에서 각각 일주일씩 인턴십을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네?! 5대 길드요? 그럼 한 군데가 아니라 다섯 군데라는 겁니까?”
당연히 한 곳에서만 인턴십을 진행하는 줄 알았던 조 중장이 태주의 입에서 나온 파격적인 대답에 화들짝 놀랐다.
“네. 일반적인 케이스는 아니지만, 다행히 대표님들께서 모두 동의해 주셔서 순조롭게 논의를 마쳤습니다.”
“이야, 이런 분이 과외를 맡아 주신다니 정말 가문의 영광입니다.”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다시 한번 실감한 조 중장이 황송한 얼굴로 태주의 손을 부여잡았다.
“과찬이십니다. 물론 현웅이의 수업 태도에 따라 공유할 필요가 없는 일정이 될 수도 있지만.”
누가 갑이고, 누가 아쉬운 쪽인지를 확실히 짚고 넘어가기 위한 마지막 기 싸움.
대화의 주도권과 수업에 대한 전권 모두를 움켜쥔 채 과외를 시작하고 싶었던 태주가 7월 전에 사임할 수도 있다는 암시로 긴장감을 조성하며 슬그머니 손을 뺐다.
“네? 아, 네, 그렇죠.”
끝까지 마음을 놓을 수 없는 태주의 우회적인 으름장에 막연한 불안감을 느낀 조 중장이 공든 탑을 무너뜨릴 수 있는 유일한 위험 요소인 아들을 따끔하게 다그쳤다.
“야! 너 앞으로 똑바로 해. 학원에서처럼 대충대충 하다 걸리면 아주 죽여 버릴 거니까. 알았어!”
“알아, 알아. 내가 그 정도 눈치도 없는 줄 알아?”
물론 이번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 건 당사자인 현웅도 마찬가지였지만.
“참고로 레벨 테스트의 결과는 말 안 해도 알지?”
자신의 의도가 충분히 전달되었다고 판단한 태주가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A급이라고 안심할 단계가 아니란 건 네가 더 잘 알 테니까 더 이상 길게 얘기하진 않을게.”
“감사합니다.”
두 손을 앞으로 공손히 모은 현웅이 적나라한 피드백을 생략한 태주의 배려에 꾸벅 고개를 숙이던 바로 그때.
▶ 선택한 물품을 소환하시겠습니까? (Y/N)
“그리고 이거.”
인벤토리를 연 태주가 국내 업체로부터 협찬받은 레이드 보우 한 개를 현웅에게 건넸다.
여러모로 인연이 깊은 택시 기사의 아들이자 자신의 팬인 비각성 궁수 지망생 고창윤에게 주었던 입학 선물과 동일한 모델이었는데, 일반 등급인 탓에 딱히 사용할 일이 없어 이렇게 생색내기용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물론 홍보용으로 무려 5개나 지원받은 터라 아직도 3개가 더 남아 있었지만.
“어? 이게 뭐예요?”
얼떨결에 활을 받아든 현웅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선물.”
“네? 선물이요?”
“어. 앞으로 잘하라는 의미에서 주는 작은 선물.”
“……?!”
채찍과 당근을 번갈아 주듯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다는 뉘앙스로 긴장감을 주던 태주의 생각지도 못한 선물에 현웅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와아, 이거 진짜 주시는 거예요? 오오, 대박.”
상황 파악을 마친 현웅이 활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아이고, 선생님, 뭘 이런 것까지…….”
아이처럼 기뻐하는 아들의 모습에 덩달아 흐뭇해진 조 중장이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야, 너 선생님 드리게 가서 음료수 좀 가져와. 아주 시원한 걸로.”
“어? 어, 알았어. 내가 금방 갔다 올게.”
심부름을 시킬 때마다 늘 토를 달았던 현웅이 태주에게 받은 활을 어깨에 맨 채 쏜살같이 뒷문으로 뛰어갔다.
“하하. 저 녀석이 군말 없이 심부름을 가는 모습도 다 보네요.”
태주로 인한 가시적인 변화를 목격한 조 중장이 아들의 분주한 뒷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사실 따로 드릴 말씀이 있어서 이렇게 음료수를 핑계로 자리를 비우게 했습니다.”
사격장에 단둘이 남겨진 것을 확인한 조 중장이 때아닌 심부름의 이유를 밝히며 태주를 마주했다.
“네. 말씀하시죠.”
별장에서의 첫 만남을 선물과 함께 마무리 지으려 했던 태주가 조 중장의 은밀한 대화 요청에 차분한 목소리로 응했다.
“인턴십 기간엔 프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실제 게이트에 들어간다 들었습니다. 물론 안전상의 이유로 대부분의 교육이 E급 게이트에서 이루어진다는 것도요.”
“네. 저도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안 그래도 5월 중순부터 6월 중순 사이에 먼저 E급 게이트에 들어갈 예정이고요.”
“네? 그렇게나 빨리요?”
7월에 있을 인턴십 일정만 염두에 두고 있던 조 중장이 뜻밖의 사실에 놀라 목소리가 커졌다.
“제가 4학년 과목인 던전 실습1을 수강하고 있거든요.”
“아니, 4학년 과목을 1학년이 말입니까? 하하. 이거 괜히 인턴십을 앞당긴 게 아니었네요.”
알면 알수록 놀라운 태주의 비현실적인 행보에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건 그렇고, 제가 뭐 하는 사람인지는 알고 계시죠?”
“네. 게이트작전사령부의 사령관님이라고 정웅이한테 들었습니다.”
“그럼 게이트작전사령부가 무슨 일을 하는 곳인지도 아시겠네요?”
뒤늦은 자기소개를 시작한 조 중장이 바지 뒷주머니에 있던 지갑을 꺼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