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 과팅 (6)
“어, 왜.”
숙맥이 따로 없는 세준의 부자연스러운 몸짓 하나하나를 흥미롭게 지켜보던 태주가 정웅의 갑작스러운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너 혹시 과외할 생각 없어?”
“뭐? 과외?”
과외 의뢰를 처음 받아 본 태주가 생각지도 못한 정웅의 제안에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어. 그룹 말고, 1 대 1 개인 과외.”
“누가 부탁한 건데?”
“그건 비밀이야.”
“왜?”
“네가 승낙을 했을 때만 따로 알려 주라 그랬거든.”
“그럼 그냥 찔러만 보는 거야?”
“아니. 그냥 찔러 보는 건 아닌데, 네가 워낙 귀하신 몸이라 그쪽에서도 조심스러워하는 거 같아.”
“그래도 넌 의뢰인이 누군지 알 거 아니야?”
“나야 당연히 알지.”
또 다른 주선자의 역할을 맡게 된 정웅의 한쪽 입꼬리가 스르륵 올라갔다.
“그래? 그럼 너라면 어떻게 할 건데?”
“해야지.”
이미 고민을 해 본 사람처럼 정웅의 대답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왜?”
“과외비만 보고 수락할 급은 아니었거든.”
의뢰인의 사회적 위치와 배경을 알고 있는 정웅의 대답이 오히려 태주의 선택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솔직히 너도 과외비가 아쉬운 입장은 아니잖아. 길드에서 받는 용돈만 해도 한 달에 수천만 원은 될 텐데.”
“……?!”
태주의 남다른 클래스가 느껴지는 정웅의 이유 있는 짐작에 수용거실 안이 술렁였다.
“뭐?! 수천만 원?!”
세준과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혜윤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태주야, 진짜야?”
“어? 어, 뭐.”
태주를 관리 대상으로 지목한 길드의 숫자와 용돈의 총액이 곧 헌터로서의 장래성이자 잠재력의 척도였기 때문에 20곳이 넘는 국내 길드로부터 매달 적게는 수십만 원, 많게는 300만 원까지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애써 부정할 이유는 없었다.
“와, 멋있다.”
태주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혜윤이 세준을 향해 틀어져 있던 자세를 바르게 고쳐 앉으며 관심을 표했다.
“뭐? 멋, 멋있다고?”
혜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에 당황한 세준의 말투가 다시금 어눌해졌다.
“아니, 길드에서 왜 태주한테 용돈을 줘?”
헌터 업계에 대해선 문외한인 시현이 파트너인 재룡에게 물었다.
“예전부터 그냥 용돈이라고 불리긴 했는데, 실제론 자기 길드로 영입하려고 일찌감치 성의를 보이는 거야. 태주 같은 인재가 다른 길드로 갈까 봐.”
“어? 그럼 너도 용돈을 받고 있어?”
“아니. 우리 동기들 중엔 태주가 유일해.”
“진짜? 왜? 그래도 명색이 한국대 헌터학과잖아.”
“보통 3학년 때부터 용돈을 받거든. 2학년만 돼도 무지 빠른 거고.”
“와아, 그럼 태주처럼 1학년 때 받는 건 정말 특별한 케이스네?”
“특별한 정도가 아니지. 조소과를 예로 들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조각가들이 신입생인 널 주목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금전적인 지원까지 해주고 있는 거니까.”
“우와, 그렇게 얘기하니까 확 와닿는데?”
재룡의 맞춤형 비유에 공감대를 형성한 시현이 태주의 위엄을 실감하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참고로 그쪽에서 제시한 조건은 주 1회 수업이야. 수업 시간은 하루에 2시간씩이고.”
의뢰인의 정체를 함구한 정웅이 태주의 결정을 기다리는 동안 과외의 진행 방식을 밝혔다.
“으음. 일주일에 두 시간 정도면 그렇게 부담스러운 스케줄은 아니네.”
주 3회를 예상했던 안나가 생각보다 적은 수업 횟수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근데 과외비는 정확히 얼마야? 나도 어렸을 때부터 미술을 해서 알지만, 원래 예체능 쪽 레슨비가 좀 세잖아.”
학원과는 별개로 미대 입시를 위한 개인 지도까지 받은 적이 있는 안나가 자신의 경험을 떠올리며 과외 시급을 물었다.
“과외비는 협의야.”
“협의? 협의는 보통 모 아니면 도 아니야? 시세보다 높거나 시세에서 깎거나.”
적은 수업 횟수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던 안나가 가늠할 수 없는 시급 수준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이, 선생님이 태주인데 당연히 모겠지. 안 그래?”
물론 나리의 확신대로 과외비가 깎일 가능성은 제로에 수렴했지만.
“맞아. 여기서 말하는 협의는 상한을 정하지 않겠다는 거지 시세를 조정하려는 의도가 아니야. 뭐, 그러실 분도 아니고.”
‘그러실 분? 대체 누군데 그러지?’
평범한 학부모가 의뢰한 것이 아님은 분명했지만, 극존칭의 대상이 궁금하다는 이유만으로 제안을 수락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귓속말 게임처럼 벌주를 마셔야 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근데 과외를 맡기고 싶으면 직접 연락을 하지 왜 제삼자인 너한테 부탁했을까? 뭐, 나처럼 태주랑 친한 사이도 아닌데.”
태주의 절친이자 오른팔을 자처하는 세준이 동기라는 것 이외엔 별다른 접점이 없는 정웅에게 주선자가 된 까닭을 물었다.
“어? 설마 네가 먼저 하겠다고 나선 거 아니야? 무슨 특별한 인센티브를 노리고?”
“뭐? 인센티브? 야, 내가 설마하니 수수료 몇 푼 남기겠다고 태주를 팔겠냐? 하여간 생각하는 수준하곤. 쯧쯧.”
세준의 밑도 끝도 없는 의심에 헛웃음만 나온 정웅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혀를 끌끌 찼다.
“야, 너 지금 뭐라고 그랬냐? 생각하는 수준이 뭐 어쩌고 어째?”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태도에 발끈한 세준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언성을 높였다.
“일어나면 뭐. 그리고 먼저 시작한 쪽은 너 아니야?”
탕!
테이블 위를 손바닥으로 내리친 정웅이 세준을 따라 일어서며 미간을 구겼다.
“얘들아, 무섭게 왜 싸우고 그래. 워, 워.”
싸늘하게 식어버린 분위기에 당황한 나리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을 진정시켰다.
물론 술자리에서의 말다툼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었지만.
“야, 임세준, 너 진짜 내 친구들 앞에서 이럴 거야?”
정웅과는 초면인 나리가 그나마 친분이 있는 세준을 설득하며 싸움을 마무리 지으려 했다.
“아니, 왜 나한테만 그래. 내가 뭘 어쨌는데?”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려는 게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리의 의도를 오해한 세준이 엉뚱한 곳에 불똥을 튀기며 얼굴을 붉혔다.
바로 그때.
“…….”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난 태주가 아무 말 없이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싸움이 커지기 전에 두 사람을 떼어 놓는 것도 중요했지만, 그보다 과외의 주선자인 정웅에게 겸사겸사 묻고 싶은 것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
순간, 세준과 정웅을 비롯한 모든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태주의 뒷모습에 쏠렸다.
철컹!
철문을 반쯤 연 태주가 정웅을 돌아보며 무심하게 물었다.
“잠깐 얘기 좀 하자.”
두 사람의 말다툼을 말리지 않고 있던 태주의 묵직한 한마디.
“어? 얘기?”
태주의 조용한 카리스마에 압도당한 정웅이 자신과 함께 불리지 않은 세준을 힐끗 쳐다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알았어. 나갈게.”
갑작스러운 부름에 어리둥절해하던 정웅이 긴장도 풀 겸 반쯤 남은 소주를 마저 들이켠 뒤 태주를 따라나섰다.
철컹!
“…….”
철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찾아온 잠깐의 정적.
“왜 류정웅만 불렀지?”
나리의 설득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던 세준이 동행의 이유를 의아해하며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
*
*
지하 계단을 오른 태주가 향한 곳은 제일 포차의 입구 옆, 작은 골목길이었다.
“익숙한 구도지?”
걸음을 멈춘 태주가 뒤따르던 정웅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러게. 냉삼집 골목도 딱 이 정도 폭이었는데.”
공대원 모임 당시, 2차로 넘어가기 직전에 이루어진 태주와의 대화를 떠올린 정웅이 두 팔을 벌리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나저나 무슨 할 얘기라도 있어? 너 원래 나와 봤자 담배도 안 피우잖아.”
세준의 지적대로 두 사람은 이유 없이 바람을 쐴 만큼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네가 먼저 과팅에 껴 달라 그랬다며.”
오래 자리를 비우는 건 예의가 아니라 생각한 태주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누가. 임세준이 그래?”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서로 날을 세웠던 상대라 세준의 이름만 나와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정웅이었다.
“어. 어디서 듣고 왔는지 자기가 묻기도 전에 와서 껴 달라 그랬대. 왜. 아니야?”
“아니야. 맞아. 내가 먼저 껴 달라고 한 거. 근데 그게 왜.”
“진짜 과팅이 하고 싶어서 그런 거야?”
“무슨 뜻이야?”
“과외 얘기. 그거 언제 들은 거야?”
“뭐?”
“소개를 부탁받은 시점이 과팅에 껴 달라고 한 날보다 먼저냐고.”
“왜. 내가 과외 부탁 때문에 일부러 접근했을까 봐?”
인센티브 의혹을 부정했던 정웅이 태주의 의심에 코웃음을 쳤다.
“그 웃음의 의미는 아니라는 거지?”
“아니. 반은 맞고, 반은 틀려. 솔직히 너 때문에 껴 달라고 한 건 맞는데, 과외 부탁 때문에 그런 건 아니거든.”
“……?!”
정웅의 예상치 못한 대답에 태주의 말문이 막혔다.
“아, 그렇다고 해서 너무 경계하진 마. 그냥 너랑 조금 더 가까워지고 싶었을 뿐이니까.”
“나랑 가까워지고 싶었다고? 갑자기 왜?”
자발적 아싸이자 혼밥의 장인인 정웅의 입에서 친해지고 싶다는 얘기가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신기할 따름이었다.
“과외를 주선해 달라고 부탁받았을 때 처음으로 느꼈거든. 근묵자흑(近墨者黑), 근주자적(近朱者赤). 먹을 가까이하면 검어지고, 붉은 것을 가까이하면 붉어지는 듯 누구를 가까이해야 내 인생에 도움이 되는지를.”
눈치가 빠르고 실리에 영악한 정웅이 안경의 브리지 부분을 검지로 밀어 올리며 친분을 쌓고 싶은 이유에 대해 가감 없이 밝혔다.
물론 의뢰인의 정체에 대해 함구하고 있는 터라 그러한 마음을 품게 된 명확한 이유에 대해선 말을 아끼고 있었지만.
“지나치게 솔직한 거 아니야?”
“그만큼 너를 믿고 있다는 거지. 네가 남의 말을 여기저기 퍼뜨리는 성격이 아니란 걸 멀리서 충분히 지켜봤으니까.”
“그래. 좋게 봐줘서 고맙네. 근데. 거절할지도 모르는 과외 얘기를 왜 과팅 같은 공개적인 자리에서 언급한 거지? 네 말대로 소개를 부탁받은 시점이 과팅에 껴 달라고 한 날보다 먼저면, 굳이 오늘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었을 텐데.”
“아아, 그거. 아무리 생각해도 따로 만나서 얘기하면 너무 쉽게 거절할 것 같았거든. 뭐, 내가 과외를 주선했다는 사실을 증명해 줄 다수의 증인들이 필요하기도 했고.”
“증인? 설마 증인 없인 네 말을 못 믿을 만큼 깐깐한 의뢰인이야?”
과외를 받는 학생과의 관계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학부모와의 소통이었기 때문에 과외비가 아쉽지 않은 태주의 입장에선 조건의 호불호를 떠나 거부감이 들 수밖에 없었다.
“깐깐하다기보단 확실한 걸 좋아하시는 분인 거 같아. 우리 아버지 표현으로도 그렇고.”
“뭐? 아버지? 너희 아버지가 의뢰인이랑 무슨 사이인데?”
정웅의 가족
관계에 대해 아는 바가 없는 태주가 베일에 싸인 의뢰인의 정체를 우회적으로 물었다.
“글쎄. 우리 아버지의 목숨 줄을 쥐고 있는 사람?”
“……?!”
태주가 지나친 솔직함을 넘어선 정웅의 아슬아슬한 비유에 두 귀를 의심했다.