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 과팅 (7)
“목숨 줄?”
“어. 목숨 줄.”
“그럼 내가 거절하면 너희 아버지가 불이익을 받는 거야?”
“아니. 거절에 대한 불이익은 없지만, 승낙에 대한 이익은 있지.”
“승낙에 대한 이익이 있다고?”
인센티브가 발단이 되어 일어난 말다툼이었기에 정웅의 달라진 입장이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는 태주였다.
“아까 세준이가 물어봤을 땐 인센티브가 없다고 그랬잖아. 수수료 몇 푼에 날 팔아넘길 수 없다고.”
정웅의 말을 인용한 태주가 따지듯이 물었다.
“나한테 직접적으로 떨어지는 건 없어. 오히려 아들 덕분에 아버지가 득을 보는 거지.”
“그게 그거 아니야? 어차피 한 가족이잖아.”
태주가 말장난처럼 느껴지는 정웅의 주관적인 해석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어떻게 똑같아. 아버지는 아버지의 인생이 있고, 나는 내 인생이 있는데.”
단순한 궤변에 지나지 않을 것이란 예상과 달리 정웅은 전통적인 가족의 개념에서 벗어난 독립적인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살벌한 관계는 아니니까 우리 아버지 때문에 괜히 승낙할 필요는 없어.”
“그래? 그럼 내가 얻을 수 있는 이득은 뭐지? 네 말대로 과외비만 보고 수락할 급이 아니면, 뭔가 보람을 느낄 만한 요소가 있을 거 아니야.”
“이득? 글쎄. 그분이 너한테 어떠한 보답을 준비하고 계신 진 모르겠지만, 일단은 좋은 인맥 하나 얻는다고 생각해.”
“좋은 인맥?”
‘좋은’이란 수식어의 의미가 다소 모호하긴 했지만, 한편으론 계산적인 정웅이 보증하는 만큼 검증이 필요 없는 인물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게 다야?”
“다는 아니겠지만, 내가 확신할 수 있는 수준은 딱 거기까지야. 섭섭지 않은 과외비와 좋은 인맥.”
“애는 어떤데. 설마 학생에 대한 정보도 비밀이야?”
“아니. 현재 고3 남학생이고, 초기 각성은 A급, 클래스는 궁수야. 물론 이름까진 알려줄 수 없고.”
“고3? 입시가 코앞이라 좀 부담스러운데? 게다가 A급이면 당연히 한국대를 목표를 할 거 아니야.”
“아무래도 그렇겠지? 근데 너무 걱정하지 마. 어차피 네가 선생이면 다들 학생의 역량이 부족해서 떨어졌다고 생각하지 못 가르쳐서 떨어졌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니까.”
정웅의 추측대로 실력을 의심받기엔 태주가 지금껏 보여준 객관적인 성과들이 너무나도 뚜렷했다.
“아무튼 할 거야 말 거야? 나도 부탁을 받은 입장이라 늦어도 다음 주까진 확답을 드려야 되거든.”
“다음 주……. 그럼 안 할래.”
“어? 왜?”
잠시 고민하는가 싶었던 태주의 생각보다 이른 결정에 정웅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급한 쪽은 내가 아닌데, 왠지 대답을 재촉하는 기분이 들어서.”
태주의 말대로 과외가 성사되지 않아 아쉬운 쪽은 자식을 한국대에 보내고 싶어 하는 의뢰인이지 이미 한국대를 넘어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는 세계 최초의 매직 아처가 아니었다.
“으음. 듣고 보니 그러네.”
의뢰인의 요구 사항만 대변하고 있던 정웅이 태주가 느낀 감정에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럼 내일쯤 네가 거절했다고 전할게.”
과외 성사에 대한 직접적인 인센티브가 없는 정웅이 더 이상의 설득 없이 태주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다른 할 말은? 또 거슬리는 건 없어?”
“거슬리는 건 없는데, 궁금한 건 있어.”
“궁금한 거? 뭔데?”
“너희 아버지. 너희 아버지는 뭐 하시는 분이셔?”
“우리 아버지? 갑자기 우리 아버지 직업은 왜? 아아, 혹시 우리 아버지의 목숨 줄을 쥐고 있다는 말 때문에 그래? 우리 아버지의 정보를 통해 의뢰인의 정체를 유추하려고?”
질문의 의도를 눈치챈 정웅이 흥미로운 미소를 지으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의뢰인의 정체야 과외를 승낙했을 때만 들을 수 있지만, 그밖에 다른 정보까지 비밀로 한 건 아니잖아. 뭐, 물론 네가 아버지의 직업에 대해 밝힐 의무는 없지만.”
“의무야 없지. 근데 의무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물어본 건 무슨 자신감이지?”
“자신감? 난 자신감이 아니라 예의를 갖춘 건데?”
“뭐? 예의?”
상대에게 궁금증을 유발하는 방식으로 대화의 주도권을 쥐고 있던 정웅이 태주의 원인 모를 당당함에 의아한 기색을 내비쳤다.
“무슨 예의?”
내밀었던 얼굴을 뒤로 물린 정웅이 상황에 맞지 않는 단어를 선택한 이유를 물었다.
“무슨 예의긴. 너희 아버지에 대해 얼마든지 알아낼 수 있지만, 아들인 너에게 먼저 물어보는 절차상의 예의지.”
“……?!”
남다른 정보력을 암시하는 태주의 여유로운 미소에 정웅의 말문이 처음으로 막혔다.
“좋은 인맥? 좋지. 근데 네가 강조하는 그 좋은 인맥이 아주 없진 않거든.”
대부분의 인간관계가 동기나 선배들로 국한된 여느 신입생들과 달리, 태주의 인맥은 캠퍼스 안팎으로 그 우호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좀 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급할 것도 없고, 아쉬운 소리를 할 이유는 더더욱 없으니까.”
대화의 주도권을 단숨에 뺏어 온 태주가 정웅의 한쪽 팔뚝을 가볍게 토닥인 뒤 미련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그만 들어가자. 애들 기다리겠다.”
“저기, 잠깐만.”
알 수 없는 초조함을 느낀 정웅이 골목을 빠져나가던 태주를 황급히 불러 세웠다.
“왜.”
정웅의 부름에 멈춰 선 태주가 무심하게 돌아보며 물었다.
“비밀이란 건 상대가 모를 때까지만 의미 있는 거겠지?”
태주가 언급한 절차상의 예의가 빈말처럼 들리지 않았던 정웅이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뭐야, 그런 당연한 소리나 하려고 부른 거야?”
정웅의 마음이 움직였다는 것을 눈치챈 태주가 모른 척 헛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아니. 그냥 너를 귀찮게 해서 좋을 게 없는 것 같아서.”
“무슨 뜻이야?”
“네가 우리 아버지에 대해 따로 알아볼 순 있지만, 내 입을 통해 들으면 너도 편하고, 나도 너한테 고맙다는 소리 정도는 들을 수 있잖아. 안 그래도 너랑 친하게 지내고 싶은 마당에.”
머릿속으로 침묵의 실익을 따져 본 결과 자신에게 득이 될 것이 없음을 알게 된 정웅이 태주와의 친분이라도 쌓기 위한 나름의 결단을 내렸다.
“그래서. 고작 아버지에 대한 것만 알려줄 거야? 네 말대로 나랑 친하게 지내고 싶은 마당에?”
아쉬운 쪽이 누구인지를 명확히 구분 지은 태주가 한술 더 떠 의뢰인에 대한 정보까지 직접적으로 요구했다.
“말했잖아. 의뢰인의 정보는 과외를 수락했을 때만 알려줄 수 있다고.”
아버지의 직업만 공개할 예정이었던 정웅이 농담을 가장한 태주의 과감한 요청에 난색을 표했다.
“알아. 근데 네가 이런 말도 했잖아. 내가 남의 말을 여기저기 퍼뜨리는 성격이 아니라 믿을 수 있다고. 그럼 둘만 있을 때라도 얘기해 줄 수 있는 거 아니야?”
물론 상대의 입장이 난처하다는 이유로 쉽게 포기할 태주가 아니었지만.
“아니, 그건, 내가, 하아……. 오케이. 대신 넌 아무것도 모르는 거다. 나중에라도 내가 얘기했다고 하면 절대 안 돼.”
반박 대신 깊은 한숨을 내쉰 정웅이 결국 비밀을 지켜 달라 신신당부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너 혹시 게이트작전사령부라고 알아?”
“뭐? 게이트작전사령부?”
생각지도 못한 고유 명사의 등장이 기업가나 정치인 쪽을 예상했던 태주의 두 귀를 단숨에 사로잡았다.
“아니. 잘은 몰라.”
헌터학과를 졸업한 태주로선 모를 수가 없는 곳이었지만, 시간 관계상 불필요한 개입으로 대화의 흐름을 끊고 싶진 않았다.
“하긴, 게이트 근처에도 안 가 봤으니 모르는 게 당연하지.”
태주가 회귀자임을 알 리 없는 정웅이 혼잣말을 하듯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아무튼 게이트작전사령부라는 곳이 있는데, 쉽게 말해, 게이트가 열린 곳의 주위를 통제하는 군인들이야. 게이트와 관련된 업무를 담당하고 있지만, 특이하게도 헌터협회가 아닌 국방부 소속으로 되어 있지.”
“아아, 뉴스에서 보던 그 군인들이 전부 게이트작전사령부 소속이었구나.”
정웅의 말을 경청하고 있던 태주가 이제야 알았다는 듯 자연스러운 표정 연기를 했다.
“맞아. 그리고 그 뉴스에서 가끔 인터뷰를 하는 대령 아저씨가 한 명 있는데, 그게 바로 우리 아버지야. 류, 홍자, 석자 대령님.”
정웅의 친부이자 육사 출신의 비각성자인 류홍석 대령은 게이트작전사령부 소속으로 사령관을 보좌하는 참모들 중 한 명이었다.
“아, 그래?”
정웅의 아버지가 영관급 장교임을 듣고 나니 의뢰인의 계급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럼 설마 너희 아버지의 목숨 줄을 쥐고 있다는 분도…….”
“어. 같은 직업 군인이셔. 우리 아버지의 까마득한 육사 선배님이시자 게이트작전사령부의 사령관이신 조용욱 중장님. 한마디로 쓰리 스타지. 우리 아버지피셜 확실한 걸 좋아하시는 이번 과외의 숨은 의뢰인이기도 하시고.”
‘게이트작전사령부의 사령관이라…….’
예상대로 정웅이 보증하던 의뢰인의 사회적 지휘와 도움 가능성은 태주의 기대 그 이상이었다.
‘확실히 좋은 인맥이긴 하네.’
대한민국 안에서 생성된 모든 게이트 발생 지역의 대피 작전과 던전 브레이크에 대비한 지원 공격 등을 담당하는 게이트작전사령부의 경우 대한헌터협회와 함께 몬스터의 위협으로부터 국민들의 안전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이자 헌터들이 레이드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조력자의 역할을 자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쓰리 스타? 그럼 군 생활을 하신지도 오래 되셨을 텐데 아직도 자제분이 고3이라고?”
“늦둥이 막내아들이래. 본인을 드러내지 않았던 건 업무의 특성상 널 과외 선생으로 모시는 과정에서 지위를 남용했다는 의혹이 제기될까 봐 그랬던 거고.”
“아아, 그래서 네가 나랑 동기라 너희 아버지께만 따로 부탁하신 거구나?”
자신에게 직접 연락을 취하지 않은 채 주선자부터 내세운 이유를 알게 된 태주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리고 중장님처럼 높으신 분이 우리 아버지를 찾아와 개인적인 부탁을 하셨다는 소릴 들었을 때 정확히 깨달았지. 네가 얼마나 대단한 녀석이고, 그 대단한 녀석과 친하게 지내는 것만으로도 내 인생이 순탄하게 풀릴 수 있다는 것을.”
태주와 단둘이 있을 때만큼은 지나치게 솔직한 정웅이 근묵자흑을 떠올리게 된 자신의 솔직한 속내를 다시 한번 털어놓았다.
“뭐야, 오늘따라 너무 솔직한 거 아니야?”
정웅의 칭찬이 낯선 태주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드리워졌다.
“그러게. 술기운 때문인가?”
태주의 궁금증을 남김없이 풀어 준 정웅이 실없는 소리와 함께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아 참, 그리고 그 과외 말이야. 일단 하겠다고 전해줘.”
“어? 진짜? 갑자기 왜?”
내일 당장 거절의 뜻을 전하려 했던 정웅이 마음을 바꾼 이유에 대해 물었다.
“너희 아버지, 아들 친구 덕분에 득 좀 보시라고.”
정웅과 달리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는 법이 없는 태주가 가벼운 농담으로 확답을 피하던 바로 그때.
“야! 너희들 어디 갔었어?!”
지하 계단에서 헐레벌떡 뛰어올라 온 나리가 두 사람을 향해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