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 과외 (1)
‘이게 그 교도관 모형이구나.’
화장실 앞에 도착한 태주가 잠시 걸음을 멈춘 채 작품을 감상했다.
“남자 화장실은 왼쪽이에요.”
등 뒤에서 들려온 낯선 목소리가 태주에게 말을 걸었다.
“…….”
뒤를 돌아본 태주가 자신을 향해 호의적인 미소를 짓고 있는 한 남성과 말없이 눈을 마주쳤다.
“아, 물론 모를 것 같아서 알려준 건 아니에요.”
농담이었음을 밝힌 의문의 손님은 태주의 곁으로 자연스럽게 다가가 능청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
“와아, 잘 만들었다. 그죠? 누군진 몰라도 완전 금손이네. 표정도 살아 있고.”
교도관 모형의 디테일에 감탄하던 남자의 시선이 태주의 손으로 옮겨졌다.
“태주 씨도 금손이라면 금손이겠죠?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점에선 예술가나 마찬가지니까.”
매직 아처의 화살 생성 능력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남자가 갑자기 활시위를 당기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
“아이고, 그래도 대화는 처음인데 너무 부담스럽게 다가갔나?”
아무렇지 않게 너스레를 떨던 의문의 손님이 태주의 미적지근한 반응에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어설픈 활쏘기 동작을 거뒀다.
‘대화는? 언제 만난 적이 있나?’
구면임을 암시하는 상대의 미묘한 뉘앙스가 마음에 걸린 태주가 잠시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전 신방과 3학년 홍영광이에요.”
뒤늦게 자신을 소개한 남자가 태주에게 악수를 청했다.
‘홍영광? 어디서 들어본 것 같긴 한데…….’
기억력이 좋은 편인 태주가 긴가민가하게 여긴다는 건 회귀 전후를 통틀어 그리 인상적인 만남이 없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까 이벤트 할 때부터 쭉 지켜보고 있었는데, 아마 태주 씨 뒤편에 있어서 잘 못 봤을 거예요.”
“아, 네. 전…….”
“알아요. 헌터학과 1학년 신태주.”
태주의 소개를 가로챈 영광이 예의상 내민 오른손을 덥석 움켜쥐며 뜻밖의 사실을 밝혔다.
“근데 초면이라는 표정이라 좀 섭섭하네. 심지어 수업도 같이 듣는데.”
“……?!”
대화 내내 경계심을 풀지 않고 있던 태주가 영광의 결정적인 힌트에 처음으로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수업이면 혹시…….”
태주의 시간표 중 다른 학과 학생들과 듣는 수업은 콘텐츠 제작의 이해가 유일했기 때문이다.
‘근데 잘 기억은 안 나네.’
물론 학생 한 명 한 명이 소개되긴 했어도 100명이 넘는 수강생 전원의 채널을 똑같은 집중력으로 감상할 순 없다 보니 지수나 동기들의 영상에 비해 상대적으로 휘발된 기억이 많았지만.
“맞아요. 콘텐츠 제작의 이해.”
맞잡은 손을 거둔 영광이 태주와의 접점을 콕 집어 일러주며 후련한 표정을 지었다.
“아, 임지수는 알죠? 윷튜브 먹빵여신. 저번에 보니까 둘이 대화도 하는 거 같던데.”
또 다른 접점이 있음을 떠올린 영광이 이번엔 신방과 후배인 지수의 이름을 언급했다.
“네. 근데 대화라기보단 그냥 영상 잘 보고 있다는 인사 정도만 주고받은 거라.”
응원의 말과 함께 먼저 인증샷을 부탁할 만큼 적극적으로 다가간 지수였지만, 아직까지 친분이라고 할 만한 소통은 없는 사이였다.
“에이, 뭐, 다 그렇게 인사부터 주고받다 친해지는 거죠. 지금의 우리처럼.”
지수보다 더욱 적극적인 영광이 특유의 넉살로 자신의 접근에 대한 태주의 반응을 슬쩍 떠보았다.
‘뭐지, 왜 아까부터 자꾸 임세준이 보이지?’
세준을 연상케 하는 영광의 익숙한 첫인상에 왠지 모를 부담감부터 밀려든 태주였다.
“아이고, 이번에도 너무 들이댔나?”
여전히 거리감이 느껴지는 태주의 신중한 태도에 입꼬리가 어색해진 영광이 뒷덜미를 매만지며 황급히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아무튼 강의 시간에 보면 서로 눈인사라도 하고 지내요.”
“네. 대신 중간고사 기간은 휴강이라 빨라도 다다음 주에나 보겠네요.”
오직 콘텐츠의 조회수로만 평가가 이루어지다 보니 별도의 중간, 기말이 없어 시험 기간 동안 다른 과목에 집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아, 그러게요. 그럼 또 어색해지는데…….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술자리에선 엄청 친했는데, 술 깨고 나면 다시 서먹서먹해지는 뭐 그런 애매한 상황. 뭔지 알죠?”
적당히 마무리되는가 싶었던 대화가 영광의 아쉬움으로 인해 또다시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알죠. 근데 그건 취했을 때나 겪는 일이라.”
“이야, 역시 뭘 좀 아시네. 그럼 아직 안 취한 거 맞죠? 뭐, 그 정도 캡사이신이면 취했다가도 깰 거 같긴 하지만.”
“네. 다행히 멀쩡합니다.”
“와아, 진짜 괜찮은 거 맞아요? 난 TV에서 매운 음식만 나와도 땀이 나던데.”
“사람마다 체질이 다르니까요.”
“맞아요. 체질. 근데 진짜 체질이 다예요?”
“네? 그게 무슨.”
질문을 건네는 순간의 예리한 눈빛을 포착한 태주가 영광의 의도를 헤아리며 물었다.
“아, 사실 제가 이번 여름 방학 때 신문사 인턴을 지원할 생각인데, 선배들 말로는 뭔가 새롭고 신선한 내용을 취재해야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다고 해서요.”
“그럼 제 체질에 대한 질문도 설마 인턴십을 위한 취재의 일환입니까?”
“아니요. 뭐, 꼭 그런 건 아닌데, 혹시 괜찮으시면, 한 7월 달쯤에 인터뷰 한번만 해주실 수 있어요? 제가 기사는 아주 예쁘게 써드릴게요. 태주 씨의 능력이 더욱 부각될 수 있게.”
“7월이요? 으음. 글쎄요. 저도 그때쯤 중요한 일정이 있어서 미리 확답은 못 드리겠네요.”
5주간의 여름 인턴십을 앞두고 있는 태주가 섣부른 승낙을 유보한 채 거절의 여지를 남겨뒀다.
최 총장과의 거래로 부담하게 된 첫 번째 희생의 내용이 언론을 통한 지속적인 노출이긴 했지만, 아직 상대방의 성향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했을뿐더러 실제로도 인터십의 스케줄상 인터뷰에 응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아, 그러시구나. 하긴, 신입생이라고 해서 다 한가한 건 아닌데……. 저,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나중에라도 시간이 되시면, 꼭 좀. 예. 하하.”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영광이 거절에 대한 민망함을 어색하게 웃어넘겼다.
“네. 나중에 인턴십을 할 곳이 정해지면 연락 한번 주세요.”
“아이고, 말씀이라도 참. 그럼 들어가서 볼일 보세요. 안 그래도 저 때문에 많이 참으셨을 텐데.”
태주의 형식적인 대답에 실낱같은 희망을 얻은 영광이 남자 화장실을 가리키며 머쓱하게 웃었다.
“아니요. 그냥 입만 헹구러 온 겁니다.”
태주가 나리가 건넨 생수병을 들어 보이며 헛웃음을 지었다.
“아, 그러시구나. 그럼 상으로 받은 양주로 입가심 잘 하시고, 나중에 강의 시간에 봬요.”
엄지와 검지를 입 앞에서 까딱거리며 술을 마시는 시늉을 하던 영광이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
*
*
다음 날 아침.
▶ 현실로 돌아갑니다.
일일 과제를 가뿐하게 수행한 태주가 강렬한 빛과 함께 방으로 돌아왔다.
“아함. 일요일인데 너무 부지런을 떨었나?”
하품을 한 태주가 침대 위로 몸을 던지며 다시금 잠을 청하려 했다.
지이잉!
‘으음?’
세상 편한 자세로 누워있던 태주가 팔을 뻗어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속은 좀 괜찮아?]
‘어? 나리네?’
메시지를 보낸 이는 어제 있었던 과팅의 파트너인 윤나리였다.
【어. 너는?】
태주가 반쯤 감긴 눈으로 빠르게 답장을 보냈다.
[난 소주파라 그런지 양주가 좀 안 받네 (토하는 이모티콘) 너무 비싼 술이 들어와서 위가 놀랬나 봐 ㅋㅋㅋ]
【그래? 그럼 어제 괜히 이겼나?】
[아니야. 덕분에 잘 마셨어. 술롱인지 술렁인지로 할인도 받고.]
【술롱도르.】
[아, 맞다. 술롱도르. 임세준 말이 넌 80% 할인이라며.]
【학교 앞에 있는 제휴 술집에서만. 그리고 전체 금액이 아닌 N 분의 1에 대해서만 80%야. 딱 내 몫만.】
[그래도 그게 어디야. 나중에 우리 둘이 마시면 무려 40%의 할인 효과가 있는 건데.]
태주와의 만남을 자연스럽게 이어가고 싶었던 나리가 할인을 핑계로 태주의 반응을 떠보았다.
【그렇지. 넷이 보면 20%가 되는 거고.】
[어. 뭐, 그렇긴 하지. (땀 흘리는 이모티콘)]
물론 연애보단 성장에 더 집중하고 있는 태주의 철벽은 살리도 교도소만큼이나 견고했지만.
[아, 그리고 좀 전에 아빠랑 통화했는데, 너랑 찍은 사진 덕분에 동료들이 다들 부러워했대. 자기들도 실제로 한번 보고 싶다고.]
각성자들을 수감하는 살리도 교도소의 특성상 교도관들 역시 각성자로만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러다 보니 업계의 슈퍼 루키인 태주에 대한 관심 또한 높을 수밖에 없었다.
【아, 진짜?】
[어. 근데 어떻게 소문이 돌았는지 오늘 아침엔 어떤 재소자가 아빠한테 너랑 친하냐고 물어봤었대.]
【재소자가? 이름이 뭔데?】
나리로부터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듣게 된 태주가 침대 위에 늘어져 있던 상체를 일으키며 진지하게 물었다.
‘누구지?’
평소, 자신의 독보적인 재능이 누군가에게 질투를 유발할 순 있다고 생각했지만, 살리도 교도소에 수감된 범죄자에게 개인적인 원한을 살 만큼 경솔하게 행동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냥 물어본 건가?’
나리의 답장을 기다리는 동안 이런저런 가능성을 따져 보던 태주가 확신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거까진 말씀을 안 해주셨는데, 혹시 궁금하면, 내가 따로 물어보고 알려줄게.]
태주에게 다시 연락할 수 있는 중요한 명분 하나를 마련한 나리가 미소를 띤 얼굴로 바쁘게 엄지를 움직였다.
【그래. 뭐, 크게 신경 쓰이는 건 아닌데, 막상 듣고 나니 궁금하긴 하네 ㅋ】
[ㅋㅋㅋ 나도. 근데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물어본 걸 거야. 네가 워낙 유명하니까. 그리고 그럴 일도 없겠지만, 설령 너한테 무슨 악감정이 있다고 해도 어차피 갇혀 있는 상황인데 뭐 별일이야 있겠어?]
‘아직 영향력의 개념을 모르네.’
나리는 교도소라는 장소적인 제약으로 인해 물리적으로 접근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지만, 재소자들이 알고 있는 은밀한 정보들이 뭍에 있는 익명의 헌터들에게 꾸준히 팔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태주로선 꼭 본인의 손을 더럽혀야만 일처리를 할 수 있다는 입장이 아니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긴 해.】
물론 톡에선 나리가 걱정하지 않게 적당히 맞장구만 쳐줬지만.
지이잉!
[뭐 하냐?]
‘어? 류정웅이 웬일이지? 나리처럼 속이 괜찮냐고 물어볼 녀석은 아닌데.’
나리와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던 태주가 정웅의 갑작스러운 대화 요청을 의아하게 여기며 짤막한 답장을 보냈다.
【누워 있어.】
[자는 거면 이따 연락할까?]
【아니야. 그냥 얘기해.】
[아, 다름이 아니라 어제 얘기했던 그 과외 건 말이야.]
【어. 그게 왜?】
앞서 정웅에게 피력한 대로 과외가 성사되지 않아 아쉬운 쪽은 태주가 아니었지만, 뭔가 통보를 하려는 듯한 정웅의 뉘앙스로 인해 왠지 모를 긴장감에 휩싸인 태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